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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금속공예 - 은장(銀匠)

Gijuzzang Dream 2008. 4. 9. 15:18

  

 

 

 은장(銀匠)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쪽머리에 은비녀를 꽂은 할머니들을 쉽게 볼 수 있었고,

지금도 대개의 가정에는 시커멓게 변해버린 은수저 하나쯤은 주방의 서랍에서 찾아낼 수가 있다.

이렇게 은물(銀物)이 우리 생활 속에 있는 것은 고가품이기도 하려니와

육안으로 식별되지 않는 독(毒)을 감별해 낼 수 있는 특성 때문이다.

근래에는 금은방의 진열장속에 셀로판지로 곱게 싸여있는 은주전자나 은찻잔을 대하면

그저 아직도 저런 구식 기물을 쓰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정도로만 여길 것이다.


오랜 세월, 왕실의 식기부터 서민의 정표인 은가락지까지

각종기명과 패물은 온갖 기법으로 다양하게 제작되어 생활 속에 공존해왔다.

 

이런 은기물들은 누가 만들었을까? 바로 은장(銀匠)들이다.


때문에 은장과 은장이 만들어낸 은기물들은

우리나라 전통금속공예를 이끌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은장(銀匠)들은 크게 관장(官匠)과 사장(私匠)으로 나누어지는데

관장은 조선말까지 국가에 예속되어 국가적인 행사와 국신물, 하사품,

왕실의 일상용 등의 용도에 따라 기명(器皿)들과 장신구를 만들었고,

사장은 일반인들이 쓰는 은기나 비녀 · 가락지 · 노리개 같은 장신구들을 만들었다.


백제 무령왕릉 출토 은제팔찌(520년)에 “多利”라는 이름을 남긴 공예사상 최초의 장인이나

“화랑 부례랑이 잃어버린 거문고와 만파식적(萬波息笛)를 가지고 돌아오자,

왕은 50냥의 금은으로 만든 다섯 가지 그릇 두벌을 절에 시주했다”는

통일신라시대의 기록(『三國遺事』卷3,「백률사(栢栗寺)」)에서

우리는 고려 이전에 이미 은장이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그림 1)

그림 1 . 다리작명(多利作銘) 은제팔찌, 백제 520년, 국립공주박물관


 

고려시대 이후에는 좀더 명확하게 관장으로서의 은장이 등장하는데,

장야서(掌冶署)에 지유(指諭) 1명, 행수교위(行首校尉) 2명 모두 3명의 은장이 있었다.

그들의 지위는 녹봉으로 볼 때 지유가 米 十石, 행수교위 2명은 米 七石을 받았으므로

같은 장야서 소속의 동장(銅匠)을 비롯한 다른 금속분야 장인들보다 높았다.

(『고려사』,「백관지」,「식화지」).

 

이 때는 은기가 폭넓게 사용됨에 따라

다양한 성형기법과 표면장식기법으로 각종 은기가 제작되었고,

오늘날 우리는 보스톤미술관 소장 은제주자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도금은제잔탁, 도금은제표형병 등에서

고려 은장이 이룩한 타출기법의 정수를 만나는 것이다.(그림 2)

그림2 . 은제도금잔탁(銀製鍍金盞托), 고려 12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왕조실록』에는 은장에 관련된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은을 채련하는 일부터 은기 제작,

심지어 작업 시 비상(砒霜)을 쓰기 때문에 독살과 관련된 옥사에 연루된 은장들도 종종 보인다.

 

조선시대 초, 은장은 경공장으로 공조에 8명, 상의원에 8명을 두었을 뿐 외공장은 두지 않았다.(『경국대전』,「공조」, <공장>조).

 

조선후기에는 관장체계가 더 세분화되었는지

『경국대전』이나『대전회통』에는 은장이라고만 쓰여 있으나,

실제로『肅宗世子受冊時冊禮都監(숙종세자수책시책례도감)』(1667)을 비롯한

17세기 후반이후의 각종 의궤에 기록된 장인들은 대은장과 소은장으로 분류되어 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

보통 은물은 액체나 음식을 담는 기물과 신체를 장식하는 패물로 대별되는데,

17세기 후반 이후의 대은장과 소은장도 이런 분류를 따라 형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즉 사장은 민수용 은기나 장신구 등을 구별 없이 만들었지만

관장들은 기물의 규모 및 용처에 따라 대공과 세공으로 나누었고,

장인들도 대은장과 소은장으로 구별해 불렀던 것 같다.

 

왜냐하면 병이나 주전자처럼 외형이 크고 둥근 기물을 만들려면

모루쇠인 배알레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대공 기술력을 수반해야 하고,

패물은 규모는 작으나 잔손질이 많이 가고 섬세한 기술을 요하기 때문에

이들은 당연히 전문화 되었을 것이다.

 

수많은 은장들 중에서 18세기 전반에 활동한 상의원 소속 소은장 이만재(李萬載)는

『숙종어용도사도감의궤』(1713)부터『효종가상시호도감의궤』(1740)까지

5개의 의궤에 기록되어 있어 적어도 20여 년간 당대 최고의 은장이었다.

 

19세기에 활동한 대은장 이문택(李文澤)도

『기축 진찬의궤』(1829)부터 철종의 가례행사 기록인『함풍원년 가례도감의궤』(1851)에도

이름이 보여 그 역시 20여년 이상 대공 명장이었다.


관장과 달리 사장은 대공, 세공을 나누지 않고 통칭 은장으로서

개인공방에서 작업해 장에 내다 팔거나

대갓집에서 혼례 같은 행사가 있을 때면 미리 초청되어

그 집에 단기간 기숙하면서 필요한 기물이나 패물을 제작해 주었던 것 같다.

(어우동과 은장의 스캔들에서 확인된다).

 

규모가 큰 은기는 누구나 사용하는 것이 아니지만

비녀나 가락지 같은 패물은 여인들의 끊임없는 수요가 있어 사장들은 주로 세공 일을 했을 것이다.

그림 3 . 은제주자, 1900년 전후, 국립고궁박물관

 

그림 4 . 은제오작노리개, 19세기, 개인


 

조선왕조가 망하자 사장들이 활동했던 종로, 광교천변의 은방도가(銀房都家)가

한때 금 · 은 세공의 중심이 되었었는데 아마 구한말의 관장들도 관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은방도가는 비록 장인이었으나 갓 쓰고 두루마기를 입고서 풀무질이나 줄질을 했다고 하며,

그들에 대한 사회적 예우는 애오개에서 붐질을 하던 놋갓장이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고 한다.


한평생 은장이로 살려면 어릴 적 은방에 입문해

허드렛일이나 풀무질, 작은 손끝만이 할 수 있는 단순한 부속품들을 수년간 만들고서야

어깨 넘어 곁눈으로만 익힌 기술을 비로소 전수받기 시작하고

점차 기예 수준을 높여가며 은장으로 성장한다.

 

그들이 작업하던 은방은 어떻게 생겼을까?

김준근 작『기산풍속화첩(箕山風俗畵帖)』에 그려진 ‘금은마량장이’는

19세기 은방의 환경을 잘 전해주고 있다(그림 5).

 

몸을 틀거나 손을 뻗으면 닿을 만치 주변에 풀무와 화덕, 도가니, 모루대를 배치해놓고

은장은 바닥에 앉아 작업하고 있다.

풀무의 위쪽에는 각종 줄(?)들이 놓여있고

오른 손으로 풀무손잡이를 잡고서 밀고 당겨 바람을 넣어 화도(火度)를 높여

도가니가 올려진 내화벽돌 밑의 화덕을 달구면서

동시에 왼손으로 큰집개로 은덩이를 가열하고 있다.

그들은 평생 이 같은 작은 공간에서 쭈그리고 앉아 불똥을 맞아가며 메질을 하여

격조 높은 은기물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림 5 . 금은장, 19세기말, 김준근, 기산풍속화첩


 

한국 공예사상 최상급 공예품으로서 공예사를 선도해 온 은공예는

각 시대를 거치며 조형적 · 기술적으로 발전해 왔고 그 중심에는 은장이 있었다.
그러나 근대사회를 거치면서 전통 은기물은 수요자체가 적어졌고,

생활방식이 완전히 서구화된 현대에는

간혹 사찰에서 쓰는 다기나 사리구만 주문제작하는 정도여서

전통 은장의 맥은 거의 끊긴 안타까운 실정이다.


무릇 ‘쟁이(匠이)’란

숙련된 솜씨로 성형해가며 기물이 의도대로 완성되었을 때 느끼는 흡족한 마음과

또 그것을 애용하는 사람들을 상상하며 어떠한 까다로운 공정도 혼신으로 매진하기 마련이다.

전통 은장들도 그 사회가 요구한 작품을 만들어낸 예인이며,

작품속에 담긴 예술혼 역시 일반회화 작가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박물관진열장 안의 은공예품을 대할 때 형태만 보는 것보다

그 속에 담겨있는 쟁이의 기예와 당시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느꼈던 美感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해보는 것도 문화재를 보는 바른 눈이라 생각한다.
- 문화재청 인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안귀숙 감정위원
- 문화재청칼럼, 2008-04-07

 

 

 

 

 

- 'one Fine Morning' / Sh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