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조상들은 어떻게 새해를 맞이했을까? | ||||||
왕실에서는 새해를 맞이하여 왕이 주관하는 큰 잔치가 벌어졌고, 신하들은 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축문과 함께 특산물들을 바쳤다.
왕은 신하들에게 세화(歲畵)라는 그림을 하사하였고, 새해를 축하하는 시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 또한 민간에서는 세배를 하고, 설빔을 입고 떡국을 먹는 풍습이 유행하였다.
정조 때의 학자 홍경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1819년 김매순이 완성한 「열양세시기(冽陽歲時記) : 한양의 연중행사를 기록한 책」,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득공이 쓴 「경도잡지(京都雜誌)」 등의 책에는 당시의 새해 풍속들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 책들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왕실과 민간에서 맞이한 새해의 모습 속으로 들어가 본다.
각종 의식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새해 첫날 왕실에서 행해지는 가장 큰 공식 행사는 정조(正朝)의식, 요즈음으로 치면 신년 하례식이었다. 정조(正朝, 음력 1월 1일)를 맞아 왕과 문무백관의 신하들이 한데 모여 신년을 축하하는 조하(朝賀) 의식을 행하였다.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중심이 되어 관리들을 인솔해 왕께 새해의 문안을 드리고 새해를 축하하는 전문(箋文)과 표리(表裏: 옷감의 겉과 속)를 올렸다. 특히,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왕 정조는 새해가 되면 농사를 권장하는 교서를 친히 지어 8도의 관찰사에게 내렸다고 한다.
왕은 신하들에게 회례연(會禮宴)을 베풀어 음식과 어주(御酒), 꽃 등을 하사하면서 지난해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이와 함께 왕비전인 중궁전에서도 왕실 여성을 위한 잔치가 따로 베풀어졌다.
이때 홍문관이나 규장각의 제학에게는 운(韻) 자를 내게 하여 오언절구나 칠언율시 등을 짓게 하였다. 당선되는 시는 궁궐 안 전각 기둥이나 문설주에 붙여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새해를 함께 축하하였다.
새해에 쌀, 생선, 소금 등을 하사하였다. 관리로서 80세거나, 백성으로서 90세가 되면 신분의 한 등급을 올려주고, 100세가 되면 한 품계를 올려 주었다. 이렇듯 새해를 맞이한 장수 노인들에게는 특별 배려를 해 준 것이었다.
직일신장(直日神將: 하루의 날을 담당한 신)의 그림을 그려 왕에게 올리고 또 서로 선물하기도 하였는데, 이를 세화(歲畵)라 하였다.
또 황금색 갑옷을 입은 두 장군의 화상을 그려서 왕에게 바치기도 하였다. 이외에 붉은 도포와 까만 사모를 쓴 화상을 그려서 궁궐의 대문에 붙이기도 하였고, 역귀와 악귀를 쫓는 그림이나 귀신의 머리를 그려 문설주에 붙이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각 관청의 아전과 하인들, 군영의 장교와 나졸들은 종이를 접어서 이름을 쓴 명함을 관원이나 선생의 집을 찾아 전해 드렸다. 그러면 그 집에서는 대문 안에 옻칠을 한 쟁반은 놓아두고 그 명함을 받아들였는데, 이를 세함(歲銜)이라 하였다. 세함은 신년에 주고받는 명함이라는 뜻이다.
차례를 지낸 후에는 남녀 아이들 모두 ‘설빔’이라는 새 옷을 갈아입고, 집안 어른들과 나이 많은 친척 어른들을 직접 찾아가 새해 첫 인사를 드렸다. 이때 대접하는 음식을 세찬(歲饌)이라 하였고, 함께 내주는 술은 세주(歲酒)라 하였다. 또한 떡국(탕병, 湯餠)은 조선시대에 새해를 맞이함에 있어 항시 빠지지 않는 음식이었는데, 경도잡지는 이에 대한 기록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멥쌀로 떡을 만들고, 굳어지면 돈처럼 얇게 가로로 썬 다음 물을 붓고 끓이다가 꿩고기, 후추가루 등을 섞었다.”- <경도잡지>
새해에 친구나 젊은 사람을 만나면 올해는 “과거에 합격하시오”, “부디 승진하시오”, “아들을 낳으시오”, “재물을 많이 얻으시오”와 같은 덕담(德談)을 주고받았다.
조선시대 민간에서는 특히 윷점과 오행점이 성행하였다. 오행점은 나무를 장기쪽처럼 만들어 금, 목, 수, 화, 토를 새겨 넣은 다음 나무가 엎어지는 상황을 보고 점괘를 얻었다. 윷점은 지금도 유행하는 윷을 던져 새해의 길흉을 점친 것이었다. 예를 들어 도가 세 번 나오면 ‘어린 아이가 엄마를 만나는 운세’, ‘도·도·개’면 ‘쥐가 창고에 들어가는 운세’ 등이었다.
그런데 요즈음 새해 운세를 보는 책으로 가장 유행하고 있는 「토정비결」에 관한 언급이 「동국세시기」·「열양세시기」·「경도잡지」등에 언급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토정비결」은 빨라야 19세기 후반부터 유행한 것으로 짐작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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