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 보물 제652-6호
조선 숙종 때의 국학자이자 실학의 선구자였던 병와 이형상(甁窩 李衡祥, 1653-1733)이 남긴 원고본으로, 그의 저서와 함께 그와 관련된 편지글, 임금이 내린 교지 등의 고문서와 인각(印刻), 기타 유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탐라순력도>는 이형상이 제주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로 부임했을 때 제주도를 동-남-서-북으로 한달간에 걸쳐 순력(巡歷, 감사가 도내의 각 고을을 순회하는 일)하고 돌아온 후 여러 가지 상황들을 28폭으로 그린 그림 포함 총 41圖에 서문 2面으로 된 도첩(圖帖)이다.
이 그림들은 화공(畵工) 김남길(金南吉)이, 설명은 이형상이 삽입하여 함께 제작하였다.
'순력(巡歷)'은 본래 관찰사가 도내의 각 고을을 순회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제주의 경우 전라도관찰사가 매년 2차례 제주에 내려와 삼읍을 순력하는 일은 불가능하였다.
전라도관찰사는 자신의 임무 중 일부를 제주목사에게 위임하였는데 순력의 이무 역시 그 중의 하나였다.
제주목사 이형상은 순력을 1702년 가을 음력 10월29일 출발하여 11월19일까지 21일 동안 실시하였다.
<탐라순력도>는 순력의 내용을 담은 각 행사장면 28圖, 평상시의 행사모습을 담은 11圖,
제주도와 주변도서의 지도인 ‘한라장촉’ 1圖, ‘호연금서’ 1圖 등 총 41圖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이형상의 화기(畵記) 2면(面)을 넣어 43面으로 구성된 화첩을
오노필(吳老筆)에게 청하여 비단으로 장황하여 <탐라순력도>라 명명하였다.
** 가로 35×세로 55㎝ 크기의 장지(壯紙)에 가로 29.5×30.5㎝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상단에는 가로 29.5×세로 3.7㎝ 칸 안에 네 글자로 제목을 달았다.
그림의 하단에는 가로 29.5×세로 12.8㎝ 크기에 좌우 이등분하여
우측 칸에 그림과 관련된 내용을 기록하였다.
완성 시기는 서문의 말미에서 알 수 있듯이 1703년 5월13일로 생각된다.
이형상 제주목사가 1703년 3월에 파직 당하였으나 5월초까지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탐라순력도> ‘비양방록’ 행사그림 아래 기록된 ‘1702년 10월 11일 생포한 사슴들을 다음 해 4월 28일에 비양도로 옮겨 풀어놓았다’는 내용으로 미루어, 그림들은 1703년 5월 초순경의 10여 일 동안에 걸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목사의 제서(題序) 일자가 1703년 음력 5월 13일로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순력행사가 있었던 다음 해(1703년)에 화첩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순력도’라는 이름의 기록화로서는 현존하는 거의 유일한 자료일 뿐 아니라
당시 해외로 인식될 정도로 서울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제주도지방에서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각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순력기간:1702년(숙종 28) 10월29일~11월19일
순력지역 : 제주목을 출발해 화북소 - 조천관 - 별방성 - 수산소 - 정의현 - 서귀진 - 대정현 - 모슬포 - 차귀소 - 명월진 - 애월진 등의 요새지와 그 주변의 명승명소를 동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일주하면서 시행했던 것으로, 제주목 성으로 돌아와 4차례의 행사를 더 치른 뒤 끝을 맺었다.
순력기간 행사기록도 :
제주도 순력 장면 22장면(제주목을 출발 - 화북, 조천, 별방, 수산, 정의, 서귀, 대정, 모슬, 차귀, 명월, 애월을 돌아 귀환)한 후 4차례의 행사장면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제주, 정의, 대정 등지의 양로연(노인잔치) 광경을 그린 3장면, 명승지를 그린 5장면, 감귤 봉진과 과거 등을 그린 9장면이 추가되어 있다.
그중 28장면은 순력의 목적이 방어시설에 대한 군기점검의 비중이 높았던 점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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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 |
그림 (面) |
탐라순력도 부분 |
군사훈련 |
조점(操點) |
8 |
제주조점, 조천조점, 별방조점, 정의조점 서귀조점, 대정조점, 명월조점, 애월조점 |
성조(城操) |
2 |
화북성조, 수산성조 | |
점부(點簿) |
2 |
모슬점부, 차귀점부 | |
시사(試射) |
2 |
별방시사, 명월시사 | |
강사(講射) |
2 |
정의강사, 대정강사 | |
사회(射會) |
1 |
제주사회 | |
하례의식 |
배전(拜箋) |
1 |
대정배전 |
활쏘기경연 |
사후(射侯) |
2 |
천연사후, 현폭사후 |
사냥 및 방사 |
대렵(大獵) |
1 |
교래대렵 |
방록(放鹿) |
1 |
비양방록 | |
시험 및 심사 |
시사(試射) |
1 |
승보시사 |
전최(殿最) |
1 |
제주전최 | |
점마(點馬) |
2 |
우도점마, 산장구마 | |
연향 |
양로(養老) |
3 |
제주양로, 정의양로, 대정양로 |
봉진 |
말(馬) |
1 |
공마봉진 |
감귤(柑橘) |
1 |
감귤봉진 | |
탐승 |
과원(果園) |
2 |
귤림풍악, 고원방고 |
해돋이(日出) |
1 |
성산관일 | |
굴(窟) |
2 |
산방배작, 김녕관굴 | |
폭포(瀑布) |
1 |
정방탐승 | |
뱃놀이(船遊) |
1 |
병담범주 | |
종교 |
미신타파 (神堂, 寺刹 등) |
1 |
건포배은 |
** 조점(操點)과 성조(城操)는 3읍성(제주성, 정의현, 대정현)과 9개 진성(鎭城=화북진, 조천진, 별방진, 수산진, 서귀진, 모슬진, 차귀진, 명월진, 애월진)의 군기와 군사훈련을 점검하는 장면
** 양로(養老)는 지방관이 마련한 경로잔치로 유교가 국시였던 조선시대의 순력에는 관례화된 행사였다.
** 시사(試射), 강사(講射)는 제주 군사들의 활쏘기대회와 활쏘기 시험장면
** 전최(殿最)는 제주 관리들의 근무 성적을 평가하고 있는 그림
** 화첩에는 당시 인구와 경작지 면적, 진상 감귤류, 방어시설, 지리정보, 생활상 등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제주 3읍은 민가 호수가 9,552호에 인구는 43,515명이었고 밭은 3,640結이었다. 당시 마을을 일컫는 里 단위는 제주목 95개里, 정의현 22개里, 대정현 12개里 등 모두 129개里가 있었다. 목장은 64개, 소(所)로 말 9,372필과 소 703두가 있었다.
국립과수원에 해당하는 과원(果園)은 42개소, 귤나무 7,300여 그루가 심어 있었다. 방어시설은 3城, 9鎭, 봉수 25곳, 연대(煙臺) 38곳 등이 있었다. 또 3고을 읍성(邑城)의 모습과 관아(官衙) 배치 상황, 각 진(鎭)의 위치와 구조, 봉수의 연대의 위치 등이 기록되어 있어 제주의 관아시설과 진성(鎭城)을 정비하는데 매우 유용한 사료로 ‘제주목 관아를 정비할 때도 기본사료로 활용되었다.
이형상 목사 일행은 조천성에 들어가 군사훈련과 말을 점검하고(조천조점), 김녕의 용암굴을 둘러본 뒤(김녕관굴), 정방폭포도 구경하고(정방탐승), 서귀진의 군사를 점검(서귀조점)한 뒤엔 천제연폭포에서 활쏘기대회(현폭사후 · 명월시사)도 연다. 또 귤나무 숲에 들어 풍악을 곁들인 잔치를 열고(고원방고), 산방산 산방굴 앞에서 잔을 기울이기도 한다(산방배작). 그림에서 이형상 목사는 붉은 모자를 쓴 이로 표시돼 금세 알아볼 수 있다. 이 목사는 순행을 마치고 제주목으로 돌아와서는 각 고을 어르신들을 초청해 양로잔치를 베푼다(제주양로). 제주양로 장면의 아래쪽에 적힌 기록엔, 100살 이상이 3명, 90살 이상이 23명, 80살 이상이 183명 참석했다고 적혀 있다.
**제일 마지막인 ‘호연금서’를 제외하고 화면을 붉은 선으로 3등분하고 제일 윗부분에는 해서체로 4자씩의 제목을, 중간에는 김남길의 그림, 밑부분에는 행사참가 인원을 기록하였다.
** 회화사적인 측면에서 <탐라순력도>의 독특한 가치는
①의궤(儀軌) 반차도(班次圖)식의 기록화로 분류된다.
우리나라 회화사상 많은 기록화 가운데에서 탐라순력도만큼 생생하고 자세하고 정밀한 기록화는 보기 드물 정도이다. 저자, 화공, 제작동기, 연대 또한 확실하다. 기록화로서 충실성을 높이 평가할만한 작품이다.
그림으로 설명이 부족한 부분은 글로써 표현하고 글로서 부족한 부분은 그림으로 표현하여 18세기 초 제주의 실상과 문물을 명쾌하게 기록해냈다. 그리고 탐라순력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실경을 정확하게 사생하고자 하는 화가의 노력이 절실함을 읽을 수 있다.
②기록화로서 민족지(民族誌)의 성격을 갖는다.
조선 숙종 때 제주의 지리, 풍속, 성곽, 군사병력, 조점제도, 공물세제, 지방관 행차, 경제생산, 비축미곡, 건축배치, 연례행사, 군기집물, 목장규모, 병적현황, 풍류연악, 감귤생산 등의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 지역의 민족지를 글과 그림으로 체계 있게 정리한 기록은 없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더욱 높게 평가할 수 있다. <탐라순력도>가 민족지적인 기록이 풍부하기 때문에 오늘날 다양한 분야에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③도첩의 배접지로 사용한 당시 제주목의 병적부에는 병정들의 자세한 기록들이 나와 있어서 조선후기 지방군사제도 연구에 기여한 바가 클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④조선시대 마정(馬政)에 대한 정확한 내용과 기록 또한 그 방면 연구에 영향을 주고 있으며, 감귤도 마찬가지다. 당시의 제주도 건물과 고적이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그 복원과 재현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탐라순력도>는
이형상의 종손으로 경북 영천에 거주하는 이수창(李秀昌)이 소장해오다가
1998년 12월에 제주시청에서 3억원에 매입, 소장하였고, 현재 보물 제 65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형상의 <남환박물>과 함께 제주의 조선시대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현재 탐라순력도 원본은 제주시 돌문화공원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으며,
국립제주박물관에서는 영인본을 제작해 대체 전시하고 있다.
병와 이형상(甁窩 李衡祥, 1653-1733)
효령대군보의 10대손인 왕족의 후예로 약관에 대과급제하여 등용문이 열려 있었지만 그의 관직은 12년뿐이고 대부분 생애를 독서와 연구로 보내며 60여 종, 2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그는 역(易), 경서(經書)를 비롯해 시, 서, 의례, 가례 등 각 분야에 통달했을 뿐만 아니라 <악학편고(樂學便考)>, <악학십령(樂學拾零)> 등을 내놓은 음악의 대가이기도 했다.
이형상은 그의 나이 50살인 1702년(숙종 28) 3월 제주목사로 부임했다. 당시 제주목사의 임기는 2년 반이었으나 이형상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이듬해 6월 제주를 떠나게 된다. 그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떠나게 된 것은 유배인들을 두둔했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떠날 때 그의 행장 속에는 제주산 박달나무로 손수 만든 거문고 하나와 책 몇 권이 들어있었을 뿐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그는 제주에서 전설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당 오백, 절 오백을 부순 영천 이목사, 마을사람들을 괴롭히던 광정당의 이무기를 퇴치한 장수, 알몸으로 작업하던 잠수들에게 잠수복을 입게 한 사또 등으로 전해져 온 것이다.
한편, 병와 이형상의 초상화가 후손들에 의해 발견됐다. (1979년 11월7일 경향신문 기사 참조). 자신의 일생을 총정리한 저서목록을 수록한 <정안여분(靜安餘噴)> 가운데 실린 자신의 묘지명, 만사를 쓴 기록 틈에 끼어있는 ‘박상기(薄相記)’에서 “내나이 이제 80이다. 몸이 굽은 것은 아니지만 습체(濕滯)로 다리를 절기 때문에 10년전보다 작게 보인다. 키는 발밑에서 머리정수리까지 7척1치, 어깨넓이 1척6치, 허리둘레 2위(1위는 양손을 맞대어 벌린 길이), 얼굴길이 1척1치, 볼의 넓이 7치, 양쪽 귀 사이의 거리 1척3치이다...”는 수학적 묘사로부터 시작해 얼굴과 신체의 특징, 형상 등을 유머러스하고 정확한 어휘를 찾아 표현했다. 이형상은 영조 9년(1733) 81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는데 ‘박상기’는 작고하기 1년전에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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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순력도> 숙종 28년(1702),
제주목사 이형상, 36.4×56.8㎝, 총 43면 (그림 41圖/ 서체 2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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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라장촉(漢拏壯囑)
1702년(숙종 28) 4월15일 당시 제주도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과 주변도서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고 있는 고지도 |
▲ 한라장촉
화첩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지도 ‘한라장촉’은 독립된 제주도 지도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꼽힌다.
현대지도는 북쪽을 지도의 위쪽에 놓는데, 이 지도는 남쪽을 위로 놓았다.
조선시대의 지도는 궁궐이 있는 한양에서 바라보는 시점에서 제작된 경우가 많다.
탐라순력도의 ‘한라장촉’ 역시 마찬가지여서, 한양에서 바라보는 시각에서 그린 것이어서 제주목이 아래에, 서귀포 지역은 위로 가게 뒤집어진 모습이다
그리고 24방위를 배치하고 해당 방향에 주변 지역을 그려 넣어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하게 했다. 이는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라는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변에 그려진 외국 지명을 살펴보면 중국의 영파부(寧波府), 소주(蘇州), 항주(杭州), 양주(楊州), 산동성(山東省), 청주(菁州)를 비롯해 일본, 유구(琉球), 안남국(安南國), 섬라국(暹羅國), 만자가(滿刺加) 등이 표시되어 있다. 이러한 외국에 대한 인식은 중국을 통해 입수한 지식과 제주로 표류했던 외국인을 통해 전해들은 것으로, 당시 서양과 달리 먼 거리를 항해하는 게 제한되어 있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제주도 부분은 제주도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과 당시의 현실을 잘 나타내고 있다.
삼읍(三邑: 제주목 · 대정현 · 정의현)
관아의 위치와 해안을 둘러가면서 설치되어 있는 방호소(防護所) 안 9개 진(九鎭: 화북진, 조천진, 별방진, 수산진, 서귀진, 모슬진, 차귀진, 명월진, 애월진)의 위치는 붉은 색으로 강조했다. 또한 세 고을의 경계도 붉은 색 선으로 그려 넣었다. 이 그림에서는 당시 제주목과 대정현은 판포, 제주목과 정의현은 용항포, 대정현과 정의현의 경우는 법환포와 색수의 중간지점이 그 경계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그 밖에 산악, 도로, 마을이름, 하천뿐만 아니라, 80여 개의 포구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당시 포구의 분포를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지도에서 특징적인 점은 중산간 지대에 설치되어 있었던 목마장이다.
목마장의 경계이기도 했던 돌담을 점선으로 그려 넣었으며 각 소장의 이름도 적어 넣었다. 전통시대에 제작되는 많은 지도들은 이전 시기 지도들을 베껴내는 경우가 많은데, 한라장촉은 당시 실정과 정보들을 담아 새로운 모습으로 재창조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지도 아래에는 지도의 제작시기와 당시 지방관의 이름, 각 방위를 따라 도달하는 지역까지의 거리가 기재되어 있다.
먼저 제주도와 관련해서 3읍의 경계가 시대에 따라 다소의 변동은 있었으나, 이 그림상으로는 제주목과 대정현의 판포(板浦), 제주목과 정의현은 용항포(龍項浦). 대정현과 정의현의 경우는 법한포(法閑浦)와 색수(塞水)의 중간 지점이 그 경계가 되고 있다. 삼읍관아(三邑官衙;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의 위치와 9개 진(鎭)의 위치 즉, 화북진. 조천진. 별방진. 수산진. 서귀진. 모슬진. 차귀진. 명월진. 애월진의 소재지를 적색으로 표시하여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하였다. 그외에 목장. 산악. 도로. 마을명. 하천뿐만 아니라, 80여 개의 포구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당시 포구의 분포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그림에서 중요시하고 있는 것은 제주도가 섬이라는 지정학적 조건에 따른 주변 도서와의 관련 내용이다. 즉, 제주도를 중심으로 주변도서를 24방위로 표시하여 그 대략적인 위치를 이 한 장의 그림으로 가늠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 육지 지역과의 유일한 교통수단이 선박임을 감안할 때, 이는 선박의 조난 혹은 이국선(異國船)의 표도시(漂到時)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그림 하단부에 기록해 놓은 내용을 보면,
지방관 제주판관(濟州判官) 이태현(李泰顯)과 호위병격의 군관호군(軍官護軍) 이우해(李迂楷) 등 11원(員), 심약(審藥: 약제를 심사 감독하는 관원) 윤기은(尹起殷)이라 기재하였다.
그리고 제주도의 전체 둘레 480리, 대로(大路)의 둘레 378리, 동서길이 170리, 남북길이 73리로 나타냈다.
방향 |
지명 |
거리 |
방향 |
지명 |
거리 |
- |
해남 |
970리 |
동쪽 |
일본국 |
2,000여 리 |
병시(丙時: 11시) |
여인국 (女人國) |
8,000여 리 |
오시(午時: 12시) |
유구국(琉球國) |
5,000여 리 |
정시(丁時: 13시) |
안남국 (安南國) |
17,000여 리 |
미시(未時: 14시) |
섬라국(暹羅國) 점성(占星) |
10,000여 리 |
곤시(坤時: 15시) |
영파부 (寧波府) |
8,000여 리 |
신시(申時: 16시) |
소주(蘇州)와 항주(杭州) |
7,000여 리 |
경시(庚時: 17시) |
양주(楊州) |
7,000여 리 |
신시(辛時: 19시) |
산동성(山東省) |
10,000여 리 |
술시(戌時: 20시) |
청주(菁州) |
10,000여 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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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지 지역과의 주요 관문 중의 하나인 해남까지 970리, 동쪽 일본국까지 2,000여 리, 병(丙: 11시)의 방향 여인국(女人國)까지 8,000여 리, 오(午: 12시)의 방향 유구국(琉球國)까지 5,000여 리, 정(丁: 13시)의 방향 안남국(安南國)까지 17,000여 리, 미(未: 14시)의 방향 섬라국(暹羅國) 점성(占城)까지 10,000 여 리, 곤(坤: 15시)의 방향 영파부(寧波府)까지 8,000리, 신(申: 16시)의 방향 소주(蘇抗州)와 항주(杭州)까지 7,000리, 경(庚: 17시)의 방향 양주(楊州)까지 7,000리, 신(辛: 19시)의 방향 산동성(山東省)까지 10,000여 리, 술(戌: 20시)의 방향 청주(靑州)까지 10,000여 리로 기재해 놓아 그 원근을 알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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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승보시사(陞補試士) 1702년(숙종 28) 윤6월17일 이형상 제주목사가 시험관(試官), 제주판관(濟州判官) 이태현(李泰顯)이 부시관(副試官), 대정현감(大靜縣監) 최동제(崔東濟)를 참시관 (參試官)으로 시행한 승보시(陞補試) 시험장(장소: 관덕정)의 모습을 그림 |
▲승보시사
- 승보시(陞補試)는 본래 성균관 유생들에게 치루어진 소과(小科) 초시(初試)에 해당하는 시험인데, 외방(外方)에서는 개성. 제주. 수원에서 시행되었다. 제주의 경우는 1639년(인조17) 심연(沈演)목사가 조정에 건의해 실시하였는데, 고시관 3원(員: 9품 이상의 관료에게 붙이는 칭호)은 9품 이상의 관료에게 붙이는 칭호)이 매년 2명을 뽑아서 소과 복시(覆試)의 응시자격을 주었다. 후일 고시관. 시취생(試取生)의 수는 여러 차례의 변화를 겪기도 한다. 1702년에는 윤6월17일부터 연3일간 시취(試取)하여 응시인 12명 중에서 최종적으로 시(詩), 부(賦) 각 1인씩 2명을 시취하였음을 알 수 있다.
관덕정 중앙 상좌에 시험관인 목사가 홍삼(紅衫) 차림에 사모(紗帽)를 쓰고 엄숙한 분위기로 앉아 있다.
그 약간 전면의 좌우에는 부시관(副試官)과 참시관(參試官)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고개 숙여 앉아 있고, 시험관 오른쪽 뒷면에는 사동(使童)이 엎드려있다. 시험관을 중앙에 두고 관덕정 좌우에는 6방 관속들이 부동자세로 서있는데, 모두가 칼을 차고 있는 모습이다. 그 중에는 통인(通引)이 좌우에 각각 1명씩 서있다.
계단 아래쪽 왼쪽에는 의관을 차려입은 유생 3명이 꿇어앉아 있고 오른쪽에는 주안상이 마련되어 있는데 그 옆에는 한 선비가 서있다. 관덕정 앞뜰에는 큰 차일(遮日)을 쳐놓았으며 정면 좌우에는 시제(試題)가 4개의 대막대기 끝에 저마다 걸려있다. 그 앞에 깔아놓은 초석에는 붉은 옷을 입은 12명의 응시자가 한 줄로 나란히 앉아 과거에 응시하고 있다. 응시자 좌우편에는 각각 녹기(綠旗)를 든 기수 4명과 집장사령(執杖使令) 4명이 배치되어 있다. 좌측 뒷면에는 고수(鼓手)가 대령해 있고 관덕정 좌측 전면의 높은 게양대에는 사자기(獅子伎)가 걸려 있다.
관덕정 앞 왼쪽에는 포정루(布政樓)가 있는데, 2층 다락에 종과 북을 매달아 놓고 있다. 또 그 옆에는 군기청, 진무청, 기생청, 군기고, 병고, 북과원 등이 그려져 있고 전면 좌우에는 긴 집채인 회랑(回廊)이 그려져 있다.
또한 중앙 전면에는 물림폭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이 물림폭은 과녁 뒤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설치되는 휘장으로 사수(射手)가 150보 전방의 과녁을 향하여 활을 쏠 때 과녁을 조정하기 쉽게 만들어놓은 일종의 보조기구라고 할 수 있다.
그림 아래 설명에 의하면, 시험관은 정시관(正試官)인 이형상 목사와 부시관인 제주판관 이태현, 참시관인 대정현감 최동제 등의 문시관(文試官)으로 3員을 갖추었다.
응시자 12명, 거둔 답안지도 12매이므로 응시자 전원이 답안지를 제출했음을 알 수 있다. 합격자는 시(詩)와 부(賦)에 각 1명이며, 시험은 3일 동안 계속되었다.
(관덕정의 위치 표시)
** 관덕정(觀德亭)
조선 초기에 창건된 관덕정은 제주의 대표적인 정자이자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1448년(세종 30) 안무사 신숙청이 병사훈련과 무예수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창건했는데 <예기(禮記)>에 나오는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보는 것이다’는 내용을 인용해 정자 이름을 ‘관덕(觀德)’이라 했다.
조선시대 제주지방 통치의 중심지였던 제주목(濟州牧) 관아는 지금의 관덕정을 포함하는 주변 일대에 분포해 있었으며 이미 탐라국 시대부터 성주청(星主聽) 등 주요 관아시설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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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공마봉진(貢馬封進)
1702년 (숙종 28) 6월7일 실시 진상에 필요한 말을 각 목장에서 징발하여 관덕정에서 제주목사가 입회한 가운데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광경을 그린 그림 |
▲공마봉진
- 책임을 수행하기 위하여 대정현감 최동제(崔東濟)를 차사원 (差使員)으로 임명하였다.
당시 진상에 필요한 공마의 내역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즉 어승마 (御乘馬: 임금이 탈 말) 20필, 연례마(年例馬; 매년 정기적으로 공납하는 말) 8필, 차비마 (差備馬; 특별한 용도로 쓰기 위하여 마련하는 말) 80필, 탄일마(誕日馬; 임금의 생일을 축하하여 바치는 말) 20필, 동지마(冬至馬; 해마다 동짓달에 중국으로 사신을 보내면서 함께 바치는 말) 20필, 정조마(正朝馬; 정월 초하룻날을 맞이하여 바치는 말) 20필, 세공마(歲貢馬; 연말에 각 목장에서 바치는 말) 200필, 흉구마(凶咎馬: 凶變이 있을 때 使役하는 말) 32필, 노태마(駑태馬; 짐 싣는 말) 33필 등 총 433필, 검은 소(黑牛) 20수인데, 어승마와 차비마는 식년(3년마다)에 바쳤으므로 이 때가 식년에 해당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정된 말들은 선박으로 운반되어 해남, 강진, 영암 세곳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부터는 육로를 통해 말을 한양까지 몰고 가게 되는데 이에 소용되는 말의 먹이나 마부의 비용이 모두 제주도민들에 의해 충당되었다.
망경루(望京樓) 앞뜰에서 각 종류의 감귤과 한약재로 사용되는 귤껍질을 봉진하는 그림
4. 감귤봉진(柑橘封進)
▲감귤봉진
- 감귤의 포장과정이 잘 묘사되어 있다. 망경루 앞뜰에서 여인들이 귤을 종류별로 나누고 있고 이형상 목사는 연회각에 앉아 이를 일일이 점검하고 있다.
여인들 앞에는 남정들이 나무통과 짚단을 만들고 있다. 감귤을 봉진하는 과정에서 짓눌려서 훼손되거나 썩어버릴 염려가 있기 때문에 특별히 짚단을 이용해 싸고 나무통에 다른 물건가 함께 넣도록 했다.
그림 아래 부기(附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금귤(唐金橘) 678개, 감자(柑子) 25,842개, 금귤(金橘) 900개, 유감(乳柑) 2,644개, 동정귤(洞庭橘) 2,804개, 산귤(山橘) 828개, 청귤(靑橘) 876개, 유자(柚子) 1,460개, 당유자(唐柚子) 4,010개, 치자(梔子) 112근, 진피(陳皮) 48근, 청피(靑皮) 30근 등이다.
이렇게 봉진된 감귤은 천신용과 물선진상용으로 활용되었다. 천신용은 예조에 보내어 조경묘, 종묘, 경모궁, 효정전, 산릉, 휘정전의 순서에 따라 제사용 천신과일로 나누어졌다. 물선진상용 귤은 대전, 대왕대비전, 왕대비전, 대비전 순서로 나누어졌다.
한편, 영조(1724)대 이후로는 제주의 귤이 조정에 도착하면 임금의 특명으로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들에게 제주 귤을 하사하면서 제술(製述)을 시험하던 황감제(黃柑製)라는 과거시험이 생겨나기도 했다. 이에 수석으로 합격하면 문과의 전시에 곧바로 나아가는 특전을 베풀기도 했다.
감귤의 봉진절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매년 8월 귤나무의 상태를 조사하고 귤의 수를 상세하게 조사해 보고한다. 제주성 근처의 과원은 제주목사가 직접 시찰하고 먼 마을에는 비장(裨將)을 파견해 일일이 과실수를 조사해 문부에 기재한다. 봉진 시기가 오면 3읍의 수령이 책임지고 문부에 기재된 수에 맞추어 귤을 영문에 가져오게끔 한다.
2. 매년 9월에 제일 먼저 유자를 봉진한다.
3. 매년 10월에 당금귤을 천신용으로 예조(禮曹)에 보낸다. 물선진상은 초운에서 7운까지 이루어졌는데 물선진상용 귤의 종류는 당금귤, 금귤, 감자 등이었다.
4. 매년 11월에 유감, 동정귤, 당유자, 감자, 산귤 등이 천신용과 물선진상용으로 봉진되었다.
5. 매년 2월에 청귤이 천신용과 물선진상용으로 봉진되었다. 청귤은 겨울을 넘겨야 제 맛이 나기 때문에 새해 들어 처음 올리는 천신용으로 봉진되었다.
濟州太守崔安以洞庭橘見寄 以許詞之
(제주태수 최안이 동정귤을 보내왔기에 시로 사례하노라)
除却耽羅見尙難 탐라가 아니면 보기조차 어려운 것
遠來何況水程艱 더구나 먼 바닷길로 어렵게 보내왔으니
貴人門閥猶稀得 귀인의 집에서도 얻기 어려운 것
最感年年及老殘 해마다 늙은 사람 생각해줌이 고맙네.
圓於金彈樂堪珍 황금탄알보다 둥글고 찬란한 보배는
猶似霜林始摘新 서리 내린 숲에서 새로 따낸 듯
呼作洞庭尤可喜 동정귤이라 부름이 더욱 기꺼운 것은
飮筵宜伴洞庭春 술자리엔 동정호의 봄빛과 같이 있기 때문일세.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東國李相國集 5권>
: 고려 무신집권기의 재상이자 명문장가인 이규보는 당시 제주부사 최자(崔滋)가 보내온 동정귤에 고마워하며 시로 사례를 하고 있다. 당시 실력자인 이규보에게 이 귤선물이 효과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곧이어 최자는 제주에서 서울로 돌아가게 된다.
귤의 진상은 9월부터 시작하여 매 10일 간격으로 1운(運)에서 20운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그림이 천신용(薦新用: 제사에 쓰이는 햇과일) 2차 진상 21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아, 위 원칙이 그대로 지켜지지는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귤의 진상을 마련하기 위해 1526년(중종 21) 이수동(李壽童) 목사는 별방, 수산, 서귀, 동해, 명월방호소에 과원(果園)을 설치하고, 그곳을 수비하는 군인으로 하여금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후 과원은 제주목에 22개소, 정의현에 7개소, 대정현에 6개소로 증설되었으며, 숙종 때에는 모두 42곳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들 과원에서 생산되는 양으로써 봉진의 수량을 충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관(官)에서는 일반 민강 있는 귤나무를 일일이 조사하여 관리하였다. 일반민들에게는 귤나무 8주(株)를 기준으로 하여 1년의 역(役)을 면제하여 주는 방안이 마련되기도 하였지만, 귤의 열매가 맺자마자 관가에서 일일이 그 맺은 바를 헤아리고 장부에 기록하였다가 그 수를 귤나무 소유자에게 모두 부과시켰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파생되었다.
수확시기까지는 많은 시일이 남아 있어 그간에 해충 또는 바람 등에 의해 떨어진 귤마저 그 소유자에게 전가시켰던 것이다. 이에 민가에서는 오히려 귤나무가 고통을 주는 나무라 하여 도리어 귤나무에 더운 물을 끼얹어 고사(故死)시키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5. 귤림풍악(橘林風樂) 망경루 후원(後園) 귤림(橘林)에서 풍악을 즐기는 장면을 그린 그림
▲귤림풍악
- 날짜가 기록되어 있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순력 일정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그림에 나타나는 열매의 색깔로 보아 과일이 익어가는 시기인 듯하다. 귤나무들의 과일색이 다른 것은 나무마다 품종이 다름을 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제주읍성 안에는 동과원, 서과원, 남과원, 북과원, 중과원, 별과원(別果園) 등 6개 과원(果園)이 있었는데 이 그림의 정경을 보면 왼편 아래쪽에 망경루, 그 오른쪽에 귤림당, 오른쪽에 교방(敎坊), 위쪽에 병고(兵庫)가 있는 것으로 보아 ‘북과원(北果園)’이다. 이곳은 본래 여말선초에 상진무청(上鎭撫廳), 부진무청 (副鎭無廳)이 있었던 곳이다.
과원 가운데 풍악을 즐기는 모습이 상세히 보이며, 과원 둘레에 대나무가 방풍림 (防風林)으로 심어져 있는데 대나무는 화살용으로 공납을 했고 대나무밭에 감귤을 저장하는데도 요긴하게 이용되었다. 과거에 제주도에서 심었던 대나무류는 왕대와 이대의 두 종류가 있었다. 이 그림의 대나무 높이로 보아 크게 자라는 왕대로 추정된다.
그림의 아래쪽에는 임오년(1702) 3읍의 감귤 결실수(摠結實數)를 표기하고 있는데 당금귤(唐金橘) 1,050개, 감자(柑子) 48,947개, 금귤(金橘) 10, 831개, 유감(乳柑) 4,785개, 동정귤(洞庭橘) 3,364개, 산귤(酸橘) 185,455개, 청귤(靑橘) 70,438개, 유자(柚子) 22,041개, 당유자(唐柚子) 9,533개, 등자귤(橙子橘) 4,369개, 우금귤(右金橘) 1,021개, 치자(梔子) 17,900개, 지각(枳殼) 16,034개, 지실(枳實) 2,255개 등으로 귤 종류와 개수를 상세하게 적고 있어 당시 귤 관리가 얼마나 철저했는가를 엿보게 한다.
** 제주감귤
언제부터 제주에서 감귤이 재배되었는지 확실한 기록은 없으나 <고려사>에 백제 문주왕 2년(476) 4월 탐라에서 방물(方物)을 헌상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미루어 꽤 오래전부터 재배된 듯하다. 고려 태조 천수8년(925) ‘탐라에서 방물을 바치다’를 시작으로 ‘방물을 바쳤다’ ‘토물(土物)을 바쳤다’는 내용이 계속되는데 그 방물과 토물에 감귤이 포함되었다는 분명한 기록은 없지만 정황으로 보아 감귤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귤’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게 된 것은 <고려사> 세가(世家) 권7의 기록(문종 6년, 1052) 4월에 ‘탐라에서 세공하는 귤자의 수량을 일백포로 개정 결정한다’는 내용으로 그 이전부터 제주도의 감귤이 세공으로 바쳐졌음을 알 수 있는 것으로 탐라의 감귤세공 유래 역시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귤’은 감(柑)과 귤(橘)로 따로 구분된다. 여기서 감(柑)=열매, 귤(橘)=나무를 칭하는데, 즉 감귤(柑橘)이라는 것은 밀감나무 전체를 뜻한다.
조선시대에는 태조 원년(1392)부터 제주도 귤유(橘柚)의 공물에 대한 기록이 계속되고 있다. ‘감귤(柑橘)’이란 용어는 세조 원년(1456)에 제주도안무사에 내린 유지 <세조실록>2권에 나온다.
‘감귤은 종묘에 제사지내고 빈객을 접대함으로써 그 쓰임이 매우 중요하다’로 시작된 유지에는 감귤 종류의 우열(금귤-유감-동정귤-감자-청귤-유자-산귤 順), 제주과원의 관리실태, 공납충족을 위한 민폐, 사설과수원에 대한 권장방안, 번식생리와 재식호대, 진상방법의 개선방안 등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감귤재배 역사를 보면 중국에서 건너 온 귤나무가 삼한시대에 일본의 신공황후가 우리나라에서 귤나무를 가져갔다는 기록이 있다.
금귤, 유감, 동정귤이 최상품이고, 감자와 청귤이 중품이며, 유자와 산귤이 하품이었다고 한다. 당유자(唐柚子)는, 초겨울부터 설날(구정) 사이에 수확하는 귤로서, 귤 중에서 열매가 가장 큰 종류이며 전 세계적으로 제주에만 자생하는 상록광엽수로, 줄기에는 가시가 있는 귤나무이다.
현재 우리가 주로 식용으로 달콤하게 먹고 있는 온주밀감(溫州蜜柑)은 일본에서 18세기말부터 19세기 초인 ‘에도시대’ 후기에 품종을 개발, 재배되기 시작된 후 제주도에도 들어오게 된 것이다. 기록에 남아있는 도입경로들은 보면 “조선말엽 박영효가 잠시 제주에 왔을 때 일본에서 도입한 감귤나무를 제주시 구남천에 있는 과수원에 심었다”고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온주감귤 등 새로운 감귤품종을 도입, 입맛에 맞는 품종이 개발되면서 점차 재래종은 없어졌는데 병귤을 비롯하여 당유자, 유자, 진귤, 청귤, 동정귤 이 외에도 변이(變異)되거나, 이름을 알 수 없는 몇 품종만이 남아있다.
17세기 중반 이원진의 <탐라지>에 의하면 제주목 23개, 정의현 8개, 대정현 6개소 등 총 37개소의 과원이 조성되었다고 기록돼 있으며, 각 과원마다 재배한 재래감귤은 감자, 유자, 산귤, 금감, 탱자, 청귤 등 12품종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제일 오랜 된 기록인 <고려사>에 의하면 감귤은 고려 문종 6년(1052) 이전에 제주의 특산품으로 임금님께 진상되는 귀한 과일이었다는 기록만이 제주가 감귤의 ‘원조지역’임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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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교래대렵(橋來大獵)
1702년(숙종 28) 10월11일 교래 지경에서 진상을 위한 산짐승과 날짐승을 사냥하는 그림 |
▲교래대렵
- 이형상은 <남환박물>에서 당시 제주에서 산짐승으로 삵괭이, 오소리, 돼지, 사슴 등이 있었다고 하고 호랑이, 표범, 곰, 큰곰, 승냥이, 이리, 여우, 토끼 종류는 없다고 기록했다. 또 날짐승으로는 매, 꿩, 접동새, 제비, 참새, 갈매기, 백로, 두루미, 앵무새, 기러기, 올빼미, 부엉이가 있고 황새, 까치는 없다고 기록했다.
사슴과 노루를 쫓는 모습이 생동감 있고 왼쪽에 그려진 고초기(高招旗)들이 화려하다. 고조기(高照旗)라고도 하는 고초기는 군대를 지휘하고 호령할 때 쓰는 군기로 행로를 가르거나 합치는 신호로 쓰였다고 한다.
이날 사냥에 참여한 관원은 3읍 수령과 감목관이며 사냥에 동원된 인원은 말을 타고 사냥하는 마군(馬軍) 200명, 걸어서 짐승을 일정한 장소로 모는 보졸(步卒) 400여 명, 포수 120명이며, 사냥을 통해 사슴 177마리, 돼지 11마리, 노루 10마리, 꿩 22마리를 잡았다.
‘교래대렵’에 기재된 지명은 지금의 표선면 가시리에 있는 오름들을 일컫는 것으로 사냥장소의 위치와 부근의 지형을 가늠해볼 수 있다.
- ‘검은오름, 검은이오름’의 흑악(黑岳)은 표고 496m의 오름이다.
- ‘염은영아리’의 여운영아리(如雲永我里)는 표고 517m의 ‘영아리’오름이다.
- ‘구두리오름’의 구두리(九斗里)는 표고 518m의 오름이다.
- ‘널묻은동산’의 판매동산(板埋同山)은 가시리에 있는 동산이름이다.
- ‘따라비오름’의 다라비악(多羅非岳)은 표고 342m의 오름이다.
- ‘족은사스미’의 소록산(小鹿山)은 표고 466m의 오름이다.
- ‘큰사스미’의 대록산(大鹿山)은 표고 475m의 오름이다.
**<경국대전> 병전(兵典)에 의하면 지방 수령들의 수렵은 세칭 ‘전렵(田獵)’이라고도 해서 군사훈련을 겸했다고 한다. 수렵을 통해 잡은 짐승은 종묘에 제물로 바치게 되어 있었다.(태종실록 19권, 9년 12월 丁未).
그러나 수렵으로 인한 농작물피해가 심해 일정한 지역을 사냥터로 정했는데 제주에서는 교래 지역이 수렵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교래는 중산간 360m 고지에 위치한 광활한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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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산장구마(山場驅馬)
1702년(숙종 28) 10월15일 산장에서 말을 몰아 일정한 장소에 모으고 그 수를 확인하는 그림 |
▲산장구마
- 산장은 ‘산마(山馬)를 목양하는 목장’으로 한라산 중턱 이상에 설치됐는데 효종 9년(1658) 제주목사 이회(李禬)의 계청(啓請)에 따라 김만일(金萬鎰)의 후손들이 국가로부터 산마감목관(山馬監牧官)을 세습적으로 임명받으면서 비롯되었다.
이들 산장은 숙종 대를 거치면서 침장(針場), 상장(上場), 녹산장(鹿山場)으로 개편되었다. 이 그림은 세 군데 산장 중 한 목마장의 말들을 점검하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원장과 사장이 설치되어 있는데 원장은 우마를 모아놓기 위해 만든 원형의 목책이고, 사장은 모아놓은 우마를 한 마리씩 통과할 수 있게 만든 좁은 목책통과로다.
각 구역마다 말을 취합하는 데 필요한 원장(圓場)과 사장(蛇場)이 설치되어 있다. 원장은 우마를 취합하기 위하여 만든 원형 목책이고, 사장은 취합한 우마를 1두 또는 1필씩 통과할 수 있게 만든 좁은 목책 통과로이다. 모아놓은 우마가 이 사장을 통해 빠져나갈 수 있게 하면서 나라에 봉진할 우마를 간택하거나 우마의 질병, 증감의 숫자 등을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원장은 다시 미원장(尾圓場)과 두원장(頭圓場)으로 구분되며, 그 중간을 연결하는 것으로 사장(蛇場)이 있다. 우마를 먼저 미원장에 몰아 놓고 사장을 통해서 점검한 후에 두원장에 취합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다. 사장은 우마의 수효를 파악하는 데 이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진상 혹은 다른 목장으로 우마를 보내기 위하여 하나씩 붙들 수 있도록 된 장치이기도하다.
이날 산장의 점마는 제주판관, 정의현감, 산장감목관이 책임을 담당한 가운데 결책군(結柵軍: 사장과 원장의 목책을 만드는 군인) 2,062명, 구마군(驅馬軍: 말을 모는 임무를 맡은 군인) 3,720명, 목자(牧子: 말의 직접적인 관리자)와 보인(保人: 목자의 경제적 기반의 일부를 제공하는 사람) 214명 등 총 6,536명에 이르는 인원이 동원되었다.
성판악 바로 밑에 있는 산쪽 끝 지점에서부터 구마(驅馬)군이 말을 몰고 내려오면 결책군들은 다른 목마장의 경계인 목책 바깥에 줄줄이 도열해 지킴으로써 말들이 다른 곳으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했다.
구마는 남북 약 40리, 동서 약 60~70리의 넓이를 차지하고 있으며 목책으로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녹산장(鹿山場), 상장(上場), 침장(針場)으로 생각된다.
미원장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군인과는 다른 복장을 한 것으로 보아 목자들로 보인다. 이들은 원장에 모인 말들의 낙인으로 자신이 관리하는 목마장의 말인지를 확인했을 것이다. 그리고 사장 바로 앞에는 제주판관, 정의현감, 감목관 등이 자리 잡고 있으면서 말의 수, 낙인, 상태를 직접 점검했던 것으로 보인다.
점마를 통해 골라낸 공마는 다음과 같은 절차에 따라 봉진되었다.
1. 제주목사가 조정의 지시에 따라 그 할당량을 3읍의 감목관에게 배정한다.
2. 3읍의 감목관은 각 목장에 공마에 충당할 마필의 수집을 명한다.
3. 각 목장에서는 구마군 · 결책군 · 목자 등을 동원하여 공마를 가려낸다. 이때 미원장에 몰아넣은 마필들을 사장으로 통과시키면서 공마에 적합한 마필을 골라낸다.
4. 가려낸 공마를 소속 영문(營門)에 인도한다.
5. 제주 · 정의 · 대정 영문에서는 감목관의 책임 아래 습마(習馬) 6명이 각 목장에서 보내온 말의 마적(馬籍) · 낙인자(烙印字) · 말 주인(개인소유의 말인 경우) 등을 확인한다.
6. 말의 나이, 키, 털빛, 건강, 조습실태 등을 조사하여 골라서 공마의 목록과 함께 보고한다.
7. 골라진 공마는 세목(細目)과 함께 조천포, 화북포로 운반해 진상선에 실어 조정에 바쳐진다.
** 제주말
태초에 삼성(三姓)이 탐라에 정주하면서 오곡을 뿌리고 망아지와 송아지를 길렀다는 것으로 보아 제주도에서는 예로부터 말을 사육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시대 : 제주에서 말을 사육했다는 기록이 나타나는 것은 고려시대부터이다. 곧 원나라는 제주도를 속국으로 관할했던 충렬왕 2년(1276)부터 약 100년간 제주를 야마생산지로 활용하기 위해 대규모 목장을 설치하고 원으로부터 종마로 ‘달단마(몽고마)’와 ‘대완마(서역마)’ 등 160마리를 도입하여 말을 생산하는 한편 지역의 토마를 개량하기 시작했다 한다.
조선시대 : 제주도 중산간(中山間) 지역은 대부분 진상을 위한 말을 키우는 국가목장이 있을 정도로 말의 진상이 있었는데, 10소장으로 대표되는 제주도 목장에 일반적으로 4천-1만필 내외의 말이 사육되어 모두 중앙정부에 공물(貢物)로 진상되었다.
**목자(牧者)
목자(牧者)의 기원은 삼국시대 소와 말 생산에 종사하던 자들은 사회 최하층에 속하는 노비들이었다. 이후 고려가 원의 지배하에 들어간 후 원에 의해서 목장이 세워지고 또한 몽고의 마필과 사육전문가인 목호(牧胡)가 와서 본격적으로 목마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공민왕 16년경부터 종래의 노비를 목자(牧者)라 부르게 된데서 목자라는 칭호가 유래된 것으로 보이며 '목자'는 말을 목양(牧養)하는 자를 말한다.
곧 '목자(牧者)'란 고려시대 이후 관청에 소속되어 국가의 말을 관리하는 사람들이다.
제주도 중산간 마을을 중심으로 목축을 주업으로 하면서 농업도 하던 ‘목축업자들’. 그리고 목축업자의 소와 말을 일정기간 동안 맡아서 돌보던 ‘테우리’를 포함하는 의미이다. ‘목축업자’들은 경제적으로 매우 넉넉한 생활을 영위하던 사람들이었으나 관청에 소속되었던 ‘목자(牧者)’들은 비천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테우리’들 또한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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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성산관일(成山觀日)
1702년(숙종 28) 7월13일 성산일출봉에서 해뜨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 |
▲성산관일
- 성산 일출봉에서 해뜨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으로 일출봉과 우도의 지형이 자세하다. 제주판관, 정의현감, 군관 김진기(金振淇), 도한필(都漢弼)이 배행했다. 일출봉 입구에 진해망(鎭海望)의 옛 터가 표시되어 있고, 그 위로 일출봉의 정상에 있는 성산망(城山望)까지 오르는 등정 길이 자세하게 나타나 있다. 각교(刻橋)라 하여 등정 길이 험난하기 때문에 암반에다 모두 계단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일출봉 앞 평지에는 예전에 진(鎭)이 이곳에 있었을 때 수비하는 병사들을 위한 것으로 봉천수(奉天水)가 있으며, 이곳에서 하마(下馬)하고 걸어서 성산망에 이르게 되어 있다. 또한 오조연대(五照煙臺)의 위치, 우도와 죽도의 지형, 그리고 우도 내에 있는 어용굴(魚龍窟)이 표시되어 있다.
이형상 목사는 진해당(鎭海堂)에 대해 ‘지지난 정축년에 이경록 목사가 성산에 살 계획을 세우고 또 서쪽 기슭에 진해당을 지었다’고 했다. 정축년은 정유년의 오기(誤記)인 듯하다. 이경록 목사가 성산으로 수산진을 옮기려고 했던 것은 임진왜란(정유년, 1597) 당시였다. 그러나 성산은 너무 궁벽진 곳에 있어 방어가 어렵고 물과 토지가 없어 2년 뒤 다시 본래 위치로 옮겨가게 되는데 이 목사가 이곳을 찾았을 때는 모두 철폐돼 그 터만 남았다고 기록했다.
- 성산일출봉
해돋는 모습(城山日出)이 장관을 이뤄 일찍부터 ‘영주십경(瀛洲十景)’ 중 으뜸으로 손꼽혔다. 제주도 동쪽 끝머리에 자리한 일출봉은 태초에 바다 속에서 용암분출로 형성된 섬이었으나 너비 500m 정도의 사주가 1.5㎞에 걸쳐 쌓이면서 제주와 이어졌다.
삼면이 깎아지른 듯한 해식애(海蝕崖)를 이루는 성산일출봉의 ‘성산(城山)’은 분화구 주위를 빙 두른 99개의 날이 선 기암괴석들이 마치 거대한 성과 같다해서 ‘일출봉’ 앞에 붙은 이름이다. 기암괴석 가운데는 설문대할망이 등잔으로 사용했다는 등경돌도 있다. 높이 솟은 바위에 다시 큰 바위 하나를 얹어놓은 형상인데 설문대가 불을 켜보니 등잔이 얕아 다시 바위를 올려놓아 사용한 것이라 한다. 3만여 평에 달하는 초원이 펼쳐진 넓은 분화구 안에는 희귀식물 150여 종이 살고 있다.
임제(林悌, 1549-1587)는 <남명소승>에서 ‘성산은 한송이 푸른 연꽃을 바다 물결 가에 꽂은 듯하다. 그 위는 돌벼랑으로 둘러싸여 있으니 마치 성곽과 같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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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우도점마(牛島點馬)
1702년(숙종 28) 7월13일 우도 목장 내에 있는 말을 점검하는 그림 |
▲우도점마
- 하단의 말은 262필이며 이들 말을 관리하는 목자, 보인의 수가 23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도(牛島)는 ‘쉐섬’의 한자 차용 표기로 제주에서는 소를 ‘쉐’라 부른다. 동두(東頭)는 ‘동머리’의 한자 차용 표기로 우도의 ‘쉐머리오름’을 이르며 이름 그대로 이 쉐머리오름은 머리로 소가 누워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이 그림은 우도의 모습을 마치 소가 누워있는 듯이 묘사하고 있는 점에서 과거 조상들의 독특한 지형인식을 엿볼 수 있다. 또 포구와 어용굴(魚龍窟)이 표시되어 있다. 어용굴은 해식동굴인데 신룡(神龍)이 살기 때문에 어선이 접근하면 대풍(大風)과 뇌우(雷雨)가 일어나 나무를 쓰러뜨리고 곡식을 해친다는 속설이 전해졌던 곳으로 지금의 동안경굴을 말한다.
당시 우도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민가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우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이원조 목사가 장계(狀啓)를 올려 우도 목장의 개간을 허락받은 1843년경부터의 일이다. 오른쪽 지미망(指尾望)은 ‘지미망’의 한자 차용표기로 지그의 구좌읍 종달리에 있는 표고 165m의 지미봉(地尾峰)을 이른다. <세종실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는 지말산(只末山) 또는 지미산(只未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두원포 연대는 ‘두원잇개연듸’의 한자 차용표기로, 구좌읍 종달리에 있었던 ‘두원잇개’연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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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화북성조(禾北城操) 1702년(숙종 28) 10월29일 화북진에 소속된 성정군의 군사훈련 모습 |
▲화북성조
- 하단의 기록은 당시 화북진의 조방장은 이희지, 성정군의 규모는 172명, 군대의 점검과 아울러 군기의 수효도 일일이 확인하였음을 전해주고 있다.
성의 좌측에는 화북진에 소속된 별도연대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고 화북진의 자세한 지형과 화북성의 위치, 성 내의 건물배치 뿐만 아니라 민가 위치 등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화북진성을 중심으로 오늘날의 화북마을 모습이 상세하다. 화북진성 바로 남쪽에 ‘별도포리(別刀浦里)’라는 마을 이름이 선명하다. 민가의 분포는 동쪽의 별도연대와서쪽의 별도포구가 끝나는 지점까지 비교적 골고루 퍼져있지만 연대 서쪽과 화북진성의 동문지점 그리고 별도포의 안쪽 가장자리를 에워싸는 부근에 특히 많이 나타나 있다.
성의 좌측에는 화북진에 소속된 별도연대(別刀煙臺)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별도포 안에는 몇 척의 배가 정박되어 있는데, 당시 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별도포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제주도의 관문적 성격을 띠는 포구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시대적으로는 꽤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별도포(別刀浦)’는 ‘벨돗개’의 한자 차용 표기로 지금의 화북 1동 포구를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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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조천조점(朝天操點)
1702년(숙종 28) 10월20일에 있었던 조천진 성정군의 군사훈련과 인근 제2소 목장의 둔마(屯馬)를 점검하는 그림 |
▲조천조점
- 원형의 섬으로 이루어진 조천진의 위치와 진 안의 연북정을 비롯한 건물배치, 민가의 위치, 해안에 흩어져 있는 여(礖) 등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조천진은 서산봉수와 조천, 왜포, 함덕연대를 관할했다.
그림 윗부분에 말을 점검하기 위해 설치된 원장과 사장이 보인다.
그림 아래의 기록으로 조방장은 김삼중(金三重)이며 그 휘하의 성정군은 423명인데 이들에 대한 점검과 군기 점검, 그리고 2소 목장의 둔마 505필, 목자 87명을 점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림에 나타난 지명들을 살펴보면 조천관리(朝天館里)는 ‘조천관마을’의 한자 차용표기로, 조천읍 조천리를 이른다. 관포(館浦)는 ‘관개’의 한자 차용표기로 조천관포(조천관개)를 줄여서 표기한 것이다. 조천리 포구를 이른다.
묘수(猫水)는 ‘궤물’의 한자 차용 표기로 조천리 바닷가의 바위굴에서 나는 물이다. 죽도(竹島)는 ‘대섬’의 한자 차용 표기로 조천리 앞바다에 있는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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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김녕관굴(金寧觀窟)
1702년(숙종 28) 10월30일 김녕의 용암굴에 횃불을 들고 들어가는 그림 |
▲김녕관굴
- 김녕의 용암굴에 횃불을 들고 들어가는 그림으로 이곳에서 말을 갈아타기 위해 잠시 머물며 김녕굴 안을 둘러보았는데 가마를 타고 굴 안쪽을 관람하는 모습과 굴 바깥쪽에 우거진 팽나무가 잘 표현되어 있다.
굴의 높이 30척, 너비 20척, 길이 5리에 해당하는 굴이다. 오늘날의 사굴과 만장굴을 합해 김녕굴이라 했던 듯하다. 입산(笠山)에 입산봉수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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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별방조점(別防操點)
1702년(숙종 28) 10월30일 별방성에서의 군사훈련과 성정군, 군기, 우마를 점검하는 그림 |
▲별방조점
- 별방진(別防鎭) · 황자장(黃字場) · 지미봉수(指尾烽燧) · 하도의리리(下道衣離里)의 민가, 연대의 위치가 상세하다. 별방진은 만조시에 바닷물이 흘러들어 오도록 되어 있으며, 동창(東倉)과 객사 건물의 위치를 엿볼 수 있다. 타원형의 성으로 동문, 서문, 남문이 있다. 성문은 정면 1간의 루가 있는 우진각 초가이고 성문 앞에는 옹성과 회곽도를 오르기 위한 돌계단이 성문 옆에 축조되어 있다.
다른 진성(鎭城)에 비해 성의 규모가 크고 성문이 3개소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제주성에 속하면서도 동쪽 끝에 멀리 떨어져 있어서 방어의 중요성이 절실했음을 알 수 있다. 남문을 들어서면 북성 가까이 왼쪽에 호수를 두었으며, 객사가 있고 객사 오른쪽에 공수(攻守) 또는 사령방으로 보이는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남문에서 객사에 다다르는 길과 서문에서 객사에 다다르는 길에 축을 맞추어 ‘ㅁ’자를 형성하면서 동창이 자리 잡고 있으며 건물과 건물 사이에는 담을 둘러 영역을 구분하고 있다. 동창 앞에는 객사와 마주한 군기고가 자리 잡고 있다.
순력 중에 10월 30일은 이곳에서 머물렀다.
별방진의 조방장은 김여강(金汝江)이고, 성정군은 423명으로 화북성의 성정군 수효와 일치한다.
황자장의 우마수는 흑우 247수, 말 946필이며, 목자와 보인은 모두 187명이다. 별방진 내에 위치해 있던 동창에 보관되어 있는 곡식은 2,860여 석으로 부기되어 있다. 한편, 별방진 관할의 봉수와 연대는 입산봉수(笠山烽燧) · 왕가봉수(往可烽燧), 입두연대(笠頭烟臺) · 좌가연대(佐可烟臺) · 무주연대(無住烟臺)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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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별방시사(別防試射)
1702년(숙종 28) 11월1일 순력도중 별방진에 들러 활쏘기를 장려하기 위해 시행하는 활쏘기 시험장면 |
▲별방시사
- 성 안에는 한편에서는 활쏘기 시험, 또 한편에서는 우마(牛馬)의 점검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활쏘기 시험에는 각 면의 교사장(敎射長) 10명과 사원(射員) 208명이 참가하고 있다. 교사장은 활쏘기를 가르치는 교관이며 사원은 활쏘기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시험장에 모인 사람들이다.
당시 활쏘는 방식에는 몇 보의 거리에 서서 또는 말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는 형태와 유엽전(柳葉箭, 살촉이 버들잎처럼 생긴 화살)을 가지고 쏘는 형태 등이 있었다. 이러한 활쏘기 시험을 통해 사원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량을 맘껏 표출했다. 활쏘기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했을 경우에는 무과전시(殿試)에 곧바로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점검되고 있는 말들은 별천자둔(別天字屯)의 말이며 성 밖까지 이어져 있다. 흑우둔의 흑우는 성 밖 좌측의 아래쪽에 대기하고 있다. 밀물 때 바닷물이 흘러들어오도록 되어 있는 별방진의 성 밖의 배경으로 체오름(帖岳), 다랑쉬오름(大朗秀岳), 둔지오름(屯止岳)이 그려져 있고 봉수는 지미망(指尾望), 포구는 별방포와 용항포, 마을로는 하도의탄리의 초가가 표시되어 있다. 또 여기저기에서 목자들이 우마를 관리하고 있는데 우마는 검열에 대비해 줄을 서 있는 형태아니 몇 마리는 풀을 뜯는 모습으로 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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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수산성조(首山城操)
1702년(숙종 28) 11월2일 정의현 수산진성에서의 성정군 군사훈련을 점검하는 그림 |
▲수산성조
- 수산진성, 수산봉수, 협재연대, 구수산고성의 위치가 상세하며 수산진은 동문과 서문이 있는 타원형의 성이다. 수산진성 내에는 건물 배치 상황뿐만 아니라 샘의 위치도 표시되어 있다. 수산진 관할의 봉수로는 지미 · 성산 · 수산 봉수가 있고 연대에는 협재 · 오소포 · 종달 연대가 있다.
정의현감 박상하(朴尙夏)가 참석하였으며, 조방장 유효갑(兪孝甲)을 비롯해 성정군 80명 및 군기에 대한 점검을 실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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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정의조점(旌義操點)
1702년(숙종 28) 11월2일 정의현성에서의 조련(操鍊)과 제반사항을 점검하는 그림 |
▲정의조점
- 정의현 성, 달산봉수의 위치와 읍외촌(邑外村), 궁산촌(弓山村)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정의현 성은 성곽이 둘러쳐지고 동문, 서문, 남문이 세워져 있으며 그 중심지에 객사가 자리 잡고 관아 · 창고 · 문묘(文廟) 등의 건물 명이 보인다.
당시 정의현은 읍내 1리, 동면 10리, 서면 12리로 구성되어 있는데 민호(民戶)는 1,435호, 전답(田畓)은 140결이다. 성장(城將) 2인, 치총(雉摠) 4인, 성정군(城丁軍) 664명과 제반군기는 물론 목자와 보인 190명, 말 1,178필, 흑우 229수, 창고의 곡식 4,250여 석을 점검했음을 알 수 있다. 정의현 성의 직접적인 관할 봉수는 남산, 독자, 달산, 토산이며 연대(煙臺)는 말등포, 천미, 소마로, 벌포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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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정의양로(旌義養老)
1702년(숙종 28) 11월3일 정의현성에서 치러진 노인잔치 광경 |
▲정의양로
- 정의현 성은 성곽이 둘러쳐지고 동문, 서문, 남문이 세워져 있으며 그 중심지에 객사가 자리 잡고 있다. 노인잔치는 객사(客館) 앞에서 이루어졌는데 이형상 제주목사는 북쪽을 향해 있으며 노인들은 남쪽을 향하고 있다. 그림 아래 기록에 의하면 이날 참석한 정의현에 사는 80세 이상의 남녀노인은 17명, 90세 이상은 5명이다.
이형상 목사 앞에는 가야금을 타는 여인이 4명, 대금을 부는 남자 2명, 장구를 치는 여인 1명, 틀에 달고 채로 치는 북을 두드리는 1명 등 악기를 연주하는 악공들과 춤을추는 남자 2명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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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정의강사(旌義講射)
1702년(숙종 28) 11월4일 동짓날에 정의현에 머물면서 시행한 강사(講射), 즉 강(講)받기 시험과 활쏘기 시험 장면 |
▲정의강사
- 대상은 강유(講儒)와 사원(射員)이다. 講 받기 시험은 유생들에게 자신이 읽은 글을 시험관 앞에서 암송하도록 하는 것이다.
정의현 성은 성곽이 둘러쳐지고 동문, 서문, 남문이 세워있으며 그 중심지에 객사가 자리 잡고 있다. 남문으로 들어서면 좌우에 민가들이 밀집되어 있고 다음데 병고(兵庫)에 설치된 1간대문에 이른다.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 서쪽에는 현아(懸衙)인 일관헌과 연결되는 문을 제외하고 담장을 둘러 공간을 구획했는데 마당 북쪽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놓은 객사가 자리 잡고 있다.(오늘날 제주도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어 있는 일관헌은 지금의 군청에 해당하는 곳으로 정의현감이 집무하던 청사이며 그 옆마당에는 거대한 연자매가 있다.)
객사를 중심으로 그 우측에는 수(帥)자기가 있고, 정면 좌측, 우측에는 각종 깃발과 무사가 배열되어 있다. 객사 안에는 이형상 목사가 앉아있고 그 옆에는 주안상이 마련되어 있다. 활을 쏘는 사람과 순번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객사 밖에까지 늘어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또 객사 앞에는 도훈장 5명과 강유, 각 면 교사장이 붉은 옷차림으로 앉아 있다. 특히 강유들도 순번을 기다리고 있다.
이날 훈장인 유학 고세웅, 각 면 훈장 5명, 각 면 교사장 7명, 유학을 공부하는 166명 등이 참석한 가운데 87명의 사원(射員, 활쏘는 사람)이 재주를 겨루었다. 당시 정의현에 거주하는 사원은 350여 명이었다.
객사의 북서쪽 가까이에 현감이 집무하는 현아가 ‘ㅁ’자형으로 형성하고 그 남쪽으로 교육시설인 문묘(향교)가 주위에 별도로 담장을 두르고 ‘ㄷ’자를 형성하면서 자리 잡고, 군사들의 식량을 보관하는 창고는 객사 마당쪽 동측에 ‘ㅁ’를 형성하고 있다.
성 밖에는 오름으로 영주산이 있고, 달산망 봉수와 초가가 보인다. 정의현 성의 직접적인 관할 봉수는 남산, 독자, 달산, 토산이며 연대(煙臺)는 말등포, 천미, 소마로, 벌포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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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정방탐승(正方探勝)
1702년(숙종 28) 11월5일 배를 타고 정방폭포를 탐승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
▲정방탐승
- 폭포 위에 있는 소나무가 강조되어 있으며 그 아래 정방연(正方淵)에서 배를 타고 놀이를 즐기고 있는데 부기의 내용으로 보아 정방폭포의 길이 80여 척, 너비 5척임을 알 수 있다. 이형상의 <남환박물>에 의하면 정방연(正方淵)은 정의현에서 서쪽 60리에 있으며 폭포 위에는 큰 소나무들이 있고 밑으로 바다가 있어 폭포가 바다에 직접 떨어져 가히 제일명구(第一名區)라 이르고 있다.
이 그림은 남쪽 바다에서 바라본 시점으로 그려져 있는데 파도의 모습과 폭포에서 바다로 떨어지는 물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특히 해안 절벽 위의 노송들이 독특하게 그려져 있고 지금의 보목동 앞바다에 있는 섶섬(삼도)도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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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천연사후(天淵射帿)
1702년(숙종 28) 11월6일 천지연폭포에서의 활을 쏘는 장면을 그린 그림 |
▲천연사후
- 천지연폭포에서 활 쏘는 장면으로 폭포의 반대편에 과녁을 설치해 화살을 쏘고 있는데 폭포의 좌우에 줄을 동여매고 그 줄을 이용해서 추인(芻人, 짚이나 풀로 만든 인형)을 좌우로 이동하게 했다. 이와 같은 추인은 주로 기병(騎兵)들의 화살을 쏘는 표적으로 주로 이용되었으나 여기서는 과녁을 향해 쏜 화살을 상대편에서 추인에게 꽂으면 이쪽에서 줄을 당겨 추인에게 꽂힌 화살을 건네받는 것이다.
천지연폭포는 길이 50여 척, 너비 10여 척이라 부기되어 있다. 정방폭포에 비해 폭포의 길이는 짧으나 넓이는 그 배에 해당한다. 폭포의 좌우는 깎인 봉우리가 서로 포옹하는 모습을 하고 있어 마치 활에 화살을 당긴 형상을 하고 있다.
오늘날 천지연폭포의 높이는 22m이며 폭은 한라산에 비가 많이 올 때는 12m까지 넓어진다. 20m의 못에는 천연기념물 제268호 무태장어가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열대어의 북방한계지 또한 이곳이라는 사실이 중요시되어 천지연폭포는 ‘제주도 무태장어 서식지’라는 명칭으로 천연기념물 제2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계곡 전체는 천연기념물 제379호로 보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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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서귀조점(西歸操點)
1702년(숙종 28) 11월5일 서귀진의 조련과 군기 및 말을 점검하는 그림 |
▲서귀조점
- 서귀진의 위치와 주변 섬의 위치가 잘 나타나 있다. 서귀진은 동문과 서문이 있는 타원형의 성인데 성벽 위에는 여장이 설치되어 있고 회곽도를 오르기 위한 돌계단이 성문 옆에 축조되어 있다. 성문 앞에는 옹성이 있고 성 안의 북성 가까이에 객사가 자리 잡고 있는데 객사 앞쪽에는 넓은 마당을 두고 남성에 붙여 성벽과 나란히 창고, 마당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에는 병고(兵庫), 왼쪽에는 진졸청과 창고로 보이는 건물이 있다. 객사의 왼쪽에 있는 초가는 기단이 있는 것으로 보아 진(鎭)의 책임자가 거주하는 진사(鎭舍)인 듯하다.
정의현감과 더불어 대정현감이 함께 참석했는데 이는 아마 다음 순력지역이 대정현 지역이기 때문에 목사를 배행하기 위해 참석한 듯하며, 당시 서귀진 조방장은 원덕전(元德全)이었으며 성정군 68명과 군기를 점검하고 목자와 보인 39명, 말 237필도 아울러 점검했다. 서귀진 소속의 봉수는 자배 · 호촌 · 삼매양 봉수, 연대(煙臺)는 금로포 · 우미 · 보목 · 연동 연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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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현폭사후(懸瀑射帿)
1702년(숙종 28) 11월6일 현재의 중문 천제연폭포에서 활쏘는 모습을 그린 그림 |
▲현폭사후
- ‘대정지경(大靜之竟)’임을 표시하는 글자가 보이며, 천제연폭포를 상폭(上瀑)과 하폭(下瀑)으로 구분해 놓고 있다. 천지연폭포와 마찬가지로 폭포의 좌우에 줄을 동여매고 그 줄을 이용해 추인(芻人, 짚이나 풀로 만든 인형)이 좌우로 이동하고 있다. 이와 같은 추인은 주로 기병(騎兵)들의 화살을 쏘는 표적으로 주로 이용되었으나 여기에서는 과녁을 향해 쏜 화살을 상대편에서 추인에 꽂으면 이쪽에서 추인의 매달린 줄을 당겨 추인에 꽂힌 화살을 건네받는 것이다.
폭포의 길이는 50여 척, 너비는 5척이라 부기(附記)하였다.
상폭 서쪽 암벽에는 임관주(任寬周)의 시가 전해온다.
천제연 열린 곳에 큰 폭포 흘러내려
총석(叢石)으로 옮겨오고 깊은 못에 쏟아지네.
추인(芻人)은 화살을 지고 공중을 걸어가니
제일 기이하고 볼 만한 것이 이 사후(射侯)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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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고원방고(羔園訪古)
1702년(숙종 28) 11월6일 고둔과원(羔屯果園)에서 왕자구지(王子舊地)를 탐방하는 그림 |
▲고원방고
- 1702년(숙종 28) 11월6일 서귀진을 떠나 이형상 제주목사는 정의현감 박상하, 대정현감 최종제와 함께 고둔과원(羔屯果園)에 도착, 샛노란 귤을 보며 술과 노래를 즐겼다. 대정현 성에서 동쪽으로 55리에 위치한 고둔과원은 현재 서귀포시 용흥동 속칭 염돈마을 운랑천 부근의 염돈과원을 가리킨다.
과원 좌측에 ‘왕자구지(王子舊地)’라 되어 있고 그곳에서 기녀들이 거문고를 연주하는 가운데 풍악을 즐기고 있다. 과원의 방풍림으로 대나무가 심어있고 과원의 밖에는 참나무밭과 매화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운랑천(雲浪泉)으로 추정되는 물과 인근에는 그 물을 이용한 논이 형성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이형상 목사는 ‘풍치로 이를 말하면 가을 겨울에 낙엽할 때 홀로 과원은 봄철 녹음으로 단장해 하늘을 가리우고 누런 열매는 햇빛에 비치니 나무마다 영롱하고 잎마다 찬란하다’고 적었다.
순력 후에 이형상 목사는 이 과원을 평가하기를 ‘제주의 북원, 정의의 성산과 함께 제주의 과원 중 가장 뛰어나다’라고 했다.
청음 김상헌도 <남사록>에서 ‘동정(洞庭)에는 귤(橘)이 있되 매화는 없고, 서호(西湖)에는 매화는 있으되 귤은 없는데 이곳은 동정과 서호가 함께 눈앞에 펼쳐져 있다’고 하여 그 풍치를 찬양했다.
과원에 있는 감귤나무는 익어가는 색깔을 달리하여 여러 품종이 재배되고 있음을 나타내며, 고둔마을은 고둔과원 근처에 형성된 마을로 지금의 서귀포시 용흥동 염둔마을을 가리킨다. 고둔과원은 현재 강정동 2012번지 부근이며 조선시대부터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둔과원 안에는 ‘왕자구지’가 있어 당시에는 제주로 부임하는 목사들이 즐겨 찾는 경승지였다.
<남환박물>에는 고둔이 ‘고득종(高得宗) 감사의 옛 집터’가 있는 곳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원진의 <탐라지(1956)>에는 ‘고둔과원은 대정현에서 동쪽 55리에 있으니, 고득종의 농막 터인데 지금도 주춧돌과 계단이 남아있는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득종은 부친 고봉지(高鳳智)를 따라 10세 때 상경했는데 효행이 두터워서 1413년(태종 13) 벼슬에 천거되어 직장(直長)을 지내다가 이듬해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대호군, 예빈시판관 등의 벼슬을 지냈고, 1427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제주목마장에 관해 세종의 자문에 응하며 세종의 총애를 받아 두 차례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39년 통신사로 일본에 가서 천황의 서계(書契)를 가지고 돌아온 후 한성판윤, 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고득종은 특히 문장과 서예에 뛰어났으나 전하는 저술이나 작품은 없고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몇 편의 시가 전한다.
제주에는 기록상 3번 다녀갔는데 한번은 배가 난파되기도 했다. 황희(黃喜)와는 제주마를 줄 정도로 친분이 있었으며 안평대군과는 몽유도원도에 그의 찬시(讚詩_가 올라있을 정도의 친분이었다고 한다.
관덕정 창건 당시 고득종의 간청으로 안평대군이 관덕정의 현판글씨를 써주기도 했는데 후에 불에 타 없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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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산방배작(山房盃酌)
1702년(숙종 28) 11월10일 산방굴(山房窟)에서 배작(盃酌)의 그림을 그린 그림 |
▲산방배작
- 돌산인 산방산(山房山)의 모습이 기골이 웅장하게 묘사되어 있다.
송악산(松岳山), 형제도(兄弟島), 군산(軍山), 감산(紺山), 용두(龍頭) 등이 보이며, 도로와 산방연대(山房烟臺)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사계리 포구가 흑로포(黑路浦)로 표기되어 있는데 산방산 남쪽을 휘감은 도로는 현재에도 사용하고 있는 도로이다.
현재 산방산 입구에 수문장처럼 버티고 있는 노송이 이 그림에서도 노송처럼 그려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수령이 400년은 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이형상의 <남환박물>에 의하면 “산방산은 대정현 동쪽 10리에 위치해 있으며 산의 높이 200척, 둘레 10리로 산 전체가 돌로 형성되어 있고 남쪽 언덕에 큰 굴이 있는데 굴암이라 이르며 물이 굴 위로부터 한 방울씩 떨어진다. 그 남쪽에 암문(暗門)이라는 굴이 있는데 그 벽 사이가 1척이며 깊이가 100척, 길이 50여 척에 이른다. 그 북쪽에 큰 굴이 있는데 깊이는 헤아릴 수 없으나 피생문(彼生門)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어 세 개의 굴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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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대정조점(大靜操點)
1702년(숙종 28) 11월10일 대정현성의 성정군 조련과 대정현의 제반사항을 점검하는 그림 |
▲대정조점
- 대정현 성의 내부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대정현 성은 성곽이 둘러쳐진 타원형의 성으로 성벽 위에는 여장이 설치되어 있고 회곽도를 오르기 위한 돌계단이 성문 옆에 축조되어 있다. 북성 가까이 정청(政廳)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놓고 초하루와 보름마다 향궐만배(向闕萬拜)하는 곳인 객사(客舍)가 자리 잡고 있다.
남문에 들어서면 넓은 마당 한 가운데 두 기둥을 세우고 지붕 없이 홍살을 세워 댄 홍살문에 이르는데 객사로 출입하는 문이 가운데 있고 좌우로 익랑을 둔 솟을대문에 이른다. 이 문에 들어서면 마당을 중심으로 객사가 자리잡고, 객사 앞쪽 좌우측에 객사공간을 구성하기 위한 행랑채가 자리잡고 있다. 현관의 집무소인 관아는 객사 서쪽에 성벽과 함께 하여 ‘ㄷ’자를 형성하고 있고 객사와 관아 사이에는 군관의 처소인 관청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객사 동측에는 군기를 보관하는 군기고가 있으며 군기고 남쪽에는 좌수와 별감이 근무하는 향청, 육방의 우구머리가 집무하던 작청 등의 건물이 자지잡고 있다. 관아 남쪽에는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다. 성 밖의 민가들은 성의 동쪽에 밀집되어 있으며 당시 대정현의 편제는 읍내1리, 동면9리, 서면2리로 모두 12리에 민호는 797호, 전답은 149결이다. 성장 2인, 치총 4인, 성정군 224명, 군기, 문묘의 제기ㆍ제복ㆍ서책, 목자와 보인 123명, 말 840필, 흑우 228수, 창고의 곡식 1,9500여 석을 일일이 점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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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대정배전(大靜拜箋)
1702년(숙종 28) 11월11일 대정현에서 시행된 배전(拜箋)의 광경을 그린 그림 |
▲대정배전
- 순력 도중 대정현에서 조정의 경사를 듣고 배전(拜箋)이 행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배전(拜箋)이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지방관이 그 소재지에서 임금에게 전(箋, 書面)을 올려 하례(賀禮)의 뜻을 표하는 의식을 말한다.
대정현성은 성곽이 둘러쳐진 타원형으로 읍내의 민가와 읍성 밖에 동성리로 추정되는 민가들이 보인다.
그림 아래에 기사의 내용은 없다.
「대정조점(大靜操點)」, 「대정양노(大靜養老)」, 「대정강사(大靜講射)」의 그림과 아울러 대정현성 내의 건물 복원에 상당히 유용한 그림이다. 읍내의 민가와 읍성 밖에 동성리로 추정되는 민가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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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대정양로(大靜養老)
1702년(숙종 28) 11월11일 대정현에서의 노인잔치를 그림 |
▲대정양로
- 당시 대정현에는 80세 이상의 노인 11명, 90세 이상의 노인 1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목사의 순력 시에는 이와 같은 노인잔치는 거의 관례화되어 있었는데 제주지방 풍속 중의 하나가 ‘인다수고(人多壽考, 장수하는 사람이 많다)’인데 이원진의 <탐라지>에 의하면 제주 가운데 한라산이 있어 남쪽 큰 바다의 독기는 산에 막히고 북쪽에서 불어오는 찬 기운이 더운 습기와 열기를 몰아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제주 내에서도 한라산 남쪽에 비하여 북쪽이 더욱 장수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속설에는 봄가을 동쪽 하늘에 나타나는 노인성을 보면 장수한다고 전해오는데 이 노인성이 제주의 한라산에서 흔히 볼 수 있어 도민들 중에 장수하는 자가 많은 까닭으로 전해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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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대정강사(大靜講射)
1702년(숙종 28) 11월12일 대정현에 머물면서 시행한 강사(講射)의 장면 |
▲대정강사
- 부기의 내용을 보면, 강사(講射)에는 도훈장(都訓長)에 현감을 역임한 문영후(文榮後), 각면(各面) 훈장 5인, 각면 교사장(敎射長) 5인, 강유(講儒: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 42인 등이 참석한 가운데 21명의 사원(射員: 활 쏘는 사람)이 활을 쏜 것으로 추정된다.
대정현 성안에는 각종 깃발이 도열되어 있고 이형상목사는 객관에 앉아 있다. 그 옆에는 주안상이 있고 또 사원들이 그 앞에서 배례를 올리고 있다. 유강들은 붉은 옷차림으로 사원들과 함께 늘어서 있다. 객관 좌측에는 기수들이 잡고 있는 각종 깃발이 도열해 있는데 과녁과 물림폭이 시설되어 있고 그 옆에는 판정관가 활의 적중여부를 알리는 사령 3명이 신호기를 눕힌 채 엎드려 있다.
성 밖의 남쪽으로는 좌측으로부터 산방산, 바굼지오름(破軍山岳), 송악산이 있고 섬은 우측으로부터 가파도(盖波島), 마라도, 형제도가 있으며 봉수로는 저성망(貯聖望), 마을로는 모슬포의 초가가 보이고, 성 밖에도 초가가 있다. 특히 바굼지오름 남쪽으로 문묘(文廟) 즉 대정향교가 보인다.
대정현성 내의 건물 위치와 아울러 주변의 송악산, 형제도, 산방산, 파군산, 모슬포, 가파도, 마라도 등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파군산 뒷편에 향교의 모습이 보인다. 저별망이 저성망(貯星望), 가파도가 개파도(蓋波島), 마라도(馬羅島)가 마라도(摩羅島)로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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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모슬점부(慕瑟點簿) 1702년(숙종 28) 11월13일 모슬진 군대를 점검하는 그림 |
▲모슬점부
- 이형상 목사가 직접 점검하지 않고 군관 전만호(前萬戶)와 유성서(柳星瑞)를 대신 보내 점검했다.
목사가 친히 점검하지 않고 장부상으로 확인한 경우는 이를 구별해 ‘점부(點簿)’라 한 듯하다.
점검 결과 모슬진의 조방장에 오세인(吳世仁), 방군(防軍), 기병, 보병이 24명이었다.
대정현성에서 모슬진에 이르는 주변 지형을 잘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수연대와 모슬봉수의 위치, 모슬촌의 민가가 표기되어 있다.
모슬진은 원형의 성으로 성문이 동문 하나만 있다.
동문과 남성 사이에 객사와 병고가 조금 떨어져 ‘ㄴ’자를 형성하고 있고
동문과 북성 사이에도 ‘ㄴ’자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으며 모두 우진각 초가로 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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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차귀점부(遮歸點簿)
1702년(숙종 28) 11월13일 실시한 차귀진의 조련과 점검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
▲차귀점부
- 이형상 목사가 친히 점검하지 않고 당시 군관(軍官)으로 있는 사과(司果) 홍우성(洪遇聖)을 대신 보내어 점검하도록 하고, 이형상 목사는 문서상으로 확인하고 있다. 점검 결과의 내용은 차귀진(遮歸鎭) 조방장 김국준, 방군(防軍) · 기병(騎兵) · 보병(步兵)이 20명이며, 그 외로 군기도 점검하였다.
이 그림에는 차귀진의 모습뿐만 아니라 차귀진 소속의 당산봉수, 우두연대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으며, 참나무가 있는 모동(毛同) 지경과 우자장(宇字場) 목장이 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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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명월조점(明月操點)
1702년(숙종 28) 11월14일 명월진 성정군의 훈련모습과 말을 점검하는 그림 |
▲명월조점
- 명월진성 내의 천(泉) · 별고(別庫) · 서별창(西別倉) 등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고, 주변의 지형을 상세히 표기하였다. 즉, 우둔촌(牛屯村)과 수류천촌(水流川村) 민가의 위치, 만조봉수(晩早烽燧) · 마두연대(馬頭烟臺) · 배령굴(排令窟) · 월계과원(月溪果園)의 위치가 표기되어 있다.
또한 명월진의 해안변에 위치한 논 등도 상세히 그려져 있다. 명월진 내에 말을 점검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원장(圓場)과 사장(蛇場)을 설치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부기(附記)의 내용은, 지방관겸중군(地方官兼中軍) 제주판관 이태현(李泰顯), 명월진 조방장 강세건(姜世建), 성정군(城丁軍) 412명, 목자 · 보인 185명, 말 1,064필, 창곡의 곡식 3,300여 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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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명월시사(明月試射)
1702년(숙종 28) 11월14일 명월진성에서 활쏘기 시험장면을 그린 그림 |
▲명월시사
- 앞의 ‘명월조점’ 그림과 흡사하며 우면(右面) 교사장(敎射長) 17인, 활 쏘는 사람(射員) 141명이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주위에 대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명월진성은 본래 왜구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하여 중종 5년(1510) 장림(張林) 목사가 축조하였고 그후 선조 25년 이경억 목사가 개축하였는데, 둘레가 3,050척, 높이가 9척, 3문(동 · 서 · 남)이 있으며 문 위에는 루(樓)를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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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애월조점(涯月操點)
1702년(숙종 28) 11월14일 애월진의 군사와 말을 점검하는 그림 |
▲애월조점
- 1702년(숙종 28) 11월 14일 순력(巡歷) 및 숙소. 애월진(涯月鎭)의 군사와 말을 점검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애월진 · 애월리 · 고내봉수(高內烽燧) · 애월연대(涯月烟臺)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으며, 애월진 내에는 군기 등의 건물 다수와 말을 점검하기 위한 사장(蛇場) 및 원장(圓場)이 설치되어 있다.
부기(附記)의 내용은 제주판관, 조방장 남해거(南海擧), 성정군(城丁軍) 245명, 목자와 보인이 181명, 말 1,040필이다. 애월진은 둘레가 549척이며, 성문은 남쪽과 서쪽에 있었다. 그리고 1개 봉수와 2개 연대를 관장하였는데, 고내봉수 · 애월연대 · 남두연대(南頭烟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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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제주조점(濟州操點)
1702년(숙종 28) 11월15일 제주읍성에서 성정군의 조련과 제반사항을 점검하는 그림 |
▲제주조점
- 가중군(假中軍: 임시로 임명된 중군) 이항, 성장(城將) 4명, 치총(雉摠) 2명, 민호 7,319호, 전답 3,357결, 성정군(城丁軍) 1,236명, 창고의 곡식 30,0400여 석, 향교의 제기(祭器) · 제복(祭服) · 서책(書冊), 군기(軍器) 등을 일일이 점검하고 있다. 당시 제주목의 편제는 읍 3리, 동면 34리, 서면 53리, 남면 5리 등 3면 95리이다.
일반적으로 지방 관아의 소재지를 읍치(邑治)라고 한다. 읍치의 주위는 대개 성곽으로 둘러있고 그 안에 거의 모든 관아시설이 배치되어 있다. 이렇게 행정적인 목적으로 축성된 성곽을 읍성(邑城)이라고 한다. 이 그림에는 관덕정(觀德亭) · 객관(客館) · 옥(獄) · 향교(鄕校) · 서원(書院)의 위치 그리고 서과원(西果園), 중과원(中果園), 남과원(南果園), 북과원(北果園), 별과원(別果園)의 위치 등 제주읍성 안의 관아건물의 위치가 상세하게 표기되어 있어 당시 읍성 안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뿐만아니라 제주읍성 밖 남쪽에는 모흥혈(毛興穴), 연무정(演武亭), 사직단(社稷壇)이 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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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제주사회(濟州射會)
1702년(숙종 28) 11월18일 실시된 활쏘기 장면 그림 |
▲제주사회
- 사회(射會)는 활쏘기를 하는 모임으로 활 쏘기 전에 관덕정 앞에 정렬해 있는 모습이다.그림 아래 설명에 따르면 절제사인 이형상 목사를 비롯해 중군제주판관 이태현(李泰顯), 대정현감 최동제(崔東濟), 정의현감 박상하(朴尙夏), 군관 15명, 주무(州武, 고을의 武學으로 제주목의 무인 출신) 23명, 그리고 각청 관리들이 정렬했다. 활시위를 당기는 사람들 모습에 긴장감이 감돌고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들을 표현해 전체적으로 생동감이 느껴진다. 상세하게 그려진 제주읍성의 관아건물들도 흥미롭다.
관덕정 동 북쪽으로 우연당, 영청, 상아, 망경루가 자리하고 이들 건물로 드나드는 외대문, 중대문, 내대문, 후문이 차례로 나타나며 애매헌, 군관청, 군기고 등도 표시되어 있다. 관덕정 동남쪽으로 제주판관과 관련된 관아건물인 관청, 목관, 목관으로 통하는 외대문, 내대문, 군관청, 민가들의 모습들도 눈길을 끈다.
제주목사의 동헌으로 통하는 탐라포정사(耽羅布政司)가 있고 그 위에 성문을 여닫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매달려 있다. 본래 이 사장(射場)에는 건물이 없었는데, 1448년(세종 30) 제주목사 신숙청(辛淑晴)이 창건하였다.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보는 것이다’라 하여 ‘관덕(觀德)’이라 이름하였다. 관덕정이란 현판은 처음에는 안평대군이 썼다고 하나 현재의 현판은 이산해(李山海)의 글씨이다.
현재 관덕정 내 두 개의 대들보에 가로 650㎝, 세로 50㎝의 작자와 연대 미상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두보취과양주귤만헌(杜甫醉過楊州橘滿軒)」, 「상산사호(商山四皓)」, 「홍문연(鴻門宴)」, 「진중서성탄금도(陣中西城彈琴圖)」, 「대수렵도(大狩獵圖)」, 「십장생도(十長生圖)」 등이 그것이다.
1702년(숙종 28) 11월17일 제주목사가 관하 각 관리의 치적(治績)을 심사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36. 제주전최(濟州殿最)
▲제주전최
- 제주목사인 절제사가 관덕정 중앙 상좌에 사모를 쓰고 엄숙히 좌정해 있는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그 오른쪽에 주안상이 놓여 있고 두 시녀가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있다. 절제사의 정면에는 장고, 북 등 악기를 연주하는 기녀들과 사당패가 앉아 있고, 그 좌우에 판관, 두 고을 현감, 군관과 많은 고을 무사들이 앞에 주안상을 놓은 채 나란히 앉아 있다. 관덕정 앞 계단과 뜰 좌우편에는 사령들이 깃발을 들고 도열해 있으며, 관덕정 좌측 높은 깃대에는 수(帥)자기가 깃봉 없이 게양되어 있다.
제주읍성의 관아 건물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그림 왼쪽의 종(鐘)이 매달려 있는 작은 건물은 ‘탐라포정사(耽羅布政司)’이다. 성문을 여닫는 시간을 알릴 때 이 종을 울렸다고 한다. 전면에는 긴 집채[回廊]만이 그려져 있고 관덕정 중앙 정면에는 물림폭이 그려져 있다.
관덕정 북쪽으로 우연당(友蓮堂) · 영청(營廳) · 상아(上衙) · 망경루(望京樓)가 보이며, 이들 건물로 드나들기 위한 외대문(外大門) · 중대문(中大門) · 내대문(內大門) · 후문(後門)이 차례로 나타나 있으며, 애매헌(愛梅軒) · 군관청(軍官廳) · 군기고(軍器庫) 등도 표시되어 있다. 관덕정 동남쪽으로는 제주판관과 관련된 관아 건물인 관청(官廳) · 목관(牧官), 목관으로 통하는 외대문 · 내대문 · 군관청(軍官廳), 그리고 민가(民家)의 모습이 표시되어 있다.
당시 제주지방의 군대는 속오군(束五軍)과 마대(馬隊)로 구분되는데, 속오군은 3부(部) 6사(司) 30초(肖)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림 아래의 기록에 따르면 각 부의 책임자 천총(千摠), 각 사의 책임자 파총(把摠), 각 초의 책임자 초관(肖官), 마대(馬隊)의 책임자 별장(別將), 각 진(鎭)의 조방장(助防將), 성장(城將) 8명, 교련관(敎鍊官) 13명, 기패관(旗牌官) 94명, 도훈장(都訓長) 유학(幼學) 양유혁(梁維爀), 각면(各面) 훈장(訓長) 8명, 각면 교사장(敎射長) 22명, 강유(講儒) 302명, 사원(射員) 322명, 모두 800명이 넘는 인원이 모두 당시 전최(殿最: 공적 심사)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전최(殿最)'란 '포폄(褒貶)'이라고도 한다. 법적으로는 경관(京官)에게도 적용되는 것이었으나 대개 지방관의 경우를 일컬었다. 지방관이란 백성을 직접 대하는 관원으로서 그 잘잘못이 백성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므로 임명과 감독에 신중을 기하는 한편 나쁜 지방관은 파면되기도 했던 것이다.
고려 우왕(禑王) 때는 전야(田野)의 개간, 호구(戶口)의 증가, 부역의 균등, 사송(詞訟)의 간결, 도적의 근절 등 5가지 면에서 지방관의 성적을 판정하였다. 조선시대에는 1392년(태조 1) 이미 지방관의 고과법(考課法)을 제정하여 실적을 선(善) · 최(最) · 악(惡) · 전(殿)의 4등급과 여기에 세밀한 등급을 붙여 조사·보고하도록 하였다. 그 후 기준은 다소 달라졌으나 이상의 사실을 근거로 하여 관찰사가 지방관의 실적을 몰래 조사하여 매년 6월 15일과 12월 15일에 이를 중앙에 보고하였다. 이렇게 하여 재직 중에 받은 성적은 승진에 큰 영향을 주었으나 이 제도도 후기에 들어와서는 전최과정에 정실이 개입되는 일이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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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제주양로(濟州養老)
1702년(숙종 28) 11월19일 제주목에서 이형상 제주목사가 동헌 앞에서 양로연을 실시하는 광경 |
▲제주양로
- 동헌 뜰을 중심으로 망경루(望京樓), 마방(馬房), 귤림당(橘林堂), 애매헌(愛梅軒), 동헌의 모습이 상세하다. 이형상 목사는 북쪽을 향하고 있으며 제주목의 80세 이상 183人, 90세 이상 23人, 100세 이상 3人의 남녀노인은 남쪽을 향하고 있다. 정의현감, 전 대정현감 문영후, 전찰방 정희랑, 군관 15인원, 三學 등이 참여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들은 이형상 목사의 오른쪽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의 수령은 노인들을 초청하여 경로의 잔치를 베푸는 양로연을 먼저 하는 것이 중요한 직분이었다. 양로연을 베풀 때에는 귀하고 천한 것을 가리지 않고 노인들의 좋은 말을 들어 정치에 반영했다. 노인을 공경하고 어진 이를 존경하는 것은 조선왕조를 다스리는 근본이었다. 제주도의 경우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어사가 양로잔치를 베풀었다. 이형상 제주목사에 이르러서는 정기적으로 봄가을로 나누어 양로잔치를 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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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병담범주(屛潭泛舟)
1702년(숙종 28) 11월19일 이형상 제주목사가 취병담(翠屛潭), 곧 용연(龍淵)에서의 뱃놀이모습을 그림 |
▲병담범주
- 취병담(翠屛潭)에서의 뱃놀이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이곳은 영주십경(瀛州十景)의 하나로 용연야범(龍淵夜泛)이라 하여 휘영청 밝은 밤에 용연을 찾아와 밤 뱃놀이를 즐겼다. 그래서 취병담에는 다른 명승지와 마찬가지로 제주목사 · 제주판관 · 유배인들이 풍류를 즐기다가 바위나 절벽에 유람의 흔적을 남긴 기념비적인 마애명(磨崖銘)들이 전해지고 있다.
이형상 자신도 이곳을 상당히 인상적으로 여겼던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이형상 제주목사와 관련된 마애명은 확인되지 않으나, 그의 학문적 재능이나 풍류로 볼 때 마애명을 남겼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시일이 지나면서 마멸 또는 탈락된 것이 아닌가 싶다.
취병담에서 남쪽을 향해 바라본 산의 지형이 상부 중앙의 백록담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그려져 있고, 취병담에 배를 띄워 놓고 기녀들과 놀이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대천(大川) 우측에 민가의 모습, 용두암 부근에서의 목욕을 즐기는 광경, 연대 등이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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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건포배은(巾浦拜恩)
1702년(숙종 28) 12월20일 향(鄕)품(品)문(文)무(武) 300여 명이 관덕정 앞과 건입포(健入浦)에서 임금이 있는 북쪽 즉 조정을 향해 배례하는 모습과 제주의 각 마을에 있었던 신당(神堂)의 일부가 불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
▲건포배은
- 향품문무(鄕品文武) 300여 명이 관덕정 앞과 건입포(健入浦)에서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즉 조정에 배례하는 모습과 제주의 각 마을에 있는 신당(神堂)이 불타는 모습을 그렸다. 산의 형세 및 하천의 흐름이 상세하다.
배례장면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유난히 서늘해보이는 한라산과 성 밖 각 마을에 있는 신당(神堂)들이 불타고 있는 장면이다. ‘건포배은’과 ‘신당 파괴’의 두 사건을 한 도면에 표현한 것으로 그림 아래에는 불에 타 없어진 신당이 129곳, 훼손된 사찰 5곳, 285명의 무격(巫覡, 남녀무당)을 농업을 본업으로 삼도록 조치하였다고 적고 있다.
제주도는 일찍부터 북방신화의 바람길과 남방문화의 물길이 휘감기면서 교차하는 중심에 위치한 1만8천 神들의 고향으로 신화와 전설이 가득한 신비의 섬이다. 신당과 사찰을 불태우며 미신타파를 위해 노력한 것을 알 수 있다. 실제 당시 도민들의 정서는 이와 반대였겠지만 이형상 목사는 신당혁파 자체를 커다란 업적으로 생각하며 신당 및 사찰을 훼손한 것에 대해 도민들이 커다란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형상의 <남환박물>과 <탐라계록초>에 이 두 사건의 내용과 전후가 밝혀져 있다.
건포배은은 이형상 목사가 조정에 장계를 올려 허락을 받음으로써 그동안의 민폐가 상당히 줄어든 것에 대해 국은(國恩)을 입었다 하여 북쪽을 향해 절을 올린 것이다.
<남환박물>에 의하면 건포배은이 후에 향품문무 등은 이형상 목사를 찾아가 인사를 올리며 국은에 감격한 백성들은 그 은혜와 덕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드러내기 위해 섬의 어리석은 몇 가지 풍속을 스스로 금하겠다고 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음사(淫祀, 부정한 귀신에게 지내는 제사)였던 것이다. 결국 신당 파괴는 이형상 목사와 향문문부들과의 만남이 있은 다음날의 사건이었다. 두 사건을 한 도면 안에 표현한 것은 당시 제주도민들의 정서는 정반대였겠지만 이형상 목사는 신당혁파 자체를 큰 업적으로 여겼기 때문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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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비양방록(飛揚放鹿) 1702년(숙종 28) 10월11일 사슴을 생포하고 1703년 4월28일 비양도로 옮겨 방사(放飼)하는 그림 |
▲비양방록
- 이 그림은 무엇보다도 제주목 서면의 53개 마을의 위치가 한 장에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제주읍성의 서문(西門)에서 명월진에 이르는 지형을 담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해안의 지형, 봉수, 연대의 위치, 애월진과 명월진, 토성(土城)의 위치가 잘 드러나 있다.
그 외 병문천(兵門川, 屛門川) · 대천(大川) · 무수천(無數川, 無愁川) · 정자천(亭子川)의 흐름이 보인다.
그리고 비양도에 대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음을 그림으로 강조하고 있다.
부기(附記)의 내용은 1702년 10월 11일 사슴을 생포하고 1703년 4월 28일에 비양도에 방사(放飼)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1703년(숙종 29) 보길도에서 한라산을 바라보면서 호연한 마음으로 거문고를 타며 책을 읽는다는 뜻으로 <한라장촉(漢拏壯囑)>과 짝을 이루는 그림.
▲호연금서
41. 호연금서(浩然琴書)
- 좌측에 원당망(元堂望), 우측에 사라망(沙羅望)이 표기된 것으로 보아 중앙의 진성(鎭城)은 화북진성(禾北鎭城)에 해당한다. 몇 척의 배가 별도포(別刀浦)로 들어오고 있는 모습이 표현된 것으로 보아, 당시 육지 지역과의 주요 통로로 조천포(朝天浦, 朝天館浦)와 함께 별도포가 널리 이용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 제주도와 주변국가
제주는 지정학적으로 동북아시아의 해상 중심에 위치한 섬이다.
따라서 제주도 인근을 항해하는 선박들은 1950m의 한라산을 항해의 이정표로 삼고 동중국 해상을 자유롭게 왕래하였다. 그러나 배를 타고 항해를 하는 사람들은 언제 뜻하지 않은 바람을 만나는 불안한 상황의 연속이었고 제주부근을 항해하는 선박이 제주도에 표류하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오늘날과 같이 선박과 항해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에 표류민을 통한 주변 지역에 대한 정보 획득은 국가의 입장에서 매우 유용하기도 했다. 공식적인 국가의 외교사절단을 제외하면 다른 나라의 이국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표류를 통한 것이었다.
제주인들은 고기잡이, 미역채취, 제주도 연안 항로를 이용한 물품운반, 감귤, 말 등의 공물운반, 과거응시나 장사를 위해 육지로 가다가 중국, 일본, 유구, 안남 등지에 표류하였고 다른 나라 사람들도 제주도에 표도하는 사례가 많았다.
- 디지털 탐라순력, 탐라문화관에서(『제주의 역사와 문화』)
***** 참고
경향신문 윤민용 기자가 <탐라순력도> 각 장면을 미술사적으로 조명한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전문사 석사학위 논문인 ‘탐라순력도 연구’에서
역사적 자료로써의 가치는 높이 평가 받지만 ‘그림’으로 접근한 경우는 드물다고 하면서 “이렇다 할 준법이 사용되지 않고 채색과 선묘로 경물, 경관을 표현했으며, 평면적이고 과장된 측면이 강하다”며 “이는 서양화법까지 받아들일 정도의 중앙화단과는 차별화되고, 양식적으로도 개성적 표현이 두드러진다”고 분석했다. 회화적 특징으로는 기록화, 회화식 지도, 실경산수화의 요소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졌다.
제작배경은 임진왜란 · 병자호란을 겪은 당시 사대부관료와 지역 사림들이 국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면서 지역의 역사 · 문화를 글 · 그림으로 남기려는 기록 욕구의 시각적 결과물로 분석된다. 그러나 사대부관료 이형상의 주문에 의해 제작된 화첩은 유교적 질서에 편입된 이들과 편입되지 않은 이들을 철저히 구분, 서민에 대한 묘사는 배제하고 자신의 치적을 강조하는 공적행사 위주로 구성하고 장면을 배치했다.
논문은 탐라순력도의 의의를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한 기록화이자 지역의 개성적 조형의식이 반영된 시각기록물”이라고 주장했다.
또 윤기자는 “제작 300년이 지났지만 지방 기록화라는 이유로 학계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겨져 상세한 분석, 해석은 물론 성격, 제작배경 등에 관한 규명은 이뤄지지 않은 실정”이라고 했다.
- 2010년 8월 2일,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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