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파주 진동 허준의 묘 | ||||
1982년 어느 날. 서지학자 이양재씨는 어떤 골동품 거간꾼으로부터 한 통의 간찰(편지)을 입수했다. 눈이 번쩍 띄었다.
그러나 준(浚)자 이름을 지닌 분들 가운데 이런 초서의 글을 멋들어지게 쓸 만한 학식과 지위에 있었던 이는 단 한분이었다. 바로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 선생이었다. 더구나 글자체도 16~17세기쯤으로 추정됐다. 그러나 이는 모래 속에서 바늘찾기격. 게다가 민통선 이북지역. 그러나 추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무시로 열람시킬 경우 재산권 분쟁이 생길 수 있기에 군청이 공개를 거부했다. “허준 묘만 찾으면 된다”고 지역 지주회장 등을 통해 신신당부했다. 간신히 토지대장을 열람할 수 있었다. 샅샅이 옛 지번을 확인하다가 하포리라는 곳에서 주목할만 한 이름이 보였다. 그래! 이제 찾을 수 있겠다 하고 생각했죠.” 마을 사람들의 전언에 따르면 남북분단이 고착화하기 전인 1947년까지 자손들이 38선을 넘어 제사를 지내고 돌아갔다.
향토사학자인 이윤희씨도 “이 근방인 독정리와 우근리에는 100호가 넘는 양천 허씨 집성촌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곳 지주회장의 운전기사로 신분을 감추고 10년 가까이 옛 허씨 땅을 찾던 1991년 7월 어느 날. 무덤이란 무덤은 모두 처참하게 도굴돼 있었다. 그런데 어느 무덤(역시 마구 파헤쳐진)에 눈길을 돌리는 순간 이양재씨는 숨이 멎는 듯했다. 그것도 두 쪽으로 동강난 명문비석이었다.
바로 ‘양평군 호성공신 허준’이었습니다.” 그의 자취를 찾기란 이렇게 힘들다. 아마도 선생이 서자였고, 그때만 해도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한 의사였던 탓이겠지…. 적절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감히’ 최근 드라마 속의 ‘장준혁’과 비교해보자. 한마디로 가장 ‘장준혁’다웠지만, 가장 ‘장준혁’답지 못한 의사였다. 선생의 천재성을 말해준다. ‘조선사람 허준’을 쓴 신동원은 “선생은 스스로 기회를 개척하여 새로운 스타로 떠올랐다”고 평가한다. 선생은 1590년(선조 23년) 왕자와 공주, 옹주 등의 두창(마마)을 성공적으로 치료한다. 선생은 드라마 속 장준혁처럼 과감하고 자신감 넘치는 결단을 내린다. 신이 세번 약을 써서…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허준의 ‘언해두창집요’에서) 왕자(광해군)를 비롯한 왕가의 병을 고쳤으며 마침내 당상관의 반열에 오른다. 훗날 죽음을 앞둔 임금(선조)을 치료할 때도 그랬다. 다른 의관들처럼 후환이 두려워 대충 처방하지 않고, 더욱 센 약을 처방함으로써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광해군 일기)’ 죽어가는 임금을 살리려 했다. 그런데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지자 신하들이 줄줄이 임금을 팽개치고 뿔뿔이 흩어진다. 의주에 이르기까지 문·무관이 17인, ‘어의 허준’을 비롯한… 몇몇이 끝까지 곁을 떠나지 않았다.” (선조수정실록) 선생이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이어 보국숭록대부(정1품)에 오르자 질시하는 세력의 상소가 빗발쳤다. 급기야 선조가 죽고, 광해군과 대북파가 정권을 잡자 선생은 “망령되게 약을 써서 임금이 죽었다”는 탄핵을 받는다. 1년8개월 만에 방면한다. 그러나 허준이 귀양 간 곳은 남해 먼바다가 아니라 선대 임금과의 추억이 깃든 의주였다. 광해군은 또 “(망령되어 약을 써서 선조가 죽인 게 아니라) 허준의 의술이 부족하여 그랬다”고 변호하기도 했다. 대북파와 소북파 간 정치적인 소용돌이에서 빠졌지만 정치적인 계산에 의해 움직이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1596년부터 무려 14년 역작으로 완성된 동의보감. 허준은 86종의 수많은 의서들을 참고, 정리함으로써 고급지식을 임상의들에게 제공했다. 하지만 더욱 돋보이는 것은 병든 백성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다. 백성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두창과 성홍열, 티푸스 같은 전염병에 걸려 속절없이 죽어가는 백성들을 위해 헌신한 이가 바로 허준이다. 그러던 것을 어의 허준이 약을 써서 살아난 사람이 자못 많았다. 민간 사람들이 어려서 죽은 것을 면한 자가 많았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이 전한 허준 선생의 진면목이다. |
발분의 저작 동의보감 첫 국제적 베스트셀러
발분(發憤)의 저작들이 있다.
살아가면서 가장 어려운 환경에 놓여있는 인물들이 역경 속에서 불후의 명작을 저술하는 것을 뜻한다.
저 2000년 전 불멸의 역사서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의 ‘발분의 변’을 들어보자.
“서백(주 문왕)은 유리에 억류되어 ‘주역(周易)’을,
공자는 진과 채에 연금되었을 때 ‘춘추(春秋)’를,
굴원은 초나라에서 쫓겨나 ‘이소’를 지었다.
…손자는 다리가 잘린 뒤 ‘손자(孫子)’를,
여불위는 촉으로 귀양가서 ‘여씨춘추(呂氏春秋)’를,
한비는 진나라에 갇혀 세난(說難)과 고분(孤憤)을 썼다.”
사마천은 이른바 이릉(李陵) 장군의 흉노 투항을 변호하다 무제로부터 궁형을 당했다.
그는 치욕의 나날들을 승화시켜 10년간의 노력 끝에 저 유명한 ‘사기’를 썼다.
허준 선생의 동의보감도 역시 발분의 역작이었다.
선조는 1596년 허준에게 동의보감 편찬을 지시한다.
그러나 정유재란(1597년)과 선조의 승하(1601년) 등이 겹쳐 진도가 제대로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선조의 죽음으로 선생은 탄핵을 받아 삭탈관직과 귀양 등 일생일대의 큰 위기를 맞는다.
그때 ‘발분의 저작’이 이뤄진 것이다.
신동원씨는 “탄핵과 귀양 ‘덕분에’ 선생은 동의보감 저술에 온 힘을 바쳤을 것”이라면서
“10년간 지지부진했던 저작을 3년 사이(1608~1610년)에 마무리한 셈”이라고 말한다.
1610년 8월6일 동의보감 25권을 받아든 광해군은 감개무량했다.
“허준은 …심지어 유배되어 옮겨 다니고 유리(流離)하는 가운데서도 그 일을 쉬지 않고 하여
이제 비로소 책을 엮어 올렸다. …내가 비감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다.”(광해군일기)
얼마나 귀하게 여겼든지 광해군은
동의보감 초판본을 태백산과 오대산 사고에 보존토록 지시했을 정도였다.
동의보감은 국내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화제를 뿌렸다.
이양재씨에 따르면 중국판 동의보감 고판(1920년 이전)만 해도 조선판의 6배가 되는 23종이나 되었다.
중국판 가운데는 조선에서 중국에 직접 전한 판도 있고,
일본~중국을 거쳐 다시 국내에 역수입된 판도 있다.
이양재씨는 “이렇게 보면 동의보감은 조선인이 저술한 최초의 국제적인 베스트셀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면서 “동양의학의 대표적인 고전으로 평가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 2007년 03월 30일, 경향, 이우형 한국국방문화재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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