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 한국인의 대마도(對馬島) 인식
- 하 우 봉(전북대학교)
1. 머리말
1949년 1월 8일 이승만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대마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일본에 대해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였다. 당시 이 대통령의 이 발언은 국내외에 큰 방향을 불러 일으켰다. 국내의 언론은 이 대통령의 발언 내용을 상세히 보도하였고, 국회에서는 앞으로 열길 대일강화회의에서 대마도 반환을 관철시킬 것을 촉구하는 건의안이 제출되기도 하였다.
한편 일본의 요시다 내각은 강력히 항의하는 동시에 연합군최고사령부(SCAP)의 맥아더 장군에게 이 대통령의 요구를 막아주길 요청하였다.1)
맥아더 사령부측도 이 대통령의 발언이 전후(戰後) 동아시아에서의 미국의 구도를 방해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냉랭한 반응과 함께 유감을 표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문제가 국제법상 효과를 발휘하기는 어렵다고 보았는지 이 대통령도 대마도 영유권 주장과 반환 요구를 그 후 공식 문서나 외교 채널을 통해 정식으로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외교사절을 만날 때 이따금 대마도 영유권을 역설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대통령은 어떤 근거를 가지고 대마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발언을 하였을까?
당시 일부 언론은 ‘대일 배상 요구를 위해 미리 띄워 본 애드벌룬’. 혹은 ‘고도의 외교적 책략의 일환’ 으로 분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이 발언은 돌연히 취한 일회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건국 직후인 1948년 8월 18일 대마도 반환 요구를 처음으로 발설한 뒤 일본측에서 물의가 일자 9월 9일 이를 반박하면서 다시 대마도 속령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1월 6일 대일 배상을 요구한 데 이어 이틀 후인 8일에 대일강화회의 참가 계획을 발표하면서 거듭 대마도 반환 요구를 주장한 것이다. 또 이 대통령은 건국 초부터 북간도, 두만강정계비, 독도, 대마도 등 영토와 국경선 문제에 대해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하였다.2)
이 대통령의 발언은 상당한 검토를 거쳐서 나온 만큼 나름대로의 역사적 근거를 기저에 깔고 있었으며, 거기에는 당연히 한국인의 전통적인 대마도관이 개입되었다고 보여진다.
이와같은 문제 의식에 바탕하여 여기에서는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대마도인식을 문헌자료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고대ㆍ중세의 관계와 인식
1) 삼국시대
기록상으로 대마도가 나오는 최초의 사서(史書)는 중국의 《삼국지(三國志)》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왜인전(倭人傳)〉이다.
3세기의 대마도 모습을 묘사하였다고 보여지는 이 기록에는 대마도가 ‘대마국(對馬國)’으로 표기되어 있다. 대마도 내의 사정은 간략하면서도 비교적 정확한 것 같으나 한반도와의 거리 등에 관한 기술은 틀린 부분도 있다. 《삼국사기》에는 ‘대마도’로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대마국’, ‘대마도’, ‘대마주(對馬州)’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한자의 음을 빌린 ‘대마(對馬)’ 란 이름이 중국의 《삼국지》이래로 널리 쓰여졌던 것 같다. 한편 일본의 《고사기(古事記)》에는 ‘진도(津島)’로 나와 있고, 《일본서기》의〈신대(神代)〉에는 ‘한향지도(韓鄕之島)’로 기술되어 있다. 이것은 대마도 이름의 뜻과 관련된 것으로서, ‘쓰시마[津島]’는 ‘한반도로 가는 배가 머무는 항구와 같은 섬’이고, ‘가라시마’는 ‘한반도로부터 사람과 문화가 건너올 때 거쳐온 섬’, 혹은 ‘한국섬’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후자는 한반도와의 관련성이 더 강하게 표현된 것이지만 요컨대 대마도가 한반도와 일본의 사이에 있으면서 교량적 역할을 한 섬이라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3)
고대 한반도와 대마도가 어떠한 관계에 있었는지 나타내주는 사료는 아주 적은 편이지만 그 가운데 다음의 사료를 검토해 보자.
사료 A-1 : 《환단고기(桓檀古記》 태백일사(太白逸史) 〈고구려국본기>
임나(任那)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 경계였다. (…)
후에 대마의 두 섬은 마침내 임나가 통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임나는 오로지 대마도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예로부터 규슈와 대마도는 곧 삼한(三韓)이 나누어 다스린 곳으로 본래 왜인이 살던 땅이 아니었다. 또 임나(대마도)는 세 가라(加羅)로 나뉘었다. 소위 가가란 가장 중심이 되는 고을을 말한다.
이때부터 삼한(三汗)4)은 서로 싸웠으며 세월이 오래도록 적대감을 풀지 못하였다. 좌호가라(佐護加羅)는 신라에 속하고, 인위가라(仁位加羅)는 고구려에 속하며, 계지가라(鷄知加羅)는 백제에 속하게 되었음은 k로 그것을 말한다.
사료 A-2 : 《삼국사기》 권 1 신라본기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 38년
호공(瓠公)이란 사람은 그 족성(族姓)이 미상인데 본래 왜인이다. 처음에 표주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온 까닭으로 호공이라고 하였다.
동권 3. 신라본기 실성니사금(實聖尼師今) 7년
실성왕은 왜인들이 대마도에 영(營)을 설치하고 병기와 군량을 저축하여 우리를 습격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이 움직이기 전에 우리가 정병을 뽑아 격파하자고 하였다.
사료 A-3 : 《대주편년략(對州編年略)》5) 범례(凡例)
《산가요약기(山家要略記)》에 말하기를
“대마도는 고려국의 목(牧)이다. (옛날에는) 신라사람들이 살았는데, 개화천황(開化天皇)대에 이 섬(대마도)으로부터 (일본본주로) 습래해 왔다. 중애천황(仲哀天皇)이 풍포궁(豊浦宮)에서 대마도를 거쳐 신라를 정벌함으로써 마침내 이 섬을 얻었다“고 하였다.6)
사료 A-4 : 《진대(塵袋)》7) 권 2
무릇 대마도는 옛날에는 신라국과 같은 곳이었다. 사람의 모습도 그곳에서 나는 토산물도 있는 것은 모두 신라와 다름이 없다.
사료 A-1은 광개토왕 10년(400) 당시의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서 대마도에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분국(分國)이 설치되었음을 말해 준다. 이병선의 연구에 의하면 그 가운데서도 신라의 읍락국가(邑落國家)가 가장 강성하여 8세기까지 대마도를 지배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대마도가 완전히 일본영유로 들어간 것은 8세기 이후의 일이라고 보고 있다.8)
사료 A-2에 나오는 기사에 대해 《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에서는 “호공이 대마도인으로서 신라에 벼슬하였으니, 당시 대마도가 우리 땅이었음을 알 수 있으나 어느 시기에 저들의 땅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논평하였으며, 후자에 대해서는 “만약 본래부터 대마도가 왜인의 땅에 속하였다면 그곳에 영(營)을 설치한 것을 신라의 역사에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여 사료 분석적 입장에서 해석하였다.
사료 A-3에서는 고대부터 대마도에 신라사람들이 살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사료 A-4는 대마도가 옛날에는 신라와 같은 곳으로서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인 면에서 동질적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9)
이상의 자료로 미루어 볼 때 고대로부터 대마도가 신라를 비롯한 삼국의 지배하에 있었거나 최소한 신라의 영향권 안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나. 고려시대
8세기 말 통일신라와 일본의 국교가 단절된 이래 고려시대에 들어서도 양국의 관계가 정상화되지 않아 양국간의 공식적인 교류가 없었다. 그러나 중앙정부 사이의 사절 왕래는 없었지만 상인들에 의한 교역과 표류민 송환과 같은 민간교류는 유지되었다.
이와 같은 교류는 고려 중기 문종대(1047~1082)에 들어서 활발해졌는데, 특히 대마도에 의한 표류민 송환과 토산물 진헌이 가장 많았다.
11세기 후반 문종대 이래 대마도와 일본 서국 지역의 호족들 간에 이루어진 교역이 12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진봉선무역(進奉船貿易)으로 정례화되었다.
사료 B-1 : 《고려사》 권 25 원종 4년 4월
양국이 통교한 이래로 해마다 상례로 진봉하는데 한 번에 배 두척을 넘지 못하게 하였다. 만일 다른 배가 다른 일을 빙자하여 우리(고려측) 연해 지방의 고을에 외람되게 소란을 일으킬 때에는 (일본측이) 엄하게 처벌하고 금지할 것으로 정약하였다.
위 기사는 대마도 해적의 금압을 요구해 일본에 보낸 고려의 외교 문서이다. 이 내용으로 볼 때 고려는 일본과 진봉선무역에 관한 정약을 체결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조약에 의해 진봉선무역은 매년 상례대로 시행되었으며 진봉선은 1년에 1회로 하되 한 번에 배 두 척으로 제한되었다. 이와 같은 진봉선무역을 정약한 고려의 목적은 왜구를 방지하기 위한 회유책이면서 동시에 폭주하는 일본인들의 내왕을 통제하기 위한 일종의 무역 제한책이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이 진봉선체제가 성립된 때가 언제이며, 진봉선을 보낸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제시되고 있다.10)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해 보면 대개 시기적으로는 11세기 말경 성립되어 13세기 후반까지 지속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진봉선무역은 진봉(進奉)과 회사(回賜)로 이루어지는 조공무역으로서 ‘진봉예제(進奉禮制)’로 표현되기도 했듯이 제도화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일시적인 사헌무역(私獻貿易)이 아니라 외교의례의 형식을 갖춘 공식적이고 정례적인 교역체제였다.
또 진봉의 주체는 대마도이고 대재부(大宰府)가 그것을 관리 감독하고 막부는 묵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는 이 진봉선을 접대하기 위해 금주(金州 : 김해)에 객관을 설치하였으며, 외교문서의 수수관계는 고려의 금주방어사(金州防禦使) -대마도주, 경상도안찰사- 대재부의 루트를 통하였다.11)
그런데 진봉선무역은 고려 후기로 오면서 약정된 무역선 외에 허가받지 않은 사무역선이 무질서하게 내왕하고 또 일부는 해적 행위를 자행함으로써 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러다가 원(元)의 침략 이후 고려가 원과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이어 여원연합군의 일본 침공이 시작되면서 이 진봉선체제는 종말을 고하였다. 이후 고려와의 교역 통로를 상실한 대마도인은 왜구로 변하게 되었다.
고려 말에 이르러서 왜구금압을 위해 고려 정부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함에 따라 정부간 통로가 열리기는 하였다. 그러나 막부의 왜구통제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고려는 구주탐제(九州探題)와 서국 지역의 호족 및 대마도와 직접 교섭하게 되었다.
사료 B-2 : 《고려사》 공민왕 17년(1368) 7월
대마도만호가 사자를 보내와 특산물을 진헌하였다. (…) 윤7월 강구사(講究使) 이하생(李夏生)을 대마도에 보냈다.12)
사료 B-3 : 동 공민왕 17년 11월
대마도만호 숭종경(崇宗慶)이 사자를 보내어 조공하였다. 종경에게 쌀 1,000석을 하사하였다.13)
사료 B-2와 B-3은 고려 말 공민왕대에 대마도만호가 사자(使者)를 보내고 조공을 하였다는 기사이다.
이 시기에는 대마도주가 아비류 씨에서 종씨(宗氏)일족으로 바뀌었는데 위 사료의 ‘대마도만호 숭종경(崇宗慶)’은 대마도주 종경무(宗經茂)를 가리킨다.14)
이 기사를 통해 대마도주가 고려 정부로부터 만호(萬戶)라는 관직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대마도만호란 직책은 물론 왜구 금압을 위한 대가로 경제적 보상과 함께 주었을 것이다.15)
만일 그렇다면 대마도주의 ‘수직왜인화(受織倭人化)’가 고려시대에 이미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면 고려시대의 대마도인식은 어떠하였을까?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는 선종 2년(1085) 이래 대마도주를 ‘대마도구당관(對馬島勾當官)’로, 일기도주를 일기도구당관이라고 명명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구당관은 고려시대 변방 지역 내지 수상교통의 요충지를 관장하는 행정 책임자들에게 붙인 관직명이다. 이를 보면 탐라, 대마도, 일기도의 지배자에게 고려가 구당사 혹은 구당관이란 명칭을 쓴 의미를 알 수 있다. 즉 앞의 세 섬을 고려의 속령(屬領)으로 인식하였거나 아니면 고려 정부가 대마도와 제주도를 고려 고유의 지배 질서 속에서 같은 차원으로 취급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16)
이와 같은 인식은 중기 이래 진봉선무역체제하에서 더욱 강화되었을 것이다. 이 체제하에서의 고려와 대마도는 조공관계였다. 또 고려 말 공민왕대에는 대마도주가 만호라는 고려의 무관직을 받았다. 양국간에 국교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대마도가 진봉선무역이라는 형태로 고려와 통교하였다는 사실, 그리고 도주가 고려로부터 관직을 받았다는 것은 대마도의 반독립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고려는 대마도를 속령 내지 속주로 인식하였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한편 고려시대 중기 이후의 고려 - 대마도 관계를 보면 조선 초기의 그것과 아주 유사함을 발견할 수 있다. 진봉선은 조선 초기 대마도주에게 허락한 세견선(歲遣船)과 같은 성격이며 진봉선의 접대를 위해 금주에 설치한 객관도 조선 초기의 왜관과 마찬가지이다. 이로써 조선 초기 대마도관계의 원형이 고려 후기에 이미 성립된 것으로 여겨진다.
인식면에 있어서도 후술하는 바 조선초기의 대마고토의식(對馬故土意識)과 속주의식(屬州意識)이 고려시대의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둔 것이며 그 원형은 고려시대에 형성된 것이 아닌가 한다.
3. 조선시대의 관계와 인식
가. 조선 전기의 통교체제와 대마도인식
조선 초기 대일정책의 기본은 남쪽 변경의 평화를 확보하는 것으로서 바로 왜구대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왜구를 평화적 통교자로 전환시키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조선정부는 외교적 교섭, 군사적 대응과 회유책을 병행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구의 침략이 근절되지 않자 세종 원년(1418) 왜구의 근거지였던 대마도에 대한 정벌을 단행하였다.
이와 같은 경과를 거쳐 15세기 중엽에 확립된 대일 통교체제는 막부와는 대등한 형식의 교린과 대마도 등 여타 세력에 대해서는 기미교린(羈縻交隣)이라는 중층적인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특히 대마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교역상의 특권을 주면서 일본의 각종 통교자들을 통제하도록 하는 대신 조선 중심의 국제질서 체계 안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이 시기 조선 정부가 대마도에 대해 시행한 수직왜인제, 수도서인제, 세견선 정약, 세사미두의 하사 등은 전형적인 외이기미책(外夷羈縻策)으로서 일종의 이이제이책(以夷制夷策)이라고도 할 수 있다.
1) 대마도정벌과 속주화 문제
대마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인식은 세종 원년(1419)의 대마도정벌과 뒤이은 대마도의 경상도 속주화 조치 때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그 과정상에 보이는 조선 정부의 대마도관을 살펴보자.
사료 C-1 : 출정전(出征前) 태종의 교유문(敎諭文)
대마는 섬으로서 본래 우리나라의 땅이다. 다만 궁벽하게 막혀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을 가지고 경인년부터 뛰놀기 시작하였다.17)
사료 C-2 : 대바정벌 후 도주에게 보낸 교유문
대마는 섬으로서 경상도의 계림(鷄林)에 예속되었던 바 본시 우리나라 땅이라는 것이 문적(文籍)에 실려 있어 확실하게 상고할 수 있다. 다만 그 땅이 매우 작고 또 바다 가운데 있어서 왕래함이 막혀 백성들이 살지 않았을 뿐이다. 이에 왜놈으로서 그 나라에서 쫓겨나 갈 곳 없는 자들이 몰려와 모여 살며 소굴을 이루었던 것이다. (…)
만약 빨리 깨닫고 다 휩쓸어 와 황복하면 도주에게는 좋은 벼슬과 두터운 몫을 나누어 줄 것이요, 나머지 대관(代官)들은 평도전(平道全)의 예와 같이 할 것이며, 그 나머지 무리들도 옷과 양식을 넉넉히 주어서 비옥한 땅에 살게 할 것이다. (…)
이 계책에 나아가지 않는다면 차라리 무리를 다 휩쓸어서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도 가하다. 만일 본국에 돌아가지도 않고 우리나라에 항복하지도 않으면서 도적질할 마음으로 품고 섬에 머물러 있으면 마땅히 병선을 갖추어 다시 섬을 에워싸서 정벌할 것이다.18)
사료 C-3 : 번병(藩屛)과 속주화(屬州化)를 요청한 도주 사신의 요청
밖에서 귀국을 호위하며 (…) 우리 섬으로 하여금 귀국 영토 안의 주군(州郡)의 예에 따라 주의 명칭을 정하여 주고 인신(印信)을 주신다면 마땅히 신하의 도리를 지키어 시키는 대로 따르겠습니다.19)
사료 C-4 : 속주화 조치와 도주에의 인신 하사
대마도는 경상도에 예속되었으니 모든 보고나 문의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본도의 관찰사에게 보고를 하여, 그를 통해 보고하도록 하고 직접 본조에 올리지 말도록 할 것이요, 겸하여 요청한 인장과 하사하는 물품을 돌아가는 사신에게 부쳐 보냅니다.20)
사료 C-5 : 일기도초무관(壹岐道招撫官) 강권선(康勸善)의 보고
권선이 또 아뢰기를 대내전(大內殿)의 관반(館伴) 노라가도로(老羅加都老)가 말하기를 “대마도는 본래 조선의 목마지(牧馬地)이므로 대내전이 조선과 더불어 협공하여 대마도를 귀국에 돌리고자 하였더니 불행히도 세상을 떠났는데 영주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21)
우선 과정을 보면, 세종 원년(1419) 6월 대마도정벌을 감행한 후 강화교섭이 이루어졌다. 이해 7월 17일 병조판서 조말생(趙末生)의 명의로 대마도주에게 보낸 교유문에는 다 휩쓸어 와 항복(捲土來降)을 하거나 아니면 무리를 다 이끌고 일본으로 돌아갈 것(한자)을 요구하였다.(사료 C-2)
결국 대마도는 이듬해 윤1월 이 요구에 응해 조선의 번병(藩屛)을 자처하며 속주(屬州)가 될 것을 요청하였다(사료 C-3).
사료 C-4는 대마도주에게 보낸 예조판서의 답서 내용으로서 조정은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시키고 도주에게 인신(印信, 즉 圖書)을 하사하였다. 이로써 대마도는 경상도의 속주로 편입되고 도주는 조선의 수도서인(受圖書人)이 되었다. 이후 모든 서계에는 반드시 이 도서를 찍어야만 효력을 인정받았다. 도주가 새로 바뀌면 대마도측은 조선 정부에 신청해서 새로운 도서를 하사받았다. 도서제와 함께 모든 보고사항으로 경상도 관찰사를 통해서만 하도록 한 점은 고려시대 진봉선체제하에서의 방식과 아주 흡사하다.
그런데 그 후 막부측의 개입, 소이전(小貳殿)과 대마도측의 항의, 회례사(回禮使) 송희경(宋希璟)의 유화적 태도 등에 의해 속주화 조치는 1년 3개월 만에 철회되었다.22)
조선 정부는 대마도를 영토적으로 복속시키는 대신 도주가 신하가 되어 변경을 지킨다는 명분과 정치적 종속관계에 만족하였다. 즉, 조선 정부의 대마도정벌의 목적은 왜구의 진압이었지 대마도에 대한 영토적 지배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것으로 조선 정부는 대마도가 조선의 번병(藩屛)으로 속령화되었다고 본 것이다.
위의 사료 가운데 사료 C-1과 C-2의 내용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그대로 계승되면서 이후 조선시대 대마도인식의 근간을 이루었다.
여기에서의 ‘계림’은 경주를 말하는데 보다 더 정확하게는 《고려사》지리지에 나와 있는 바 경상도 경주에 설치된 동남해도부서(東南海都部署)를 가리킨다. 즉 고려 중기 진봉선무역이 시행되는 시기에 대마도가 경상도안찰사가 관장하는 동남해도부서에 예속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추측된다.23)
‘문적’ 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예부터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24)
추측하건대 지금은 모두 전하지 않는 자료들이지만 고려 초기에 편찬된 《구삼국사(舊三國史)》를 비롯해 《고려사》편찬에 참고한 고려시대의 사서(史書), 조선 초기 정도전이 편찬한 《고려국사(高麗國史)》를 가리키거나, 혹은 고려시대 진봉선 무역체제 하에서 대마도주가 고려에 보내 온 〈표문(表文)〉등이 아닐까 한다.
요컨대 위 기사는 대마도가 옛날부터 우리 영토였다는 식의 막연한 관념이 아니라 바로 전시대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여진다.25)
사료 C-5의 기사는 세종 26년(1444) 일기도초무관 강권선의 보고문을 통하여 대마도가 본래 조선의 목마지였다는 사실과 대마정벌시 대내전이 더불어 협공하여 조선으로 되돌리고자 하였다는 대내전 부하의 말을 전하였다.
당시 대내전은 대마도주를 배후에서 지원하고 있었던 소이전(小貳殿)과 대립관계에 있었던 만큼 이 말을 전적으로 믿기는 곤란할지 모르지만 일본 내에서의 대마도관을 보여주는 한 사례로 주목할 만하다.26)
2) 조선 전기의 대마도인식의 전개
대마도정벌 이후 대마도인식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지식인․정부의 입장, 지리지 등을 통해 살펴보자.
대마도정벌 후 일본에 회례사로 다녀온 송희경은 일본이적관(日本夷狄觀)의 바탕 위에서 대마도를 부용국(附庸國) 내지 속국으로 인식하였다. 대마도에 도착한 후 그는 ‘조선과 일본은 한 집안’이라고 하였고, 대마도만호 좌위문태랑(左衛門太郞)을 만나서는 ‘같은 왕의 산하’라고 하였다.27)
이는 당시 경상도 속주화 조치가 내려진 상황하에서 대마속국관을 명백히 표현한 것이다.
세종의 대마도관 또한 김중곤(金仲坤)의 〈노비문기(奴碑文記)〉에 두지(豆之 : 대마도의 지명)인이 있는 데 대해 “대마도는 곧 우리나라의 변경이니 왜인이라고 해서 무엇이 관계되랴“28) 고 말한데서 알수 있다. 이에 대해 정승 황희(黃喜)도 ”대마도는 본시 우리나라 땅이온대 고려 말기에 기강이 크게 허물어져 도적을 금하지 못해 드디어 왜적의 웅거하는 바가 되었다”라고 화답하였다.
이것은 대마정벌 후 이와 같은 인식이 왕을 비롯한 조선 조정에 일반화되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세조대에 대마도주 종성직(宗成職)의 수직(授職)을 추진하던 과정에서 대마도주에게 내린 교서에서도 “경의 조부가 대대로 남쪽 변방을 지켜서 나라의 번병(藩屛)이 되었는데, 지금 경이 선조의 뜻을 이어서 더욱 공경하고 게으르지 아니하며 거듭 사람을 보내어 작명(爵命)을 받기를 청하니 내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 특별히 숭정대부 판중추원사 대마주병마도절제사를 제수한다”고 하였다.29)
성종대와 연산군대 조정에서의 논의 과정이나 대마도주에게 주는 서계에서도 ‘대마주는 우리나라의 번신(藩臣)’이라거나 “어찌 (대마도와 조선을) 양국이라고 칭하느냐. 너희 도주가 우리나라에 신하라 칭하였으니 (대마도는) 우리나라의 일개 주 현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라는 기사가 자주 보인다.30)
대유학자이자 명종대 예조판서로 재직하였던 이황(李滉)은 조선과 대마도의 관계를 중국 역대왕조의 대오랑캐 정책을 원용하면서 부자(父子)관계로 비유하였다.31)
또 그는 세사미두(歲賜米豆)의 의미에 대해 “귀도가 충성을 다하여 바다를 든든하게 지키는 수고로운 공적을 가상히 여겨 해마다 하사한다”고 설명하면서 대마도를 우리나라의 번국(藩國)이라고 규정하였고 나아가 “더욱 충절에 힘써서 길이 번국의 복을 누리라”고 권고하였다.32)
다음으로 임진왜란 당시의 대마도관을 살펴보자.
사료 D-1 : 김성일이 서장관 허성(許筬)에게 보낸 답서
대저 이 섬이 우리나라와 어떤 관계인가? 대대로 저정의 은혜를 받아 우리나라의 동쪽 울타리를 이루고 있으니 의리로 말하면 군신지간이요, 땅으로 말하면 부용이다.33)
사료 D-2 : 김성일이 대마도주에게 보낸 글
두 나라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이 귀도로, 족하는 동으로 귀국을 섬기고 북으로는 우리 조정에 순종하여 하늘을 두려워하고 사대의 공경함이 지극하였다. 그런데 혹시 어떤 도적이 족하의 길을 빌어서 두 나라를 침범하려 한다면 그를 허락하겠소이까?34)
사료 D-3 : 종의지(宗義智)에게 보낸 경상감사의 답서
우리나라와 일본은 형제와 같이 우호관계를 맺으면서 신의와 화목을 닦아서 200여 년 동안 조금의 틈도 없었다. 대마도는 동번(東藩)으로 칭하면서 우리나라의 신하로서 섬겼으므로 나라에서 심히 후하게 대접하였다. 세견선의 곡식으로 먹이고 수레의 포목으로 입혔으니 섬의 모든 백성이 조상 대대로 은덕을 입고 양육받지 않음이 없었다. 그로써 생활하였으니 추호라도 모두 우리 나라의 은혜이다.35)
임진왜란 직전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되었던 김성일(金誠一)은 사료 D-1에서 대마도가 우리나라의 동쪽 울타리로서 우리나라와 군신관계를 맺은 번방국(藩邦國)임을 말하였다. 또 사료 D-2에서는 대마도가 조선과 일본의 두 나라 사이에서 양국을 모두 섬겨온 사실을 말하면서 양속관계임을 분명히 밝혔다.
사료 D-3은 임진왜란 당시 정부의 대마도관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대마도주 종의지(宗義智)가 강화교섭을 위해 서장을 보낸 데 대해 경상감사가 보낸 이 답서에서 조․ 일 관계를 형제지간으로 비유한 후, 대마도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의 동쪽 울타리로서 신하로 부용했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에서 세사미두와 면포를 주어 도민을 먹여 살렸다는 것이었다. 조선 전기의 대마동번 의식과 그 정치적․ 경제적 배경이 잘 드러나 있다. 조선 초기 태종과 세종의 대마도인식이 그 후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으로서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대마도인식이 지리서에는 어떻게 반영되어 있을까?
사료 D-4 : 《동국여지승람》 권 23, 동래현 산천조
대마도는 곧 일본의 대마주이다. 옛날에 우리 계림에 예속되었는데 언제부터 왜인이 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 이 섬은 해동 여러 섬들의 요충에 위치해 있으므로 우리나라에 내왕하는 자는 반드시 경유하는 곳이어서 모두가 도주의 문서를 받은 후에야 올 수 있다. 도주 이하의 사람들이 각기 사선(使船)을 보내오는데 해마다 일정한 액수이다.
섬이 우리나라에 가장 가깝고 가난이 극심하므로 매년 쌀을 주는데 차등 있게 하였다.35)
위 기사에는 이외에 대마도의 지리․ 역사․ 도주세계(島主世系)․ 대조선관계․ 사회문화상 등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전반부는 세종의 교유문, 후반부는 《해동제국기(海東諸國紀)》의 내용을 종합한 것인데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대마도가 일본국의 대마주라고 밝혔지만 이어 옛날 우리의 고토(故土)였다고 하고 동래부의 부속도서로 취급하고 있는 점이다.36)
그러나 대마도가 세종의 교유문과는 달리 ‘경상도의 계림’에 예속된 것이 아니라 ‘옛날 우리나라 계림’에 예속되었다고 하여 이 계림이 경주인지 신라를 말하는 것인지 약간 애매하게 표현되어 있다.
성종 17년(1486) 왕명으로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의 이 내용은 조선시대 대마인식의 기본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이후 지리지 및 외교 자료집에 그대로 계승되었다.37)
또 명종대 제용감(濟用監)에서 편찬한 〈조선방역지도(朝鮮方域之圖)〉에는 만주와 대마도를 우리 영토로 표시하고 있어 이 시기의 영토의식 내지 대외의식을 보여주고 있다.38)
한편 대마도는 이러한 관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을까?
사료 D-5 : 성종 18년 대마도주의 서계
영원토록 귀국 번병의 신하로 칭하며 충절을 다할 것입니다.39)
사료 D-6 : 대마번이 메이지〔明治〕정부에 올린 봉답서(奉答書)
세견(歲遣)을 약속한 것은 실로 업신여기며 주는 음식을 받아먹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일시적인 구급책에 불과합니다.(…) 그리하여 잘못된 선례가 생겨 조선에 대해 번신(藩臣)의 예를 갖추어 수백 년간 그 나라로부터 굴욕을 받았으니 분함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40)
사료 D-5는 성종 18년(1487) 대마도주 종정국(宗貞國)이 대장경을 구청하면서 올린 서계의 일부분인데, 스스로 번병의 신하로서 충절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비슷한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사료 D-6은 메이지 유신 이후 신정부의 외교개혁 과정에서 대마도측이 정부에 올린 봉답서의 한 부분이다. 여기서 대마도는 대조선 관계가 번신의 예로서 굴욕이었다고 하였다. 이어 1868년 메이지 정부로부터 국서 전달을 지시받았을 때에는 “지금의 서계부터는 조선이 주조해 준 도서 대신에 일본 조정이 만들어주는 새로운 도장을 사용하여 그들(조선)이 번신으로 우리를 대해 온 오류를 바로잡아서 옛날부터 받아온 국욕(國辱)을 씻고 오로지 국체와 국위를 세우고자 한다”41)고 하면서 각오를 밝혔다.
이로써 대마도는 조선시대 조선 정부가 대마도에 취한 세견선과 수도서제가 조공의례에 바탕을 둔 것이며 또 대마도가 조선의 번속국이었음을 자인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 조선 전기 대마도인식의 성격
이상 살펴본 바 조선 전기의 대마도인식을 정리해 보면,
① 대마도가 옛날 우리 나라의 땅이었다는 대마고토의식(對馬故土意識)
② 대마도가 우리나라의 동쪽 울타리라고 하는 대마번병의식(對馬藩屛意識) 내지 속주의식(屬州意識)
③ 대마도가 일본 본주(本州)와는 다르다고 하는 대마구분의식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대마고토의식은 태종과 세종의 교서 이래로 일반화되었다.
그런데 그 근거가 문적에 분명하다고 하였지만 구체적인 증거는 약간 불확실하다. 대마정벌 후 대마도가 일시 경상도의 속주로 편입되기도 하였고, 대마도정벌을 감행한 태종이나 중종대 삼포왜란을 진압한 황형(黃衡)과 같이 대마도가 우리나라의 땅이었으므로 되찾아야 한다는 주장도 계속 존재하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그 후 대마도가 일본의 영토인 현실에 대해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해동제국기》나 《동국여지승람》의 기사도 대마도가 현실적으로 일본 땅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서술된 것이었다. 따라서 대마고토의식은 세종대 중기 이후로는 관념적인 형태로 존재하였다고 할 수 있다.
둘째, 대마번병의식이다.
대마고토의식이 다소 관념적인데 비해 대마번병의식은 현실에 바탕을 둔 것으로서 조선시대 대부분의 한국인이 가졌던 대마도관이었다. 대마도정벌 후 대마도에 대한 영토적 지배 대신 정치적 속령화 정책으로 바꾸게 됨으로써 대마도는 일본의 소속으로 되돌아갔지만 정치적으로 조선에 종속되게 되었다. 대마도주는 수도서인(受圖書人)이 되어 조공무역을 하였으며 세사미두를 하사받았고, 도내의 호족들은 수직왜인이 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 정부는 대마도에게 경제적 특혜를 주는 대신 조선의 울타리로서 왜구를 진압하고 통교자를 통제하는 역할을 맡김으로써 남쪽 변경의 평화를 보장받고자 한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외이통제책으로서 조선에서는 대마도의 교역선에 대해 모두 조공적 의례를 갖추도록 하였다.
또 대마도에 파견한 사신의 명칭도 경차관(敬差官)․체찰사(體察使)․초무관(招撫官) 등 국내의 지방관의 직명을 사용하였던 점도 대마도를 속주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42)
이와 같이 대마도가 영토적으로는 일본에 속하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조선의 국가질서 속에 의제적으로 편입되어 신하의 예를 갖추었기 때문에 이를 양속(兩屬)관계라고 한다.
셋째, 대마구분의식이다.
이것은 양속관계론과 관련되는 것이지만 조선시대인들은 대마도를 일본 본주와 구별되는 반독립적인 존재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사례는 많이 있다. 예컨대 대마정벌시 조선 정부는 해적단의 본거지를 토벌하는 것으로서 일본 막부로부터 환영받을 것으로 생각하였던 듯하다. 그래서 그것이 본주에 대한 침략이 아님을 구주탐제에게 미리 통보하였다.
세종 26년(1444) 일기도초무관 강권선의 보고에서는 대마도에 대해 ‘일본국왕의 명령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라고 하여 일본 본주와 다른 지역으로 파악하였다.43)
《해동제국기》에서도 대마도를 본주와 구별하는 시각이 많았는데 임진왜란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가 그린 ‘팔도총도(八道總圖)’라는 지도에 대마도가 조선영토로 표기되어 있는 점도 일본인의 대마도인식의 일단을 보여주는 사례인다.44)
실제 가마쿠라 막부 시대에는 고려와 정식 국교가 없는 상태에서 대마도가 독자적으로 진봉선무역을 하였고, 무로마치 막부 시대에도 대마도는 반독립적인 입장에 있었다. 이 시기에 대마도는 별도로 이루어졌으며, 조선에서 막부로 파견한 사절을 호행(護行)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대마도는 조선정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았으며 대일 외교의 창구 역할을 하였다. 흔히 양속관계라고 하지만 조선 전기의 경우 대마도는 무로마치 막부보다는 조선 정부와 더 밀접한 교류를 하였다.
나. 조선 후기의 관계와 대마도인식
1) 통교관계의 변화
무로마치 막부 시기에 반독립적인 지위를 누리며 조선과 독자적인 통교를 하였던 대마도는 전국시대(戰國時代)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예속화의 길로 들어선다. 이어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도 초기에는 조선 외교를 전담하면서 독자적 위치를 유지하였으나 17세기 초반에는 막번체제(幕藩體制)에 편입되어 도주 종의지(宗義智)가 막부로부터 종사위하시종(從四位下侍從) 대마수(對馬守)로 임명받았다. 물론 이 시기에도 대마도가 조선 외교를 특수 임무(家役)로서 맞아 전담한 것은 조선 전기와 마찬가지이다.
대마도주는 여전히 조선 정부의 수도서인으로 세견선, 세사미두의 지원과 왜관무역을 통한 이익으로 재정을 유지하였다. 형태적인 면에서 볼 때 조․일 양국간의 양속관계라는 큰 테두리에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내용상으로 보면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우리 조선 후기의 대일 통교 체제는 전기와 같은 다원적 형태가 청산되고 막부- 대마도로 일원화되었다. 전기와 같이 여타 호족 세력들의 통교가 없어져서 대마도의 조선외교 독점성은 상대적으로 강화되었지만 막부가 감독을 하여 독자성은 줄어들었다.
즉 1635년 임진왜란 이후 국교재개 과정에서 대마도가 자행한 국서개작사건(國書改作事件)의 폭로로 인해 이정암윤번제(以酊庵輪番制)가 실시되었다. 막부에서 파견한 이정암윤번승(以酊庵輪番僧)들은 조선 외교에 관한 외교문서를 감찰하였으며 통신사 호행시에도 참여하였다.
이와 같이 17세기 주안 이후 대마도의 조선 외교는 기본적으로 막부의 감독하에 진행되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1609년에 체결된 기유약조(己酉約條)가 이전보다 더 엄격히 통제된 것이었기 때문에 대마도는 그 부족분을 막부의 지원에 의지하였다. 특히 왜관무역이 쇠퇴하는 18세기 중반부터는 막부의 재정지원이 일상화되었다. 전반적으로 볼 때 조선 전기에 비해 대마도의 일본 예속화가 진전되었고, 그만큼 양속관계는 약하되어 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의 변화는 대마도가 형태적으로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양속관계를 유지하였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막부쪽으로 기우는 것이었다.45)
이른바 조선전기의 대마도가 ‘조선측의 대일 외교 창구’였다면 후기는 ‘도쿠가와 막부의 대조선 외교의 창구 내지 대리자’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2) 통신사행원과 실학자의 대마도관
조선 후기의 대마도인식의 전개 양상을 통신사행원과 실학자의 대마도관 및 지리지를 통해 살펴보자.
통신사행원들은 일본에 사행하면서 대마도에 대해 직접적인 체험을 가지고 있었고 또 귀국 후 대부분 정부의 대일정책 결정에 참가 하였던 일종의 대일전문가 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사료 E-1 : 광해군 9년(1617) 오윤겸(吳允謙)의 《동사상일록(東槎上日錄)》
지성으로 사대하며 시종 한마음을 가져 영원히 번병(藩屛)이 되어야 할 것이다. 또 이 섬의 인민은 오로지 우리나라의 난육(卵育)의 은혜에 힘입어 생계를 삼고 있는 처지이니 이뜻을 모든 인민들이 알아야 할 것이다.46)
사료 E-2 : 인조 21년(1643) 조경(趙絅)의 《동사록(東槎錄)》〈망마주(望馬州)
조선의 쌀과 베가 배고플 때 너희의 밥 되고 추운 때 갖옷 되었다. 너희 목숨 조선에 달렸으니 너희 자손 대대로 속이지 말라.(…) 거듭 위하여 고하노니 너희 조그만 대마주는 양국간에 끼엇으니 모름지기 양편에 충심을 다해 백년토록 하늘의 복을 맞을지라.
사료 E-3 : 숙종 45년(1719) 신유한(申維翰)의 《해유록(海游錄)
이 섬은 조선의 한 고을에 지나지 않는다. 태수가 도장(圖章)을 받았고 조정의 녹을 먹으며 크고 작은 일에 명을 청해 받으니 우리나라에 대해 번신(藩臣)의 의리가 있다.47)
사료 E-4 : 영조 39년(1763) 조엄(趙曮)의 《해사일기(海槎日記)》
대개 이 대마도는 본래 조선의 소속이었는데 어느 나라 어느 때 일본으로 들어갔는지 알 수 없다.(…) 이미 조선의 옛 땅에 살면서 대대로 조선의 도서를 받으며, 또한 공미(公米)와 공목(公木)으로 생활하니 곧 조선의 외복지이다.48)
사료 E-1은 통신정사 오윤겸이 대마도주와 상견례할 때 나눈 대화 내용으로서 대마도가 조선의 번국(藩國)이며 조선의 경제적 지원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사료 E-2에서 통신부사 조경도 조선의 경제적 지원의 의미를 강조하면서 대마도가 양속관계임을 분명히 밝혔다.
사료 E-3은 제술관 신유한이 대마도주와 의례논쟁을 하면서 말한 내용인데 대마속주의식과 번국관(藩國觀)이 강조되어져 있다.
사료 E-4에는 통신정사 조엄의 대마도관이 피력되어 있는데 그도 기본적으로 대마고토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또 대마도와의 관계에 대해서 ① 조선의 고토(故土)에 삶 ② 도주가 조선의 도서(圖書)를 받음 ③ 조선의 경제적 지원으로 생활함이라는 이 세 가지를 지적한 다음 대마도가 조선의 외복지(外服地)라고 하여 번병의식을 나타내었다.
통신사행원들의 대마도인식은 전기의 그것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오히려 더 엄격해지는 느낌이다. 그들은 사행중의 체험을 바탕으로 대마도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그 역할에 대해서도 기존의 번병론(藩屛論)을 더 강조하였다. 그러나 위의 사료를 통해서 보면 조선 후기 대마번병의식의 핵심은 경제적 지원임을 알 수 있다. 또 그것은 양속관계를 전제로 해서 성립하는 것으로서 대마도가 영토적으로 일본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음으로 전통적인 화이관(華夷觀)에서 벗어나 일본이적관(日本夷狄觀)을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였던 실학자들의 대마도관은 어떠하였을까?
여기서는 대마속국론을 둘러싼 이익(李瀷)과 안정복(安鼎福)의 논쟁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사료 F-1 : 《순암선생문집(順庵先生文集)》 권 10〈동사문답(東史問答)
대마도는 부용전으로 넣었습니다. 대개 대마도는 신라․ 고려 이래로 국초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가 속국으로 대해 왔으며 여지승람에는 “옛날 계림에 예속되었다”고 하였고, 태종이 기해년에 대마도를 정벌할 때 교서에도 “대마도는 본래 우리나라의 땅이었다”고 하였으니 가히 증거되는 바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정벌할 일은 마땅히 속국을 꾸짖는 방책이었습니다.
사료 F-2 : 《성호사설(星湖僿說)》 권 19 경사문(經史門) 〈정대마도(征對馬島)
내가 상고해 보니 대마도라는 섬은 고금이 다 말하기를 ‘본래 신라에 소속되었다’ 고들 하나 삼국사(三國史)에는 반드시 그런 말이 보이지 않는다.
사료 F-1은 안정복이 《동사외전(東史外傳)》을 지으면서 대마도에 대해〈일본전〉과는 별도로〈부용전(附庸傳)〉으로 편찬하였음을 이익에게 알린 것이다. 여기서 그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대마속국론을 주장하였다.
사료 F-2는 이익이 안정복이 주장한 대마속국론의 증거에 대해 확인하는 내용이다. 이어 답장에서 그는 ‘대마속국론에 대해 다시 상세히 검토해 보라’고 함으로써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다.49)
이에 대해 안정복은 다시 대마도가 우리 영토인 것은 문적에도 나오는 바 확실한 사실이라고 하면서 《삼국사기》와 중국의 《삼국지(三國志)》, 《북사(北史)》 등에 나오는 대마도 관련 기사를 검토하면서 대마도와 조선 관계의 밀접성과 유구성을 고증하였다.50)
안정복은 《동사강복(東史綱目)》을 저술하면서 스승인 이익의 견해를 대부분 수용하였으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양보하지 않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이들의 후배인 정약용은 《비어고(備禦考)》 권 4 〈마도사안(馬島事案)〉에서 대마도가 지금은 일본 땅이지만 본래는 우리 영토였다는 점, 대마도의 언어와 복식 등 문화가 우리나라와 유사하다는 점, 일본의 본주인과 구별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역대 사서에 나오는 관계 기사를 인용 분석하였다.
대마속국론을 둘러싼 이익과 안정복간의 이 논쟁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대일강경론자와 유화론자, 명분론자와 대세수용론자 간의 대립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정약용은 직접 논쟁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대체로 안정복의 주장을 수용하였던 것 같다.
한편 조선 후기의 지리지를 보면 전기적인 인식이 그대로 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풍수지리적 관념이 발달하였는 바 우리나라의 지세를 인체에 비유하여 설명한 점이 흥미롭다.
즉, 영조대인 1750년대 중반 제작된 《해동지도(海東地圖)》의 〈대동총도(大東總圖)〉에는 “백두산이 머리가 되고 태백산맥은 척추가 되며, 영남의 대마와 호남의 탐라를 양발로 삼는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西北彼我兩界萬理一覽之圖)〉에도 거의 같은 내용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어 당시 이러한 인식이 상당히 일반화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51)
영조 36년(1765)에 제작된 《여지도서(與地圖書)》와 순조 22년(1822) 편찬된《경상도읍지》등에는 대마도가 동래부 도서조(島嶼條)에 수록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대개《신증동국여지승람》의 대마도인식을 보완한 것이다. 그리고 183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보여지는 〈해좌전도(海左全圖)〉에는 울릉도․ 독도와 함께 대마도를 우리 영토로 표시하면서 이종무의 정벌 이후 우리 영토로 사용해왔다고 기록되어 있어 주목된다.
3) 조선 후기 대마도인식의 특성
조선 후기 대마도인식의 특성을 요약하면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조일관계와 대마도의 지위가 내용적으로 바뀌어 감에도 불구하고 대마고토의식과 동번의식은 그대로 계승되고 있었다. 통신사행원들과 안정복, 지리지 등이 그러한 예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현실과는 반대로 더 관념화되면서 심화되는 측면도 없지 않다.
둘째, 대마구분의식의 심화를 들 수 있다.
일본의 본주와 대마도를 구분하는 의식은 조선 전기부터 있었지만 일본의 본주와 대마도를 ‘심처왜(深處倭)’와 ‘대마왜(對馬倭)’의 용어로 구분한 것은 임진왜란시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강항(姜抗)의 《간양록(看羊錄)》이 처음이었다. 그것은 대마구분의식이 전기보다 명확해진 것을 의미한다.
이후 안정복이《동사외전(東史外傳)》에서 대마도를 〈부용전〉으로 〈일본전〉과는 별도로 설정한 것도 이러한 의식의 표현이다.
영조 39년(1763) 통신사행의 서기였던 원중거(元重擧)는 “대마도는 내국인과는 전혀 다르다. 내국인들이 항상 대마도인을 만이(蠻夷)라고 부르며 사람축에 같이 끼워주지 않는다”52)라고 하였다. 또 그는 대마도가 일본과 조선 양국 사이에서 농간을 부리며 이득을 추구하는 행태에 대해 ‘조선과 일본 양국의 적(敵)’이라고까지 하였다. 이는 대마도와 본주를 기본적으로 구별해서 본 인식에서 나온 것으로 양속관계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대마번병의식과 대마구분의식의 심화는 대마도의 달라진 위상과 태도에 대해 기존의 관념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나온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셋째, 양속관계의 약화에 따른 대마번병의식의 쇠토현상을 들 수 있다.
일본에 대한 재인식을 주창하였던 이익이 대마속국론에 대해 부정하는 입장은 변화하는 국제관계의 현실과 대마도의 위상을 수용하자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조엄이 대마도를 조선의 ‘외복지(外服地)’라고 한 것도 ‘우리 나라의 국경 밖에 있으면서 복속하는 번국’이라는 의미로서 이전보다는 영유의식이 약화된 표현이라고 여겨진다.
4. 근대의 관계와 인식
근대에 들어와서 특히 일본의 국내 정세의 변화에 의해 조선과 대마도의 관계는 일변하였다.
1954년 미일강화조약 이후에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도쿠가와 막부는 종래 대마도에 의해 대행되고 있었던 조선 외교와 무역을 직접 관장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혼란 속에 이 조치는 결행되지 못하고 메이지 정부의 과제로 넘어가게 되었다.
1868년 메이지[明治]유신 후 성립된 신정부는 당연히 외교권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1869년 판적봉환(版籍奉還)이 이루어져 ‘대마번(對馬藩)’은 ‘이즈하라번’으로 개칭되었다. 동시에 대마도주 종씨의 조선 외교권은 신정부에 강제로 넘겨주게 되고, 이해 9월 외무성 관리가 대마도로 파견되었다. 이어 1871년 폐번치현(廢藩置縣)의 실시에 의해 대마번은 이즈하라현으로 바뀌어 이마리[伊萬里]현에 합병되었다가 1877년 다시 나가사키현에 편성되었다. 이리하여 대마도는 나가사키 현 부속의 일개 지방행정단위로 바뀜으로써 사실상 해체된 셈이다.
또 메이지 정부의 외교일원화 조치에 의해 대마도의 가역(家役)인 대조선 외교에 관한 제반업무도 1872년 모두 외무성으로 이전되었다. 이해 5월 28일 메이지 정부에 의해 부산의 왜관이 접수되었으며 수도서제(授圖書制)와 세견선(歲遣船)이 폐지되었고, 표류민 송환도 외무성이 관장하게 되었다.53)
메이지 정부의 이러한 일련의 조치에 의해 조선시대 조․ 일간의 전통적인 교린체제는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조선정부는 대마도와 어떠한 관계도 맺을 여지가 없었다.
이에 따라 조선측의 대마번병의식(對馬藩屛意識)은 그 현실감을 잃게 되었다. 이 시기에 와서는 대마도와 일본 본주를 구분할 수가 없었고, 대마도와의 별다른 관계 설정도 없었다. 당연히 대마번병의식을 나타내는 기록도 급격히 사라져갔다.
필자의 조사 부족 탓이겠지만 이 시기 대마도에 관한 기사는 고종 32년(1895) 간행된《영남읍지》나 순종 2년(1908)의《증보동국문헌비고》와 같은 지리지에서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이 중《증보동국문헌비고》에는 대마도에 대해 처음 “지금 비록 일본땅이 되었으나 본래 우리나라 지방에 속했던 까닭에 우리나라의 고사(故事)가 많으므로 아울러 기록한다.”고 한 뒤 “섬 안 남자들의 언어와 부녀들의 의복이 조선과 많이 유사하다. 그들이 왜를 칭할 때 반드시 일본이라고 하고 일본사람들도 그들을 대우하기를 역시 내지(內地) 사람과는 달리 하였으므로 백성들이 모두 일찍이 순수한 왜인으로 자처하지 않았다”라고 하여 문화적 유사성을 강조하였고, 이어《삼국사기》에 나오는 기사를 인용해 신라시대에 대마도가 우리 영토였을 가능성에 대해 논증하였다.54)
여기에는 대마도 영유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차분하고 공정한 자세를 유지하면서도 대마고토의식, 조선과의 문화동질성, 일본내 대마도의 이질성, 경상도속주화 문제 등이 고루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조선 말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세계지도《소라동천(小羅洞天)》의 〈동국조선총도(東國朝鮮總圖)〉,〈강원도도(江原道圖)〉,〈경상도도(慶尙道圖)〉에는 독도와 대마도가 우리나라 영토로 그려져 있어 주목된다.55)
이와 같이 위의 지리서에는 대마도를 여전히 동래부의 부속도서로 취급하고 있어 전시기의 대마번병의식을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와서 대마번병의식은 현실적인 의미를 거의 상실하였으며 잔영과 같이 의식의 바닥에 침전되어 갔을 뿐이다.
5. 맺음말
본고에서는 한국인의 대마도인식을 대마고토의식, 대마번병의식, 대마고분의식의 셋으로 나누어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셋으로 나누어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체계화되지만 고대 이래의 역사적인 유래에 바탕을 둔 것이라는 사실을 논증하였다.
특히 조선 전기의 대마도인식은 고려시대 중기 진봉선무역체제 하에서의 조공적 관계와 고려 말 대마도주의 ‘수직왜인화’ 등에 의해 생긴 것으로 추정하였다. 여기에 대마정벌 후 일시적이나마 대마도가 경상도의 속주로 들어왔다는 사실, 또 대일통교 체제상 대마도가 조선의 국제질서 속에서 번신(藩臣)으로 의제되면서 편입되었던 사실 등에 의해 이러한 대마도인식은 체계화되었다.
조선 정부는 대마도에게 대일외교의 창구를 맡기는 대신 수도서제와 수직왜인제(受職倭人制)를 실시하였고, 세견선과 세사미두를 지원해 주었다. 이러한 방식은 전형적인 외이기미책의 형태이다. 이에 따라 조선 정부는 대마도가 비록 영토적으로 일본에 소속되기는 하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조선의 번속국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이러한 대마도인식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왕정복고와 외교일원화 조치에 의해 대마도가 사실상 해체됨으로써 일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대마번병의식은 현실적 의미를 잃어갔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의해 국토가 유린당하느 상황에서 영토에 강한 집착을 가졌던 민족주의자들에게는 더욱 회상의 대상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한국인의 대마고토의식은 잠재된 형태이지만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인 만주에 대한 향수, 일제의 농간에 의해 빼앗긴 간도(間島)에 대한 실지회복의식(失地回復意識)과 함께 여전히 남아 있다.
대마도영유권과 반환을 주장한 이 대통령의 발언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한국의 전통적인 대마도인식을 바탕으로 해서 나타난바 나름대로의 역사성이 있는 것이다. 이는 일본이 독도문제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제시하는 역사적 근거와 비교해 볼 때 훨씬 시기적 연원도 깊고 자료도 풍부하다고 할 수 있다.
(註)................................
1) 일본측의 반응은 신속하여 이 대통령의 대마도 반환 요구에 대한 반대 자료를 작성하기 위해 외무성 산하에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한편 학회 차원에서도 대응이 있었다. 이 직후 역사학․고고학․인류학 등과 관련된 일본의 5대 학회가 동원되어 2년간 걸쳐 대마도를 조사하고 보고서를 제출하였으며, 이 대통령 발언의 부당성을 강조하는 논문이 잇달아 발표하였다.
2) 朴實, 《한국외교비사》, 기린원, 1980, 89쪽
3) 한편 한국의 최남선(崔南善)과 김정학(金廷鶴)은 대마도가 ‘쓰시마’의 한자식 차음(借音)이라는 점은 동의하지만 쓰시마가 ‘두 섬’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이병선은 ‘韓鄕之島’와 관련하여 대마도의 어원이 ‘가라시마(韓島)’에서 변형된 것이라고 하였따.(《일본 대마 일기도 종합학술보고서》, 서울신문사, 1985, 127-133쪽).
4) 대마도에 대한 삼한(三韓)의 분국(分國)을 가리킨다. 이것은 한반도 내의 삼한과 구분하기 위해서 삼한(三汗)으로 표기한 것으로 바로 다음에 나오는 三加羅를 말한다.
5) 대마도인 등정방(藤定房)이 1723년에 편찬한 사서로 모두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인 藤定房의 가계는 嚴原八심宮의 祠官을 세습적으로 담당하였으며 대마도에 國學을 개척한 학자 집안으로 유명하다. 이 책은 神代로부터 집필 당시까지의 대마도사가 편년체로 서술되어 있는데 대마도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6) “山家要略記云 對馬島者 高麗國之牧也 新羅住之 開化天皇代 從此島襲來 仲哀天皇豊浦宮幸對馬島 征伐新羅 竟取此島” - 《山家要略記》는 12세기 말(1186-1197년) 일본 천태종의 승려인 顯眞이 편찬한 것이다. 한편 이병선은 ‘대마도가 고려국의 목이다’라는 기사를 ‘고구려의 통치하에 있었다’라고 풀이 하였는데 필자의 생각으로는 글자그대로 ‘대마도가 고려시대의 목(牧)이었다’라고 볼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후술하는 바 이것은 진봉선무역체제하에서 고려와 대마도의 관계를 시사해 주는 기사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앞 문장은 당시의 사실을 이야기한 것이고, 뒷 문장은 대마도의 역사적 연원을 설명한 것이다.
7) 가마쿠라 시대 중기(13세기 말)에 만들어진 11권의 사서(辭書)로서 저자는 불명이다.
8) 李炳銑, 〈對馬島의 新羅邑落國〉,《日本學志》10집, 계명대 일본문화연구소, 1990- 한편《일본서기》를 보면, 646년 大化改新 후에 國司가 대마도에 파견되고, 677년에는 國府를 정해 國?을 설치하였다고 나와 있는데 당시의 대마도가 일본의 국가적 편제(율령체제)에 편입되었는지는 의문이다.
9) 대마도가 한반도의 문화적 영향권 내에 있었다는 것은 지리적 여건으로 보나 역사적 사실로 볼 때도 자명하다. 오늘날까지도 대마도에는 그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일본 대마 일기도 종합학술조사보고서》, 서울신문사, 1985에 잘 정리되어 있다.
10) 진봉선무역체제에 대해서는 羅鍾宇, 《韓國中世 對日交涉史硏究》 제1장, 원광대출판부, 1996과 李領,〈東シナ海にる麗․日關係史の硏究〉,(東京大學 박사학위논문, 1995 참조 - 진봉선체제의 성립 시기에 대해 나종우는 11세기 후반부터 13세기까지로 보고 있고, 이영은 보다 구체적으로 의종 23년(1169)에서 원종 7년(1263)까지라고 추정하였다.
11) 당시의 ‘대마도주’에 대해 고려는 ‘對馬島?當官’이라고 불렀고, 일본은 ‘對馬島?當官’라고 하였다. 이 시기 진봉선무역을 한 대마도주는 平安시대 후기에서 鎌倉막부 시대 초기까지 대마도의 지배자 역할을 한 阿比留였다.
12) 《고려사》세가 권 41, 공민왕 17년(1368) 7월 기묘- “對馬島萬戶 遣使來獻土物(…) 潤月 遣講究使李夏生于對馬島”.
13) 위의 책 공민왕 17년 11월 병오-“對馬島萬戶崇宗慶 遣使來朝 賜宗慶米一千石”.
14)〈宗氏家譜〉등에 나와 있는 守護의 계승에 관한 내용이 반드시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음은 알려진 바이다. 宗經茂는 〈종씨가계보〉에는 5대로 나와 있지만 증명되는 바 종씨로서는 최초로 대마도의 守護代가 된 인물이고, 그 시기는 14세기 중반이다.(中村榮孝, 〈ツシマの歷史的位置〉,《日本歷史》19, 1949). 한편, 사료 B-2의 대마도만호가 사료 B-3에 나오는 대마도주 崇宗慶과 동일인물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전자의 경우에도 고려에서 講究使를 보낸 것으로 볼 때 대마도주라고 봄이 타당할 듯하다.
15) 萬戶는 물론 원간섭기 고려에 생긴 관직명이다. 한편《고려사》세가 공민왕 5년 10월조와 반역전 〈崔?〉,《고려사절요》 공민왕 12년 6월조 등에 나오는 ‘倭人萬戶府’의 성격도 앞으로 규명해야 할 과제이다.
16) 고려적 고유질서의 의미와 성격에 대해서는 奧村周司,〈高麗における八關會的秩序と國際環境〉,《조선사연구회논문집》16, 1979 참조.
17) 《세종실록》원년 6월 6일 - “對馬爲島 本是我國之地”.
18) 《세종실록》 원년 7월 17일 - “對馬爲島 隸於慶尙道之鷄林 本是我國之地 載在文籍 昭然可考”.
19) 《세종실록》2년 윤1월 10일 -“以爲外護貴國 (…) 若將我島 依貴國境內州郡之例 定爲州名 賜以印信 則當效臣節 惟命是從”.
20) 《세종실록》 2년 윤1월 23일 - “對馬島隸於慶尙道 凡有啓稟之事 必須呈報本道觀察使 傳報施行 母得直呈本曹 兼請印?竝賜物 就付回价”.
21) 《세종실록》 26년 4월 30일.
22) 세종 원년 11월에 온 막부장군의 사절에 대해 송희경이 회례사로 선발되어 이듬해 윤1월 일본으로 갔을 때 早田萬戶를 내세워 대마도의 속주화 요청이 본의가 아니었다고 하면서 항의하였다. 이에 송희경이 그것은 그대들의 요청에 응한 것일 뿐이고, 조선이 영토적 야심이 있어서 예속시킨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조정에 그 뜻을 알리겠다고 대답하였다(《老松堂日本行錄》2월 28일〈卽事〉).
이에 자신을 얻은 대마도는 그 후 도주의 사자를 보내어 대마도의 경상도 예속을 부인하고 일본의 변도(邊島)임을 주장하였다(《세종실록》3년 4월 6일). 그러나 대마도의 속주화 문제는 몇 차례에 걸쳐 도주의 사신이 와 요청한 사실이《조선왕조실록》에 명백히 나와 있다. 무엇보다 도의 사활이 걸린 무제를 도주가 몰랐다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대마정벌 후 교섭 과정에서 막부와 조선의 태도를 관망하면서 지연작전을 쓰던 대마도로서는 소이전(小貳殿)과 협의, 송희경에게 외교적 책략을 써본 것인데, 거기에 송희경이 잘못 응대하자 방침을 바꾼 것이다. 中村榮孝도 앞의 논문에서 그러한 개연성을 인정하면서 대마도의 지정학적 여건상 불가피한 것이라고 하였다. 대마도가 대조선외교에서 상황이 불리할 때 도주의 시신이 위사(僞使)라고 하면서 발뺌하거나 호도하는 것은 고려시대 이후 계속되어 온 상투적인 수법이었다. 세조대 대마도주 宗成職의 受職事件은 그 전형적인 예이다. 이러한 대마도의 농간에 대해 조선 정부는 대체로 관용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행태가 계속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 그것이 마침내는 임진왜란 이후 국교재개 과정에서 양국의 國書를 개작하는 사건으로까지 이어졌다.
23) 李領, 위의 논문 41쪽.
24) 대마도의 松浦允任이 지은《朝鮮通交大紀》 권 1〈圓通寺公〉에서도 이에 대해 “생각컨대 我州(대마도)가 본래 조선 경상도의 屬島였다는 것이 언제나 저들의 書에 보인다. 여지승람 또한 我州를 동래의 속도라고 하였다. 어떠한 근거에 의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라고 의문을 제기하였다. 조선측에서도 자주 이 구절을 인용하지만 이 文籍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밝히지 못해 논쟁거리가 되었다. 후술하는 바 대마속국론(對馬屬極論)을 둘러싼 이익과 안정복의 논쟁도 핵심은 여기에 있었다.
25) 여기서 세종은 대마도주에게 捲土來降하든지 아니면 捲土率衆 歸于本國하라고 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再征하겠다고 하였다. 앞의 두 가지 조건이 모두 섬을 비우라는 요구이고 보면 당시 조선 정부는 대마도영유의식과 함께 고려 말 대마도를 비워 두었다는 공도정책(空島政策)을 믿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본국으로부터 쫓겨와 왜구가 된 자들’은 종씨(宗氏)세력을 가리킨다고 보여진다. 즉, 종씨가 대마도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대마도가 우리나라의 땅이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고려시대의 한일관계와 관련해 주목되는 점이다. 또 이것은 현재 일본사에서 설명하는 바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상황과는 다른 것으로 앞으로 보다 세밀하게 검토해 보아야 할 과제이다.
26) 대마도가 조선의 목마지였다는 이야기는 대마정벌 이후 교섭 과정에서 대마도주의 사절인 莘戒道도 ‘이 섬은 본시 대국(大國)에서 말을 기르던 땅’ 이라고 하였다는 점에서 볼 때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닌 것 같다(《세종실록》 3년 4월 6일).
27) 〈到泊對馬島東面船餘?〉, 《노송당일본행록》 2월 21일
28) 《세종실록》23년 11월 22일.
38) 〈接待日本人舊定事例〉 대마도조, 金指南․金慶門 撰 권 5, 1714와 〈接待日本人舊定事例〉, 대마도조, 李宗模 撰,《交隣志》, 1832와 같은 외교자료집에도 대마도가 우리 나라 계림에 속하였다는 《동국여지승람》의 기사 내용이 대체로 수용되어 있다. 또 조선시대에 간행된 대부분의 지도에 대마도가 우리 나라의 영토로 그려져 있다. 독도가 누락된 지도는 종종 있어도 대마도는 거의 표기되어 있다. 김정호의《대동여지도》도 그러한 보기 가운데 하나이다.
45) 〈지도 3〉참조 - 서지학자 이종학의 설명에 의하면 이 지도는 일본 궁내부 도서관 소장본으로서 1871년(明治 5)에 모사한 것이라 한다.
46) 대마도인 스스로도 양속관계하에서 조선 조정을 섬기던 자세에서 벗어나 일본의 대리자임을 명백히 하였다. 시기적으로 좀 뒤이지만 영조 39년(1763)에 통신정사 조엄은 대마도의 태도 변화에 대해 ‘근자에 와서는 접대하고 수응하는 예절이 점차 전과 같지 않다’고 지적하였다. (《海?日記》)
50) 〈答安百順 別池 丁丑〉, 《성호선생문집》 권 26 - 이익은 대일유화론자로서 대마도정벌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고 경제적 지원을 통한 대일화평정책을 옹호 하였으며, 대마속국론을 부정하는 입장이었다. 이익과 안정복의 일본인식에 대해서는 하우봉,《조선 후기 실학자의 일본관 연구》, 일지사, 1989, 제2장 참조.
- 출처: 독도와 대마도. 한일관계사연구회 지음(지성의 샘)
한국인의 대마도(對馬島) 인식
。너희 섬(대마도)은 조선 지방이니, 마땅히 조선 일에 힘을 써야 한다."
― 에도 막부(江戶幕府) 장군의 측근이 대마도 고위관리에게 한 말.
1617 년 통신사 이경직(李景稷 : 1577∼1640)이 자신들(통신사 일행)을 수행하던 대마도의 고위관리에게 이 말을 듣고 적어 놓았다.
。대마도는 … 대대로 우리 조정의 은혜를 받아 조선의 동쪽 울타리를 이루고 있으니,
의리로 말하면 임금과 신하 사이요, 땅으로 말하자면 조선에 부속된 작은 섬이다.
― 1590 년, 임진왜란 직전에 통신사 부사로서 일본을 다녀온 김성일(金誠一 : 1538∼1593)이 조선에 돌아온 뒤 낸 보고서에서
。우리 대마도에게 조선 영토 안의 주, 군(州, 郡)의 예에 따라 주(州)의 명칭을 정하여주고
인신(印信 : 도장)을 주신다면 마땅히 신하의 도리를 지키어 시키는대로 하겠습니다.
― 1419 년 대마도 정벌 뒤에 대마도주가 보낸 서신에서.
。(전략) … 이곳은 일본 국왕의 명령이 미치지 않기 때문에 중간에서 망령되게 자존하면서 포악하오나, 이들 모두 도서(圖書)를 받고 우리 조정에 귀순하기를 바라고 있사오니, 바라옵건데 이 섬의 두목들에게 예전처럼 오고 가게 하고, 이따금 양식이나 주고 도서를 주어 뜻밖의 우환에 대비하게 하소서.
― 1444 년 대마도에 보내졌던 초무관 강권선(康勸善) 이 세종에게 보고한 글.
-------------------------------------------------------------------------------------
11세기 후반(1000년경)부터 13세기 후반(1200년경)까지 200여 해 동안
대마도의 고려에 대한 진봉(進封)관계가 연구로 밝혀지고 있다.
-------------------------------------------------------------------------------------
。『산가요약기(山家要略記)』(12세기 말 일본 천태종의 승려가 쓴 책)에 말하기를
"대마도는 고려국의 행정치소인 목(牧)이다. 옛날에는 신라 사람들이 살았는데, 개화천황(開化天皇)대에 이 섬(대마도)으로부터 (일본본주로) 습래(襲來)해 왔다. 중애천황(仲哀天皇; 신공황후가 섭정) 이 풍포궁(豊浦宮)에서 나와 대마도 악포(鰐浦)에서 新羅(당시 대마도에 있던 佐護加羅 중심의 新羅임)를 정벌함으로써 마침내 이 섬을 얻었다."고 하였다.
― 1723년 對馬島人 등정방(藤定房)이 쓴 대마도의 역사서인『대주편년략(對州編年略)』에서
。무릇 대마도는 옛날에는 신라국(新羅國)과 같은 곳이었다.
사람의 모습도 그곳에서 나는 토산물도 있는 것은 모두 신라와 다름이 없다.
― 13세기 말의 일본 책인『진대(塵袋)』 제 2권에서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고려는 선종 2년(1085) 이래 대마도주를 '대마도구당관(對馬島勾當官)'으로 불렀다고 하는데 이 점이 시사하는 바는 상당히 흥미롭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는 제주도의 성주(星主)를 '탐라구당사'(耽羅勾當使)로, 일기도(壹岐島 : 대마도와 구슈 섬 사이에 있는 이키 섬) 도주(島主)를 일기도구당관(壹岐島勾當官)이라고 명명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구당관은 고려시대 변방 지역 내지 수상(水上)교통의 요충지를 관장하는 행정 책임자들에게 붙인 관직명이다.
이를 보면 탐라, 대마도, 일기도의 지배자에게 고려가 구당사 혹은 구당관이란 명칭을 붙인 의미를 알 수 있다. 즉 앞의 세 섬을 고려의 속령(屬領: 영토로 속한 땅)으로 인식하였거나 아니면 고려 정부가 대마도와 제주도를 고려 고유의 지배 질서 속에서 같은 차원으로 취급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마도는 섬으로서 본래 우리 나라의 땅이다. 다만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을 가지고 경인년부터 뛰어놀기 시작하였다.
― 태상왕(太上王)이었던 태종이 세종 때 대마도 정벌을 하기 전에 군사들에게 내린 교유문(敎諭文)에서
。대마(對馬島)는 섬으로서 경상도의 계림(鷄林)에 예속되었던 바 본시 우리 나라 땅이라는 것이 문적(文籍 : 서적, 기록)에 실려 있어 확실하게 상고할 수 있다.
다만 그 땅이 매우 작고 또 바다 가운데 있어서 왕래함이 막혀 백성들이 살지 않았을 뿐이다. 이에 왜놈으로서 그 나라에서 쫓겨나 갈 곳 없는 자들이 몰려와 모여 살며 소굴을 이루었던 것이다.
― 대마도를 정벌한 뒤 대마도주에게 보낸 편지에서
。대마도는 본래 조선의 목마지(牧馬地 : 말 기르는 땅)이므로 대내전(大內殿)이 조선과 더불어 협공하여 대마도를 귀국(貴國=朝鮮)에 돌리고자 하다가 불행히도 세상을 떠났는데 지금의 영주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 대마도 정벌 이후 일기도(壹岐島 : 대마도와 구슈 섬 사이에 있는 이키 섬)로 파견된 조선 관리인 강권선(康勸善)에게 일기도(壹岐島) 영주 대내전(大內殿)의 관반(館伴)인 노라가도로(老羅加都老)가 한 말.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조선 침략에 대비하여 무장에게 명령해서 만든 지도인『팔도전도(八道全圖)』에는, 독도(獨島) 뿐 아니라 대마도(對馬島)도 조선의 땅으로 나와 있으며, '공격 대상'이라고 적혀 있다.
일본도 대마도를 일본 땅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 출처 : 전북대교수 하우봉의 논문『한국인의 대마도인식』에서
'알아가며(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국접양지도> - '대마도는 조선땅'이라 인정한 日 고지도 (0) | 2011.05.12 |
---|---|
이승만의 대마도 반환 요구 (제3회 이승만포럼) (0) | 2011.05.12 |
<일본표해록> - 대마도는 조선땅 (0) | 2011.05.12 |
17-19세기 동아시아 상황과 연행, 연행록 (0) | 2011.05.09 |
다산(茶山), 역사를 논하다 (0) | 2011.05.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