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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활자개량과 정리자(整理字)

Gijuzzang Dream 2011. 5. 18. 20:01

 

 

 

 

 

 

정조의 활자 개량과 정리자(整理字)

 

 

 

18세기의 조선 르네상스를 이끈 정조는 많은 책을 직접 저술하였으며

책을 편찬하고 간행하는 일을 진두지휘하였다.

 

또한 정조는 임진자(壬辰字), 정유자(丁酉字), 한구자(韓構字), 생생자(生生字), 정리자(整理字) 등

수십만 자의 활자를 제작하였다.

 

이들 활자 가운데서도 생생자와 정리자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로 이 두 활자가 종전의 활자에 비해 개량된 활자여서

인쇄하는데 시간과 노력이 많이 절약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이 활자로 보다 많은 책을 인쇄할 수 있었는데

근대식 활자와 함께 대한제국 때까지 관보(官報) 등의 인쇄에 사용될 수 있었다.

 

두 번째로 특히 정리자는 그 명칭과 제작 목적 등에서 정조의 왕실 권위 강화라는 측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즉 이 활자는 정조의 왕권강화를 상징하는 <정리의궤(整理儀軌)> 제작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조선시대의 금속활자는 단순히 실용적 측면에서 제작되었다기보다

국가의 권위를 상징하는 측면이 강한데 정리자에서 그 특징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셋째로 두 활자는 중국 <사고전서취진판정식(四庫全書聚珍板定式)>을 모방하고

글자체는 <강희자전(康熙字典)>의 글자체를 따왔다.

조선시대 활자의 글자체는 대부분 중국 인쇄본에서 따왔지만

활자 제작 방법까지 모방한 예는 기록에 없다.

그 이전에는 중국에서 국가적으로 활자를 대대적으로 제작한 예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북학파 등에 의해 중국으로부터 선진문물을 배워오려 했던 당시 분위기와 관련이 있다.

 

- 이재정 중, 근세관 조선4실

-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와의 대화, 제240회(2011년 4월20일)

 

 

 

 

 


 

 

 

 

 

 

 

정리자(整理字) 는 1795년(정조 19) 『정리의궤통편(整理儀軌通編)』을 출판하기 위해

<정리의궤> <원행정례> 등의 책을 인출하기 위해 1795년 주조에 착수하여

다음해(1796년 3월, 정조 20) 주자소에서 중첩자까지 완전하게 주성한 동활자이다.

 

규장각 직제학 이만수(李晩秀)와 규장각 원임직각 윤행임(尹行恁)에게 감독하게 하고,

생생자(生生字)를 자본(字本)으로 대자(大字) 16만자, 소자(小字) 14만여 자를 주성하여

규영신부(奎瀛神府)에 간직하였는데, 이를 ‘정리자(整理字)’라 한다.

‘초주정리자(初鑄整理字)’라 하며, 일명 ‘을묘자(乙卯字)’라고도 일컫는다.

 

[정조실록 권 제44, 29~30장, 정조 20년 3월 17일(계해)]

정리주자가 완성되었다. 전교하기를,

“우리나라에서 활자로 책을 인쇄하는 법은 국초부터 시작하였다.…

을묘년에는 <정리의궤> 및 <원행정례> 등의 책을 장차 편찬, 인행하려는 계획 아래 명하여

생생자를 자본을 삼아서 구리로 활자를 주조하게 하여 크고 작은 것이 모두 30여 만 자였는데,

이를 ‘정리자’라 이름하여 규영신부에 보관하였다.” 하였다.

整理鑄字成 敎曰 我東活字印書之法 始自國初…

乙卯 整理儀軌及園幸定例等書 將編次印行 命以生生字爲本 範銅鑄字大小幷三十餘萬

名之曰整理字 藏于奎瀛新府.

 

 

글씨체는 중국 청(淸)나라에서 만든 『강희자전(康熙字典)』의

글씨체를 바탕으로 한 인쇄체로 읽기에 편리하였다.

정리자는 이전에 만든 금속활자에 비해

활자모양이 반듯하고 높이도 일정하여 인쇄하기에도 편리하였다.

이 활자의 자체는 균제, 방정하고 각주(刻鑄)가 정교하여

위부인자(衛夫人字)와 한구자(韓構字) 등에 비해 인쇄하는데

종이가 찢어지거나 활자가 옆으로 기울고 흔들리는 일이 없었으며,

인쇄도 간단하여 비용과 노력이 덜 들고

인쇄상태는 중국의 수진본(袖珍本)보다도 오히려 선명하였다.

다만 그 자체의 규각(圭角)이 너무 드러나서

원후(圓厚)한 맛이 없는 것이 흠일 뿐이었다.

 

찍어낸 인본은 <원행을묘정리의궤>(1795), <화성성역의궤>(1796), <오륜행실도>(1797),

<두율분운>(1798), <육률분운>(1798), <태학은배시집>(1798), <홍재전서>(1814),

<진찬의궤>(1829), <계원필경>(1834), <유중외대소민인등척사윤음>(1840) 등이다.

 

 

정리자(整理字) 활자는 주자소(鑄字所)에서 도록(都錄, 목록)을 만들고

전수원(田守員)을 두어 간직했는데

1857년(철종 8) 10월15일 밤에 빈전도감의 화재로

활자를 보관해두었던 주자소(鑄字所)에 저장되었던 다른 활자와 함께 

대자(大字) 16만 자와 소자(小字) 14만 자가 소실되었다.

 

이듬해(1858) 정리자 대자 8만 9,203와 소자 3만 9,416자를 새로 주조하고

전년도에 불타고 남은 활자 17만 5,698자와 함께 주자소에 간직하게 하였는데

이를 ‘재주정리자(再鑄整理字)’라 일컫는다.

 

클릭하시면 창이 닫힙니다다음 해 다시 정리자를 만들었으며

지금 남아 있는 활자는 대부분 두 번째 만든 정리자이다.

 

첫번째 만든 정리자[初鑄整理字]는

주로 조선왕실에서 ′의궤′를 편찬할 때 사용되었으며

두번째 만든 정리자[再鑄整理字]는

의궤 인쇄뿐만 아니라 구한말 발행한 교과서, 관보(官報),

법령, 조약문을 인쇄할 때도 널리 사용되었다.

활자의 뒷면은 활의 등처럼 속으로 움푹 패여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 활자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청동의 사용량을 절약하면서 점착물이 그 속에 들어차면

움직이지 않도록 고안되었던 방법이다.

 

 

 

 

   

한편 정리자에는 한글활자가 만들어져 병용되었는데,

1797년 초주정리자로 찍은 <오륜행실도>가 그 예이다.

<주자소응행절목(鑄字所應行節目)>에는 이를 ‘초주정리자병용한글활자’라 한다.

또 갑오경장 이후 교과서와 관보 등에도 재주정리자와 병용된 한글활자가 있는데

‘재주정리자병용한글활자’라 하며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오륜행실도>의 한글자와는 다소 차이가 나는 동활자이다.

 

1883년(고종 20) 근대식 연활자(鉛活字)가 이미 수입되어

각 부분의 인쇄에 많이 실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리재주활자로 특히 외국과의 조약서, 공법회통, 갑오개혁 이후의 관보,

또는 학부가 편집한 교과서 등을 인출하였는데

이는 이 활자가 중소형의 인서체로서 근대식 연활자처럼 인쇄에 편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재주판에 이 활자보다 다소 작은 활자가 보이는 것은

불타고 남은 글자를 자본(字本)으로 하여 보주(輔鑄)하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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