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왕조승(興王肇乘)> - 홍양호가 정조에게 헌정한 조선 건국사
우리나라에는 건국 이야기가 많다. 역대로 많은 나라가 흥망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고조선을 일으킨 단군을 필두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탐라 등 여러 나라에서 건국 영웅이 등장했다. 처음엔 건국 영웅의 신이(新異)한 사적을 드러낸 개인의 이야기였다. 그러다, 건국 영웅의 선조들로부터 건국 영웅에 이르기까지 가문의 이야기가 나왔다. 고려와 조선의 경우가 그렇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건국 이야기는 많아도 건국사만 전문적으로 서술한 책자는 드문 것 같다. 고려중기 『동명왕편(東明王篇)』이나 조선전기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가 건국사에 근접한 책이지만 역사가 아닌 시가(詩歌)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 조선후기 홍양호(洪良浩, 1724~1802)가 정조에게 헌정한 『흥왕조승(興王肇乘)』은 글자 그대로 조선 건국사이다. 굳이 조선 건국의 당위성을 천명할 필요가 없어 보이는 홍양호와 정조의 시대에 과연 조선 건국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함경도 지도 붉은 원 부분이 경흥(慶興) 지역이며 그 아래 적지(赤池)라는 지명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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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설
우리나라 역사가 중에서 건국사 전문가는? 문제는 어렵지만 답은 쉽다. 한국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 박은식(朴殷植 1859~1925)이다. 그는 1907년 스위스의 건국 이야기를 담은 실러의 희곡 『빌헬름 텔』을 개작한 『서사건국지(西士建國誌)』를 번역하였다. 스위스의 건국, 그것은 합스부르크 왕국에서 파견된 외국인 관리에게 고통 받는 스위스 백성이 스스로의 힘으로 외국인 지배자를 몰아내고 자유를 되찾은 장엄한 역사였다. 한국의 백성이여, 스위스의 백성이 되기를!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11년 『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를 완성하였다. 발해의 건국, 그것은 멸망한 고구려 유민이 분발하여 조국을 회복하고 강국을 건설한 특별한 역사였다. 한국의 백성이여, 발해의 백성이 되기를! 박은식이 발해의 건국사로 두만강 이북을 보았다면 장지연(張志淵)은 조선의 건국사로 두만강 이북을 보았다. 장지연은 『대한강역고(大韓疆域考)』에서 두만강 이북을 대한 황실의 발상지로 중시하면서 대한제국이 간도를 영유해야 하는 당위성을 무엇보다 여기에서 구하였다. 사실 두만강 이북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가문의 최초 기업(基業)이었다. 이성계의 고조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와 목조의 아들 익조(翼祖) 이행리(李行里)는 두만강 이북 오동(斡東) 지역에서 원 제국의 외관(外官)인 다루가치가 되어 여진족과 섞여 지내면서 유력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세종대 정인지(鄭麟趾)가 지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서 목조가 다루가치가 되어 동북의 인심이 모두 목조에게 돌아가 왕업(王業)의 흥기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서술한 것은 조선 건국의 역사적 기원으로 1255년 두만강 이북의 오동을 적극적으로 기억할 필요가 있음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스스로 ‘조선태사(朝鮮太史)’를 자처했던 홍양호, 그는 『흥왕조승』 뿐만 아니라 『영종실록(英宗實錄)』, 『중종보감(中宗寶鑑)』, 『갱장록(羹墻錄)』, 『동문휘고(同文彙考)』, 『중흥가모(中興嘉謨)』,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 등을 편찬한 정조대의 일류 역사가였다. 그는 정조가 즉위한 후 홍국영에게 밀려나 함경도 경흥에서 외관 살이를 할 무렵 북관 지역의 풍토와 고적을 상세히 조사하였고, 이십여 년이 지나 이를 토대로 조선 건국기의 사적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역사책 『흥왕조승』을 편찬하여 정조에게 헌정하였다. 1799년 12월 21일, 일흔 여섯 노신(老臣)의 필생의 작품이었다. 『흥왕조승』을 정조에게 헌정한 홍양호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혹시 8년 전 황초령(黃草嶺)에서 진흥왕 순수비를 발견했던 기쁨의 순간을 떠올리지는 않았을까? 어릴 적에 야사를 읽다가 선조 때 신립이 함경도에서 진흥왕 순수비를 발견하고 탁본까지 했다는 꿈같은 기록과 만났던 소년 홍양호. 그 후 매번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하는 관리들에게 순수비의 행방을 물었던 집념의 세월들. 세월이 흘러 이제는 회갑을 훌쩍 넘긴 노인 홍양호. 함경도 지역 개발을 추진하는 정조의 의지. 장진부(長津府)의 개척과 함흥과 갑산 사이의 교통로 확보. 마침내 홍양호의 부탁을 경청하고 끝내 황초령에서 순수비를 발견한 함흥 판관 유한돈(兪漢敦). 순수비 탁본을 전해 받은 홍양호의 손길은 어쩌면 정복군주 알렉산더 대왕의 잊혀진 유물을 발견한 고고학자의 떨리는 손길은 아니었을까? 그랬기에 그는 함경도에서 발견한 정조 치세의 조선 사회의 역동성을 가슴에 담아 함경도에 서려 있는 조선 건국의 현장들을 보듬고 끝내 조선 건국사를 완성하여 정조에게 이를 헌정한 것이다. 이를 받은 정조의 마음도 뭉클했을 것이다. 인간 정조의 고난과 시련은 건국기의 제왕이 창업 과정에서 겪는 그것과 방불한 것이었다. 그는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고 우뚝 일어섰다. 만일 그가 계획한 대로 정말 1804년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스스로 상왕이 되었다면, 그는 참으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나 태종과 같은 임금이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랬다면 홍양호의 『흥왕조승』은 정조의 제2의 건국을 예고하는 책자로까지 해석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조는 『흥왕조승』을 받은 후 여섯 달이 지나 세상을 떠났고, 결국 그는 조선 건국사를 헌정 받은 세종과 같은 임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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