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외국어 학습소 | ||||
조선에서 외국어 교육은 과연 어디서 담당했을까? 당시 외국어는 사역원(司譯院)에서 담당했는데, 고려 때 설치된 통문관(通文館)이 전신이었다. 사역원에서 가르치는 외국어는 중국어, 몽골어, 여진어, 일본어, 위구르어, 유구어로 여섯 개였다. 관사(官舍)는 종로구 적선동에 있었는데, 본원 외에 한학전함청, 몽학청, 왜학청, 청학청 등 30여개 관서가 있어서 외국어 대학 같은 성격을 갖고 있었다. 지금같이 다른 세계와 소통이 활발하지 못했던 과거에도 외국어는 국가의 외교업무에 반드시 필요했다. 『태조실록』 2년(1393) 9월 19일자 기록에 따르면 “사역원(司譯院)을 설치하고 중국어를 익히게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듯이 조선도 일찍이 외국어의 중요성을 인지했다. 따라서 과거제도를 정비할 때 ‘문과(文科) · 무과(武科) · 음양과(陰陽科) · 의과(醫科) · 율과(律科) · 역과(譯科)’의 여섯 개의 과에 역과를 포함시켰고, 바로 사역원에서 전문 통역관을 길러냈다. 『고려사』 「백관지」 ‘통문관’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통문관은 충렬왕 2년에 처음으로 설치해 금내학관(禁內學官) 등 참외(參外)로 나이가 40미만인 자에게 한어(漢語)를 학습시켰다.”라고 전하고 있다.
사역원의 기틀을 잡은 사람이었다. 태조 3년(1394) 그가 사역원의 체제와 공부 과목 등에 대해서 보고했는데, 이에 따르면 사역원의 기본 외국어 과목은 한어와 몽골어였다. 비록 북방으로 쫓겨 갔으나 원나라는 아직 명과 충돌하면서 재기를 노리고 있었고, 누가 최후로 승리할지 알 수 없었으므로 몽골어도 기본 언어의 하나로 선정한 것이었다.
중국어를 기본과목으로 선택한 응시생은 중국어 외에 《사서(四書)》와 《소학(小學)》· 이문(吏文 : 외교 격식의 언어) · 몽고어를 봐야했다. 중국어 역관은 제2외국어로 몽고어까지 습득해야 했던 것이다. 이 다섯 과목을 모두 합격해야 제1과科로 정7품 역관으로 임용되었다. 중국어와 《사서》의 절반 및 《소학》에 합격하면 제2과로 삼아 정8품으로 임용되었고, 중국어와 《소학》만 합격하면 제3과로 삼아 정9품으로 임용했다.
몽고어 외에 위구르어도 습득해야 제1과로 삼아 정7품으로 임용되었다. 몽고어는 통과했는데, 위구르어는 문자만 해득하고 말을 하지 못하면 제2과로 삼아 정8품으로 임용했다. 이는 조선 태조 때의 역과는 중국어, 몽고어, 위구르어의 3개 국어가 외국어 시험과목이었음을 말해준다.
선발 인원은 중국어 역관의 경우 제1과 1인, 제2과 3인, 제3과 8인이고, 몽고어 역관은 제1과 1인, 제2과 2인으로 모두 합해 15인이었다. 중국어가 12인, 몽고어가 3인으로 중국어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일본과 국교가 수립되면서 일본어 역관의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태종 14년 사역원에 일어 역관 자리가 신설되었고, 세종 8년 9월에는 여진어(만주어) 역관 자리가 사역원에 생겼다. 조선 초기에는 사역원에서 5개 국어를 가르쳤다.
유구어(琉球語)도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아시아 남방의 무역국이었던 유구는 중산왕(中山王)이 조선이 개국한 1392년 8월 사신을 보내 조회할 정도로 조선과 일찍부터 수교를 원했다.
이런 필요성 때문에 세종 19년(1437) 11월 27일 예조에서 “서울과 지방에서 유구국 문자를 해득하는 자를 찾아서 사역원 훈도(司譯院訓導)로 차임(差任)하고, 왜학생(倭學生)에게 겸해서 익히도록 하기를 청합니다.”라고 요청했다.
세종의 수락으로 사역원에서 가르치는 외국어는 여섯 개가 되었다. ‘왜학생(倭學生)에게 겸해서 익히도록’ 했다는 것은 일본어 역관이 유구어 역관을 겸임했음을 뜻한다. 북방 몽고어 역관에게 위구르어까지 익히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어 역관에게 다른 남방어인 유구어를 익히게 한 것이다. 결국 조선 초에 사역원에서는 6개 국어를 가르쳤다.
사역원의 장관인 사역원 정正은 정3품이었으나 그 규모는 작지 않았다. 사역원 관사는 현재의 종로구 적선동과 도렴동에 걸쳐서 있었는데, 그 규모는 동서 23칸間, 남북 24칸의 총 552칸이었고, 대청(大廳) · 상사당상청(常仕堂上廳) · 한학전함청(漢學前銜廳) · 몽학청(蒙學廳) · 왜학청(倭學廳) · 청학청(淸學廳) 등 30여개의 청사가 늘어서 있었다. 종합 외국어 대학교 같은 모습이었다. 비록 역과(譯科)가 잡과에 속해 있었지만 지원자가 많아서 사역원의 입학 조건은 까다로웠다. 부(父) · 조부(祖父) · 증조부 · 외조부의 명단인 사조단자(四祖單子)를 제출해 이상이 없어야 했고, 여기에 참상관 이상 2인과 교회(敎誨 : 사역원 관리) 1인의 신원보증서를 제출해야 했다.
사역원에서는 15인이 심사해 입학여부를 결정했는데, 사역원 연혁지인 『통문관지』에 따르면 ‘항통(缸筒 : 비밀투표함)을 넘어뜨려 3매듭結 이상이면 입속(入屬)을 거부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3명 이상이 반대하면 입학이 거부되었다는 뜻이다. 입학하면 무섭게 공부해야 했다. 모든 대화를 자신이 전공하는 외국어로만 해야 했고, 수시로 원시(院試)와 고강시(考講試)를 치러야 했다. 원시(院試)는 각 중월(仲月: 2·5·8·11월)과 계월(季月: 3·6·9·12월)에 쳤는데, 중국어의 경우 2인씩 짝을 지어 중국어로 강(講)해야 했다. 원시보다 한 차원 높은 고강시는 4계절의 첫 달 초하루에 쳤는데, 『노걸대(老乞大)』·『박통사(朴通事)』등 6권의 교재를 반 권씩 12권으로 나누어 돌아가며 배강(背講:뒤돌아서서 책을 보지 않고 외우는 것)했고, 『사서(四書)』·『춘추(春秋)』등의 경서는 임강(臨講 : 책을 보고 읽고 풀이하는 것)했다.
고강시까지 합격하면 국가고시인 취재시(取才試)와 역과시(譯科試)에 응시하는데, 역과는 회화 · 강독 · 사자(寫字 : 작문) · 번역의 4종류를 치렀다. 취재시와 역과에 합격해야 본격적으로 역관의 업무를 볼 수 있었다.
외국어를 통해 권력과 부에 다가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에 가는 사절단에 항상 역관들이 수행했는데, 일반적으로 중국에 가는 사신은 보통 왕자나 정승들이 정사(正使)가 되었다.
그런데 조선 초에는 역관 중에서 정사가 되는 경우도 있어, 세종 때의 역관 김을현(金乙玄)은 세종 23년(1441) 사은사(謝恩使)의 정사로 북경에 다녀오기도 했다. 정사가 귀국할 때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돌아오면 왕세자가 나가서 맞이해야 했으니, 잡과 출신으로는 최고의 영예가 아닐 수 없었다.
조선은 명나라와는 사대(事大), 일본 등 다른 나라와는 교린(交隣)관계를 맺었다. 사절단이 왕래할 때는 공무역(公貿易)뿐만 아니라 사무역(私貿易)도 부수적으로 행해졌는데, 이 사무역은 전적으로 역관들의 영역이었다.
명나라는 일본에는 문호를 개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의 역관들은 일본으로부터 은을 구입해 명나라에 되팔거나 명나라 물품을 일본으로 파는 국제 중개 무역을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로 조선의 최대 갑부는 역관들이었던 것이다. 예전에도 유창한 외국어는 그만큼 권력과 부에 다가가는 통로였다. - 월간문화재사랑, 2008-05-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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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있었다! 외국어 학습 교재들 | ||||||
어느덧 외국어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필수품처럼 되었다. 우리보다 앞선 시대를 살아간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외국어는 어떻게 인식되었을까? 예상과는 달리 조선시대에도 체계적인 외국어 학습이 이루어졌음이 눈에 띈다. 외국어에 대한 수요가 있으니 당연히 오늘날과 같은 학습 교재도 있었다. 중국어 교본인 「노걸대」와 「박통사」를 비롯하여 일본어 학습서인 「첩해신어」 등이 그것이다.
다만 모든 백성에게 중국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중국 사신을 접대하고, 중국에 파견되는 사절단을 수행하는 역관들을 중심으로 중국어 학습이 이루어졌다. 물론 지식인층 중 상당수는 외국어를 능숙히 구사하였다. 대표적으로 세종 시대를 빛낸 학자 신숙주는 중국어, 여진어, 몽고어, 일본어에 두루 능통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노’는 상대를 높이는 접두어로 우리말의 ‘씨’, 영어의 ‘미스터’쯤 된다. ‘걸대’는 몽고인이 중국인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다. 3명의 고려 상인이 말과 인삼, 모시를 팔기 위해 중국에 다녀온 과정에서 겪는 다양한 상황을 적어 놓은 책이다. 상, 하 2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권은 완전히 회화체로 구성되어 있다. 『노걸대』에는 말을 사고파는 법, 북경에 도착하여 여관에 드는 방법, 조선의 특산물인 인삼을 소개하는 방법 등이 중국어로 소개되어 있는데, 그야말로 실무에 필요한 실용 회화책이라 할 수 있다.
『노걸대』의 구성을 살펴보기 위해 첫 부분의 대화를 잠깐 소개해 보기로 한다.
위에서 고려라 표현한 부분이 조선으로 바뀐다. 원래 고려시대에 간행되었던 『노걸대』였기 때문에 고려인이 주인공이었지만, 나라가 바뀌었으니 주인공도 조선 사람으로 된 것이다.
중국어 회화책인 『노걸대』 원문에 두 종류의 한자음을 달고 우리말로 언해한 책이다. 『노걸대언해』는 한자를 모르는 사람도 쉽게 중국어를 배울 수 있게 한글로 해설한 책으로, 요즈음으로 치면 원문과 번역문을 함께 적은 번역서라고 볼 수 있다.
『몽어노걸대(蒙語老乞大)』는 몽고어로 『노걸대』의 내용을 싣고 우리말로 그 음을 달아 풀이를 해 놓은 책이다.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는 이미 멸망했지만 언젠가 몽고어가 필요한 시기가 올 것으로 판단하고 몽고어 학습에도 신경을 썼던 조선후기의 시대분위기를 읽을 수 있는 책이다.
2007년 5월 몽고대통령 부부가 규장각을 방문하였다. 방문 목적은 바로 『몽어노걸대(蒙語老乞大)』를 보기 위함이었다. 몽고어 학습에 기울였던 선조들의 열정이 현대 한국과 몽고의 우호 협력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통사가 역관의 직책인 만큼 ‘박 씨 성을 가진 역관’이라는 뜻이다. 『박통사』의 내용은 106개의 절로 이루어져 있는데, 『노걸대』가 상인의 무역활동을 주제로 하고 있는 ‘비즈니스 회화’에 가깝다면, 『박통사』는 중국의 일상생활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둘째는 고려에 간다는 중국 사신과 나누는 대화, 셋째는 장마에 무너진 담을 쌓기 위하여 담을 쌓는 사람과 흥정하는 내용 등을 비롯하여, 전당포에서 돈을 빌리는 상황, 공중목욕탕의 요금과 때밀이, 차용증 쓰기 등에 이르기까지 중국 생활에서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내용들이 망라되어 있다.
특히 『박통사』는 『노걸대』 보다 고급 단계의 언어를 반영하고 있어서, 중국어와 우리말의 생생한 모습과 함께 풍속 및 문물제도까지 접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노걸대언해』와 함께 당시 중국어가 보급된 양상을 볼 수 있다. 이들 언해본 학습 교재는 우리나라 중세 국어의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된다.
조선 초기에는 일본을 이적(夷狄)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실용적인 차원에서 일본에 대한 적극적인 정보 수집을 바탕으로 일본의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조선시대 외국어 전담 관청인 사역원에서는 일본어 역관들을 교육하기 위해 간행한 일본어 학습용 교재인 『첩해신어(捷解新語)』를 간행하였다. 그런데 『첩해신어』의 초고를 쓴 강우성(康遇聖)의 경력이 재미가 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일본에 잡혀갔다 돌아온 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1618년(광해군 10)경에 이 책의 초고를 완성하였고, 숙종 때인 1676년에 『첩해신어』를 널리 간행하였다.
처음에는 한학(漢學)과 몽학(蒙學)만 개설되었다가 나중에 왜학(倭學)이 개설되었기 때문에 일본어를 ‘신어(新語)’ 또는 ‘신학(新學)’이라 부르게 되었다.
『첩해신어』라는 제목은 ‘신어, 즉 일본어를 빨리 해독하는 책’이라는 뜻이다.
『첩해몽어(捷解蒙語)』라는 책도 있는 것을 보면 ‘첩해’가 당시 회화책에 관용구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첩해신어』는 큰 글씨로 일본 문자를 쓴 다음 그 오른쪽에는 한글로 발음을 적고, 왼쪽에는 우리말로 그 뜻을 기록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조선, 일본을 왕래하는 사람 사이의 대화, 상거래 때의 대화, 조선 사절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의 대화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본어를 외우는 능력을 가장 중시한 것으로 보인다. 영조 때의 역관 현경재라는 사람이 쓴 역과 시험 답안지인 『왜학시권(倭學試券)』을 보면, 『첩해신어』에서 여섯 부분을 정해 외어서 쓰도록 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일본어 능력을 중시했던 면모가 나타난다. | ||||||
부국강병으로 향하는 길을 인도하다.
조선의 역관, 방의남과 홍순언 | ||
특히 사대를 하고 있던 중국어 역관들은 직접 무역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기 때문에 비단, 인삼 등을 거래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거부로 불리는 홍순언, 방의남, 임상옥, 이덕유 등 쟁쟁한 부호들 모두 중국어 역관 출신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하게 부만 축적한 것이 아니라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눈부신 활약을 하는가 하면 당당한 외교관으로 국가의 자존을 지키기도 했다.
경복궁의 근정전과 경회루가 그렇고, 창경궁의 인정전과 대조전을 비롯하여 우리 조선시대의 많은 건축물들이 대부분 잿빛 기와로 되어 있어 고색의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어디 대궐뿐이랴. 조계사, 불국사, 해인사를 비롯한 천년 사찰도 잿빛의 기와로 덮여 있고 전통 한옥의 지붕을 덮은 기와도 잿빛이다.
경복궁의 근정전과 경회루는 처음 건축되었을 때 지붕이 청기와였다. 청기와가 대궐에 쓰였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연산군 때는 인정전과 선정전이, 광해군 때는 영은문의 청기와가 파손되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있다. 창덕궁의 선정전은 지금도 푸른 기와가 남아 있는 건물이다. 선조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도성은 피폐하고 대궐이 온통 불에 탔다. 선조는 병을 자주 앓아 왜적이 물러간 뒤에 불에 탄 대궐을 중건하지 않았으나, 광해군은 즉위하자마자 불탄 대궐의 중건에 나섰다. 이에 많은 와장들이 번와소에서 기와를 굽게 되었다.
광해군은 대궐을 중건하면서 새로운 명을 내렸다. 대신들은 광해군의 명을 받고 깜짝 놀랐다. 황기와는 중국에서도 천자의 대궐에만 사용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황기와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황기와를 굽는 와장이 없었다. 대신들이 일제히 황기와를 굽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대궐의 기와를 황금색으로 바꾸는 것은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다.’
그는 직접 와장들을 찾아다니면서 청기와와 황기와를 굽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결국 고려시대에 청기와를 구워 사용했던 기술을 찾아내 본격적인 청기와 생산에 들어갔다. 그러나 황기와가 문제였다. 청기와를 구워 창경궁의 전각 지붕 몇 개를 청기와로 덮었으나, 인정전 등은 황기와로 덮으라는 것이 광해군의 영이었다.
황기와의 생명은 기와를 굽는 점토에 어떻게 황금색을 입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중국의 와공들은 조선에서 온 그에게 황기와 굽는 기술을 가르쳐주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중국인으로 변장해 황기와를 굽는 남경의 제와소까지 찾아갔다. 그는 제와공으로 위장한 후, 채색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이국 땅에서 오랜 시간을 고군분투했다. 여섯 달 후 조선으로 돌아온 방의남은 제와장을 동원하여 황기와를 굽기 시작했다. 그러나 흙이 달랐기 때문에 중국에서 배워 온 기술은 사용할 수 없었다.
방의남은 점토의 철광석과 섞여 영롱한 황금색을 내는 안료를 연구했고, 마침내 황금색 기와를 생산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방의남이 만든 황기와는 대궐의 지붕에 사용될 수 없었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축출 당하자 조정은 천자의 대궐에만 사용하는 황기와를 대궐에 사용할 수 없다고 중지시켰던 것이다. 황기와 제조는 폐지되었다. 광해군 이후 황기와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볼 수 없다. 황기와 제조 기술은 방의남 이후 맥이 끊어졌고 대궐에도 사용되지 않았다. 이때 대궐의 기와를 황금색으로 바꾸었다면 청와대는 황와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루한 대신들은 끝내 민족의 자존을 지키지 못했다.
모두 그가 통역하여 국가가 위기에 빠졌을 때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가 더욱 유명한 것은 명나라에서 5만 명의 구원병을 조선에 파견하게 만든 인물이기 때문이다. 『청구야담』의 기록에 의하면, 홍순언이 한 번은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이르러 연경의 번화가를 구경하게 되었다. 그런데 한 기루 앞에 여자의 그림이 붙어 있고 하룻밤을 같이 지내는데 은자 1천 냥이라고 씌어 있었다.
“저의 부친이 억울하게 나라에 죄를 지어, 은자 1천 냥이 있어야 구명이 됩니다. 부친을 살리기 위해 저를 팔 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이 여인의 언행을 보니 장차 귀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어찌 하룻밤의 즐거움을 위하여 청백지신을 더럽히겠는가?’ 결국 그는 낭자에게 준 은자 1천 냥 덕분에 상단으로부터 많은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1천 냥 중에는 상인들이 맡긴 돈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홍순언은 더욱 열심히 장사를 하여 상인들의 돈을 갚았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져있었다. 조선을 구하기 위해서는 명나라의 도움이 필요했고, 구원 요청을 위해 사신을 파견하게 되었다.
홍순언은 다시 역관의 자격으로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들어갔다. 그가 연경에 이르자, 옛날에 1천 냥을 주었던 기루의 여인이 병부상서 석성의 부인이 되어 그를 반갑게 맞이해주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홍순언이 명나라에 구원병을 청하러 왔다고 전하자,남편인 병부상서에게 말하여 조선에 5만 명의 구원병을 보내게 해주었다. 조선은 명나라에 온 5만 명의 구원병 덕분에 평양을 탈환하고 일본군을 격퇴했다. 홍순언은 병부상서 내외로부터 많은 재물을 받고 귀국하여 큰 부자가 되었다. 홍순언은 임진왜란 때에 많은 공을 세웠기 때문에 역관들 중에 가장 많은 야사가 남아 있으며, 현재에도 역관을 넘어 유능한 외교관으로 평가받고 있다. - 월간문화재사랑 2008-05-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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