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듬어보고(전시)

[국립중앙박물관] 내소사 괘불

Gijuzzang Dream 2011. 5. 11. 05:03

 

 

 

 

 

 

 

 초대형 불화 내소사 괘불

 

 

 

ㅇ전시명칭: 내소사 괘불
ㅇ전시기간: 2011. 5. 10 ~ 8. 28.
ㅇ전시장소: 국립중앙박물관 서화관 불교회화실

 

 

 

 

 

1700년, 삼베바탕에 채색, 995×914cm, 보물 제1268호

 

 

 

 

부처님오신날(5월10일)을 맞아

전북 부안군의 내소사 괘불(보물1268호)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5월10일부터 8월 28일까지 전시한다.

내소사(來蘇寺)측의(전북 부안군 소재) 협조를 얻어 높이 995cm 괘불을 특별 공개한다.

 

 

 

 

괘불은 큰 재(齋)나 초파일 같이 대중이 많이 모이는 날 법당 앞 당간지주에 거는 의식용 대형 불화이다.

불교의식(佛敎儀式)은 부처의 힘으로 질병이나 기아, 전쟁, 천재지변 등과 같은 현실의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행해졌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불교의식 가운데 죽은 이의 영혼이 극락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기원하는

천도의식이 왕성하게 이루어 졌다.

대표적인 천도의식으로는 49재(四十九齋), 예수재(豫修齋), 수륙재(水陸齋), 영산재(靈山齋) 등이 있다.

이러한 의식을 행할 때에 멀리서도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대형의 괘불(掛佛)을 걸었다.

평소에는 둘둘 말아 함에 넣어 두다가 장엄한 의식을 갖춰 마당으로 내온다.


조선시대의 괘불은 거대한 규모 때문에 제한된 공간에서 전시할 수밖에 없다.

이에 국립중앙박물관은 괘불의 규모를 고려하여

서화관 불교회화실에 높이 약 15m의 괘불 전시공간을 마련하여

매년 부처님 오신 날에 맞추어 테마전을 개최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2006년 “법당 밖으로 나온 큰 불화, 청곡사 괘불” 이후 그 일곱 번째 전시이다.


내소사는 전북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능가산(楞伽山)에 위치한 사찰로 선운사의 말사이다.

고찰임에도 불구하고 사찰의 역사를 추적할 수 있는 비문이나 사적비는 전하지 않아

내소사의 연혁을 파악할 수 있는 기록자료는 부족한 편이다.

단지 <읍지(邑誌)>와 <지리지(地理志)> 등 문헌을 통해 원래 '소래사(蘇來寺)'로 불리던 사찰이

어느 시기엔가 개칭되어 현재의 내소사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내소사 괘불은 높이 10.5m, 폭 8.17m의 그림이다.

1700년 6월에 그려진 것으로 화면구성은,

중앙의 석가모니부처를 중심으로 보살과 여래가 타원형으로 에워싼 7존 형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즉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한 원형구도에 좌우대칭으로 권속(眷屬)들을 배치하였다. 

 

 

이 괘불은 등장인물의 광배 좌 · 우측에 붉은색 테두리를 마련하고

여기에 금색 안료로 각각의 이름을 써 넣어 조선후기 괘불 도상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내소사 괘불은  18세기 괘불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18세기 괘불의 양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중앙의 석가모니 부처를 보살과 여래가 둘러싼 모습을

청색 홍색 금빛의 아름다운 색채를 베풀어 화려하게 그린 걸작이다. 

 

<내소사 괘불>은 정방형에 가까운 삼베 바탕에 그려졌다.

가로 폭이 좁고 세로로 확장된 화폭을 사용하는 일반 괘불과 비교했을 때

가로와 세로 폭이 약 20cm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다소 이례적인 비율이다.

 

이 괘불은 몸의 윤곽선을 둥글게 처리하여 곡선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보살이 몸을 3번 꺾은 삼곡(三曲)자세를 표현하고,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 화려하게 채색하는 등

뛰어난 작품이다.

 

 

그림의 주존은 오른손을 길게 내리고 왼손은 복부 앞으로 들어 올려

첫째와 셋째 손가락을 마주 짚고 있는 석가모니불이다.

원형 두광에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는 신광을 배경으로

본존의 좌우에는 대칭적으로 각 2위씩 총 4위의 보살이 있으며,

두광 좌우측에는 동일한 도상의 여래상이 배치되어 있다.

각 인물은 다소 넓고 여유있는 공간에 본존을 중심으로 원형의 구도를 이루고 있다.

 

조선후기 괘불 가운데는 존상의 명호를 화기에 몇몇 작품이 전하는데, <내소사 괘불>도 이 중 하나이다.

특히 이 괘불은 등장인물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있도록

각 도상의 광배 좌우측에 붉은색 테두리(方題)를 마련하고 금색 안료로 각각의 이름을 써 넣고 있다.

방제의 위치는 일정하게 통일되기보다는

존상의 좌측 혹은 우측에 존상을 가리지 않는 기준에 입각하여 쓰여졌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살펴보면

영산교주석가모니불(靈山敎主釋迦牟尼佛), 문수대보살(文殊大菩薩), 보현대보살(普賢大菩薩),

관음대보살(觀音大菩薩),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증청묘법다보여래(證聽妙法多寶如來),

극락도사아미타여래(極樂導師阿彌陀如來)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도상은 『법화경(法華經)』에 근거할 뿐만 아니라 당시에 간행되었던 영상회 의식집의 거불편에

거명되는 인물들과도 일치하여 불교의식집에 근거한 도상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중앙에 주존으로 「영산교주 석가모니불(靈山敎主釋迦牟尼佛)」,

좌우 협시보살은 연꽃에 여의와 관인을 지닌「문수대보살(文殊大菩薩)」, 「보현대보살(普賢大菩薩)」,

그리고 다음 열에 정병(淨甁)을 들고 있는「관음대보살(觀音大菩薩)」,

관인(官印)을 들고 있는 「세지대보살(勢至大菩薩)」이다.

마지막 열 상단에 대칭으로 나타나는 두 여래는 「증청묘법 다보여래불(證廳妙法多寶如來佛)」,

「극락도사 아미타여래불(極樂導師阿彌陀如來佛)」를 배치하였다.

증청묘법다보여래는 <법화경>에서 다보불이 석가의 설법이 묘법임을 증명한 것에서,

극락도사아미타여래는 아미타여래가 극락으로 천도한다는 의미에서 부른 이름이다.

이처럼 석가모니불, 다보여래, 아미타여래로 구성된 삼신불은 영산회상도의 근거가 되는 <법화경>이나

다른 불상이나 불화 등에도 흔히 보이지 않은 예로 괘불화의 도상과 의식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내소사의 괘불의 주제가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한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한 영산회임을 명확하게 보여주며,

<내소사 괘불>은 영산회 거불(擧佛) 절차를 도상화한 첫 번째 사례로

의식에 거는 불화의 도상 변모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석가모니불과 다보불, 아미타불이 이루는 삼불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불교의식이었던 영산회 의식절차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식에는 ‘거불(擧佛)’이라는 절차가 있다.

거불은 신앙의 대상이자 의식도량의 교주로 삼고자 하는 불보살의 이름을 불러

도량에 강림하길 청하는 것이다.

영산회 거불 편에는 나무영산교주 석가모니불, 증청묘법 다보여래, 극락도사 아미타불, 문수ㆍ보현대보살,

관음ㆍ세지대보살 등의 불보살이 요청된다. 이들은 영산회상에 모여든 8만여 명을 대표하는 존재들이다.

증청묘법다보여래는 『법화경』「견본탑품」에서 다보불이 석가의 설법이 묘법임을 증명하였다는 데서

유래한 명칭이며, 극락도사아미타불은 극락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로

많은 천도의식의 성격을 포용하게 되는 영산회 의식의 변모를 암시한다.

이전 괘불과 달리 새로운 도상을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18세기 괘불화의 출발점을 시사해준다.

 

야외로 이운된 괘불에 재현된 불보살은 의식도량에 강림하기를 바라며 봉청하는 존상과 명호와 일치한다.

청각과 시각의 일치된 조우는 영산회를 재현하려는 의식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

 

 

<내소사 괘불>을 만든 사람들 

 

괘불의 하단에는 이 괘불을 조성한 연대와 봉안처, 시주한 내용과 시주자를 기록한 ‘시주질(施主秩)’,

괘불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을 기록한 ‘연화질(緣化秩)’로 구성되어 있다.

화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73명으로 시주자 49명과 승려 24명이다.

 

바탕시주자 곽선흥(郭善興, 1628-1697),

공양시주자 곽수흥(郭秀興, ?-?), 곽기흥(郭紀興, 1636-1716) 등 3사람이 주목된다.

포산(苞山) 곽씨 족보(현재 현풍 곽씨 족보)에 의하면,

이들은 형제 사이로 만경 북면 송방촌(현재 김제 만경읍)에 대대로 거주하였다.

 

“이들의 시조(始祖) 곽경(郭鏡)은 고려 인종 연간에 등과해 문하시중을 지냈으며

후에 포산군(苞山君)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는 중국(關西 弘農人)에서 우리나라에 왔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의 원래 고향은 밝혀지지 않으나 17대손인 곽대관(郭大寬)이 전라북도 임실에서

만경 북면 송방촌으로 이사를 하면서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괘불을 조성하기 위해 시주를 한 3형제는 포산 곽씨 20대손인 곽무철(郭武哲, 1590-?)의 아들이다.

곽무철은 부안 김씨와 혼인하여 선흥, 수흥, 기흥 등 세 아들과 두 명의 딸을 두었는데

큰 아들인 선흥은 남평 문씨, 김해 김씨와 혼인하여 천주(天柱)를 낳았다.

둘째아들 수흥은 보성 오씨와 결혼하였는데 후손이 없는 것 같다.

셋째 아들 기흥은 교하 노씨, 천안 전씨와 혼인하여 제태(齊泰)를 낳았다.

사위는 두 명이다.

족보에 의하면 이들은 대체로 만경현 일대의 유력한 양반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과 내소사와의 인연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이들 삼형제의 어머니가 부안 김씨인 점이 주목된다.

나머지 대시주자들 가운데 이들 3형제와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이들은 족보에서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조선시대 양반들의 친족 관계가 부계뿐 아니라

결혼을 매개로 한 인척들과도 긴밀하게 얽혀 있었던 만큼, 대시주자들 중 일부는

이들 3형제와 친족 또는 인척 관계를 맺고 있어 함께 시주하여 조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첫째아들 선흥은 정축년 7월6일(1697) 유명을 달리하여

<내소사 괘불>의 화기에 영가(灵駕)로 부기되어 있다.

따라서 이 괘불은 3년 전 먼저 사망한 선흥의 나머지 일족들이 망자의 천도를 기원하기 위해

함께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후 3년은 명부계에서 다시 새로운 세계로 태어난다는 불교적 관념과 성리학적 가례와도 일치한다.

 

이 외에도 화기에는 영가(灵駕), 또는 양위(兩位)로 기록된 인물이 9명이 부기되어 있어

이들도 함께 천도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 괘불은 먼저 사망한 선흥의 나머지 일족들이

망자의 천도를 위해 1700년(조선 숙종 28) 6월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불화를 그린 화원(畵員)은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영남과 호남지역에서 활동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관직을 받은

수화승 천신(天信)을 비롯하여

승선(勝先), 각융(覺融), 새형(璽浻), 난익(鸞翼), 해안(海眼), 국견(國堅) 등 7명의 화승이 참여하였다.

특히 수화승 천신은 17세기 후반 전라도지역을 중심으로 비단 불화 제작에 국한되지 않으며

불상 조성의 동참 화원, 불상의 개금 화원, 서적 개판을 위한 서사(書寫) 화주(化主)에 이르는

다양한 영역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불상과 불화의 조성, 두 영역에서의 활약은

조각승과 화승의 역할이 명확하게 구분되기 이전인 17세기 승장의 모습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 배영일, 서화관 불교회화실

-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와의 대화, 제244회(2011년 5월18일)


- 정명희, 서화관, 불교회화실

-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와의 대화, 제246회(2011년 6월 1일)  

 

 

 

 

 

<내소사 괘불의 도상적 특징>

내소사 괘불은 화면 하단에 불화를 만든 내력을 적은 ‘화기(畵記)’가 있다.

이에 따르면 이 괘불은 강희 9년(1700) 경신(庚申) 6월에

곽선흥, 곽수흥, 곽기홍 등의 형제가 능가산 내소사에 봉안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괘불은 가선대부 천신(天信)을 비롯한 7명의 화승(畵僧)이 함께 그렸다.

크기는 높이 9.95㎝, 폭 9.15㎝로 거의 정방형에 가깝다.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살펴보면 중앙에 서 있는 석가모니 부처를 중심으로

앞 열부터 좌우에 문수대보살과 보현대보살, 관음대보살과 세지대보살,

마지막 열에 증청묘법 다보여래, 극락도사 아미타여래가 배치되어

본존을 둥글게 에워싼 7존형식으로 독특한 구성을 보인다.

 

이러한 등장인물의 구성은 영산회의 ‘거불(擧佛)’ 절차에 나오는

나무영산교주 석가모니불, 증청묘법 다보여래, 극락도사 아미타여래, 문수대보살, 보현대보살,

관음대보살이 모두 등장하여 당시에 간행된 영산회 의식집과

밀접한 관련성을 보인다는 점에 의의를 갖는다.

 

또한 의식집 뿐만 아니라 불교경전인 『법화경』의「서품(序品)」,「견보탑품(見寶塔品)」,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의 내용을 기본으로 하여 제작된 것으로

이 법이 진리이며, 누구나 석가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음을 도상화한 것으로 생각된다.

 

색채는 수화사로 참여했던 천신(天信) 특유의 색채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는 쌍계사 <영산회후불화(1688)>와 흥국사 <영산회후불화(1693)>에서 따뜻한 갈색을 바탕으로

붉은색과 녹색 위에 밝은 청색을 주 포인트로 사용하여 밝고 경쾌한 느낌을 주고,

시점의 다변화를 주었다.

이것은 군집형 구도의 특징인 복잡한 화면을 등장인물들의 구성이나 표정으로도 극복하고,

밝은 청색을 부분적으로 사용하여 그 효과를 극대화한 것이다.

 

<내소사 괘불>에서는 붉은색과 녹색을 주조색으로 하고

푸른색 계통을 더 광범위하게 사용하여 진전된 양상을 보인다.

즉 채도를 8단계로 달리한 청색이 화면 전체에 사용되고 있어

화면은 밝고 가벼운 느낌을 주기 때문에 천신이 의도했던 효과가 더욱 두드러진 것으로 생각된다.

 

내소사 괘불 조성에 참여했던 시주자 집단이다.

괘불의 하단에 기록된 화기(畵記)에 등장하는 시주자 성씨를 살펴보면,

곽씨, 김씨, 박씨, 이씨, 최씨, 임씨, 심씨 등 7개의 성씨로 49명의 시주자가 등장한다.

이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성씨는 포산(苞山) 곽씨이다.

바탕 대시주자가 중추부 곽선흥이고, 공양대 시주자가 곽수흥, 곽기흥이다.

이들은 내소사 괘불을 조성할 당시 김제에 거주하였던 포산 곽씨 형제이다.

 

이 괘불은 조성할 당시 큰아들인 선흥은 이미 무진년 7월6일(1697)에 유명을 달리하였다.

따라서 이 괘불화는 먼저 사망한 선흥의 나머지 일족들이

망자의 천도를 기원하기 위해 함께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 배용일, 서화관 불교회화실

- 국립중앙박물관 제245회 큐레이터와의 대화, 2011년 5월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