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와 호주제 | |
오늘날 호주제 철폐를 포함한 가족법 개정문제로 많은 논란을 빚고 있고 대결양상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이 문제는 오랜 관습으로 이루어져 와서 참으로 그 내용이 복잡하다. 성씨제도와 족보 등 여러 문제들이 얽혀있기 때문이다.
먼저 이 문제와 직접적 관련이 있는 성씨의 형성과정부터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본디 제왕이 귀족 등 지배자들에게 성을 내리는 사성(賜姓)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성을 갖는 풍습이 일어났다. 차츰 귀족과 호족은 물론 하급 벼슬아치나 양민들도 성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고려 말기에는 노비들마저 성을 갖게 되었다. 또 같은 성을 가진 혈족들이 분산되어 살다보니 이를 표시키 위해 씨(본관)가 주어졌다. 같은 이가 성이라도 인천 이씨, 전주 이씨로 구분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구잡이로 씨(氏)를 지정해서는 혼란이 야기되므로 일정한 숫자 이외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안동권씨' 족보
특히 조선 후기 신분제도가 무너질 때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성씨를 갖는 경우가 많았다. 막동이라는 이름을 가진 종이 김가 성을 가지기도 했고, 돌쇠라는 이름을 가진 백정이 이가 성을 갖기도 했다. 처음 시성을 얻은 인물은 시조가 된다. 곧 평산 신씨의 경우 신숭겸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 이 시기 노비들도 3분의 2 이상이 성을 가진 것으로 나타난다. 더욱이 흥선대원군은 종친들의 위세를 드러내기 위해 종친과(宗親科)라는 특수 과거제를 실시하면서 전주 이씨 족보 만들기를 권장했는데 이때 성이 없는 자들의 모성을 묵인했다. 이는 청동기시대부터 형성된 가부장제(家父長制)의 영향 탓이다. 곧 모든 제도에서 남성 위주의 권력이 형성되고 가족관계에서는 남성이 가부장으로 군림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모녀를 제외하고 있다. 모든 규범을 남성에게만 맞추었다. 또 일반 가정의 축문에서도 신위의 당사자인 아버지를 부군(府君)으로 표시하고 있으나 어머니는 유인(孺人, 남성 지위에 따른 내명부 호칭)으로 표시하면서 아버지와는 달리 성씨를 별도로 표시했다. 결코 한번 지정한 성을 바꾸지 못하게 했다. 여성이 시집을 가서도 성을 바꾸지 않았으며 양자를 들일 적에도 같은 성을 가진 부계 혈통만을 고수했다. 한번 성씨를 가진 자는 본인은 물론 그 자녀들까지 결코 성씨를 변경하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이는 엄격한 관습법이었다. 곧 자녀는 어떤 경우든 아버지의 성씨를 따르게 했으며 호적에 부계의 본관을 표시케 하고 동성동본 사이에 혼인을 금지시켰다. 그러므로 성씨는 가부장적 남성 권력의 상징물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어찌나 성을 중요하게 보았던지 “성을 갈 놈”을 가장 나쁜 욕설로 보았고, 자신의 진실을 다짐할 적에는 “성을 갈아도 진짜다”라고 말한다. 족보에는 시조부터 자손들의 간단한 내력을 적었다. 따라서 족보를 들여다보면 종적으로는 윗대, 횡적으로는 일가붙이를 알 수 있었다. 모든 조상과 종족관계의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고려시기에는 조상의 간단한 내력을 적은 가승(家乘)이 많이 만들어졌으나 차츰 일가붙이가 많아져 전체 종족의 내력을 알아볼 수 있는 기록이 필요했던 것이다.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안동권씨 성화보’(1476년)와 ‘문화유씨 가정보’(1565년)를 꼽는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사화가 유리되었다. 이런 시대상황에서 동족의 확인과 거주지 등을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또 조선후기에 들어 신분제도가 문란해질 때 문벌을 확인해야 한다는 의식이 팽배했다. 그리하여 족보를 만드는 풍조가 차츰 만연해졌다. 특히 양반붙이를 자부하는 문벌들이 종족집단을 과시하려 다투어 만들기도 했다. 한 파만을 기록하는 파보 등 여러 이름을 가진 족보가 등장했다. 족보를 만들 때에는 대개 한 세대 단위로 문중에서 보소(譜所)를 차리고 수록 인물의 간단한 내력을 적은 단자(單子)를 받아 작성되었다.
하나의 보기를 들어보자. 조선 말기에 평안도에 살았던 유흥렴이란 사람은 남쪽의 사정을 돌아보기 위해 문화 유씨가 집단마을을 이루고 사는 경상도 하회마을로 찾아갔다. 그는 이곳 유씨들로부터 숙식을 제공받으면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이런 일은 동족들끼리 벌어지는 일반적 현상이었다. 철저하게 부계혈통 위주였다. 하지만 조선 초기에는 아들과 딸을 태어난 순서로 적는다든지, 친손과 외손을 같은 비중으로 기재했다. 다만 적서를 차별하는 국가정책에 따라 적자와 서자를 구별하는 정도였다. 외손을 친손과는 달리 부대로 기재했다. 또 종가를 중심으로 기재하면서 적서를 엄격하게 구분하기도 했다. 정부와 유림사회에서 주자학적 명분론과 신분질서가 강화되면서 남성 위주의 기술을 충실하게 따른 현상이었다. 남녀 차별의 한 전범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먼 조상의 계보나 동족을 자세하게 알 수 없기도 했으나 그 막대한 비용을 마련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족보는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유행하고 발달되었으나 그만큼 폐단도 많았다. |
- 경향, [한국사 바로보기] 2004년 12월 29일 / 2005년 1월 5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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