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채용신의 또 다른 이면, 백납병

Gijuzzang Dream 2011. 5. 6. 04:49

 

 

 

 

 

 

 

 

 채용신의 또 다른 이면, 백납병

 

 

 

 

 

채용신과 사진술

 

석지 채용신(石芝 蔡龍臣, 1850~1941) 극세필로 사물을 정확히 묘사한 것으로 정평이 있다.

어느 면에서는 흡사 사진을 찍은 듯이 세밀하여 천연색 사진을 보는 느낌이다. 사진이나 극사실주의 회화가 화면 전체를 표현하는데 비하여 그의 그림은 한국화적인 여백을 두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채용신은 초상화의 대가다. 사진이 영정을 대신하여 그의 화업이 사양화 되기도 하였으나, 동시에 사진의 혜택을 톡톡히 입은 부분도 적지 않다.

사진술은 1880년대에 1 수신사 김기수의 화원 자격으로 따라간 김용원(金鏞元, 1842~?)이나 종두법을 들여온 지석영(池錫永)의 형으로 문인화가였던 지운영(池雲永, 1852~1935), 역시 서화가로 이름을 날린 황철(黃鐵, 1864~1930), 김규진(金圭鎭, 1868~1933) 등에 의해 우리나라에 전파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모두 전통적인 서화를 배웠던 서화가였음에도 그들의 화업이 연계되어 새로운 기술을  도입한 것이다. 사진술이 상층 사회에 정착될 무렵 채용신은 무관직으로 관직생활을 하며 지식층과 교류하였고, 50 초에는 이미 어진화사(御眞畵史)가 되었다. 당시 고종은 채용신이 그린 자신의 어진은 물론 기로소 당상(堂上)인 삼승상(三丞相), 13정경(正卿)을 보고 눈에 주인공을 알아맞출 정도로 핍진한 경지에 도달했었다. 이처럼 정치한 실력을 갖춘 채용신이 만년에는 종종 사진을 이용하여 초상화를 그려내었다. 1911년에 그린 매천 황현의 초상은 그의 사후에 사진을 보고 추사(追寫)한 것이며, 만년에 초상화를 그릴 때는 사진을 이용해 그린 것이 다수였다. 노년에는 ‘채석강도화소(蔡石江圖畵所)’라는 일종의 공방을 열고 사진을 보내면 초상화를 그려주는 주문제작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인물을 그리는데 있어 시작은 마치 사진을 보는 극사실적으로 그리다가 나중에는 사진매체를 직접 응용하였고, 사후에는 사진을 통해 자신의 유작에 대한 증거를 후대에 남겼다. 채용신의 아들 상묵이 종로에서 우미관이란 사진관을 경영함으로써 1943 석지의 유작 전시회가 사진으로 남아 우리에게 그의 족적을 생생히 기억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사진은 당시로서는 새로운 기술이었다.

기술을 예술형식에 접목시킨 것은 그의 탁월한 필력이 밑받침되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예술적 재능에는 다른 이면이 있다. 일견에 확인할 있는 작품이 바로 백납병 2폭이다. 부산박물관에 기증된 채용신의 백납병 2폭은 순정효왕후께서 부산의 가문에 하사한 것으로, 채용신의 진취적인 신문화 수용과 폭넓은 회화 취미를 감지할 있다.

 

 

 

순정효황후의 애장품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1894~1966) 피난길에서도 다른 진보(珍寶)를 마다하고 병풍을 품에 안아 부산으로 갔다. 병풍이 바로 채용신이 그린 것으로, 채색이 맑고 선명한 것이 특징이다. 원래는 열두 폭에 60점이었는데, 현재는 9점의 그림만이 남아 있다.

 

채용신과 해평 윤씨 집안과의 인연은 1900년으로 거슬로 올라간다.

당시 태조어진모사의 주관화사로 발탁된 채용신은 모사할 어진을 함경도 영흥의 준원전(濬源殿)에서 직접 이안해온 도제조 윤용선을 만나게 된다. 채용신의 작업을 가까이서 지켜본 윤정승은 부친상으로 관직을 그만두고 향리로 돌아간 그를 천거하여, 충남 정산군수의 보임을 맡게 했다.

채용신에게는 정산군의 군수직이 그의 마지막 실직이어서인지 이후의 그림에 ‘정선군수’라는 직함과 ‘정산’이라는 호를 자주 사용했다. 아마도 백납병은 황실의 명에 의해 제작되었을 수도 있으나, 이와 같은 배려에 대한 보답으로 더욱 정성껏 그린 것이라고도 있다.

 

지금은 60점의 그림이 뿔뿔이 흩어져 9점의 그림만으로 병풍의 전모를 추정할 수밖에 없지만 흥미로운 화목들이 눈에 뛴다.

은일풍취(隱逸風趣)를 담은 <춘강선유도〉나 〈누각산수도〉, 미불(米芾, 1075~1151)을 배웠던 고극공(高克恭, 1248~1310) 필치를 따르는 〈미법산수도〉등 전통적인 화의(畵意)를 극세필 극채색으로 그린 것이 있는 반면 청대 해상화파(海上畵派)의 산뜻하고 화려한 감각이 물씬 풍기는 〈소과호접도〉, 그리고 평안과 장수, 집안번창 등의 기복적 바람을 담은〈화조도>, 〈묘두응도〉, 〈수하유견도〉등이 그것이다. 가운데 <소과호접도>에서 보이는 배추와 열무, 장식적인 절지화의 선택과 배경 없이 확대하여 감각적인 색채로 처리한 방식들은 조선 말기~20세기 유입된 해상화파의 영향으로 여겨진다.

 

19세기에는 중국의 양주화파(揚洲畵派)가 막을 내리고 상해를 중심으로 해상화파가 새롭게 부상하였다. 장웅, 조지겸(趙之謙, 1829~1884), 임웅, 임백년, 오창석 해상화파들은 강한 채색과 파격적인 주제, 간결한 구도 등을 표방하며 새로운 감각의 화조화를 창출하였다. 특히 연지에 호분을 섞은 혼합 안료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탁하면서도 독특한 효과를 나타내는 방식은 양주화파의 이선을 계승한 조지겸 회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또한 <묘두응도> 〈수하유견도〉에서는 고희와 장수, 액막이와 풍요를 상징하는 전통적 제재를 선택했으나 나뭇가지의 일부를 과감히 잘라버리는 화면구성방식과 수채화와 같은 선염법에서는 근대적 취향이 돋보인다. 이처럼 백납병 일련의 작품에서 엿보이는 무심했던 일상적 제재의 선택, 과감히 잘라내는 구도, 강렬한 색채의 직접적 전달 등은 모두 신사조를 받아들이고 사진술을 응용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채용신의 백납병

 

지금까지 채용신은 초상화에 있어 극세필과 음영법으로 사실성을 추구했을 아니라 화조영모화나 산수인물도 역시 ‘구륵진채법(鉤勒眞彩法)’, ‘극세극채법(極細極彩法)’ 등으로 화려하고 섬세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인 평가는 백납병의 그림들로 인하여 수정하지 않을 없게 되었다. 그림에 나타난 남종화의 미법산수 화풍이나 소재와 색채에 있어서 중국의 근대적 화파로 평가되는 해상화파과의 친연성, 풍속화적 제재와의 결합 등이 그것이다.

 

채용신은 여전히 극세필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나, 조선 말기 유행하던 여러 화목과 당시 화단에 풍미하던 새로운 화풍을 인식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이다게다가 지금까지 민화 계열로 분류되던 채용신의 화조영모와 병풍도 궁중회화로 재평가 받을 여지가 마련된 셈이다.

여기에 가지 하자면, 백납병의 수요층에 관한 재고 또한 필요하게 되었다.

 

백납병은 조선 말기에 특히 유행하였다. 현존하는 백납병은 유숙(劉淑, 1827~1873), 안건영(安健榮, 1841~1876) 조선 말기 문인적 취향을 보여주는 작품 말고는 작자 미상의 민화적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병풍은 순정효황후가 1906 동궁계비로 입궐한 것을 축하하거나 1907 황후로 등극한 것을 경하하기 위해 제작된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 남아 전해지고 있는 9점의 작품들이 장수와 풍요, 번창과 평안 기복과 축하의 의미와 맥이 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를 통해 백납병의 수요층이 궁중까지 확대되었음을 있다.

 

현재 기증자의 전언에 의하면 아버지로부터 12 병풍에 60점의 그림이 그려진 완형의 백납병을 받았다고 한다. ‘활짝 진달래 사이로 나비가 정겹게 날고, 사립 나무 아래 어미 개가 새끼들 먹이고, 매화에 제비 깃드는데 개구리가 올챙이 노니는 바라보고, 누각에서 담소하는 선비로부터 여인이 가마로 강을 건너려는 풍경까지… 산수에서 기명절지나 화조영모 여러 풍경들이 두루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마치 사진첩처럼.

 

기증자는 백납병을 폭으로 잘라 두루마리 형식으로 보관하다가, 집에 귀한 손님이 때마다 장씩 오려 선물했다고 한다. 60 장이 넘는 낱낱의 그림이 인연 따라 병풍으로 만들어졌다가, 인연 따라 흩어진 내력을 생각하면 마음속에 애틋함이 생겨난다.

이곳저곳 흩어진 그림들이 언젠가 다시 인연 따라 곳에 모여 다시금 권의 역사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세월은 흘렀으나 채용신의 그림이 빛바랜 사진이 되지 않고 가치가 선명해지는 것은, 새로운 것을 없이 펼쳐낸 오롯한 작가 정신 때문이 아닐까.

 

- 글, 사진: 이현주,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 문화재감정관실 감정위원 

- 사진: 부산박물관

-  2011-04-15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백납병(百衲屛)

백납병은 다양한 화제를 한 폭의 그림에 세로로 나열하여 그린 것을 말한다.

원형, 방형, 선형 등 갖가지 모양의 작은 화면형식에 화훼, 괴석, 화조, 어해, 영모, 산수, 인물, 기명절지 등 다양한 주제를 담은 그림들을 그리거나 붙여 병풍으로 만든 것이다.

백납병에 동원된 그림은 대작이 아니므로 화가는 비교적 편안하게 자신의 장기를 드러낼 수 있었으며, 설사 잘못 그렸더라도 대체하기가 손쉬울뿐더러 그림 가운데 잘된 것을 골라 구성할 수도 있었다. 또 화면과 소재가 다양했기에 아기자기한 병풍으로 꾸밀 수 있어 여성취향적이었다.

 

 

 

 

 

 순정효황후(조선 마지막 임금 순종의 비 윤비) 백납병풍 찾았다

당대 최고 채용신 作 12폭 60점 그림 중 9점 발견

 

 

조선시대 마지막 임금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 윤비가 소장했던 12폭 백납병풍 중 일부 화폭

(위)채용신, 소과도, 견본채색, 26.5×17.6㎝, 부산박물관

(중간)채용신, 화조도, 견본채색, 부산박물관

(아래)채용신, 미법산수도, 견본담채, 33.8×15.0㎝, 부산박물관

 

 

 

100여 년 전 조선시대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 윤비가 소장했던 백납병풍이 발견돼

눈길을 끌고 있다.

병풍은 조선 말기 초상화 화가로 유명했던 채용신 선생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채용신 작품으로는 보기 드문 산수화 등을 담고 있어 작가 연구의 새로운 사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윤비 6·25 때 해운대 피란 당시 선물로 준 것 후손이 보관

향토사학자 주영택씨 확인

가마골역사연구원 주영택(71) 원장에 따르면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윤비가 부산 해운대구 우1동 장지마을에 2년간 머무른 적이 있었는데

윤비가 자신을 돌봐준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이 12폭 병풍을 건넸다는 것.

이후 병풍은 그의 딸이 서울로 시집갈 때 딸에게 건네졌으며

딸이 병풍에 있던 60점의 그림 중 9점의 그림을 소지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주 원장이

그림을 입수하게 됐다. 이후 주 원장은 소지자에게 병풍의 부산박물관 기증을 적극 독려하고 있다.

병풍 소지자 김남숙(72 · 경기도 성남시)씨는 아버지로부터 병풍을 건네받은 뒤

운반이 어렵자 대형 병풍을 폭마다 잘라 두루마리 형식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이후 김씨는 집에 귀한 손님이 올 때마다 그림 한 장씩을 오려줘 현재 그림은 9점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

한때 국내 굴지의 대기업 회장이 이 병풍 그림을 집 한 채 값을 주고 사겠다는 뜻을 전해오기도 했다고 한다.

병풍에 담긴 그림 60점은 꽃, 개, 풍경 등 제각각 다른 소재를 다룬 산수화, 화조화,

풍속화 등으로 구성돼 있으며 각각 다복과 풍요, 장수의 의미를 담고 있다.

병풍은 1907년께 순종 즉위 후 동궁계비 윤비가 순정효황후가 되는 것을 축하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백납병풍은 병풍 한 폭에 여러 장의 그림을 마치 옷을 깁듯이 붙여 놓았다고 해 붙은 이름이다.

병풍은 김씨에게 건네지기 전까지는 해운대 장지마을에서 잔치 때마다 마을사람들이 돌아가며

펼치는 '물건'이기도 했다. 윤비가 자신의 안방에 뒀던 병풍으로 좋은 의미가 다 담겨 있다고 하자

마을사람들이 경사가 있을 때마다 빌려가곤 했다는 것.

부산박물관 이성훈 학예연구사는

"일단 9점의 그림 중 채용신의 호 '석지'라는 낙관이 찍혀 있는 3점의 작품은

채용신의 작품이 맞을 것으로 보이지만 나머지 6점에 대해서는 좀 더 정밀한 연구가 필요하다"면서

"백납병풍의 경우 온전하게 보전된 게 거의 없고, 채용신은 조선 말기 김은호와 함께

초상화로 당대 최고였던 화가로 초상화 이외 작품은 많지 않아 이번 병풍 그림은 연구의 가치가 있다"

고 평가했다.

석지(石芝)는 물론 석강(石江), 정산(定山) 등의 호를 사용했던 채용신(1850~1941)은

조선 말기 화가로 100여 점의 초상화, 10여 점의 화조화를 남겼다.

고종의 어진(御眞)을 비롯해 흥선대원군, 최익현 등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전통양식을 따른 마지막 인물화가이며 전통과 서양화법을 조화시켜

세부묘사와 원근, 명암 등을 표현하였다.

'운낭자 27세상(雲娘子二十七歲像)', '최익현 초상' 등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 부산일보, 2009-05-20

 

 

 

 

 

 

 

 

<더보기>

 

채용신의 백납병(百衲屛) : http://blog.daum.net/gijuzzang/8515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