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고려말 유학자들의 초상화

Gijuzzang Dream 2011. 5. 9. 18:35

 

 

 

 

 고려말 유학자들의 초상화

 

 

초상화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회화 예술의 매우 이른 시기에 출현한,

또한 역사적으로도 보는 이의 이목을 가장 집중시켜 온 분야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우리 옛그림에 있어서도 특히 빼어난 성취를 이루었던 화목이다.

 

우리나라의 초상화는 삼국시대 이전에는 아직 그 기록과 작품을 찾아볼 수 없고,

그 회화적 진면목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조선시대 초상화에 이르러서야 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도 문헌을 통하여 초상화의 제작과 기능, 감상 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고,

그 내용으로 미루어보다 여러 유형의 초상화들이 다양한 맥락에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어진이나 공신상과 같은 공리적 목적의 초상화는 물론이고

일반인의 초상화 역시 제례와 기념을 위해 많이 그려졌던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 전하는 작품은 몇 점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며

초상화의 주인공이 고려시대의 인물이라 할지라도

그 작품 자체는 훨씬 후인 조선시대에 이모된 예가 많다.

이러한 고려시대 또는 고려시대 인물의 초상화가 많지는 않지만,

그 대부분이 고려 말의 유학자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아쉬운 중에서도 우리의 관심을 끄는 측면이 있다.

 

경북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전해진 <안향초상(국보 111호)>은

충숙왕 5년 왕명에 의해 초상화를 그릴 때 추가로 그려 안향의 고향인 흥주 향교에 봉안했던 작품이다.

주지하듯 안향은 고려에 주자성리학을 들여오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했고,

주자의 초상화를 비롯하여 관련 서적과 자료를 구해 보급한 인물이다.

호 회헌(晦軒)은 주자의 호 회암(晦庵)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의 주자에 대한 흠모를 잘 알려준다.

안향은 또한 나라의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도 힘썼다.

문하에서는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그 체계를 세운 백이정(白頤正, 1247-1323)이 배출되었고,

그 뒤를 이어 이제현, 이색, 조선초기의 권근과 변계량, 김종직 등에게 이어지는 학통이 형성되었다.

안향의 초상화는 소수서원본 이외에도

합호서원(合湖書院) 순흥안씨 종중에 소장된 본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이 전한다.

국립중앙박물관본은 소수서원본과 같은 내용의 안우기(安于器, 1265-1329)가 지은 찬시가 해서로 써 있다. 세 본 모두 우안(右顔)의 반신상으로 인물의 모습, 자세 등이 같아서

하나의 본에서 파생되어 온 것으로 생각된다.

 

- <안향초상>, 조선후기, 비단에 색, 88.8×53.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경북 풍기군 소수서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국보 111호, 고려시대 문신 안향의 초상화는

홍색 직령포를 착용하고 평정건을 쓴 안향의 모습을 담고있다.

안향이 죽은 뒤인 1318년(충숙왕 5)에 충숙왕은 원나라 화가에게 그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는데,

현재 전해지고 있는 그의 화상은 이것을 모사한 것을 조선 명종 때 다시 고쳐 그린 것이다.

안향은 주자학 도입과 보급에 공이 큰 인물로 원종 때 직한림원으로서 내시를 겸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고려시대의 내시는 남성이 제거된 환관과는 구분되어,

귀족 자제로서 용모가 단정하거나 유학적 지식을 갖추었기 때문에 선발된 인재에 속한다.

우리나라 사립대학의 창시자인 최충의 손자 최사추, 고려 중기 최고의 지식인인 김부식의 아들 김동중,

최초 주자학을 도입한 안향 등 모두 이러한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내시로 선발되었던 것이다.

내시는 여러 시종들과 함께 왕의 행차에 동행한 것은 물론 왕명의 초안을 작성하거나 국가 기무를 관장하고 때로는 유교경전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 내시가 언제 어떠한 직급으로 설치되었는지에 관한 명확한 기록은 없다.

단, 918년(태조 1) 오늘날 부총리급에 해당하는 광평시랑 직예를 내시서기로 삼았다는 기록에서

당시 내시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내시의 선발기준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기준은 문종 때에야 확인할 수 있는데,

문종은 재능과 공로가 있는 사람들 가운데 용모가 수려한 사람 20명 정도를 내시로 뽑아

자신을 시종하게 하였으며 그 수고의 대가로 별사미(別賜米)를 주었다.

이러한 원칙은 그 후 인종때까지 준수되다가 의종 때에 이르러

귀족 자제로 구성된 좌번내시와 유신(儒臣)으로 구성된 우번내시의 이원적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초상화 내에서 착용하고 있는 옷은 몽고의 영향을 받은 남자 평상복에 해당한다.

홍색의 포 형태에 깃은 원나라 복식과 같이 깃중심선이 한 줄 더 있고,

여밈은 겨드랑이 밑까지 깊게 겹쳐져 있다. 보이지는 않으나 깃 끝에 매듭 단추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며

띠도 홍색으로 띠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포의 양 옆에 트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말의 대학자로 충선왕을 따라 연경에 거하면서 만권당에서 원나라 학자들과 교유했던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초상화이다.

화면의 자찬에 의해 원나라 화가 진감여(陳鑑如)가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이제현의 문집 <익재집(益齋集)>에 수록된 찬문에는

화가가 오수산(吳壽山)이며 진감여가 그렸다는 것은 틀린 것이라는 주가 붙어 있어

약간의 혼동 및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제현의 초상화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이외에

이한철의 이모본으로 전하는 수락영당본 등 여러 점이 전하며, 이와 거의 같은 목판본도 존재한다.

 

 

 

- <이제현 초상>, 진감여, 중국 원(元) 1319년, 비단에 색, 177.3×93.0㎝,

국보 제110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귀곡사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 성리학의 기초 확립자, 이제현(李齊賢,1287-1367) 영정은

주자학과 함께 원에서 들어온 유학자들의 법복, 즉 심의 착용 모습을 보여준다.

인물이 착용하고 있는 심의의 모습은 흰색의 깃 위에 검은색의 연(緣)을 둘러 깃이 조금 노출되었고

상(裳) 오른쪽에는 여밈 자락이 보인다.

대를 묶은 허리 부분은 소매에 가리어져 보이지 않지만

매듭을 묶은 양 귀와 늘어뜨린 신(紳)에는 검은색 연(緣)이 둘러져 있고 세조(세조)는 보이지 않는다.

 

 

한편 이제현의 후손으로 조선시대 말기의 관료로 서화에도 큰 관심을 가졌던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은

화사 이한철로 하여금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였다.

이 초상화에 적힌 그의 일가 동생 이유승(李裕承, 1835-?)의 화상기에 의하면

이유원은 선조인 이제현의 행적을 흠모하여 초상화를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유원 초상>은 <이제현 초상>의 형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지는 않으나,

진감여가 그린 이제현의 초상화에 대해 가전되어 오던 ‘화상기’의 내용이 상당히 반영되었다고 한다.

(박은순, 「19세기 문인영정의 도상과 형식-이한철의 <이유원상>을 중심으로」,

『강좌미술사』24, 불교미술사학회, 2004).

이는 존숭하는 인물의 초상화가 자신의 초상화 제작에 영감을 주고

이로 인하여 그에 대한 존숭과 기념이 확장되는 새로운 경로를 알려주는 흥미로운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제현의 문인으로 대학자였던 이색(李穡, 1328-1396)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색 초상>은

현재 전국적으로 여러 본이 산재해 있는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을 제외한 일련의 서원, 영당 소장본이 일괄하여 보물 121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각각은 누산영당(樓山影堂)본(1654), 목은영당(牧隱影堂)본(1711), 영모영당(永慕影堂)본(1755),

대전영당 본(1844)의 전신상 4점, 목은영당 본 반신상 1점이다.

이 초상들은 필치와 채색의 정교함에 있어 그 격이 약간씩 다르지만

구도, 인물의 모습과 자세, 기물의 형태 등은 일관되고 있어

기본적인 틀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몽주(鄭夢周, 1337-1392)는 고려 말의 문신이자 학자로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킨 삼은(三隱) 가운데 한 분이다.

대학자 이색이 그를 일러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고 높이 평가한 만큼 일가를 이룬 성리학자였다.

<정몽주 초상> 역시 전국 곳곳의 서원, 영당에 여러 본이 전해져오고 있고,

국립중앙박물관에는 1880년 화원 이한철(李漢喆, 1808-1880 이후)이 개성 숭양서원에 봉안된 초상을

중모한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숭양서원 본은 한종유(韓宗愈, 1737-?)가 1768년(영조 44) 이모한 적이

있는데 이 작품을 이한철이 다시 그린 것일 가능성이 있다.

 

『포은집(圃隱集)』권2「화상항목(畵像項目)」에는 1390년(공양왕 2) 공양왕을 추대한 공으로

정몽주가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록되었을 때 공신도상을 그렸다는 내용이 전한다.

현재 전하는 여러 본의 초상화는 아마도 이 상을 이모한 도상으로 역시 그 상용형식이 대부분 같으며,

고려말의 전형적인 공신도상 형식을 추정해 볼 수 있는 자료가 된다.

또한 『포은집』에는 수록된 포은영정의 판각본 또한 그 형식이 같아서

존숭의 대상이 되는 인물의 도상이 유지되고 후대에 전승되는 양상을 살펴보는 데

흥미로운 자료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정몽주 초상>, 이한철, 조선 1880년, 종이에 색, 61.5×35.0㎝,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려 공신 정몽주(鄭夢周)의 초상화에서 사모(紗帽)를 쓰고 단령(團領)를 입은

고려 관료의 상복(常服) 착용 사례를 볼 수 있다. 흑색 사모의 2단 모부가 둥글게 표현되어 있고,

후각 역시 그 외곽이 모나지 않고 둥근 모양이다.

사모의 후각에 보여지는 반투명 재질감과 문양까지도 정밀하게 표현된 것이 특징적이다.

인물은 넉넉한 품의 단령포를 착용하고 있는데,

단령이라는 명칭은 깃이 곧은 직령에 비하여 포의 옷깃이 둥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포의 소매가 넓고 길이는 발뒤꿈치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며

허리 선 위로 둘러진 대는 화려한 금빛 장식이 고위 관료로서의 품위를 돋보이게 한다.

 

 

목은 이색(牧隱 李穡),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와 함께 ‘삼은(三隱)’으로 일컬어지는

야은 길재(冶隱 吉再, 1353-1419)의 초상화는 『야은집(冶隱集)』에 수록된 유상이 있다.

일종의 판화 형식을 보여주는 이 초상은 오건(烏巾)을 쓰고 심의(深衣)를 입은 공수자세의 우안좌상이다.

야복 차림은 이방원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키며

후학양성에만 힘을 쏟은 그의 생애를 보여주는 듯하다.  

<길재 초상>도 여러 곳의 사우(祠宇)에 봉안됐었으나

현재는 금산 청풍사(淸風祠) 소장본이 원본의 형용을 전하고 있을 뿐이다.

청풍사본은 문집에 수록된 유상과 같은 야복 차림에 공수자세의 좌상이다.

출처 : 충남 청풍사소장[길재]

- <길재 초상>, 금산 청풍사 소장

고려 말 조선 초의 생활상 부분을 보여주는 길재(吉再) 초상은 일반 사대부상으로서,

대개는 의례적 기념용으로 쓰는데 조선시대에 와서 이묘된 것으로 알려졌다.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공수(拱手) 자세로 앉아있는 길재의 초상 속에 표현된 복장은

머리에 높이 솟은 관모를 착용하고 있으며, 폭이 넓은 포를 오른쪽으로 여미어 착용하고 있다.

색은 정확히 표현되어 있지 않으나, 포의 길색은 소색에 가까울 것으로 추정되며,

깃둘레가 짙은 색으로 선이 둘러져 있으며, 동정이 달려 있다.

허리 부분에 짙은 색의 대를 둘러 고정하였다.

길재의 초상에서 짙은 흑색으로 추정되며, 정수리 위로 높게 솟아올라 있는 고려시대 관모를 볼 수 있다.

 

 

 

 

 

 

- <이색 초상>

충남 예산군 누산영당에서 소장하고 있는 이색(李穡)의 영정에는 관료로서 집무할 때 착용했던

상복(常服), 즉 사모와 단령을 갖추고 허리에 대를 매며 화를 신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두 손을 마주잡은 공수(拱手) 자세로 앉아있는데

착용한 단령은 품이 넉넉하며 인체의 선이 둥글고 완만하게 표현되어 관료로서의 위엄이 보인다.

상복의 기본인 사모와 단령 착용은 고려 우왕 13년(1387) 사신으로 갔던 설장수가

명나라 왕이 하사한 사모와 단령을 입고 돌아오자 정몽주의 건의에 의해 시행된 것이다.

1품에서 9품까지 사모, 단령을 착용하였고 대로 품계의 상하를 구별하였으며,

우왕대의 개정 관복제도는 조선시대 과녹 중 상복이 된 사모, 단령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고려말 유학자들의 초상화가 다른 고려시대 인물의 초상화와 달리

여러 사원, 영당에서의 봉안 및 이모본 제작을 통해 그 형용이 유지되고 전승되었던 이유는

물론 조선이 새로운 왕조로 개창되면서 고려 왕실이 숭앙했던 불교를 배척하고

유학을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적인 원리로 채택한 점에 있다고 할 것이다.

안향, 백이정, 이제현, 이색 등에 의해 체계를 잡은 성리학이 조선시대에 사상의 주류로 자리잡으면서

이들에 대한 경모와 존숭, 학맥의 가시화라는 측면에서

초상화가 매우 유용하게 작용하였으리라는 점은 확실하다.

 

고려 말에 제작되었던 성리학자 안향의 초상이 조선시대에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의 주도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이후 소수서원으로 사액)에 봉안되는 과정은 시사하는 바 크다 하겠다.

또한 이들 초상화의 형식이나 조형에서는 상감청자라든지 나전칠기나 금속세공품 등에서 추출되는

고려시대의 화려한 미감보다는 검약한 복식과 도학자적인 엄정함을 보여주는 듯한 선미(線美)가 돋보여

초상화 주인공의 성정과 학문을 더욱 잘 드러내 준다.

- 장진아, 역사관 고려3실

- 제198회 큐레이터와의 대화, 2010년 6월23일, 국립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