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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연재자료)

승정원일기 연재 - 1. 국가기록 관리체계의 모범

Gijuzzang Dream 2007. 11. 3.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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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에서

 

2006년 8월 27일 -  2006년 12월 25일까지

 

기획시리즈 ‘세계기록유산, 승정원일기를 읽는다’  를 18회에 걸쳐 연재하였던 내용입니다.

 

승정원일기를 각각 데이터베이스화 · 국역하고 있는 국사편찬위원회와 민족문화추진회의 연구원들이

집필하였습니다.

 

 

  

  

 

 

1. 국가기록 관리체계의 모범

 

 

 

 

 

 

 

 

‘승정원일기’는

조선시대 왕명을 출납하던 국왕 비서실의 일기이다.

현재 1623년(인조 1년)부터 1910년(순종 4년)까지의 왕명 출납, 제반 행정사무, 의례 등을 기록한 것이

남아 있다. 이전 것은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으로 소실됐다.

승정원에는 도승지를 비롯한 6명의 승지 아래 실무를 담당하던 7품관 주서가 있었고,

이들에 의해 그날그날 업무가 상세히 기록되었다.

주서는 사관과 함께 국정 논의과정을 기록하는 임무를 부여받기도 했다.

작성된 일기는 한 달 또는 반 달치씩 묶어 승지에게 제출하면, 승정원에 보관하게 된다.

이를 토대로 편찬된 ‘승정원일기’는 국정 전반에 걸친 내용을 날짜순으로 정리한 기본사료이며,

1차 사료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도 정책에 참고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승정원일기’에서 그 전례를 찾아보았을 정도였다.

현존하는 분량 또한 조선왕조실록보다 5배 이상이나 되는 엄청난 양이어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다.

지난 5월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이 입법 예고되었다.

‘승정원일기’를 생각하면서 때 늦은 감이 있지만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 여겼다.

국가 통치행위에 관한 기록물 관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11개 대통령자문 국정과제위원회 활동에 관한 기록물 현황이

국가기록원에 통보되지도, 영구 기록물로 분류되지도 않았다고 한다.

국가기록원 보존 대통령기록물 총 12만 건 중 74%가 사료적 가치가 없는,

청와대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출력한 단순 민원자료라는 것이다.

그러니 군사정권 시절 통치자료 관리는 오죽했겠는가?

이승만 대통령 시절 한·미상호방위조약 관련 문서 등 공적 기록물 15만여쪽도 국가기록물로 지정되지도

않은 채, 개인이 소장하다 연세대 ‘우남관’으로 옮겨졌다.

그러니 제헌헌법 원본, 외국과 체결한 조약 원본들이 사라지고,

국새 행방이 묘연해도 모른 채 지낼 수밖에 없던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고대국가 이래 기록물이 체계적으로 생산 관리되었던 것은

문화적으로 보다 성숙한 단계에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한·중·일이 각기 자국의 역사를 기록하고 관리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던 것은

다름 아닌 국가의 문화적 자긍심이었다.

아득한 삼국시대, 고구려·신라·백제는 융성한 정치와 문화를 바탕으로

그 자신감을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해 역사를 편찬했다.

특히 신라 태종무열왕 7년조 기사부터는 종전의 월별이 아닌 날짜별 기사로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사관이 기록한 것을 토대로 편찬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다.

이후 고려시대는 역사를 전담하는 춘추관을 두었고, 조선에서도 이를 답습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기록관리가 더욱 엄격해졌다.

‘경국대전’ 예전(禮典) 장문서(藏文書)조에

‘시정기를 비롯한 기록물 작성 보관과 일반 공문서의 관리’ 등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관청별 일지(승정원일기, 일성록, 비변사등록, 의금부등록, 의정부등록, 포도청등록 등)들이

기록·관리되었고, 오늘날 관보와 같은 조보 발행으로 시급한 정보와 소식을 전달하기도 했다.

이런 기록류들은 사고를 비롯한 여러 보관시설에 비장되었고,

소중한 국가기록물들이 오늘날까지 전승될 수 있었다.

그 후 갑오개혁을 거치면서 공문서의 자체 보관과 폐기 수준이었던 조치는

통감부와 총독부 시절에도 답습되었다.

일제에 의한 생산문서 보존기간 제도도 지금까지 내려오지만, 적지 않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국가 공문서들이 통치행위 수행을 위한 필요성에서 보관되고 폐기되어 왔기 때문이다.

다행히 1999년 ‘공공기관의 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어

국가기록물 관리에 대한 법적 근거는 마련되어 있다.

‘승정원일기’를 거울삼아 기록물 생산관리 체계를 한 단계 끌어 올린다면

문화강국 위상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으로 일부 번역된 ‘승정원일기’를 검색할 수 있는 수준에 와 있으니,

문화콘텐츠 인프라도 이미 구축되어 있는 셈이다.

- 박홍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 경향, 2006년 8월 27일

 

 

 

 

******************* 덧붙여.... '승정원일기' 는,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국보 제303호)’는

 

조선시대 국왕의 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에서 쓴 일기로,

'조선왕조실록'이 국왕 사후 사관들에 의해 편집된 2차 자료라면

'승정원 일기'는 왕실의 사건뿐 아니라 당시 시대상을 꼼꼼하게 기록한 1차 사료인데,

고종 31년 갑오경장 이후의 일기 내용은 일제에 의한 내정 간섭기 궁중기록이고

조선왕(황제)의 결재를 요하는 사건과 기타 궁중의 비화를 기록한 것이므로

근대사 연구의 1차 기본 사료가 된다.

 

총 3,243권, 2억4천250만자에 이르는 승정원일기는

조선왕조실록(1,893권· 4천7백만자)의 5배 규모로 현존하는 국내 최대 문헌이다.

참고로 중국의 '중국 25사'는 3,386책, 약 4,000만자이다.

 

 

'승정원일기'는

조선왕조 최대의 기밀 기록인 동시에 사료적 가치에 있어서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비변사등록과 같이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세계에 자랑할 만한 자료이며,

또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할 때 기본 자료로 이용하였기 때문에

실록보다 오히려 가치있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음은 물론,

원본 1부밖에 없는 귀중한 자료로 국보 제303호(1999년 4월9일)로 지정되어 있다.

또 세계 최대 및 1차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1년 9월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승정원일기는

인조 1년(1623) 3월부터 1910년 8월까지 왕명을 담당하던 기관인 승정원에서 처리한 여러 가지 사건들과

취급하였던 행정사무, 의례적 사항 등을 매일 기록한 것으로 

수량은 총 3,243책 393,578장에 이르며, 종이질은 닥나무종이이다.

 

현존본은

승정원일기(1623∼1894)와

승선원일기, 궁내부일기, (전)비서감일기, 비서원일기, (후)비서감일기, 규장각일기(1894∼1910)로

구성되어 있다.

 

승정원일기 / 국보 303호(1999년 4월9일 지정)

 

수록연대

책수

승정원일기

(承政院日記)

 1623. 3 - 1894. 6

3045책

승선원일기

(承宣院日記)

 1894. 7 - 1894.10

4책

궁내부일기

(宮內府日記)

 1894.11 - 1895. 3

5책

전비서감일기

(前秘書監日記)

 1895. 4 - 1895.10

8책

비서원일기

(秘書院日記)

 1895.11 - 1905. 2

115책

후비서감일기

(後秘書監日記)

 1905. 3 - 1907.10

33책

규장각일기

(奎章閣日記)

 1907.10 - 1910. 8

33책

3243책

 

 

내용을 보면 국정 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사실의 기록으로

계품(啓稟), 전지(傳旨), 청패(請牌), 청추(請推), 정사(呈辭), 상소(上疏), 선유(宣諭), 전교(傳敎) 등에

관한 것이다.

 

이 책의 기재 방식을 보면 한 달을 기준으로 책머리에 월간 경연상황, 내전(內殿)의 동향을 기록하고

다음으로 승정원의 관리 및 당직자의 표시와 출근실태를 표시하고

마지막에 승정원의 업무현황, 왕 및 내전의 문안, 승정원의 인사관계(人事關係) 등의 내용을 실었다.

 

이 책에 관여한 사람들은 정3품 승지 6명, 정7품 주서 2명이며,

도승지는 이조, 좌승지는 병조, 우승지는 호조,

좌부승지는 예조, 우부승지는 공조, 동부승지는 형조의 공사를 나누어 담당하였다.
주서가 기록을 담당했고, 그가 자리를 비우면 가주서가 대신 그 일을 맡았다.
전쟁기사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전쟁에 관한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사변가주서가 담당했다.

이 책은 생산기관의 명칭과, 책명을 변경해가며 1623년 3월 12일부터 1910년 8월 29일까지 280여년간

 그 작업이 계속되었다. 역사를 연도에 따라 서술하는 편년체로서 날짜순으로 배열하였고,

월별로 책을 만들었는데 분량에 따라 한 달에 2책으로도 만들었다.

 
조선 전기의 '승정원일기'는 승정원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 불타버리고 말았다.

또 1592년 임진왜란 이후 1623년까지의 일기도 이괄의 난 때 거의 불에 타버렸다.
인조 때 1592년 이후의 일기를 보수하였으나, 영조 20년(1744) 승정원에 불이 나면서 모두 타버렸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일기 역시 보수한 부분이 상당히 많으나 보수에 최선을 다하여

그 역사적 가치는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국가의 중대사에서부터 의례적인 일에 이르기까지 국정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승정원의 전모가 기록되어 있을 만큼 방대하여,

'조선왕조실록'편찬을 위한 첫 번째 사료로서 그 가치가 대단히 높게 평가되는 기록물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승정원일기' 원본은 보존을 위하여 공개하지 않고 있으나,

'영인본 승정원일기'(국사편찬위원회 1961∼1977 간행)와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철종 2년(1851)부터 순종 융희 4년(1910)까지의 일기 필사본은

인터넷으로 제공하고 있으며,

향후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영인본 전체를 디지털화하여 인터넷으로 일부 제공하게 된다.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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