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민통선 문화유산 기행] 2. 오두산성(파주시 탄현면)

Gijuzzang Dream 2007. 12. 9. 13:59

 

 

 

 

 (2) 파주시 탄현면 ‘오두산성’

- 고구려 · 백제 치열한 106년 전투 ‘관미성’ -


 

1600여 년 전 고구려와 백제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벌인 파주 오두산성.

지금도 산성의 정상부에 자리잡고 있는 통일전망대가 남북분단의 아픔을 전하고 있다. 탄현/권호욱기자


“저기가 북한입니다. 한 3㎞ 떨어졌을까요.

저기 보이는 곳은 북한의 선전촌이고요. 김일성 사적관도 보이고….”

경기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엔 오두산성이 자리잡고 있다.

요즘은 통일전망대로 더 유명한 야트막한 산(해발 112m)이다.

뿌연 안개 사이로 갈 수 없는 땅 북한 관산반도가 어렴풋이 보인다. 손에 잡힐 듯 지척이다.

“썰물 때는 도섭(걸어서 건널 수 있는)할 수 있는 지점도 조금 더 가면 있어요.”

임진강과 한강이 만난다 해서 교하(交河)라 했던가.

윤일영 예비역 장군의 말이 새삼스럽다. 팽팽한 남북 분단의 상징….

1600년 전에도 그랬다. 이곳은 예나 지금이나 쟁탈의 요소임을 금방 알 수 있다.

문헌상 기록으로도 우리는 4~5세기 이곳을 무대로

대서사시를 썼던 고구려와 백제의 피비린내나는 전쟁상황을 묘사할 수 있다.

“신(臣)의 근원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습니다(臣與高句麗 源出扶餘).

하지만 쇠(釗 · 고국원왕)가 신의 국경을 짓밟아…,

화살과 돌로 싸워 쇠의 목을 베어 달았습니다.”(삼국사기 개로왕조)

472년, 고구려 장수왕의 압박에 위기감을 느낀 백제 개로왕이 중국 위나라에 원병을 요청한다.

하지만 수포로 돌아간다. 장수왕은 3년 뒤 백제 수도 한성을 공략한다.

망명한 백제인이었던 고구려 장수 걸루와 만년은

한때의 주군이던 개로왕의 얼굴에 3번이나 침을 뱉은 뒤 죽인다.

이로써 106년에 이르는 피어린 4~5세기 고구려-백제 전쟁은 고구려의 승리로 마감된다.

개로왕의 언급처럼 고구려와 백제는 ‘뿌리가 같은’ 부여였다.

“선세 때는 옛 우의를 도탑게 하였는데…”라고 했던 개로왕의 표현대로

4세기 중반까지 고구려와 백제는 별다른 충돌이 없었다.

하지만 백제 근초고왕이
369년 첫 도발 이후 백제를 침략해온 고국원왕을

평양성에서 죽이면서(371년) 피나는 혈투가 이어진다.

때는 바야흐로 마한의 소국들을 병합한 한성백제가 최전성기에 이를 무렵이었다.

최종택 고려대 교수에 따르면

369~390년 사이 고구려-백제전의 승자는 백제였다.

백제는 10번의 전투에서 5승1패(4번은 승패불명)의 압도적인 우위를 보인다.

비명횡사한 아버지(고국원왕)의 원수를 갚으려던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의 복수전은

실패로 끝났다는 뜻이다. 하지만 고국원왕의 손자인 광대토대왕이 즉위하자(392년)

승부의 저울추가 고구려 쪽으로 기운다.

광개토대왕은 392년(광개토대왕비문에는 396년) 4만 군사를 이끌고

백제 석현성 등 10성을 함락시킨다.

그런 뒤 그해 10월 ‘사면이 가파르고 바닷물에 둘러싸인(四面●絶 海水環繞 · 삼국사기)’

관미성(關彌城)을 함락시킨다.

관미성을 얻은 광개토대왕이 수군을 이끌고 아리수(한강)를 건너 백제의 국성을 포위한다.

백제왕(아신왕)은 남녀 1000명과 세포 1000필을 헌납하고 무릎을 꿇는다.

“지금부터 영원한 노객(奴客)이 되겠나이다.”

광개토대왕은 백제 58개성과 700촌을 얻고는 개선한다.

아신왕은 피눈물을 흘린다.

특히 관미성을 잃음으로써 ‘굴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신왕은 1년 뒤 동명묘에 절하고, 제단을 쌓아 기도를 드린 뒤 진무 장군에게 특명을 내린다.

“관미성은 우리 북쪽 변경의 요충지인데 고구려에게 빼앗겼다.

과인은 너무 분하다. 반드시 설욕하라!”(삼국사기 아신왕조)

백제로서는 임진강 이북의 석현성 등 빼앗긴 10성을 되찾기 위해

반드시 먼저 탈환해야 할 관미성 공략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의 보급로 차단으로 아신왕은 뜻을 이루지 못한다.

결국 관미성은 고구려-백제의 치열한 쟁탈의 요소였던 것이다.

고구려가 이 성을 수중에 넣은 뒤 전세는 급격하게 고구려로 기운다.

한성백제는 몰락의 길로 접어든다.

급기야 475년 왕(개로왕)이 장수왕의 공격에 전사하고 한성이 함락된다.

고구려는 최전성기에 접어들었고, 한성백제의 역사(493년)는 종지부를 찍는다.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는 더는 웅비의 꿈을 펼치지 못한다.

관미성.

바로 이 성은 고구려-백제의 치열한 106년 싸움을 상징하던

‘사면초절 해수환요(四面초絶 海水環繞)’의 요새인 것이다.

게다가 광개토대왕의 병신년 기사(396년)에 보이는 58개 성 가운데

유일하게 구체적인 성의 모습이 기록됐다.

하지만 관미성이 과연 어디인지는 누구도 밝혀내지 못한 채 설(說)만 설설 끓는 형국이었다.

강화도설(이병도·신채호)과 예성강 유역설(김성호·이마니시),

그리고 임진강 · 한강 交回지점설 등이 어지러이 제기되었다.

그러던 1985년. 지금의 오두산 지역 관할부대 대대장으로 부임한 윤일영 중령이

주목할 만한 ‘발견’을 하게 된다.

육사생도 시절부터 임진왜란 당시의 70개 전투를 줄줄 암기할 정도로

전쟁사에 관심을 많았던 인물이었다.

“우연히 김정호의 대동지지(1864년) 교하편을 보았습니다.

거기엔 오두산성은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곳이며,

본래 백제의 관미성이다(臨津漢水交合處 本百濟關彌城)’란 문구가 있었어요.

육사시절 은사인 허선도 교수에게 보여주니 그분이 무릎을 탁 치더군요.”

관미성의 위치를 문헌상으로 처음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자네, 이걸로 석사논문 쓰게. 대학원에 바로 들어와.”

허교수는 ‘관미성 위치고’라는 논문 제목까지 정해주면서 제자의 ‘발견’을 격려한다.

어찌 보면 ‘어이없는 발견’일 수도 있다.

사료에 분명 적혀 있는 걸 모르고 지금껏 지형 조건과 고대어의 음운체계,

고구려군의 진출 경로 등을 통한 ‘탁상공론’에만 몰두했기 때문이었다.

이 오두산성이 통일전망대로 개발되기에 앞서

경희대 발굴팀이 지표조사를 벌인 적이 있다(1990년).

조사단은 이 성이 바로 관미성이란 확증을 찾지는 못했다.

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관미성일 가능성이 많다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

광개토대왕이 7개 방면으로, 20여 일에 걸쳐 힘겹게 공략한 후 겨우 함락시킬 정도로

‘사면초절’하다는 점과, 밀물 때는 바닷물이 밀려 들어오는 것을 감안한다면

‘해수환요’의 조건에 딱 맞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난해 7월 오두산성 성곽보수 및 정비와 관련된 유구조사 등 몇 차례 조사에서

백제토기가 발견되었다는 점도 심상치 않다.

 

심정보 한밭대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백제식 축성기법(정상부를 띠로 두르듯 쌓았고, 산기슭을 ㄴ자로 파내고 한 쪽만 석축한 성)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어요. 백제 기와도 나오고….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보면 오두산성이 관미성일 가능성은 많다고 봅니다.

다만 고고학적인 발굴이 더 진행되고, 더 많은 백제유물이 나와야 하긴 하지만….”

지금 성을 지키는 초병의 얼굴에서 1600년 전 백제 병사의 모습을 떠올린다.

불안한 정적이 흐르는 최전방 초소에서….

건널 수 없는 강을 무시로 나는 갈매기를 보며 고향의 어머니를 그리워했겠지.
- 2007년 3월 9일 경향〈이기환 선임기자 / 탄현에서〉

 

 

 

 

 

 

 

 

고구려 군사전략, 필살의 ‘청야전술’

관미성의 위치와 광개토대왕 수군의 남하루트(윤일영씨 추정).

 

 

1600여 년 전의 고구려-백제전쟁과 57년 전의 한국전쟁의 양상은 같을 수 없다.

무기와 기동수단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형이 변하지 않는 한 그 지형을 이용하는 전략과 전술의 기본 개념은 비슷할 수밖에 없다.

그런 측면에서 관미성을 군사학적으로 조명한 윤일영씨의 연구는 주목된다.

그는 광개토대왕의 남하(396년) 루트와 남하 시간까지 계산했다.

그의 계산에 따르면

만약 광개토대왕이 1만명의 수군을 보냈다면

선단의 전체 길이는 무려 65㎞가 되는 대단한 위용을 과시했을 것이다.

황해도 조읍포에서 출발한 고구려 해군은 나흘간의 대장정 끝에 관미성(106㎞)에 도달했을 것이다.

1만명의 수군과 보조 인원 2만5000여 명을 합한 3만5000명이 540여척의 배에 분승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고구려 해군은 무려 7개 방면으로 20일을 공략한 끝에 겨우 공수의 요처를 수중에 넣는다.

관미성을 수중에 넣지 않으면 한성을 ‘도모’할 수 없기에 피나는 전투를 벌인 것이다.

지금도 우리 해병대가 김포반도의 한강·  임진강 교회지점을 지키는 이유다.

이쯤해서 누구나 품게 되는 의문점 하나.

왜 고대전쟁에서는 성의 공략에 운명을 거는 것일까.

예나 지금이나 지휘관의 기본은 요해지를 막는 전술이다.

고구려가 수·당 같은 제국을 상대하면서도 700여년을 버틴 이유는

바로 필살의 청야전술 덕분이다.
청야전술은 적이 공격해오면 백성들이 산성으로 대피하면서 중도에 모든 곡식을 불태우는 전술이다.

 
“우리 군량은 모두 요동에 있는데 지금 북쪽의 안시성을 지나쳐 남쪽의 건안성을 쳤다가,

만약 고구려 사람들이 군량길을 끊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 태종이 645년 안시성 공격에 실패, 우회할 것을 명령하자

당 장군 이세적은 배후의 보급로 차단을 걱정하면서 한 소리다.

1636년 병자호란 때도 청나라군은 평안도 안주성을 우회하여 남하했다.

그런데 안주성을 지키던 평안 병사 유림이 철원으로 내려가 청군의 배후를 쳐서

병자호란 때의 유일한 승전보인 김화대첩을 거둔다.

결국 수성(守城) 및 청야전술은

칼과 말에 능한 중국 중원과 북방민족의 침략에 맞서

축성술과 활에 능한 우리 민족이 생존할 수 있었던 비책이었던 것이다.
<이재 / 한국국방문화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