느끼며(시,서,화)

변상도 <대방광불화엄경소 제41>

Gijuzzang Dream 2007. 11. 26. 16:47

 

 

문화재칼럼

 

 

《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 제41》

 

 

 

기록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음은 누구라도 아는 사실이다. 특히 문화재에 기록이 있다면 사람으로 치자면 주민등록증이 붙어있는 것과 맞먹는다.

 

불교경전 역시 마찬가지로 그 말미에는 간행과 관련된 모든 사항이 기록되는 간기(刊記)가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변상도(變相圖)가 붙어있으면 금상첨화이다.

보물 제964호는 《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 제41》은 이러한 여러 조건들은 갖추고 있는 사례로 주목된다.

 

이 경전은

고려 대각국사 의천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실증적으로 증명해주는 자료인 동시에,

그 앞에 붙은 변상도는 공민왕대제 제작된 불교판화로 미술사 뿐만아니라

역사적·불교적 상황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이다.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은 문종의 넷째아들로 영통사로 출가하여 승통에 오른 대학승이다.

대장경 간행의 열망으로 왕이 불허함에도 불구하고 몰래 중국 송으로 들어가

화엄의 대가 정원법사(淨源法師, 1011-1088)를 비롯한 화엄, 천태, 선종 등 여러 종파의 고승들과 교유하고 경전을 비롯한 많은 불교전적을 수집하였다.

그는 정원이 머물던 항주 혜인선원(慧因禪院)에 재정지원을 하여 경전을 인쇄하여 두게 하는 등 기여하여 정원의 제자들이 선종사찰이던 혜인원을 화엄종 사찰로 바꾸었으며, 이는 속칭 '고려사(高麗寺)'로 불리웠다.

 

한편 의천은 1086년 귀국하여 흥왕사의 주지가 되었고

그곳에 교장사(敎藏司)를 설치하여 속장경 간행에 착수하였고,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3권을 간행하였다.

의천은 화엄학을 중심으로 불교학을 연구하였으나 불교에 머물지 않고

유교전적과 역사서 및 제자백가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던 뛰어난 학승이었다.

 

그는 불교의 신비적 주술성을 배격하여 불교적 합리주의를 강조하는 한편,

선 수행도 중시하여 천태종(天台宗)을 개창하는 등 교리정립에 노력하였으며 대각국사문집 등 많은 저술도 남겼다.

 

 


《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 제41》은

청량법사(淸凉法師) 징관(澄觀 : 737~838)이 찬술한 《대방광불화엄경소》를

송의 정원이 주해한 120권본 중 41권이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접었을 때의 크기는 세로 31.8㎝, 가로 10.7㎝이다.

 

<대방광불화엄경>은 줄여서 <화엄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중요사상으로 한다. 화엄종의 근본경전으로 법화경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사상 확립에 크게 영향을 끼친 경전이다. 

권의 첫머리에 있는 기록을 보면, 대각국사 의천이 정원과의 친분에 의해 가져온 송나라 목판을 고려 공민왕 21년(1372)에 찍어낸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본문의 내용을 요약하여 그린 변상도(變相圖) 역시 같은 해(1372년)에 새긴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은『주인왕호국반야경』권1∼4 (보물 제890호),『대방광불화엄경소』권 42 (보물 제891호)와 판의 모든 조건이 비슷하여 이들의 간행연도를 정확히 알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권의 첫머리에 화엄경 변상도가 처음 등장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대각국사 의천이 송에 갔을 때 정원법사가 자신이 저술한 이 책 1질을 의천에게 주었는데,

의천은 은 삼천량으로 당시 항주의 일류 각수에게 그 판각을 주문하고 귀국하였다.

이듬해(1087년) 송에서 경판을 갖고 와서 납품하였는데 그 수는 2,900여판에 이른다고 한다.

이 판에서 인쇄한 판본이 현재 국내에 12첩이 알려져 있으며

소장처는 다르지만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를 인쇄했던 판목은

이미 조선초 세종 6년(1424) 일본인들이 고려대장경판을 강력하게 요구하여

밀교대장경판과 함께 일본에 보내져 국내에는 없다.


 

[대방광불화엄경소 41 변상도]


 

이 12첩 중 보물 964호로 지정된 제41권에는 유일하게 변상도가 붙어있어 주목된다.

 

그런데 이 변상도는 처음부터 함께 판각된 것은 아니다.

변상도 끝에는 ‘각주화엄경도변상연기(刻注華嚴經都變相緣起)’라는 제목과 변상을 판각한 연유가 간략히 기록되어 있다. 즉 '범부는 형태가 없으면 믿음이 생기지 않아, 불경의 앞머리에 변상을 얹는데 유감스럽게도 대각국사가 송에서 갖고 온 이 판에는 변상이 없어, 변상을 고범에 의거하여 조판하여 오관산 영통사에 둔다‘는 내용이다.

 

또한 흥미로운 사실은 이 변상도를 발원한 사람들은 이미충(李美沖), 박성량(朴成亮), 김사행(金師行) 3인으로 이들은 모두 공민왕대의 환관들이다.

특히 김사행은 공민왕의 총애를 받은 환관으로 내시부사에 이르렀는데 고려사에는 교설과 사행으로 왕의 총애를 얻은 간교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공민왕릉인 현릉(玄陵)과 노국대장공주의 정릉(正陵)을 조성할 때 감역을 맡았었는데 왕으로부터 공사를 잘 감독하였다하여 상으로 안마(鞍馬)를 받기도 한 인물이었다.


고려시대의 환관은 궁중의 전령과 잡무에 종사하였고 인원도 소수였는데

의종(毅宗)대 부터 그 세력이 급신장되어 국왕의 정사를 전횡하기도 하였다.

특히 몽고 간섭기 원에 환관을 진공하게 됨에 따라 그 수도 많아져 다시 세력이 재흥하였고,

충렬왕대에는 검교, 검의, 밀직 등의 대관직이 수여되었다.

 

공민왕 5년에는 내시부가 설립되어 정이품에서 정구품까지의 관원을 두게 하는 등 환관의 정치적 세력이 더 한층 확충되어 갔다. 이 시기 환관들은 정치·외교·군사 등 다방면에 걸쳐 권력을 휘두르고 또한 왕실재정에도 관여하는 등 경제적인 세력도 비약적으로 신장되었다.

 

이 판화가 제작된 시기는 이렇게 특수권력층이 된 환관들이 막강한 세력과 부를 과시하고 있었던 역사적 상황을 증명해주는 자료라 할수 있다.

 

불교사적인 측면에서 정원이 주해한 이 화엄경소는

고려는 물론 조선시대까지 지속적으로 간행되어온 경전이므로

우리나라 화엄종의 방향과 성격을 알려주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사에서 그 중요성이 인식되고 있다. 또한 이 화엄경 변상판화는 화엄경의 서분인 세주묘엄품(世主妙嚴品)을 도상화한 것으로 우리나라 화엄경변상도 도상의 한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불교미술사에서도 매우 중요하고 의미있는 작품으로 인정된다.


이 경전은 이렇듯 여러 방면에서 심대한 의미를 지니는 작품이다.

만일 이 한 장의 변상도가 없었고, 또한 여기에 그 간행기록이 없었다면

단지 우리는 대각국사 의천이 번각을 발원한 정원국사의 화엄경소의 1권이라는 사실 밖에는 몰랐을 것이다.

이 경전의 판목은 일본으로 보내졌지만

영통사에 두었던 이 변상도의 판목 1매도 함께 보내졌을까?

혹 영통사에 아직도 보존되어 있지 않을까?


 

[각주화엄경도변상연기(刻注華嚴經都變相緣起)]
1372년 김사행 등 환관 3인이 발원한 사실을 알려준다.
 

[대방광불화엄경소 41 변상도 일부]


▶ 문화재청 인천항 문화재감정관실 박도화 감정위원 / 2007-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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