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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3대 악성(樂聖) - 왕산악, 우륵, 박연

Gijuzzang Dream 2008. 1. 17. 16:10
 

 

 

 

우리나라의 3대 악성(樂聖) -  ‘왕산악, 우륵, 박연’

- 음악으로 승화된 애국심

 


‘악성(樂聖)’이라는 말을 생각해 본다. ‘악지성인(樂之聖人)’의 줄임말이다.

음악의 성인이라 이를 만한 뛰어난 음악가라는 뜻이다.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 조선의 박연, 이 세 사람을 우리나라의 3대 악성(樂聖)이라 부른다.

 

언제, 누가 이들에게 ‘악성’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들이 그러한 호칭에 걸맞는 인물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왕산악은 거문고를 만들었고,

우륵은 가실왕이 만든 가야금의 음악을 만들고 지켜냈으며,

박연은 세종 때 음악을 정비하여 조선 전기의 음악을 일정한 수위에 올려놓았다.

세 사람 모두가 시대를 달리하고 태어났지만

음악 분야에 정통한 인물, 프로페셔널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그들이 악성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전문가’라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투철함 때문이었다.


왕산악과 거문고

한 악기가 있다. 그의 나이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천 육백 살 이상이다.

온갖 영욕을 지켜보며 긴 세월을 살아왔지만 악기의 모양이나 소리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온갖 고초를 겪었어도 변치 않는 사람과 같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사람들은 그 악기의 모양이나 소리를 함부로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 악기는 거문고이다.

거문고는 고구려의 왕산악이 만들었다.

당시 고구려의 제 2상 벼슬을 하고 있었던 인물이다.

왕산악이 거문고를 만든 이야기는 『삼국사기』 「악지」에 전한다.

진(晉)나라에서 칠현금을 고구려에 보냈는데,

고구려 사람들은 그것이 악기임은 알았으나 성음(聲音)과 연주법을 알지 못했다.

이에 왕산악이 그 본래 악기 모양은 그대로 두고 제도를 조금 바꾸고 일백여 곡을 만든 후

악기를 연주하자 검은 학이 날아와 춤을 추었다[玄鶴來舞]고 해서 ‘현학금(玄鶴琴)’이라 했다가

나중에 ‘현금(玄琴)’이라고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삼국사기』의 이와 같은 기록은 진위 여부에 논란이 있다.

현금, 즉 거문고가 중국 악기를 모방해서 만들었다는 설 때문이다.

검은 학이 날아와 춤을 추어서 ‘거문고’가 되었다는 『삼국사기』의 이야기보다는

고구려를 의미하는 ‘   ’과 ‘고’가 합성하여 ‘고구려의 금’이라는 의미의 거문고가 되었다는 학설에 많은 사람이 수긍하고 있는 현실이다. ‘가야의 금’을 ‘가야금’이라 부르는 맥락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이 역사 기록의 진위를 밝히기 위한 것이 아니므로

명칭에 대한 논란은 더이상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중요한 것은 왕산악의 역할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진나라에서 악기를 보내왔다고 했지만

왕산악이 살던 시기 이전에 이미 우리 땅에는 거문고와 유사한 모양의 ‘고’라는 악기가 있었다.

왕산악은 그 악기를 개량해서 거문고를 만들었다.

 

왕산악이 만든 거문고의 구조와 모양은

현재 중국 길림성 집안현에 있는 통구 무용총 벽화에서 볼 수 있다.

신선인 듯한 이가 사뿐하게 앉아 무릎 위에 악기를 올려놓고,

오른손으로는 방금 현을 내려친 듯, 왼손으로는 날렵하게 괘를 짚고 있는 그림이다.

 

네 줄과 열 네개의 괘로 되어 있는 악기이다.

이후 어느 무렵 거기에 두 줄이 더 얹어져 여섯 줄이 되고,

괘 또한 두 개가 더 추가되어 현재의 거문고 모양으로 발전하였다.

왕산악이 만든 거문고에 고구려인들의 성정이 담겨있다는 사실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고구려인들의 정서에 적합한 악기로 꾸몄을 것임에 분명했기에

거문고에는 왕산악의 고민의 흔적이 묻어 있다.

그가 고구려인의 웅혼한 기상을 그 악기에 담고자 했을까.

광활한 대륙을 누볐던 고구려인들의 기상을 투영시키고자 했을까.

그래서인지 거문고의 소리는 꿋꿋하기 그지없다.

술대로 명주실을 내려칠 때 나는 둔탁한 소리에서는

그 악기를 통해 고구려를 노래하고자 했던 왕산악의 정신이 살아나는 듯하다.

 

이후 거문고는 일본으로도 전해졌다.

‘군후’ 또는 ‘백제금’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통일신라, 고려, 조선을 거쳐 현재까지 거문고는 백악지장(百樂之丈)으로 자리하고 있다.

 


우륵과 가야금

한 나라의 악기가 건강하게 살아남으려면, 그 나라가 온전히 존재하고 있어야 할까.

나라가 존재한 뒤라야 악기가 있는 법이니, 그다지 틀린 명제는 아닐 것이다.

 

가야국의 악사 우륵이 적국 신라의 음악인이 되는 길을 선택한 것은 어지러워진 조국 때문이었다. 사람마다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고 부정부패와 사치, 방탕에 절어 있는 가야인들에게서

우륵은 희망을 찾기 어려웠다.

조국 가야가 사라질 날이 가까왔음을 짐작한 우륵은 가야금도 함께 사라질까 두려웠다.

그가 선택한 길은 가야금을 안고 신라로 투항하는 길이었다.

당시 신라는 진흥왕 때였다.

진흥왕은 신라로 넘어온 우륵을 받아들여 국원, 지금의 충주 땅에 머물게 했다.

충주의 탄금대(시도기념물 제4호_충주시)가 그곳이다.

아울러 신라 청년 세 사람을 제자로 삼도록 보내 주었다. 계고, 법지, 만덕이 그들이다.

우륵은 이들에게 자신이 가야국에서 만든 음악을 모두 가르쳤다.

가야국에 있을 때 가실왕의 요청에 의해 이미 열두 곡을 만들었던 우륵이었다. 

신라의 제자들은 스승에게 열두 곡의 음악을 배웠지만 그 음악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음악이 ‘번거롭고 음란하다[번차음(繁且淫)]’는 이유에서였다.

우륵이 가야국에서 만든 음악 열두 곡은 모두 낙동강 유역의 토속성 짙은 음악이었음에 분명하다.

대부분 당시의 가야지역 이름을 따온 곡 제목만 보아도 그 성격이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결국 신라의 제자들은 열두 곡의 음악을 다섯 곡으로 편곡해 버린다.

제자들의 행동에 우륵은 분노하였지만, 일단 그 음악을 모두 들어 보기로 한다. 한 곡 한 곡 연주하는 가운데 우륵의 분노는 차츰 탄식으로 바뀌어갔다. 적당히 즐겁고 적당히 분위기에 젖을 수 있는 그런 정서의 음악이었다.

우륵은 그 음악을 이렇게 평한다.

“즐거우나 지나치지 않고, 슬프나 비탄에 젖게 하지는 않으니 바르다고 이를 만하다.(樂而不流, 哀而不悲, 可謂正也)”

결국 우륵의 음악을 바탕으로 그의 신라 제자들이 편곡한 음악은 신라의 대악(大樂)이 되어 신라 땅에서 명맥을 잇게 되었다.

우륵이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간 신라 땅에서 가야의 가야금은 긴 수명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후 가야금은 거문고와 함께 통일신라의 삼현삼죽(三絃三竹) 악기의 하나로 자리한다.

 

또 일본 땅으로도 전해져 ‘시라기고또(新羅琴)’라는 이름으로

악기박물관인 정창원(正倉院)에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

그 모양이 현재의 풍류가야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륵이 가야금의 도(道)를 전하고자 나선 길은 위험했지만,

그 결과 그의 가야금은 지금도 여전히 이 땅에서 건강한 호흡을 하며 살아 숨쉬고 있다.

우륵은 자신이 짊어지고 가야 하는 유일한 진실을 믿었다.

그것은 곧 가야금의 생명을 위한 길이었다.  

 


박연과 음악정비

세종 때의 음악이론가 박연은 고려시대에 태어났다.

고려 우왕 4년(1378년)에 태어났으니 한참 사춘기 나이인 열다섯에 조국 고려가 멸망하고 또 하나의 조국 조선이 개창되었다.

조선 태종 5년(1405)에 생원이 되었고, 태종 11년(1411) 그의 나이 서른 넷에 등과(登科)한 이후 집현전 교리, 세자시강원, 관습도감사, 중추원부사 등을 역임하였지만 가장 큰 업적은 음악과 관련된 악학별좌, 악학제조를 맡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악학별좌는 과거에 급제하고, 음악적 역량이 있는 관리가 맡는 것이 최상이었다. 박연이 악학별좌나 악학제조를 역임했던 것도 그의 음악적 재능과 무관하지 않다.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는 새로운 문물을 정비해야 하는 큰 과제를 안고 있었다.

 

박연이 음악적인 부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시기는 세종 때였다. 세종은 조선의 어느 왕에 비해 음악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세종이 박연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음악과 관련된 주요 업적이 박연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박연의 여러 음악 업적 가운데 편경을 제작한 일은 매우 중요하다. 당시 조선에 있는 편경 대부분은 심하게 낡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소리를 내지 못했다. 심지어는 기와로 구운 와경(瓦磬)으로 음악을 연주하기도 했다.

와경으로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은 음악을 제대로 연주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왓돌이 좋은 소리를 울릴 수 없는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좋은 경돌을 구하지 못했고,

중국에서 수입해 오는 일도 여의치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현실을 견뎌야 했다.

박연은 때마침 남양에서 양질의 경돌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돌을 채취하여 편경 제작에 들어갔다. 편경의 국산화를 실현하게 된 셈이다.

 

또 박연은 제사를 지낼 때 연주하는 아악과 회례용 아악을 정비하였다. 당시 종묘나 사직, 석전, 선농, 선잠제 등의 제사음악이나 회례악은 정리가 잘 되어 있지 않았다.

이에 박연은 『석전악보』라든지 『의례경전통해』의 「시악」과 같은 전적을 참고하여 음악을 정비하는 과제를 수행했다.

세종 때 박연을 중심으로 정리된 아악은 지금 성균관 대성전에서 매해 봄가을 상정일(上丁日)에 거행되는 문묘제례의 음악을 통해서 여전히 들을 수 있다.

그 음악에 박연의 노고가 고스란히 담겨 있음이 분명하다.

글 : 송지원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사진제공 : 충주시청, 제천시청, 영동군청

게시일 2008-01-14, 월간문화재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