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는(문화)

해인사 장경판전의 비밀

Gijuzzang Dream 2008. 1. 18. 23:17

 

 

 佛心을 지키는 장경판전의 비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팔만대장경판

법보사찰인 해인사는 불보사찰인 통도사, 승보사찰인 송광사와 더불어 한국의 3보 사찰로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가야산 자락 해발 1,430m에 자리 잡고 있으며,

해인사가 속한 가야산의 명칭은

인도의 부다가야(budagaya) 근처 가야산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하여 온다.

 

『삼국사기』기록에 의하면

이 절은 신라 애장왕 3년(802)에 창건된 사찰로 알려져 있지만,

팔만대장경판이 보관되어 있어 더욱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다.

 

해인사의 여러 건물 중에서도 가장 상단에 놓여 있는 장경판전은

법보전(法寶殿) · 수다라장(修多羅藏) · 동사간판전(東寺刊板殿) · 서사간판전(西寺刊板殿) 등

4동의 건물이 ㅁ자 형태로 배치되어 있고,

이들 건물에 보관되어 있는 팔만대장경판(8,1258점)은 국보 제32호로 지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역사성과 학술적인 가치가 인정되어

1995년 12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팔만대장경판은 불력으로 몽고를 물리치고자

고려 고종 23년(1236)에 시작되어 고종 38년(1251)에 완성되었는데,

바다에 인접한 강화도가 왜구로부터 자주 위협을 받자

이 경판은 조선 태조 7년(1398)에 선원사에서 해인사로 옮겨지게 되었다.

허나 팔만여 장에 이르는 목판을 어떤 경로를 통해서 무슨 방법으로 이곳까지 옮겨 왔는지는

아직까지도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그러나 이들 경판은 그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여

입지 조건 등 그 원인에 대한 여러 가지 과학적인 분석이 여러 차례 시도되었다.

 


판전 보호를 위한 치밀하고 꼼꼼한 과학성

먼저 입지적인 측면에서 보면 해인사는 우두봉, 두리봉, 깃대봉, 단지봉 등에 둘러싸여 있고

세 개의 계곡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약간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이들 대지 위에 배치된 건물은 대체로 서남향이다.

 

또한 장경판전의 붙박이 살창에 의해 공기의 유통이 적절히 조정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 바 있다.

 

법보전과 수다라장의 정면 아래 창문의 면적은 위의 창문보다 네 배 정도 크고

뒷면은 이와 반대로 위 창문이 아래창문보다 1.5배 크게 계획되어 있는데,

이러한 창문의 크기와 높낮이 배치는 건물 내 기류의 유동을 지속적으로 적절히 유지해준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풍력 환기가 이루어지게 되면서,

목재에 치명적인 손상을 주는 습기를 방지할 수 있는 과학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장경판전의 입지는

태양의 고도, 일조량, 햇볕의 방향도 고려되었다는 연구보고서가 나와 있다.

 

즉 판전은 가야산 자락과는 20도 정도의 경사를,

마주보는 개봉산 자락과는 10도 정도의 경사각을 갖고 있고

주변의 모든 산들과도 완만한 산세를 보이고 있어, 산중에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평지에서 만큼이나 햇볕을 풍부하게 받을 수 있는 위치를 선택하였다.

 

뿐만 아니라 장경판전은 하지 때 태양의 고도가 67.04˚이고

동지 때의 태양고도가 49.46˚인데

이러한 고도에 맞추어 건물 처마길이를 산정함으로써,

건물 내부로 드는 태양광의 양을 조절하였다고 한다.

 

또한 동지의 태양고도를 연장해 보면 중앙열 판가 아래까지 햇빛이 비추게 되어 있는데,

이는 본래 앞쪽에 판가가 없었던 점을 고려해 보면

주변의 자연 환경으로부터 경판을 보호할 수 있는 최상의 계획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같은 태양광의 조절은 온도차에 의한 공기의 대류를 형성하게 된다.

즉 창을 통해 들어오는 태양광이 오전에는 후면의 흙바닥을,

오후에는 전면의 흙바닥을 데움으로써 실내의 공기 순환이 촉진되어

판전(板殿) 내의 공간을 균일한 온도와 습도로 유지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온도차에 의한 공기의 흐름은 국부적으로 발생되어

두 장씩 포개 세워진 좁은 경판 사이의 미세한 틈으로 공기가 유통되는 굴뚝효과를 가져와

온도 · 습도의 조절과 균일화를 촉진시키고 있다.


또한 경판 보존을 위한 배려는 건축 재료적인 측면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판전 내부의 바닥은 주로 사양토이며, 깊이 갈수록 자갈의 양이 많아졌고

각 토층마다 점토가 일정한 비율로 섞여 있으며

바닥의 표토에서는 숯과 횟가루가 발견되어

판전의 시공과정 중 바닥에 숯과 횟가루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바닥 재료의 사용은 여름철에 습기가 많을 때는 수분을 흡수하고

건조기에는 수분을 발산시키는 자연적인 습기 조절 능력을 갖추도록 하였는데,

이는 또한 해충을 막는 데도 효과적인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또한 판가 건물과 목판재로 쓰인 수만 재의 목재가

수분을 흡수할 때에는 열을 발산하여 주위의 대기 온도를 높이고,

반대로 건조되면서 수분을 방출할 때에는 열을 흡수하여

주위의 대기를 냉각시켜 판전 건물 내부에 보관되고

판가는 노출된 건축재와 더불어 습기와 온도를 조절하는 완충(緩衝) 효과를 발휘한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이처럼 해인사 장경판전은

자연채광과 환풍이 어우러지는 입지 선택과 판전을 보호하기 위한

우리 선조들의 치밀하고 꼼꼼한 과학성을 통해

훌륭한 과학 문화유산 중의 하나로 손꼽을 수 있겠다.

- 장헌덕, 문화재청 한국전통문화학교전통건축학과 교수

2007-12-04, 월간문화재사랑

 

 

 

 

 해인사 고려대장경판(高麗大藏經板)과 제 경판(諸 經板)

해인사대장경판(국보 제32호) 및 해인사장경판전(국보 제52호)은

불교 경전이 한자로 새겨져 있는 세계 유일의 목판본으로,

그 내용이 광범위하고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고유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며

초기 목판 제작의 기술을 알려주는 지표로서 매우 소중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고려대장경의 규모와 가치

 

대장경이란 부처의 설법을 모은 것으로

시대에 따라 삼장(三藏) 또는 중경(衆經),

일체경(一切經) 등으로도 불렸던

불교성전(佛敎聖典)의 총칭이다.

 

해인사 고려대장경판은

1232년에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버린

초조대장경을 전쟁을 치르면서 문화재

복원사업으로 다시 만든 대장경판이다.

 

해인사 고려대장경은 해인사에 보관되고 있는 고려시대에 간행된 대장경이란 뜻이다.

판수가 8만여 장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팔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당시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새긴 것이기 때문에

‘고려대장도감판(高麗大藏都監板)’이라고도 한다.

 
해인사 고려대장경판은

지금도 인쇄할 수 있는 1,496종 6,568권의 경전을 한 면에 23행 14자씩 배열하여

앞뒤로 78,280장에 새긴 목판대장경이다.(국보 지정숫자 81,258매는 일제 때 잘못 조사한 숫자임)

이 대장경판은 양쪽에 4cm정도의 마구리를 포함하여

가로 68~78cm, 세로 24cm, 두께 2.8~3.4cm이며, 무게는 약 3.5kg쯤이 된다.

새긴 글자의 크기는 사방 약 1.5cm 정도이다.

각 권의 마지막 장에는 “丁酉歲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雕造” 등으로

간기(刊記)가 표시되어 있어 간행시기와 장소를 알 수 있다.

경판의 판면에는 옻칠이 되어 있고 양끝에는 마구리(손잡이)를 대어

판목의 뒤틀림을 방지하고 보관할 때 판면이 손상되지 않도록 제작되었다.

 


고려대장경 판각연도

 
고려대장경판의 판각은 1233년에서 1248년까지 16년이 걸려 판각한 것이다.

그동안 고려사 고종 38년(1251) 9월 임오조의 기록(고려사 권24)은

임금이 대장판당에 백관을 거느리고 가서 판각 완성에 따른 경축행사를 한 기록인데

이 기록을 근거로 대장경을 1236년에서 1251년 까지 판각했다고 잘못 알려져 왔다.


그러나 대장경의 간기를 조사 정리해

본 결과 <표>에 나타난 바와 같다.

 

몽고 침입으로 불타버린 초조대장경은

당시 백성들의 정신적 지주였기 때문에 

백성들은 육지에 남겨두고 임금과

귀족들만 강화도로 피난을 간

무신정부가 대장경 복원을

뒤로 미룰 수 없었을 것이다.

 

바로 대장경판각을 서둘렀을 것인데, 무엇보다 먼저 판각용 목재가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물량을 조사하는 일이 시급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베어서 판각할 장소로 옮겨와서

삶고 건조시키고 일정한 크기로 다듬어 놓아야 했다.

 

한편으로는 송나라 개보판대장경(971~983)과 고려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1011~1029),

거란판대장경(1031~1054)의 내용을 대교하면서 교정에 교정을 거듭한 뒤에

새길 판하본을 필사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판각할 각수를 뽑아 훈련시키는 등 상당한 준비기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1232년에 초조대장경이 불타버리자

그 다음해인 1233년부터 4년 동안 준비하고

1237년에 첫 판각을 시작하여 1247년까지 판각을 모두 마치고

1248년에 대장목록 1종을 마지막으로 대장경 판각을 완료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1249년에 최우가 죽고 그의 아들 만전(万全)이 환속하여 최항(崔沆)으로 개명하고

정권을 이어 받는 과도기를 거치게 되면서

1251년에야 강화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서

대장경 판각 완료에 따른 축하행사인 경찬회를 거행할 수 있었다.

 


고려대장경 판각장소

 
그동안 대장경판 판각은 최우가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음은 잘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강화 선원사가 당시 무신정권의 최고 권력자인 최우의 원찰(願刹)이라는 이유로

대장경판을 판각한 것으로 잘못 추정했다.

선원사는 1245년에야 완공되었으나 이때 대장경판은 이미 90%이상 판각을 완료했던 시점이다.

선원사는 대장경 판각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강화도에서는 판각을 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대장경 판각은 남해에서 이루어졌다.

 
그 이유는 첫째로 대장경판의 각수를 조사해보면

동일한 각수가 대장도감과 분사대장도감에 함께 나타나고 있으며

그것도 같은 해에 또 같은 경전에 나타나고 있다.

판각장소로서 대장도감과 분사대장도감이 동일한 장소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이러한 각수조사로 대장경판은 남해에서 판각된 것으로 입증된다.

 

둘째는 고려사 열전 등 기록을 보면

최이가 중심이 되어 대장도감의 운영 경비를 거의 반을 부담했고

정안이 그 나머지를 부담하여 대장경판을 새겼다.

 

  

진양군과 하동 남해 일원은

당시 독재 권문세가이던 최우와 그의 처남인 정안의 선대로부터의 식읍지 였다.

사재를 기울여 대장경판을 제작할 수 있는 경제적인 기반이 마련되어 있는 곳이다.  

최우가 1234년에 진양후로 책봉된 것도 대장도감 경영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셋째로는 남해도는 경판의 자재인 산벗나무 후박나무 등이

지리산과 거제도 완도 등 남해안 일대에 자생하고 있었고,

벌채하여 운반하는 데는 섬진강 한려수도로 불리는 바닷길이 있어

대장경판 판각을 위한 물자 조달이 용이할 수 있었던 곳이다.

마지막으로 남해는 강화도와 마찬가지로 섬이기 때문에

몽고의 말발굽에 피해가 없이 작업을 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최우는 자신의 선대로부터 식읍지인 진양 근처 남해에 분사를 세우고

대장경판 판각사업을 시작하였다. 대장도감은 행정조직으로 최우가 전체적으로 주관했고,

분사도감은 처음에는 단순한 판각공장 역할만 하다가

정안이 남해로 내려간 1241년 이후에는 정안이 본격적으로 참여하여 주관하였다.

그리하여 1243년부터 분사도감 간기가 등장하고

부진하였던 대장경판은 1243년부터 1247년까지 전체 3분의 2 이상을 판각하게 되었고,

1248년에는 목록 1종을 끝으로 판각이 모두 완료된다.

 

해인사 고려대장경판의 위치

 
고려대장경은 판각할 당시 수기법사(守其法師) 등에 의해서

초조본과 송본 · 거란본(契丹本)대장경의 내용을 대교하여

오자와 탈자를 바로잡고 선본을 실었다. 그 대교한 내용을 기록하여

『고려국시조대장교정별록(高麗國新雕大藏校正別錄)』(30권)을 남겨 놓고 있다.

그리고 『법원주림(法苑珠林)』등 고려대장경이 아니었더라면

그 명목도 모르고 영원히 멸실되었을 많은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현재 거의 전래되지 않는 북송관판과 거란본의 내용을 살필 수 있는

한역대장경의 원본 역할을 하고 있다.

 
조선조(1392~1910) 태조 4년(1395)에 왜구가 붙잡아 갔던 포로 570명을 송환시킨

일본의 사신 정세(貞世)에게 감사의 표시로 대장경을 하사하였다.

이후 일본에서는 사절을 보낼 때마다 대장경을 요구하여

조선 전기의 일본과의 교류는 고려대장경이 그 중심에 있었다.

일본의 끊임없는 요구로 그동안 찍어낸 고려대장경 판본은

물론 국내에 남아 있던 송, 원판대장경도 일본에 보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일본으로 간 고려대장경은

이미 17세기에 고려대장경이 가장 정확한 대장경으로 널리 알려지게 했고,

17세기 일본의 종존판대장경(宗存版大藏經)을 비롯하여

20세기에 이루어진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

상해의 빈가정사판 대장경(頻伽精舍版大藏經),

최근에 들어와서 중국의 중화대장경(中華大藏經), 대만의 불광대장경(佛光大藏經) 등

아시아 각국의 대장경 제작에 바탕본으로 사용되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대장경으로 명성을 지니고 있다. 



 

 해인사 제 경판(海印寺 諸 經板)

 
해인사에는 대장경판 외에 1098년에서 1958년에 새긴 경판들이

대장경 판전의 판가 위쪽 시렁과 판전 사이에 있는 사간판전에 보관되어 있다.

이 경판들은 수창(壽昌) 4년(1098)의 간기판(刊記板)을 포함한

11~13세기에 간행한 주본, 진본, 정원본 등 3본의 『화엄경』을 비롯하여

『기신론필삭기』 『화엄소』 『기신효소』 『십문화쟁론』 『보살계본지범종요』등

의천 대각국사의 교장(敎藏)판이 있고,

『금강경』『능엄경요해』『금광명경』『보현행원품』『당현시범』『백화도량발원문』

『대각국사문집』『남양선생시집』『화엄경변상도』등 13-14세기에 간행된 고려시대 경판들과,

『사분율산번보궐행사초 상집기』『구사론 송소초』『석문홍각범 임간록』등

조선조 간경도감판 등은 국내에 남아있는 유일한 경판이다.

이외에도 조선시대 강원 교재들을 비롯하여 각종 경전과 『제반문』『운수단』등 의식집,

『오대진언집』『염불보권문』등 한국불교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다. 

- 글, 박상국 문화재위원, 한국문화유산연구원 원장
- 사진 · 눌와 이정진

- 문화재청, 2009-01-09

 

 

 

 

 

 

 

팔만대장경 수호 故 김영환장군에 금관문화훈장 추서 

 

정부는 8월 21일 해인사에서 봉행하는 ‘故 김영환 장군 호국 추모법회’를 계기로

故 김영환 장군에게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인 동시에, 이제는 온 세계인이 지키고 가꾸어야 할

세계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을 6.25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지키는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한 공적을

기리고자 금관문화훈장(1등급)을 추서하기로 했다.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8월 21일 오전 10시30분부터 경남 합천 해인사 탑 마당에서 봉행되는

‘故 김영환 장군 호국 추모법회’에 참석, 정부를 대표하여 훈장을 유족에게 전달할 계획이다.

 

 

 

故 김영환 장군은 6.25 전쟁 당시 지리산과  가야산 일대의 무장공비 토벌 작전으로

해인사 폭격을 지시받은 당시 공군 제1전투비행단 부단장이자 제10전투비행전대장으로 출격했으나,

국보인 팔만대장경의 소실을 막기 위해서, 군인으로서 전쟁에서 공격을 포기하는

목숨을 건 용기 있는 결단을 통해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후세에 남겼다.

 2010-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