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는(문화)

조선시대 도로 / 교통

Gijuzzang Dream 2008. 1. 28. 18:59

 

 

 

 

 

 

 조선시대 교통  

 

 

(1) 주요교통로

 

조선왕조가 개경으로부터 한양에 도읍을 옮기면서

한양을 중심으로 한 교통의 재편성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우선 서울의 교통로는 대로 · 중로 · 소로로 구분되고,

노폭은 영조척(營造尺)으로

대로 56척(약 17m), 중로 26척(약 8m), 소로 11척(약 3.5m), 길옆 도랑 2척(약 0.6m) 이다.

주요교통망은 경복궁과 종묘 · 사직단, 그리고 4대문 · 4소문을 두고, 가로 세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도성내의 도리(道里)의 기준점은 궐문(闕門: 창덕궁 돈화문)으로 하고 있었으며,

각 지방과의 도리 기준점은

4대문인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 흥인문(興仁門: 동대문) 등의 성문을 기준점으로 하였다.

그리고 한양을 중심으로 한 역도의 정비와 함께 전국의 간선을 9대간선 혹은 10대간선으로 재편하였다.

 

제1로는 서울에서 의주를 연결하는 교통로로써

간선도로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교통로이다.

연행로(燕行路) 또는 사행로(使行路)라고도 불린다.

특히 사절들의 숙식 및 연향(宴享)을 감당했기 때문에 서울에서 의주까지에는 관사가 설치되어 있었다.

주요노정은 서울―개성―평양―안주―의주였다.

 

제2로는 서울에서 함경북도 서수라(西水羅)까지 연결하는 교통로이다.

흔히 관북로(關北路)라고 부르기도 했다.

주요노정은 서울―회양―원산―북청―경성―회령―경흥―서수라였다.

 

제3로는 서울에서 동해안의 평해(平海)까지 연결하는 교통로로써 흔히 관동로(關東路)라고도 하며,

그 노정은 서울―원주―진부역―대관령―강릉―울진―평해였다.

 

제4로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연결하는 교통로로써 흔히 좌로 · 중로로 불리기도 한다.

특히, 좌로는 왜사(倭使)의 입경로로서 낙동강과 한강의 내륙수로와 연결이 편리한 교통로이기도 했다.

주요노정은 서울―한강―용인―충주―조령―대구―동래―부산이었다.

 

제5로는 서울과 통영을 잇는 교통로로써 서울에서 문경의 유곡역까지는 노정이 같다.

따라서 이 도로를 중로라 할 수 있다. 주요노정은 서울―상주―성주―현풍―함안―고성―통영이었다.

 

제6로는 서울과 통영을 연결하는 교통로로써 전라도를 경유하여 통영에 이르는 간선인데,

그 노정은 서울―동작나루―과천―천안―공주―전주―운봉―함양―고성―통영이었다.

 

제7로는 서울에서 제주를 연결하는 교통로로써 서울에서 삼례역까지는 제6로와 같다.

따라서 우로에 속하며, 주요 노정은 서울―정읍―나주―해남―…(수로)…제주였다.

 

제8로는 서울에서 충청 수영까지 교통로이다.

우로(제6로)를 따라 진위―소사―평택으로 이어진다.

주요 노정은 서울―신례원―충청수영이었다.

 

제9로는 서울에서 강화를 연결하는 교통로이다.

주요 노정은 서울―양화도―김포―강화였다.

 

이밖에 《대동지지》에서는 10대 간선도로라 하여

서울에서 봉화(奉化)를 연결하는 교통로를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봉화의 동북쪽 태백산에 사고(史庫)가 두어짐에 따라 내왕을 위한 도로 개설로 보인다.

 

 

(2) 교통로의 종류

 

1) 대 · 중 · 소로

도성내의 도로에도 등급을 두고 있듯이 전국 지방도로에도 대 · 중 · 소로의 등급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등급에 따라 노폭이라든지 노면 등의 구조적인 차등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간선으로서의 중요도에 따른 분류라 하겠다.

《경국대전》에 대 · 중 · 소로를 자세히 구분하고 있다.

 

2) 왜사입경로(倭使入京路)

넓은 의미로는 일본의 막부로부터 출발하여 서울까지의 노정을 왜사입경로라고 말할 수 있지만,

좁은 의미로는 왜 사신이

우리나라 남해안의 3포(鹽浦 · 薺浦 · 富山浦)에 도착하여 서울까지 내왕하는 교통로를 말한다.

특히, 왜사(倭使)의 왕환로(往還路)는 육로와 수로를 함께 이용하게 하였는데,

그들의 보안상 문제 때문에 그들의 왕환로라든지 그 일정이 고정되어 있었다.

 

3) 파발로(擺撥路)

파발은 통신망을 위주로 하는 기구로서

변방의 급보(急報)를 효율적으로 전달하려는 목적에서 설치되었다.

파발의 종류에는 기발(騎撥)과 보발(步撥)이 있다.

전자는 말을 타고 달려서 급보를 전달하는 방식이며,

후자는 사람이 빠른 걸음으로 달려서 급보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파발로는 크게 3대간선과 여러 가닥의 지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서울에서 의주를 연결하는 간선을 서발(西撥),

서울에서 함경도 경흥을 연결하는 간선을 북발(北撥),

서울에서 동래를 연결하는 간선을 남발(南撥)이라고 한다.

 

3대간선 중 서발은 기발이기 때문에 대로기발이라고도 하며,

북발 및 남발은 보발이기 때문에 대로보발이라고도 한다.

 

파발을 기능면으로 파악할 때 군사적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파발의 조직을 보면, 기발은 25리, 혹은 20리 또는 30리마다 1참(站)씩을 두고,

발장(撥將) 1인, 색리(色吏) 1인, 군정(軍丁) 5인, 말 1필씩을 배치하였다.

한편, 보발은 30리, 혹 40리 또는 50리마다 1참씩 두었고, 매참에 발장 1인, 군정 2인을 두었다.

 

4) 능행로(陵幸路)

임금의 배릉(拜陵)을 위한 교통로를 가리키지만, 능행만을 위한 도로는 물론 아니다.

한양에서 수원의 현륭원(顯隆園: 뒤에 융건릉)까지가 대표적인 능행로였다.

특히, 능행을 할 때에는 한강에 주교(舟橋)를 설치하기도 하였는데,

이의 가설을 위한 전담부서인 주교사(舟橋司)와 주교 시설의 규정인 주교절목(舟橋節目)이

세세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5) 교역로(交易路)

중국에 대한 무역은 사행에 의한 공식적인 무역(朝貢貿易)과

사행원을 수행한 이들에 의한 비공식적인 사무역(私貿易)이 크게 번영하였다.

이들의 내왕 교통로를 사행로(使行路) 또는 무역로(貿易路)라 부르기도 한다.

 

이들의 노정은 대개 한양에서 의주까지의 길을 거쳐

의주―압록강―구련성(九連城)―책문(柵門)―봉황성(鳳凰城)―연산관(連山館)―요양(遼陽)―심양(瀋陽),

요양―광녕(廣寧)―산해관(山海關)―영평부(永平府)―북경(北京)이었다.

 

해로(海路)로는 조선 초기에 명나라가 난징[南京]에 수도를 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황해도 풍천(豊川)에서 배로 출발하였으나 베이징(북경)으로 천도한 이후로는 육로를 이용하였다.

 

그 후 1621년부터 다시 해로를 이용하게 되었다.

출항지는 평안도 선천부 선사포(宣川府 宣沙浦)였으며,

산둥반도의 딩조우[登州]에 기착하여 육로로 베이징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1627년 이후로는 평안도 증산현 석다산(石多山)에서 출항하여 철산부 가도(鐵山府가島)를 경유,

딩조우에 상륙하는 항로를 취하였다.

 

한편, 왜에의 항해로는 동래부 부산의 영가대(永嘉臺)를 출발하여,

쓰시마―이키섬(壹岐島)―오사카(大阪城)―나고야(名古屋)―에도(江戶)에 이르는 노정인데,

수로로 3,290리, 육로로 1,310리가 된다.

 

 

(3) 노변(路邊) 설비

《경국대전》을 보면,

“외방도로(外方道路)는 매 10리마다 소후(小堠)를, 30리마다 대후(大堠)를 세우고 역을 설치한다.

뒷면에는 잇수(里數)와 지명을 새긴다.”라고 하였다.

결국 후는 장승으로서 일종의 이정표라 할 수 있다.

 

또 옛 제도에서는 대 · 중 · 소로에 각기 원우(院宇)를 설치하여 여행자들이 거쳐 가게 했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경과한 이후(16세기말∼17세기 초)부터는 원우는 모두 폐지되고

점사(店舍)가 많이 생겼다.

 

원(院)의 설치목적은 애당초 공무여행자의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원은 공공적인 시설로서 전국 대 · 중 · 소로에 설치되어 그 기능을 감당하였는데,

대체로 30리 거리에 설치되어 있었다.

 

원은 조선 초기에 이를 정비 보완하여 인근주민 중에서 덕망 있는 사람에게

원주(院主)의 책임을 맡도록 하게하고, 국가는 원주에게 원주전(院主田)을 지급하여

원 운영의 경제적 비용의 충당을 지원하고 있었다.

원이 공무 여행자의 편의 시설인 데 반하여 일반 민간여행자를 위한 시설로는 점사(店舍)가 있었다.

 

 

(4) 교통장애의 극복

육로교통에 있어서 교통의 자연적 장애물로는 산 고갯길과 강 · 하천 그리고 바다가 있다.

따라서 산봉우리와 산봉우리의 허리를 통과하게 되고,

경사가 급한 곳은 때로 잔도(棧島: 사닥다리 돌길)를 가설하여 내왕에 편의를 도모하였다.

 

일반적으로 하천에는 징검다리, 혹은 외나무다리 · 돌다리 등을 설치하여

교통의 저해요인을 극복하려 하였고,

강에는 나룻배를 설치하거나 뜬다리(浮橋 혹은 舟橋)를 가설하여 강을 건너기도 하였다.

 

한편, 화물수송에 있어서는 큰강의 내륙수로와 해상교통로를 주로 이용하게 되었다.

내륙수로에 있어서 주된 장애요인은 수중 암초와 여울이었다.

따라서 그러한 곳을 통과할 때의 안전을 기원하는 화주당(化主堂)이 곳곳에 설치되어

계절에 따라 국가나 지방관 차원에서 안전을 빌기도 했다.

 

옛날의 해상교통의 이용은 시계항해였고, 연안항해로서 밀썰물과 순풍이었다.

때로, 원양항해인 경우에 연안에서의 발착은 밀썰물을 이용하였지만,

한바다 항해에는 주로 바람에 의존하였다.

 

연안교통로는, 크게 3개 노선으로 구분하고 있다.

① 한양의 용산강(龍山江)에서 강화 손돌목을 돌아

충청―전라―경상도의 연해안을 거쳐 동래에 이르는 해로

 

② 한양의 용산강에서 통진―강화의 북쪽 돈대(墩臺)를 돌아

교동(喬桐)―황해―평안도의 연해안을 거쳐 의주에 이르는 해로

 

③ 함경도 서수라를 출발하여 함경도―강원도―경상도의 연해를 따라 동래에 이르는 해로이다.

 

이상의 3대 해로에서 연해안의 포구로 연결됨으로써

예로부터 해상교통의 이용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조창의 소재지는 대개 하삼도(下三道)에 있기 때문에

서울 용산강에서 강화 손돌목을 통과하여 서남해안을 연결하는 해로를 이용하게 되는 셈이다.

 

하삼도의 조창은

전라도 함열의 성당창과 옥구의 군산창,

충청도 아산의 공진창,

경상도 창원의 마산창(좌창) · 진주의 가산창(우창) · 밀양의 삼랑창(후창) 등이었다.

 

 

(5) 교통규정

조선시대 육로교통의 기능을 원활하게 한 것은 역전(驛傳) · 기발(騎撥) · 보발(步撥)의 제도적 정비로써

관원들의 여행과 통신문 전달에 편의를 제공하였다.

 

역로행정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에 480∼537역을 약 40∼44개의 역도로 나누어 관할하게 하였고,

역도의 중요도에 따라 대 · 중 · 소역의 등급이 있어서

역의 종사자와 마필(馬匹)의 숫자도 차등 있게 배설하였다.

 

따라서 각 역도는 10개 내외의 역을 관할하게 되고, 역도의 중심역에 종6품의 찰방 1인을 두고 있었다.

또한, 각 역에는 역장 · 역리(驛吏) · 역졸(驛卒) · 역정(驛丁) · 일수(日守) · 노비(奴婢) · 보인(保人) ·

솔인(率人) 등이 있어서 역무에 종사하였는데, 그 종사자의 수는 역의 등급에 따라 달랐다.

 

한편 조선 초기 각 역에 딸려 있는 마필의 수는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전국 40개 역도 535개역에 5,380필의 말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마필에도 상등마 · 중등마 · 하등마 · 태마 등의 등급이 있었고,

역의 등급에 따라 마필 수 및 등급의 배속이 달랐었다.

역마는 원칙적으로 1일 3식(90리, 1息은 30리)을 여행하도록 규정하였고,

남승 · 남급자라든지, 역마를 반환하지 않는 자는 엄하게 처벌하였다.

 

한편, 역의 운영경비와 종사자들의 급료지급을 위해 각역에는 토지가 지급되었으며,

역마 충당을 위해서는 마전(馬田)이 지급되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검색/ 한국학중앙연구소

 

 

 

 

 

************** 조선시대 도로 원표(道路 元標)

서울과 전국 주요 도시간의 도로상 거리를 표시하는 기준점이다.

 

1914년 도로 원표가 마련될 당시 2개가 제작되어 세종로 사거리의 중앙에 설치되어 있었으나

1935년에 새로 제작되면서 세종로 양편으로 옮겼던 것을

1960년대 세종로의 지하보도 및 도로확장공사를 하면서

지금의 교보빌딩 앞 비전(碑殿 : 고종황제 칭경기념비, 高宗皇帝稱慶紀念碑) 앞쪽으로 옮겨졌다.

이정원표(里程元標)라고 부른다.

 

 

 

 

1997년 12월 29일 설치되어 현재에는 세종로 광화문 사거리인 세종로 파출소 앞으로 변경하였다. 

하지만 교통 방해 등으로 인하여 도로원표를 가까운 곳에 옮겨 놓은 것일 뿐이고,

실제 도시간 거리 측정의 원점은 세종로 광화문 사거리의 중심을 기준으로 한다.

이 광장 중앙의 표석은 도로 원표의 위치를 변경하면서 서울특별시에서 새로 제작 설치한 것이다.

 

 

 

 

 

도로원표 관련법규 / 도로교통법 시행령 제23조 (도로원표)

그 도시의 출발기점의 상징물로서 도로의 노선과 시작점, 종점, 경유지 등을 나타내고

각 도시까지의 거리를 표시해 둔 표석인 이 도로원표는 우리나라의 도로법에 의해 설치 운영되고 있다.

①도로원표는 특별시 · 광역시 · 시 및 군에 각 1개를 설치하여야 한다.
②도로원표는 도청. 시청. 군청 등 행정의 중심지. 교통의 요충지. 역사적 문화적 중심지에 설치한다.
서울특별시에 있어서의 도로원표는 서울특별시장이 이를 설치 · 관리하되,

   그 위치는 세종로광장의 중앙으로 한다.
④광역시 · 시 또는 군에 있어서의 도로원표는 광역시장 · 시장 또는 군수가 설치 · 관리하되,

   그 위치는 광역시장 또는 도지사가 정한다.

도로원표의 크기 · 표기방법 · 설치기준 등은 건설교통부령으로 정한다. 
⑥표기방법
   - 정면(1면) : “도로원표” 표시.
   - 후면(2면) : 주요도시명과 거리표시(도로원표간 거리, 상급도로순, 도서지역은 직선거리로 표시 km)

   - 옆면(3면) : 관리청(시군명칭)
   - 옆면(뒷면) : 설립일자 표시

⑦본래 위치에 설치 할수 없을시 본래 설치장소에 노면에서 직경 50cm의 황동 판설치하고

   표면에“도로원표” “○○시(군)”표시하고 도로원표 측면에 본래위치, 방향, 거리로서 표시한다.
⑧도로원표 재료는 내구성이 있는 석재로 한다. 도로원표의 글자 표기부분은 음각 동판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