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신분증’ 부절(符節)
5세기 두 무덤의 유리 관옥 맞춰보니 딱 맞아 …
‘부부’ 간접증거 - 충남 공주 수촌리고분 4호분(男)과 5호분(女)의 유리관옥
최근 신정아씨 가짜 박사 파문 사건이 미술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인터넷이나 국제 통신 수단이 아무리 발달해도, 역으로 그 기술을 이용해 신분을 속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예다.
주민등록증도 없고, 홍채 인식 기술 같은 것도 없던 과거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할 방법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지방관으로 누군가 내려왔다. 한데 그가 중앙에서 파견한 진짜 지방관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런 때 쓰던 것이 부절(符節)이다. 돌이나 금속, 거울 같은 것에 글을 쓴 뒤 깨뜨려 양측이 각각 보관하고 있다가 나중에 맞춰 봄으로써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다. 영어로 부절을 뜻하는 ‘tally’가 있는 것으로 보아, 동서를 막론하고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부절은 이미 2000여 년 전 삼국사기 고구려 유리명왕편에 등장한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의 딸을 임신시켰다. 그러나 주몽은 부여의 왕자들에게 쫓겨 남으로 도망가 고구려를 세웠다. 주몽은 도망치기 전, 예씨 부인에게 “아들을 낳거든 내가 유물을 ‘모가 일곱 개 진 돌’ 위 소나무 밑에 숨겨 두었으니 그것을 찾아 오라”고 했다. 예씨가 낳은 아들 유리는 아버지의 말을 따라 방방곡곡을 뒤졌지만 찾지 못했다. 어느 날 마루 밑 주초석의 모가 일곱 개인 것을 발견했다. 주초석 위에 선 나무 기둥 밑을 뒤지니 부러진 칼 한 조각이 나왔다. 유리는 주몽을 찾아가 맞춰 보았다. 딱 맞았다. 유리는 곧 태자가 됐고, 결국 왕이 됐다.
부절이 발굴된 예는 많지 않다. 발굴되더라도 ‘반쪽’만 나온다. 한 사람이 부절 ‘두 쪽’을 다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부절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1980년 러시아 연해주 니콜라예프카 성터에서 나온 발해 장군의 청동부절도 그런 예이다. 길이 5.6㎝, 최대 너비 1.8㎝, 두께 0.5㎝짜리다. 청동으로 물고기 모양을 만든 뒤 머리에서 꼬리 방향으로 두 개로 정확히 나누고, 나눈 한쪽 면에 ‘좌효위장군 섭리계(左驍衛將軍 ?利計)’라고 장군의 직책과 이름을 새겼다. 나머지 반쪽은 발굴되지 않았다.
그러나 두 개로 나뉜 부절이 각각 발굴돼 기적적으로 합쳐지는 경우도 있다. 2003년 충남역사문화원 문화재센터(센터장 이훈)는 서기 5세기 전반기 무덤인 충남 공주 수촌리고분 4호분과 5호분을 발굴했다. 두 무덤의 시신 머리맡에는 부러진 유리 관옥 한 점씩이 놓여 있었다. 이훈 센터장은 “왜 부러진 관옥을 한 점씩 넣었는지 당시로서는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다.
2년 뒤 발굴조사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유물을 실측하던 직원들은 4호분과 5호분에서 나온 두 관옥의 크기나 모양이 너무나도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부러진 곳을 맞추어 보니, 딱 들어맞았다. 관옥은 전체 길이 5.4㎝, 지름 1.2㎝로, 칼이나 망치 등으로 자르지 않고 손으로 정확히 전체의 절반 크기인 2.7㎝로 뚝 잘라 무덤에 넣은 것이었다.
발굴단은 부부가 평생 소중히 지녔던 부절을 무덤에까지 가지고 간 것으로 보고 있다. 4호분에서는 금동관과 금동신발, 큰 칼이 나오는 등 남성의 무덤이 확실한 반면, 5호분에서는 17점의 장식용 구슬이나 최고급 자기 등이 나온다는 점에서 여성의 무덤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토기나 무덤 축조 양식 등을 통해서 볼 때 4호분에 묻힌 남자가 5호분 주인공보다 10~20년 정도 빨리 묻혔다는 점도 두 사람을 부부로 보는 ‘간접 증거’ 중 하나다. - 2007-7-30, 조선, 문화재야화, 신형준 기자 [송기호 서울대교수(발해사)= 도움말] [이훈 충남역사문화원 문화재센터장= 도움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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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 수록된 고구려 건국신화를 구성하는 이야기 중 하나로 건국시조 고주몽(高朱蒙)의 큰아들인 유리(琉璃)가 아버지를 찾아가서 아들임을 확인하는 기이한 사연이 소개돼 있다. 이에 의하면 유리는 7모서리 주춧돌 아래서 발견한 '단검 1단'(斷劒一段), 즉, 부러진 칼 한쪽을 들고서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을 찾아가니, 주몽이 지니고 있던 나머지 칼 한쪽과 맞추어 보고서 들어맞음을 알고는 마침내 아들로 인정받게 된다.
이와 아주 유사한 사례가 같은 삼국사기 설씨녀(薛氏女) 열전에서도 발견된다. 이에 의하면 율리(栗里)라는 곳에 사는 그녀는 사량부(沙梁部)라는 곳에 사는 소년 정혼자 가실(嘉實)을 6년만에 다시 만난다. 수자리 간 지 6년만에 다시 나타난 가실. 그의 몰골이 형편이 없어 설씨녀는 처음에는 가실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런 그들이 서로를 확인하기 위해 '파경'(破鏡)을 꺼내 들었다. 헤어질 때 두 조각으로 쪼개 각각 나눠 가진 거울은 결합됐다.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은 제후들을 분봉(分封)하면서 '단서철권'(丹書鐵券)을 제후왕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약칭 철권(鐵券)이라 하는 이 물건은 요즘으로 치면 훈장이나 임명장 정도가 되는데 항상 세트였다. 하나는 황실에 보관하고 나머지 하나는 제후가 갖는다. 명칭으로 보아 재료가 철(鐵)이었을 같지만 실제는 옥(玉)이 가장 애용됐다.
쪼갠 칼이나 거울, 세트로 제작된 철권이 모두 부절(符節)이다. 여기서 '절(節)'은 마디라는 뜻이니 끼워 맞춘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부(符)'란 부합(符合)한다는 뜻이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제1장은 "해동(海東)에 여섯 용이 나시어[飛]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 고성(古聖)과 동부(同符)하시니" 인데 여기서 말하는 동부(同符)가 바로 부절이다. 즉, 두 조각으로 깨서 나눠 가진 칼이나 거울, 혹은 세트로 제작한 철권처럼 아귀가 딱 들어맞는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부절로 생각되는 유물이 최근 충남역사문화원(원장 정덕기)이 조사를 완료한 공주 수촌리 고분군에서 확인됐다. 같은 공주 지역 무령왕릉 보다 빠른 5세기 중후반 무렵 축조됐다고 생각되는 수촌리 고분군 중 같은 횡혈식 석실분인 제4호와 5호분에서 각각 조각 형태로 출토된 유리 제(制) 대롱옥(관옥<管玉>)이 그것.
발굴 당시 책임조사연구원이었으며 현재 수촌리 유적 발굴보고서를 준비 중인 문화원 이훈 연구부장은 "이 대롱옥 두 점은 원래 하나였으나 두 개로 부르뜨린 다음에 각각 4-5호분 시신 머리쪽에 부장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이렇게 하나로 결합된 관옥은 전체 길이 5.4㎝에 지름 1.2㎝ 가량이었다. 이 한 점은 중간쯤인 2.7㎝ 가량 되는 지점에서 절단이 나 있었다.
하나의 관옥 조각을 나눠 기진 두 무덤 피장자는 부부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 근거로 이훈 부장은 "4호분에서는 금동관과 금동신발 외에 남성 무덤에서만 대체로 출토되는 환두대도(環頭大刀)가 확인된 반면 5호분에서는 이런 유물들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장식용 구슬이 집중 출토됐다" 는 점을 중시한다.
즉, 4호분이 남편이며 5호분이 그 부인일 가능성이 아주 큰 셈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궁금증은 남는다. 부부가 동시에 사망했다면 그 시점에 관옥을 쪼개 각기 다른 봉분을 만들면서 하나씩 넣어줬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현재까지 연구성과로는 두 무덤은 축조시기가 다르다. 즉, 5호분이 나중에 만들어졌다.
이런 추정이 타당하다면 이들 '부부'는 이미 생전에 변치 않는 사람을 약속하는 의미로 관옥을 쪼개 가지고 있었거나, 아니면, 남편이 먼저 죽는 그 시점에 부인이 장례를 치르면서 관옥을 쪼개 하나는 자기가 갖고 다른 하나는 남편의 시신과 함께 부장했을 것이다.
이런 부절의 전통은 말할 것도 없이 그 원류는 고대 중국에 있다. 중국적인 문화전통이 이미 수촌리 무덤에 짙게 투영됐다는 증거는 다름 아닌 이곳에서 중국제 도자기가 여러 점 출토된 점에서도 간접 확인된다.
이번에 드러난 관옥이 부절임이 확실하다면, 이 수촌리 고분군이 축조되던 그 시점에 한성(漢城, 서울)에 중심을 둔 백제는 일종의 봉건제적 지방통치를 실시하고 있었음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있다. 백제가 공주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제후를 임명했건, 아니면 별도의 관리를 중앙에서 파견했건 상관없이, 이곳을 위임통치하는 관리는 왕에게서 그 위임을 상징하는 부절(符節)을 틀림없이 지니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 2005.6.16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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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차이 남녀 무덤에 반토막씩
두 사람은 죽은 뒤까지도 영원한 사랑을 나누고자 했던 부부였을까? 충남 공주 수촌리고분군(사적 460호). 서기 4~5세기에 축조된 백제 지배층 무덤 5기 중 4, 5호 무덤 두 곳에서 각각 출토된 유리로 만든 관옥(管玉)장식 두 점이 사실은 한 점의 관옥을 부러뜨린 뒤 묻은 것임이 밝혀졌다. 봉분을 따로 쓴 무덤에서 둘의 관계 등을 나타내는 부절(符節: 돌이나 대나무 · 옥 따위를 나눠 각각 보관하며 신표로 삼던 물건)이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충남역사문화원(원장 정덕기)은 2003년 발굴 당시, 4호분과 5호분에서 피장자(被葬者)의 머리맡에 각각 놓인 유리 관옥을 한 점씩 찾았다. 이훈 연구부장은 ‘왜 부러진 관옥을, 그것도 딱 한 점씩만 놓았을까’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단서는 없었다. 최근 문화원의 한 연구원이 발굴 유물을 실측하던 중 두 관옥의 크기나 모양이 너무나도 비슷해서 부러진 곳을 맞추어 보았다. 딱 들어 맞았다. 관옥은 전체 길이 5.4㎝, 지름 1.2㎝로, 칼이나 망치 등으로 자르지 않고 손으로 정확히 전체의 절반 크기인 2.7㎝로 뚝 잘라 무덤에 넣은 것이었다.
무덤에 묻힌 두 사람은 어떤 관계였을까? 이훈 연구부장은 “부부였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본다”고 했다. 우선 4호분에서는 금동관과 금동신발 외에도 둥근 고리 장식이 달린 큰 칼이 출토됐다. 무덤임이 확실하다는 것. 그러나 5호분에서는 금동신발이나 금동관은 물론, 칼 등이 출토되지 않은 대신, 17점의 장식용 구슬이 출토됐다. 여성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출토 유물로 미뤄볼 때 4호분이 5호분보다 10~20년 앞서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무덤에 관옥을 부러뜨려 절반을 넣고 훗날 아내도 자기 무덤에 관옥의 나머지 부분을 부장품으로 넣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
- 2005-6-16 조선일보 신형준 기자
=========================== <참 고> ===================================================
1600년 前 제의 용, 봉황 날아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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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과 봉황 장식은 전북 익산 입점리 백제금동관(5세기 후반),
충남 공주 무령왕릉 둥근고리 큰 칼(6세기 초반),
충남 부여 출토 백제금동대향로(6세기 후반~7세기 전반, 국보 287호)는 물론, 일본 후쿠오카 에다후나야마(江田船山)고분 금동관(6세기 전반·백제가 하사) 등 백제 최고 지배층 유물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
“일본에까지 건너간 백제 용봉(龍鳳)문양의 시원(始原)을
찾은 셈”(이한상 동양대 교수)이다.
금동관은 높이 19㎝다.
발굴 당시 흙과 녹으로 엉겨 붙어 전체 모습을 알 수 없었다.
이훈 센터장은 “관(冠)의 꽃봉오리 모양 장식(=수발)과 테두리 일부가 보였을 때 유물 훼손을 막기 위해 관 주변 흙을 통째로 떠 왔다”며 “현미경으로 유물을 보면서 붓과 외과용 칼(메스)을 이용해 흙과 녹을 조금씩 벗겨냈다”고 했다.
금동관은 8개의 판을 붙여 만들었는데, 용과 봉황 무늬는
금동관 앞 육각형판에 장식됐다.
용은 여의주를 물었으며, 봉황은 날개를 활짝 펴고 있다.
이한상 교수(고고학)는
“4세기 중국 동진(東晋)에서 왕의 관에는 청렴을 상징하는 매미를, 허리띠에는 용과 봉황을 장식했는데,
백제는 중국의 허리띠 장식 무늬를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둥근고리 큰 칼에는 고리 양측에 불을 뿜는 용 두 마리를 은으로 상감(象嵌, 표면에 무늬를 새긴 뒤
금 · 은 등으로 박아 넣는 기법)했다.
용과 봉황이 꿈틀대며, 1600년 세월을 이겨낸 백제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공주 수촌리 4호분 금동관 용과 봉황 장식 세부 사진. 충남역사문화원 문화재센터 제공 |
모두 5기의 무덤으로 이뤄진 공주 수촌리 고분군(群· 4세기 말~5세기 중엽)에서는
금동관 2점, 금동제 신발 3점, 중국제 최고급 자기 등
무덤에 묻힌 이의 권위를 상징하는 위세품(威勢品)이 다수 출토됐다.
이훈 충남 역사문화원 문화재연구부장은
“2003년 공주 수촌리 4호 고분(사적 460호)에서 발굴된 백제 금동관을 보존 처리를 거쳐 복제했다”
고 밝혔다. 보존 처리 결과 출토된 금동관은 높이 19㎝로,
고깔모양에 재료의 면을 도려내 도안을 나타내는 방식인 투조(透彫)로
용(龍)과 덩굴무늬 등을 새겼으며
관 앞뒤로 화초(花草)나 꽃봉오리 모양 장식 가장자리에 눈금을 새겨 세웠다.
이한상 동양대 교수(고고학)는
“수촌리 금동관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한성백제기(서기전 18년~서기 475년) 유일의 금동관”이라며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백제 관(冠)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평했다.
서기 5세기 중반, 한강에 도읍 했던 한성백제가 충남 공주의 최고위 수장(首長)에게 하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금동관이 1500여 년 만에 제 모습을 찾았다.
백제가 동일한 양식의 금동관을 여러 점 만든 뒤
충청권 세력을 정치적으로 편입시킬 때 하사한 것으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고고학계는 제작 방식이나 무늬 등을 볼 때, 이 금동관은
일본 후쿠오카에서 발굴된 에다후나야마(江田船山) 금동관(서기 6세기 초) 제작에도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드러나, 일본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공주 수촌리 금동관(왼쪽)과 일본 에다후나야마 금동관.
고고학계는 제작 방식이나 무늬 등이 일치한다고 지적한다.
충남역사문화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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