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연재자료)

승정원일기 연재 - 6. 15일간의 체류 행적

Gijuzzang Dream 2007. 11. 3. 18:21



6. 15일간의 체류 행적  

 

 

"접대, 유람 대신 銀으로 달라" 잿밥에 눈먼 明나라 사신들

 

조선 초기부터 이어진 명나라와의 외교관계에서 이른바 ‘천사(天使)’라고 불린 명나라 사신의 접대는 국가적 중요 행사였다. 천사는 명 황제의 등극이나 조선의 왕위 계승, 세자·왕비의 책봉 등 국가적 사안이 있을 때 주로 왕래했다. 명 초기에는 학자 출신의 문신들이 주로 파견되어 명의 선진 문화와 학문을 전파하는 통로로서 조선 관각문학의 발달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던 반면, 임진왜란 이후 명 말기에는 주로 탐욕스러운 환관이 파견되어 무리한 예물 요구와 횡포를 일삼았으므로 나라의 재정을 고갈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모화관에서 영조가 사신을 영접하는 모습>

 

인조 12년(1634년) 6월20일 명나라 사신이 서울에 왔다. 인조의 장자 소현세자를 왕세자로 허락한다는 중국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나온 것이다. 왕은 교외에 나가 다섯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오배삼고두(五拜三叩頭)의 예를 행하고 칙서를 받았다.


명나라 사신들의 횡포를 잘 알고 있었던 조선 조정은 이번 중국 사신 행차에 어느때보다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칙사인 사례감 태감 노유녕은 명나라 조정에 뇌물을 쓰고 파견되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서울로 들어온 다음 날, 하마연(下馬宴)에서 명나라 사신이 예단을 물리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유는 “저울추의 무게가 무거워서 인삼 근수가 줄었다”는 것이었다. 이어 칙사의 예물에 대한 우리의 답례에 대해서도 “칙사가 보낸 물품의 가격에 반도 못미친다”며 물리쳤다. 한번은 아예 자기들이 준 물건을 도로 돌려달라고 칙사가 직접 나서기까지 했다.


25일 다담상(茶啖床)을 들일 때부터는 그들의 본격적인 은(銀) 징수 작전이 시작되었다. “오늘부터는 다담상을 차리지 말고 그 비용을 모두 은으로 쳐서 달라”는 말이 담당 역관을 통해 전달되었다. 26일 유람 일정이 잡힌 날 당일 역관 장예충이 전한 칙사의 말은, 유람을 모두 중지하고 그 비용을 모두 은으로 대신 지급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미 한강의 정자선(亭子船) 정비나 잠두봉(蠶頭峯) 및 망원(望遠) 지역 수리 등 유람에 필요한 준비를 마친 상태였던 우리측으로서는 경비를 이중으로 부담하게 된 것이다.


7월1일, 나라의 사정으로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어주지 못할 경우 재신들이 관소에 가서 술을 대접하는 주봉배(晝奉盃) 행사 때 역시 기어이 은을 받아내려 하자, 사신 접대를 담당한 관반사조차 이런 사람을 빈주(賓主)가 서로 공경하는 예로 대우할 수 없다고 분노했다.


7월3일, 출발 예정일 하루 전에 행하기로 되어 있는 상마연(上馬宴)을 돌연 사신측에서 취소했다. 예정했던 은 수량을 채우지 못하여 답답한 심사를 드러낸 것이었다. 사신들은 결국 이틀을 더 머물게 되었고, 청하는 연회마다 사양하여 수연은(隨宴銀)까지 챙기는 데 성공했다. 심지어 돌아가는 도중에 먹을 쌀값까지 은냥으로 쳐서 받아가기도 했다.


마침내 7월6일 전별연(餞別宴)을 끝으로 명나라 사신은 서울을 떠났다. 15일간의 그들의 일정은 두 번 왕과의 접견 이외에는 오로지 은자를 모으는 일로 일관한 것이었다. 머무는 동안 매일 지급되는 체류비용조의 좌지은(坐支銀), 거기다 각종 행사와 연회를 사양하고 대신 받은 은까지 합하면 얼마나 될까.

7월4일 호조가 올린 초기에 의하면, 칙사에게 지급된 은자만 5만5천여냥이고 가져온 물건을 민간에 팔아 챙긴 것이 6만1천8백여냥으로 수중에 들어간 은자는 총 11만6천8백여냥에 달했다. 대강 소 1마리 값이 은 7냥이었던 당시, 호조에 비축된 은은 1만1천여냥 뿐이었으니, 나라 살림의 손실을 가늠할 만하다.


이것은 명나라의 마지막 사신 행차였다. 10년 뒤인 1644년, 명은 청나라에 수도 북경을 내주었고 끝내 국권을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승지 이경헌이 왕에게 올린 글에 말한 ‘사람의 도리라곤 전혀 없어서 실로 인도(人道)로 논하기가 어려운’사신들의 행적이 바로 멸망을 눈앞에 둔 대국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 세옥/ 민족문화추진회 전문위원

- 경향, 2006년 10월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