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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 날개를 달아준 이름 - 소파 방정환

Gijuzzang Dream 2011. 5. 28. 15:01

 

 

 

 

 

 

 

 

제한된 삶을 살았던 근대 초기 어린이

 

근대 초기 우리나라의 아동은 자신의 방이 따로 없이 성인들과 함께 지내는 공간에서 살아야 했다.

아동은 동성의 성인 근처에 머물렀고, 아동에 사적 행위, 사적 생활에 대한 배려는 무시되었다.

남녀유별의 사회적 가치에 따라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된 어른들의 준별거 생활은

자녀들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자녀들은 성별에 따라 서로 다른 성장과정을 거친다.

남아는 7~10세가 되면 어머니 곁을 떠나 사랑채나 초당에서 기거하면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훈육을 받으면서 자랐다. 여아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다가 시집갔다.

여아들은 다듬이질, 바느질, 문안편지 쓰기, 책 읽기 등을 하며 여성과 어머니로서의 자질을 배워나갔다.

자연물을 가지고 놀이하는 것은 걸음마 시기 이후부터 몇 년 동안만 가능했고

학령기가 되면 성인의 거처에서 성별에 따른 사회화를 학습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아동은 어느 날 갑자기 언어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이것이 가져다 준 두려움과 공포를 견디어야 했다.

학교생활은 규율을 지켜야하는 엄격함이 지배하였고, 일본의 아동 노동착취에 활용되면서 아동들은

체력단련이라는 명목 하에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어 오는 등 땔감을 마련하는데 수시로 동원되었다.

오늘날의 아동에 비해 자연과 더불어 지낼 수 있어 즐거움을 느끼기도 하였지만

놀이가 주는 흥겨움과 유희, 그리고 탐구심과 호기심을 발휘하기는 어려웠다.

단 한마디의 한국말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공포와

이러한 규율을 따르지 않으면 교사로부터 배척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훨씬 컸다.

 

 

그 때 그 시절의 이야기


당시 아동들의 삶이 열악하였던 것은 학교 입학률에도 나타난다.

1919년 3개의 면에 1개씩의 보통학교를 세우는 계획이 추진되었지만

학생들을 모두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취학률은 1919년 4.0%, 1926년 17.6%, 1932년 18.9%에 그쳤다.

졸업률 또한 1924년 51.6%, 1928년 44.9%로 매우 저조했다.

1936년 보통학교 입학대상 아동 2,769,364명 중 취학한 아동은 71,429명에 불과하였고

이중 남아가 4분의 3을 차지하고 여아는 불과 8분의 1에 그쳤다(동아일보 1936. 1. 30일자).

학령기 아동이 가족의 ‘일손’으로 생활 전선에 나가야 했던 ‘그 때 그 시절’이야기다.

실제로 월사금을 내지 못할 정도로 절대적 빈곤에 시달리던 가정이 많던 때이다.

 

 

 

1931년 잡지 『어린이』를 통해 신영철 선생은

당시 아동들의 삶이 얼마나 피폐하고 궁핍했는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조선의 어린이! 그들은 정말 가엽습니다.

간신이 학교를 간대야 월사금이나 학용품 몇 개만 사려해도 쳐다보게 되고

그나마 학교라고 가보지도 못하는 수만흔 어린이들은 부형들의 꾸지람과 걱정미테서 

땀을 흘려가며 어린 뼈가 휘도록 일하지 안흐면 할 수 없는 형편에 잇는 것이

오늘 조선소년의 처지입니다.”

 


아동학대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1930년 8월 15일자 조선일보 사설은 ‘아동학대방지령 실시 문제’라는 제하로

아동학대방지법이 제정되어야 할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아동의  학대는 예로부터 잇는 것이요, 그것이 실지로 나타나는 방면은 다양하다.

고로 학대의…… 몹시 일을 시키는 것도…… 몹시 때리는 것도 사학대의 일태일 것이다.

아동학대란 기아를 원숭이나 노리개가티 유용하야 돈을 버는 행위를 획하는 것이다.

고로 아동학대방지령의 대상으로 하는 바는 이 학대를 금지하자는데 잇는 것이다”

 

그 이후 줄곧 아동학대 기사가 눈에 띄는데 1931년 10월 27일자 사설은 아동구타 문제를 다루고 있다.

1933년 5월 21일자 동아일보 사설에서도 아동 중심의 사회라는 제하의 사설에서

끔찍한 아동학대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는 현실을 개탄하고

아동학대를 근절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아동과 관련된 기사는 주로 임신과 출산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아동과 아동의 삶은 아동학대 등과 같은 사회적 이목을 끌만한 사건 외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다.


아동은 가문의 계승과 농업을 기반으로 한 가계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수단적 존재로

아동 개인의 생각과 감정 표출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아동은 위험을 이해하거나 자신의 발달에 해로운 영향을 미치는 것에 대해

저항하고 어려움을 피하는데 취약하여 자신을 옹호해 줄 수 있는 어른이 필요하다는

아동의 자연스러운 발달적, 의존적 속성은

아동이 존재 그 자체로서 사회적 존엄성을 획득하기 어렵게 하였다. 

 

 

 

 

어린이의 인권을 살려낸 인물, 방정환


하지만 방정환은 달랐다.

 

“~조선 사람들은 여태까지 내리 눌리고 짓밟혀서 아프고 슬픈 생활만 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그 불쌍한 사람 중에서도 (중략) 참담함 중에 참담한 인생이 우리들 조선의 소년소녀였습니다” 라는 식민지배의 고통과 어려움을 감내하는 아동의 삶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내었다.

 

방정환은 아동의 “어림(幼)은 크게 자라날 어림이요, 새로운 것을 지어낼 어림”이라고 인식하며 아동의 잠재된 발달 가능성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신여성(1924)』에 실린 수필 「어린이 찬미」에서 방정환은 “이 세상의 평화라는 평화”는 모두 가지고 있고,

“더할 수 없는 참됨과 더할 수 없는 착함과 더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갖추고

그 위에 또 위대한 창조의 힘까지 갖추어진 어린 하느님이다”라며

아동을 천성에 가깝고 신에 근접한 것으로 간주하고,

개인의 일생에서 최고의 시기이며 순진무구한 시기로 묘사하였다.


더 나아가 방정환은 아동존중사상을 발전시켰다. 이는 본격적인 소년운동으로 이어졌다.

 

방정환이 『어린이』 편집자로 어린이 독자들에게 쓴 ‘어린이 동무들에게(『어린이』, 1924. 12)’에서

“짓밟히고 학대받고 쓸쓸하게 자라는 어린 혼을 구원하자! 이렇게 외치면서

우리들이 약한 힘으로 일으킨 것이 소년운동이요, 각지에 선전하고 충동하야 소년회를 일으키고

또 소년 문제연구회를 조직하고 한편으로 『어린이』잡지를 시작한 것이

그 운동을 위하는 몇 가지의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조선의 가족구조, 가옥의 형태 등이 모두 성인 중심으로 되어 있음을 비판하였다.


방정환은 어린아이가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어야

우리나라가 일제의 압박과 절망 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보았다.

방정환은 성장하는 힘을 가진 어린아이에게서 희망을 찾았다.

이는 일제 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고

꿈도 꽃 피우지 못했던 당시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참담한 대우를 받고 희망이 없던 아동의 삶에 방정환은 변화를 약속하였다.

그것은 「아동권리 공약 3장」이다.

 

1923년 4월 40여개의 소년회를 연합하여 조선소년운동협회를 창립하고,

1923년 5월 1일 제1회 어린이날 기념식을 개최하였다.

역사적인 「아동권리 공약 3장」은 이날 선포되었다.

 

「아동권리 공약 3장」은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할 것’,

‘어린이는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만 14세 이하의 아동에 대한 무상 또는 유상의 노동을 폐할 것’,

‘어린이가 배우고 즐거이 놀만한 각양의 가정 또는 사회적 시설을 행할 것’을 제시하였다.

 

이 내용은 당시 아동을 부모의 예속물로 보거나 아직 미성숙한 어른으로 보던 시대상황을 고려할 때

획기적이었다. 아동과 성인의 인간관계를 새롭게 정리하였다.

 

 

 

「아동권리 공약 3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우리나라 아동의 삶에 구현 되었는지를 확신하기 어렵다.

흔히 오늘날 아동의 삶이 과거보다 더 많은 , 그리고 특별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본다.

인터넷의 보급으로 시작된 X세대부터 W세대, P세대, M세대 그리고 PDS세대로 대별되는

아동의 변화는 자신들의 자기결정권을 과거에 비해 확대시켰다.

그러나 아동은 ‘더 빨리’, ‘더 많이’하고 싶어 하고 또 그래야 한다고 강요받는다.

여기에 아동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고민이 있다.

현대사회는 아동에 대한 국가의 획기적인 투자를 요구하고 있다. 

 

- 황옥경  서울신학대학교 보육학과 교수  

- 사진ㆍ한국잡지협회, 연합콘텐츠,

  역사비평사 출판(우리는 지난 100년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한국역사연구회)

- 2011-05-16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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