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서곡리 벽화묘 | ||
- 한씨자손이 권준선생을 600년 모신 사연 -
“민통선 안에서 누가(도굴범) 물건을 꺼내왔다는데…. 무덤에 뭔가 그림 같은 게 있다고 하네요.” 도굴된 벽화묘? 우리나라에서, 특히 한반도 남부에 벽화묘는 극히 드문 것이어서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대단한 ‘사건’이었다. “벽화묘라니까 발굴조사가 필요했어.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이던 한병삼씨(작고)도 청주한씨거든. 내 대학 동기이기도 하고….”
조상묘를 파헤친다는 것은 정서상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도굴당한 무덤이고, 더욱이 벽화묘이므로 발굴조사는 불가피했다. 정실장은 겨우 청주 한씨 종중의 양해를 얻었다.
당시 조사원이던 최맹식 국립문화재연구소 유적조사실장의 말. 군인 3~4명이 호위하는 속에서 조사를 시작했죠. 대남방송은 귓전을 때리고….” 사방 벽면에 12명의 인물상을 배치했고, 천장에는 별자리를 그린 성신도가 있었어요. 그런데 북벽과 별자리 그림은 확연했고, 동서남벽 쪽은 많이 훼손됐어요. 전형적인 고려말 무덤의 모습이었습니다.” 무덤 바로 앞의 흙에서 묘지석(誌石 · 죽은 사람의 인적사항이나 묘소의 소재를 기록하여 무덤에 묻는 돌)이 4편이나 확인됐다. 눈에 띄었어요. 그러니까 묘 주인공이 권씨라는 말이잖아요.” 무덤 앞에 서있는 비석은 엄연히 청주한씨, 즉 한상질의 묘라고 해놓았는데 그 무덤의 주인공이 권씨라니.
무덤앞에 서있는 묘비엔 지금도 ‘한상질’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박재찬기자
“정양모 실장(조사단장)에게 유선상으로 연락하고, 탁본을 떠서 전문가에게 보이고 했죠.” 정확한 판독결과 묘지명의 주인공은 고려 충렬왕~충목왕 때의 문신 창화공 권준(1280~1352)이었다. 권준이 죽은 1352년 사위 홍언박의 간청으로 당대 문인인 이인복이 지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청주한씨는 무려 600년 가까이 엉뚱한 분의 제사를 지냈다는 말인가.
지석의 파편 일부가 무덤내 석실에서도 발견됨에 따라 발굴단은 무덤 밖에서 확인된 지석이 원래는 무덤 안에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더욱 기막힌 것은 묘지석의 주인공인 권준과 비석의 주인공인 한상질이 내외손 간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권준의 둘째 아들인 권적의 사위가 한상질의 아버지인 한수(1333~1384)였던 것이다. 엽기적인 성행각을 벌인다. 바로 남색(男色)이었다. 왕은 김흥경이라는 총신(寵臣)을 사랑했고, 김흥경을 통해 자제위라는 기관을 두어 미남의 귀족자제들을 선발했다. 공민왕은 자제위 홍륜 등과 난삽한 관계를 맺는 장면을 문틈으로 엿보기도 하고, 익비와의 성행위를 독려했다. 그러자 왕은 최만생에게 “후사가 없는 터에 잘 된 일”이라면서 은밀하게 물었다. 두려움에 떨던 최만생은 홍륜 등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홍륜 일파는 그날 밤 술에 만취한 공민왕을 살해한다.
그런데 다음날 ‘전세’가 역전된다. 친원파인 이인임 등이 홍륜과 이 사건에 연루된 자제위 권진과 한안 등을 죽인다.
물론 공민왕의 비참한 최후와 관련, 배후세력이 있다는 주장도 많다. 자객이 침입해 왕을 시해한 뒤 자제위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는 설과, 이른바 친원파의 음모라는 설 등이 그것이다.
역사적 진실이야 어떻든 이때 죽은 권진이라는 인물은 권준의 증손자이다. 권준 할아버지의 제사를 내외손 간인 청주한씨 집안(한수)에게 부탁했을 겁니다.”(권병선씨) 한수의 아들 한상질(1400년 사망)의 무덤으로 오인했다는 것이다. 무덤 앞에 서있는 한상질의 비석은 1700년대에 세운 것이다. 어렵사리 발굴까지 허락해준 청주한씨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우리 가문인 한안(자제위)이라는 분도 공민왕 시해사건 때 피살되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권씨 제사를 지낼수 있었겠습니까.”(한명철 청주한씨 문열공파 종친회장) 법원은 조사단의 발굴보고서를 토대로 이 무덤의 주인공은 ‘권준’이라는 ‘역사판결’을 내렸다. 권준의 묘지석이 발견되고, 유물상황이나 고려풍 벽화의 형태 등을 보아 틀림없다고 본 것이다. 다시 발굴조사 보고서(국립문화재연구소 펴냄)가 잘못됐다면서 다시 소송에 들어갔다. ‘역사재판’에서 이번에는 ‘고고학재판’으로 번진 것이다. 재판은 2심까지 모두 기각됐지만 청주한씨 측은 대법원에 상고해놓은 상태다. 지금도 ‘한상질’이라는 이름의 비석이 무덤 앞에 턱하니 서 있었다. 600년의 기구한 사연을 담은채…. 비록 남의 집안이 차려준 제사상이지만 그동안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으니까. 그렇다면 한상질 선생은…. |
서곡리 벽화, 전통적 고려때 양식과 딴판
서곡리 벽화는
14세기 중엽, 즉 고려말기 고분벽화의 변화양상을 보여주는 자료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1991년 4월26일 당시 이어령 장관을 비롯, 기자 35명이 민통선의 살벌한 환경을 뚫고 달려온 이유다.
고분의 네벽에 12지신을 배치했는데, 이것이 전통적인 고려벽화분의 배치법과 구별된다.
즉 동벽의 축(丑)상과 서벽의 해(亥)상은
북벽의 자(子)상을 보좌하듯 좌우대칭을 이루며 앉아 있다는 것이다.
안휘준 문화재위원장의 재미있는 해석.
“북벽의 자상은 이 무덤의 주인공을 그린 것이 아닐까.
주인공을 표현하기 위해 자상을 단독으로 배치시킨 것이 아닐까.”
혹 무덤의 주인공은 자시(子時)에 태어난 것이 아닐까.
통일신라시대에는 이 12지신은 동물의 모양이었는데,
고려시대에는 사람의 얼굴과 몸에, 모자만 동물의 특색을 표현한다.
북벽 자상의 경우 사람의 몸과 얼굴에, 모자만 ‘쥐’의 형상을 하고 있다.
주인공은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홀(笏)을 오른쪽으로 삐딱하게 받쳐들고 있다.
얼굴과 이마가 좁고 볼이 넓어서 마치 잘라놓은 조선무의 아래토막을 보는 것 같다.
천장의 별자리 그림도 재미있다.
본래는 가장 북쪽에 북극성, 그 다음에 삼태성, 그리고 이어서 북두칠성을 그려야 하는데,
이 천장 그림은 반대이다. 즉 순서가 뒤집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차 실수’.
무덤 밖에서 천장석을 놓고 위에서 아래로 북극성→삼태성→북두칠성 순으로 그린 것까지는 좋았지만,
덮을 때 잘못 덮었다.
하기야 무덤높이가 낮아 무덤 내부에서 천장그림을 그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하나 별자리 가운데 오직 3개의 성좌를 이루는 11개 별만 단순화시킨 것도 주목거리다.
안휘준 위원장은
“이런 실수와 생략적인 별자리 표현은 고려말 국운이 쇠하고 백성들의 마음이 들떴던
고려말의 사회분위기를 반영하고 있지 않을까”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우형 / 한국국방문화재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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