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방대함과 자세함
조선실록 5배, 中 明실록 2배 '놀라운 분량'
경연 비밀사항도 '생생'
서울대 규장각에 설치돼 있는 승정원일기 서가. |
지금부터 5년 전인 2001년 9월4일은 ‘승정원일기’(이하 ‘일기’)의 역사
에서 잊을 수 없는 날이다.
그날 우리나라 청주에서 열린 유네스코 심의 회의에서 ‘일기’는 23개국에서 신청한 42건의 경쟁 자료들을 제치고 ‘직지심체요절’과 함께 세계기록 유산으로 지정돼 그 중요성을 세계로부터 공인받았다.
특히 ‘일기’는 세계 최대 규모의 편년체 역사 기록물이며, 국왕에게 직접 보고된 당시의 생생한 문서라는 특장점을 높이 평가받았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세계 32개국 69건의 세계기록 유산 중 4건을 보유하게 되어 국가의 문화적 위상을 한층 높이게 되었다.
‘일기’의 가장 큰 가치는 방대함과 자세함을 온전하게 구비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조선전기 부분은 남아있지 않지만, 3,245책에 적혀진 2억5천만자라는 놀라운 분량은 조선시대 전체를 포괄한 ‘실록’보다 5배 이상 많으며, 중국에서 가장 방대한 역사 기록물이라는 ‘명실록’(明實錄, 2,964책, 1천6백만자)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이다.
더욱 중요한 측면은 그 자세함일 것이다. 누구도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과거를 탐구하는 학문인 역사학에서 ‘일기’는 당시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국정의 거의 모든 핵심적 상황을 마치 영상처럼 보여준다.
승정원의 주서(注書)들은, 대궐 안에서는 물론 책상 앞에서 국왕의 언행을 비교적 편안하게 기록할 수 있었지만, 궐밖 행차시에도 붓과 종이를 휴대해 수행함으로써 ‘임금의 모든 행동은 은폐하지 않고 반드시 기록한다’(君擧必書 良史書法不隱)는 동양의 기록정신을 모범적으로 체현했다. 그러니 ‘실록’이 마치 롱테이크로 찍은 뒤 주요 부분만을 압축한 편집본이라면, ‘일기’는 근접 촬영의 무삭제본이라고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일기’의 이런 특징은 ‘실록’과 비교하면 좀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영조 46년(1770) 11월14일의 ‘실록’에는 “전국의 누락된 세곡을 4만석까지 탕감한다”는 국왕의 지시가 간략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같은 날의 ‘일기’를 보면 그 지시의 내면이 풍부하게 드러난다. 우선 그 전교는 진시(辰時, 오전 7~9시)에 숭정전에서 영조가 대신들과 경연(經筵)을 마친 차대(次對) 자리에서 내린 것이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런 시혜적인 하명이 내려진 동기다. 당시 고령으로 건강이 좋지 않던 영조는 경연 직후 어의들에게 진맥을 받았는데, 맥박이 정상적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러자 영조는 거기에 대한 감사와 보답의 뜻으로 백성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이 돌아갈 만한 방책을 물었고,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세곡 탕감을 제의하자 중신들과 논의를 거쳐 그렇게 결정한 것이었다.
한 사안의 전말이 이처럼 자세하게 기록된 ‘일기’의 내용은 단편적인 결과만을 전달해주는 ‘실록’의 한계를 뛰어넘어 그런 정책이 결정된 때와 장소, 동기는 물론 대화 내용을 통해 각 관료들의 말투와 성품까지도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므로 “경연에서 논의한 비밀 사항도 반드시 입시해 직접 기록하고, 다음달 20일이 되기 전에 책을 만들어 바치기 때문에 그 자세함과 정확성에서 우리나라의 문헌 중 ‘일기’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순조대 도승지 박종훈(朴宗薰)의 평가는 정확한 것이었다(‘일기’, 순조 16년 8월24일).
4대 사고에 분산 비치된 ‘실록’과 달리 ‘일기’는 궐내 승정원에 한 부만이 비치되어 있었다. 고종이 ‘일기’를 한 부 더 필사한 뒤 북한산에 소장할 것을 제안한 것은 소실 또는 분실 등의 위험성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현재 '일기'는 이런 자료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 분량의 방대함과 난해함 때문에 널리 쉽게 이용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전산화와 번역작업에 좀더 많은 관심과 지원을 보태는 것은 이처럼 소중한 '일기'의 가치를 오늘에 되살리는 데 중요한 힘이 될 것이다.
- 박한남/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정보실장
- 경향, 2006년 9월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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