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접양지도> 日 고지도에서 ‘대마도는 조선땅’ 인정
국제공인 ‘삼국접양지도’ 원본 공개
김상훈 육사 군사훈련처장 주장
일본이 1860년대 국제공인 고지도를 통해
대마도(對馬島. 일본명 쓰시마)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 주최 '제3회 이승만 포럼'에서 "대마도가 조선땅이라는 것을
일본(日) 정부 스스로 제시해 국제 공인을 받았던 지도를 발견했다"고 말하며
“이 오래된 해상경계는 대마도와 일본 본 섬 사이의 현해탄”이라고 밝혔다.
'오래된 해상 경계'가 현해탄이라면, 대마도는 엄연한 대한민국의 영토가 된다.
김 대령은 일본인 하야시 시헤이(林子平. 1738∼1793)가 1785년 작성한 <삼국통람도설>에는
당시 일본과 주변 3국(조선, 오키나와=류쿠국, 홋카이도=하이국=북해도),
무인도였던 오가사와라제도(小笠原, 일본 남부 태평양 1000km지점의 80여개 군도)에 대한 지도와 해설을 해놓았다. 또 ‘삼국접양지도’ 등 5개 지도를 포함하고 있다.
무인도였던 일본은 1860년대 오가사와라 제도를 두고 미국과 분쟁하던 당시
독일의 동양학자인 클라프로스(Klaproth)가 번역한 '삼국접양지도'의 프랑스어판을 증거로 제시해
영유권을 인정받았다.
지도는 오가사와라 제도를 일본 영토라고 규정했지만, 울릉도와 독도, 대마도는 조선 영토로 표기했다.
▲ <삼국접양지도>, 日 지도에 나타난 독도와 대마도.
조선국 본토와 같은 노란 색으로 울릉도, 독도, 대마도를 표시하여 조선영토로 인정하고 있다.
<삼국접양지도>는 과거에도 여러 연구자에 의해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자료로 인용된
바 있으나 원본이 아닌 흑백 필사본으로 색 구분이 어려워 대마도를 일본령으로 분류했었다.
이에 김 대령은 "과거에 공개된 필사본은 흑백이라서 대마도의 영토 구분이 어려웠다"며
"원본은 분명히 대마도를 조선 땅으로 분류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사실을 접한 네티즌들은 “드디어 대마도 땅을 인정 받는 건가”, “이번엔 꼭 확실하게 끝을 맺자”,
“정말 끝나지 않는 싸움이다”, “확실한 증거가 있으니 일본도 꼼짝 못하겠지”등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편 '삼국접양지도'의 원본은 독도연구 전문가인 한상복 박사가 호주에서 구입한 것으로 추정되며,
김 대령은 이 지도를 국회도서관 독도 특별전시관에서 찾았다고 전했다.
김 대령이 대마도 연구에 천착하게 된 것은 2008년 미국 조지 워싱턴대에서 연수시절
도서관에서 발견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영문 저서를 접하면서부터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8월 18일과 1949년 1월 7일 두차례 연두기자회견에서
일본에 대마도 반환을 공식 요구했다. 이 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에서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며,
“한국과 일본 사이에 오래된 해상 경계가 있다”고 했다.
김 대령은 "이 전 대통령의 요구는 아직도 타당하다"면서
"일본과 영토문제는 독도뿐 아니라 대마도까지 확대해 새로운 시각에서 봐야 한다"고 말했다.
- 2011.05.12 세계일보, 연합뉴스 등 일간지
日, '대마도=조선땅' 국제공인 지도 은폐
일본제작, 대마도=조선땅 지도 미국에 제시,
프랑스-영국 지도도 "대마도는 조선땅" 인정
일본인이 만든 바로 <삼국접양지도>가 대마도가 명백한 한국 영토임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그것도 색으로 구분해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삼국접양지도>의 프랑스어 판 지도의 국제적 가치는 호사카 유지 교수(세종대 독도연구센터 소장)의 일본어 논문(<三國通覽與地路程全圖> と‘伊能島’の 中の 獨島. 독도 창간호, 영남대 독도연구소, 2008)과 조선총독부 문서(1924년 일제하 발간된 일본천황 열람<삼국통람도설>)에 잘 기술되어 있다.
호사카 유지교수는 당시 일본 정부가 이 지도를 국제공인지도로 활용했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일본에 개국을 요구한 미국의 페리는, 오가사와라를 미국령으로 할 목적으로
이미 미국인을 군도에 살게 하였고,
이 사실을 들어 막부에 오가사와라를 미국령으로 인정하도록 요구한 것이다.
이에 대해 막부 측은, 하야시 시헤이의 <삼국통람도설>과
그 삽입 지도인 <삼국통람여지노정전도>(삼국접양지도)’를 제시하였는데,
미국이 인정하지 않자, 그 프랑스어판을 제시하여 겨우 미국의 영유권 주장을 물리친 것이다.”
즉 일본은 1861년 2월과 1862년 4월 미국의 해리스(Harris)대사, 영국의 알코크(Alcock) 대사 등
당시 열강 대사들에게 이 지도를 제시하면서, 국제적인 영토 분쟁의 공식 자료로 활용한 것이다.
김 대령은 “이같은 미-일간의 오가사와라 영토분쟁을 해결한 하야시 시헤이에 대해,
1924년 조선총독부가 다시 발간한 <삼국통람도설>에는
'모든 일본인은 하야시 헤이시 선생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해야 함.
광격천황께 바쳐져서 원본을 친히 열람하셨음' 이라는 표현이 있어
이 지도를 일본이 공식으로 인정한 것이 증명됐다“고 강조했다.
김 대령은 “대마도가 조선령으로 기록된 삼국접양도를 이토오 히로부미도 알고 있었다”면서
“일본은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고자 증거자료를 없애고,
사실과 다른 자료를 19세기부터 지금까지 다량 배포함으로서 우리를 기만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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