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목-은거당의 옛터를 찾아서 | ||
동지가 지나 소한(小寒)의 추위가 다가오는 12월28일, 우리 일행은 안내자도 없이 길을 물어 역사의 땅을 찾았다. 그곳은 바로 역사의 비극을 그대로 안고 있는 민통선 안의 비무장지대인 허허로운 벌판이자 산등성이에 흩어져 누워있는 몇몇의 묘소가 을씨년스럽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곳은 양천 허씨들이 대대로 이어온 큰 집성촌(集姓村)으로 6·25 전만 해도 면소재지로 면사무소와 초등학교도 있었고 물산의 집산지인 시장(市場)까지 열리고 있어 상당히 번화한 마을이었다. 그러나 민족 상잔의 전화가 휩쓸고 가버린 지금, 사람이 거주하는 집이라고는 없이 전답만이 질펀하게 널려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최근에야 통제를 받는 민간인들이 출입하여 제한하는 시간 안에서만 농사를 짓도록 허용되어 출입증을 제시해야만 출입하는 곳이다. 아! 여기에 오면 민족분단의 비극이 무엇인가라는 아픔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게 해주는 바로 그곳이다. 어찌하여 역사의 땅이자 사상의 고향인 이 마을이 이런 정도의 폐허로 변했을까를 생각하면 가슴 저리는 분단의 비극이 우리를 망연자실하게 만들어주었다. 민통선의 초소에 신분증을 맡기고 강서리 마을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마을이래야 집이라고는 없는 질펀한 벌판, 주변의 야산에 듬성듬성 빗돌과 함께 고즈넉이 자리한 묘소들, 거기에 허씨들의 이름난 선조 묘소들이 대부분 자리하고 있었다. 온 나라에 이름을 떨친 학자이자 벼슬아치로는 최소한 세분을 꼽을 수 있다. 우선 동애(東崖) 허자(1496~1551)라는 학자, 관인(官人)이다. 조선왕조 초기의 당대의 학자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 · 공조 · 이조판서와 좌 · 우찬성이라는 정승 다음의 벼슬을 지내다 끝내는 바르고 정직하며 강직한 주장을 펴다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죄를 안고 죽었다가 뒤에 영의정에 추증된 저명한 사람이 바로 그 마을 출신으로 허씨의 이름을 크게 빛낸 분이다. 또 이 마을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니, 두 사람은 아버지들이 형제사이이던 사촌간의 형제였다. 관설, 미수는 허씨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조선왕조 중기 이후의 남인을 대표하는 학자로서 한 시대를 풍미한 사상가의 지위에 오른 분들이다. 7세 위의 사촌형인 관설의 큰 영향 아래 유년시절을 보낸 미수 허목은 그 중에서도 더 뛰어나 효종 이후 크게 대립되던 서인과 남인의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남인의 종장(宗匠)으로 이른바 ‘근기실학파’의 개산조(開山祖)가 되는 분이다. 그런 잔혹한 6·25의 참화 속에서 어떻게 그들의 묘소가 온존할 수 있었다는 것인가. 비록 빗돌에는 탄흔이 서려 군데군데 빗면을 할퀴었으나 그래도 통째로 비문을 알아볼 정도로 건실하게 서있고 묘소도 둥실하게 누워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오랫동안 종적을 알 수 없이 폐허로 방치되던 곳, 후손들만이 민통선 안을 출입할 수 있는 허가를 받자 후손들이 힘을 모아 묘역을 단장하고 새롭게 치장하면서 미수와 그 선조 및 후손들의 묘역은 누가 보아도 손색없는 훌륭한 선산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곳에서 미수 허목은 만년에 학문과 사상을 마무리짓고 거기에서 88세의 장수를 누리고 영면하였다. 임금이 은혜롭게 내려준 집에서 살아간다는 뜻으로 미수는 그 집의 이름을 ‘은거당(恩居堂)’이라 명명하고 화초와 괴석으로 정원을 꾸미고 운치있는 생활을 했다고 한다. 최근에 후손들이 마련한 유적비와 알림판이 흘러간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광막한 들판의 변두리 야산 밑에 집터는 쓸쓸하지만 그곳에서 일세의 노학자가 평생을 마무리했다는 사실에 우리는 그곳의 주변을 맴돌면서 깊은 사념에 잠기기도 하였다.
비문이 새겨있는 미수의 묘소 앞에서 우리 일행은 묵념을 올리며 큰 학자이자 정승이라는 높은 벼슬의 정치가의 위업을 기렸다.
미수의 묘소를 중심으로 오른쪽 등성이에는 미수 아버지와 어머니 묘소가 따로 빗돌과 함께 있었고 왼쪽 등성이에는 사촌형 관설 허후의 묘소와 증조부 동애 허자의 묘소도 있었다. 그야말로 한사람의 명성으로도 역사의 땅이 될 이곳에 이름만 대면 금방 알아보는 역사적 인물의 묘소가 즐비해 있었으니 대단한 장소가 아닌가. 27년째에 인조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둘째 아들 효종이 임금에 오른 해가 1650년이다. 서인세력의 힘으로 임금이 된 인조가 등극하면서 정치 주도권은 서인들의 손에 있었고 효종시대에도 역시 그들이 막강한 힘을 발휘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른바 ‘산림(山林)’이라는 재야학자들을 고관대작으로 등용하여 ‘산림정치’라는 새로운 스타일이 활발하게 전개된 일이다. 비록 출사는 하지 않았지만 스승을 찾아가 학문을 연마하고 전국의 명승지를 돌면서 심신의 수양에만 힘쓰던 재야 학자이던 허목에게도 최초의 벼슬이 내렸으니 효종 1년이던 1659년의 일이자 허목의 나이 56세 때의 일이다.
조선왕조 벼슬의 위계로는 최하위인 종9품인 참봉이라는 벼슬이었다. 물론 허목은 잠깐 응하고는 바로 사양하고 말았다. 요즘으로 보면 은퇴할 나이에 첫벼슬이 내려졌으니 늦어도 한참 늦었다. 그러나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고 학자에게 능참봉의 벼슬을 내리는 것 자체도 대단한 영광임은 말할 나위 없다. 효종 8년 허목 63세인 1657년의 일이니 지평(持平)이라는 벼슬이었다. 지평은 언관(言官)의 지위이기 때문에 허목은 정치의 잘못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고 곧바로 고향인 연천으로 하향하고 말았다.
1659년인 65세 때는 바로 효종 재위의 마지막 해이자 효종의 붕어로 이른바 ‘기해예송(己亥禮訟)’이라는 전대미문의 당쟁이 발단한 해였다. 이 해에 허목은 장령(掌令)이라는 더 높은 언관의 지위에 오르고, ‘임금의 덕(君德)’에 관한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산림으로 발탁되어 고위직에 올라 허목을 비롯한 고산 윤선도(1587~1671), 탄옹 권시(權시 :1604~1672), 백호 윤휴(1617~1680) 등 남인계 학자들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당쟁의 와중으로 빠져들었다.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趙大妃)가 인조의 둘째 아들로 임금의 자리에 오른 효종의 상사(喪事)에 기년(朞年)복이냐 3년복이냐의 문제로 격화된 당쟁은 정권의 향방을 좌우하는 권력쟁취로 변화하여 편안할 날이 없는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허적은 허목의 12촌의 집안 아우되는 사람으로 애초에 과거를 통해 벼슬에 나오고 영의정이라는 최고지위에 올라 권력자가 되었으나 원칙을 중시하는 허목과는 견해가 달라 결국은 탁남 (濁南)으로청남(淸南)에 속하던 허목과는 불목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허목의 3년 설에 허적도 동조하여 같은 남인계의 주장을 폈으나 권력 남용의 우려를 버리지 못한 허목의 지혜가 그를 멀리하였고, 같은 3년 상의 주창자이던 남인계 윤휴도 마찬가지로 허목의 주장을 옹호하고 응원했지만 견해의 차가 벌어져 큰 화란에 휩싸여 참혹한 비극을 맞았던 점도 허목의 지혜가 높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1595 서울 창선방(彰善坊)에서 태어나다. 어머니는 예조정랑 백호 임제(林悌)의 따님인 임씨(林氏), 부인은 영의정, 문충공 이원익(李元翼)의 손녀인 전주이씨 이때부터 학자관인이던 용주(龍州)조경(趙絅)과 교류하기 시작. 평생의 학문적인 벗이 됨. 그 때 종형(從兄) 허후와 동행 이 무렵 모계(茅溪) 문위(文褘),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도 출입. |
- 古學으로 송시열에 맞서다 -
은거당(恩居堂) 유지(遺址). 허목이 살았던 본가이나 지금은 터만 남아 표지 비석만 서 있다. |
# 81세 노인 정치의 한복판으로
1660년, 허목의 나이 65세, 효종을 이어 현종이 임금으로 등극한 해다.
허목은 현종의 어전인 경연(經筵)에서
송시열 일파의 ‘기년설’은 예(禮)를 그르친 잘못이 있다는 폭탄선언을 하면서
일대 파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이른바 ‘기해예송’이 발단되면서 현종·숙종대의 당쟁시대가 개막되었다.
시골에 숨어살면서 학문연마에만 전념하던 재야의 학자 허목이
정치의 한복판으로 진입하면서 파란만장한 생애가 전개됨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그러나 아직 정치적 세력이나 정치력이 턱없이 미약하던 허목 일파는
송시열 일파를 대적할 세력이 못되었다. 정치적 힘에 밀린 허목은 중앙정계에 있지 못하고
강원도 삼척이라는 외딴 곳의 부사(府使)로 내침을 당했다.
목민관으로서의 1년 반 동안의 삼척생활은 허목의 선정(善政)을 주민에게 선보인 시기였고
능력을 돋보이게 했던 시절이었다. ‘동해송’을 짓고 ‘척주비’를 세워,
그의 글과 글씨가 얼마나 우수하고 뛰어났는지 지금까지도 보여주는 국보급 유물이 되었다.
바다의 해일로 연안 주민들이 큰 피해에 시달릴 때 바닷물이 더 이상 밀려오지 않게 해달라고
해신(海神)에게 아뢴 비문의 내용은 그로 인해 큰 해일이 일지 않아 큰 덕을 입었다고 전해지는데,
사실 여부야 알 길이 없는 전설적인 이야기다.
고향 연천으로 돌아온 허목은 이후 10여 년간을 본격적인 학문연구와 저술활동에 전념한다.
1675년, 현종이 세상을 떠나고 숙종이 등극하면서
81세의 노인 허목은 다시 정치의 한복판으로 나와
대사헌, 이조참판, 비국당상이라는 재신(宰臣)의 지위에 오르고
정치와 학문을 주도하는 국가 원로가 된다.
예설(禮說)로 서인을 누르고 정권을 잡은 남인의 중심인물로
같은 해에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라는 대신이 되었으니
세상에 드문 ‘산림정승’이라는 높은 명예까지 얻었다.
고대 중국의 강태공 여상(呂尙)이 궁팔십(窮八十), 달팔십(達八十)이라 하여
80년을 궁한 선비로 지내다 80이후에 재상으로 다시 80을 보냈다는 전설처럼,
허목은 80이 넘어서야 재상이 되고 대신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권력은 역시 한 때. 1680년 숙종6년, 이른바 ‘경신대출척’이라는 큰 화란이 일어나
영의정 허적이나 이조판서 윤휴 같은 고관대작이 참형으로 죽어갔다.
당시 허목 역시 삭출(削黜)을 당해 고향에서 대죄(待罪)해야 했다.
그러나 허적을 반대했고 윤휴도 비판했던 허목의 지혜로 더 큰 화란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2년 뒤에 허목은 세상을 떠났고 오래지 않아 복관(復官)되어
학자와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 근기학파의 개산조(開山祖)
미강서원(嵋江書院)의 옛터에 단(壇)을 묻고 비를 세워 기념하고 있다. |
예로부터 남인에는 4명의 선생을 꼽는다.
허목의 평생 동지이자 학우이던 용주 조경, 고산 윤선도, 미수 허목, 백호 윤휴가 바로 그들인데 학문으로나 정치적 영향으로도 그 네 분이 남인을 대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허목은 학문적 성격이나 학술사적 계보 때문에 가장 큰 주목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송시열파에서 성리학인 주자학(朱子學) 일변도로 학문의 범위를 한정짓고 정치적 권력마저 독점하고 있을 때, 허목이라는 거목이 나타나 송시열 일파와 대립각을 세우고 고학(古學)과 고문(古文)을 제창하게 된다.
이 때 허목은 성리학 위주의 사서(四書) 중시 풍토에서 벗어나 육경(六經)을 학문의 방향으로 새롭게 잡았던 것이다. 이 점이 바로 다음 세대에서 주자학을 비판하면서 공맹(孔孟)의 원시유교에 학문적 비중을 높게 두고, 이른바 ‘실학파’라는 새로운 학파가 등장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다.
우리가 찾은 허목의 옛집, 은거당(恩居堂)은 그래서 학문과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본거지가 된다.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겨우 기념비만 서 있는 이곳이 역사의 새싹이 돋아난 바로 그곳이었다.
바로 그곳은 주자학의 문제점을 본격적으로 거론했던 백호 윤휴가 대선배인 허목을 찾아와
학문을 논했던 곳이요, 반계 유형원이 스승 같은 허목을 찾아와 학문과 시국을 논했던 곳이다.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힌 한강(寒崗) 정구(鄭逑:1543~1620)의 수제자인 허목은
영남학파의 학문적 전통을 근기(近畿)지역으로 옮겨받아
고학(古學)과 고문(古文)이라는 고경(古經)으로 방향을 틀어 ‘근기학파’를 열었고,
거기서 조선 후기 실학의 3대 학자라는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이라는 학문적 연원을
이룩했다.
반계 · 성호 · 다산이 육경(六經)의 높은 가치에 매력을 느끼고 성리학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점은,
곧 고학·고문·고경을 중시한 허목에서 싹텄음을 부인할 수 없다.
# 고학(古學)을 통한 변혁의 발단
허목의 학문과 사상이 담긴 문집은 ‘기언(記言)’이라는 이름으로 전한다.
모두가 ‘문집’이라 했건만, 허목 자신이 ‘기언’이라 정했다.
‘기언’은 원집과 속집을 합해 67권이고 다시 별집(別集)이라 하여 26권이 있으니
도합 93권 25책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책 전체의 서문은 자신이 직접 기록했다.
“허목은 고서(古書)를 무척 좋아했고 늙어서도 게으르지 않았다(穆篤好古書 老而不怠)”라는
서문의 첫 글귀가 그의 평생을 설명해준다.
모두가 성리학에 열중하여 송나라 주자(朱子) 이후의 학문에 매혹되었을 때,
허목은 옛글, 최소한 이전의 공맹(孔孟)의 학문만을 좋아해서
늙도록 게으르지 않게 그런 부분만 연구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선언했다.
허목의 상고정신(尙古精神),
즉 옛것을 숭상하는 마음은 흔히 말하는 복고주의와는 사못 다르다는 것을
일찍이 이우성 교수는 밝혔다.
“고문·고서의 ‘고’를 숭상하는 미수의 상고정신은 중세에 대한 부정이며,
중세에 대한 부정은 동시에 관념화된 당시의 성리학-주자학적 정신 풍토의 부정이다.
주자학적 권위주의가 우리나라에서 정점에 도달한 17세기 당시에
그 권위의 구축에 일생의 정력을 바친 송시열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라는 주장처럼
주자학적 권위주의를 탈피하려는 변혁의 발단이 바로 허목에게서 나왔음을 여기에서 알게 된다.
17세기 당쟁의 시대는 바로 이런 학문적 뒷받침 속에서
허목과 송시열의 대결이라는 역사적 경쟁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허목이나 송시열보다는 한 세대 이상의 후배이던 간재(艮齋) 최규서(崔奎瑞:1650~1735)는
뒷날 소론(小論)계로 영의정에 이른 큰 인물인데
그가 젊은 시절 두 사람을 직접 만났을 때의 인상을 적은 글이 전한다.
미수 허목 묘
아버지가 연천현감으로 근무하던 때인 16세(1665)에 최규서는 71세의 허목을 ‘은거당’으로 찾아뵈었다. 이후 그는 “세 칸의 띠집이 숲속 그늘에 있었는데,
넓은 뜨락 한 모퉁이에는 뾰족한 돌무더기를 모아 금강산 모습으로 만들었다.
바위에는 이끼 무늬가 어룽대고 그런 사이에 전서(篆書)글씨를 새겼으니
제법 예스러운 모습으로 보였다. 방안에는 쓸쓸하게 다른 물건은 없었고,
더부룩한 눈썹에 성긴 수염은 청고(淸高)한 골상(骨相)이 마치 깡마른 학의 모습 같았다”
라는 글을 남겼다.
최규서는 미수의 생전 모습과 사후의 유상으로 전하는 모습을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었을까. 대단한 관찰력이다.
최규서는 19세이던 1668년에 62세의 송시열을 뵌 적이 있다.
“처음으로 도성 안의 모씨집에서 인사를 올렸다. 골목길에서부터 장터처럼 시끄러웠고,
뜨락이나 마루에도 사람들이 쭉 둘러있었다.
틈이 나는 대로 각자가 방안으로 들어가 어깨와 발을 맞대고 앉을 정도로 빼곡 들어차 있었다.
묻고 대답하는 일에 권태롭지 않았고 책을 끼고 들어가 직접 펴보이며 묻는 사람도 있었다”
(‘간재문집’ 병후만록)라는 대목에서
허목의 청고한 모습과 송시열의 학문적 권위와 권력의 위세를 충분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영원한 라이벌 허목과 송시열은 남인과 노론의 양편 종장(宗匠)으로
조선왕조 후기 역사의 향방을 좌지우지했다.
끝내는 주도권이 노론에 있었기에 노론은 보수적 입장을 고수하며 정치를 주도하였다.
반면 남인계열은 정치적 주도권은 빼앗겼으나
학문적으로 고(古)를 숭상하다가 실학이라는 맥을 세상에 전해주는 공을 쌓았다.
그런 문제는 정조 때의 영의정이자 큰 경세가이던 번암 채제공이 정리하였다.
영남의 성리학이나 유학의 논리를 허목이 근기에 전해주자
성호 이익은 그를 사숙(私淑)하여 성호학파를 이루고 실학파의 전통을 세웠다.
게다가 반계 유형원이 허목의 제자에 가깝도록 직접 학문을 묻고 토론했던 점으로
요즘 밝혀진 대로 보면 허목의 위상은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다.
숙종대왕의 명령으로 경기도에는 미강서원(嵋江書院)이,
전라도 나주시에는 미천서원(眉泉書院)이 세워져 허목의 학문과 사상이 널리 퍼졌다.
그러나 이제 세상은 변해 그런 일도 활발하지 못한 채로 미강서원은 터만 남았고,
미천서원은 덩실하게 서있긴 하나 내용은 너무 빈약할 뿐이니 안타깝기만하다.
어둡던 중세를 벗어나려는 학문적 노력이 허목에게서 발단하였고,
그 뒤를 이은 반계 · 성호 · 다산 등의 학문과 사상의 전통이
그대로 오늘날 조선학의 긍정적인 측면으로 본다면,
우리가 찾았던 ‘은거당’은
분명히 역사의 땅이자 사상의 고향이면서 한국사상의 한 뿌리임을 인정하게 된다.
- 2007년 1월 5일, 1월 12일 / 박석무 단국대 이사장, 다산연구소 이사장, 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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