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는(문화)

옛조상의 새해맞이 풍속 - 세화(歲畵)

Gijuzzang Dream 2008. 1. 17. 18:18

 

 

 

 

 

 우리 옛 조상들은 어떻게 새해를 맞이했을까?


지금 우리도 그렇지만, 조선시대는 특히 한 해를 시작하는 새해의 의미가 그 어느 때보다 컸다.

왕실에서는 새해를 맞이하여 왕이 주관하는 큰 잔치가 벌어졌고,

신하들은 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축문과 함께 특산물들을 바쳤다.

 

왕은 신하들에게 세화(歲畵)라는 그림을 하사하였고, 새해를 축하하는 시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

또한 민간에서는 세배를 하고, 설빔을 입고 떡국을 먹는 풍습이 유행하였다.

 

정조 때의 학자 홍경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1819년 김매순이 완성한 「열양세시기(冽陽歲時記) : 한양의 연중행사를 기록한 책」,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득공이 쓴 「경도잡지(京都雜誌)」 등의 책에는

당시의 새해 풍속들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 책들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왕실과 민간에서 맞이한 새해의 모습 속으로 들어가 본다.

 


다채로운 왕실의 새해맞이 풍경들

새해가 되면 조선 왕실도 분주했다.

각종 의식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새해 첫날 왕실에서 행해지는 가장 큰 공식 행사는 정조(正朝)의식,

요즈음으로 치면 신년 하례식이었다.

정조(正朝, 음력 1월 1일)를 맞아 왕과 문무백관의 신하들이 한데 모여 신년을 축하하는 조하(朝賀) 의식을 행하였다.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중심이 되어 관리들을 인솔해

왕께 새해의 문안을 드리고 새해를 축하하는 전문(箋文)과 표리(表裏: 옷감의 겉과 속)를 올렸다.

특히,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왕 정조는 새해가 되면

농사를 권장하는 교서를 친히 지어 8도의 관찰사에게 내렸다고 한다.


지방의 관리들은 축하 전문과 함께 지방의 특산물을 올렸다.

왕은 신하들에게 회례연(會禮宴)을 베풀어 음식과 어주(御酒), 꽃 등을 하사하면서

지난해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이와 함께 왕비전인 중궁전에서도

왕실 여성을 위한 잔치가 따로 베풀어졌다.


승정원에서는 미리 선정한 시종신(侍從臣: 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 승정원,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예문관 소속의 관리)과 당하의 문관들로 하여금 연상시(延祥詩)라는 신년의 시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

이때 홍문관이나 규장각의 제학에게는 운(韻) 자를 내게 하여 오언절구나 칠언율시 등을 짓게 하였다.

당선되는 시는 궁궐 안 전각 기둥이나 문설주에 붙여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새해를 함께 축하하였다.


조정의 관리나 왕실 및 관리의 부인 중에서 70세가 넘는 사람에게는

새해에 쌀, 생선, 소금 등을 하사하였다.

관리로서 80세거나, 백성으로서 90세가 되면 신분의 한 등급을 올려주고,

100세가 되면 한 품계를 올려 주었다.

이렇듯 새해를 맞이한 장수 노인들에게는 특별 배려를 해 준 것이었다.


화원들이 소속된 도화서에서는 수성(壽星: 인간의 장수를 맡고 있다는 신) 및 선녀와

직일신장(直日神將: 하루의 날을 담당한 신)의 그림을 그려 왕에게 올리고 또 서로 선물하기도 하였는데,

이를 세화(歲畵)라 하였다.

 

또 황금색 갑옷을 입은 두 장군의 화상을 그려서 왕에게 바치기도 하였다.

이외에 붉은 도포와 까만 사모를 쓴 화상을 그려서 궁궐의 대문에 붙이기도 하였고,

역귀와 악귀를 쫓는 그림이나 귀신의 머리를 그려 문설주에 붙이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각 관청의 아전과 하인들, 군영의 장교와 나졸들은

종이를 접어서 이름을 쓴 명함을 관원이나 선생의 집을 찾아 전해 드렸다.

그러면 그 집에서는 대문 안에 옻칠을 한 쟁반은 놓아두고 그 명함을 받아들였는데,

이를 세함(歲銜)이라 하였다. 세함은 신년에 주고받는 명함이라는 뜻이다.  

 


소박하지만 정감 있는 민간의 새해맞이 풍속도

백성들은 새해 아침 일찍 제물을 사당에 진설하고, ‘정조다례(正朝茶禮)라는 제사를 지냈다.

차례를 지낸 후에는 남녀 아이들 모두 ‘설빔’이라는 새 옷을 갈아입고,

집안 어른들과 나이 많은 친척 어른들을 직접 찾아가 새해 첫 인사를 드렸다.
이렇게 세배를 드릴 때에는 별식을 먹곤 하였는데,

이때 대접하는 음식을 세찬(歲饌)이라 하였고, 함께 내주는 술은 세주(歲酒)라 하였다.

또한 떡국(탕병, 湯餠)은 조선시대에 새해를 맞이함에 있어 항시 빠지지 않는 음식이었는데,

경도잡지는 이에 대한 기록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멥쌀로 떡을 만들고, 굳어지면 돈처럼 얇게 가로로 썬 다음 물을 붓고 끓이다가

꿩고기, 후추가루 등을 섞었다.”- <경도잡지>

 

새해에 친구나 젊은 사람을 만나면

올해는 “과거에 합격하시오”, “부디 승진하시오”, “아들을 낳으시오”,

“재물을 많이 얻으시오”와 같은 덕담(德談)을 주고받았다.


새해에는 점을 치는 풍습도 유행하여,

조선시대 민간에서는 특히 윷점과 오행점이 성행하였다.

오행점은 나무를 장기쪽처럼 만들어 금, 목, 수, 화, 토를 새겨 넣은 다음

나무가 엎어지는 상황을 보고 점괘를 얻었다.

윷점은 지금도 유행하는 윷을 던져 새해의 길흉을 점친 것이었다.

예를 들어

도가 세 번 나오면 ‘어린 아이가 엄마를 만나는 운세’,

‘도·도·개’면 ‘쥐가 창고에 들어가는 운세’ 등이었다.

 

그런데 요즈음 새해 운세를 보는 책으로 가장 유행하고 있는 「토정비결」에 관한 언급이

「동국세시기」·「열양세시기」·「경도잡지」등에 언급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토정비결」은 빨라야 19세기 후반부터 유행한 것으로 짐작된다.
- 글/사진제공 : 신병주 연구사,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액을 쫓고 복을 바라는 새해맞이 선물, 세화(歲畵)

 

세화(歲畵)는 연말연초라는 한정된 시기에

 ‘벽사진경’이라는 목적에 의해 사용된 기능적인 그림이다.

세시의 벽사진경에 사용되는 그림은

‘문배(門排)’와 ‘세화(歲畵)’ 두 용어로 불리어져 왔는데

일반적으로 별다른 구분 없이 경우에 따라 사용되어 왔으며,

문배에서 길상 등의 기능이 확대되면서

세화로 이어졌다는 의견도 있다.

 

설날에는 대문에 갑옷을 입고 한 손에 도끼를 들고 서 있는 장군상(將軍像)을 그려 붙이며 이를 문배(門排) 라 불렀다.

일반적으로 문배는 한 해 동안의 액운을 물리친다는 의미를 가지는 반면,

세화는 신년을 축하하는 의미로 서로 간에 선물로 주고받거나 집안을 장식한 그림을 의미한다.


민화의 근본이 된 세화의 유래

세화가 언제부터 전해져 오는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조선 초기 새해를 축복하기 위한 의미로

궁궐에서 만들어 왕가 친인척과 신하들에게 나눠주던 그림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당시 세화는

지금의 민화개념인 민중들이 소박한 심성으로 자유롭게 그려 붙였던 것과는 달리

궁중의 전문화가들이 그려 임금에게 바치면 이를 하사품으로 전해 받았다는 것이다.

<육전조례(六典條例)>에 따르면

조선왕조의 도화서 화원은 약30명, 또 촉탁격인 차비대령 화원이 약 30명과 사무직 등 약 70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들 화원들 중 차비대령은 1년에 세화를 30장씩, 그리고 화원은 각각 20장씩

12월 20일까지 그려 바쳐야 했다.

그리고 또 화원들은 궁궐의 문과 문간에 재앙을 쫓는 벽사용 그림을 그리도록 되어 있었다.

이들이 그린 세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연결병풍으로 된 오봉산일월도(五峰山日月圖)와 십장생도(十長生圖)

그리고 바다에 학이 날며 신선이 먹고 불로장수한다는 천도복숭아가 있는 해학반도(海鶴蟠桃)를 비롯

 미인도, 수렵도 등을 들 수 있다.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 유득공(柳得恭)의 저서 <경도잡기(京都雜記)>에 의하면,

세화에는 수성, 선녀, 직일신장(直日神將)이 그려졌다는 기록이 있으며,

김매순(金邁淳)의 저서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는

세화로 금 · 갑신장(金 · 甲神將)을 그려 바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자료부족으로 신장 그림의 내용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문배(門排)라 하여 무장의 형태를 그려 궁궐의 문이나 여염집 대문에 붙여

악귀를 쫓는 주술적인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문배에 대해서는

조선 순조 당시 학자였던 홍석모의 저서 <동국세시기>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풀이할 수 있다.

수성은 하늘의 별 중 장수(長壽)를 맡은 노인성(老人星)을 형상화한 것이며,

직일신장은 그 날을 담당한 신을 가리킨다.

금(金) · 갑(甲)의 두 장군은 그림의 길이가 한 길이 넘으며,

한 장군은 도끼를 들고 한 장군은 절월(節鉞)을 들고 있는 것으로

모두 대궐의 문 양쪽에 붙이고 이를 문배라 불렀다고 한다.

또한 붉은 도포와 까맣고 네모난 모자를 쓴 인물상을 그려 궁전의 겹대문에 붙였으며,

중국에서 역귀 또는 마귀를 쫓는 신으로 당·송 때 성행했다고 알려진 종규상을 그려 붙이기도 했다.


 

한 해의 다복다산, 무병장수를 비는 세화

이렇듯 궁궐이나 사대부 집안의 대문에는

악귀를 물리치는 세화(문배)로 장군상을 사용한데 비해

여염집에서는 닭과 호랑이의 그림을 붙여 액이 물러나기를 빌었다.

 

닭은 귀신이 도망간다는 새벽을 알리는 영물로 신성시 되었으며,

호랑이는 맹수의 왕이자 산신령의 수호자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렇듯 세화는 벽사 위주의 의미가

무병장수를 소망하는 의미의 십장생도나 수성노인 등 길상(吉祥)의 뜻이 깃든 형체로 발전하면서 현재의 민화와 같은 새로운 장르로 변해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새해가 되면 나쁜 악귀나 액을 쫓고 다복다산을 소망,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호랑이, 용, 학, 해태, 봉황, 사슴, 물고기 등 십장생도에 나오는 상서로운 동물들과

봄, 즉 소생을 의미하는 매화, 수선화, 동백 등의 화초와 괴석, 수석, 책가도 그리고 장수와 행복을 상징하는 선녀, 수성노인 등을 그려

서로 주고받거나 집에 걸어두면서 그 의미를 생각하며 기원하기도 했다.

풍자와 해학이 담긴 민화의 근간이 되다

이 같은 세화가 오랜 세월 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새해라는 시간의 기점과 이것을 걸어두거나 장식할 수 있는 공간이

우리 생활 속에 상시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세화는 민중들의 메시지를 담아 자연스럽게 표출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 좋은 예가 현재 최고가를 호가하는 호작도(虎鵲圖)일 것이다.

호작도에 그려진 호랑이의 머리는 표범의 문양과 호랑이 문양인 줄무늬가 섞여 있다.

이러한 호랑이는 <호질전>에서 얘기하는 양반, 그 중에서도 무반을 상징하는데 그림에서는 호랑이를 바보스럽게 또는 못생긴 사람처럼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호랑이가 소나무 아래 앉아 있으면,

까치가 호랑이를 향해 지저귀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민중을 상징하는 까치가 산중 왕이라는 호랑이를 약 올리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만약 이처럼 양반을 능멸하는 의미의 그림을 시도 때도 없이

아무데나 붙여 놓았다면 아마 그 화가는 무사하지 못했을 테지만, 세화라는 명분으로 자연스럽게 걸어둘 수 있었기 때문에

그 같은 풍자가 가능했었다는 것도 재밌는 사실이다.

 

세화가 단순히 무병장수만을 기원했다면 그 생명력은 무당

그림처럼 평가절하 되어 풍속화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조선중기에 이르기까지 활발하게 그려지던 세화는

후기로 가면서 세시풍속의 만연과 도시경제의 발달로 점차 민간에 확산되고,

장식용 그림과 함께 조선 후기 이후 민중 의식이 내포된 민화의 근간이 되었다.
- 글 : 김호년 미술평론가, 고미술저널 발행인
- 사진제공 : 우리민화협회

게시일 2008-01-14 , 월간문화재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