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책가도 / 책거리

Gijuzzang Dream 2007. 11. 22. 11:31

 

 

 

 

 

 책가화(冊架畫) / 책거리의 제작

 

 

 

책가화(冊架畵)의 수용, 제작

 

책가화(冊架畵)는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중국으로부터 완성된 형식으로 유입되어

정조대(1776-1800 재위)에 화원들에 의해 우리나라의 상황에 맞게 번안된 것으로 생각된다.

 

청나라 다보격도의 성립이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시대 황제들의 예술품 수집,

서적 편찬사업과 서양화법의 사실적 실재감에 대한 경도에 있었다면,

조선후기 책가화의 성립배경은 책과 공부를 좋아한 정조(1752-1776-1800)의 학구적 취향과

정조시대의 외국문물에 대한 개방적 분위기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그림은 중국의 직접적 영향을 받았지만, 그 영향은 선별적으로 선택되고 소화되면서

한국적인 특성을 발전시켜왔다.

책가화와 같은 이질적이고 전례가 없었던 유형의 그림이 선택되었던 것에는

정조의 역할이 가장 컷을 것으로 생각된다.

 

책가화 병풍을 정조가 실제로 사용했었던 사실과 그 효용을 신료들에게 설명한 것을

규장각 제학을 지낸 오재순(吳載純, 1727-1792)이 1791년에 정조와의 대화 내용을 기록한 글로서

알 수 있다.

 

御座 뒤의 書架를 돌아보면서 입시한 大臣에게 이르기를, “경은 보았는가?” 하였다.

보았다고 대답하자, 웃으면서 하교하기를, “경이 어찌 진짜 책이라고 여겼겠는가?

책이 아니라 그림일 뿐이다. 옛날에 程子가 ‘비록 책을 읽을 수 없다하더라도 書室에 들어가서

책을 만지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라고 하였는데, 나는 이 말에 깊이 공감하는 바가 있다.

그려진 책 끝의 표제(標題)는 모두 내가 평소 좋아하는 경사자집(經史子集)으로 쓰되

제자백가(諸子百家) 중에서는『장자』만을 썼다.” 하였다.

 

이어 탄식하며 말하기를,

“요즈음 사람들의 글은 취향이 완전히 나와 상반되니, 그들이 즐겨 보는 것은 모두 후세의 병든 글이다.

어떻게 하면 이를 바로잡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이 그림을 만든 것은 또한 이러한 뜻을 부치고자 해서이다.” 하였다.

 (제학 신 오재순이 1791년에 기록하다) 

顧視於座後書架, 謂入侍大臣曰, 卿能見之乎. 對曰, 見之矣. 笑而敎曰, 豈卿眞以爲書耶. 非書而畫耳. 昔程子以爲雖不得讀書, 入書肆摩挲簡帙, 猶覺欣然, 予有會於斯言. 爲是畫卷端題標, 皆用予平日所喜玩經史子集, 而諸子則惟莊子耳. 仍喟然曰, 今人之於文, 趣尙一與予相反, 其耽觀者, 皆後世病文也. 安得以矯之. 予爲此畫, 蓋亦寓意於其間者矣. (提學臣吳載純辛亥錄)

 

정조에게 책가화의 사실적 실재감은

바쁜 정무로 인해 책을 읽을 여유가 없을 때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책의 대용물 역할을 한,

정조의 학구적 취향에 알맞은 장식화였다.

그러면서도 정조는 그려진 책의 제목들을 일일이 써넣도록 지정해 주어

자신이 애호하는 독서물을 제시하면서 한편으로는 권장하는 정치적 고려를 부가하였다.

 

정조의 어록인 「日得錄(일득록)」에는 수록되지 않았지만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이 자신의 문집에 기록해 놓은 내용에도 책가화에 대한 언급이 보인다.

 

畵工에게 冊架를 그리도록 명하여 이를 자리 뒤에 붙여 놓고 臣 등에게 하교하기를

“先儒의 말에 사람이 비록 정해놓고 책 읽는 공부를 하지 못하더라도 때때로 書室에 들어가

책상을 쓰다듬으면 또한 족히 뜻에 맞으리라고 하였다. 나는 평소 書籍으로 스스로의 즐거움을 삼지만,

간혹 일이 많고 분주해서 책을 읽고 외울 겨를이 없을 때면 그 말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이 그림을 눈으로 보면서 마음으로 노닌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오히려 나을 것이다.”

(이상 1798년에 기록하다)

命畵工寫冊架, 付之座後, 敎臣等曰, 先儒言凡人雖不程課爲看讀工夫, 時時入書室, 摩挲几案, 亦足可意. 予平日以書籍自娛, 而或値事務紛多, 未暇誦讀, 則未嘗不思其言, 而游心寓目於此, 猶賢乎已也.

(以上 戊午錄)

 

오재순과 남공철의 기록으로 볼 때, 학문과 책을 지극히 좋아했던 정조는

최소한 1791년에서 1798년까지 화원화가가 그린 책거리 그림을

창덕궁의 편전인 선정전의 어좌 뒤에 장식한 뒤 신하들에게 자랑하며 설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궁중에서 나고 자란 정조에게 마치 서가에 책이 있는 듯 실물처럼 정교하고 치밀하게 묘사한

장식화에 대한 선호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학구적 성품이라는 정조의 개인적 취향이

이러한 그림을 그리게 하여 어좌를 장식한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일득록」에 기록된 독서와 공부에 대한 정조 자신의 언급들을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어려서부터 언제나 반드시 일과를 정해 놓고 글을 읽었다.

병이 났을 때를 제외하고는 일과를 채우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았는데,

임금이 된 뒤로도 폐지한 적이 없다. 때로는 저녁에 응접을 한 뒤에 아무리 밤이 깊어도

조금도 쉬지 않고 반드시 촛불을 켜고 책을 가져다 몇 板을 읽어 일과를 채우고 나서

잠을 자야만 비로소 편안하다. (17-18면)

 

나는 글에 대하여 하루에 어떤 글을 몇 번 읽고,

어떤 글을 몇 줄 읽는다고 반드시 과정을 정해 놓고서 아무리 바쁘더라도 그만둔 적이 없다.

이는 文字공부에 유익할 뿐 아니라 마음을 잡는 공부도 된다.

 (21면)

 

내가 춘저(春邸)에 있을 적에 책을 모으는데 취미가 있어

중국에서 사왔다거나 故家에 소장된 것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즉시 사오게 해서보곤 하였다.

지금 모두 장소를 마련하여 소장해 둔 것으로 經․ 史․ 子․ 集이 없는 것이 없고, 또 모두 한번은 본 것이다.

(25면)

 

上이 조회를 파한 뒤에는 하루 종일 책만 읽어 언제나 밤까지 가니,

신하들이 건강을 해칠까 염려하는 말을 하였다.

하교하기를, “예로부터 궁중에는 시간을 보낼 만한 일들이 꽤 있지만

나는 천성적으로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 때로 신하들을 불러다가 글 뜻을 토론하기도 하고

고금의 일을 헤아려 보기도 하는데 심신에 유익할 뿐만이 아니다.

나는 이러한 것을 매우 즐거운 일로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조용히 앉아서 책을 보는데 그 맛이 매우 깊다.

때로 마음에 꼭 맞아서 흔연히 자득함이 있는 듯하여 해가 저물었는지 밤이 깊었는지를 모르기도 한다.

옛사람이 이른바 ‘내가 좋아하면 피곤하지 않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다.”하였다. (27-28면)

 

제자(諸子)의 문장 중에는『장자』가 가장 훌륭하다. 내가 어려서 이 책을 꽤 여러 번 읽었는데,

책을 보다가 답답한 기분이 들 때마다 소요유편(逍遙遊篇)을 펴서 한 번 읽고 나면

가슴속이 상쾌해져서 한 점의 연기나 먼지도 남아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85면)

 

<서전(書傳)> 下經은 태반은 어려워서 읽기 힘든 문자이다.

처음 읽을 때는 입이 껄끄럽고 혀가 뻣뻣하지만,

익숙히 읽으면 또 어금니 사이에서 참다운 맛을 느끼게 되니,

세속에서 이른바 ‘황율상서(黃栗尙書)’라는 것은 참으로 적절한 비유이다.

겨울 새벽, 잠에서 깨어나 베갯머리에서 묵송(黙誦)하면 더욱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 (85-86면)

 

나는 여가 시간에 하는 공부에서 반드시 한 건의 일을 만들어서

세밑에 문서를 마감하듯이 마무리를 하였다.

작년에는 <시관(詩觀)>으로 마감(磨勘)하였고 올해는 <팔자백선(八子百選)>에 현토(懸吐)하였다.

(143면)

 

매우 신중한 성품이었던 정조 자신의 이러한 언급은

책과 공부에 대한 거의 체질화 된 애호심을 알 수 있게 한다.

책을 만지기만 해도 마음이 즐거워진다는 말이 공연한 언사가 아님을 알 수 있고,

이러한 그림은 書室에 들어가 볼 여유조차 없을 때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조선후기의 문예부흥기로 불리는 정조시대 문예의 부흥은

<홍재전서(弘齋全書)> 184권 100책의 글을 남긴 정조의 학문적 소양과,

詩文과 書畵에 능했던 정조의 예술적 식견도 중요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회화의 주요한 제작층인 사대부 문인인 양반 여기(餘技)화가와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인 관료직업(官僚職業)화가의 이원적 구조 속에서

정조시대는 화원화가들이 가장 전성을 누렸던 시기였고,

이러한 배경에서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1806?)와 같은 위대한 화원화가가 탄생될 수 있었다.

 

화원은 각종의 의궤(儀軌)와 어진도사(御眞圖寫)를 비롯하여 초상화․ 기록화․ 장식화․ 지도 등

실용성이 강한 그림을 제작하는 공적인 활동이 주 업무임에도

남아 있는 감상화로 보아도 이인문(李寅文, 1745-1821),  김응환(金應煥, 1742-1789), 

김득신(金得臣, 1754-1822), 김석신(․金碩臣, 1758-?), 장한종(張漢宗, 1768-?), 

이명기(李命基, 18세기후반-19세기) 등 이 시대를 대표하는 많은 화가들이 화원이었다.

 

정조는 국정운영 초기부터 우문지치작성지화(右文之治․作成之化)라는 시정의 기본방침이 뚜렷했고

또 이를 위한 조직적인 추진력이 강했던 인물로써 규장각의 설치, 초계문신제도의 운용,

규장각 차비대령화원제(差備待令畫員制)의 신설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문예정책에 있어서도 관련제도의 운영에 치밀했었다.

 

‘차비대령화원제(差備待令畫員制)’는

정조의 서화관련 정책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많은 영향을 미친 제도이다.

규장각에 설치되었던 이 제도는 사화양청(寫畵兩廳)에 8명의 사자관과 10명의 화원을 두어

궁중 안의 국왕 주변에서 근무하는 조선시대 최초의 정식 궁중화원제도이다.

이 제도로 인하여 화원들은 국왕의 강력하고도 절대적인 후원과 통제를 동시에 받았는데,

정조대 무렵을 전후하여 화원화가들의 활동이 가장 뛰어나고 왕성했던 것은

이런 제도적 변화와 직결되어 있다.

 

국왕과 규장각 각신(閣臣)들이 직접 ‘녹취재(祿取才)’라는 별도의 시험을 실시하면서

특별관리하고 후원하며 재교육함으로써 화원의 운영체제에 획기적인 변화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도화활동의 내용과 성격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일반적인 도화서의 취재(取才)는 도화서 제조를 겸했던 예조판서 한 사람이 주재했지만

규장각 자비대령화원 녹취재는 규장각의 각신들이 1차와 2차 시험을 출제하고 채점한 뒤

국왕의 재가를 받았으며, 3차 시험은 국왕이 직접 출제하고 채점함으로써

도화서의 취재와 달리 취재 주재자의 범위가 확장되고 그 성격도 변화되었다.

 

녹취재의 화문(畵門)과 화제(畵題)에 대한 출제경향에는

국왕과 각신들의 취향이나 심미관이 반영되어 있다.

정조는 녹취재의 8개 화문 중에서 속화, 인물, 문방, 누각, 영모, 초충, 매죽, 산수의 순서로 많이 출제했고,

각신들은 인물, 속화, 산수, 영모, 누각, 매죽, 문방, 초충의 순서로 출제했다.

정조는 文房을 세 번째로 많이 출제하여 각신들의 취향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정조 8년(1784) 국왕이 출제하고 채점하는 자비대령화원의 녹취재 삼차 시험에서

정조는 각신들이 추천해 올린 文房 畫門의 화제 중에서 ‘冊架’를 낙점하여 출제하였는데,

1791년 오재순의 기록과 1798년 남공철의 기록에서 언급된 어좌 뒤를 장식했던 책가화가

자비대령화원의 녹취재 문방 화문에 속한 화제였음을 알 수 있다.

 

정조 12년(1788)의 녹취재에서는 자유롭게 그리라고 했으면

신한평(申漢枰, 1735-1809)과 이종현(李宗賢, 1748-1803) 등은

마땅히 ‘冊巨里’를 그려서 제출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그림 같지도 않은 다른 그림을 그려냈다고

나무라며 자비대령화원에서 파면시키고 멀리 귀양보내는 처분을 내리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은 이들이 그동안 정조에게 적지 않은 책거리 그림을 그려 올리며

이를 전문화하고 또한 잘 그렸기 때문에 정조와 이들 사이에

어떤 암묵적인 전제가 성립되어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이종현은 정조 9년(1785)의 근무 고과에서 “묘가 문방에 있다(妙在文房)”는 평가를 받았고,

정조 17년(1793)에는 “문방그림의 품격이 우아하다(文房雅格)”는 평가를 받아

그와 같은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한평과 이종현 등이 이런 암묵적인 전제와 기대를 무시한 채 책거리 그림을 그리지 않고

다른 그림을 그려냈다가 정조의 호된 질책을 받고 자비대령화원에서 파면되었던 것은

이 책거리 그림이 많은 공이 드는 어려운 그림이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필선 위주로 사물을 형상화하는 전통에 익숙해 있던 조선시대 화가들에게 투시도법을 익히는 일이나,

면으로 입체를 분석하여 명암을 넣는 일은 매우 어렵게 느껴졌을 것이다.

 

이러한 기록들에서 1784년경이나 그 이전부터

왕실이나 궁관 주변에서 책가화가 운위되며 적지 않게 그려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책가화의 성립과 사용은 정조시대 궁중 장식화로부터 시작되어 상류계층으로 확산된 것으로 추정된다.

<홍재전서>에서 정조가 그 이름을 언급하고 있을 만큼 畵技를 인정받아 자비대령화원에서 조차

특별히 열외 되는 대우를 받은 국왕 직속의 초대화원(待詔畵員)이었다고 판단되는,

김홍도가 冊架畫를 잘 그렸다는 기록이

이규상(李奎象, 1727-1799)의 <일몽고(一夢稿)> 중 「화주록(畫廚錄)」에 보인다.

 

김홍도의 字는 士能이며 號는 檀園으로 圖畵署에서 입신하여 지금 현감으로 있다. …

당시 도화서의 그림은 서양의 사면척량화법(四面尺量畫法)을 새로이 본받고 있었는데,

그림을 완성하고 나서 한쪽 눈을 감고 보면 기물들이 정돈되어 서있는 듯 하였으니

세속에서는 이를 가리켜 冊架畫라고 한다. 반드시 채색을 했는데,

한 시대의 貴人으로 집 벽을 이 그림으로 장식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김홍도는 이러한 재주에 뛰어났다.

金弘道, 字士能, 號檀園, 發跡於圖畵署, 今縣監. … 當時院畫創倣西洋國之四面尺量畫法, 及畫之成, 瞬一目看之, 則凡物無不整立, 俗目之曰冊架畫. 必染丹靑, 一時貴人壁, 無不塗此畫, 弘道善此技.

 

김홍도의 연풍현감 발령은 1791년 12월 22일자이고, 체임(遞任)된 것은 1795년 1월 7일자이니,

이 무렵 궁중장식화였던 책가화를 당대 ‘貴人’들도 사용했다는 것과,

김홍도가 서양화법을 응용한 진채 책가화를 잘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서양의 '사면척량화법'이란 '원근법'과 '투시도법'을 말하는 것으로

사방의 입면을 적절한 비례에 의해 평면에 옮긴다는 뜻에서

사면척량(四面尺量)이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생각되며,

당시 도화서와 궁중의 화원들이 서양화법을 적용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양화법은 사대부화가들보다 채색을 주로 다루는 도화서 화원들에게 더 깊고 폭넓게 확산되어

18세기 후반 도화서의 새로운 경향 중의 하나로 확실하게 자리잡았던 것 같다.

실제로는 전부터 들어와 있었던 기법이었지만 이 시기에 이르러 그에 대한 거부감이 누그러지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를 수용하는 분위기로 돌아섰다는 뜻에서 기록한 것이라 생각된다.

 

김홍도는 1790년 수원으로 옮긴 사도세자의 묘소 현륭원의 능침사찰(陵寢寺刹)인

용주사(龍珠寺) 대웅보전의 <삼세여래체탱(三世如來軆幀)>과

칠성각의 <칠성여래사방칠성탱(七星如來四方七星幀)>의 제작을 주관 감동(監董)하여 완성시켰는데,

이 불화는 당시 연경(燕京)의 천주교 성당에서나 볼 수 있던 서양화법,

그 중에서도 음영법, 원근법을 본격적으로 수용한 것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갖는다.

 

김홍도가 책가화를 잘 그렸다는 이규상의 기록이나

“그림 그리는 일은 다 그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였다.”고한 정조의 총애 등으로 볼 때

정조가 사용했던 책가화는 김홍도가 제작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정조와 당대의 ‘貴人’들이 애호했던 책가화는 궁중화원이 그린 최상류계층의 장식병이었으며,

김홍도는 이러한 작품으로 명성이 있었다.

 

서양화법이라는 외래화풍을 수용한 책가화가 보수적 경향이 강한 궁중에서부터 통용될 수 있었던 것은

정조시대의 자신감 있는 문화능력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정조의 외래문물에 대한 수용적 성향은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

倭人의 그림을 김홍도에게 모사 하게 하여 화성행궁에 두었다는 기록으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정조시대의 궁중행사도에는 구도와 설채에서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특징들이 나타나는데

모두 서양화법에서 자극 받아 새롭게 시도된 표현법이었다.

 

정조시대는 ‘북벌(北伐)’의 공허한 명분론이 ‘북학(北學)’으로 확실하게 대체되면서

병자호란이후의 쇄국적 국면에서 벗어나 조선사회의 전면적인 변화가 진행된 시기였다.

명․ 청의 교체는 조선에게 충격적인 변화였고,

병자호란의 치욕과 함께 이민족 정복왕조인 청조에 대한 반발은 중국과의 문화적인 단절을 초래했다.

정조시대의 중국은 만명(晩明)지식인들을 중심으로 明末淸初에 제기되었던 經世學이

청조의 지속적인 문화통제 정책으로 인해 강희 말기부터 점차 쇠퇴하고,

경세학의 학문적 도구였던 새로운 학문경향인 고증학(考證學)이 발흥하던 때였다.

청조는 국가적인 거대한 편찬사업에 학자들을 대거 동원하여 고증학을 중심으로

높은 수준의 학술적 성취를 이루었다. 청나라의 학술과 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조선사회는

국수적인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다시 자기문화의 외연의 폭을 확대하려는 경향으로 진행되었다.

 

정조시대의 문화분위기는 만명(晩明)이래 청조와 단절된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이루었던

고유문화의 자신감 위에 새로이 외래문화의 신선한 자극이 적극적으로 유입되던 시기였다.

앞선 영조시대(1724-1776)가 일부 선진 지식층 외에는 아직 청조에 대한 단절이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고유문화의 발현이었다면, 뒤이은 순조시대(1800-1834)는 정조시대의 선진문물에 대한 견문이

사회전반의 유익한 경험으로 확산되어 생산성을 가지는 방향으로 진행되지 못하고

일부 연행(燕行) 지식인들의 한묵(翰墨)적인 국제취미로 고착되던 시기이다.

 

18세기의 4/4분기에 해당하는 정조시대(1776-1800)의 문화적 분위기는

고유문화의 자신감 위에서 외래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국제성과 고유성이 조화를 이룬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책가화의 성립 배경에는 정조의 학문에 대한 개인적인 애호심,

북학이라는 시대사상의 새 물결 속에서 정조시대 궁중에서 외래화풍이 수용될 수 있었던 점,

이질적인 화풍을 소화할 수 있었던 화원들의 역량과 함께

무엇보다 이러한 회사(繪事)를 지시한 정조의 개방적인 회화관이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책가식 책가화

 

현전하는 작품 중에서 정조가 궁중장식화로 사용했던 책가화와 가장 근접할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삼성 리움암미술관에 소장된 지본채색의 <책가도> 8曲 병풍이다.

이 작품은 마지막 폭 하단에 그려진 인함(印函)의 다섯 개 도장 중 정면을 향한 印面이

‘이형록인(李亨祿印)’으로 판독되어 순조대 후반경부터 헌종대와 철종대에 자비대령화원으로 활동한

이형록(李亨祿, 1808- ?)의 작품인 것으로 밝혀졌다.

 

 - 이형록(李亨祿, 1808∼?)의 책가도(冊架圖)  8곡병(139.5 X 421.2 cm, 리움미술관 소장) 

이 작품은 단원 화풍에 따른 19세기 작품으로

화면 왼쪽 하단의 도장 상자 안에는 '이형록인 (李亨祿印)'이 숨은 그림찾기식으로 들어 있다.
 

 

이형록은 순조 말년인 1833년 26세 때부터 31년 간 녹취재에 참여했는데,

문방에서 특히 성적이 좋아 문방그림이 특기였다.

이형록의 전주이씨가문은 아버지 이윤민(李潤民, 1774-1841), 할아버지 이종현을 비롯해

5명의 자비대령화원을 배출하여 조선후기와 말기의 화원계에서 가세를 떨쳤던 유력한 화원가문이다.

 

秋史 金正喜(1786-1856)를 중심으로 새로운 회화사조가 불어닥친 조선말기의 화원계에서

조선후기의 진경산수와 풍속화의 전통이 유력 화원가문을 중심으로 계승되는 경향이 강했던 것으로 볼 때,

이형록의 <책가도>는 정조로부터 ‘冊巨里’를 그려내지 않았다고 해서 파면되어 귀양가야 했던,

할아버지 이종현대로부터 내려온 가문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양식이라고 생각된다.

 

이종현은 1777년 강희언의 집에서 김홍도 등 동료화원들과 모여

일 년 내내 公私간의 주문에 응하는 그림을 함께 그릴 정도로 친밀했으므로

책가화로 명성이 높았던 선배인 김홍도로부터 어떠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김홍도는 대작을 그릴 때 그것을 그리기 위한 수많은 시작(試作)과 분본(粉本)을 만들어서

그 테마에 관한 묘법을 충분히 익혀, 구투(舊套)에 만족하지 않고

신기축(新機軸)을 내려는 예술가의 열의가 있었고,

그렇게 하여 완성된 작품은 수많은 아류 모방작들을 낳는 전형이 되었다.

 

서유구의『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김홍도가 스스로 말하기를 평생의 득의작이니 다른 사람이 비록 본떠 그린 것이 있다 해도

물고기 눈알과 야광주(夜光珠)가 다른 것처럼 한 눈에 판별할 수 있다.

(弘道自云 生平得意筆 他人縱有彷放 魚目夜光一見可辨)”라고 한 기록에서

당시부터 김홍도의 그림을 베낀 많은 모방작들이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이종현의 아들인 이윤민은 1808년부터 25년 간 자비대령화원의 녹취재에 참여하였는데

속화, 인물, 산수의 순서로 성적이 좋았으며, 1831년에는 “문방그림으로 명성이 있다(文房著稱)”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윤민, 이형록부자의 책가화에 관하여

유재건(劉在建, 1793-1880)의『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1862)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화사 이윤민은… 문방도를 잘 그려서 양반집 병풍이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이 많았는데,

당시 사람들이 높고 묘한 솜씨가 짝이 없다고 일컬었다.

그의 아들 형록 또한 가업을 계승하여 정교한 솜씨가 극에 달하였다.

나에게 그가 그린 수 폭의 문방도 병풍이 있는데 매번 방에 펴놓으면 와서 보는 사람들이

책들이 書架에 가득한 줄 알다가 가까이 와서 자세히 보고 웃곤 하였다.

정묘하고 실감 나는 것이 이와 같았다.

畵師李潤民, … 善畫文房, 搢紳家屛障, 多出於其手, 時稱高妙無儔. 其子亨祿, 亦承箕裘, 極其精工. 余有數幅文房圖屛, 每設於房舍, 惑有來見者, 認以冊帙滿架, 近察而哂之. 其精妙逼眞如此.

 

유재건의 기록은 이규상의 기록으로부터 약 70년 정도 후의 정황을 전해주고 있다.

책가화의 명수는 김홍도에서 이윤민으로, 명칭은 책가화에서 문방도병으로,

향수층은 一時貴人에서 搢紳家(진신가)로 기록되었다.

잘 그린다는 표현이 선차기(善此技)에서 선화문방(善畵文房)으로 바뀐 것은

김홍도시대에 책가화는 서양화법의 신기한 기술로 인식되었고,

이윤민시대의 문방은 널리 인지된 장르였다는 시대적 변화를 나타내고 있다고 보인다.

 

이형록의 <책가도>는 현전하는 책가화 중에서 음영법이나 투시법이 서양화에 가장 근접하는 것으로,

김홍도와 친밀했던 이종현으로부터, 이윤민→이형록에게 家傳으로 이어져

정조에 의해 궁중에서 사용되고 자비대령화원의 시험과목으로 출제되었던 冊架 화제 그림의 양식을

반영하고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그림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식병은 유재건이 ‘설어방사(設於房舍)’라고 표현했듯이

생활공간에 설치하는 구조물로서 일종의 가구역할을 한 ‘바람막이’의 용도로도 쓰였던 병풍이었다.

대부분 화첩이나 두루마리, 족자의 형태로 이루어져 필요시 펼쳐보는 감상화와는 달리

장식병은 사용하면서 훼손․퇴색되면 수리 보수하여 계속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원형을 잃고 있을 수도 있다.

아울러 1970-80년대의 민화 붐을 타고 유통되는 과정에서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변형이 이루어졌을 개연성도 높다.

수묵이 아닌 진채이므로 교묘한 가필, 가칠로 수리되어졌을 경우는 더욱 원 모습을 짐작하기 어렵다.

제작 당시의 원형을 잃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장식병은

그림자체에 의거한 확정적 해석과 판단을 할 수 없다는 점이 연구상의 가장 큰 난점이다.

 그러나 그림자체에 의거한 합리적인 史的 전개가 아닌 많은 사항을 유보하는 추론일지라도

장식화와 민화를 회화사에서 배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정조시대는 조선시대 출판문화의 황금기로서 정조의 재위 24년 동안 150여종 4천 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의 책이 규장각을 중심으로 편찬 출판되었다.

정조의 책에 대한 혹애와 책가화에 그려진 책의 표제까지 일일이 지정했던 치밀함,

정조시대 출판문화의 융성 등으로 볼 때 한적의 추가는 정조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이다.

아울러 궁중장식화의 인습적 작품 예로 볼 때 한적의 유무는

궁중화원에 의해 제작된 책가화의 유형을 구분하는 참조사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의 지식인들이 화본과 한적을 함께 소장하며 공부했던 것을 여러 그림에서 볼 수 있다.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의 <독서여가(讀書餘暇)>에서 4갑의 화본(華本)과 한 질의 한적이 책장 안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책가화는 정조대 이전의 선행양식이 전혀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冊架 畵題가 출제된 문방 화문(文房 畫門)도 중국문헌의 일반적인 화문 가운데 그 이름이 보이지 않으며, 유사한 개념도 언뜻 찾기 어려울 만큼 조선 후기 규장각의 독자적 화문 설정인 신흥장르였다.

 

책가화는 청나라로부터 다보격도가 완성된 양식으로 유입되어, 정조의 애호를 받으면서 궁중화원들의 번안을 거쳐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책가화는 신흥장르로서 기술적 어려움과 함께 이질적인 제작기법이었지만 완성된 형식의 유입, 자비대령화원들을 직접 관리한 정조와 같은 유능한 감독자, 김홍도를 비롯한 많은 명수 화원들이 있었던 정조시대에 성립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에 이와 같은 조건들이 사라지자 역사적 기반이 짧았던 만큼 그 소멸도 빨랐을 것이다.

 

현재 알려진 것 중 화원 작품의 책가식 책가화는 10여 점 정도의 적은 양으로 생각된다.

익숙하지 않은 기법으로 인해 제작이 쉽지 않았으므로 다량이 제작되었으리라고 생각하기 어렵고,

국왕을 비롯한 최상류계층의 장식물로서 그 수용층이 넓지 않았던 점,

서양화법에 대한 호기심이 청나라 황실에서도 건륭제 이후로는 쇠퇴했으며,

조선에서도 정조시대이후 활발히 수용되지 않았던 점 등에서

상층문화의 일시적 유행으로 그쳐 뿌리를 내리지 못했던 것 같다.

 

 

책가화의 해체 - 나열식 책가화

 

책가화 장르의 기본적인 전제는 책가라는 기물의 실재감 있는 입체적 묘사가 우선적이며,

거기에 서화고동이 나열되고 있다.

정조대 이후 조야(朝野)의 화단에서 서양화법에 대한 호기심이 줄어들고,

추사화파의 문인화 사조가 풍미하면서 서양화법 위주인 책가화는 그 형식이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최상위계층의 장식화로서 성립되었으므로 궁중장식화의 인습적 경향과

화원가문내의 가전으로 그 양식이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았지만,

‘책가식 책가화’는 쇠퇴하고 ‘나열식 책가화’의 형식으로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다보격에서 출발한 책가는

진열장 계통의 가구가 없었던 조선의 정서나 생활환경과는 융합되지 않는 기물이었고,

서양화법은 문인화풍의 유행으로 쇠퇴하였다.

그러나 책가의 내용물이었던 서책과 서화고동에 대한 애완취미는

사회지도층인 문한(文翰) 계급의 기본적인 교양이자 문인사회에서 교제와 생활의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특히 조선후기에는 붐이라고 할 정도로 중국의 서화(書畵), 고동(古董)을 수집하고 감상하는 문화가

유행했으므로 이러한 소재에 대한 수요는 소멸되지 않았다.

 

문인들은 시서화를 겸비하고,

중국의 서화와 고동을 수집․ 완상․ 감식․ 품평하는 탈속적이고 심미적인 문인주의가

서울에서 유행하여 비양반 출신인 중서층과 시정(市井)으로까지 확산되는

전에 없던 양적 팽창과 질적 성장 및 변모를 보이게 되었다.

이와 같은 조류는 경제력 향상과 도시발달을 배경으로 한 심미의식의 대두와 더불어

풍류문인생활과 호사취미 수요층의 확대 등에 기인하고 있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초에 활동했던 여항시인 조수삼(趙秀三)의 단편「고동노인(古董老人)」은

시정의 한 부자가 골동품 거간상들에게 속아 가짜를 마구잡이로 사들이는 바람에 파산하게 되었으나,

그래도 끝까지 진품인줄 알고 골동취미를 버리지 않았다는 내용인데,

이를 통해 고동서화취미가 시정인들에게까지 확산되었던 당시의 현실을 엿볼 수 있다.

고동서화을 수집하고 감상하는 것을 고급한 예술 취미로 여기는 풍조는

19세기에 오면 거의 생활로 정착되어,

신위(申緯, 1769-1845)는 “이서(吏胥)의 집이 재상(宰相)과 같아,

그림과 글씨, 완호물들이 방안에 가득하다(吏胥之居宰相同 圖書玩好映房櫳)”라고 할 정도로 유행되었다.

 

 

정조는 이러한 유행을

“근래 들어 사대부들의 풍습이 매우 괴상하여

반드시 우리 나라의 틀에서 벗어나 멀리 중국인들이 하는 것을 배우려 한다.

서책은 물론이요 일상의 집기까지도 모두 중국산 제품을 사용하여 이것으로 고상함을 뽐내려한다.

먹, 병풍, 붓걸이, 의자, 정이(鼎彛), 준합(樽榼) 등 갖가지 기괴한 물건들을 좌우에 펼쳐 두고

차를 마시고 향을 피우며 고아한 태를 내려고 애쓰는 모습은 일일이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구중 깊이 앉아 있는 나로서도 그러한 풍문을 들었으니

낭자하게 이루어졌을 그 폐해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라고 하여

외제선호와 사치풍조를 염려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서 책가와 서양화법은 사라졌어도

서책과 서화고동이 주된 소재인 나열식 책가화와 민화 책거리가 계속해서 그려진 배경을 알 수 있다.

 

나열식 책가화는 서화고동이 수납이나 진열의 장치는 물론

특정한 공간이나 장소적 배경을 설정하지 않고 바닥에 나열되어 그려진다.   

 

  

 

책가식 책가화에서 책가를 제거하면

각각의 기물들은 한정된 공간 속에 독립적으로 놓여져 상호 관련 없이 나열되는 상황이 된다.

 

나열식 책가화에서 기물들이 상호 연관되지 않고

서로의 윤곽선을 침범하지 않는 독립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비록 책가가 사라졌지만 책가로 구획되었을 때의 전통이 남아있어

개개의 공간을 그대로 차지하고 있는 양상으로 파악된다.

각 대상체들은 윤곽선이 더욱 정리되어 형체감이 뚜렷해졌으나,

놓여진 위치관계에서는 책가화와 상당한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서책과 기물의 양적 비례에서 책보다 기물의 비중이 더 커진 것은

고동애완 풍조와 아울러, 이러한 장식화가 제공하는 볼거리로서

책가의 눈속임 효과(trompe l'oel)가 사라진 대신

다양한 문방청완품들이 볼거리로서 대체된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나열식 책가화에서는 서책의 경우에도 학문의 우의적 상징성보다 책갑의 색채와 문양에 치중하는

장식성이 두드러지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한적(韓籍)의 비중이 책가식에 비해 현저하게 줄어든 것도

중국 수입품의 유행과 함께 한적의 취약한 장식성에도 기인되었을 것이다.

 

나열식 책가화는 책가가 사라지고 문방기물들만 그려지므로 ‘나열식 문방도’라는 명칭도 합당할 듯하나, 공간구조의 면에서 볼 때 책가화와 연계선상에 있으며,

책갑의 표현 등에서 부분적으로 서양화법적인 시각법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나열식 책가화’로 부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책거리

 

조선후기 미술 문화의 생산과 소비는 상층사회 뿐 만 아니라 서민사회에서도 활발했다.

상업과 수공업의 발달로 화폐경제가 촉진되어,

“서울은 돈을 가지고 살아가고 팔도는 곡식을 가지고 살아간다(生民之業 京師以錢 八道以穀)”라고 한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의 말과 같이 서울은 돈을 가지고 살아가는 곳이었고,

이현(梨峴), 종루(鐘樓), 칠패(七牌) 등 서울의 ‘三大市’의 주변에 갖가지 수공업자[百工]들이

조업을 하고 있었고, 각종 상품[萬貨]들이 상인에 의해 주집(湊集)되고 있었다.

 

시장에서 거래되었던 百工의 萬貨에는 그림도 포함되었다.

순조 3년(1803) 자비대령화원 녹취재에 '속화(俗畵)' 화문으로 출제되었던 ‘광통교매화(廣通橋賣畫)’는

지금의 광교에 해당하는 청계천 입구의 광통교 그림시장의 광경을 그리도록 한 것이다.

 

조선후기에는 광교다리 서남쪽 개천가에 글씨와 그림을 파는 서화책사(書畵冊肆)가 있어서

오봉병(五峯屛)이나 세화(歲畵) 같은 그림을 팔았고,

조선 말기의 오원 장승업(吾園 張承業. 1843-1897)도 여기에서 그림을 그려 팔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산거사(漢山居士)라는 인물이 헌종 10년(1844) 지은 것으로 보이는 <한양가(漢陽歌)>에는

광통교 그림시장에서 매매되고 있었던 그림의 품목들을 다음과 같이 나열하고 있다.

 

광통교(廣通橋) 아래 가게 各色 그림 걸렸구나.

보기 좋은 병풍차(屛風次)에 백자도(百子圖) 요지연( 瑤池宴)과 곽분양행락도(郭汾陽 行樂圖)며,

江南 金陵 경직도(耕織圖)며, 한가(閑暇)한 소상팔경(溯湘八景) 山水도 기이(奇異)하다.

다락벽 계견사호(鷄犬獅虎), 장자문(障子門) 어약용문(魚躍龍門), 해학반도(海鶴 蟠桃) 십장생(十長生)과

벽장문차(壁欌門次) 매죽난국(梅竹蘭菊), 횡축(橫軸)을 볼짝시면

구운몽(九雲夢) 성진(性眞)이가 八仙女 희롱하여 투화성주(投花成珠) 하는 모양,

周나라 강태공(姜太公)이 궁팔십노옹(窮八十 老翁)으로 사립(絲笠)을 숙여 쓰고

곧은 낚시 물에 넣고 때 오기만 기다릴 제, 周 文王 착한 임금 어진 사람 얻으려고 손수 와서 보는 거동,

漢나라 상산사호(商山四皓) 갈건야복(葛巾野服) 道人 모양,

네 늙은이 바둑 둘 제 제세안민(濟世安民) 경영(經營)일다.

南陽의 제갈공명(諸葛孔明) 草堂에 잠을 겨워 형익도(荊益圖) 걸어 놓고 평생을 아자지(我自知)라,

한 소열(漢 昭烈) 유황숙(劉皇叔)이 삼고초려(三顧草廬) 하는 모양.

진 처사(晉 處士) 도연명(陶淵明)은 오미두(五斗米) 마다하고

팽택령(彭澤令) 하직하고 무고송이반항(撫孤松而盤桓)이라.

唐 學士 이태백(李太白)은 주진청루(酒肆靑樓) 취(醉)하여서

천자호래 불상선(天子乎來 不上船)을 歷歷히 그렸으며,

門에 붙일 신장(神將)들과 모대(帽帶)한 문비(門裨)들을 진채(眞彩) 먹여 그렸으니

화려하기 측량(測量)없다.

 

 

정조 15년(1791) 私商들에 의한 난전(亂廛)을 합법적인 상업활동으로 인정하는 신해통공(辛亥通共)의

실시는 상업과 수공업의 발달을 더욱 촉진시켜 서민층의 경제력을 향상시켰고,

이는 미술문화의 소비로도 이어졌다.

전문 상점에서 대규모 세트 그림인 병풍에서부터 다락벽, 장지문, 벽장문, 대문 등

각각 그 용도에 맞는 그림이 진열되고 있었고,

이와 같은 실용화 이외에 다양한 소재의 감상용 횡축도 팔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대부 문인계층에서 통용되었던 그림이나 상류계층의 장식화와는 다른

제작과 유통, 수용층을 가지고 있었던 이러한 상업적 그림을 민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상업활동으로 인한 서민층의 경제력 상승이 미술문화의 소비로 이어져

민화의 유통이 상업화 된 것은 주거생활환경과의 관련성이 크다.

 

현전하는 민화들은 대부분 병풍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어

민화의 대량생산은 병풍의 유행과 대량수요와 비례한다고도 할 수 있다.

사계절의 온도변화가 심한 기후에서 차가운 외풍을 가리기 위한

겨울용 ‘바람막이’의 용도로서 사용되기 시작되었을 실용품으로서의 병풍은 그 쓰임이

문화적 용도로 확장되어 조선후기인들의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일생의 중요한 의례에 필수품이었다.

 

관혼상제에 쓰였던 婚屛과 祭屛을 비롯해서 돌에서 회갑, 회혼례에 이르기까지

실내와 야외에서 이루어지는 개인, 집안, 사회, 국가의 모든 행사에는

그 행사의 성격에 합당한 병풍이 소용되었고, 그 다양한 용처만큼이나 민화의 내용도 풍부하게 되었다.

 

회화는 매체(medium)라는 물질적 요소와 표현(representation)의 의미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두루마리, 족자, 부채그림, 화첩, 벽화 등이 아닌 의례와 일상에 사용된 병풍을 매체로 하여

주로 발전한 민화는 그 매체적 속성과의 관련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더 나아가 그러한 형식이 통용되었던 생활양식과 문화 속에서 읽는 것이 중요하다.

 

병풍은 생활예술의 가장 친근한 형식이다.

인생의 중요 장면을 장엄하고, 바람을 막다가 닳아 소모되면 사라지게 되므로

그려지는 내용은 감상되고, 수장되어, 보존되는 예술의 형식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쓰이는 장면과 설치되는 장소의 형식에 타당한 내용으로 구성된다.

매체상으로 볼 때 중국그림의 대표적 형식인 手卷과 우리나라 그림의 대표적 형식인 병풍은

회화문화의 한 단면을 말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의례용 병풍이 행사의 내용에 따라 그림의 내용을 달리 한다면,

일상생활에 사용된 병풍은 놓여지는 장소에 따라 그림이 달라지는 장소성이 특징이다.

사랑방․ 안방․ 아이방․ 노인방 등 방의 장소적 성격이 병풍의 내용을 규정하면서,

그에 알맞은 전형적 공간을 구축하는 상징을 제공한다.

 

조선시대의 병풍은 ‘개인’인 ‘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놓이는 방의 성격을 규정하므로

개인의 취향이나 개성이 아니라 그 사회가 공유하는 공간의 관습에 따른다.

서로 비슷비슷한 그림의 병풍들이 계속해서 재생산되는 몰개성적인 반복성은

이러한 문화관습상의 특성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누구의 방이냐가 아니라, 사랑방이냐 안방이냐 하는 방의 성격에 그림의 내용이 부속되므로

정형화된 유형의 본에 의해 유사한 소재들이 되풀이되는 本 그림으로 전개되었다.

 

반면에 중국의 병풍은 주로 한 폭이나 세 폭의 가리개인 장자(障子)의 형식으로서

의자나 탑상을 두르는 위병(圍屛)이나 침상을 두르는 와병(臥屛)이 주된 용도로서,

공간을 분할하고 장소를 나누어 전체 공간에 대응하는 구조물로서 개인을 위호하도록 설치된다.

 

중국의 병풍이 개인을 규정한다면,

조선시대의 병풍은 방이라는 공간과 의례를 장엄하는데 쓰였다고 할 수 있다.

 

민화는 미술을 위한 그림이 아니라

일생의 중요 장면을 장엄하고 일상의 생활을 함께 한 삶을 위한 그림이었다.

민화라는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것이 생산되고 사용된 컨텍스트를

보다 면밀히 살피는 방식이 필요하며,

병풍화의 경우 매체와 표현이라는 두 측면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는

앞으로 더욱 주변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민화의 주거생활과의 관련에서 병풍과 함께 중요한 것은

그림을 벽지처럼 벽에 바르는 일종의 도배문화라고 할 수 있다.

<한양가(漢陽歌)>에서 ‘병풍차’와 함께, 다락벽 장지문 벽장문 대문 등에 바르는 그림을 팔았다고

한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듯이, 도배용 민화는 벽지와 같은 일상생활의 소모품이므로 유존작이 거의 없으며,

있더라도 가장 최근의 것일 수밖에 없다.

 

민화에는 대문에 붙였던 신장(神將)과 문비(門裨) 등과 같이

세시풍속이나 벽사진경(辟邪進慶)의 민속과 관련된 범계층적인 생활장식화도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한양가(漢陽歌)>에서 언급한 그림은 용도로 볼 때

병풍용, 도배용, 감상용, 대문용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규상이 ‘무불도차화(無不塗此畫)’라고 한 것은 꼭 풀로 붙여서 도배지처럼 바른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림을 일회용으로 바르는 도배문화 사회의 언어관습상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양가(漢陽歌)>에서 언급한 매죽난국의 사군자와 소상팔경의 산수화는 문인화의 소재이며,

강태공, 상산사호, 제갈공명, 한소열, 도연명, 이태백 등의 고사인물도는

상류층의 감계적 감상화와 같은 내용들이다.

 

백동자도, 요지연도, 곽분양행락도, 경직도, 해학반도도, 십장생도 등도

상층계급의 장식화와 공통되는 내용이다.

계견사호(鷄犬獅虎), 어약용문(魚躍龍門)은 상하층을 막론하는 벽사진경과 길상의 의미이다.

 

민화에만 나타나는 것은 이야기그림인 구운몽도

민화의 내용이 대부분 상류계층의 그림과 공통되는 소재임을 알 수 있다.

 

상류계층의 문화가 외국 선진문화의 유행을 쫓는다면 서민층은 상류계층의 문화행태를 모방한다.

민화에는 당시의 궁중, 양반, 중국의 문화나 미술의 경향이 반영되어 있다.

민화는 여러 경로의 다양한 그림들이 서민층으로 전파되어 저변화되면서 변이 되기도 하고,

그 단계 내에서의 양식적 변모과정을 거치기도 하면서 분방한 형태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민화는 서민들의 세계만이 아니라

문화적 취향이 다른 당시 상층 양반사회, 궁중, 중국에서 유입되는 외래문화 등이 상호작용하는

공동의 장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상층문화는 자신을 남과 구별지으려는 차별성을 중요시하지만,

서민문화는 필요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흡수력이 있기 때문이다.

 

민화 책거리 중에는 궁중장식화인 책가화가 연원이 된 유형도 있으나

그 외에도 다양한 양식을 볼 수 있어 책가화만이 원류가 된 것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책거리의 다양한 양식이 어떠한 근원들을 갖는가를 현재 확정할 수 없지만

정조대 이후로 궁중화원에 문방화문이 설정되어 화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그려진 사실은

하나의 단서가 된다.

유재건이 <이향견문록>에서 책가화를 ‘문방도병’으로 일컬은 것 또한 그 까닭이 있다고 생각된다.

 

궁중화원들이 그렸던 문방 화제의 책가화(冊架畵)가 책거리化 된 것은

화원과 민화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게 한다.

화원은 전문적인 기술을 갖춘 직업화가이자 궁관(宮官)이라는 최상층계급의 미술문화 생산자인

그림전문가이다.

 

도시의 전문상점을 통한 간접유통, 장날의 일시적 판매, 실수요자들의 직접 주문 등

다양한 경로로 유통되었을 책거리의 原本은 화원의 그림이었을 것이다.

1777년 김홍도를 비롯하여 당시의 최상급 화원들이 일년간이나 한 곳에 모여 公私간의 주문에 응하여

그림을 그렸다고 한 사적인 수요의 그림들 중에는 서민화가들의 본이 된 그림도 있었을 것이다.

 

책거리는 화원의 원본에 의해 계속적으로 반복 생산되면서

의식적 변용과 무의식적 착오, 혹은 창의적인 덧붙임 등에 의해 전개되면서

원본에서 멀어질수록 민화만의 독자적 양식으로 발전하였을 것이다.

원본의 제작경로, 원본의 복제 및 재 복제, 제작시 수요자의 요구사항, 제작자의 수준 등

무수한 변수들로 인해 다채로운 민화작품의 생산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아울러 조선후기 청나라 문물의 활발한 도입으로 인해

중국의 年畫를 비롯한 각종 그림들이 민화에 직접 참조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책가식, 나열식, 장막식의 다양한 책가화들이 책거리의 모태가 된 것으로 생각되므로

책거리의 유형을

① 수납장치인 가구, ② 공간의 지각과 입체의 표현, ③ 묘사된 기물들의 유형과 표현태라는 방식으로

분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①의 방식으로 볼 때 

책가식 책거리로, 나열식 책거리로, 서안식 책거리로, 장막식 책거리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책거리에서 책은 한적, 화본, 화첩(韓籍, 華本, 畵帖)의 구분 없이

책갑과 표지의 화려한 비단의 색과 다채로운 무늬를 장식하기 위한 수단이다. 

포개어 쌓은 책이 각 폭마다 무려 150여 권씩이나 등장하는 책거리도 있다.

원․ 사각․ 육각․ 마름모꼴 등 다종다양한 사방연속무늬로 장식된 책들은

화려한 장식성으로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서책은 ‘책’으로서의 형태적 존재감이 뚜렷하여 원본에서 멀지 않은 단계에서 그렸을 것이지만,

장식의 쾌감이 뛰어난 독창적인 양식으로 발전시킨 그림이다.

 

책거리 그림의 성행은 학문을 숭상하고 식자(識者)를 존경했던 조선에서

실지로 서책을 공부해서 과거를 볼 수 있는 양반층뿐만 아니라

일반 서민들도 책을 숭상하고 교양을 중시한 것을 나타내는 그림으로서

민화 문자도의 유행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학문과 교양을 상징하는 책거리는 실제로는 가까이하기 쉽지 않은 책을

그림상의 허구적이고 화려한 책을 통해 가까이 하기 쉬운 느낌이 들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가까이 하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해준다.

책거리의 우의성과 장식성이라는 양면적 특징이 이 그림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한편, 책갑의 반복적이고 기하학적 무늬 패턴의 도형이 화면의 전체적인 느낌을 형성할 정도로 사용되어

서책은 ‘책’으로서의 의미보다는 무늬를 사용하기 위해 필요한 조형물로 인식되기도 한다.

 

 

또 책거리에서 흔히 책갑의 윗면은 앞보다 뒤가 넓게 그려지기도 하는데,

이런 도형은 투시원근법과는 정반대의 시점으로 그려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역원근법(逆遠近法, 처음 이 말을 사용한 사람은 야나기 무네요시이다)'으로 부르고

지금까지 그대로 통용되고 있다.

 

투시원근법의 반대되는 개념으로서의 역원근법은 이론상으로만 가능하다.

圖解로 나타났을 때 물체의 前面을 바라보고 묘사하면서 시점을 화면에서 뒤쪽에 둔다고 하는 것은

모순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형은 물체의 全面을 보려고 하는 다시점(多視點)의 의도로서

대상을 완전체로써 파악하려는 잠재적인 의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책거리의 회화적 표현은 다시점에 의한 것이 특징이며,

시점의 이동에 의한 변형된 도형, 형태의 대소․상하, 좌우, 원근의 무시, 이중적 구성과 동시적인 표현

등으로 볼 수 있다.

 

책과 장식물들이 중첩되어 쌓아 올려지는 구성은

조선후기로 갈수록 장방형화(長方形化)된 병풍 형식에 맞추어 더욱 복잡 다양하게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학문적 우의성과 관계없이

재미있고 즐겁게 신변의 사물을 화사하게 모아 그리게 되어

구성력과 색채감각이 풍부한 상상정물화로 발달한 책거리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19세기에 이르면 회화 애호층이 저변화되면서 채색민화보다 값싼 경제성과 상층문인문화를 통해

정신적 상승효과를 누리기 위한 보상심리 등으로 인해

수묵화조와 사군자류 등의 수묵민화가 서민용으로 크게 범람했었다.

- 이인숙(영남대)의 논문 <책가화, 책거리의 제작층과 수용층>에서 일부분 발췌

 

 

 

 

- 김영동의 대금연주 / 은행나무침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