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연재자료)

승정원일기 연재 - 5. 왕의 하루일정

Gijuzzang Dream 2007. 11. 3. 18:22

 

5. 왕의 하루일정  

 

 


보고서 결재, 지방관 접견, 학문 토론 ....

눈코 뜰 새 없는 政事

 

왕의 하루도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기상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그저 그냥 보내는 하루가 아닌 그야말로 빡빡한 일정이 기다리고 있다. 기상하자마자 의관을 정제한 후 왕실 웃어른에 대한 문안, 신하들과 학문토론을 하는 경연, 아침식사, 조회로 이어지는 일정을 소화하자면 정신이 없을 정도다.

  

                      <창덕궁 인정전과 은대(銀臺)>

 

승정원일기(이하 일기)는 이러한 왕의 아침 일정에 대해 ‘上在○○宮. 停常參·經筵.’이라 기록하고 있다. ‘왕은 ○○宮에 있었으며 아침 일정인 상참(약식 조회)과 경연을 정지하였다’는 의미다. 이렇듯 생략되는 일정들이 있었기에 배겨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도성을 떠나 장기간 행차하였을 경우 일기는 대궐과 왕이 행차해 있는 행궁에서 각각 작성된다. 현종 10년 3월15일 눈병과 피부병으로 고생하던 왕은 온양온천으로 향하는 길에 올랐고, 이날부터 환궁하는 4월18일까지 일기는 2종이 작성되었다. 도성 안 승정원 관원들이 작성한 것과 왕을 따라 온양으로 갔던 승정원 관원들에 의해 작성된 일기가 따로 전해진다. 이 시기 도성에서 작성된 일기는 대비와 세자에 대한 신하들의 문안기사와 관상감에서 보고하는 천문기사 등이 기록되어 있다. 기타 신하들의 임명기사와 다른 정치적인 행위들은 왕이 행차해 있는 온양에서 작성된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두 일기 모두 ‘上在溫陽行宮’(상재온양행궁·왕은 온양의 행궁에 있었다)으로 왕의 소재를 기록하고 있다.


왕의 아침 일정인 조회 개최 여부 기사에 이어 관상감에서 올린 천문기사와 신하들의 왕실에 대한 문안기사를 일기에 기록한다. 만약 왕이 병이라도 있게 되면 이 문안기사는 약방의 처방전 및 병의 차도를 묻는 기사로 가득 차게 된다. 조선시대 왕의 안위는 정국의 불안과 직결되기 때문에 특별히 관리되어야 할 사항이었다. 때문에 당시로서는 최고의 의술이 약방의 처방전 기사에 실리게 되며 종종 일기를 한의학의 중요한 자료로 이야기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신하들이 왕실에 대한 문안을 마치고 나면 본격적인 왕의 업무 처리라 할 수 있는 각 관서에서 올린 보고서에 대한 결재가 이어진다. 승정원의 업무처리 지침서라 할 수 있는 ‘은대조례(銀臺條例)’에 의하면 인종(仁宗)대에 관원들이 직접 왕에게 나아와 보고하는 제도를 폐지하고 승정원을 통해 업무를 보고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즉 각 관서가 보고서를 승지에게 전하면 승정원 주서는 “아무개 승지가 아무개 관서의 말로써 아뢰기를(某承旨 以某司言啓曰云云)”로 시작되는 일종의 요약문인 초기(草記)에 보고서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여 승지가 왕에게 보고하는 형태이다. 이를 위해 당시 승정원 6승지 중 도승지는 이조를, 좌승지는 호조를, 우승지는 예조를, 좌부승지는 병조를, 우부승지는 형조를, 동부승지는 공조의 업무를 분장하여 담당하고 있었다.


왕의 오전 업무가 끝나고 나면 오후에는 낮 공부인 주강, 지방관 접견 및 각 지방에서 올라온 장계 처리 등이 이어진다. 일기는 이러한 기사들을 순서에 따라 기록하고 있으며 신하가 왕을 만나는 대화기록만은 일기의 가장 뒤에 첨부하였다. 아마도 대화기록은 주서가 입시하여 대화의 전 과정을 기록하였기 때문에 별첨의 문서로서 기록한 듯하며 입시기사에는 왕과 신하의 만남이 이어지는 장소와 시간, 참석자를 기재하고 이어서 왕과 신하 간에 이어지는 대화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저녁이 되면 왕은 석강에 참여한 후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왕실 웃어른에게 문안인사를 드리고 난 후 잠자리에 듦으로써 하루 일과를 마치게 된다. 그런데 저녁에도 왕의 업무 처리가 있기 때문에 승정원에 숙직을 하는 관원들은 항상 관복을 입고 있어야 했다. 조선 초에는 입직을 서는 승지가 한명이었으나 세조대에 숙직을 하던 승지 이교연(李皎然)이 술을 먹고 잠들어버려 왕의 물음에 자문하지 못했던 일이 있고 나서 2명씩 숙직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토록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 낸 왕들이 있었기에 조선이란 나라가 장장 오백년을 지탱했던 것이다.

- 최재복/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 경향, 2006년 9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