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의 리더십에서 실패를 배운다
올초 개봉된 영화 ‘평양성’은
연개소문 사후(死後) 고구려 지배층에서 벌어진 희극 같은 비극을 소재로 다룬 역사물이다.
불과 23년 전에 당태종 이세민이 이끄는 수십 만 대군을 물리친 大고구려가
어쩌면 그렇게 어이없이 무너질 수 있단 말인가?
송나라 왕안석조차도 “특출한 인물(非常人)”이라고 감탄했고
청나라 시대 경극(京劇)의 인기 레퍼토리의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한 영웅호걸 연개소문이
어떻게 나라를 다스렸길래 하는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그래서 집어든 것이 <삼국사기><삼국사절요>와 같은 우리 역사서다.
<구당서><자치통감>과 같은 중국역사서도 찾아 읽었다.
하지만 역사기록 속에서 연개소문의 리더십을 살펴보려는 의도는 출발점부터 가시밭길이었다.
우선 역사에서 연개소문의 언행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겨우 2-3회 남짓한 대목에서만 연개소문의 생각이 직접 드러나 있을 뿐,
그에 대한 기록의 대부분은 배후인물로 처리되고 있었다.
7세기 중반부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당태종 이세민, 신라의 김춘추, 김유신 등과 더불어
그 시대를 주도한 연개소문을 왜 역사가들은 소홀히 다루었을까?
역사 기록에서 사라진 영웅호걸 연개소문
그 이유의 하나는 그가 패망한 나라의 실권자였기 때문이다.
패망한 고구려는 자기 역사를 기록하지 못했으며, 그때까지의 역사도 보존하지 못했다.
(<유기> <신집> 등의 멸실).
특히 연개소문이 사망한 직후 그의 아들들이 권력다툼을 벌여 나라가 망하게 된 상황에서
그를 훌륭한 정치가로 기록할 수 없었다.
이후 <삼국사기> 등의 역사서는 대부분 중국측 사료에 의거해 편찬되었고
그 결과 중국인의 역사관을 통해 ‘중국인들을 패퇴시킨’ 연개소문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김부식 등이 갖고 있던 유교라는 정치이데올로기의 영향이다.
고구려-당나라 전쟁과정을 기록한 김부식의 태도를 보면
그가 혹 ‘당태종의 신하가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의구심을 갖게 한다.
그는 당태종에 대해서 신하들의 말을 경청하고 군사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어진 군주로 그리고 있다.
이에 반해 연개소문 등 대다수 고구려 사람들은 당태종 이세민의 입에서 나온 말로 평가하고 있다.
이렇다보니 연개소문의 관점에서 기술된 고구려의 국내외 정치사는 거의 전무하다.
나라를 잃는다는 것은 곧 기록을 잃는 것이며, 기억에서 잊혀져간다는 것을
고구려의 패망사는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탈리아의 역사학자 마키아벨리는 말하지 않았던가.
정치지도자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우선 그의 관점에서 사태를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무릇 풍경을 그리려는 화가가 계곡에 펼쳐진 장관을 내려다보기 위해서는 산 위로 기어 올라가야 하는 것”
처럼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군주의 어깨 너머로’ 일의 전개과정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하여 나는 연개소문의 어깨 너머로 패망을 전후한 고구려사를 들여다보기로 하였다.
여기서는 주로 리더십 과정의 관점에서, 즉 그가 인식한 당시 시대상황과 거기서 도출한 버전,
그리고 그가 내린 처방들을 간략히 살펴보려고 한다.
【진단】국내외적 위기상태
연개소문이 파악한 7세기 중반의 고구려는 국내외적으로 위기상태였다.
먼저 국내적으로 고구려는 6세기 전반까지 ‘중앙집권체제’였으나
이후 이 체제가 무너지고 ‘귀족연립정권기’로 전환된다.
그 뒤 귀족세력들의 거듭된 왕위계승전과 전쟁은 국력의 쇠퇴를 가져왔다.
“힘센 신하와 호족이 모두 나랏일을 손에 쥐고 붕당끼리 결탁하는 것이 풍속이 되었다”는 개탄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다보니 국가 기강은 엉망이 되고 당나라의 사신이 첩자로 와서
“나라 안의 허실을 엿보았으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외적 위협은 점점 커져만 갔다.
남쪽의 신라는 진흥왕 이후 국력을 결집하여
한강유역은 말할 것도 없고 마운령(지금의 함흥)까지 진출해 고구려의 영토를 잠식해왔다.
중원대륙의 당나라는 더 심각한 존재였다.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실패(612년) 후의 민심 이반을 기회로 집권한 이세민은
당나라를 중심으로 한 ‘일원적인 세계질서를 확립’하려는 정책을 펼쳐왔다.
그런데 고구려가 추구해온 독자적인 외교노선은 걸림돌이었다.
반복되는 이세민의 고구려 정벌론은 고구려에게 중차대한 도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집권 귀족세력들은 눈앞의 이익 추구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연개소문이 자신의 정적들을 열병식(閱兵式)에 초대하여 일거에 제거해버린 것은
그런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비전】고구려의 영광 재현
다음으로 연개소문이 생각한 국가의 비전이다.
그는 고구려의 여러 문제들이 국가의 중심이 없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안팎으로 어려움에 처할수록 더욱 국시를 주관하는 중심이 바로 서야 하는데,
귀족연립체제 하에서 국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따라서 연개소문은 과거 광개토대왕이나 장수왕 때처럼 국가의 중심이 바로 서는 나라를 만들려고 했다.
6세기 전반까지 고구려처럼 ‘나가 싸우면 이기고, 돌아서면 위엄을 떨치는’ 그런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고구려의 중흥’이야말로 연개소문이 비전이었고, 그것이 고구려의 신민들에게 호소력을 가졌기에
비록 “나라 사람들이 대단히 고통스럽게 여기면서도” 그의 뜻을 따랐고,
당나라의 파상적인 공격에 대항하여 하나로 뭉칠 수 있었다.
“연개소문이 국사를 주관할 때는 비록 지극히 포악하였으나,
정사(政事)가 한 사람에게서 나와 인심이 분열되지 않았고,
그 때문에 당태종의 신무불측(신무불측)으로서도 오히려 그 뜻을 얻지 못했다”는
조선시대 권근의 지적은 그런 정황을 말해준다.
【처방】대단히 현실주의적인 조처들
이 단계에서 연개소문의 여러 조처들은 온전히 평가될 수 있다.
즉 그의 상황 진단과 목표하는 비전을 이해한 다음에 그가 취한 언행,
즉 “스스로 물속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대중을 현혹”시킨 일이며,
아버지 연태조의 지위인 대대로 계승을 반대하는 귀족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사죄하면서
“그 직을 임시로 맡겨주시되 잘못해서 쫓겨나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애걸하여 관직에 오른 일,
그리고 관직에 오른 후 자기를 제거하려는 정적들에게 자신의 이임식을 가장한 열병행사에 초대하여
100여 명을 살해한 사건 등은 그가 철저히 현실주의적인 정치가였음을 말해준다.
연개소문의 조처 중에서 중요한 것으로 실용외교를 들 수 있다.
그는 장수왕 때(413-491)처럼 북방의 여러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맺으며,
중원대륙의 특정 왕조가 발호하지 못하도록 한 다원적 천하질서를 복원하려 했다.
당나라에 도교를 전수해달라며 문화외교를 요청하는가 하면,
전쟁 직후에 사신을 보내 관계 복구를 추구하면서도
백제 · 일본 등과 우호적인 관계를 협력하여 지속하여 신라의 배후를 위협했다.
또 몽골고원의 터키계 유목민인 설연타 부족과 외교적으로 협력하여
안시성 전투 패배 후 망설이는 이세민으로 하여금 전면 철수 명령을 내리게 한 것이나,
말갈족을 복속시킨 행위는 모두 연개소문의 탁월한 외교력에 힘입은 것이었다.
이처럼 연개소문은 지극히 현실주의 정치가이면서도 비전과 균형 감각을 가진 국가경영자였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탁월한 국가지도자라고만 평가할 수는 없다.
연개소문의 리더십 실패 요소들
첫째, 연개소문은 집권 후 국내 지지세력 규합에 실패했다.
쿠데타 성공 직후 그는 군권을 장악하는 대장군(주도 주둔군 사령관인 ‘대모달’)에 취임하는 한편,
자기와 같은 지역(部) 출신 사람을 귀족회의의 의장인 ‘대신(大臣)’으로 앉혔다.
반대파 집단인 귀족세력의 정치적 입지를 어느 정도까지는 인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연개소문은 귀족회의라는 제도적 통로를 유명무실하게 만들어 버렸다.
대신 그는 태막리지, 태대막리지 등의 관직을 만들고 거기에 자기의 아들인 남생, 남산 등을 앉혔다.
그의 사후에 나타난 귀족세력과 지방 세력의 이탈은 그가 지지세력 규합에 실패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둘째, 그는 자신의 준거 군주였던 장수왕과 달리 리더십 승계를 잘하지 못했다.
장수왕은 부왕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후 자신의 손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어서
3대에 걸친 뛰어난 군주의 안정적인 국가경영을 가능케 했다.
물론 연개소문이 왕위승계 준비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세 아들 남생, 남건, 남산에게 군사적인 요직을 두루 맡게 하였지만
그는 그들 사이를 분리시키고 권력을 분산시켜 권력투쟁의 소지를 남겨놓았다.
자신이 권력을 장악할 때는 대단히 현실주의적으로 행동했지만
정작 자신의 자식들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으로 대처한 것이다.
연개소문이 놓친 최대의 기회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연개소문은 중국 최고의 군주 당태종이 대군을 이끌고 와서도 어찌 하지 못하고 돌아갈 정도로
탁월한 국가경영능력을 가진 영웅호걸이었다.
그는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는 데 있어서 비상한 능력을 가진 현실주의적 정치가였다.
고구려의 중흥이라는 비전을 세워 장수와 군민들의 마음을 모을 줄 아는 지도자였다.
하지만 그는 지지 세력을 규합하고 리더십을 승계하는데 실패한 리더였다.
무엇보다 연개소문의 커다란 실책은 당나라와의 전쟁을 막지 못했고 신라를 포용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물론 당태종의 야심적인 팽창정책을 고구려의 외교만으로 막아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몇 차례의 기회를 놓쳤다.
그 하나가 집권 초반 신라의 김춘추가 찾아왔을 때 그를 어정쩡한 상태로 쫓아 보낸 것이다.
김춘추가 백제를 치기 위해 동맹을 맺자고 했을 때
연개소문은 오히려 신라의 땅을 요구하다가 결국 그를 풀어주고 말았다.
그는 또한 당태종과의 전쟁 방지를 위한 외교적 협상에서도 실패했다.
644년 1월 이세민이 사신을 보내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고 했을 때,
사신에게 군사적 위협을 가하고 심지어 굴 안에 가둬버리는 오만한 행동을 보였다.
이후 두 나라는 상호 비방전과 전쟁준비의 길로 나아가 돌이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전쟁의 결과 비록 고구려가 이겼다고 하지만 그 승리는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연개소문이 남쪽의 신라를 포용하지 못한 것과,
당나라와의 국교 단절은 ‘불능’의 차원이 아니었다.
그것은 ‘불위’의 문제였고 따라서 우리는 ‘정치가 연개소문’의 잘못을 문제삼을 수 있다.
그런데 연개소문의 이야기를 하면서 가끔 북한의 김정일 이후 사태가 연상되는 것은 왜일까.
그리고 북한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돌아보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리더십연구소 실장
- 2011년 5월 <리더십 에세이> 제 12호, 한국형리더십 개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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