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파주 백학산 석불 |
“여기에는 지뢰 같은 것 없죠?” 기자가 농처럼 묻는다.
‘미확인 지뢰지대’라는 빨간 딱지의 표지를 스치듯 지나가노라니 왠지 꺼림칙하다. 수풀을 헤치며 다가가는 발걸음이 섬뜩하다. 그래서 묻노라면 동행한 이재 국방문화재연구원장과 이우형 연구원이 씩 웃는다. 그러면서 되받아치는 농담. 지뢰탐사반이 철저하게 훑고 지나가도 간혹 발견하지 못한 지뢰가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니까. “야! 정말 끝내주는 비유네!”하고 박장대소하지만 등짝에 맺히는 식은 땀방울을 어찌할꼬. 사방 ‘미확인 지뢰지대’임을 경고하는 간이철책 사이에 아슬아슬 나있는 교통호를 따라 내려가는 길이다. 1사단 00연대 00대대 주임원사인 임종인씨도 이 교통호를 따라 내려왔다. 눈덮인 전방고지. 병사들과 함께 한창 눈을 치우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뭔가 짚이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1981년의 일이었다. 그때 임원사는 돌이 떨어질까봐 병사들과 함께 돌을 굴려 떨어뜨릴 요량으로 힘껏 밀었다. 하지만 꿈쩍도 안했다. 장정들이 몇 번이나 힘껏 밀었는 데도 떨어지지 않은 걸 보면 다 부처님의 뜻이었겠죠.” 임원사는 지뢰탐색기를 앞세워 조심스럽게 한걸음 한걸음 내디뎠다. 목이 달아난 불상이어서 섬뜩하기도 했고….”
미확인 지뢰지대에 숨어있던 백학산 석불(위). 지뢰탐사반의 통로개척으로 석불로 가는 길은 좁게 나 있지만 바로 곁에는 미확인 지뢰지대다. <파주 군내/박재찬기자> 하지만 ‘신문의 오 · 탈자’처럼 언제 터질지 모르는 미확인 지뢰 때문에 더는 조사하지 못했다. 그는 곧바로 대대장에게 보고했고, 관할 군내출장소에 알렸다. 임원사는 과일 등 제사음식을 불상 앞에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드렸다. 머리는 불상 앞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는데, 아마도 6·25 이전에 누군가 떨어진 머리를 수습해서 잘 모셔놓은 것이 분명하다. 머리는 소발이지만 얼굴면과 분명하게 구분되었고, 얼굴에는 높은 코와 가느다란 눈, 작은 입, 길게 늘어진 귀 등이 잘 표현됐다.
최선일 경기도 문화재전문위원의 평가. 두 손이 옷자락 안쪽에 놓여있는데, 가슴 부위에서 두 손을 깍지 꼈거나 지권인(智拳印)을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 수인(手印) - 부처나 보살의 깨달음의 내용이나 활동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표시 양쪽 손가락으로 나타내는 모양 *** 지권인(智拳印) - 왼손 집게손가락을 뻗치어 세우고 오른손으로 그 첫째 마디를 쥐는 것
전쟁 전까지는 지역민들의 예불대상이었을 것이다. 이 입상은 백학산 아래 향교동의 드넓은 농지를 바라보고 있다. 향교가 있던 지역이라 향교동이라 했는데 한국전쟁 후 동네 주민들을 모두 민통선 이남으로 이주시키는 바람에 동네는 폐촌이 되었다. 한때는 지역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을 불상도 전쟁과 남북 분단의 희생양이 되어 잊혀진 존재가 된 것이다. 최선주 국립중앙박물관 학예관은 “특히 고려시대 대불(大佛)은 후삼국 시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건국한 고려시대 전기(918~1170) 사이에 집중 조성됐다”고 말한다. 신라 하대부터 대두된 풍수사상이 모든 분야에 걸쳐 영향력을 끼친 시기다. 불교에도 신이적(神異的)인 요소가 나타났던 시기였다. 특히 왕조 초기에 끝까지 저항한 후백제 세력을 통제하고,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지방 호족들을 아우를 필요가 있었다. 광종이 논산 관촉사에 무려 18.12m 크기의 석조보살상을 세운 것이 단적인 예다. 평상시의 1년간 비용이 족히 태조 당시의 10년 비용과 같습니다.” 왕조 창건에 따른 새로운 기운을 북돋우면서 왕권 강화책을 펼친 광종은 ‘작은 것’보다는 ‘큰 것’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에 빠졌던 것이다. 유학자인 최승로는 그걸 비난한 것이다. 미륵신앙은 이상적인 복지사회를 제시하는 미래불로서의 미륵을 믿는 신앙이다. 미륵불을 자처한 궁예가 대표적인데, 미륵불 신앙은 고려 창건 이후에도 구백제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박경식 한백문화재연구원장과 최선일씨, 그리고 최선주씨 등은 고려 시대의 것이 확실하다고 보고 있다. 문화재 지정을 위해 작성한 최선일씨의 공식 조사보고서도 ‘고려 시대’라고 시기를 확정지었다. 백학석불의 사진을 본 문명대 한국미술사연구소장은 “이 불상은 조선시대, 즉 15세기 무덤에서 흔히 보이는 문인석의 양식을 그대로 따른 불상” 이라고 본다. 이런 신체 표현이라든가, 층단식으로 표현된 옷주름 등을 볼 때 15세기 중엽에 특징적으로 볼 수 있는 문관석 양식을 빼닮았습니다.” 조선조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런 시대 확정과 성격 규명은 전문가들이 앞으로 해야 할 몫. 여기서는 한 평범한 직업 군인의 ‘소리 없는 활약’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지뢰밭에 방치된 문화재를 찾아낸 주임원사 임종인씨의 활약에…. 나라를 지키는 것만큼이나 문화유산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아는 군인이야말로 참군인이다. |
미확인 지뢰밭 여의도 면적 23배 |
지표조사에 앞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지뢰를 찾아내는 육군탐사대원 |
'지뢰와의 싸움, 생명을 건 조사.’
군사보호지역의 문화재 조사는 이렇게 한 마디로 정리될 수 있겠다. 이곳에 대한 문화재 조사가 시작된 것은 1991년. 당시 조유전 국립문화재연구소 유적조사실장과 이재 육사교수 등의 주도 아래 실시됐다. ‘한갓 농사꾼’이었던 필자는 이 일대 사정에 밝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로 조사에 참여하는 기회를 얻었다. 2003년 국방부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지뢰매설지역은 여의도 면적(90만평)의 30.3배에 이르는 2753만평이었다. 확인된 지뢰지대에는 약 108만발이 깔려있다는 통계다. 이 자료에 따르면 미확인 지뢰지대는 여의도 면적의 23배(2090평)에 이른다. 지금도 모골이 송연해진다. 미확인 지뢰지대여서 관할 군부대 지뢰탐사반의 도움을 받아 한걸음 한걸음 나간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탐지기를 댈 때마다 족족 지뢰가 잡혔다. 막상 발을 들여 놓았으나, 좁디좁은 탐사 반경 밖으로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원래 오각형, 육각형 공식이라 해서 한가운데는 대전차 지뢰를, 그 주위에는 5각형이나 6각형 형태로 대인지뢰를 차례로 묻는다. 그러니까 아차 실수해서 하나 잘못 밟으면 다 죽는 불상사가 일어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리석은 만용이었는데 그대로 밀고 들어가 조사를 마쳤다. 이밖에도 철원 성산성을 조사할 때는 폐기탄과 수류탄, 지뢰가 무시로 탐지되었다. 이것들을 제거하는 작업이 조사 기간의 절반에 이를 정도였다. 산불이라도 나면 곳곳에서 지뢰가 터지고, 그리고 홍수로 흙이 흘러내리면 지뢰는 아주 흉측한 모습을 드러내고…. 조사단은 그저 아무도 하지 못한, 그리고 누구도 할 수 없는 조사를 담당하고 있다는 책임감과 자부심 때문에 ‘만용’을 부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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