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듬어보고(전시)

[서울역사박물관] 한양의 진주 류씨(기증유물특별전)

Gijuzzang Dream 2011. 6. 30. 22:14

 

 

 

 

 

 

 

 2011년 기증유물특별전 한양의 진주류씨(晉州柳氏)

 

 

 

전시기간 : 2011-07-08 ~ 2011-08-14

전시장소 :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

 

 

 

 

 

 

조선시대 한양의 건천동(현재 중구 인현동)에 살던

명문가 진주류씨(晉州柳氏) 문성공파(文成公派, 종손, 류원배)에서는

2004년과 2009년 두 차례에 걸쳐 중종 때 반정공신 류순정(柳順汀)의 초상화,

그의 아들 류홍(柳泓)의 초상화, 그리고 집안 대대로 전해오던 전적류 등을 기증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조선전기 전형적인 공신초상화로 류순정(柳順汀)의 초상화 4점(대형 전신상 2점, 반신상 2점),

아들 류홍(柳泓)의 초상화 1점이 소개된다. 

 

 

 

초상화뿐만 아니라 여러 전적류 30건을 소개하는데  모두 류순정의 후손들이 남긴 것들이다.

<진주류씨 족보>를 비롯하여 <영조대왕어필>, 류엄(柳儼)의 문집인 <화악만록>, 관직일기인 <반대록>,

그가 중국 갔다가 돌아오면서 쓴 <연행연구첩> 등이 대표적이다.  

 

 

 

전시는 네 부분으로 구성하였다.

1)공신초상화, 류순정과 류홍

2)류씨가의 전통이야기

3)선조의 정신을 계승하다

4)옛 초상화 복원과정

 

 

 


 

 

 

 

 

 

 공신초상화 류순정과 류홍

 

조선전기 한양에 살았던 영상(領相) 대감은 어떤 모습을 하고 계실까?
중종 때의 반정공신이자 영의정을 지낸 류순정(柳順汀)의 초상화를 만나보자.

 

조선 연산군~중종 때에 류순정(柳順汀, 1459~1512)은 건천동(현재 중구 인현동)에 살았다.

그는 연산군 대에 이조판서였는데 임금의 폭정을 보다 못해서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거사를 도모했다.

1506년 9월 1일 저녁에 반정을 일으켜 하루아침에 조선의 군주를 갈아치웠다.

다음날에 새 임금이 옹립되었으니 그가 바로 중종이다.

 

폭군을 몰아낸 이는 류순정을 비롯하여 박원종, 성희안 등이었다.

얼마 후 이들은 모두 정국공신으로 추대되었다.

공신들에게는 여러 가지 포상과 예우가 주어졌는데, 그 중 하나는 초상화를 그려서 영구보존하는 것이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류순정의 초상화 4점을 선보이고, 아들 류홍(柳泓, 1483-1551)의 것도 1점 곁들인다.

조선전기에 한 사람을 대상으로 이 정도의 초상화가 남아 있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화면 길이가 173㎝, 전체 길이가 240㎝인 대형 전신상은 실제 사람 크기로 제작된 것으로

초상화 기법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류홍영정(柳泓影幀)류순정영정(柳順丁影幀)   

(왼쪽) 류순정 초상 / (오른쪽) 류홍 초상

 

 

문성공 류순정의 종가에는 류순정의 공신초상화 4점, 아들 류홍의 초상화 1점이 남아 있었다.

 

류순정의 공신초상화 - 대형 전신상(화면 길이 173㎝, 전체 길이 240㎝) 2점, 반신상 2점

류홍의 공신초상화 - 대형 전신상 1점

 

조선시대 공신들에게는 관직을 수여하고 노비를 주었으며 또한 그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물을 세워서 초상화를 그려 넣고<入閣圖形>, 비석을 세워 공을 기록하는 일<樹碑紀功>을 잊지 않았다. 특히 초상화를 그려두는 일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공신초상화는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들이 그렸기 때문에 당대 최고의 품격을 자랑하고 있다.

아울러 후손들은 이를 영정(影幀)으로 받들어 소중하게 간직하면서 돌아가신 조상의 모습으로 여겼다.

 

  

 

류순정의 초상화

 

청천부원군(菁川府院君) 류순정(柳順汀, 1459-1512)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자는 지옹(智翁)이고, 목사 양(壤)의 아들로서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87년 진사로 알성문과에 장원, 전적에 등용되었다. 1491년(성종 22) 북정도원수 허종의 막하로서 야인 정벌에 종군하여 많은 전공(戰功)을 세우고 돌아왔다. 뒤에 평안도 평사로 전임, 연산군 초에 헌납, 부응교, 집의, 사성을 역임, 의주목사를 거쳐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올랐다. 그 후 형조, 공조의 참판을 지내고 평안도 찰사, 이조 참판을 거쳐, 이조 판서에 승진하였다.

1506년(중종 1) 중종 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으로 청주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리고 우의정에 승진, 이듬해 병조 판서를 겸하고, 이과(李顆, 1475∼1507)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정난공신(定難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509년(중종 4)에 좌의정, 이듬해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로 군부를 지휘, 이어 직접 경상도 도원수로서 출정하여 난을 평정하였다. 1512년 영의정이 되어 재직 중 죽었다. 시호는 무안(武安), 뒤에 문정(文定)으로 개시(改諡)되었다.

 

한편, 세종 때의 명신 황희 정승은 부정부패를 척결해야 할 대사헌의 지위에 있을 때도 청탁을 했고, 정승 시절에도 뇌물을 받았다.(조선왕조실록) 그럼에도 역사는 그를 청백리라 기록했다.

그리고 공신들 중에는 뇌물을 밝히는 이가 많았는데, 중종 때 훈구파 유순정 역시 너그럽고 부드러운 성품의 소유자로 명성을 얻었지만 속은 음흉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뇌물 수레가 꼬리를 물고 이어져, 값비싼 개꼬리 털로 모자를 엮어 쓸 정도였다."

- 이자(1480~1533)의 '음애일기(陰崖日記)'

 

 

 

류순정의 시

 

(1)영남루(嶺南樓)

 

徒倚湖山萬里天

依然身世卄年前

數村水竹牛鳴外

一蔟雲嵐鳥去邊

夢斷落花江館外

詩成斜日柳橋烟

白頭詞客偏懷舊

奈此樽傾月萬筵

 

호산에 의지하여 만 리 하늘 바라보니

신세가 여전히 20년 전이라

두어 마을의 수죽엔 소 울음이 미치고

한 무리 구름과 산 기운에 새가 이른다.

꽃잎 떨어진 강 집 밖으로 꿈은 다하고

지는 해 나무다리에서 시를 짓는다

백발의 시인은 옛일을 회상하니

달은 자리에 가득한데 이 술잔을 어찌할까

- <여지도서> 밀양

 

 

(2)교귀정(交龜停)

 

交龜停上倣乾坤

不覺霜華點鬢根

一水宮霜風自激

千岩圖書日將昏

詩因寫景窮飛鳥

淚爲傷懷讓斷猿

南地己銷雙雙堠

月明今夜宿何村

 

교귀정에 올라앉아 하늘땅을 즐기는데

문득 깨달으니 귀밑머리 흰빛이로다

한 가닥 흐르는 물은 바람과 더불어 노래하고

즈믄(일천)바위는 그림 같건만

날은 점점 저물어만 가누나

내가 시로서 경치를 읊으매 날 새는 보금자리 찾아 헤매고

나의 눈물로 회포를 되씹으매 잔나비마저 그 울음을 멈추도다

남쪽 길 두 이정표는 이미 어두워 그 모양 사라져만 가는데

아, 달도 밝은 오늘밤사 어디에서 머무를 것인고.

- 문경새재

- 류순정의 스승, 점필재 김종직(佔畢齊 金宗直, 1431-1492)

 

 

(3)산거즉사(山居卽事)

 

雨霽黃梅晩色明

開簾獨坐對岩扃

林間鳳尾蕨芽老

園裏蠶頭菁子成

素月臨牕宵代燭

淸泉漱石曉聞笙

閉門白髮從蕭颯

閑摘松肪養性靈

 

4월 황매 비는 개이고 저문 빛이 밝은데

발을 열고 홀로 앉아 바위 문을 대한다.

숲 사이 봉황꼬리 같은 고사리순이 커가고

동산 속엔 누에머리 같은 무씨가 익어가네.

밝은 달이 창에 들어 촛불을 대신하는데

맑은 샘물 돌을 씻어 새벽의 생황 소리 같다.

문을 닫고 흰 머리를 바람에 맡겨 두고

한가로이 송진 따며 마음을 닦는다.

- <속동문선> 권8


    

 

중종반정(中宗反正) 이란?

1506년(연산군 12) 박원종, 성희안, 류순정 등이 조선왕조의 제10대 임금인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제11대 중종을 즉위시킨 사건

 

연산군은 훈신 · 척신계와 궁금(宮禁)  세력의 강력한 후원 아래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들을 제거했다. 그 후 연산군의 비호를 받은 궁금 세력들은 훈신 · 척신계와 대결하여 정치 및 경제계에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기도했다. 그 결과 연산군과 그의 측근인 궁금(宮禁) 세력은 1504년(연산군 10)에 갑자사화를 일으켜 훈신계열을 철저하게 숙청하고 잔존의 사림파마저 제거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지배층 내부의 불만을 야기시켰고, 특히 연산군 자신은 방종한 생활로 인해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사게 되었다.

 

반정에 가담한 주도세력 훈신계열인 류순정(柳順汀.1459~1512), 박원종(朴元宗. 1467~1510), 성희안(成希顔. 1461~1513) 등이 모의해 1506년 9월1일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신윤무(辛允武),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박영문(朴永文) 등과 함께 무사들을 모아 궁금 세력의 대표자인 임사홍(任士洪) · 신수근(愼守勤) 등을 제거한 다음 궁중에 들어가 성종의 계비인 정현왕후(貞顯王后)의 허락을 받아 폭정을 일삼던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새로운 임금 중종이 추대되었다. 조선 최초로 신하의 주도로 임금을 갈아치운 일대 사건이었다.

 

 

 

류순정의 전신 초상화 (1)

 

 

초상화에는 류순정의 7대손 식(寔)이 지은 제(題)와

인조 대의 명신 김상헌이 짓고 9대손 선(縇)이 쓴 찬(撰)이 있다.

 

류순정의 7대손 식(寔)이 지은 제(題)

秉忠奮義決策翊運靖國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菁川府院君 贈諡成烈公 柳順汀畵像 七代孫副護軍 寔謹書

(병충분의 결책익운 정국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청천부원군 증시성렬공 류순정화상 칠대손 부호군 식 삼가 씀)

 

 

김상헌은 병술년(1646) 유상(遺像)을 알현하고는 찬(撰)을 지어 주었다.

그는 당시 “조선이 개국한 이래로 공신의 가문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200여 년을 거치면서 제대로 보전한 자는 드물다”고 하면서 류씨 자손들 중에는 현명한 이가 많이 나올 것이라고 하였다.

- <청음집> 권15

 

成烈公畵像讚撰(성렬공 화상찬)

有顯成烈 厥勳攸崇

傳神惟肖 晳䫉明瞳

端莊詳昚 尙見英風

逖溯遐觀 孰爲比隆

其殆慕伊尹之志

而懷霍光之忠者歟

安東金尙憲撰

九代孫縇謹書

 

높게 드러나신 성렬공이여 그 공훈 드높도다.

초상 모습 매우 닮았으니 명석하신 모습과 밝은 눈동자

단정 의젓하고 상세 신중하여 뛰어난 풍모 엿보인다.

아득히 살펴본들 누가 공과 겨루리오.

이윤(伊尹)의 의지 사모하고 곽광(霍光)의 성심 품었으리.

안동 김상헌 지음

9대손 선 삼가 씀

 

 

류순정 초상화는 얼굴과 전신의 정면이 70% 보이게 하면서 오사모를 쓰고 있다.

또 이에 수반되는 의자, 발판까지 같은 방향을 취하고 있어서 왼쪽 옆면이 많이 드러난 모습이다.

바로 16세기 전반기 초상화의 전형인 것이다. 

  

얼굴은 위엄이 있으면서도 매우 온화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눈동자는 생생하여 살아있는 듯하고 눈썹과 수염은 올마다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관복에는 금색의 화려한 공작(孔雀) 흉배가 있으며 허리에는 서대(犀帶)를 둘렀다.

 

 

 

겉옷인 단령의 트임 사이로는 빨간 철릭과 녹색 답호가 겹겹이 드러나고,

속에는 주머니와 접이부채 등의 장신구도 살짝 엿보인다.

아래쪽 발판 위에는 작은 화문석을 깔았고, 바닥에는 채색 비단((彩顫)을 깔았다.

이 초상은 화폭이 연폭으로 결봉(結縫)되어 있으며 화폭에는 좌우에 찬문(撰文)이 적혀 있는데,

좌측에는 ‘성렬공화상찬(成烈公畵像贊)’이라 하여 김상헌의 찬문을 9대손인 선(縇)이 적어 넣었으며,

우측에는 7대손인 식(寔)이 써넣은 찬문이 있다.

 

초상은 사모에 청포단령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좌상으로서

안면의 취각은 좌안7분면이며, 공수자세를 취하고 있고,

바닥에는 채전이 깔려 있는데 이 채전은 조선 중기 공신상에서는 최초로 볼 수 있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초상화는 현재 몇 점 전해지지 않는 16세기 초 조선 공신 초상화의 전형인 동시에 공신도상의 전개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초상화이다.

 

공수(拱手) 자세나 의자에 방석을 붙들어 맨 형태, 단령(團領)의 트임 사이에 첩리와 내공(안감)이 겹겹이 나타나는 점 등에서는 적개공신상과 연접한 양식적 특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밑에 깔린진 채로 처리된 채전의 등장과 청포단령의 외곽선이 적개공신상보다는 부드러워지고

족좌대(足座臺)가 원근법에 위배되어 있지 않은 점 등은 정사공신상과의 유사점을 보여준다.


또한 류순정 초상은 안면표현법에서 먼저 옅은 살색의 안색을 기조로 하여 이목구비를 갈색기 나는 선묘로서 규정하고 있으며, 입술색은 엷은 적색을 띠어 후대의 검붉은 자주색과는 대조를 이룬다.

안면 전체에는 살풋이 음영이 깔려 있는데, 원공(귓바퀴무늬) 역시 옅은 갈색 선으로 처리하였다.

눈의 윗 꺼풀은 검은 묵선, 아랫 꺼풀은 갈색 선으로 아주 조심스럽고도 자연스럽게 형용하였다.

또한 얼굴의 돌출한 부위에 홍색의 선염기가 약간 들어 있어 중기 초상화의 기법을 예고해주며,

류순정의 마마 자욱 역시 피부결과 일체를 이루며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사출(寫出)해 내었다.

 

초상화의 단령부분은 후대에 가채(加彩)하여 원형이 손상되어 있으나 아마도 숙종 년간에 9대손인 선(縇)이 김상헌의 화상찬을 적어 넣을 무렵 화폭의 보존을 위해 보채(補彩) 과정을 거친 것으로 짐작된다.
류순정 초상은 현재 몇 점 전해오지 않는 16세기 초기의 초상화로 조선조 중기 공신상의 가장 전형을 보여주는 동시에 바닥에 채전이 등장하는 최초의 예로 회화사적으로 가치가 크다.

 

 

 

류순정의 전신 초상화 (2)

오랜 세월 보존되어 오면서 많이 훼손되었는데 장기간 보존처리과정을 거친 결과 이제는 열람이 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며 보존처리 과정 중에서 최종단계로 족자를 만들어 제작하는 공정만 남겨두고 있다.

  

 

이 초상화는 얼굴과 신체를 약간 옆으로 틀어서 자연스럽게 입체감을 살렸다. 소위 7분면이라고 하여 정면을 70% 보이게 하였으며, 얼굴과 신체뿐만 아니라 수반되는 오사모를 비롯하여 의자, 발판까지 같은 방향을 취하여 왼쪽 옆면이 많이 드러난 모습이다.

 

 

얼굴은 위엄이 있으면서도 다소 온화하게 표현되어 있다. 눈동자는 생생하여 살아있는 듯하며, 눈썹과 수염은 올마다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아청색 단령에는 금색의 화려한 공작 흉배가 있으며, 허리에는 서대(犀帶)를 둘렀다. 겉옷인 단령의 트임 사이로는 붉은 직령(直領)과 녹색 철릭(帖裏)이 겹겹이 드러나고, 속에는 주머니와 접이부채 등의 장신구도 살짝 엿보인다. 아래쪽 발판 위에는 작은 화문석을 깔았고 바닥에는 채색 융단을 펴놓았다.    

 

 

 

 

류순정의 반신초상화

 

전신상에 비하여 작지만 상대적으로 그리기 수월하고 후손들이 가정에서 곁에 두고서 보기 편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한 점은 숙종 대 도화서 화원인 윤상익이 그린 것이고, 다른 한 점은 작자미상이다.

 

 

초상화 왼쪽에 “이 사람으로 모사하게 하라(以此人模寫)”고 되어 있고 그 안쪽에 ‘尹商翊’이라는 성명이 기재되어 있다. 윤상익은 숙종 대에 활동한 화가였는데 1688년(숙종 14) 5월 태조어진을 모사할 때 주관화사(主管畵師)로 참여한 인물이다.

초상화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붉은 반점이 보인다. 아마도 병환으로 인해 생긴 흔적인 듯하다. 여기에서 바로 조선 초상화의 사실성을 알 수 있다. 주인공의 얼굴을 그릴 때 내면의 성격이나 인품 등을 근엄하게 표현하면서도 피부병으로 인한 흉터는 속이지 않고 그렸던 것이다.

 

 

영정함

도화서 화원이 그린 초상화는 오래도록 보관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동나무 등의 재질로 함을 만들고 겉에는 옻칠을 하여 견고하게 제작하였다.

 

류순정 영정함(141.0×20.2×11.3㎝)은 초상화의 크기에 비례해서 매우 규모 있게 제작되었다.

통상적으로 함의 잠금장치가 가운데에 1개 있는데 류순정 영정함은 양쪽을 한 개 씩을 더하여 세 개를 만들었다. 초상화를 안정적으로 보존하기 위한 방법이었던 듯하다. 

   

 

 

친환경적인 방충 및 살충제 사용

 

 

 

또한 영정함 안에는 초상화를 오래도록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하여 방충 및 살충을 위한 약재를 넣어두었다. 약재를 넣어두는 주머니는 통상 ‘향낭(香囊)’이라고 하며 그 제품은 ‘의향(衣香)’이라고 한다.

 

 

의향에는 영릉향(零陵香), 감송향(甘松香), 단향(檀香), 정향(丁香) 등의 다양한 성분의 약재가 들어가고, 또 살충효과가 뛰어난 ‘부용향(芙蓉香)’에는 목련(木芙蓉)을 재료로 만들었으며 기다란 봉의 모양을 하고 있다.

의향은 방충효과가 있고, 부용향은 살충 효과가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류순정의 영정함에서 나온 의향(衣香) 천연약재를 처음으로 공개한다.

 

 

 

 

류홍(柳泓, 1483-1551)의 초상화

 

- 류홍(류순정의 아들) 초상

 

 

 

류홍(柳泓, 1483-1551)이 1506년 아버지인 류순정(柳順汀, 1459-1512)과 함께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성공으로 이끈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책록(冊祿)된 것을 기념하여 제작한 초상화이다.

 

그러나 <중종실록>을 보면 아버지인 류순정과 달리

류홍의 경우는 국가에서 입각도형(入閣圖形)하였다는 기록은 없는 점으로 보아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제작한 초상화는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의 주인공인 류홍(柳泓, 1483-1551)은 류순정의 아들이며, 그의 자는 자연(子淵)

류홍은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혀 능하였으며 1511년 무과에 급제하여 충청도, 경사도, 전라도 등지의 절도사를 거치며 무관으로서의 요직을 두루 맡았다.

1506년(중종 1) 아버지 류순정을 따라 반정군(反正軍)으로 활동하였다. 아버지가 중종반정을 주도하여 1등공신이 되자 그는 아들이었던 관계로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었다.

이후 정주목사, 충청도병마사, 경상우도병마사, 전라도수군절도사, 북병사 등 변경의 장수직을 두루 역임하고 말년에는 훈련원도정을 거처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2품의 품계에 올라 1544년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졌으며 1551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초상화는 류홍이 청단령(靑丹領)을 입고 오사모(烏紗帽)를 쓴 채 교의(交椅)에 앉아 있는 모습을 그렸다.

얼굴은 유순정의 영정보다는 약간 어두운 살색이 칠해져 있으나

이목구비는 선묘(線描)만으로 규정되어 시대적으로 고식(古式)을 보여준다.

수염은 옅게 나 있어 젊은 모습을 보여주는데,

눈매와 다문 입가는 미장부(美丈夫)로 일생을 용맹한 무장(武將)으로서 살아갔던 그의 이력을 실감케 한다.

 

 

청포(靑袍)의 주름 처리는 선염기(渲染氣) 없이 선묘(線描)만으로 처리되어 있지만

부친의 초상화보다는 주름 선을 물결치듯 율동감 있게 처리하여 화가의 장식적인 욕구를 보여준다.

 

 

가슴에는 흉배 없이 각대만 차고 있다.

이 초상화가 그려지기 1년 전인 1505년(연산군 11)에 이전의 중국 명나라 홍무예제(洪武禮制)를 따라

1품에서 3품까지만 흉배를 달게 한 제도를 1품에서 9품까지 확대하고

사슴, 돼지, 거위, 기러기 등 조선적인 문양을 사용하게 한 바 있다.

 

그런데 이 초상화에서는 4품 이하의 직급은 흉배를 달지 않는 홍무예제에 따라 표현된 점으로 보아

연산군대의 흉배제도는 중종반정으로 말미암아 1년 만에 원상복귀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아버지인 류순정 영정에는 단령, 오사모, 표구 등에 여의두문(如意頭紋)이 표현되어 있으나,

이 영정의 경우는 이런 문양 없이 단순하게 표현되어 있다.

 

 


자세는 좌안7분면(左顔七分面)으로

왼쪽의 어깨가 오른쪽의 어깨에 비하여 기울기가 완만해진 것을 볼 수 있다.

옷의 외형이 둥글게 부풀어 오르고 약간 각이 진 선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옷주름은 정두서미묘(釘頭鼠尾描)로 간결하게 표현한 점은

조선 초기 초상화에 전형적으로 보이는 위엄과 권위의 표현이다.

겉옷인 단령의 옆은 트여 그 사이로 녹색 직령과 자색 첩리(帖裏)와 붉은 내공(內工)이 내비치고 속에는 주머니와 접이부채 등의 장신구가 엿보인다.

전체적으로 이 초상화는 형태나 색상이 단순하며 다소 간결하게 표현되어 있다.

 


바닥에는 류순정 영정과 달리 중국식의 채전(彩氈)이 깔려 있지 않다.

채전의 사용은 직급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림의 왼쪽에는  ‘분의정국공신가의대부동지중추부사겸오위도총부부총관훈련원도정진산군류홍화상(奮義靖國功臣嘉義大夫同知中樞府事兼五衛都摠府副摠管訓鍊院都正晋山君柳泓畵像)'라고 쓴 표제가 있다.

'육대손부호군 식 근서(六代孫副護軍 寔 謹書)'라고 6대손인 식(寔)이 썼음을 말해준다.


표구는 원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아울러 초상화를 보관하는 영정함과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넣은 향과 향봉지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초상화 보관에 관한 연구에 많은 참고가 된다.

초상화를 접어서 보관한 흔적이 뚜렷하고 접혀진 부분의 채색이 탈락된 점이 아쉽지만, 비교적 보관 상태가 양호하다.


<류홍 영정>은 본격적인 공신상은 아니지만,

초상화의 질적인 면에서 볼 때 단정하면서도 강직한 무관의 성격을 잘 묘출해 낸 가작(佳作)으로서 공신도상과의 형식상의 차이를 비교해 볼 수 있는 자료적 가치와 함께 묘사력도 인정된다.

 

 

 

 

 

 

 

 한양의 진주 류씨(晉州 柳氏)

 

한양의 진주류씨(晉州 柳氏)는 중종반정 공신 류순정(柳順汀, 1459-1512)을 배출한 명문가이다.

류순정은 연산군~중종 대의 인물로 연산군 대에 임금의 폭정을 보다 못해서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거사를 도모하여 하루아침에 조선의 군주를 갈아치웠다. 이후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었고 영의정에 올랐다.

류순정 이후 진주류씨들은 대대로 서울에 살면서 명가의 전통을 이어나갔다.

 

류순정 이래 진주류씨 문성공파는 대대로 가문의 전통을 유지하였다.

관직에 오른 인물이 끊이질 않았으며 공신의 후손이기에 국가로부터 '○○君'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가문의 전통이 면면히 이어지면서 영조 대에는 충신이자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던 류엄을 배출하였다.

류엄은 공조, 형조, 예조판서 그리고 오늘날의 서울시장인 한성부판윤에 올랐다.

그는 판서로서 정무에 최선을 다하고 주청부사(奏請副使)로 중국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또한 집안에서는 독자로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여 국왕과 대신들을 감동시켰다.

류씨家의 전통은 이후 한말과 일제강점기를 지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고려말 이래의 명문가

진주류씨(晉州柳氏) 류순정의 가계는 고려말~조선초기 이래 서울의 명문가이다.

여말선초의 인물인 5대조 진산군(晉山君) 류구(柳玽)는 세종 대에 대제학으로 청백리에 선정된 인물이며, 그 아들 겸(謙)도 청백리였다. 조부인 자해(子偕)는 세종 대 영의정을 지낸 심온의 사위이며 세종과는 동서지간이 된다.

 

 

봉군(封君), 왕의 친족과 같이 예우 받고

류순정은 중종반정으로 정국공신이면서 동시에 청천부원군(菁川府院君)으로 봉군(封君)되었다.

바로 임금의 친족에 준하는 예우를 받는 것이다. 이후 후손들은 규정에 따라 2품에 오르게 되면 류순정처럼 군호(君號)를 받을 수 있었다. 아들 류홍이 진산군(晉山君)이 된 것을 비롯하여 자손들 8명이 각각 봉군되었다.

 

 

삼촌과 조카가 정승이 되다(叔侄拜相)

류순정은 4형제 중 3째이다. 류첨정(첨정), 류안정(안정), 류순정, 류효정(효정) 순이다.

첨정의 아들은 류부(柳溥)인데 그는 연산군 대에 문과에 급제하고 중종 대에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오른 명신이다. 삼촌은 영의정, 조카는 좌의정으로 숙질이 모두 정승에 오른 것이다.

- 임하필기(林下筆記)

 

 

임금님도 감동한 부자간 효자

류순정의 11대손은 영조 때 예조판서를 지낸 류엄(柳儼)이다. 그는 국가에 충성한 명신이기도 하였지만 부모에게 효도를 다한 인물로도 널리 알려졌다.

 

 

 

청양군(菁陽君) 류엄(柳儼, 1692-1752)

자는 숙첨(叔瞻), 호는 성암(省菴) 또는 화악(花岳)이며, 시호는 혜정(惠靖).

류엄은 독자였는데 불행히도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다. 그렇지만 편모를 봉양하되 지극히 하였다고 전한다.

1723년(경종 3) 문과에 급제한 이후 1727년(영조 3)까지 언관으로 활약하였다. 이후 대사간이 되었다가 1737년(영조 13)네 주청부사(奏請副使)로 중국을 다녀왔으며 뒤에는 공조 ․ 형조판서, 한성부판윤,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그는 중국에 다녀오면서 내내 건강이 좋지 않았다고 하는데 왕세손(의소세손)의 장례 때 밖에서 밤을 새우다가 병이 더하여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1752년 4월에 사망하였다.

영조는 그의 업적을 칭송하고 장례에 소용되는 물자를 후하게 내려주었다.

 

임금께서 전교 내리시길 “청양군 엄은 나를 오래도록 섬기고, 국가를 위해 충성하였다. 내가 항상 가상히 여겼는데, 이제는 세상을 떠났도다. 슬프고 애통하여 무얼 말하며, 내 어찌 차마 침묵하리오.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상례와 장례에 소요되는 물자를 넉넉히 지급하여 내 뜻을 보여주라”고 하였다.

傳曰, 菁陽君柳儼, 事我多年, 爲國之誠, 心常嘉之, 今聞長逝云, 愴惜曷諭? 豈忍默然? 令該曹喪葬等需, 從厚題給, 以示予意.

 

이익정이 말하기를 사람들 모두 효자로서 칭송하니, 누이 없는 독자로서 일찍 아버지를 잃었으며 편모를 봉양하되 정성을 지극히 하였다.

益炡曰, 人人, 皆以孝子稱之, 以無妹獨身, 早喪其父, 奉其偏母, 誠孝篤至.

- <승정원일기> 1082책, 영조 28년 5월7일

 

 

아들 성제(聖躋)는 부친이 엄(儼)이 사망했을 때 성복하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위중하여 의원이 말렸다.

그럼에도 상(喪)에 참여하다가 6일 만에 따라 죽었다.

이에 임금은 “이는 한 집안의 참담한 일이요, 지극한 효도의 일단을 보는 것이다”라고 애통해하면서 장례를 후하게 치르도록 하였다. 이들 부자간의 효도는 조정에 알려져서 임금과 신하들에 의해 칭송되었다고 한다.

 

 

류엄은 관직생활을 하면서도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아 중국 역대 명문 등을 두루 섭렵하여 이를 <성암오편>이란 책으로 편집하였다. 또한 시문에도 능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화악만록>을 저술하였다.

그는 특히 조상대대로 서울에 살면서 공암(구암공원), 궁산 소악루, 선유봉, 잠두봉, 행호(杏湖, 행주산성 앞), 양화진(楊渡) 등 한강변과 주변의 경치에 많은 애착을 지닌 듯하다.

특히 당대 유명시인이었던 사천 이병연과 교류하면서 지은 시도 다수이다.

 

 

(1)공암의 다층탑(孔巖層塔)

孔岩多古意  一塔了洪濛

下有滄浪水  漁歌暮影中

 

공암에 옛 뜻 많으나 탑 하나만 아득하구나

아래에 창랑수(滄浪水) 있으니

고기잡이 노래 저녁 그림자 속에 잠긴다

-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의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서

  사천 이병연(槎川 李秉淵, 1671∼1751)의 제발

 

 

瀟湘烟寺數聲鐘

八景於斯賁餙工

試看孔巖巖上塔

春生窩外影連空

 

소상의 안개 낀 절에 울리는 종소리

팔경에서 아주 뛰어난 곳이네

시험 삼아 공암 위 탑을 바라보니

춘생과 밖의 경치 하늘에 가득하다

- <화악만록(花岳謾錄)> 春生窩十二詠

 

  

(2)소악후월(小岳候月) - 소악에서 달을 기다리며

 

 

月自東蜂出

披襟倚檻頭

光明此世界

鄰有廣寒樓

 

달은 스스로 동봉에서 뜨니

옷깃 걷고 난간 위에 의지한다,

광명이란 이런 세계인가

곁에는 광한루가 있도다.

-  <화악만록(花岳謾錄)>

  

 

<화악만록(花岳謾錄)> 18세기

류엄이 짓고 쓴 문집이다.

내용은 오은고(梧隱稿), 해서록(海西錄), 기영록(畿營錄), 북산록(北山錄)으로 구성되었으며,

시(詩) 부(賦) 만사(輓詞) 등이 실려 있다. 중앙과 지방에서 관직생활을 하면서 지은 시문들이다.    

 

 

<영종(영조)대왕 어필(御筆)> 1733년

영조가 짓고 쓴 글이다. 영조 9년(1733) 12월에 지었으며 “상하가 새 날에 힘써야하되 마땅히 먼저 할 일은 공적인 것이리라. 지금 내가 새해를 위해 축원하니 멀고 가까운 이들은 함께 협조하라(上下礪新日宜先必也公 今余爲歲祝 寅協遠近同)”고 하였다. 

 

 

 

<연행연구첩(燕行聯句帖)> 18세기

류엄이 1737년 중국에 사신으로 가면서 읊은 시를 기록한 책이다. 그는 부사(副使)로 정사(正使) 이철보(李喆輔)와 함께 다녀왔는데 압록강을 지나면서 연경에 이르는 동안 이철보가 먼저 읊으면 그가 화답하는 형식으로 시를 지었다.

 

 

<가장(家藏)> 18세기

류엄이 아버지 류정진(柳挺晉)을 비롯하여 조부인 류관(柳綰), 증조부인 류장운(柳長運)의 묘소에

비석을 세우고 거기에 새겨 넣기 위해서 지은 글을 모은 책이다. 

 

- 왼편은 가장(家藏) / 오른편은 가례(家禮)

 

 

<가례(家禮)> 1920년

각종 제사에 쓰이는 축문 형식을 써놓은 책.

장례 때 절차에 따라 지내는 제사, 그리고 기제, 묘제를 지낼 때 쓰는 축문 등의 양식을 기재하였다.

 

 

<시장초(諡狀草)> 1752년

류엄에 대한 시장초(諡狀草)이다. 시장(諡狀)은 고급관료(정2품 이상)가 사망했을 때 관계자들이 국왕에게 시호의 하사를 건의하기 위하여 해당자의 행적을 적어 올리는 글이다.

류엄에게는 뒤에 ‘혜정(惠靖)’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반대록(鞶帶錄)> 18세기

류엄이 관직생활 중에 적은 일기이다.

1723년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면서 본문이 시작되었다.

이후 1723년 9월까지 관직생활 중에 발생한 정사(政事) 내용을 서술하였다.

제목에 쓰인 ‘반대(鞶帶)’는 명복(命服; 관리의 예복) 위에 두르는 가죽띠를 말하므로,

곧 관직, 벼슬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 ‘반대(鞶帶)’ : 說文 鞶 大帶也. 易 曰〔或錫之鞶帶〕男子帶鞶 婦人帶絲 从革般鞶

 

 

 

 

 

 

 

 

 류순정(柳順汀, 1459-1512), 류홍(柳泓, 1483-1551) 묘역

 

소재지 : 서울시 구로구 오류동 산 43-31 (서울시 기념물 22호)

 

 

 

 

오류철도고가차도에서 경인로를 따라 온수역 방향으로 걸으면 오일뱅크 지나 고가도로 아래 배드민턴 실내 체육관이 나온다. 그 앞에서 삼성 디지털 프라자 오류점 쪽으로 횡단보도를 건넌 후, 골프연습장 옹벽을 따라 걸어가다가 보면 오른쪽으로 접어드는 길을 만난다. 거기에서 ‘수목원1길’, ‘동보아파트 330m’ 등의 안내판을 찾아볼 수 있다. 수목원1길을 걸어 들어가다가 플러스마트 수목원점 앞에서 오른쪽을 바라보면 동보아파트가 보인다. 그 동보아파트 서편에 두 개의 묘역이 있다.

류순정 부부 묘역과 류홍과 그 후손들의 묘역이다.

잔디를 훼손하지 말라는 주의사항이 게시되어 있긴 하지만 안내판도 세워져있고 출입도 자유롭다.

이곳에는 류순정, 류홍의 묘뿐만 아니라 11기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다.

 

처음 묘소가 자리 잡을 때는 북쪽의 주봉을 중심으로 좌청룡, 우백호를 거느리는 주맥(主脈)을 따라 내려오다가 정혈(正穴)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이후 후손들은 차례대로 영역 내에서 적절한 자리를 찾았다. 이곳은 조선시대 도성과 매우 근접한 최고의 명당이었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 경기(京畿)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에 속해 있었는데, 1896년(고종 33) 경기도 부평군 수탄면(水呑面)으로 바뀌고, 1914년 다시 경기도 부천군(富川郡)으로 변경되었다가 1963년 서울시 영등포구로 편입되었고, 1980년 다시 신설된 구로구에 속하게 되었다.

 

원래 이 묘역은 반정공신으로서 영의정의 자리에 있던 류순정이 1512년(중종 7) 53세에 졸(卒)하게 되자 중종이 박원종 졸(卒) 당시의 예에 따라 철조삼일(輟朝三日)하고 장생전(長生殿)의 관곽(棺槨)을 내어줌과 동시에 경기(京畿)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에 속하는 지역인 현재의 구로구 오류동(梧柳洞)과 온수동(溫水洞) 일대 및 경기도 부천시 여월동(如月洞), 작동(鵲洞)에 이르는 약 300여만 평의 땅을 사여(賜與)하면서 조성되었다. 문중 묘역은 그 땅 가운데 명당에 속하는 곳에 조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500년이 다 돼가는 지금은 후대로 오면서 매각 등으로 묘역이 있는 임야 8,000여 평으로 줄어들었으며, 고층아파트와 빌라가 묘역 주변에 들어서 있는 상황이다.

 

묘역의 가장 우측능선 상단에는 중종반정 3대공신(박원종, 성희안, 류순정)이며 영의정을 지낸 류순정(柳順汀)의 묘가 있고, 그 아랫단에 배위(配位)인 안동권씨(安東權氏) 묘가 있다. 좌향은 남향이고 묘역의 입구에는 유순정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류순정의 묘역에서 서남쪽(좌측 능선)으로 약 80여m 떨어진 오류동 산 43-31에는 류순정의 아들로서 역시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책록된 진산군(晉山君) 류홍(柳泓)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류홍 묘의 동쪽 아래로는 다른 곳에서 이장된 그 후손묘 5기가 자리하고 있는데 류홍의 묘역이 최상단에 위치하고 있다.

 

  류홍과 그 자손들의 묘소 전경

류홍의 묘로부터 아래에 온양군수(溫陽郡守) 사필(師弼), 군자정(君資正) 준(浚), 진성군(晉城君) 순(焞), 감찰(監察) 좌승지(左承旨) 중광(重光), 진흥군(晉興君) 식(寔)의 묘가 있다.

 

그리고 이 묘의 중앙에는 류홍 신도비(神道碑)와 류사필 묘갈(墓碣)이 세워져 있다.

좌향은 동향 및 동북향이다.

 

이들의 가계를 살펴보면 조부가 자해(子偕), 부가 양(壤), 순정(順汀) 그리고 순정의 아들 홍(泓), 홍의 아들 사필(師弼), 사필의 아들 준(浚), 준의 아들 중광(重光), 그리고 중광의 아들 순(焞), 순의 아들 시경(時慶), 시경의 아들 식(寔)이다. 

 

 

 

 

류순정 · 류홍 부자 묘역은 서울지역에서 유일한 부자(父子) 2대 공신묘역으로 조성 시기도 16세기 전반으로 상당히 이른 시기에 속한다. 특히 중종반정의 1등공신인 류순정의 묘역은 조성 당시 왕족에게만 내려주던 장생전(長生殿)의 관곽(棺槨)을 사여할 정도로 국가적 관심 속에서 조성되어 공신묘역의 조성방식을 알게 하는 중요자료이다.

 

묘역 내 석물들 또한 매우 정교하고 생동감 있는 조각수법과 강한 개성을 보여주고 있어 이 시대 조각사 연구에 의미 있는 자료가 되며, 문인석 등에 보이는 의복 등은 복식사 연구에 중요자료가 된다. 또한 두 공신들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해 놓은 신도비의 비문은 실록 등 문헌기록을 보완하는 사료가 될 뿐만 아니라 당대에 해서체로 두각을 나타낸 명필 송인(宋寅)의 필체를 느낄 수 있는 서예사적 중요자료이기도 하다.

 

류순정(안동권씨 묘역 포함)과 류홍의 묘역 및 묘역에 부착된 석물중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는 대상을 2004년 서울시기념물 제22호로 지정했으며 진주류씨(晉州 柳氏) 문성공파 종친회가 관리자로 지정되었다.

 

현재 오류동 등 구로지역 일대에 사는 후손들은 거의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매년 음력10월 5일 오전11시에 이곳에 모여 시제를 지내고 있으며, 조만간 명성에 걸맞는 사당을 지을 준비를 하고 있다”고 진주류씨 문성공파 종친회는 밝혔다.

 

 

●류순정(柳順汀 : 1459(세조 5)-1512(중종 7) 묘

 

1세

1459(세조 5)

한양 건천동(현재 중구 인현동) 출생

29세

1487(성종 18)

진사시에 합격, 별시문과 장원급제, 성균관 전적

31세

1489(성종 20)

함경도 평사(評事), 오랑캐들을 귀순시킴

35세

1493(성종 24)

평안도 평사

40세

1498(연산군 4)

사간원 헌납(獻納), 평안도 경차관(敬差官)

43세

1501(연산군 7)

평안도 절도사로 오랑캐를 평정함

45세

1503(연산군 9)

공조참판, 호조참판, 평안도 관찰사

48세

1506(연산군 12)

이조판서, 중종반정(9월), 우의정(10월)

51세

1509(중종 4)

좌의정 겸 병조판서

52세

1510(중종 5)

부산포, 제포(창원), 염포(울산) 등 삼포의 왜란을 진압

54세

1512(중종 7)

영의정, 12월 병환으로 돌아가심

 

류순정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진주. 자는 지옹(智翁). 아버지는 목사 양(壤)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1487년(성종 18)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홍문관 전적으로 등용되었다.

문신임에도 불구하고 무예에 뛰어나 훈련원정으로 있을 때 전라도 지방에 침입한 왜적을 방어했고, 1491년에는 북정도원수(北征都元帥) 허종(許琮)의 참모로서 야인(野人) 정벌에 참여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그 뒤 평안도평사를 거쳐 연산군 초기에는 헌납 · 교리 · 집의 등을 지냈다.

1503년(연산군 9)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다음해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이조참판 · 이조판서를 지냈다.

 

1506년 당시 이조판서로 전 이조참판 성희안(成希顔), 지중추부사 박원종(朴元宗) 등과 함께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출했다. 반정에 성공한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으로 청천부원군(菁川府院君)에 봉해졌다. 영경연사(領經筵事)로 연산군이 폐지한 경연의 부활에 힘썼고, 1507년에는 이과(李顆)의 역모를 다스린 공으로 정난공신(定難功臣) 1등이 되었다. 1508년 평안도 인산 · 강계 지방에 둔전(屯田)을 설치했으며, 이어 좌의정이 되었다. 1510년(중종 5) 제포(薺浦)의 왜인들이 난리를 일으키자 도체찰사로 사건을 처리했으며, 이어 도원수로 출정하여 삼포왜란을 평정했다.

1512년 영의정에 오른 뒤 죽었다. 중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무안(武安)이었으나, 문정(文定)으로 개시(改諡)되었다.

 

 

류순정(柳順汀)의 묘표는 이수형 1면비이다. 이수 전면에는 이무기 한마리가 고개를 틀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표현했고, 주변에 운문을 장식했다. 후면에는 가운데 반달의 형상을 나타내고 주변에 운문을 장식했다.

 

비신 전면에는 “秉忠奮義決策翊運靖國推誠保社 佑世定難功臣大匡補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 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菁川府院 君贈諡柳公之墓”라 새겼다. 그리고 비좌 윗면에는 복련을 장식했다.

규모는 이수 61×24×48cm, 비신 47.5×16×81cm, 비좌 77×47×19cm이다.

동자석은 머리에 쌍계를 하고, 어께 뒤쪽에는 구름모양의 덧깃 운견(雲肩)을 착용하였다. 의복은 3벌을 가장 긴 것부터 안쪽에서 착용 하였으며, 가장 겉에 입은 짧은 옷은 뒷자락에 화문을 조각 하였다. 허리에는 대(帶)를 두르고 앞에서 매듭을 하여 늘어뜨린 것으로 보인다. 양쪽 팔 아래에는 피건(披巾)을 장식적으로 표현 하였다. 규모는 총고 123cm이다.

 

류순정묘 아랫단에는 류순정의 배위(配位)인 안동권씨(安東權氏) 묘(墓)가 부전(祔前)하여 있다.

비신 전면에는 “贈貞敬夫人安東權氏之墓”라 새겼다.

규모는 운수 56×23×43cm, 비신 46×13.5×82cm, 비좌 79×50.5×25cm이다.

 

 

●류순정(柳順汀) 신도비(神道碑)

 

 

류순정 신도비는 팔작지붕 옥개형, 4면비이다. 비좌 윗면에는 복련을 장식했고, 전면에 안상 3구획, 측면에 안상 2구획을 새겼다.

 

비제는 “有明朝鮮國秉忠奮義決榮翊運靖國功臣大匡補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菁川府院君贈諡文定柳公神道碑銘 幷序”이다.

비문은 한성부(漢城府) 판윤(判尹) 진천군(晉川君) 강혼(姜渾)이 찬(撰)하고,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이 서(書)했다.

규모는 옥개석 122×67×56cm, 비신 68.5×21×155.5cm, 비좌 121×72×41cm이다.

 

 

 

진산군(晉山君) 류홍(柳泓) : 1483(성종 14)-1551(명종 6) 묘

 

1세

1483(성종 14)

한양 출생

24세

1506(중종 1)

정국공신 4등에 녹훈

25세

1507(중종 2)

형조 ․ 공조 정랑

29세

1511(중종 6)

무과 급제, 사복지 부정

30세

1512(중종 7)

훈련원 부정, 모친상

33세

1515(중종 10)

모친상 탈상, 훈련원 부정으로 복귀, 제포 첨사

34세

1516(중종 11)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37세

1519(중종 14)

원주목사, 정주목사

46세

1528(중종 23)

충청도 병마절도사

54세

1536(중종 31)

광주목사, 전라도 수군절도사

62세

1544(중종 39)

진산군(晉山君)으로 봉군

69세

1551(명종 6)

동지중추부사, 병환으로 돌아가심

 

류홍의 자(字)는 자연(子淵)이고, 부(父)는 순정(順汀), 조부(祖父)는 양(壤)이다.

중종반정 당시 이를 주도한 아버지를 따라 활동,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책록되고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에 임명되었으며, 형조정랑 공조정랑 등을 거쳐 1511년(중종 6) 무과에 급제, 사복시부정 첨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1544년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지고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 때 금직제강(禁直諸將)의 한사람으로서 위사원종공신(衛社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1547년 훈련원 도정을 거쳐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비신 전면에는 “奮義靖國功臣嘉義大夫同 知中樞府事兼五衛都摠府 副摠官訓練院都正晉山君 諡○○柳公之墓”라 새겼는데, ‘諡’ 다음의 두 칸은 글자가 마모된 것이 아니고, 아마도 시호(諡號)를 받은 뒤에 새기기 위하여 띄어놓은 것이 아닌가 한다.

규모는 이수 54×22×38cm, 비신 46.5×16×84cm, 비좌 78.5×48.5×15cm이다.

문인석은 복두공복을 착용했다. 복두를 매는 끈을 얼굴 옆선으로 내려 턱 아래에서 양옆으로 나눴다. 복두 뒤에는 각(脚)을 양옆으로 올렸고(殿脚), 허리 뒤에는 야자대(也字帶)를 하였다. 규모는 총고 204cm이다.

망주석은 좌측이 운각에 여의두문, 그 아래 염의를 조각하였고, 우측은 주신 일부만 남고 윗부분이 깨어져 나갔다. 규모는 좌측 총고 136cm이다.

장명등은 사모합각지붕의 옥개석을 갖추고 화사석 네 면에 화창을 내었는데 한쪽은 사각의 화창을, 한쪽은 초생달 모양의 화창을 낸 특이한 형태이며 규모는 총고 158cm이다.

 

 

 

●류홍(柳泓) 신도비(神道碑)

 

 

류홍 신도비는 옥개형으로, 진주류씨 묘역에 들어가는 입구 중앙에 류사필(柳師弼) 묘갈(墓碣)과 함께 세워져 있다. 비좌 윗면에는 복련을 새겼고, 전후면에는 세 구획의 안상과 그 아래 당초문을, 측면에는 두 구획의 안상과 당초문을 조각하였다.

비제는 “有明朝鮮國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行奮義靖國功臣嘉義大夫同知中樞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晉山君柳公神道碑銘幷書” 이다.

비문은 좌의정(左議政) 강령군(江寧君) 홍섬(洪暹)이 찬(撰)하고,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이 서(書)했다. “萬曆元年二月日立” 선조 6년(1573) 비를 세웠으며, 규모는 옥개석 103×80×30.5cm, 비신 64×20×141cm, 비좌 113×68.5×54cm이다.

 

 

 


 

 

 

 옛 초상화 복원과정

 

 

초상화의 모사(模寫)

 

처음 그려진 초상화는 시기가 지나면서 차츰 훼손되어 간다.

더구나 영당이나 사당에 모시는 초상화는 더욱 보존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어느 시점이 되면 모사하지 않을 수 없다.

모사(模寫)된 초상화는 주인공을 보지 않고 그린다는 차이가 있을 뿐 최대한 원본과 동일하게 그렸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영당이나 서원 등에서 봉안할 목적으로 모사하는 경우도 있다.

 

류순정과 류홍의 초상화도 영정각에 모시려는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이들 초상화는 2005년 7~8개월을 소요하여 모사되었다.

예전에 쓰던 것과 같은 올의 비단 위에 동일한 물질의 재료를 사용하여

배채(뒷면 칠하기)와 전면 채색을 겸비하면서 완성하였다. - 류순정 초상화 모사자: 손광석

 

 

초상화 그리는 순서

 

초상화는 전통시대 국왕이나 공신, 그리고 유명 사대부 등을 대상으로 그려졌다.

목적은 돌아가신 이후를 대비하여 영당, 서원, 사당 등에 모시고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아울러 생존 시나 사후를 막론하고 해당 인물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그런데 초상화를 그릴 때에는 해당 인물의 성격을 화폭에 담아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수염 한 터럭이라도 정교하게 묘사해야만 하였다.

이른바 “터럭 한 올이라도 틀리면 다른 사람이 된다(一毫不似 便是他人)”라는 말 속에서

초상화에 담긴 정신을 이해할 수 있다.

 

1)기름종이(油紙)에 초본을 제작한다.

초상화 대상자를 보고 기름종이에 버드나무 숯(유탄, 柳炭)으로 밑그림을 그린다.

배채(背彩, 기름종이의 뒷면에 색을 칠한다)

앞면에다가 이미 색칠한 뒷면의 색과 음영을 고려하여 색을 칠한다.

그림을 검토하고 고쳐서 초본을 완성한다.

 

2)정본을 그린다.

비단에다 아교에 백반을 섞은 액체를 발라 비단의 채색을 좋게 한다.

초본 위에다가 아교를 바른 비단을 놓고 먹선을 그린다.

비단의 뒷면에다 앞면의 먹선을 따라 색을 칠한다.

앞면에다가 뒷면의 색과 음영을 고려하여 색을 칠하여 마무리한다.

 

3)뒷면 색칠(배채, 背彩)의 효과

그림의 얼굴색이나 반투명한 사모 등에 사용하여 은은하게 발색하는 효과를 내며 장기적으로는 그림이 훼손되는 것을 예방한다.

 

 

●옛 초상화 복원(보존처리) 과정

 

조선시대의 초상화는 시기가 지나면서 많이 잃어버렸다.

다행히도 잘 보전된 것들이 있으나 훼손된 경우가 매우 많아 형태를 알아보기도 어려워 열람하기조차 쉽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전문가의 손을 거치면 옛 모습처럼 복원될 수 있다.

 

옛 초상화의 복원과정은 다음 단계로 이루어진다.

 

1)초상화의 상태조사

- 현미경, X-Ray, 적외선 촬영 등의 촬영을 하고 안료, 비단, 종이, 유물의 손상 상태를 조사하여 보존 처리 방향을 설정한다.

 

2)모양 바로잡기

- 크게 3부분으로 분리된 조각을 그림의 형태와 비단의 씨실과 날실의 방향을 고려하여 모양을 바로 잡은 후 임시 접착한다.

 

3)건식, 습식 크리닝(뒷면)

- 건식 ․ 습식 크리닝 과정으로 그림의 오염과 얼룩 등을 제거한 뒤 그림 앞면의 안료층을 보호하기 위하여 임시 배접을 실시한다.  

 

 

4)배접지 제거(뒷면)

- 배접지의 pH가 5.76-5.81로 산성화가 진행되고 있으므로 그림에 좋지 않아서 배접지를 제거한다.

 

5)결실부 보강(뒷면)

- 비단이 없어진 부분은 바탕 비단과 같은 조직의 비단을 사용하여 보강한다. 이때 사용되는 비단은 수 백 년이 지난 그림의 비단과 똑같이 약하게 만들기 위해서 전자선으로 강제 열화 시킨다.

 

6)배접

- 배접은 오리나무 열매로 염색한 닥지와 소맥전분 풀을 사용한다. 이 풀은 밀가루에서 단백질을 제거한 전분만으로 제작한다.

 

7)색 맞춤

- 결실부분을 보강한 부분에 색맞춤을 실시한다. 보강한 부분의 미적인 면을 살리기 위하여 그림의 분위기와 색을 맞춘다.

 

8)족자꾸미기

- 손으로 짠 연꽃문양 비단을 쪽과 오리나무 열매로 각각 염색하여 조선시대 초상화의 전통적 형태로 족자를 꾸민다.

 

 

 

●초상화 복원에 필요한 재료와 도구

 

종이류, 직물류, 소맥전분 풀, 우뭇가사리 풀, 탈산용 스프레이, 붓, 자, 풀체, 풀통,

핀셋, 송곳, 가위, 칼, 대나무칼, 들대, 스프레이, 문진

 

- 염색 & 채색용 재료 : 안료, 염료, 봉채, 아교

- 조사용 도구 : 색도기, 현미경, 두께 재는 도구, Ph meter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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