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살이를 장 보던 예전 장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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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 기회가 거의 없던 농경사회의 농민에게 장날은 단순히 ‘장 보는’ 날만이 아니라 근동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놀이판이자 잔치판이었다.
<성종실록>에 있는 신숙주의 상소에 의하면, 성종 원년(1470) 흉년이 들자 전라도 백성들이 모여 시포(市鋪)를 열고 가지고 있는 물건을 사고팔아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조선정부도 흉작이 들 때 국민을 구제하는 일환으로 장시를 인정하기도 했지만, 당시 정부의 장시에 대한 시각은 부정적이어서 농사에 힘쓸 농민이 장시에서 이익을 찾는다거나, 도둑의 소굴이 된다는 등 장시 혁파의 목소리가 컸다. 하지만 갈수록 사회적 생산력이 발달하면서 잉여생산물을 교환하는 시장의 기능이 활발해지고, 장시에서 나오는 세금이 재정에 큰 도움이 되어가자 18세기에 들면 장시에 대해 긍정적 입장이 되어갔다.
“촌에서 사람들이 모두 돈 꾸러미를 차고 나갔다가 취하여서 붙들고 돌아온다”고 기록했고,
1800년대 초 실학자 우하영이 <천일록>에 “장이 서면 길거리에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고 했다. 이사벨 비숍은 “장날이 되면, 언제나 권태롭고 단조로운 모습을 보이던 한국의 마을들은 온통 활기와 윤기를 띠게 되고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로 야단스럽다”고 장날의 마을 분위기를 적고 있고, 캠벨은 “시장으로 가는 길은 장을 보러 가는 사람들의 즐거운 목소리로 활기를 띠었다. 부녀자들은 머리에 참외, 배 등의 과일을 담은 도기나 바구니를 이고 가고 있었다. 윗도리를 벗어 제쳐 반나체가 된 지게꾼은 내리 누르는 무거운 짐 때문에 허리를 굽힌 채 장독과 나무그릇을 진 지게를 지고 가고 있었다”고 장에 나서는 사람들을 그렸다.
장으로 가는 길에 줄 잇는 사람 중에는 “남이 장에 간다고 거름지고 나선다”는 생각 없는 사람도 있었고, “남이 장에 간다니 씨오쟁이 짊어지고 따라간다”는 사람도 있었다.
짚을 엮어 만든 씨오쟁이는 다음해에 뿌릴 씨앗을 담아두는 그릇이어서 농사꾼에게는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것이다. 평소에 남 따라 나설 일이 없는 농민이 생각 없이, 아끼는 씨오쟁이라도 들고 장에 갈만큼 장날은 농민이 함께 어우러지는 날이었고, 속담은 이 같은 농민생활을 반영한 것이었다.
소를 파는 쇠전, 닭전, 곡물전, 옹기전, 포목전, 종이전, 어물전, 과일전, 유기전, 철물전, 가마전, 자리전, 갓전, 신전, 소쿠리전, 채소전, 약전 등의 좌판이 나름대로 구역을 정해 자리 잡고 있었다.
장날에 나오는 상품은 인근 고을 농민들이 가져오는 것도 많지만, 전문적으로 장터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행상도 있었다.
보부상이 이들이다. 봇짐장수와 등짐장수를 합한 말인 보부상은 농민, 어민, 장인들과 소비자 사이에서 물건을 중개하고 상설점포가 거의 없던 지방 장시에서 상품 유통의 주도적 역할을 했다. 물론 이들 외에도 장터에 일없이 나온 맥장꾼, 철 지나 헐고 싼 물건을 주로 파는 마병장수, 뱀 잡아 파는 땅꾼, 고기꾸미를 이고 팔러 다니는 꾸미장수, 관아의 허락을 받지 않고 금지된 물건을 몰래 파는 잠상, 만병통치약을 판다면서 장꾼을 유혹하는 약장수, 사주보는 점쟁이들도 어울려 장터는 마냥 북적대고 눈요기꺼리가 많은 공간이었다. 장터는 놀이판이기도 했다. 씨름이나 윷놀이가 벌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국밥에 막걸리 먹고 얼큰해진 장꾼들의 화답 소리에 맞춰 사당패들이 줄타기를 하고 재주를 넘었다.
장터를 이용해 정부의 정책이 백성에게 전달되고 형벌이 집행되기도 했다. 장꾼에 묻혀온 대처 소식이나 근동의 대소사에 울고 웃던 농민들은 날이 저물기 시작하면 막걸리 한 잔에 얼큰해져서 “볼 장 다 보고” 다음 장을 기약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장꾼들이 묻혀 온 세상 소식은 마을로 돌아가 그대로 민심의 일부가 되었다. 예전 조상들의 장날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날만이 아니라 근동 사람들과 함께 세상살이를 ‘장 보는’ 날이었던 것이다. - 사진 / 하원호, 남정우 -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2008-05-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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