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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 링골드 - '퀼트'로 여성의 꿈과 희망을 그리다

Gijuzzang Dream 2011. 6. 30. 22:37

 

 

 

 

 

 

 페이스 링골드 - '퀼트'로 여성의 꿈과 희망을 그리다

 

 

 

 

페이스 링골드 <타르해변 Tar Beach> 1988, 캔버스에 아크릴, 염색천으로 퀼트, 188×174㎝,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언뜻 보면 마치 여러 가지 무늬가 있는 천 조각을 이어 붙인 이불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흑인 여성 화가 페이스 링골드(Faith Ringgold, 1930~)가 창조한 ‘스토리 퀼트(story quilt)’라고 합니다.

 

스토리 퀼트에는 마치 그림책처럼 그림과 이야기가 있는데요, 링골드는 그림의 테두리를 퀼트로 둘러싼 후 솜을 넣고 누벼서 커다란 누비이불처럼 만든 후 그림과 관련된 이야기를 글로 써서 퀼트에 덧붙이는 독특한 방법으로 미술작품을 만들었어요.

 

일반적으로 퀼트는 천 조각을 이어 붙여서 만든 누비이불을 말하는데, 노예선을 타고 미국으로 건너 온 흑인 여성들이 퀼트에 자신들의 인생 이야기와 가족의 역사 등을 기록하면서 미국 흑인의 역사적 전통으로 이어졌습니다.

 

영화 <아메리칸 퀼트 How to Make an American Quilt>(1995)에서 보면 미국 여성들이 그러한 전통에 따라 사랑, 결혼, 이별 등 인생의 중요한 사건과 이야기를 퀼트의 무늬로 아로새긴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물론 링골드도 고조할머니로부터 흑인 전통과 퀼트를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링골드는 그림에 퀼트를 덧붙이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그녀가 뉴욕의 가난한 동네인 할렘(Harlem)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당시로서는 드물게 대학에서 정식 미술 교육을 받은 흑인 여성이라는 점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링골드는 남성과 백인 위주의 사회에서 차별을 경험하게 됩니다. 게다가 대학에서 가르치는 '대가' 대부분이 유럽의 백인 미술가들로, 흑인이나 여성이 설 자리가 없다는 것과, 몇몇 교수들이 흑인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덮어놓고 자신이 화가가 될 수 없다고 말하거나 재능이 없다고 비판하는 것에도 실망했어요.

하지만 링골드는 포기하지 않고 흑인 여성도 훌륭한 화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링골드는 백인 남성 문화에서 저급하다고 무시되어 왔던 흑인 전통 퀼트와 흑인 특유의 공동체 문화를 가지고 흥미와 재미 가득한 독특한 스토리 퀼트를 만들게 된 것이죠.

 

<타르해변>은 그녀가 어린 시절에 경험한 소박하고 끈끈한 가족애의 추억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인데요, 어느 무더운 여름날 밤 흑인 가족이 타르로 포장한 옥상을 해변 삼아서 먹고, 마시고, 즐기고, 꿈꾸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을 묘사했어요.

 

링골드는 깨끗한 옥상과 풍성한 식탁, 그리고 화기애애하고 평화로운 사람들을 통해 흑인들은 더럽고 가난하고 폭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적 편견에 도전했어요. 그리고 “나는 별들이 내려와 나를 데리고 조지워싱턴 다리 위로 날아 오른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라는 글과 밤하늘을 날고 있는 소녀를 묘사하여 가난과 인종차별의 굴레를 뛰어넘어 훨훨 날아가고픈 흑인들의 꿈과 희망도 이야기했습니다.

 

 

페이스 링골드 <프렌치 컬렉션 Part II, #9, 조 베이커의 생일 Jo Baker's Birthday> 1993, 캔버스에 아크릴, 염색천으로 퀼트, 세인트루이스 미술관 이후 링골드는 「프렌치 컬렉션(The French Collection)」연작에서 자신의 분신으로 창조한 가상의 16세 소녀 윌리아 마리 시몬(William Marie Simone)이 프랑스를 돌아다니며 유명한 미술가와 작가, 흑인 인사들을 방문하거나 만나는 흥미진진한 여행 스토리를 만들어 냈어요. 이를 통해 관람자들이 남성과 백인 중심 미술의 역사에서 소외되었던 흑인 여성을 새로운 시각에서 이해하길 바랐기 때문이죠.

 

<조 베이커의 생일>에서 링골드는 마티스가 그린 <오달리스크>(1923)의 백인 여성 모델을 흑인 여성인 조세핀 베이커(1907-1975)로 바꾸었어요.

 

베이커는 흑인이기 때문에 가수가 될 수 없었던 미국을 떠나 파리로 건너가 몽마르트 최고의 가수이자 댄서로 전설적 인기를 누렸던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가창력이나 춤 실력이 아닌, 반나체로 바나나로 만든 치마나 큰 깃털만 두르고 춤을 추는 섹시한 댄서로 유명세를 얻었을 뿐이지요. 그래서 링골드는 이 그림을 통해 베이커가 흑인이고 여성이었기 때문에 당시 대중들이 그녀를 남성에게 성적인 쾌락과 위안을 주기 위해 그려진 마티스의 그림 속 벌거벗은 오달리스크와 마찬가지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배경 오른쪽에 또 다른 마티스의 그림인 <붉은 색의 조화(붉은 방)>을 그려 넣어 25세의 젊은 여성으로서 베이커가 꿈꿨던 행복한 결혼과 안락한 가정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표현했어요. 그녀는 나중에 국적과 인종이 다른 12명의 아이들을 입양하여 ‘무지개 대가족’의 엄마로, 68세에도 무대에 올랐던 영원한 댄서로 행복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앙리 마티스 <오달리스크> 1923, 캔버스에 유채(좌), 앙리 마티스 <붉은 색의 조화 (붉은 방)> 1908, 캔버스에 유채(우)

 

 

페이스 링골드 <프렌치 컬렉션 Part I, #4 아를르의 해바리기 퀼트 모임 The Sunflower Quilting Bee at Arles>, 1991,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 염색천으로 퀼트, 개인 소장.링골드는 또 다른 프렌치 컬렉션 작품인 <아를르의 해바라기 퀼트 모임>에서 흑인 여성들과 흑인 전통 퀼트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드러냈습니다. 유명한 흑인 여성 사회운동가들이 반 고흐가 머물던 남프랑스 아를르(Arles) 마을 앞에 펼쳐진 해바라기 밭에 모여 앉아 해바라기 퀼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 뒤에는 유명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가 해바라기 화병을 들고 서 있네요. 공손한 고흐의 자세는 마치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해바라기 꽃병을 들고 지나가다가 엄청나게 큰 해바라기 퀼트에 놀라 감탄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네요.

 

링골드는 이 같은 스토리 퀼트를 통해 과거 여성들만의 가사 노동이자 저급한 장식 미술로 여겨지던 퀼트로도 유럽의 위대한 남성 화가의 순수미술 작품에 손색없는 훌륭한 미술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어요.

 

사실 우리나라에도 퀼트처럼 여인들의 삶과 역사가 깃든 전통 미술이 있는데요, 그것은 조각보와 자수랍니다. 옛 여성들은 결혼, 탄생, 명절, 생일 등 특별한 이벤트를 위해 지은 옷에서 남은 자투리 천으로 조각보를 만들어 자신과 가족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고, 옷뿐만 아니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베개나 주머니 등에 수를 놓으며 가족들의 건강과 행복과 안녕을 기원하는 희망을 담았기 때문입니다.

 

- 김호정, 서울시립대학교 환경조각학과 강사

- 2011.06.22 하이서울뉴스 [예술, 전통의 경계를 넘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