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연재자료)

승정원일기 연재 - 2. 조선왕조와 함께한 운명

Gijuzzang Dream 2007. 11. 3. 18:30

 

 

 2. 조선 왕조와 함께한 운명

 

 

승선원, 궁내부, 비서감, 비서원, 규장각 '개명'

1910년 8월 '마지막 일기'

 

 

승정원일기 1910년 8월 29일자. 마지막 승정원 일기로 국한혼용체로 쓰여진 게 눈길을 끈다.

고종 31년(1894) 11월21일 고종은 경복궁 함화당에서 총리대신 김홍집과 각 아문의 대신을 불러 만났다. 이 자리에 참석한 승선(承宣) 신병휴(申炳休)가 아뢴다.

“신분이 낮고 말의 무게도 없는 자가 함부로 나서서 말씀드리는 것이 매우 황송한 일이기는 합니다만, 본원은 바로 임금의 명령을 출납하는 곳으로서 국가가 생긴 이후로 반드시 승지와 사관이 곁에서 시종하여 왔는데, 이번에 갑자기 혁파해 버리시니 서글프고 답답한 마음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고종이 미처 하교하기도 전에 김홍집은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굳이 이렇게 아뢸 필요가 없습니다.”

이날 김홍집은 일본을 등에 업고 2차 김홍집 내각을 출범시키면서 ‘오늘부터 승선원을 폐지한다’는 칙령 1호를 재가 받는다. 승선원과 승선이란 명칭이 오늘날에는 좀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앞서 갑오경장이 시작되면서 기존의 승정원이 승선원으로 바뀌고 승지의 명칭도 승선으로 바뀐 때문이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조선은 전제왕조국가이다. 임금 한 사람이 국정을 총찰한다. 그러므로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과 승지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그런데 지금 고종은 승선원을 폐지한다는 칙령을 스스로(?) 재가한 것이다. 비록 나중에 비서감, 비서원이 다시 설치되긴 하지만, 이때에 벌써 조선의 임금은 왕명을 출납할 통로를 봉쇄당한 서글픈 존재가 되고 만다.

승정원일기는 역사의 고비마다 수난을 겪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건국 이후의 일기가 완전히 소실되었다. 그리고 인조 2년 이괄의 난 때에도 도성이 함락되면서 임란 이후의 일기가 대부분 불타버리게 된다. 그 후에도 승정원일기는 영조, 순조, 고종 때에 실화로 인해 세 차례나 피해를 당한다.

일기가 수난을 당했을 때마다 소실된 일기를 되살리기 위한 개수 작업도 어김없이 이루어졌다. 대대적인 개수 작업은 영조 22년과 고종 27년에 행해진다. 방대한 분량을 개수하다 보니 종이의 공급, 개수 인력의 부족, 경비 마련의 어려움 등 문제가 산재하였다. 그렇지만 난관 속에서도 개수는 꾸준히 진행된다. 승정원일기의 자료적 중요성 때문이다.

영조는 개수를 지시하면서 “승정원일기가 실록보다 상세하여 성덕과 대업이 모두 기재되어 있는데 지금 남아 있는 것이 없으니 밤낮으로 한숨만 나온다”고 하였다. 고종도 “왕조의 사적은 오직 승정원일기와 일성록에 기록되어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영조와 고종이 승정원일기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승정원일기’라는 명칭은 고종 31년 6월까지의 일기에만 나타난다. 이후 외세의 압력과 맞물려 진행된 관제 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승정원은 위상과 명칭에 변화가 생긴다. 이에 따라 승정원일기도 승선원일기, 궁내부일기, 비서감일기, 비서원일기, 규장각일기로 그 명칭이 순차적으로 바뀌게 된다.

 

조선 초기 이후 500년을 이어오던 승정원일기란 명칭이 1894년 갑오경장 이후 1910년까지 불과 10여 년 사이에 여섯 차례나 바뀐 것이다. 이는 권력의 중심에 있던 임금이 차츰 외세의 압력에 의해 왕조의 명맥도 끊어져 가는 일련의 과정이 일기의 명칭에 투영된 것이다.

그러나 선왕들이 원래의 면목을 되살리기 위해 그토록 노력했던 승정원일기는 1910년 8월29일, 양위칙서에 대한 기록을 끝으로 조선왕조와 더불어 종언을 고한다.

왕권의 무력화라는 현실 앞에서 답답하고 서글픈 심정을 토로했던 신병휴도 불과 15년 뒤에 국권을 송두리째 일본에 넘긴다는 순종의 양위칙서가 나오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 김낙철/ 민족문화추진회 역사자료팀장

- 경향, 2006년 9월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