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드 툴루즈-로트렉 / 예술작품이 된 포스터
우리는 길거리나 지하철역, 버스정류장 등에서 매일 포스터들과 마주칩니다.
예나 지금이나 광고를 위해 포스터가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예술작품으로 전시되는 포스터들이 있습니다.
유화와 같은 회화 작품이 아닌 대량 인쇄한 포스터가 전통 미술의 경계를 넘어 예술작품이 될 수 있었던 계기는 1891년 12월의 어느 날 밤 파리(Paris) 시내의 건물 벽에 붙여진 한 장의 포스터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화가 앙리 드 툴루즈-로트렉(Henri de Toulouse- Lautrec, 1864~1901)이 그린 이 포스터는 오늘날에도 관광 명소로 알려진 파리 몽마르트르(Montmartre)에 있는 카바레(cabaret) ‘물랑루즈(빨간 풍차)’를 선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당시 물랑루즈는 캉캉(cancan)춤 공연으로 큰 인기를 모았으므로, 포스터에는 스타 캉캉춤 댄서(dancer)인 ‘라 굴뤼(La Goulue)’와 ‘뼈 없는 발랑탱(Valentin Désossé)’이란 남성 댄서가 묘사되었습니다.
이 포스터는 공개되자마자 충격과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거리 곳곳에서는 포스터를 떼어가려는 사람들로 소동이 일어났으며, 아이들의 눈을 가리고 지나가는 일도 벌어졌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보시다시피 라 굴뤼가 대중의 눈앞에 엉덩이와 속바지를 훤히 드러내는 낯 뜨거운 포즈로 그려졌기 때문인데요, 로트렉이 그녀를 이렇게 묘사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라 굴뤼가 늘 금발 머리를 상투처럼 틀어 올리고 앞머리를 일자로 자른 헤어스타일을 고집했고, 또 격렬한 춤 동작으로 소문났기 때문입니다. 로트렉은 그녀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묘사한 것이지요.
덕분에 라 굴뤼는 파리 시민들 사이에서 가장 유명한 캉캉춤 댄서가 되었답니다.
로트렉보다 앞서 물랑루즈를 위한 포스터를 제작했던 쥘 셰레(Jules Chéret, 1836~1933)의 포스터와 비교해보면 흥미로운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셰레는 포스터에서 물랑루즈를 상징하는 빨간 풍차 주위를 당나귀를 타고 돌고 있는 육감적인 금발 소녀들을 묘사했습니다. 이 소녀들은 셰레의 포스터에 항상 등장하는 소녀들로서 ‘라 셰레트(La Chérette)’라고 합니다. 셰레는 남·녀 소비자들의 시선을 끌고, 포스터에서 선전하는 장소나 상품을 경험할 때 느낄 수 있는 행복감을 암시하기 위해서 늘 발랄한 분위기의 라 셰레트를 등장시켰던 것이죠.
하지만 로트렉은 셰레와는 다르게 포스터에서 물랑루즈를 선전하기보다 댄서 ‘라 굴뤼’의 개성적 이미지를 표현하는 데 더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본래 프랑스의 유서 깊은 귀족가문의 후계자였던 로트렉은 소년시절에 일어난 사고 때문에 다리가 더 이상 자라지 않는 장애를 갖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화려한 사교계를 떠나 가난한 화가나 연예인들이 모인 몽마르트에 거주하면서 라 굴뤼를 비롯한 댄서, 배우, 가수 등과 같은 연예인들과 우정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는 자연스레 자신의 그림 속에 연예인들을 등장시켰고 때로는 공짜로 포스터를 그려주었습니다. 덕분에 로트렉은 어느 누구의 간섭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주관에 따라 그들의 외모와 행동의 특징을 개성적이고 독특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의 포스터는 주문자의 의견에 따라 연예인의 모습을 보기 좋게 미화시키는 데만 신경을 쓰던 동시대의 상업 포스터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트렉의 또 다른 포스터인 <디방 자포네>에서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어요.
포스터는 극장 겸 카페인 디방 자포네(Divan Japonais)에서 캉캉춤 댄서 잔느 아브릴(Jane Avril)과 음악평론가 에두아르 뒤자르댕(Edouard Dujardin)이 샹송 가수인 ‘이베트 길베르(Yvette Guilbert)’의 노래를 감상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포스터에서 선전하고자 하는 스타는 놀랍게도 화면 왼쪽 구석에 서 있는 ‘얼굴 없는’ 길베르입니다.
길베르는 당시 풍만한 몸매와 화려한 몸동작을 추구하던 여가수들과는 다르게 가녀린 몸매를 지녔고, 노래할 때도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늘 단순한 드레스와 검은 긴 장갑을 착용하고 무대에 섰다는군요. 로트렉은 의도적으로 ‘예쁜’ 길베르의 얼굴을 삭제하여 길베르다운 길베르의 스타일을 알아보는 데 필요한 요소는 얼굴이 아니라 장갑과 드레스, 몸매와 자세라는 것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이후 검은 긴 장갑은 길베르의 대표적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어요.
로트렉은 포스터를 그림과 차별 없는 예술적 표현 수단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포스터에도 서명을 남겼고 회화들과 함께 전시하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로트렉의 포스터에 묘사된 당시 반짝 스타에 지나지 않았던 연예인들도 오늘날까지 불멸의 스타로서 그 이미지가 영원히 기억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술작품만이 지닌 놀라운 능력 아닐까요?
- 김호정, 서울시립대학교 환경조각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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