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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왕조승(興王肇乘)> - 홍양호가 정조에게 헌정한 조선 건국사

Gijuzzang Dream 2011. 8. 1. 18:26

 

 

 

 

 

 

 

 

 <흥왕조승(興王肇乘)> - 홍양호가 정조에게 헌정한 조선 건국사

 

 

 

우리나라에는 건국 이야기가 많다. 역대로 많은 나라가 흥망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고조선을 일으킨 단군을 필두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탐라 등 여러 나라에서 건국 영웅이 등장했다. 처음엔 건국 영웅의 신이(新異)한 사적을 드러낸 개인의 이야기였다.

그러다, 건국 영웅의 선조들로부터 건국 영웅에 이르기까지 가문의 이야기가 나왔다.

고려와 조선의 경우가 그렇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건국 이야기는 많아도 건국사만 전문적으로 서술한 책자는 드문 것 같다. 고려중기 『동명왕편(東明王篇)』이나 조선전기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가 건국사에 근접한 책이지만 역사가 아닌 시가(詩歌)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 조선후기 홍양호(洪良浩, 1724~1802)가 정조에게 헌정한 『흥왕조승(興王肇乘)』은

글자 그대로 조선 건국사이다.

굳이 조선 건국의 당위성을 천명할 필요가 없어 보이는 홍양호와 정조의 시대에 과연 조선 건국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엎드려 생각건대 우리 동방에 나라가 있으니 아득한 태고 적에 단군이 처음 나오시고 기자가 동으로 오셨습니다.

이때 이후부터 삼한(三韓)으로 나뉘고 구이(九夷)로 흩어졌는데, 신라와 고려에 이르러 비로소 통일이 되었지만 유교와 불교의 교화가 서로 반반이고 중화와 오랑캐의 풍속이 서로 섞여 있었습니다.

렇지만 땅으로는 연(燕)과 제(齊)에 인접해 있고, 별자리로는 기성(箕星)과 두성(斗星)에 상응해 있었기 때문에, 단군의 일어남은 요임금의 때와 나란하였고 기자의 봉해짐은 주 무왕의 때에 시작되었습니다.

풍기가 서로 근접하고 교화가 점진하여 의관은 모두 중화 제도를 준용하였고 문자는 번문(番文)과 범문(梵文)을 쓰지 않았으며 ‘소중화’라 칭해지기도 하고 ‘군자의 나라’라 칭해지기도 하여, 왜가리 소리를 내며 옷깃을 왼쪽으로 다는 오랑캐의 풍속과는 현격히 달랐습니다.

다만, 왕씨 세상이 된 뒤부터 말갈과 땅이 연접하고 몽골의 원나라와 혼인이 이어졌기 때문에 예교가 흥성하지 않고 윤리가 밝혀지지 않아서 폭력을 능사로 삼아 거의 해마다 반란이 일어났으며 단군과 기자의 유풍은 아득히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천지가 개벽되고 운수가 밝아져 마침 명나라가 처음 나라를 만들 적에 우리 왕조가 일어나 국호를 하사받고 면류관을 하사받으며 내지와 똑같이 보는 영예를 입었고, 하늘과 땅이 더불어 덕을 합하고 신과 사람이 도와주었습니다.

이에 우리 태조 대왕은 거룩하고 신령한 바탕으로 천 년에 한 번 있을 운세를 만나 남쪽을 치고 북쪽을 쳐서 대번에 삼한을 소유하였습니다.

창업하여 왕통을 전하고 제도와 기강을 세우며 불교와 노장 같은 이교를 물리치고 선왕의 큰 법을 펴니 빛나는 문화가 상(商)과 주(周)의 수준이었고 밝은 성교(聲敎)가 천하에 미쳤습니다.

유구(琉球)가 조공을 바치고 섬라(暹羅)가 귀순하며1) 오랑캐(兀良哈)2)와 원료준(源了浚)3)의 무리가 서로 이끌고 약속(約束)을 들었습니다.

서쪽으로는 발해(渤海)4)에 이어지고 동쪽으로는 슬해(瑟海)5)를 다하였으며, 귤과 유자 같은 과일이 남쪽에서 올라오고 담비와 표범 같은 가죽들이 북쪽에서 내려와 상자마다 늘어섰습니다. 어염(魚鹽)의 풍족함이 오(吳)와 초(楚)와 겨룰 만하였고 견사(繭絲)의 이로움도 제(齊)와 노(魯)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예악(禮樂)이 행해지고 교화가 화락하여 집집마다 제사를 지내고 아이들도 시서(詩書)를 암송하며 말몰이꾼이나 양치기도 삼년복(三年服)을 입고 부엌데기나 아낙네도 재혼을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이는 우리 동방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래로 일찍이 있지 않았던 일로 기자가 펼친 홍범구주(洪範九疇)의 교화가 오늘날에 와서야 비로소 행해지게 된 것입니다.

아, 성대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근본하는 바 없이 이루어진 것이겠습니까.

(중략)


1) 유구(琉球)가 조공을 바치고 섬라(暹羅)가 귀순하며 : 『태조실록』 1397년 8월 6일에 유구국(琉球國) 중산왕(中山王) 찰도(察度)가 사신을 보내어 글을 바치고 방물(方物)을 바쳤으며, 잡혀 있던 사람과 바람을 만나 표류한 사람 9명을 돌려보냈다는 기사가 있다. 1393년 6월 16일에는 섬라곡국(暹羅斛國)에서 그 신하 장사도(張思道) 등 20인을 보내어 소목(蘇木) 1천 근, 속향(束香) 1천 근과 토인(土人) 2명을 바쳤다는 기사가 있다.
2) 오랑캐(兀良哈) : 한국 측 사서에서 두만강 이북 지역에서 우디거(兀狄合), 여진(女眞)과 더불어 통칭 야인(野人)이라 불렸던 종족의 하나. 중국 측 사서에 등장하는 몽골 지역에 거주한 동명의 부족과 어떤 관계인지는 미상이다.
3) 원료준(源了浚) : 일본 족리막부(足利幕府) 시대에 구주탐제(九州探題)였던 금천료준(今川了浚)을 가리킨다.
4) 발해(渤海) : 요동반도와 산동반도 사이, 지금 중국의 요녕성(遼寧省), 하북성(河北省), 산동성(山東省), 천진시(天津市)에 인접한 바다.
5) 슬해(瑟海) : 경흥부(慶興府)에서 동쪽으로 4, 50리 쯤 떨어져 있는 바닷가이다.
  


  

 

다만 이렇듯 위대한 사적(事蹟)이 혹 패관(稗官)이나 야승(野乘)에나 보일 뿐 미더운 책으로 간행됨이 없이 단지 구전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은 가만히 한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난해 북방 변경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산천을 두루 보면서 왕업을 일으킨 고적(古蹟)에 눈길을 주고 몸소 찾아갔는데, 마치 풍패(豊沛) 고을에 가서 대풍가(大風歌)6)를 직접 듣는 것처럼 하염없이 감회에 젖었지만 이를 표현하고 드날릴 수 없었습니다.

얼마 아니 있어 다시 외람되게 실록(實錄)을 찬수하는 직임을 받아 금궤(金櫃)와 석실(石室)에 비장된 책을 엿보니, 전장과 제도의 성대함은 모두 『국조보감(國朝寶鑑)』에 실려 있었지만 오랑캐를 물리치고 영토를 개척한 공로는 모두 고려시대에 속하는 것이라 증거할 수 없었습니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한 책은 즉위하기 전의 훌륭한 업적을 자세하게 기재하였지만, 이 책은 전적으로 공적을 노래하고 찬송하는 것으로 대요와 세목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단마다 비유를 가설하고 멀리 고사를 인용하니 기사하는 문체와 차이가 있고 편년의 순서도 없으며 앞뒤의 순서가 잘못되고 세대를 자세히 살피기 어려워 후세에 전할 만한 미더운 역사책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였습니다.  

신은 이에 『고려사(高麗史)』 및 『용비어천가』의 내용을 스스로 발췌하고 편집하되 연도별로 나누어 사실들을 묶었고, 물러나 다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및 『북도능전지(北道陵殿誌)』7), 『송경지(松京誌)』와 국초(國初)의 문집들을 널리 상고하여 왕업을 일으킬 때의 사실을 언급한 부분들을 수집하고 채택하였습니다.

그리고 저것을 인용하여 이것을 증명하고 번잡함을 삭제하여 간략하게 다듬고 조목은 달라도 일관성 있게 엮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간행된 성서(成書)만을 따랐을 뿐 사사로이 보관된 어설픈 기록은 감히 섞어 넣지 않아 근엄하면서도 정밀한 결과가 나오게 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는 사체(事體)를 중하게 하고 위대한 업적을 현창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윽고 세 편으로 완성한 다음에 분명하게 전해 오는 북방의 고적을 덧붙이고 열조에서 공적을 기술하고 발휘한 말을 각각 기재하고 사신(詞臣)이 찬양하여 칭송한 말을 아래에 언급하였습니다.

총괄해서 네 편으로 만든 다음에 ‘흥왕조승(興王肇乘)’이라고 이름하였습니다.

(중략)


6) 대풍가(大風歌) : 한 고조(漢高祖)가 천자(天子)가 된 뒤에 고향인 풍패(豐沛)를 지나다가 부로(父老)들과 술을 마시면서 노래를 부르기를, “큰바람이 일어남이여 구름이 흩날리도다. 위엄이 사해(四海)를 덮음이여 고향에 돌아왔도다. 어쩌면 맹사(猛士)를 얻어 사방(四方)을 지킬꼬." 하였다.
7) 북도능전지(北道陵殿誌) : 위창조(魏昌祖)가 영조의 명을 받아 1747년에 만든 북로능전지(北路陵殿誌)를 보충하여 1758년 함경감영에서 간행한 함경도의 능전에 관한 책자이다. 8권 3책이다. 함경도 함흥(咸興)·영흥(永興) · 안변(安邊) · 문천(文川) · 덕원(德源) 등지에 산재해 있는 태조 내외 8고조의 능과 전(殿) · 궁(宮)에 대하여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 선원보략(璿源譜略) · 여지승람(輿地勝覽) · 열성지장(列聖誌狀) 및 기타 자료를 근거로 상세히 서술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임금께서는 선왕을 계술하는 효성에다 선조를 추모하는 정성이 돈독하여 적도(赤島)8)에 비(碑)를 세우고 경흥(慶興)의 저택9)을 기념하며 독서당(讀書堂)과 치마대(馳馬臺)10)와 같은 고적들을 천명하여 선조의 공적을 선양하되 아무리 시대가 멀어도 현창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심지어 상산(象山)의 유지(遺址)11)까지 모두 비석을 세워 표장하였습니다.

수 백 년 동안 미처 행하지 못했던 전례가 이에 크게 갖추어졌으니, 아 지극합니다. 지금 신이 올리는 책을 보고 마음에 느껴지는 것이 있거든 한가할 때에 특별히 살펴보고 내각에 보관하여 빠진 역사를 보충하소서.

우리 열조(列祖)에서 덕업을 얼마나 쌓았는지 개창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후세에 밝게 전해질 것입니다.

이루어진 것을 지키고 후왕을 넉넉하게 해 줄 계책을 늘 생각해야 하고 어기지 말고 잊지 말아야 하리니 만세토록 태평한 세상에서 무궁한 복을 받을 것입니다. (후략)


8) 적도(赤島) : 함경도 경흥(慶興) 소재. 익조(翼祖)가 여진족의 추격을 피해 오동을 떠나 이곳에 들어와 움집을 짓고 살았다. 익조가 백마를 타고 바다를 건너 적도에 들어오는 장면은 모세가 홍해를 건넌 장면을 방불케 한다.
9) 경흥(慶興)의 저택 : 함경도 함흥(咸興) 귀주동(歸州洞)에 건립된 경흥전(慶興殿)을 말한다. 이곳은 환조(桓祖)와 태조(太祖)의 구거였고 정종(定宗)과 태종(太宗)이 태어난 곳이었다. 이곳에 처음 이주한 익조(翼祖)가 경흥댁이라 불렸던 사실을 기념해 숙종대에 경흥전(慶興殿)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10) 독서당(讀書堂)과 치마대(馳馬臺) : 함경도 함흥(咸興) 소재. 태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옛터.
11) 상산(象山)의 유지(遺址) : 황해도 곡산(谷山)에 있는 태조의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생가 옛터.


 

- 홍양호(洪良浩)
 「『흥왕조승(興王肇乘)』을 바치는 차자[進興王肇乘箚]」 『이계집(耳溪集)』

 

 

※ 이 글의 원문텍스트는 한국고전종합DB 홈페이지에 수록된 한국문집총간 241집《이계집(耳溪集)》권20, 소차(疏箚),〈진흥왕조승차(進興王肇乘箚)〉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원문 바로가기]

 

 

 

신증동국여지승람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함경도 지도

붉은 원 부분이 경흥(慶興) 지역이며 그 아래 적지(赤池)라는 지명이 보인다.

 

 

 

 

 

 해 설

 

우리나라 역사가 중에서 건국사 전문가는? 문제는 어렵지만 답은 쉽다.

한국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 박은식(朴殷植 1859~1925)이다.

그는 1907년 스위스의 건국 이야기를 담은 실러의 희곡 『빌헬름 텔』을 개작한 『서사건국지(西士建國誌)』를 번역하였다. 스위스의 건국, 그것은 합스부르크 왕국에서 파견된 외국인 관리에게 고통 받는 스위스 백성이 스스로의 힘으로 외국인 지배자를 몰아내고 자유를 되찾은 장엄한 역사였다.

한국의 백성이여, 스위스의 백성이 되기를!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11년 『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를 완성하였다. 발해의 건국, 그것은 멸망한 고구려 유민이 분발하여 조국을 회복하고 강국을 건설한 특별한 역사였다.

한국의 백성이여, 발해의 백성이 되기를!

하지만, 발해의 건국사는 그 이상의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였고 발해사를 통해 두만강 이북 수천 리 산천이 한국의 강토임을 입증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박은식이 발해의 건국사로 두만강 이북을 보았다면 장지연(張志淵)은 조선의 건국사로 두만강 이북을 보았다. 장지연은 『대한강역고(大韓疆域考)』에서 두만강 이북을 대한 황실의 발상지로 중시하면서 대한제국이 간도를 영유해야 하는 당위성을 무엇보다 여기에서 구하였다.

사실 두만강 이북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가문의 최초 기업(基業)이었다.

이성계의 고조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와 목조의 아들 익조(翼祖) 이행리(李行里)는 두만강 이북 오동(斡東) 지역에서 원 제국의 외관(外官)인 다루가치가 되어 여진족과 섞여 지내면서 유력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세종대 정인지(鄭麟趾)가 지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서 목조가 다루가치가 되어 동북의 인심이 모두 목조에게 돌아가 왕업(王業)의 흥기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서술한 것은 조선 건국의 역사적 기원으로 1255년 두만강 이북의 오동을 적극적으로 기억할 필요가 있음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조선의 건국사 하면 세종대에 나온 『용비어천가』를 떠올리기 쉽지만 엄밀히 말해 그것은 조선 건국을 찬송한 시가였을 뿐, 진정한 역사책은 정조대에 홍양호가 편찬한 『흥왕조승(興王肇乘)』이었다.

스스로 ‘조선태사(朝鮮太史)’를 자처했던 홍양호,

그는 『흥왕조승』 뿐만 아니라 『영종실록(英宗實錄)』, 『중종보감(中宗寶鑑)』, 『갱장록(羹墻錄)』, 『동문휘고(同文彙考)』, 『중흥가모(中興嘉謨)』,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 등을 편찬한 정조대의 일류 역사가였다.

그는 정조가 즉위한 후 홍국영에게 밀려나 함경도 경흥에서 외관 살이를 할 무렵 북관 지역의 풍토와 고적을 상세히 조사하였고, 이십여 년이 지나 이를 토대로 조선 건국기의 사적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역사책 『흥왕조승』을 편찬하여 정조에게 헌정하였다.

1799년 12월 21일, 일흔 여섯 노신(老臣)의 필생의 작품이었다.

『흥왕조승』을 정조에게 헌정한 홍양호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혹시 8년 전 황초령(黃草嶺)에서 진흥왕 순수비를 발견했던 기쁨의 순간을 떠올리지는 않았을까?

어릴 적에 야사를 읽다가 선조 때 신립이 함경도에서 진흥왕 순수비를 발견하고 탁본까지 했다는 꿈같은 기록과 만났던 소년 홍양호.

그 후 매번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하는 관리들에게 순수비의 행방을 물었던 집념의 세월들. 세월이 흘러 이제는 회갑을 훌쩍 넘긴 노인 홍양호.

함경도 지역 개발을 추진하는 정조의 의지. 장진부(長津府)의 개척과 함흥과 갑산 사이의 교통로 확보. 마침내 홍양호의 부탁을 경청하고 끝내 황초령에서 순수비를 발견한 함흥 판관 유한돈(兪漢敦). 순수비 탁본을 전해 받은 홍양호의 손길은 어쩌면 정복군주 알렉산더 대왕의 잊혀진 유물을 발견한 고고학자의 떨리는 손길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정조대의 역동적인 역사 한복판에 있었던 홍양호의 마음에서 순수비의 발견은 무엇보다 정조의 함경도 지역 개발을 축복하는 국가 문운(文運)의 계시였다.

그랬기에 그는 함경도에서 발견한 정조 치세의 조선 사회의 역동성을 가슴에 담아 함경도에 서려 있는 조선 건국의 현장들을 보듬고 끝내 조선 건국사를 완성하여 정조에게 이를 헌정한 것이다.

이를 받은 정조의 마음도 뭉클했을 것이다. 인간 정조의 고난과 시련은 건국기의 제왕이 창업 과정에서 겪는 그것과 방불한 것이었다.

그는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고 우뚝 일어섰다. 만일 그가 계획한 대로 정말 1804년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스스로 상왕이 되었다면, 그는 참으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나 태종과 같은 임금이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랬다면 홍양호의 『흥왕조승』은 정조의 제2의 건국을 예고하는 책자로까지 해석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조는 『흥왕조승』을 받은 후 여섯 달이 지나 세상을 떠났고, 결국 그는 조선 건국사를 헌정 받은 세종과 같은 임금이 되었다.

    

글쓴이 : 노관범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
  • 가톨릭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