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조선 왕조와 함께한 운명 | |||
승선원, 궁내부, 비서감, 비서원, 규장각 '개명' 1910년 8월 '마지막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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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31년(1894) 11월21일 고종은 경복궁 함화당에서 총리대신 김홍집과 각 아문의 대신을 불러 만났다. 이 자리에 참석한 승선(承宣) 신병휴(申炳休)가 아뢴다. “이에 대해서는 굳이 이렇게 아뢸 필요가 없습니다.” 영조는 개수를 지시하면서 “승정원일기가 실록보다 상세하여 성덕과 대업이 모두 기재되어 있는데 지금 남아 있는 것이 없으니 밤낮으로 한숨만 나온다”고 하였다. 고종도 “왕조의 사적은 오직 승정원일기와 일성록에 기록되어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영조와 고종이 승정원일기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초기 이후 500년을 이어오던 승정원일기란 명칭이 1894년 갑오경장 이후 1910년까지 불과 10여 년 사이에 여섯 차례나 바뀐 것이다. 이는 권력의 중심에 있던 임금이 차츰 외세의 압력에 의해 왕조의 명맥도 끊어져 가는 일련의 과정이 일기의 명칭에 투영된 것이다. 왕권의 무력화라는 현실 앞에서 답답하고 서글픈 심정을 토로했던 신병휴도 불과 15년 뒤에 국권을 송두리째 일본에 넘긴다는 순종의 양위칙서가 나오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 김낙철/ 민족문화추진회 역사자료팀장 - 경향, 2006년 9월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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