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연재자료)

승정원일기 연재 - 4. 왕의 거둥

Gijuzzang Dream 2007. 11. 3. 18:24

 

 

 

 

 4. 왕의 거둥  

 

 

 

출궁후 이동경로부터 백성과의 대화까지

"어버이 그립구나" 정조를 보는 듯

 

 

정조의 화성행차를 그린 ‘화성 능행도’ 의 일부분.

거둥은 한자로 거동(擧動)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는 ‘임금의 행차나 나들이’를 뜻하는 고유어이다.

 

왕의 거둥은 군사훈련을 참관하거나 사신을 영접하기 위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종묘의 제사에 참여하거나 왕릉을 참배하기 위한 것이었다.

 

‘승정원일기’에는 처음 준비부터 출궁시각, 이동경로, 거둥간의 하교나 대화, 의식, 수행원, 환궁에 이르기까지 거둥의 전 과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한 실례로 정조의 거둥을 살펴본다.

정조는 즉위하자 곧바로 생부인 사도세자의 시호를 장헌세자로 올리고,

사당과 묘소를 각각 경모궁(景慕宮)과 영우원(永祐園)으로 격상시킨 뒤

빈번하게 이곳에 친림하여 예를 표하였다.

특히 사도세자를 위해 지은 경모궁은 그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정조의 효심을 나타내는 상징물이었다.

더구나 창경궁과 맞닿아 있는 지금의 서울대병원 자리에 세워서 수시로 드나들 수 있도록 하였다.

경모궁에 참배가는 거둥길은 두가지였다.

하나는 창경궁 월근문(月覲門)을 경유하여 곧장 나아가는 길이었다.

월근문은 정조가 경모궁에 편의대로 다녀올 수 있도록 창경궁 동쪽에 새로 만든 문이었다.

이곳을 경유할 때는 단지 소수의 관원과 군병만 대동하였다.

정조는 “이 문을 거쳐서 혹 한달에 한번 전배하거나 한달씩 걸러 전배하여

어린아이가 어버이를 그리워하는 것 같은 내 슬픔을 풀 것이다”(승정원일기 정조 3년 10월10일)

라고 하여 그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또 다른 길은 정식으로 법가(法駕 · 왕의 수레)를 갖추고

관현(館峴 · 현재 창경궁과 성균관대 사이의 고갯길)을 거쳐 문묘(文廟) 앞길을 경유하여

경모궁에 가는 길이었다. 대체로 춘추제향이나 작헌례 등 공식적으로 의식을 행하는 경우에는

법가에 호위병 등을 규례대로 갖추고 거둥하였다.

특히 문묘 앞을 지날 때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유생이

으레 왕을 지영(祗迎 · 행차를 맞이하는 의식)하였다.

환궁하는 길에 임금은 종종 지영한 유생을 불러 공부를 묻기도 하고

시제(試題)를 내주어 곧장 과거를 보이는 특전을 내리기도 하였다.

정조 8년(1784) 7월에는, 그해 6월 문효세자 책봉 관계로 정조의 특별한 은전을 노린

경향 각지의 유생들 400여 명이 지영에 참여하자 정조는 특교로 이들 모두에게 과거를 보이도록 명하였다.

왕의 거둥이 지금 세인의 눈을 끄는 것은 화려함 때문일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정조의 수원 화성 원행(園幸 · 능원 행차)이다.

정조는 13년에 경기 양주 배봉산(지금은 서울 휘경동에 있음)에 위치한 영우원을

화성의 현륭원으로 옮기는 역사를 거행하고, 재위 기간 모두 12차례의 원행을 실시하였다.

그 규모 또한 많게는 6,100여명의 인원과 1,400여 필의 말이 동원되기도 하였는데

이는 정조의 막강한 왕권을 백성들에게 과시하는 장이기도 하였다.

이 화성 능행에 대해서 수원성으로 천도를 준비한 것이라는 등,

당시 권력층인 노론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둥 정치적인 해석이 분분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정조의 생부에 대한 사모의 정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정조가 마지막 원행을 마치고 환궁길에 지지대(遲遲臺)에서 멀리 현륭원을 바라보며

“새벽에 떠나와서 뒤돌아보니 현륭원은 아득한데 지지대 위에서 또 더디고 더디구나”라는 시를 읊었는 바,

그 심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한편 왕의 거둥은 백성의 고충을 직접 보고 들을 수 있는 민정시찰의 기회이기도 하였다.

거둥길에 종종 종로의 시전 상인이나 반촌(泮村, 성균관 인근 마을)의 백성에게

폐단을 상언(上言)하도록 하였다.

이때 어떤 백성은 기회를 틈타 호위선 밖에서 징을 쳐서(擊錚, 격쟁)

주목을 끌어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징을 칠 경우는 임금을 놀라게 한 죄목으로 일단 옥에 갇히게 되지만,

상언의 내용이 반드시 왕에게 보고되고 비교적 가볍게 처벌되므로

법을 벗어난 일이라도 죄를 무릅쓰고 호소하는 경우가 많았다.

 

'승정원일기'에는 이 상언과 격쟁이 상세히 들어있는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으로 당시 사회상황을 이해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 공정권/ 민족문화추진회 전문위원

- 경향, 2006년 9월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