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남(錦南) 최부(崔溥)의 표해록 | ||||
전라남도 나주시 동강면 인동리 성지마을, 이곳에서 553년 전에 뛰어난 인물이 태어나 자라며 학문과 사상을 익히고 키웠다. 그 인물이 바로 금남 최부(1454~1504)다. 본관은 탐진이고 자는 연연(淵淵)이며 호가 금남(錦南)이다. 동강면 소재지의 이름난 고깃집에서 나주곰탕과 생소고기에 맛있는 점심을 들고 거기서 가까운 성지마을에 우리가 들렀을 때는 오전에 내리던 눈도 그치고 차가운 겨울 날씨에도 햇볕은 밝게 비치고 있었다. 그러나 마을에 도착하자 최부의 흔적이라고는 ‘금남최선생유허비(錦南崔先生遺墟碑)’라는 비 하나가 서있을 뿐 마을 사람들은 집터조차 정확히 알지 못했다. 태어난 지 550년이 지났고 세월과 함께 세상은 또 상전벽해가 되었으니 알 길이 없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였고, 더구나 그 마을에는 후손이라고는 한 사람도 살지 않고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수명을 알 수 없는 엄청난 크기의 느티나무가 두 그루 넉넉하게 서 있는 것을 보면, 필시 오래된 마을인지라, 그 언저리가 분명 최부가 태어난 집이 있었으리라는 짐작을 할 수 있었다. 후손 중에 어떤 분은 유허비의 맞은편 등성이 아래가 옛날의 집터라고 전해온다고 하였다. 그래도 후손들이 유허비를 세울 때 무언가 근거가 있었기에 그곳에 세우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하고서 좌우를 살펴보니 그곳이 바로 최부의 탄생지라고 여겨도 좋을 것 같았다.
현인이 지나가면 그곳의 산천도 빛이 난다는 옛말이 있다. 최부 같은 당대의 문장가이자 벼슬아치이던 어진이가 태어난 곳이건만 마을이 이렇게 처량하게 되어 흔적이 빈약하다니 안타까움을 이길 수 없었다. 무상한 500년의 세월이 만들어 준 일이니 누구를 탓할 수 있으랴.
성종 19년인 1488년에 35세의 최부가 지어 왕에게 바친 책으로, 저작된 지 80여년 뒤인 1569년에 외손자 유희춘(柳希春)에 의하여 간행되었고 또 1578년에도 간행되었다. 이 책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저자가 당한 처절한 고난과 역경의 서술이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대단히 유명해졌고, 일본이나 중국에서까지 번역되어 세계 3대 여행기로 꼽히고 있다.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과 ‘하멜표류기’와 함께 근대 이전의 세계적 여행기로 거론되는 것이다. 최부의 ‘표해록’
한문으로 된 ‘표해록’과 함께 한글로 번역된 책까지 있었고, 최근에는 여러 출판사에서 다투어 순수한 우리말로 번역했다. 그러나 읽는 사람도 많지 않고 최부에 대한 관심이 매우 희박하여 그를 제대로 알고 있는 국민은 극소수에 이르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외할아버지가 어떤 분인가를 여러 곳에서 정확하게 밝혔다. “경술과 기절이 뛰어나 성종대왕에게 발탁되어 시종신(侍從臣)이 되었다”고 했고, “박학과 씩씩한 기절로 온 세상에 이름이 났었다”라고도 했다.
미암 유희춘은 자세한 생애를 ‘금남선생사실기(錦南先生事實記)’라는 제목으로 밝혀놓았다. 어른이 되자 경전을 익혀 글을 짓는데 일반에서 특별히 뛰어났다. 24세에 진사과에 3등으로 합격하였고 29세에 알성급제로 재주 있다는 명예를 드날렸다. 전적(典籍)의 벼슬에 있으며 ‘동국통감’을 편찬하는 사업에 참여하여 명백하고 정확한 서술로 당시 모든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 33세에는 중시(重試)에 을과(乙科) 1등으로 합격하여 홍문관 부교리에 올랐다. 34세인 1488년 9월 제주도 3읍의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선발되어 제주도로 건너가 직무를 수행하다가 35세의 윤 정월에 부친상의 소식을 접했다. 급히 고향인 나주로 귀향하던 배가 태풍을 만나 표류하여 중국의 태주(台州)에 이르렀다. 천신만고의 고생을 겪고 6월에 한양으로 돌아와 왕에게 ‘표해록’을 지어바쳤다.…”라는 기록이 있다.
추쇄경차관이란 불법자들을 찾아내 문책하는 벼슬아치다. 육지에서 죄를 짓고 제주도로 도망간 범법자들을 찾아내 치죄하려고 파견된 직분이었다. 왕명으로 표류전말을 올려 바쳐야 했다. 그 뒤 고향인 나주로 돌아가 아버지 상을 마치기도 전에 다시 어머니의 상을 당했다. 최부는 효자로서의 본분을 지켜 4년 동안 시묘(侍墓)하는 효성을 다하고서야 다시 벼슬길에 올랐다. 아버지 상을 당하고 귀국했으면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가 집상을 해야지 아무리 왕명이라해도 ‘표해록’을 저술한 것은 아들의 도리로 잘못이 있다는 간관(諫官)의 탄핵을 받아 벼슬길이 순조롭지 못했다. 그러나 최부를 절대 신임한 성종은 궁중으로 불러 표류전말을 구술하라고 명하여 전말을 듣고 나서는 그 혹독한 고난과 불운한 사정에 감탄하여 선물로 옷을 한 벌 하사하여 지극한 칭찬을 하기도 했다. 같은 해에 대제학에 오를 가망이 없는 사람에게는 내리지 않는 벼슬인 예문관 응교(應校)라는 벼슬에 오르기도 했다. 44세에는 질정관(質正官)으로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한창 벼슬에 올라 능력을 발휘하려던 무렵인 45세 때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사간(司諫)으로 연산군의 잘못을 상소하고 고관대작들의 비행을 폭로한 상소를 올리자 미움을 받던 중, 점필재 김종직의 문집을 보관했다는 이유로 46세에 함경도 단천이라는 나라 북쪽 끝으로 귀양살이를 떠나고 말았다. 그곳의 문화와 문명을 개화시키기 위해 제자들에게 많은 교육을 했다. 열심히 연구하고 글을 짓는 일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연산군 10년(1504)인 51세에 갑자사화가 일어나 다시 체포되어 극형을 당하는 불행을 맞고 말았다. 문장과 학문을 안고 반백에 세상을 마치고 만 것이다. 자라서는 일세의 학자이자 문장가인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당대의 제제다사들과 함께 교육하면서 학문을 깊고 넓게 연구하였다. 그 무렵에 벌써 나라에는 당파싸움이 시작되었으니 이른바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결이 그것이었다. 김종직 문하의 뛰어난 인물들이 비참하게 파멸한 사화가 무오사화요, 갑자사화다. 김일손·최부 등이 귀양가거나 죽임을 당해 사림파가 뿌리째 흔들렸던 때가 바로 그 시기였다. 그의 최후에 대해 역사는 그냥 입을 다물지는 않았다.
실록 연산군 10년 10월25일의 기사에서 사관(史官)은 그의 억울한 죽음을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최부는 공렴정직하였고 경전과 사서(經史)에 박통(博通)하고 문사(文詞)에 넉넉하였다. 간관(諫官)이 되어서는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회피하는 바가 없었다”고 말하고는 “죽임을 당하자 조정이나 재야의 모두가 애석하게 여겼다”는 말로 애통함을 기록하였다. 나라에 옳고 바른 말을 거리낌 없이 말하는 벼슬아치였기에, 우리는 그를 훌륭한 선비로 추앙하는 것이다.
주자학이나 성리학의 예교(禮敎)정신에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기개를 지켰던 그는, 젊은 조선 사람의 긍지를 중국에 널리 알린 점만으로도 우리들이 대우해야 할 선조 중의 한 분이었다. “그의 굳센 절의, 밝은 예절, 높은 인격, 깊은 학문은 중국 사람들의 경탄과 동정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나라를 사랑하는 지극한 충의, 부모를 생각하는 애절한 효성, 이는 중국 관원과 인민들과의 응답에서 언제나 솟구쳐 상대방의 심금을 울려마지 않았다. 그는 들놀지 않는 신념으로 우리나라의 찬란한 역사와 문화와 명성 높은 인물들을 자랑하였으며 또 우리나라의 위신을 높였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양반 관료이고 당시의 역사적 제한성 때문에 오늘의 생각과 일치할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배 안에서 생사고락을 같이 해야 한다. 딴 나라 사람이 함께 탔더라도 한마음으로 힘을 모아야 하거늘 하물며 우리는 모두 한 나라 사람으로 정이 육친과 같음에랴. 살면 함께 살고 죽으면 함께 죽자.”(표해록 윤정월 10일조)
그의 마음은 그렇게 철석 같았었다. 미암 유희춘의 제자로 큰 이름을 날린 허균의 형인 허성은 금남에 대해, “웅대한 문장과 곧은 절개로 큰 명성을 날렸다(以雄文直節 致大名)”라는 찬사를 올렸다. |
전남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에 자리한 금남 최부와 그 아버지 최택의 묘. <사진작가 황헌만> 1488년 윤 정월 초3일, 최부와 그의 일행 43명은 제주를 떠나 육지로 향했다. 항구에서 5리쯤 바다로 들어오자 날씨는 변덕을 부렸고 때 아닌 비바람이 치면서 위험한 지경에 이른다. 그러나 부모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급히 가는 길이어서 회항을 하기도 어려워 계속 앞으로 나아가자, 날씨는 더욱 악화되면서 43명의 운명은 풍전등화에 놓이고 말았다.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막말을 하고 도에 벗어나는 행위를 하려는 사람도 있었지만, 주자학과 성리학의 이론으로 인격까지 갖춘 최부의 인품은 그럴 때마다 그들을 위로하고 달래서 위기를 넘기고 있었다. 인간은 극한 상황에 놓일 때에야 그 본디의 성품이 드러나고 인격이 발휘되는 것이다. 경전과 사서에 밝고 고사나 옛일에 넉넉한 지식이 있던 최부는 막돼먹은 사람에게도 인격적 감동을 주어, 참으로 어려울 때마다 위기를 극복하면서 표류하는 뱃속 생활을 해냈다. 마침내 중국의 절강성 영파부(寧波府) 땅에 이르게 되었다. 해적을 만났을 때, 조선의 벼슬아치임을 과시하기 위해 상복을 벗고 관복으로 갈아입으라는 옆사람의 권유를 뿌리치고, 죽음을 당할망정 선비의 도리에 어긋나게 해서는 안된다던 최부의 절조는 대단한 정도였다. 해적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목숨까지 위태로운 때에도 그는 조선선비의 위풍당당함을 전혀 흐트러뜨리지 않고 버티는 지조를 발휘할 수 있었다. 그래서 대단한 선비라는 것이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해서는 안되고, 조금이라도 정직하지 못한 것이 드러나면 반드시 의심을 살 것이니 언제나 정도를 지켜야 한다” (윤정월 16일조)고 끝까지 주장하던 최부의 정신은 이 나라 민족정신의 위대한 유산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의 관인임을 증명하는 온갖 증표를 보여주어 드디어 조선인임을 인정받고 황제를 만나러 북경으로 향할 수 있었다. 3월23일 중국의 봉신역(奉新驛)에 이른다. 농부들이 수차를 이용하여 쉽게 논으로 물을 퍼올리는 것을 보고는 최부는 자세히 그 제작법을 배운다. 영 · 정조 시대에나 등장했던 중국을 통한 과학기술의 보급을 최부는 벌써 그때 실현하였다. 그는 뒷날 고국에 돌아와 벼슬하면서 가뭄이 든 충청도에 파견되어 수차제작법을 가르쳐주어 가뭄을 극복한 큰 공을 세우기에 이른다. 철저한 선비적 자세와 생활이 중국의 황제에게까지 인정받아 후한 상품을 받고 끝내 호위를 받으며 그리운 조국 땅으로 다시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다. 자신만이 아니라 동승했던 43명 전원이 아무 탈 없이 모두 무사히 귀국하였다. 모두가 최부의 인격과 학식, 뛰어난 위기관리 능력에서 나온 위대한 생의 부활이었다. 최부 묘소 아래에 있는 제각. <사진작가 황헌만> # 넘실대는 영산강 강변의 묘소 나주와 무안을 잇는 영산강 위의 다리를 건너 최부와 그의 아버지 최택의 묘소가 있는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 느러지 마을을 찾았다. 필자의 고향 땅이어서 가끔 들른 적이야 있지만, 거기가 바로 역사와 사상의 땅이자 고향임은 크게 생각하지 않고 지냈던 것이 사실이다. 크기는 훨씬 작아 아담한 금남 최부의 묘소가 영산강을 바라보며 고즈넉이 누워 있었다. 안내판에는 본디 해남에 최부의 묘소가 있었으나, 해방 후로 후손들의 노력으로 아버지 묘소가 있는 이곳으로 이장했다고 적혀 있었다. 제각(祭閣)도 덩실하게 서 있어서, 수효도 많지 않은 후손들의 따뜻한 마음이 드러나 있었다. 실제로는 최부의 탄생지와 이곳은 바로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래서 애초에 아버지의 묘소가 있게 되었고, 효성이 깊었던 아들을 아버지 묘소 아래로 모신 것은 그것을 알고 있던 후손들의 뜻이었으리라. 금남 최부의 묘비 앞면(왼쪽)과 뒷면. 세상에 아직 크게 조명되지 않은 진사 최택과 당대의 학자 관인이던 최부 부자의 묘소는 그렇게 소홀하게 취급할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 호남의 젖줄인 영산강이 넘실대는 하류, 몽탄강(夢灘江)의 바로 곁에 풍광도 아름답게 자리잡은 묘소는 호남의 문화와 학문을 열고, 이용후생의 큰 뜻을 최초로 조국 땅에 뿌린 탁월한 인물의 유골과 혼이 묻혀있는 역사적 땅이라는 것이다. 금남은 나주 태생이지만 해남의 정씨(鄭氏)에게 장가들면서 주로 해남을 근거지로 활동하였다. 해남 출신인 외손자 유희춘에 의하면, 해남은 본디 바닷가에 치우쳐 있어 옛날에는 문학과 예의(禮儀)도 없었고 거칠고 누추한 고을이었는데,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처가인 해남에서 노닐면서 우선 세 제자를 길러냈다는 것이다. 첫째는 해남윤씨로 진사시에 합격한 어초은(漁樵隱) 윤효정(尹孝貞), 둘째는 조선 중기의 대문호이던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의 숙부인 임우리(林遇利), 셋째는 유희춘 자신과 자신의 형 유성춘(柳成春) 형제의 아버지인 성은(城隱) 유계린(柳桂隣)이었다. 호남을 대표하는 세 가문이 바로 금남의 문하에서 나왔음만 보아도 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가는 금방 짐작할 수 있다. 문명을 날리던 고관들이었고, 그 후손으로 고산 윤선도, 공재 윤두서로 이어지는 명문의 학문가를 이룩했다. 석천 임억령의 형제들 또한 조선의 명사들이 많았고 호남문단에 석천이 미친 영향 또한 대단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일이다. 유성춘 · 유희춘 형제는 금남의 외손자로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더구나 금남의 사위에는 나주나씨의 나질이 또 있다. 이분의 아들 나사침은 호가 금호(錦湖)로 효행과 학행으로 천거받아 현감을 지냈는데 금남의 외손자다. 금호는 나덕명(羅德明)…나덕헌(羅德憲) 등 여섯 아들을 두었다. 모두 금남의 외증손들이면서 이른바 ‘육룡(六龍)’이라는 별호를 들을 정도로 명망이 큰 문사들이었다. 호남의 웅도인 나주 일대에 그들이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금남의 학문과 사상의 영향은 바로 호남유학의 ‘개산조(開山祖)’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금남보다 5세 연하지만 과거에 합격한 것은 금남보다 9년 뒤여서 송흠은 금남을 대선배로 모시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같은 시기 같은 조정에서 벼슬하던 두 사람은 같은 호남출신이라는 인연도 있어 자주 내왕하면서 아주 가까이 지낸 것으로 기록에 나온다. 벼슬 초기에 송흠은 휴가를 받아 고향에 왔고, 고향에 체류한다는 금남의 소식을 듣고 금남의 고향집으로 송흠이 인사차 찾아갔다고 한다. 금남이 물었다고 한다. 서울에서 고향까지의 교통편은 무엇이었느냐고. 나라에서 관인에게 내주는 역마를 타고 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대 집에서 우리 집까지의 교통편은 무엇이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마찬가지로 역마를 타고 왔다고 했다. 금남은 벌컥 화를 내며 나라에 고발하겠다고 송흠을 꾸짖었다고 한다. 자기집에 찾아옴은 사사로운 일이니 역마를 타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벼슬아치가 공사를 구별하지 못함은 절대로 안된다고 하면서 가까운 고향 후배를 끝내 나라에 고발하여 문책을 받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바르고 청렴하며 공사에 엄격했던 분이 금남이었고, 이런 경계를 받은 송흠은 그 일을 계기로 세상에 이름난 청백리로 고관대작의 벼슬살이를 했다고 전해진다. 하서 김인후, 면앙정 송순, 학포 양팽손 등이 대부분 송흠 문하에서 젊은 시절에 학문을 익힌 분들이었다. 송흠의 학문과 사상 및 청백리 정신이 최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보면 호남의 석학들은 대부분 최부의 영향을 어느 정도는 받았다고 추정하기 어렵지 않다. 1769년에 일본에서도 번역되었고 최근에는 영문이나 중국어로도 번역되어 세계적인 여행기록으로 정착한 지 오래다. 금남 최부의 고향 마을에서 생가 터를 확정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나 그는 ‘표해록’을 통해 일찍이 세계화정신을 이 땅에 뿌렸고, 연산군의 패정과 고관대작들의 비리를 폭로하다 갑자사화로 처형당했다. 그런 만큼 최부의 고향 나주는 그 외로운 의리정신은 묻혀버릴 수 없는 이 땅의 사상적 유산으로 현양하기에 충분한 곳이다. 의리 높고 박학한 학자 금남 최부의 혼과 사상을 충분히 이해하고 활용하는 일만 우리들의 몫으로 영원히 남아있다.
배 안에는 하인이나 종을 포함해서 대부분 하류층으로
윤 정월 12일 해적을 만나 겨우 위기를 벗어나고
겨우 중국땅에 오르자 이제는 왜구, 즉 왜적으로 의심받아 또 어려움에 봉착했다.
# 수차(水車)의 제작법을 배우다
애국자이던 최부, 농사짓는 조국의 백성들에게 이용후생할 마음을 버린 적이 없었다.
조선의 홍문관 학사라는 이름에 부끄럼 없이 역사와 지리에 밝고 경전과 문학에 밝았던 최부는
탄생지를 찾아가 달랑 서있는 ‘유허비’ 하나만을 보고 말았던 우리는
왕릉의 크기에 부족함이 없는 최택의 묘소 아래,
이곳 이산리는 무안군 땅이지만 강 하나만 건너면 나주의 동강면으로
# 금남의 학문 연원과 학파의 형성
필자는 몇해 전에 호남유학의 전개과정을 설명하는 ‘17~8세기 호남유학의 전통’이라는 논문에서 호남에 최초로 학문과 의리의 씨앗을 뿌린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1384~1455)를 이어 본격적으로 제자를 양성하고 학파를 형성한 학자로는 금남 최부라는 주장을 편 적이 있다.
해남윤씨 어초은 윤효정은 윤행(尹行) · 윤구(尹衢) · 윤복(尹復) 등 3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당시는 영광땅이나 지금은 장성땅에 지지당(知止堂) 송흠(宋欽·1459~1547)이 있었다.
이유인즉, 서울 집에까지는 휴가니 의당 역마를 사용할 수 있으나,
송흠의 제자에는 호남의 대학자가 많다.
‘표해록’의 가치와 중요성은 생략한다.
최부는 직계 후손들의 수도 적고 세력도 미약하다.
- 2007년 2월 2일/ 2월 9일 경향〈박석무 단국대 이사장 · 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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