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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보던, 예전 장날

Gijuzzang Dream 2008. 5. 3. 10:51

 

  

 

 

 

 세상살이를 장 보던 예전 장날

 


예전에 “장에 간다”는 말은 요즘 대형할인점인 “마트에 간다”와는 다르다.

이동 기회가 거의 없던 농경사회의 농민에게 장날은

단순히 ‘장 보는’ 날만이 아니라 근동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놀이판이자 잔치판이었다.

 

 


“장이 서면 길거리에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장시가 처음 생긴 것은 흉년 때문이었다.

<성종실록>에 있는 신숙주의 상소에 의하면,

성종 원년(1470) 흉년이 들자 전라도 백성들이 모여 시포(市鋪)를 열고

가지고 있는 물건을 사고팔아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조선정부도 흉작이 들 때 국민을 구제하는 일환으로 장시를 인정하기도 했지만,

당시 정부의 장시에 대한 시각은 부정적이어서

농사에 힘쓸 농민이 장시에서 이익을 찾는다거나, 도둑의 소굴이 된다는 등

장시 혁파의 목소리가 컸다.

하지만 갈수록 사회적 생산력이 발달하면서 잉여생산물을 교환하는 시장의 기능이 활발해지고,

장시에서 나오는 세금이 재정에 큰 도움이 되어가자

18세기에 들면 장시에 대해 긍정적 입장이 되어갔다.


18세기 중반 성호 이익은 시골 장시를 돌아보고서는

“촌에서 사람들이 모두 돈 꾸러미를 차고 나갔다가 취하여서 붙들고 돌아온다”고 기록했고,

 

1800년대 초 실학자 우하영이 <천일록>에

“장이 서면 길거리에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고 했다.

 
한말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의 눈에도 장날은 실학자들의 기록과 다를 바 없었다.

이사벨 비숍은 “장날이 되면, 언제나 권태롭고 단조로운 모습을 보이던 한국의 마을들은

온통 활기와 윤기를 띠게 되고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로 야단스럽다”고

장날의 마을 분위기를 적고 있고,

캠벨은 “시장으로 가는 길은 장을 보러 가는 사람들의 즐거운 목소리로 활기를 띠었다.

부녀자들은 머리에 참외, 배 등의 과일을 담은 도기나 바구니를 이고 가고 있었다.

윗도리를 벗어 제쳐 반나체가 된 지게꾼은 내리 누르는 무거운 짐 때문에 허리를 굽힌 채

장독과 나무그릇을 진 지게를 지고 가고 있었다”고 장에 나서는 사람들을 그렸다.

 


눈요기꺼리가 그득한 옛 시골장터 풍경

장으로 가는 길에 줄 잇는 사람 중에는

“남이 장에 간다고 거름지고 나선다”는 생각 없는 사람도 있었고,

“남이 장에 간다니 씨오쟁이 짊어지고 따라간다”는 사람도 있었다.

 

짚을 엮어 만든 씨오쟁이는

다음해에 뿌릴 씨앗을 담아두는 그릇이어서 농사꾼에게는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것이다.

평소에 남 따라 나설 일이 없는 농민이 생각 없이,

아끼는 씨오쟁이라도 들고 장에 갈만큼

장날은 농민이 함께 어우러지는 날이었고,

속담은 이 같은 농민생활을 반영한 것이었다.


장터에 열리는 가게는

소를 파는 쇠전, 닭전, 곡물전, 옹기전, 포목전, 종이전, 어물전, 과일전, 유기전, 철물전, 가마전, 자리전, 갓전, 신전, 소쿠리전, 채소전, 약전 등의 좌판이 나름대로 구역을 정해 자리 잡고 있었다.

 

장날에 나오는 상품은 인근 고을 농민들이 가져오는 것도 많지만,

전문적으로 장터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행상도 있었다.

 

보부상이 이들이다.

봇짐장수와 등짐장수를 합한 말인 보부상은

농민, 어민, 장인들과 소비자 사이에서 물건을 중개하고

상설점포가 거의 없던 지방 장시에서 상품 유통의 주도적 역할을 했다.

물론 이들 외에도 장터에 일없이 나온 맥장꾼,

철 지나 헐고 싼 물건을 주로 파는 마병장수, 뱀 잡아 파는 땅꾼,

고기꾸미를 이고 팔러 다니는 꾸미장수,

관아의 허락을 받지 않고 금지된 물건을 몰래 파는 잠상,

만병통치약을 판다면서 장꾼을 유혹하는 약장수,

사주보는 점쟁이들도 어울려 장터는 마냥 북적대고 눈요기꺼리가 많은 공간이었다.

장터는 놀이판이기도 했다.

씨름이나 윷놀이가 벌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국밥에 막걸리 먹고 얼큰해진 장꾼들의 화답 소리에 맞춰

사당패들이 줄타기를 하고 재주를 넘었다.

 

장터를 이용해 정부의 정책이 백성에게 전달되고 형벌이 집행되기도 했다.

장꾼에 묻혀온 대처 소식이나 근동의 대소사에 울고 웃던 농민들은 날이 저물기 시작하면

막걸리 한 잔에 얼큰해져서 “볼 장 다 보고” 다음 장을 기약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장꾼들이 묻혀 온 세상 소식은 마을로 돌아가 그대로 민심의 일부가 되었다.

예전 조상들의 장날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날만이 아니라

근동 사람들과 함께 세상살이를 ‘장 보는’ 날이었던 것이다.
- 하원호 동국대 연구교수

- 사진 / 하원호, 남정우

-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2008-05-01

 

 

 

 

 

 

 

 장날 풍경  


요즘이야 시골 장날에도 별로 사람이 모이지 않는 세상이 되어 버렸지만,

예전 장날은 근동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놀이판이자 잔치판이었고,

얼큰해진 장꾼들의 싸움판이었고,

아버지 손에 이끌린 딸아이가 하얀 고무신을 사 신는 날이었고,

장꾼들 인편에 묻혀온 대처소식이나 이웃동네 대소사에 울고 웃는 날이기도 했고,

쌀팔아 돈사는 날이기도 했고, 가끔 떼도둑 만나 장본 돈 털리는 날이기도 했다.

 

고은의 시 구절처럼 밀양 장날 섬뜩섬뜩 병신춤에 술이 깨어버리고,

공주 장날 파장 때 두 남정네가 멱살잡이로 씩씩거리기도 하고,

봉산 장날 처녀들이 나서서 봉산탈춤을 추고,

혜산 장날 멧돼지고기 한 점 하고 감자국수 한 그릇 먹고

압록강 건너 살러간 동생 이름을 부르는 날이기도 했다.(「장날」)

 

지금처럼 사람이 일상적으로 모이고 헤어지는 세상이 오기 전에는

시골장날이야말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세상살이가 하나로 어우러지던 날이었다.

 

김홍도의 <장터길>

 

장시가 처음 생긴 것은 흉년 때문이었다.

<성종실록>에 있는 신숙주의 상소에 의하면 성종 원년(1470) 흉년이 들자

전라도 백성들이 모여 시포(市鋪)를 열고 사고팔아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억상정책을 쓰던 조선정부도 흉작이 들 때 궁민을 구제하는 진휼정책의 일환으로

장시를 인정하기도 했지만, 정부의 장시에 대한 시각은 부정적이어서

농사에 힘쓸 농민이 장시에서 이익을 찾는다거나, 무뢰배가 늘어나고, 도둑의 소굴이 된다는 등

장시 혁파의 목소리가 컸다.

하지만 갈수록 사회적 생산력이 발달하면서

농민의 잉여생산물을 교환하는 시장으로서의 기능이 활발해지고,

장시에서 나오는 세금이 정부의 재정에 큰 도움이 되어가자

18세기에 들면 장시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긍정적 입장이 되어갔다.

1770년 <동국문헌비고>에 기재된 1,062개의 장시는 시대에 따라 없어지거나

새로 생기기도 하지만, 1908년 <증보문헌비고>에 1,075개의 장시가 보이듯이

18세기 이후 1,000개 이상이 개설되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장시에는 소를 파는 쇠전, 닭전, 곡물전, 옹기전, 포목전, 지전(紙廛), 어물전, 과일전,

유기전, 철물전, 가마전, 자리전, 갓전, 신전, 소쿠리전, 채소전, 약전 등의 좌판이

나름대로 구역을 정해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좌판을 제대로 잡지 못한 산골 할머니가 캐내 온 산나물도 좌판의 틈새에서 눈칫밥을 보며

양지쪽에 조그맣게 펼쳐져 있기도 했다.

이 중에 쇠전은 소의 덩치만큼이나 장터에서도 큰 구역을 차지해

고액의 현금이 오가는 곳이었고, 여자들은 접근할 수 없는 남성 경제권의 상징이었다.

사진의 소시장 사진에도 여자를 찾을 수 없다.  

전주의 소시장

 

장날에 나오는 상품은 인근 고을 농민들이 가져오는 것도 많지만,

전문적으로 장터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행상도 있었다.

이들을 장돌림, 장돌뱅이, 봇짐장수, 등짐장수 등으로 불렀는데 보부상이 이들이다.

봇짐장수와 등짐장수를 합한 말인 보부상은 농민, 어민, 장인들과 소비자 사이에서

물건을 중개하고 상설점포가 거의 없던 지방 장시에서 상품 유통의 주도적 역할을 했다 .

 

장터는 놀이판이기도 했다. 씨름이나 윷놀이가 벌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국밥에 막걸리 먹고 얼큰해진 장꾼들의 화답 소리에 맞춰

사당패들이 줄타기를 하고 재주를 넘었다.

황해도의 경우 거의 모든 장시에서 봉산 탈춤을 볼 수 있었다.

또 장터 한 구석 골방에는 소 팔아 돈을 산 농민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투전꾼들이 자리 잡고

투전판을 벌이기도 했다. 투전은 두꺼운 종이로 작은 손가락 너비만하게 15cm쯤 되도록 만들어

그 한 면에 인물, 새, 짐승, 벌레, 물고기 등의 그림이나 글귀를 적어 끗수를 표시하고

기름으로 절인 것인데 160장 혹은 80장이 한 벌이지만 40장을 가지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흔히 ‘잡기’에 능하다는 것은 원래 이 투전이나 나무에 짐승뼈를 붙여 만든 골패로 노는 도박을

잘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장날의 투전꾼은 지배층의 입장에서는 생업에 힘쓰지 않는 무뢰배가 되었지만,

민중에게는 유희를 제공하는 자이기도 했다.

 

장터를 이용해 정부의 정책이 백성에게 전달되기도 했다.

왕이 민심을 회유하려고 내는 윤음(倫音)이나 조정이나 지방수령의 시책도

주로 이 장터 한 구석에 방을 붙여 전달되거나 관아에서 나온 사람이 직접 읽었다.

뿐만 아니라 범죄자의 징계도 이 장터를 통해 이루어지기도 했다.

홍경래의 난에 연루되어 처벌을 받은 인물 중 일부는 장시에서 교수형에 처해지고

잘려진 목은 장대에 매달려 한동안 장터 가운데 서있었다.

한말의 을미개혁때는 상투를 자르게 하고 흰 옷을 입지 못하게 했지만,

잘 지켜지지 않자 장날에 순검이 가위와 먹물통을 손에 들고,

장꾼들의 상투를 자르고 먹물을 뿌려 대기도 했다.

 

물론 장날을 지배층만 이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1801년 늦은 가을날 경상도 하동의 두치장에는 장터 한가운데 꽂혀 있는 대나무 장대에

종이끈으로 꿰뚫어져 매달려 있는 한자 남짓한 흰 명주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져 있었다.

문무의 재예가 있어도 권세가 없어 실업한 자는 나의 부름에 응하고, 나의 창의(倡義)에 따르라.

정승이 될만한 자는 정승을 시킬 것이고, 장수가 될만한 자는 장수를 시킬 것이며,

가난한 자는 풍족하게 해주고, 두려워하는 자는 숨겨 준다


이렇게 매달아 놓은 대자보를 괘서(掛書)라고 하는데

조선후기에 사회적 불만을 가진 세력들이

시장이나 포구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길목에 내거는 경우가 많았다.

 

장터는 어느 장소보다 사람이 많이 모이던 곳이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만큼 온갖 정보가 오가던 곳이다.

장꾼들은 자신의 정보를 장날에 만난 사람에게 전하고,

장에서 얻은 정보는 다시 마을로 돌아가 민심의 일부가 된다.

두치장의 괘서 사건도 몰락한 양반들이 그 내용을 자기 고을의 농민들에게 입으로 옮겨

민심이 동요하는 바람에 한동안 조정에서도 이 문제로 크게 논란이 일었다.

 

김구의 <백범일지>에는

화적 패거리들이 대회를 벌일 때 절간이나 장터를 집회장소로 삼는다고 한다.

그들은 대회에 참가할 때 양반으로, 장돌림으로, 중이나 상제로 가장을 해 모여들었다.

하동장 습격때는 장례를 가장해 무기를 관에 넣어 상여에 싣고

도둑들은 상제나 상여꾼, 화장객이 되어 장날 백주에 들어 왔다고 한다.

김구에게 이 이야기를 전한 김진사란 인물은 청단장을 치고 곡성읍으로 들어가

탐학 때문에 원성이 높던 곡성군수를 죽이기도 했다.

 

장꾼들이 들고 오는 세상 소식은 장터를 저항의 장소로 만들었다.

1910년 1월 평안남도 순천에서 장시세 징수에 반대한 대규모 시위에 뿌려진 격문에는

통감을 지낸 일본인과 을사오적과 친일파를 평양민단 100만인의 이름으로

죽일 것을 결의하고 있었다.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터진 이후 전국적으로 독립을 바라는 시위가 일어났는데

대부분 장날을 이용해 이루어졌다.

  

  거리는 장날이다.

  장날 거리에 영감들이 지나간다.

............

영감들은 유리창 같은 눈을 번득거리며

투박한 북관(北關)말을 떠들어 대며

쇠리쇠리한 저녁해 속에

사나운 짐승같이들 사라졌다. (백석 「석양」)


장터는 세상살이에 힘든 민중이 저항하던 장소이기도 했지만,

시위가 일상적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사나운 짐승들처럼 세상에 불만이 있어도

휘적휘적 소매 자락 흔들며 볼 장 다 보고 돌아가는 장꾼의 등에 힘든 세상살이의 저녁 해가

쇠리쇠리하게 걸려 있는 것을 식민지 시대 시인 백석의 눈에는 보였던 것이다.

 

지금은 시골 장날을 관광 상품으로 만드는 시대이다.

예전 장날은 이미 나이 든 세대의 기억 속에 빛바랜 사진으로 남아 있을 뿐이지만,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던 옛 세상살이를 이해하려면

장날 풍경에서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필진 : 하원호 | 등록일 : 2004-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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