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는(문화)

익산 왕궁리유적 발굴조사(1989년부터 - 현재)

Gijuzzang Dream 2008. 1. 17. 18:29

 

 

 

 

 

 

 익산 왕궁리유적 (益山 王宮里遺蹟)

 

 

 

- 조사기간 : 1989년부터 - 현재까지

 

 

익산 왕궁리유적(사적 제408호, 1998. 9. 11 지정)은 「왕궁평」·「왕검이」·「왕금성」이라고 불리며,

이곳에 고대의 왕궁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되어

학계는 물론 많은 사람들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어 온 곳이다.

 

역사적으로 백제 말기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

이곳이 정치ㆍ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임이 『삼국사기(三國史記)』등의 문헌을 통해 널리 알려져

이 일대가 마한(馬韓)의 기준(箕準) 천도설(遷都說),

백제 제30대 무왕(武王: A.D. 600~641)의 금마천도설(金馬遷都說) 혹은 별도설(別都說),

통일신라시대 안승의 보덕국(報德國) 도읍설(都邑說),

후백제 견훤(甄萱)의 도읍설 등 고대의 왕궁과 관련된 여러 학설이 꾸준히 제기되어 오고있다.

 

이후 1965년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제289호, 1997. 1. 1 지정)의 해체ㆍ복원 당시

탑 내에서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금제금강경판(金製金剛經板)과 유리제사리병(琉璃製舍利甁)ㆍ

금제합(金製盒)ㆍ각종 장엄구(莊嚴具)등이 발견되어 국보 제123호로 지정되었고,

탑 주변에서는 「상부을와(上部乙瓦)」ㆍ「관궁사(官宮寺)」등의 명문기와가 출토되었다.

따라서 이 사지가 왕궁과 관계되는 궁내사원일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유적의 성격에 대한 궁금증을 더해주게 되었다.


익산 왕궁리유적(사적 제408호)은 백제  무왕(武王)대에 조성된 궁성유적으로

남북길이 490여m, 동서너비 240여m에 이르는 장방형 궁궐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백제문화권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지난 1989년부터 현재까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연차 발굴조사를 진행중에 있다.

2003년말까지 15년간 지속적인 조사의 추진으로

전체 면적 120,000㎡ 중 ⅔에 해당되는 지역에 대한 전반적인 발굴조사가 진행중이다.

 

 

그동안의 조사결과,

석축성벽의 규모가 남북 492m, 동서 234m의 대규모의 왕궁 및 사찰 관련시설로 판명되었으며,

성벽과 관련된 문지, 수구, 암거, 포석시설 등의 지하유구와

명문와, 연화문와당, 도가니 등 총 3,000여 점의 중요유물이 출토되었다.

제1차 5개년(1989~1993)에는

오층석탑을 중심으로 연차적으로 이루어져 주변 및 사찰영역 동 · 서 · 남편 일대(약 31,000㎡)에 대한

조사를 통해서 1탑 1금당의 사원구조, 5층석탑의 남 · 북에서 2개의 동 · 서 석축 구조,

5층석탑 서편지역에서 기와요지 2기를 확인하였다.

그 결과 두 시기에 걸친 유구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1989년부터 1993년까지 4개년간 실시한 발굴조사결과를 정리한

왕궁리 발굴조사 중간보고Ⅰ(王宮里 發掘調査 中間報告Ⅰ- 1992년) 에는

오층석탑을 중심축으로 밝혀진 추정 금당지와 강당지를 포함한 것을 중심내용으로 하여

주변의 건물지 및 기와가마터와 일부 조사된 석축단에 대해서 다루었다.

 

제2차 5개년(1994~1998)에는

오층석탑 주변 및 동 · 남 · 북편 성곽 모서리지역(약 20,000㎡)에 대한 조사를 통해서

남북 약 492m, 동서 약 234m의 석축성벽의 규모, 성벽 내·외벽면 하부에서 폭 100cm 가량의 부석시설,

동성벽의 내측에서 고려시대 건물지와 타원형 우물지를 확인하였다.

 

왕궁리 발굴조사 중간보고 Ⅱ(王宮里 發掘調査 中間報告 Ⅱ) - 1997년

왕궁리유적은 1989년부터 발굴을 시작한 이래 오층석탑을 중심으로 한 사찰터와 주변지역을 조사하여

백제시대와 그 이후의 시대를 달리하는 다양한 성격의 유구가 확인되고

시대를 편년해 주는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번 보고서에는 외곽지역에서 확인된 서편과 동남편 성벽, 사찰 관련 후대건물지, 백제시대 석축 등

1996년도까지 조사한 내용들을 정리하여 수록하였다.

각 유구는 교란이 심해 상세한 유구별 시대구분은 어려운 실정이다.

백제 말기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 이어지고 있으나

층위상 선후관계가 어느 정도 구분이 가능하게 해주고 있지만

아직 일반적인 표식유물이 드러나 있지 않아 시대구분을 명확히 하기에는 상당한 한계점을 노출하고 있다.

 

따라서 본 보고서에서는 확인 가능한 유구의 시기적 선후관계에 서술하면서

유적과 유물에 대한 실상을 상세하게 기술하는 한편

가능하면 이들의 관련성이나 시대편년을 유기적으로 서술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제3차 5개년(1999~2003)에는

서성벽 및 서북벽 성내부 일대(약 26,000㎡)에 대한 조사를 통해서

서ㆍ남 성벽에서 문지와 수구, 서북편 일대에서 석축배수로, 암거시설, 석축도수로, 포석 · 포와시설,

공방지(혹은 공방 폐기지)로 추정되는 유구, 소토구, 수레바퀴흔적을 확인하였다.


 

왕궁리유적 발굴중간보고 Ⅲ (王宮里遺蹟 - 發掘中間報告 Ⅲ ) - 2001년

1997∼1999년도에 조사된 

南성벽, 西半部, 東성벽 中間部 및 北端部, 西성벽 南半部, 塔 南便 石築, 東성벽 內側  고려시대 건물지

등에 대한 조사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조사성과는 東 · 西 양 성벽구간에서 성벽시설물인 水口가 각 1기씩 발견, 조사되었으며,

西 성벽에서 발견된 門址 1기는

南 성벽의 門址 2기와 함께 성벽유구 구조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또한 塔 南便 石築과 고려시대 건물지에 대한 조사를 통해

왕궁리유적의 유구간 편년이 네 시기로 구분될 수 있게 되었다.

 

출토유물은 도토류와 기와류가 주류를 이루고 

일부 철제유물과 자기류, 인장와에서는「前部乙瓦」,「官宮寺」, 혹은「刀下」등 일부 명문이

남아 있기도 하였다.

토기 가운데 연통토기는 조선시대에 "연가(煙家)"라 불리던 기와건물의 연통장식의 일종으로 확인되었다.

 

 

왕궁리 발굴중간보고 Ⅳ(益山 王宮里 發掘中間報告 Ⅳ) - 2002년

왕궁리유적의 서북부지역에서 나타난

포석 포와시설, 석축배수로, 소토층 및 수레바퀴자국을 비롯한 성벽 내부시설과

성벽을 구축한 기초시설 및 암거시설에 대한 유구와

소토층에서 출토된 금제품 및 유리제품, 석축배수로에서 출토된 백제시대 유물들에 관하여 수록하였다. 《부록》 1. 익산 왕궁리 출토 금속관련 유물의 금속학적 분석을 통한 유적지의 성격 추정

2. 익산 왕궁리 유적 공방지 출토 유물의 재질분석 연구

3. 익산 왕궁리 유적 수습 목탄 AMS 측정에 대한 결과

 

2004년부터 제4차 5개년 발굴조사계획을 수립하여

그동안 조사가 미진한 서북편 지역과

아직까지 전혀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동북편 능선지역에 대한 전반적인 발굴조사를 진행중에 있다.

2004년(제16차) 조사에서는

2003년도(15차조사)에서 세부적인 조사를 완료하지 못한 서벽 암거,

동서석축배수로 주변 대형화장실 및 생산관련시설에 대한 정밀조사를 실시하여

백제시대 화장실의 규모 및 존재양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확보되었으며,

서북편 일대에 대단위 생산관련시설이 존재하였음을 확인하였다.


왕궁리유적 발굴중간보고Ⅴ(王宮里遺蹟 - 發掘中間報告Ⅴ) - 2006년

2003~2004년도에 걸쳐 서북편 내측지역에 대한 조사 성과를 정리하여 중간보고서를 발간하였다.

특히 이번 보고서에서 주목할 만한 내용은

기존에 왕궁성의 성벽의 축조시기에 대한 확실한 자료를 확보하였다는 점이다.

기존 조사에서 백제말~통일신라시대 2시기에 걸쳐 사용된 석축배수로와 연결되어

아래층에서 백제말에 조성된 서벽 암거가 확인됨으로써

성벽의 축조시기를 백제말(7세기)로 설정할 수 있게 되었다.

둘째로는 서북편 지역에 대한 조사과정에서

내부의 오수를 좁은 수로를 통하여 밖으로 빼내는 오늘날의 정화조와 같은

과학적인 구조의 대형화장실 3기가 동서방향으로 나란하게 발견되었다.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사용할 수 있는 대규모의 공동화장실로

국내에서 최초로 확인된 삼국시대 화장실로 그 의의가 자못 크다.

또한 서북편 소토폐기지에 대한 조사과정에서

유리 및 금속도가니는 물론 금연주 · 금제영락 및 연결고리 · 금소환 · 금구슬류와 함께

금제품의 제작 및 가공과 관련된 반제품이 출토되었다.
분석결과, 유리제품 제작에는 winding기법(유리를 금속막대에 감아 말아 만듬)과

drawing기법(유리를 잡아 늘려 유리관 상태로 만든 후 자름)이 사용되었고,

금제품 제작에는 순금보다는 합금이 주로 사용되었으며,

다양한 주조(鑄造) · 각목(刻目)기법이 사용되었다.

이런 결과는 왕궁성의 서북편 지역에서

왕궁에 필요한 귀중품을 제작하였던 대규모 공방이 존재하였으며,

유리·금제품 제작기술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대형화장실과 관련된 수종(樹種) · 기생충(寄生蟲) · 토양(土壤)분석을 통하여

화장실 목부재로 굴피 · 상수리 · 밤나무가 주로 사용되었으며,

회충(蛔蟲) · 편충란(鞭蟲卵)의 발견으로 화장실의 존재를 확증하였음은 물론

과거에 주로 채식을 하였으며 농사에 사용된 거름으로 인분을 사용하였던 것을 확인하여

과거 식생활의 일면을 규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2005년(제17차) 조사에서는

왕궁리유적내 동벽의 존재양상 및 성격을 밝혀내기 위한 조사를 실시하여

평지에 존재하는 동벽 남반부와 입지조건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 중앙부분을 정밀조사하여

동벽의 축조수법 및 양상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동벽 상부시설물의 존재양상을 밝힐 수 있는 자료가 확인되었다.

 

2006년(제18차) 발굴조사는

동서석축1, 남벽 및 정원 일대와 수레바퀴자국 주변지역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여

궁성내부에서 대형건물지, 담장시설, 회랑, 정원, 가마터가 발견됨으로써

궁성내부의 공간배치, 활용방식에 대한 연구를 통한 왕궁의 운영원리,

더 나아가 그 실체를 규명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부여 쌍북리·금성산 출토 토제 벼루와 비견된만한 백제 벼루, 「官 」명 인장와,

바닥에 「미륵사구(?力寺?)」명문이 새겨진 개배 등 화려한 유물이 출토됨으로써

왕궁리유적의 위상을 짐작하게 할 수 있으며,

삼국~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의 변천양상에 대한 연구는 물론 서체 연구에 대한 귀중한 자료를 확보하였다.

2007년도 실시중인 제19차 발굴조사는

동서석축4 주변의 회랑으로 추정되는 건물지 및 정원 주변지역,

서벽 중앙부 수레바퀴자국 및 서문지 주변지역에 대한 정밀보완발굴조사로

궁성 내부의 정원의 구조 및 활용, 서문지를 중심으로 한 출입 및 통행경로를 추적함으로써

백제 왕궁성의 운영원리를 규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여 줄 것으로 기대된다.

유구가 복잡한 양상으로 나타나서 기존조사지역에 대한 보완조사와 함께

미조사지역에 대한 정밀조사를 실시하여 왕궁리유적에 대한 성격을 규명하고자 한다.

익산 왕궁리유적(항공사진)

 

동벽 전경

 

동서 석축 1 축조상태

 

대형건물지 전경

 

왕궁사명 명문와

 

중국제 청자편

 

연가

 

각종 도가니

 

동서석축4 건물지 27 전경

 

조경석  

 

명문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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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산 왕궁리5층석탑(益山 王宮里 五層石塔) - 국보 289호

 

고려시대 / 전북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산 80

 

 (익산왕궁리5층석탑 - 기주짱사진 추가)

 

마한시대의 도읍지로 알려진 익산 왕궁면에서 남쪽으로 2㎞쯤 떨어진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이다.

1단의 기단(基壇) 위로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부가 파묻혀 있던 것을 1965년 해체하여 수리하면서 원래의 모습이 드러났다.

 

탑의 기단은 네 모서리에 8각으로 깎은 주춧돌을 기둥삼아 놓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길고 큰 네모난 돌을 지그재그로 맞물리게 여러 층 쌓아 올려놓아

목조탑의 형식을 석탑에서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이 팔각기둥과 네모난 돌들 사이는 흙을 다져서 메웠는데

이 속에서 백제시대의 기와조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발굴 중에 기단 각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조각을 새긴 것이 드러났으며,

탑의 1층 지붕돌 가운데와 탑의 중심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1층부터 5층까지 탑신부 몸돌의 네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1층 몸돌에는 다시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 모양을 조각했다.

지붕돌은 얇고 밑은 반듯하나,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위로 치켜 올려져 있으며,

방울을 달았던 구멍이 뚫려 있다.

 

각 층 지붕돌의 윗면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해 다른 돌을 끼워놓았다.

5층 지붕돌 위에는 탑머리장식이 남아 있다.

 

지붕돌이 얇고 넓어 빗물을 받는 낙수면이 평평한 점이나,

탑신부 1층의 지붕돌이 기단보다 넓은 점 등 백제석탑의 양식을 일부 유지하고 있다.

 

그동안 언제 제작되었는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상태였으나

1965년 보수작업 때 기단의 구성양식과 기단 안에서 찾아낸 사리장치의 양식이 밝혀지면서

그 시기가 비교적 뚜렷이 밝혀졌다.

즉, 백제의 옛 영토 안에서 고려시대까지 유행하던 백제계 석탑양식에

신라탑의 형식이 일부 어우러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이 석탑에서 발견된 고려시대의 유물들은 국보 제123호로 일괄지정되어

국립전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최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발굴과정에서

지금의 석탑에 앞서 목탑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이 이 탑 밑부분에서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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