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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언문실록> - 조선의 한글 연애편지 스캔들

Gijuzzang Dream 2011. 7. 27. 23:19

 

 

 

 

 

 

 

 <조선언문실록>

 

 

 

- 조선언문실록

 

 

“한글은 세계 여러 문자 가운데 가장 과학적인 문자다.”

“세종대왕의 가장 위대한 치적은? 훈민정음 창제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청소년 시절에 학교에서 배운 내용이다.

 

좀 삐딱한 학생은 한글이 가장 과학적인 문자라는 점에 대해 “국수주의적인 자화자찬(自畵自讚)이 아닐까?”라는 의문을 품었으리라.

어떤 학생은 한글이 위구르 문자를 베꼈다느니, 인도 어느 지방의 글자와 비슷하다느니 하는 주장에 귀가 솔깃하기도 했으리라.

 

세종(1397~1450) 당대에는 한글 창제가 백성들에게 피부에 와 닿는 일은 아니었다. 먹고살기가 최대 과제인 때여서 세종의 중요 치적으로 <농사직설(農事直說)>이란 농업기술 서적과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란 의학 서적을 보급한 것이 꼽힌다.

<농사직설> 덕분에 농민은 농산물 생산량을 크게 늘려 굶주림에서 벗어났다. 농사에 필요한 노동력을 늘리려면 아이들을 건강하게 키워야 할 때였다.

<향약집성방>은 중국에서 수입한 값비싼 약재 대신 조선 땅에서 나는 약초를 이용하는 방법을 모아놓은 책이다. 이 책은 소아과와 부인과를 독립 항목으로 내세울 만큼 출산과 양육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 향약 의술에서 해열제가 개발돼 소아병인 홍진, 두창 등으로 사망하는 아기가 줄어들면서 인구증가율이 높아졌다.

 

 

한글이 만들어진 지 600년이 돼간다.

창제 당시에는 상상도 못했던 디지털 시대가 열렸다. 한글이 편의, 속도를 생명으로 하는 온라인 체제에 가장 적합한 문자임이 속속 입증된다. 과연 세종의 최대 치적이 한글 창제임을 실감한다.

한국인이 한글 없이 말글살이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알파벳, 한자, 한글이 세계 3대 문자라는 주장을 펼쳐도 무리가 아닌 듯하다.

한글의 중요성을 한글날에만 외칠 게 아니라 평소에도 인식해야 하지 않나.

 

 

 

세자도 언문 배워 한문 읽어

 

한글 전문가가 집필한 <조선언문실록>은 한글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추적한 책이다.

정주리 동서울대 교양학부 교수와 시정곤 카이스트(KAIST) 인문사회과학과 교수의 공저다.

책날개의 저자 소개란을 보자.

정주리 교수에 대해서는 ‘국어학에 발을 내디딘 후 국어의 의미를 밝히는 데 관심을 가져왔다. 특히 국어 동사와 구문의 관계, 언어와 사회의 관계, 인간의 정신과 언어 코드의 비밀스러운 공모 관계를 밝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시정곤 교수에 대해서는 ‘말글 속에 숨어 있는 무한한 힘과 놀라운 질서의 세계에 매료돼 그 비밀을 찾는 언어 탐정으로서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왔다. 대중과 호흡하는 말글살이 연구를 지향한다’고 씌어 있다. 저자들이 언어에 숨은 비밀을 찾는 전문가여서 내용이 흥미진진할 듯하다.

 

책 제목에 붙은 ‘실록’은 ‘조선왕조실록’에서 비롯됐다. 한글이 창제된 세종 25년(1443)부터 마지막 왕인 순종 때까지 ‘조선왕조실록’의 한글 관련 기록을 찾아 분석한 것이다.

저자들은 “우리는 한글로 명명되기 이전, ‘언문’으로 불리던 우리 문자가 조선 백성들의 삶 속에서 어떻게 숨 쉬고 있었는지를 기록 영화 보이듯 전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저자 서문을 직접 옮겨보자.

 

어떤 때는 사랑하는 임에게 띄우는 편지에 쓰이고, 어떤 때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문에 쓰이고, 또 어떤 때는 암호 문자처럼 쓰이고, 또 어떤 때는 누군가를 고발하는 투서에 쓰이면서 삶 속에 녹아들어 간 한글의 모습을 생생하게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이 책에는 사건, 스캔들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다. 한글 자체를 고찰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사람들이 한글을 어떻게 사용했는가를 보려 한 때문이다.

 

이 책에 나오는 여러 이야기는 실록에 기록된 것이니만큼 당대에 이목을 끈 중요한 사건이었다.

정치적 사건에서부터 백성의 생활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아우르고 있다.

 

중국을 사대(事大)하고 공식 문서는 한문으로 써야 했던 시대에 세종이 한글 창제에 나선 것은 엄청난 정치적 결단이었다. 최만리 등 관료권력이 훈민정음 창제가 옳지 못하다고 상소를 올리는 등 거세게 반발했다.

세종은 1446년 9월 훈민정음을 세상에 공포하고 일반 백성뿐 아니라 지배 계층에서도 이 글자가 널리 쓰이기를 바랐다. 하급 관리인 서리를 뽑는 시험에 훈민정음을 포함시키라고 명하기도 했다.

 

 

이 책의 1장인 ‘언문을 사랑한 임금’에서 임진왜란 때 피란을 가던 선조가 백성들에게 언문 교서를 내리는 상황이 자세히 소개됐다.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물리치라는 내용인데 백성들에게서 폭넓은 지지를 얻고자 한문 교서를 언문으로 번역하도록 지시했다. 1592년의 일이니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 146년이 지난 때였다. 이미 언문은 백성들 사이에서는 유용한 소통 도구로 자리 잡았다.

 

조선시대에는 세자가 학문을 두루 익혀야 했다. 어릴 때부터 엄청난 공부에 시달렸다. 나이 어린 동궁이 옛 성현의 어록을 읽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숙종은 언문을 아는 보모를 왕세자에게 붙여주었다. 언문으로 가르치면 매우 효과적이라는 건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연애편지 스캔들로 궁녀 처형돼

 

한글이 만들어진 이후에야 한자음을 제대로 적을 수 있었다.

그전에는 같은 한자를 두고 읽는 발음이 달라 혼란이 심했다. 유생과 사대부도 왕실에서처럼 한문과 언해본을 대조해가며 공부했다. 우리말을 소리 나는 대로 적을 수 있는 언문의 유용성에 그들은 감탄했다.

관료들이 쓰는 공식 문서에도 언문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숙종 때의 대학자 남구만은 “문과에 응시하는 유생 중에 어려서부터 언문으로 글을 익혀 읽기만 하다가 정작 과거에 오르게 되면 한문 편지 한 장을 쓰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고 개탄했다.

 

 

이 책의 2장인 ‘사대부, 언문 편지를 쓰다’에서는 사대부가 아내, 어머니, 시집간 딸, 첩 등 여성에게 편지를 쓸 때는 언문을 사용하는 여러 사례를 담았다.

연산군 때의 일이다. 연산군은 전국의 기녀를 궁궐로 불러 모으는 채홍사라는 직책을 만들었다. 한곤이라는 중급 관리는 자신의 첩이 채홍사에게 끌려갈까 걱정돼 “예쁘게 꾸미면 뽑혀 갈 것이니 꾸미지 말라”고 당부하는 언문 편지를 썼다. 이 편지가 발각돼 한곤은 국왕을 능멸했다는 대역죄인으로 몰려 사지가 찢기는 능지처참형을 당했다.

 

‘암클’은 한글과 여성을 모두 비하하는 말이다. ‘암컷이 쓰는 글’이니 요즘 기준으로는 막된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여성들이 언문을 즐겨 사용했다. 궁궐에서는 왕후나 공주, 궁녀들이 애용했다. 말하는 대로 쓰니 편했다. 특히 진솔한 감정을 표현하는 연애편지 쓰기에는 언문이 좋았다.

 

 

이 책의 3장 ‘여성의 삶과 언문’에는 조선시대의 유명한 스캔들이 나온다.

세조 때 덕중이란 궁녀의 연애편지 사건을 보자.

덕중은 사모하는 귀성군 이준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언문 편지를 써서 환관 최호, 김중호에게 주었다. 지체 높은 이준에게 덕중 자신이 접근하기는 어려웠으므로 환관에게 전달을 부탁한 것이다. 이준은 이 편지를 받고 아버지 임영대군에게 사실을 고한다. 임영대군은 아들 이준을 데리고 국왕 세조에게 가서 이를 아뢴다.

세조는 두 환관을 기강문란죄로 다스려 궁궐 밖으로 끌어내 때려죽이게 했다. 세조는 편지를 쓴 덕중은 살려두려 했다. 덕중은 세조가 수양대군인 시절에 정을 맺은 여인이었다. 왕위에 오른 후 후궁으로 삼아 아들을 낳게 했다. 그 아들이 곧 죽었고 덕중은 후궁에서 궁인으로 강등됐다. 국왕에게서 버림받은 덕중은 잇달아 스캔들을 일으켰고 마침내 편지 심부름을 한 환관 둘을 죽게 한 것이다. 신하들이 덕중도 처형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바람에 세조도 어쩔 수 없었다. 덕중은 교형(絞刑)에 처해졌다.

 

 

4장 ‘백성의 소통법’에는 백성들의 말글살이 실태가 실렸다.

캐나다 선교사 제임스 스카스 게일은 1909년에 출간한 <전환기의 조선>이란 책에서 “전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도 한 달 남짓 공부하면 성경을 읽을 수 있다”면서 “중국이나 인도에서는 천 명 가운데 한 명이 읽을 수 있는 데 비하여 조선에서의 읽기는 거의 보편적”이라고 밝힌 바 있다.

영국인 지리학자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는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이라는 저서에서 ‘한강 유역의 하층민들이 한글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는 기록을 남겼다.

 

서당에서는 한문만 가르치지는 않았다. 한자의 음과 뜻을 언문으로 표기한 교재가 널리 사용됐다. <훈몽자회>가 그런 책이다. 학생들은 한문을 잘 익히려면 언문부터 배워야 했다.

 

 

5장 ‘언문, 국문이 되다’에서는 한글이 더욱 널리 쓰이는 상황을 알린다.

임진왜란 때 작전지시 등 비밀문서는 언문으로 작성됐다. 만약 왜군에게 넘어가더라도 그들이 언문을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국에 간 사신이 국내에 중국 사정을 알리는 문서를 작성할 때도 언문으로 썼다. 중국인들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1896년 4월7일에 창간된 ‘독립신문’은 한글 보급에 크게 기여했다.

띄어쓰기를 본격적으로 사용했고 한글학자 주시경이 고안한 표기법을 따랐기 때문이다. 신문 창간자 서재필은 미국에서 의사가 된 최초의 한국인인데 영문처럼 한글도 띄어쓰기를 해야 한다는 소신을 실천했다.

 

한글 사용 인구는 남북한 및 재외교민 등 모두 7500만명을 헤아린다. 소수 언어가 사라지는 추세인데 어떤 언어가 살아남으려면 사용인구가 1억명은 돼야 한단다. “한국어와 한글을 외국인에게까지 널리 보급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간다. 한국어 사용 인구 1억명 시대를 맞이하려면 종합 대책을 세워 꾸준히 추진해야 할 것이다. 한글이 가장 과학적인 문자라는 점을 요즘엔 문자 메시지를 보낼 때마다 실감한다.

- 고승철, 저널리스트·고려대 미디어학부 강사 koyou33@empas.com

- 신동아, 2011년 05월호 620호 (p584~587) [고승철의 읽으며 생각하기]

 

 

 

 

 

 

 

 

 

 

한글은 어떻게 國文이 되었을까… ‘조선언문실록’

 

 

 

<조선언문실록>/ 정주리 시정곤 지음/ 고즈윈 발행ㆍ240쪽

 

 

 

'훈민정음'이란 이름이 버젓이 있음에도 조선시대에 광범위하게 통용된 한글의 이름은 '언문(諺文)'이었다. 중국의 글자를 '문자(文字)'라 부르던 것과 비교하면 오늘날의 시각에서 언짢은 말이다.

그러나 저자들은 굳이 ‘한글실록’이 아닌 ‘조선언문실록’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백성들의 말이었고 여성들의 말이었던 한글의 실체가 옛날의 용어 속에 드러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훈민정음 반포 초기 최대의 난관은 유학자들의 뻣뻣한 태도였다.

최만리가 “어찌 스스로 이적(夷狄)이 되려 하는가”라며 훈민정음 반포에 반대했음은 널리 알려진 일.

문종이 즉위한 후에도 사대부들은 언문 서적 간행기관인 정음청을 혁파하라는 상소를 끊임없이 올려댔다. 왕자들이 정음청에서 불교 서적을 간행하는 일을 막기 위함이었다. 문종의 환관 중용을 막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정음청은 결국 단종 즉위년(1453)에 폐지됐다.

저자들은 언문의 보급이 정치 · 사회적으로도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고 말한다.

잘못된 정치나 부패한 관료들에 대한 투서가 잇따르고, 불륜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언문으로 연애편지를 썼다가 화를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투서에 분개한 연산군이 언문 사용을 금지시킨 적도 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언문은 구한말 정식으로 ‘국문(國文)’으로 인정받기 전부터 광범위하게 사용됐다. 역설적으로 언문이 ‘여인들과 백성들의 글’로 굳어졌기 때문이라는 게 저자들의 분석이다.

왕이건 사대부이건 여인과 소통하고자 하는 남자들은 언문을 써야만 했다는 것.

한문을 읽고 쓸 줄 아는 왕비나 대비라도 교지를 내릴 땐 언문으로 했다. 백성들을 상대로 방을 붙일 때도 언문이 유용하게 사용됐음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언문이 정착된 후 조선의 ‘문맹률’은 어느 정도였을까.

정확한 수치를 아는 건 불가능하지만 몇 가지 단서는 있다.

구한말 한국에 왔던 캐나다인 선교사 제임스 스카스 게일은 <전환기의 조선>이란 저서에서 “중국이나 인도에서는 천 명 가운데 한 명이 읽을 수 있는 데 비하여 조선에서의 읽기는 거의 보편적이다”라고 밝혔고, 이사벨라 비숍도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란 책에서 “마을마다 서당이 있고, 읽고 쓰지 못하는 조선인을 만나는 일이 드물었다”고 말한 러시아 장교의 이야기를 적고 있다.

저자들은 이런 기록들을 토대로 개화기 조선 백성들이 대부분 글을 알고 있었다고 추측한다.

이 책은 언문과 관련한 여러 가지 비화들이 실려 있어 대중이 읽기에 어렵지 않다.

임진왜란 때 언문을 비밀문으로 사용했던 일, 중국인에게 언문을 가르쳐 주었다가 기밀 누설의 혐의를 받은 문관 주양우 사건 등이 흥미롭다.

창제된 지 568년이 된 한글의 정사와 야사가 모두 궁금한 이에게 권할 만하다.

 

 

 

 

 

16세기 언문 소설 인기 급등
비녀 · 팔찌 팔아 빌리기 일쑤 - '쾌가'란 책 대여점도 생겨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한글로만 지은 교서(敎書ㆍ왕의 명령을 담은 문서
)를 여러 차례 내렸다.

조선 시대 교서는 당연히 한문으로 쓰는 것이 원칙이었다. 더러 언문 번역본을 함께 반포한 경우도 있지만 교서 전체를 언문으로 내린 예는 없었다. 선조가 유난히 한글을 아꼈기 때문일까.

 

우리말 교양서를 꾸준히 출간해온 정주 리(동서울대) 시정곤(카이스트) 교수의 공저 <조선언문실록>은 조선 시대 한글이 실생활에서 어떻게 쓰였는지를 흥미롭게 전한다. 제목에 드러나듯이 <조선왕조실록>에서 왕실부터 민초들에 이르기까지 한글과 관련된 이야기를 추려 엮었다.

선조의 언문 교서에는 시대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1592년 4월 선조가 피란길에 오른 뒤 관군의 투항과 수령들의 줄행랑이 줄 잇는 가운데 천대받던 노비와 백성들이 의병을 일으켜 항거했다. 믿을 것은 백성뿐이라고 여긴 선조는 언문 교서를 통해 동요하는 민심을 달래고 의병 참여를 독려하기에 이른다.

 

그해 9월 방방곡곡에 뿌려진 교서 내용은 이렇다.

'진실로 손에 침을 바르고 일어나서 우리 조종의 남아 있는 은덕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내 관작을 아끼지 않겠다. 살아서는 아름다운 칭송을 받고 자손까지도 그 은택이 유전되리니 이 어찌 아름답다 하지 않을쏘냐.' 훈민정음 창제 후 150년, 언문이 백성의 중요한 소통도구로 자리잡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사대부들도 아녀자와 소통할 때는 한글을 썼다.

자서전 출간으로 다시 화제에 오른 신정아씨와 변양균씨의 불륜 관계는 신씨의 학력위조 사건 수사 당시 검찰이 뒤진 이메일을 통해 드러났는데 그 옛날에는 언문 편지가 범죄 수사의 단서가 되기도 했다.

연산군 2년(1496) 지방군수 유인홍은 첩에게 살해된 딸이 자살한 것으로 꾸몄다가 첩과 주고받은 편지가 발각돼 유배형에 처해졌다.

백성들에게 언문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주요 수단이었다.

광해군 때 역적으로 몰려 죽은 이홍로의 처는 그런 사정을 적어 언문 상소를 올렸다. 당시만 해도 언문으로, 더구나 아녀자가 상소를 올리는 것은 금기였다. 의금부 관리들은 이를 왕에게 고했다가 물의를 빚자 자신들의 우매한 행위를 벌해 달라고 청했으나 광해군은 "대신과 관계된 일이므로 법규에 구애받을 수 없다"며 대죄를 물리는 유연함을 보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언문 상소는 빈번해지고 사연도 다양해진다.


 

16세기 이후에는 언문 소설이 큰 인기를 끌었다.

채제공은 아녀자들이 언문 소설에 빠져 "식견도 없이 비녀와 팔찌를 팔거나 동전을 빚내서까지 다투어 빌려다가 긴 날의 소일거리로 삼는다"('여사서서' <번암집>)고 개탄하기도 했다.

이런 유행을 타고 '쾌가'라 불리는 책 대여점이 성행하고, 사람들을 모아놓고 유명 소설을 읽어 주는 '전기수(傳奇叟)'라는 직업도 생겨났다.

그런 언문이 정식으로 국문 지위에 오른 것은 1894년 갑오개혁 때였다.

그러나 책에 소개된 수많은 사연은 언문이 결코 천대받는 글이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저자들은 풍부한 사례를 들어 "언문이 어떤 의미에서는 조선의 공용 문자였다고 볼 수도 있다"고 말한다.
- 2011/03/25 한국일보

 

 

 

 

 

조선의 백성들, 나랏글로 삶을 기록하다

 

우리 민족의 찬란한 역사와 기록문화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온 우리의 겨레 글, 한글의 발자취를 되돌아다 보면, 우리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를 마주하게 된다.

한글 역사 500년, 어떤 이야기가 감춰져 있는 것일까?

 

 

겨레의 글, 한글 다시 발견되다

 

그 쓰임새의 우수성과 과학성에 매료되어 요즘은 외국에서도 배우러 오는 이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우리의 글, 한글.

1443년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은 잘 알다시피, 1446년 「훈민정음 해례본」을 간행하며 ‘어린 백성들을 편안하게 깨우치는’ 나랏글로 만천하에 반포되어 쓰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생긴 지 60년도 채 되기 전에 「훈민정음 해례본」은 모두 사라졌고, 그 이후 두 번 다시 간행되지 못했다. 그래서 그 판본 한 권이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될 때까지 500년 가깝게 창제원리와 만든 의도를 바로 알지 못한 채, 우리는 한글을 그냥 쓰고 읽기만 했어야 했던 것이다.

우리가 자랑하는 한글에는 이런 불가사의하고도 슬픈 역사가 숨겨져 있다.

 

 

반쪽짜리 글이라 업신여기고…

 

한글에 이런 아이러니컬한 역사가 숨겨져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한자문화를 고수해 온 조선 양반사회에서 그 가치가 폄하되었기 때문이었다.

한글은 우리말을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뿐만 아니라 소리를 글로 담아내는 만큼 인간의 감정과 느낌을 솔직하고 그대로 표현하고 기록할 수 있는 문학적인 문자로 만들어졌다.

감정을 그대로 밖으로 드러내서는 안 되는 조선의 양반들한테서 한글이 외면당할 수밖에 없었던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서 한자에 정통하고 익숙한 양반들에게서 한자는 식자층끼리만 통하는 귀한 글로 여겨졌고, 아녀자들이나 서민들이 힘 안 들이고 배워 쓰는 한글은 암클이라 하기도 하고 반절 밖에 안 되는 언문 등으로 불리며 그 가치가 낮게 여겨졌던 거다.

하지만 한글은 결코 서민들만의 글이 절대 아니었다. 또 다른 이율배반적인 사실(史實)이 한글의 역사 속에서는 숨어 있었던 것이다.

 

 

만백성의 글, 그래서 한글인 게다

 

조선시대, 서민들이 편안하게 즐기도록 한글로 제작되던 수많은 서적들을 저술하고 기록하던 이들은 분명 조선의 엘리트집단, 양반들이었다.

그들은 가사와 소설 같은 글 말고도 자신들이 자주 접하던 유가 교훈서와 경전을 한글로 풀이해 저술하기도 했고, 「농가월령가」 「구급간이방」 같은 실용적인 농서와 의학서들을 때로는 한글과 한문을 함께 섞어 적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한글로만 상세히 기술하여 백성들의 삶에 도움을 주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한글의 창제를 주도했던 조선의 왕실은 한글로 작성된 문서와 글들을 널리 편찬하고 발간하여 백성들의 눈과 귀를 열게 했고, 서민들의 계몽과 한글의 전파에 그 누구보다도 앞장섰다.

 

글을 읽고 즐기는 이들은 서민들이었으나 그 글을 적고 기록하는 이들은 양반들이었듯이, 조선의 양반과 서민들 모두가 나랏글, 한글로 자신들의 삶과 흔적을 기록하고 노래하며 더불어 살았던 것이다.

- 국립중앙박물관 웹진 MUZIN 070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