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민통선 문화유산 기행] 1. 신라 경순왕릉(경기도 연천 고량포리)

Gijuzzang Dream 2007. 12. 9. 14:18

 

 

 

 

 

 

 (1) 경기도 연천 고랑포리 ‘신라 경순왕릉’

- 천년 신라를 바치고 묻혀버린 恨 -


 

남방한계선에서 불과 50m 떨어진 곳에 있는 경순왕릉.

6.25 전쟁때는 ‘경순왕’임을 알리는 비석이 6발의 총탄을 맞는 비운을 겪는다. 고랑포/권호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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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무장지대, 민통선…. 남북분단의 산물이다.

예전에도 이 일대는 조상들의 삶의 터전이자, 쟁탈의 요소였다.

구석기인들이 모여 살았으며,

삼국시대 때는 한강유역 점령을 위한 건곤일척의 싸움을 벌인 곳이다.

 

한민족의 아픔을 상징하는 분단은

역설적으로 이 지역의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결과를 낳았다.

1991년부터 이 일대에서 새롭게 조사된 대규모 유적만 해도

662건(경기 421, 강원 241건)에 이를 정도다.

하지만 개발의 유혹은 이제 민통선 너머까지 뻗치고 있다.

 

경향신문은 분단의 아픔 한편에 역사의 생생한 숨결을 간직한

민통선 안팎의 문화유산을 탐방하는 역사기행에 나선다.

이것은 통일시대에 대비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역사기행은 한국국방문화재연구원(원장 이재)과 함께 떠난다.

이재 원장은 육사교수 시절 지뢰밭을 헤쳐가며 군사보호지역의 문화유적을 조사해왔다.

- 편집자 도움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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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적막하고 한가로운 농가의 모습이다.

그러나 경순왕릉 가는 좁은 길로 접어들자 금세 달라진다.

길 양쪽에 ‘지뢰’라는 살벌한 이름표를 단 울타리가 펼쳐 있다.

“저기가 남방한계선입니다.”

‘고즈넉한 평화’를 깨는 소리다. 왕릉과 한 50m나 떨어졌을까.

야트막한 산의 능선이 ‘남방한계선’이란다.

아뿔싸. 무덤 앞 ‘新羅敬順王之陵’(신라경순왕지릉)이라 쓴 비석은 6발의 총탄을 맞았다.

아마도 6·25 전쟁 때의 일이겠지.

미상불, 남방한계선 바로 밑에, 그것도 지뢰밭을 무장호위 삼아,

비석마저 총상을 입은 채 누워계신 임금님.

그것도 고향 서라벌이 아니라 머나먼 이곳 장단이라니….

“지금은 민통선에서 해제됐지만(2005년 12월 개방됐다) 무장군인들의 사주경계 속에 답사했어요.

답사라기보다는 경호를 받은 셈이랄까.”(이재 국방문화재연구원장)

얼핏 보면 누워서도 편치 않은 ‘망국의 왕’다운 기구한 팔자다.

무덤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그렇다.

임진왜란의 와중에서 능의 존재가 실전(失傳)됐다가 조선 영조 때 후손에 의해 겨우 되살아났다.

이후 왕릉급의 대우를 받아오다가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다시 존재를 잃어갔다.

일제가 향사(享祀)제도를 폐지한 탓이었다.

그리고 8·15해방과 분단, 6·25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완전히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똘똘한’ 군인 덕에 극적으로 부활한다.

1973년 1월 육군 25사단 관할 중대장이던 여길도 대위는

무덤 주위에서 총탄에 맞은 명문비석을 확인하고는 무릎을 친다.

바로 ‘신라경순왕의 무덤’이었던 것이다.

여대위는 즉각 상부에 보고했고, 이 소식은 경주 김씨 대종회로 통보됐다.

두번씩이나 사라졌던 ‘신라 마지막 임금’이 국가사적(1976년 지정)으로 환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경순왕은 1000년 사직을 고스란히 고려에 바친 비겁한 왕으로만 치부될까.

우리는 흔히 “천년 사직이 남가일몽이었고, 태자 가신 지 또 다시 천년이 지났으니…,

유구한 영겁으로 보면 천년도 수유(須臾)던가”하고 한탄했던 정비석의 ‘산정무한’을 기억한다.

그러니 마의초식(麻衣草食)했던 태자와 견줘,

속절없이 나라를 들어 바친 아비의 무력함을 탓할 수밖에.

그러나 역사가 그리 호락호락한가.

“비운 속에서도 슬프지 않았던 임금”(이병주),

“백성을 전쟁의 참화에서 구해낸 현실주의자”(조범환) 같은 평가도 만만치 않으니 말이다.

왕은 망국 후에도 무려 43년이나 더 살았고,

왕건보다도 35년이나 장수했다. 82살(97살 설도 있다)을 살았으니 천수를 누린 것은 분명하다.

그뿐이련가.

왕건은 경순왕에게 “영원한 구생(舅甥·장인과 사위)관계를 맺자”고 청했다.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가 경순왕의 신부가 되었다.

경순왕은 그의 큰아버지 김억렴의 딸을 태조에게 시집보냈다.

왕건과 김억렴의 딸 사이에 난 아들은 훗날 현종(992~1031)의 아버지가 된다.

 

훗날 김부식이

“현종은 신라의 외손에서 나와 왕위에 올랐으며

그 후에 왕통을 이은 사람은 모두 그 자손이니 어찌 음덕(陰德)의 보답이 아니겠는가”(삼국사기)

하고 사론을 달았을 정도다.

김용석 경주김씨계보연구회 연구실장에 따르면

김알지를 시조로 모시는 신라 김씨의 분파가 450여개에 달하는데,

그 가운데 약 90%가 경순왕의 후손이란다.

 

문화유산해설사 박동일씨는

“해마다 봄가을에 이곳에서 벌어지는 제사에 2000명이 넘는 김씨들이 경순왕을 기린다”고 귀띔한다.

그런 걸 보면 경순왕은 자손복 많은 ‘슬프지 않았던’ 임금이 분명하다.

그런 경순왕을 ‘현실론자’로 긍정평가하는 학자들도 많다.

“나라는 약하고 형세는 외롭게 되었다.

죄없는 백성으로 하여금 간(肝)과 뇌(腦)를 땅에 바르도록 하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는 바이다.”

(삼국사기)

경순왕 9년(935년) 10월이었다.

왕은 신하들을 불러모은 뒤 고려귀부를 결정한다.

이것으로 보면 경순왕의 가없는 ‘애민정신’이 부각되는 순간이다.

나라는 망했으되 그 백성은 살렸으며, 나라 이름은 바뀌었지만 그 후손들이 고려를 이어갔으니….

‘패배한 승리자’였다는 말이 나오는 까닭이다.

“어찌 1000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남에게 줄 수 있습니까.”

마의태자의 통곡이 귓전을 때린다.

당연히 다음 왕위를 이어받을 태자와 그 세력의 반발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아닌 게 아니라 경순왕은 속절없이 무너져 가는 천년왕국의 운명을 결정지어야 했다.

더구나 그는 전임 경애왕을 죽인(927년) 후백제 견훤에 의해 옹립됐다는 한계에서 벗어나야 했다.

정권과 나라의 운명을 진 그의 계산은 처절했다.

즉위무렵(927년 11월) 후백제의 전력은 고려와 견줘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경순왕은 자신을 왕위에 올린 견훤에 경도되지 않는다.

김갑동 대전대 교수는

“신라의 군인출신으로 반역한 견훤을 인정하면 백성들의 반감을 살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후백제와 고려는 정통정권인 신라를 끌어들이려

경쟁적으로 경순왕을 ‘존왕(尊王)의 의(義)’로 대접한다.

 

하지만 930년 고려가 고창전투에서 견훤을 꺾은 뒤 상황은 달라진다.

경순왕은 발빠르게 왕건에 접근한다. 931년 왕건을 초청, 잔치를 열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경순왕은 하염없는 눈물을 흘린다.

“견훤은 승냥이나 범 같았는데, 왕공(王公)은 마치 부모 같구나.”

후백제와의 완전결별을 선언한 것이다.

왕건은 무려 93일간이나 신라 왕경에서 머문다.

조범환 서강대 연구교수는 “이때 고려귀부와 관련된 끈질긴 협상이 이뤄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자기 자신을 비롯한 신라귀족세력의 안녕과 백성의 안위를 보장받았을 것이다.

경순왕을 비롯한 귀부파, 즉 신라의 정치지배세력은

고려에 ‘신라의 정통성을 넘기는’ 조건으로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했다.

왕건으로서도 아무런 희생없이 민족통합의 위업을 쌓은 것이니 경순왕의 존재가 얼마나 고마웠을까.

귀부 이후 옛 신라땅에서는 반역의 움직임이 없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역사는 어차피 승자의 기록 아닌가.

 

그러니 경순왕은

“비록 마지못해 한(나라를 바친) 것이지만 칭찬받을 만하다”(삼국사기)는 고려의 평가를 받은 것이다.

왕조의 수명이 너무 길었던 것은 아닐까.

중국의 경우 한나라 이후 300년을 넘긴 왕조가 없다(청나라 296년이 최고).
반면 신라(992년)는 천년을 버텼다.

왕조도 인간의 일생처럼 창업-쇠퇴-중흥-쇠운-망국이라는 흥망성쇠를 걷게 된다.

그 안에서 내부 모순과 갈등이 생기고 자연스레 왕조교체의 기운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나 신라는 그런 모순과 갈등을 안은 채 늙고 병들어 갔다는 분석도 있다.

이 또한 경순왕을 위한 변명 한마디는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망국의 원죄까지 세탁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  2007년 03월 02일 경향〈이기환 선임기자 / 고량포에서〉

 

 

 

 

 

 

 

 

경순왕이 고랑포에 묻힌 이유

 

“신의 선조인 경순왕의 능묘를 오래전에 잃어버렸습니다.

지금 장단에서 그 지석 및 신도비가 나왔으니….”(조선왕조실록)

1746년 10월14일이었다.

경순왕의 후손인 김응호가 상소를 올렸다.

임진왜란 이후 실전(失傳)된 조상의 무덤을 찾았기 때문이다.

영조는 “비지(碑誌)의 인본(印本)을 확인해보니 경순왕릉이 틀림없다”면서 다시 무덤을 조성했다.
그런데 왜 경순왕은 경주가 아니라 고랑포구가 눈 앞에 보이는 야트마한 산에 묻혔을까.

 

속전인 계림문헌록을 보자.
“왕의 훙거소식(978년 4월4일)을 듣고 신라유민들이 장사진을 이뤄 경주로 능지를 잡았다.

유거민들 전원이 등에 양식과 침구일체를 지고 다 따라 나서자 송도가 텅빌 정도였다.”

 

그러자 고려 조정은 긴급군신회의를 연 뒤 구실을 찾는다.

“왕의 운구는 100리를 넘지 못한다(王柩不車百里外).”

고려로서는 참으로 ‘절묘한 구실’을 찾은 것이다.

‘왕의 대우’를 보장하는 대가로 운구의 임진강 도하를 막은 것이다.

왕의 장례를 옛 신라 도읍인 경주에서 치를 경우 그곳 민심의 향배를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하나 지금은 남방한계선과 불과 50여m 떨어진 궁벽한 곳이지만

지금의 잣대로 경순왕릉과, 그 코앞에 있는 고랑포 포구를 평가하면 안된다.

임진강 상류로 가는 마지막 포구였던 고랑포는 뭍과 바다의 산물이 모이는 집산지였다.

일제 때 화신백화점 분점이 이곳에 있었을 정도다.

고려초에도 고랑포의 위상은 대단했을 것이다.

왕건이 항복한 경순왕을 맞이한 곳이 바로 고랑포일 가능성이 높은 이유다.

“(경순)왕이 백관을 이끌고 서울을 출발했다.

수레와 보배로 장식한 말이 30여리를 이어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을 두른 듯했다.

태조가 교외에 나가 위로하고 ….”

30여리에 달하는 그 대규모 인원이 임진강을 도하해서 개경까지 가려면 이곳 밖에는 통로가 없었다.

또하나 전설에 따르면

향수병에 걸린 경순왕이 고향을 바라보면서 눈물흘렸다고 해서 이름붙은 도라산(都羅山)이

이곳과 멀지 않다.

경순왕은 고향땅을 향해 건너는 황포돛배를 바라보며, 지금도 향수를 달래고 있을 터이다.

<이우형 / 국방문화재연구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