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듬어보고(전시)

[실학박물관] 성호 이익의 '세상 만물' 새로 보기 특별전

Gijuzzang Dream 2011. 5. 9. 19:07

 

 

 

 

 

 

 

 

 

 

 

 

 

- 전시기간 : 2011.5.13~9.13
- 개막행사 :
2011.5.20(금) 11:00~13:00 

- 개막 특별 강연 : 성호 이익과의 만남 (이성무, 전 국사편찬위원회장)

- 학술회의 : 2011.7.1(금) 13:00~18:00 

            조선시대 유서(類書)의 편찬과《성호사설》(동아시아 고대학회 공동개최

 

 

 

“실학적 사유와 인식의 실제는 어디에 바탕을 두었는가?”

실학의 비조 성호 이익(李瀷)의《성호사설》중 <만물문(萬物門)>에 나타난 사물 인식에서

실용과 과학적 사고가 시작됨을 보여주고,

260년전 성호가 꾸민 박물관에서 실학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세상사물에 대한 고증·변증·관찰을 통해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풍을 담아낸 이익의 사물 인식론이

실사구시 (實事求是)와 민생(民生)이라는 측면에서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이다.

 

 

 

 

 이익(李瀷, 1681~1763)

 

본관: 여주(驪州). 자: 자신(自新), 호: 성호(星湖)

 

 

 

 

 

 

1681년(숙종 7)

아버지 하진(夏鎭) 유배지인 평안도 운산(雲山) 출생.

이듬해 아버지를 여의고 선영(先塋)이 있는 경기도 안산의 첨성리(瞻星里)로 돌아옴.

 

1705년(숙종 31) 문과에 응시하였다가 녹명(錄名)이 격식에 맞지 않아 회시(會試)에 응할 수 없게 됨.

 

1706년(숙종 32) 둘째 형 잠(潛)이 노론을 비판하다 장살(杖殺)당한 뒤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몰두.

 

1711년(숙종 37) 윤동규(尹東奎)가 문하에 들어옴.

 

1713년(숙종 39) 『맹자질서(孟子疾書)』저술.

 

1715년(숙종 41) 『사칠신편(四七新編)』저술.
이익의 명성을 듣고 각 지역으로부터 학사(學士)들이 모여듬.

 

1724년(경종 4) 신후담(愼後聃)이 문하에 들어옴.

 

1727년(영조 3)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음.

 

1731년(영조 7) 『가례질서(家禮疾書)』저술.

 

1734년(영조 10) 신후담이 『사칠신편』의 ‘성현지칠정(聖賢之七情)’ 문제를 제기해와 여러 차례 토론.

 

1746년(영조 22) 안정복(安鼎福)이 문하에 들어옴.

 

1747년(영조 23) 『역경질서(易經疾書)』, 『이자수어(李子粹語)』저술(1753)

 

1760년(영조 36) 『성호사설(星湖僿說)』저술

 

1763년(영조 39)

안산에서 12월에 별세. 『곽우록』․『성호집(星湖集)』(1774)을 남김.

 

 

■실학의 종장(宗匠), 성호 이익의 가계(家係)

 

 

 

 

 

 

 

 

 

 

 

 

 

해(瀣)

 

 

광휴

(廣休)

 

 

철환

(喆+吉煥)

 

 

 

 

 

 

 

 

 

 

 

 

 

 

 

 

 

 

 

 

 

 

 

 

 

 

 

 

 

 

 

 

 

 

 

 

 

 

 

 

 

 

 

 

 

 

 

 

 

 

 

 

 

잠(潛)

 

 

병휴

(秉休)

 

 

삼환

(森煥)

 

 

 

 

 

 

 

 

 

 

 

 

 

 

 

 

 

 

 

 

 

 

 

 

 

 

 

 

 

 

 

 

 

 

 

 

 

 

 

 

상의

(尙毅)

 

 

지안

(志安)

 

 

하진

(夏鎭)

 

 

 

서(漵)

출계

 

 

원휴

(元休)

 

 

정환

(晶煥)

 

 

 

 

 

 

 

 

 

 

 

 

 

 

 

 

 

 

 

 

 

 

 

 

 

 

 

 

 

 

 

 

 

 

 

 

 

 

 

 

 

 

 

 

 

 

 

침(沈)

출계

 

 

용휴

(用休)

 

 

가환

(家煥)

 

 

 

 

 

 

 

 

 

 

 

 

 

 

 

 

 

 

 

 

 

 

 

 

 

 

 

 

 

 

 

 

 

 

 

 

 

 

 

 

 

 

 

 

 

 

 

 

 

 

 

 

 

익(瀷)

 

 

맹휴

(孟休)

 

 

구환

(九煥)

 

 

 

 

 

 

 

 

 

 

 

 

 

 

 

 

 

 

 

■실학의 종장(宗匠), 성호 이익의 학맥(學脈)

 

 

 

 

 

 

 

 

 

 

 

 

윤동규尹東奎 1695-1773

 

 

 

 

 

 

 

 

 

 

 

 

 

 

 

 

 

 

 

 

 

 

 

 

 

 

 

 

 

 

 

 

 

 

 

 

 

 

 

 

 

 

 

 

 

 

 

 

 

 

 

 

 

 

신후담愼後聃 1702-1761

 

 

황덕일黃德一 1748-1800

 

 

 

 

 

 

 

 

 

 

 

 

 

 

 

 

 

 

 

 

 

 

 

 

 

 

 

 

 

 

 

 

 

 

 

 

 

 

 

 

경세치용파

 

 

 

안정복安鼎福 1712-1791

 

 

황덕길黃德吉 1750-1827

 

 

 

 

 

 

 

 

 

 

 

 

 

 

 

 

 

 

 

 

 

 

 

 

 

 

 

 

 

 

 

 

 

 

 

 

 

 

 

 

이병휴李秉休 1710-1776

 

 

이삼환李森煥 1729-1814

 

 

 

 

 

 

 

 

 

 

 

 

 

 

 

 

 

 

 

 

 

 

 

 

 

 

 

 

 

 

 

 

 

 

이익李瀷

1681-1763

 

 

 

 

 

 

 

 

 

 

이용휴李用休 1708-1782

 

 

이가환李家煥 1742-1801

 

 

 

 

 

 

 

 

 

 

 

 

 

 

 

 

 

 

 

 

 

 

 

 

 

 

 

 

 

 

 

 

 

 

 

 

 

 

 

 

이맹휴李孟休 1713-1750

 

 

 

 

 

 

 

 

 

 

 

 

 

 

 

 

 

 

 

정약전丁若銓 1758-1816

 

 

 

 

 

 

 

 

 

 

 

 

 

 

 

 

 

 

 

 

 

 

 

 

 

 

 

 

 

권철신權哲身 1736-1801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이용후생파

 

 

 

 

 

 

 

 

 

 

 

 

 

 

 

 

 

 

 

 

 

 

 

 

 

 

 

 

 

 

 

 

 

 

박제가朴齊家 1750-1805

 

 

 

 

 

 

 

 

 

 

 

 

 

 

 

 

 

 

 

 

 

 

 

 

 

 

 

 

 

 

 

 

섹션 1. 백과사전, 《성호사설》 읽기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조선실학의 비조(鼻祖)로 꼽히는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이 쓴 「성호사설(星湖僿設)」은 30권 30책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이다.

 

<사설(僿設)>이란 말 그대로 '소소한 이야기'라는 뜻. 요즘도 학자들이 자신의 저서나 논문을 졸저(拙著)라고 낮춰 부르듯 성호 또한 이 책에다 겸손의 의미로 이런 이름을 붙였다.
실제 「성호사설」은 이익이 40세 전후부터 20년 동안 틈틈이 독서를 하거나 사색을 통해 터득한 독자적인 생각을 비망록 형식으로 그때그때 기록해 둔 것과  제자들의 질문에 답변한 내용을 기록해 둔 것들을 그의 나이 80에 이르렀을 때에 집안 조카들이 주제별로 정리한 일종의 수필집이다.

따라서 이 책은 한가할 때 쓴 기록, 즉 만록(漫錄)이나 잡스런 글(잡저. 雜著)인 셈이다.

 

벼슬길을 단념하고 평생 초야에서 지내면서 이렇게 모은 글이 모두 30책 3,007항목 이다.

이를 만년에 책으로 정리하면서 ▲천지문(天地門) 3권 223항목 ▲만물문(萬物門) 3권 368항목 ▲인사문(人事門) 11권 990항목 ▲경사문(經史門) 10권 1,048항목 ▲시문문(詩文門) 3권 378항목 , 5개 문(門)으로 나눴다. 그러나 이는 편의상 분류일 뿐 꼭 제목에 맞는 주제별 분류는 아니다. 

 

책은 분량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본디 이익이 "「성호사설」을 10분의 1로 과감히 추려도 좋다”고 하여 수제자이자 「동사강목」이라는 불후의 역사서를 쓴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이 「성호사설」중 중요한 것만 가려뽑은「성호사설유선」을 내기도 했다.

한편성호사설 정선」은 「성호사설」가운데 538 항목만을 골라내어 현대어로 옮겨 세 권으로 묶었다.

한용운 · 신채호 · 정약용 · 안확 · 문일평 · 홍기문 · 김태준 등 근현대 한국학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이들의 저작을 엄선해 현대어로 펴내온 한국학자 정해렴씨가 간추리고 옮겼다.

 

「성호사설」이 비록 잡저 형식을 띠긴 했어도 성호 사상의 정수, 나아가 조선실학 사상의 뼈대가 고스란히 담겨 치밀한 고증과 분석, 과학적 비판에서 출발하는 새로운 접근법으로 조선식 백과사전의 모델이 됐다.

조재삼(1808~66)의 <송남잡지(松南雜識)> , 이규경(1788~?)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는 이를 계승한 것이다.

성호 이익의 사상은 ▲경세치용적 실학사상 ▲백성을 생각하는 위민사상 ▲중국 중심 중화사상 및 중세 정체적 사고 탈피 ▲한 글자라도 의심나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고증적 태도 ▲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학문정신 등을 들고 있다.

 

  안정복이 정리한 《성호사설유선(星湖僿設類選)》

 

조선 후기의 실학자 안정복(安鼎福, 1712~91)이 스승 이익(李瀷)의 저술인「성호사설(星湖僿設)」에서 중복되고 번잡한 것은 삭제하고 다시 유별(類別)로 편차를 엮은 책.

10권 10책. 필사본.

 

원래 〈성호사설〉은 이익이 평소에 학문을 하면서 생각나고 의심 나는 것을 기록해둔 것과 제자들의 질문에 답변한 내용을 모아 엮은 책이어서, 부문(部門)이 세분되어 있지 않고 여러 가지 내용이 한 부문에 섞여 있었으며 또 중복된 것도 적지 않았다. 

 

이익으로부터 〈성호사설유선〉을 위촉받은 안정복은 의심 나는 것이 있으면 다시 물어가며 신중하게 편집했다. 천지문(天地門) · 만물문(萬物門) · 인사문(人事門) · 경사문(經史門) · 시문문(詩文門)의 5가지 문으로 크게 분류되어 있던 〈성호사설〉을, '문(門)' 은 '편(篇)' 으로 바꾸고 각 편을 다시 문으로 나누었으며, 문에는 다시 '칙(則)' 이라는 세목(細目)을 두어 유목(類目)에 따라 편집 수록했고, 편자 자신의 설은 소주(小註)로 달았다.

 

<성호사설유선〉은 본디 <성호사설>이 3,007 항목으로 저술한 것을 제자인 안정복이 <성호사설> 원편의 약 1/3로 축약되어 1,396항목이 실려 있으며, 종류별로 간명하게 배열되고 주석까지 덧붙여졌기 때문에 찾아보기에 매우 편리하였다.

 

권1의 천지편에는 천문 · 지리 · 귀신문을, 권2~5의 인사편에는 인사(人事) · 논학(論學) · 예제(禮制) 등을, 권6~9의 경사편은 경서(經書) · 논사(論史) · 성현(聖賢) · 이단(異端)의 문을 두었고, 만물편과 시문편을 합하여 1권으로 엮은 권10은 만물편이 금수 · 초목문으로, 시문편이 논문(論文) · 논시문(論詩文)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호사설〉이 가지는 방대함에 비할 수는 없으나 이익의 학문과 사상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 안정복(安鼎福)은

이익의 문하에서 일생 동안 사사하면서 학풍을 계승하여 조선 역사의 독자성에 입각한 역사 발전 주류의 계통화는 조선 역사의 체계적 파악 가능성을 높였다.

<동사강목 (東史綱目)> 등을 저술하여 과거의 역사와 지리학을 비판하고, 우리 역사의 정통성과 자주성을 내세웠다. 또한 천주교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여 당시 학자들이 천주교에 관심을 보이는 것에 경고하였다.

영조 25년(1749)에 만령전(萬寧殿) 참봉(參奉)에 부임을 시작으로, 내직으로는 감찰 · 익위사익찬(翊衛司翊贊)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목천현감(木川縣監)을 지냈다.

이익의 가르침을 받는 한편, 성호학파의 여러 학자들과 어울려서 경세치용(經世致用)의 구체적인 모색을 위한 사상적인 정립을 모색하여 갔다.

이러한 사상적 성과는 순암선생문집(順庵先生文集) 30권 15책을 비롯한 많은 저술로서 집대성되었다.

 

성호사설의 판본

 

조선시대에는 여러 필사본이 있었으나 인쇄되지 못하다가

1915년 조선고서간행회에서 안정복의 정리본인 《성호사설유선》상하 2책으로 인쇄하였다.

(조선군서대계속 제19/20집).

이 책을 다시 1929년에는 문광서림 (文光書林)에서 정인보(鄭寅普)가 교열하여

선장본(5책)과 양장본(상하 2책)으로 동시에 출판하였는데, 이 대본도《성호사설유선》이다.

문광서림본에는 저자의 자서, 변영만(卞榮晩)의 서문과 정인보의 서문이 더 붙여졌고,

부록으로 《곽우록(藿憂錄)》이 추가되었다.

 

그뒤 1967년에 이익의 조카 병휴(秉休)의 후손인 돈형(暾衡)이 소장한 30책 원본의

《성호사설》을 경희출판사에서 상하 2책으로 영인, 출판함으로써 학계에 널리 보급되었다.

 

조선시대의 필본으로는 국립중앙도서관본, 재산루(在山樓)소장본, 규장각본,

일본의 도요문고본, 와세다대학소장본 등이 있다.

이 중 국립중앙도서관본은 내용의 일부가 다른 본과 약간 다르며, 일부만이 전하는 영본인데

국립중앙도서관측의 해제에 의하면 이를 이익 자신의 자필원고로 추정하고 있다.

 

번역본에는 이익성(李翼成)이 부분적으로 번역한 《성호사설》(한국사상대전집 제24권, 同和出版公社, 1977)이 있고, 이 번역본은 삼성출판사에서 《성호사설》로 재출판되었다.(1981)

한편 전문을 번역한《국역성호사설》(11권, 민족문화추진회, 1977∼79)이 간행되기도 했다.

 

 

 
 

이익의 편지(간찰, 簡札)

아래편의 편지는 이익이 55세 때인 1735년(영조 11) 윤4월10일 상중(喪中)에 병들어 누워있는 사촌형의 안부를 물으며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고 상(喪)을 무사히 마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하고 있다.

 

 

 

 



섹션 2. 생활의 발견

 

접는 부채와 부채 장식(선추, 扇)

중국 원나라 이전엔 둥근 부채만 있고 접는 것은 없었다. 원나라 초기에 외국사신이 가진 접는 부채를 처음 보았는데 사람들은 우습게 여기면서도 이것이 풍속으로 되어 천하에 두루 퍼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직 접는 부채만 사용한다.

부채 끝에 다는 부채 추(선추, 扇錘)에는 투서(套署)를 만들어 찍게 되었는데, 그 한복판을 비워서 전문(篆文)을 새긴 자그마한 도장을 간수해 두었다가 봉함(封緘)과 낙관(落款) 따위에 사용한다. 또 별도로 향추(香墜)라는 것이 있는데 이 역시 그 한복판을 비워서 이쑤시개와 귀이개 따위를 간수해 둔다. 이것은 반드시 벼슬이 있는 사람이라야 갖게 되는 것으로 부채 하나에 2~3개의 부채추를 만들어 단 사람들도 있다.

-<성호사설>

 

 

 

 

당의(덕온공주) 

 

성호 이익은 당시 사상계의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한 성리학에서 도덕이라는 잣대로 만물을 관념으로 인식하려 한 것과는 달리 사물을 각각 하나의 학문 대상으로 삼아 세심히 관찰했으며 이 과정에서 터득한 사물의 원리를 일상생활의 편리함, 즉, 실용(實用)의 차원에서 활용하고자 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부녀자의 짧은 저고리를 그 자신은 좋아하지는 않지만 부인들의 과시하고자 하는 욕구는 막을 수 없으므로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한다.

 

 

 

너울(羅兀)을 쓰고 말군(襪裙)을 입고 말을 타는 여인의 복장

 

 

 

너울

너울을 쓰는 제도는 변방 풍속에서 나왔는데, 온 몸을 가려 덮어서 길가는 사람들이 엿보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중국 송나라 때는 부녀들이 종루거리를 다닐 때, 자주색 비단으로 모가 나게 만들어서 몸을 반쯤 가리고 다녔다고 한다. 이것을 우리나라에서는 속칭 '나올(羅兀)'이라 한다.

과거에는 부귀한 집안 부녀일지라도 출입할 때 이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을 뿐이다.

하지만 요즈음에는 문벌이 좋은 집 자손들은 물론이고 시골의 몰락양반까지도 가마(옥교, 玉轎)를 사용하지 않는 이가 없다. 또 하찮은 궁인붙이까지도 가마를 타는데, 다만 덮은 지붕과 드리운 주렴이 없을 뿐이다. 오직 궁인의 종들만 너울을 쓰고 있으니 세속풍습이 점점 사치스러워지는 것을 이것만 보아도 알 수 있겠다.

-<성호사설>

 

조선 시대 상류층 부녀자의 내외용(內外用) 쓰개.

형태는 원립(圓笠) 위에 자루모양의 천이 어깨까지 늘어뜨려진 모습으로 착용시 얼굴이 닿는 부분에는 앞을 내다볼 수 있도록 비치는 재료를 사용한 너울은 고려 시대 여성들의 쓰개인 몽수(蒙首)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몽수가 주자학이 전래된 고려 말기에 이르러서는 착용 신분에 한계가 생겨나 내외의 의미가 부여되어 조선 시대의 너울이 되었다.

국초에는 궁중과 양반 계급 여인들이 사용했으나 국말에는 궁중가례(嘉禮)와 능행(陵行) 및 궐내에서 착용했다. 조선 초기에는 입모(笠帽) · 면사(面紗)라고도 했으나 인조 때에 나올(羅兀)과 너불(汝火)이라는 말이 혼용되었다.

 

 

부인복(婦人服)

지금 부녀자의 의복은 짧은 적삼에 소매가 좁은데 어느 때부터 생긴 지는 알 수 없으며, 귀천이 함께 사용하고 있으니 해괴한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습속에 젖어 예사로 알고 있다. 추측컨대 우리나라 초기에 부인복이 중국과 차이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지금처럼 짧고 좁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부인복은 오직 고운 맵시를 귀하게 여겨 가는 허리를 자랑해보이려고 한다. 그래서 윗저고리가 아래치마에 덮이지 않도록 하였으니 우리나라도 중국 풍속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인가?

-<성호사설>

 

 

 

 

 가죽신과 나막신(油鞋, 木履)

 

 

나막신(목극, 木屐)

남북조 때 안지추(顔之推, 529?~591?)의 <안씨가훈(安氏家訓)>에 “굽이 높은 나막신을 신는 것을 고상한 취미로 여겼다”라고 했으니 옛날 사람도 늘 나막신을 신었던 것이다.

晉나라의 재상 사안(謝安)은 나막신 굽이 닳도록 신었고, 晉나라 문장가 사영운(謝靈運, 385년~433)은 나막신 굽을 없애버리고 신었다고 하니, 이것이 모두 증거가 될 수 있다. 또는 진흙탕 길에서만 이용했을 뿐이라는 것도 아니다.

 

사공지극(謝公之屐) - 晉나라 사영운(謝靈運)이 나막신을 신고

                   산에 오를 때에는 앞굽을 빼고 내려올 때는 뒷굽을 빼고 신었다 함.

 

사공리(謝公履)

각착사공리 신등청운제(脚着謝公履 身登靑雲梯)

사공의 나막신 신고 구름 사다리로 올랐네.

- 李白, 몽유천모음유별(夢遊天姥吟留別)

 

나도 평생에 말을 타고 먼 길을 가지 않을 때면 늘 나막신을 이용하니 이것은 당연한 이치를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나무 성질이란 마르면 터지기가 쉽기 때문에 터지지 않도록 미리 방비해야 하는 것이다. '납극(蠟屐)'이란 晉나라 완부(阮孚)가 밀랍을 녹여 나막신(木屐) 겉에다 칠해서 말라 터지지 않도록 미리 방비하여 신었다고 한다.

어떤 친구에게 선물로 받은 굽 없는 나막신도 있는데 이는 모양이 가죽신처럼 된 것이고 신고 다니기가 더욱 편리하다.

<자서>를 검토해보니 “석(舃)은 나무를 신 밑에 대어 습기가 차도 걱정 없도록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가죽신에다 나무로 밑을 바치면 오래도록 신을 수는 있으나 가죽이란 것은 비에 젖거나 햇볕에 쪼이거나 하면 모두 썩고 터지기도 쉽고 간수하는데도 매우 어렵기 때문에 밀랍으로 칠해서 만든 나막신만 못할 것이다. 

 

 

짚신(초갹=초교, 草屩)

왕골로 삼은 신과 짚으로 엮은 신은 가난한 자가 늘 사용하는 것이지만 옛날 사람들은 이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한나라 무제는 짚신을 신고 신하들에게 조회를 받되 상구와 이름이 같은 것을 꺼리지 않았다하니 나쁜 재료로 만들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선비들은 고운 삼으로 만든 미투리도 오히려 부끄럽게 여기거든 하물며 이 나쁜 짚신에 있어서야 어떻겠는가?

영남지방의 풍속은 집에 있을 때는 늘 짚신을 신고 미투리는 외출할 때만 사용하게 되니 그 검소한 풍속은 본받을 만하다.

- <성호사설>

 

 

 

 

 

 

 16세기,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 1538-1593)의 유품

 

안경(애체, 靉靆)

애체(靉靆)란 세속에서 이르는 안경이다. <자서(字書)>에 “서양에서 생산된다”고 하였으니 서양사람 이마두(利瑪竇, 마테오리치)가 1581년(만력 9)에 처음 중국에 들여왔다. 명나라 사람 장영(張寧)이 쓴 <요저기문(遼邸記聞)>을 보니 “서양이 멀다 할지라도 서역땅 천축(天竺)의 모든 나라는 중국과 물화를 교류한 지 오래이고, 천축은 서양과 멀지 않다. 지금 형세로 보아 애체(靉靆)란 물건은 장차 중국에 전파되어 각 가정에서 갖추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 <성호사설>

 

 

 

 

 

저울(衡石)

매번 과거를 볼 때 응시자들에게 넓고 두꺼운 좋은 종이를 쓰지 못하도록 한다. 하지만 그들은 비싼 종이를 쓰기에 힘쓴다. 급제자를 발표할 때 보면 과연 나쁜 종이를 쓴 자가 합격되는 일은 적었다. 내 생각에는 과거가 끝난 후 감찰관은 뽑힌 시권(試券)을 모아서 형석법(衡石法)에 따라 종이의 근량을 달아야 할 것이다. 한정된 무게를 어긴 자는 모두 뽑아버린 다음 대성(臺省)으로 넘겨 자세히 검토하도록 해야 한다. 이와 같이 한다면 한두 차례 지나지 않아 호화 사치의 폐단이 없어질 것이다.

- <성호사설>

 

 

 

 

 

메모장(手板)

배움에는 옛 것을 익혀 새것을 아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없다. 배우려는 이들이 누구인들 옛 것을 익히지 않으려 하겠냐만 기억하는 재주가 모자라면 어쩔 수 있겠는가?

홀(笏)이란 것은 생각했던 일을 갑자기 잊을까 대비하는 도구이다. 조회(朝會)하고 제사지낼 때 이용하는 좋은 물건이다. 만약 홀 모양에 따라 나무를 깎아 수판(手板)을 만들고 거기다 연분(鉛粉)을 칠해 옛날의 소위 ‘연참(연참)’이란 것과 같게 하여 늘 몸에 지니게 한다면 학문을 힘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성호사설>

 

 

 

 

 

 

 

 

논호미와 밭호미

중국 요동 사람들은 입운기(立耘器)를 잔자(剗子)라고 한다. 자루 길이는 거의 두 길이나 되고, 날의 너비는 우리나라 가래처럼 생겼다. 밭 매는데 편리하나 논에는 알맞지 않다. 우리나라 호미는 자루는 짧고 날은 둥그스름하면서 뾰족하다. 그리고 꼬부라진 것이 비뚜름하게 되어 흙을 파 일구기가 좋고 보습처럼 심살이 두두룩해서 앉아서 김을 매는데 매우 알맞다.

가래 따위를 모두 상고해 보아도 이런 제도는 볼 수 없다. 호미야말로 천하의 이로운 도구이고, 입운기라는 것은 서투른 연장이라 하겠다.

-<성호사설>

 

호미는 여성이나 남성, 어린이나 노인 누구나 쉽게 다룰 수 있는 손도구로,

논밭의 풀을 뽑는 김매기를 할 때, 고구마나 감자 등을 심거나 캘 때,

밭에 농산물을 심은 후 흙을 북돋아 줄 때도 유용하게 쓰이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농기구이다.

한 해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은 사실 풀뽑기, 즉 제초작업이다.

예전에는 농사를 ‘잡초와의 전쟁’이라고 할 정도였다.

잡초가 웃자라면 농작물이 자랄 수 없기 때문에 농작물이 자라면

주로 호미나 후치 같은 매는 도구로 김을 매어주는데 김매기는 한해 농사 중 가장 힘든 노동이었다.

 

특히 김매기의 가장 대표적인 연장인 호미는 비록 작고 가볍지만

비대칭 역삼각형의 날을 가진 독특한 구조로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데

잡초를 뿌리 채 뽑아내거나 자르고, 흙을 고르고 일구는 데 매우 효과적인 기능을 지녔다.

외국에도 우리의 호미와 비슷한 연장이 있기는 하지만 비대칭 구조는 우리 호미뿐이다.

 

지역에 따라 ‘호맹이(전라ㆍ경상ㆍ충청ㆍ강원), 호메이(경상), 호무(전남 보성), 홈미(함북),

호마니, 허메, 허미, 희미’ 등으로, 옛날에는 ‘호, 홈의’ 라고도 불렸다.

괭이에서 발전한 농기구로 알려져 있으며,

평남 맹산 대평리의 청동기유적지, 경기도 양평의 초기철기시대 유적지에서

호미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고대로부터 농경의 중요한 연장임을 알 수 있다.

 

호미는 날 슴베, 자루로 구성된다.

무딘 쇠날의 앞이 뾰족하고 위는 넓적하고 한 끝이 휘어져 가늘게 꼬부라진 곳에

둥근 나무자루를 박아 사용한다. 날은 땅을 파거나 풀을 뽑는데 이용되는 철판이고,

자루는 손잡이며 슴베는 날과 자루를 연결해 주는 부분이다.

 

우리 호미는 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 1764∼18827)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서도

‘동쪽나라의 호미’라고 했을 만큼 우리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연장이었다.

부등변 삼각형인 날의 한쪽 모서리에 목을 이어대고 거기에 자루를 박은 독특한 형태의 연장인

호미는 이미 통일신라시대의 안압지 출토유물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고려시대의 호미도 오늘날의 호미와 같은 형태이다.

 

호미는 사용되는 지방의 자연적인 조건과 농업경영의 특질에 따라

보습형, 낫형, 세모형 등으로 구분된다.

보습형은 논매기에 적당한 호미로 평지가 많은 지역(경기, 충청, 전북 등지)에서 흔히 쓰이며

쟁기의 보습처럼 날이 뾰족하고 위는 넓적하다.

날끝을 흙에 박아 젖히면 흙이 쉽게 뒤집어져 논을 매는데 적당하여 논호미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루에 흙이 묻으면 매우 미끄러우므로 나무자루 대신 짚을 감거나

나무자루에 베헝겊을 둘러서 쓰기도 했다.

무게 400g 내외의 보습형 호미는

남자 한 사람이 하루에 300여 평의 논을 맬 수 있으며 날은 해마다 버려서 쓴다.

낫형은 자갈이 많은 지역(경남, 제주, 전남 도서지방 및 산간마을 등지)에서 쓰이며

작은 낫과 같이 너비에 비하여 길이가 길며 끝이 날카로워

자갈 등 저항물이 많은 데에서 쓰기 편리하다. 밭호미라고도 부른다.

세모형은 장삼각형(長三角形)으로 양변에 비하여 바닥의 길이가 길다.

산간지역(황해, 평안, 경기 북부, 강원 북부 등지)에서 주로 쓰이며,

우리나라 호미 중 날부분이 넓적하고, 날과 자루가 가장 길며

보리, 옥수수, 밀과 같이 이랑이 넓은 밭의 풀을 매는데 편리하다.

흙을 떠엎는 힘이 약하여 논에는 적합하지 않다. 이 호미는 자루가 길어 서서 작업할 수도 있다.

 

또한 각 지역의 자연적인 토양조건과 기후 특성에 따라,

재배하는 농작물에 따라 그 기능과 모양이 매우 다양하다.

날의 모양과 자루의 길이에도 차이가 있다.

대체로 북쪽 지역으로 갈수록 호미날과 자루가 넓고 길며,

남쪽 지역으로 갈수록 날이 가늘고 자루도 짧다.

때문에 북부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자루가 짧아 쭈그리고 앉아 작업을 하는 것이 특징이다.

 

호미는 크게 논호미와 밭호미로 구분되는데,

논호미는 널찍하고 비교적 큰 반면에 밭호미는 조금 작다.

북한 지역의 호미는 ‘장호미’라고 하여 손잡이가 매우 길다.

밭호미는 논호미와는 달리 형태가 매우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논호미는 물이 있는 논에서 사용하도록 만들어진 호미로

밭호미에 비하여 날이 훨씬 크고 길며 무겁고 자루가 짧은데,

세모꼴로 끝이 날카로우며 흙에 깊이 꽂아서 뒤집어 풀을 뽑는다.

논매기는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이므로 보통 품앗이로 한다.

음력 7월 무렵에 세 벌 논매기가 끝나면 ‘호미씻이’라고 하여 호미를 씻어서 걸어두고

농부나 일꾼이 중심이 되어 농악을 울리며 술 마시고 흥겹게 하루를 노는 풍습이 있다.

 

논호미는 재배조건이 같은 논에서 사용되기 때문에 지역에 따라 모양이나 기능의 차이가 없지만

밭호미는 1년 내내 두루 쓰이고 매우 다양하다.

밭호미는 수도(水稻) 이외의 농작물에 다목적으로 사용되는 호미로

논호미에 비하여 크기가 작고 훨씬 가볍다. 날 끝이 평평해서 흙 표면의 잡초를 긁는데 편리하며

밭작물 재배에 사용되는데 앉아서 쓰는 호미와 서서 사용하는 선호미가 있다.

 

밭호미는 논호미와는 달리 형태가 매우 다양하다.

밭호미에는 논호미와 같은 뾰족한 쪽이 날끝이 되는 외귀호미와

삼각형의 한 변이 날끝인(날끝이 넓은) 양귀호미가 있다.

‘외귀호미’ 는 중부이남 지방에서 주로 사용되었으며

해안지방의 것일수록 날이 작고 뾰족하다.

비가 많은 지방일수록 두드러져 ‘골갱이’라고 불리는 제주도 호미는 마치 갈고리처럼

날이 예리하고 작다. 비가 많은 지역에서는 김(잡초)의 뿌리가 땅속 깊이 내리기 때문으로 보인다.

②중부 이북의 산간지방에서 주로 사용되었던 ‘양귀호미’

삼각형의 날인 한 변이 바닥이 되므로 날끝(귀)이 양쪽에 있어 양귀호미라고 부른다.

일반 호미보다 자루가 길고 날도 크고 무겁다.

양귀호미의 날끝이 평평한 것은 비가 적게 오는 곳에서는

김의 뿌리가 깊지 않아 겉흙을 긁는 것만으로도 김매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루가 길고 날이 무거운 것은 돌이 많고 흙이 거친 밭에서 쓰기 위함이다.

   

*** 신라의 진흥왕 척경비 중 경남 창녕비에는

진흥왕이 영토를 넓히고 국경을 정비한 사실과 함께 ‘해주백전답(海州白田畓)’이라는 글이 있어

당시의 농사에 대한 내용을 알 수 있다.

백전(白田)은 ‘밭’을 가리키며, 답(畓)은 밭과 구분하여 ‘논’을 가리킨다.

 

*** 호미타령

각 지방마다 전해지는 토속민요 중 노동요의 하나로,

김을 맬 때 부르는 노래이며 가락과 내용은 다르나 각 지방에 널리 퍼져 있다.

 

 

<호무가>는 평안도에서 들에서 호미로 김맬 때 불려진 농요.

품앗이로 여럿이 함께 어우러져 김을 매는데

처음에는 느린 곡조로 부르다가 점점 더 빠른 곡조로 신명나게 부르는 것이 특징이다.

‘호무’는 평안도 지방의 방언으로 호미를 말한다.

호무가는 평안북도 영변, 박천, 숙천 운산지방에서 불리워지는 농민들이 즐겨 부르는 토속민요이다.

창법은 한사람이 메기면 여럿이 후렴을 받는 형식으로

이 민요는 특히 밭 김맬 적에 많이 부른다고 하며 호미타령과 같은 성격의 농요이다.

긴 호무가, 자진 호무가, 호미타령은 씨앗을 뿌리고 김을 매는 작업을 하며 부르는 노래로

점점 잦은 소리로 김을 매며 몰아가다가 점심이 돌아오면 둘러앉아 서로 장기자랑을 한다.

 

<호무가>

에야에야 에헤야 호~~~~호무가 논다

왕대나 가림에 세대는 돌피

하나도 빠짐없이 뽑아만 주소

동서나 사방에 널리신 계원

소리를 맞추어 일하러 갑세다

중간참이 늦어를 갑네다

점심바구니 떠들오 옵네다

농자는 천하지 대본입네다

올해도 풍년이 틀림이 없네

바삐 매고 돌아를 갑세다

 

<자진호무타령>

에헤야 에헤야 에~~에헤야 에~~헤야 호무로다

일천가지 뻗은 논에 삼천석이 날 듯하외다.

너의집 논은 네귀잽이 우리집 논은 샘뱀이 논이다

장구뱀이 얼뜬 매고 물논 뱀이로 들어갑세다

일락서산에 해 떨어지고 월출동령 달 솟는다

소내기가 올듯하니 빨리 메고(얼능 매고) 돌아갑세다

헤야 헤야 호물레야, 헤야 헤야 호물레야,

얼뜬(얼능) 메고 돌아가자

향두김 메기가 이거로구나

간다 간다 나는 간다 호물레야 호물레야 호물레야 호물레야

호물레야 호물레야 호물레야 호물레야 호물레야 호물레야.

 

한편, 평안북도 염주지방에서 농부들이 논에서 김을 매며 부르는 농업노동요

<논매는 소리(호메소리)>에서 ‘호메’는 ‘호미’의 사투리이다.

 

<호무가(평안북도 염주)>

헤-헤-야 호미로다 헤-헤-야 호미로다 호미레아니고 낫치갓네

헤-헤-야 호미로다 호미장단에 놀아보자 헤-헤-야 호미로다 얼넌잠깐 떼여놋고

헤-헤-야 호미로다 여러게원이 담배먹세 헤-헤-야 호미로다 얼넌뽑어야 풀한대뽑는다

헤-헤-야 호미로다 먼디사람 듯기나좃케 헤-헤-야 호미로다 여기사람 보기나좃케

헤-헤-야 호미로다 못다맬논을 단해개태매엿구나 헤-헤-야 호미요

 

<호미타령(경기도)>

에~~야~~헤~~야, 에~헤에에 호무로다.

한일자로 늘어세서 한결같이 김을 매자

늙은 부모 잘 모시고 어린 권속 잘 기르자

 

<엉겅퀴야>

엉겅퀴야 엉겅퀴야 철원평야 엉겅퀴야, 난리통에 서방잃고 홀로사는 엉겅퀴야

갈퀴손에 호미잡고 머리위에 수건쓰고, 콩밭머리 주저앉아 부르는이 님의이름

엉겅퀴야 엉겅퀴야 한탄강변 엉겅퀴야, 나를두고 어딜갔소 쑥국소리 목이메네

   

*** 호미씻이

농가에서 농사일, 특히 논매기의 만물을 끝낸 음력 7월쯤에 날을 받아 하루를 즐겨 노는 일.

<호미씻이>는 ‘초연’ 또는 ‘머슴장원놀이’라고도 부르는데,

호미씻이를 하는 날을 ‘머슴날’이라고도 한다. 보통 백중날인 7월 보름이 머슴날이다.

7월쯤 되면 농촌에서는 밭매기와 논매기가 거의 끝나고 비교적 한가해져서

‘어정 7월 동동 8월’이라는 속담처럼 어정거리며 한 달을 지내는데,

마을에서는 일정한 날을 정해서 호미씻이를 하게 된다.

밭이나 논을 매는 호미가 필요 없기 때문에 호미를 씻어 둔다는 의미가 있다.

이날은 집집마다 술과 음식을 장만해서 산이나 계곡을 찾아서 놀고,

장터에는 ‘백중장’이라는 난장(亂場)이 서고,

주인은 머슴에게 새 옷 한 벌과 장에 나가 먹고 놀 돈을 주는데 이것을 ‘백중돈’이라 했다.

또한 마음에서 농사가 가장 잘 된 집의 머슴을 뽑아 1년의 노고를 치하한 뒤

삿갓을 씌워 소에 태우고 마을을 돌아다니면 그 집 주인은 마을 사람들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 건포배은(巾浦拜恩) 중에서

 

성황묘(城隍廟)

우리나라 풍속은 귀신 섬기기를 좋아한다. 무당들이 꽃장대에 종이로 만든 돈을 어지럽게 걸고 마을마다 돌아다니면서 ‘성황신’이라고 한다. 백성을 속이고 재물을 빼앗아내는 술책인데도 어리석은 백성은 두려워서 앞 다투어 갖다 바치고, 관청에서는 금하지 않으니 참으로 괴이하다.

섬사람들은 귀신을 모신 신당(神堂)을 더욱 숭상한다. 참의 이형상이 제주목사로 있을 때 이런 신당을 불태워버렸더니 백성들이 모두 놀랐다. 그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에는 모두들 그가 물에 빠져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바다를 무사히 건너게 되자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무당(巫)

<국어>에 “정신이 집중된 자에게 신명이 잡히니, 남자에게 집힘을 남자무당인 ‘격(覡)’이라 하고 여자에게 집힘을 여자무당 ‘무(巫)’라 한다” 하였는데, 요즈음 세상에 여자무당이 국내에 퍼져있으되 그에게 잡힌 귀신은 모두 요사한 마귀의 종류이다. ‘巫’란 신이 와 잡힌다고 하는데 이는 곧 사람이 부르는 것이지 귀신이 억지로 붙는 것이 아니다.

 

기산풍속화 <판수독경>

 

민속이 그것으로 풍악을 삼고 기도하여 신에게 제사지내는 일이라 하되 법으로 능히 금하지 못한다. 금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권장하는 편이다. 대개 무녀들에게 세금을 물려 관에서 그 물건으로 이득을 보는데 무녀들의 제물이 어디에서 나겠는가? 이는 모두가 기도하는 데에서 나는 것이다. 그래서 금하기 어려운 것이다.

 

<주례>에 무당 관직을 둔 것은 뜻하건대 옛날에도 귀신을 숭상하여 재앙이 있으면 반드시 빌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지금 국가의 제사를 지내는 곳에 무녀를 쓰지 않으니 그 의식이 극히 온당한 것이다. 마땅히 물리쳐 끊어야 할 것인데 또 어찌 세금을 받기까지 하는가? 이미 세금을 받고 또 그 귀신 섬기는 것을 처벌하고 또 많은 속전(贖錢, 죄를 면하기 위해 바치는 돈)을 받아 관에서 이득을 보니 이는 금하는 것이 아니요, 그 본의는 세금을 거두어들이는데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가까운 서울에서부터 먼 고을에 이르기까지 모두 주무(主巫)가 있어 마음대로 출입하므로 민풍이 퇴폐해진다.

 

 

 기산풍속화 <무녀의 굿>

 

지금 들으니 도성 안에는 하루 동안에도 귀신을 먹이는 자가 무수히 많은데 한 번 먹이는 비용이 적지 않게 든다고 하며 시골에도 질병이 있거나 상서로운 일이 있으면 귀신을 먹이는데 소비하지 않는 자가 없어 걸핏하면 두어 달 먹을 양식을 소모시킨다고 한다. 이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 <성호사설>

 

 

***내용 더보기

- 탐라순력도 : http://blog.daum.net/gijuzzang/8515804

 

 

 

 

 

거북점통 / 거북점과 돈점

거북이 점통 안에 엽전을 넣고 흔들어서 점을 쳤다.

지금 세속에서 점을 칠 때엔 반드시 개원통보(開元通寶)라는 동전을 사용한다.

이것은 우리나라에 많이 있기 때문이다. 거북점통은 길흉화복을 알아보기 위한 주술 행위에 쓰는 도구이다. 중국의 영향으로 상고시대부터 사용하였다. 이 유물은 거북모양 점구(占具) 속에 엽전을 넣어 흔든 뒤 꺼내서 나오는 앞뒷면으로 괘를 만들어 길흉을 판단한다.

-<성호사설, 만물문>

 

 

 

  

 

윷점과 윷점책

윷놀이에 대한 설(柶圖說)>이란 것은 누가 만든 것인지 알 수 없다. 윷놀이는 두 사람이 서로 마주 앉아 내기를 하면서 던진다. ‘고농승(高農勝)’은 산골농사가 잘 된다는 것이고 ‘오농승(汚農勝)’은 해안농사가 잘 된다는 뜻이다.

세시(歲時)에 윷놀이를 하는 것은 그 해의 풍흉을 미리 징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상세히 검토해보니, 윷이란 것은 원래 수저의 머리(匕首)의 이름이다.

<의례>에 “윷이란 본래 뿔로 만든 숟가락(角柶)과 나무로 만든 숟가락(木柶)이 있는데, 길흉에 따라 쓰는 법이 다르다”고 하였다. 지금 4개의 나무(四木)를 주사위(骰兒)라 하는 까닭에 '윷(柶)'이라 일컫게 되었으나 추측건대, 고려가 남긴 풍속인 듯하다.

-<성호사설, 만물문>

 

 

윷 말판(柶圖)

<사도설(柶圖說)>이란 것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다.

밖이 둥근 것은 하늘을 상징함이요, 안이 모난 것은 땅을 상징함이며, 중앙에 있는 것은 북두칠성의 첫 번째 별을 상징하는 것이요, 사방에 벌여놓은 것은 28수(宿)를 상징한 것이다.

말을 쓸 때에는 북에서 일으켜 동을 지나 중앙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북으로 나가게 되니 이는 동짓날 태양궤도를 상징한 것이고, 또 말을 북에서 일으켜 동을 지나 중앙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서를 경유하여 북으로 둘러가게 되니 이는 춘분날 태양궤도를 상징한 것이며, 또 말을 북에서 일으켜 동 · 남 · 서 를 모두 지나 북쪽까지 한바퀴 빙 돌게 됨은 하지날 태양궤도를 상징하는 것이고, 또 북쪽에서 말을 일으켜 동쪽과 남쪽을 경유하여 비로소 북쪽으로 나오게 됨은 추분날 태양궤도를 상징한 것이다.

 

말은 꼭 네 필로 함은 사계절(四季節)을 상징한 것이고, 윷은 둥근 나무 두 토막을 쪼개어 대통처럼 네 개로 만들어 엎어지게도 하고 자빠지게도 함은 음양(陰陽)을 상징한 것이다.

이 네 개를 땅에 던지는데 혹 세 개가 엎어지고 한 개가 자빠지기도 하며, 혹 두 개가 엎어지고 두 개가 자빠지기도 하며, 혹 한 개가 엎어지고 세 개가 자빠지기기도 하며, 혹 네 개가 모두 자빠지기도 하고, 혹 네 개가 모두 엎어지기도 하는데, 네 개란 수는 땅(地)에 해당한 수요, 다섯 개란 수는 하늘(天)에 해당한 수인 것이다. 

이른바 고농(高農), 오농(汚農)이란 것은 무엇을 가리킨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혹 윷판 말 쓰는데 구별 있음이 마치 바둑에서 백과 흑이 있는 것과 같아서, 고농과 오농이라 한 것인가! 이 글에 분명치 않은 것이 많기 때문에 대충 이와 같이 적는다.

 

결국 잡기(雜技) 따위는 군자로서는 꼭 할 짓이 아닌 것이다.

명나라 학자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에 “집안에 내기하는 기구는 일체 갖지 못하도록 하였다”하고, 그 해석을 달았는데 “바둑, 장기, 쌍륙 따위는 민간 자제들까지도 배워 익히지 못하도록 했으니 대개 당시 풍습이 그렇게 되었다”고 하였다. 나도 아이들에게 비록 윷놀이일지라도 결코 손에 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자손을 위해 경계하기 때문이다.

안백순(安百順)은, “이 <사도설(柶圖說)>은 선조 때 송도사람 김문표(金文豹)의 작품이다”라고 하였다.

- <성호사설, 만물문>

 

 

 

 

 



섹션 3. 자연의 발견

 

 소똥구리

 

조선 실학의 여러 흐름 중에서도 경세치용학파를 열었다는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은,

어느 날 마당에서 움직이는 소똥구리를 바라본다. 벌레가 하는 모양이 하도 신기해

여러 서적을 뒤져 그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기도 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도 한다.

소똥구리가 땅에 묻힌 똥 덩어리에서 저절로 생겨난다고 말하지만 궁금증을 키울 뿐이었다.

이에 이익은 자세하게 벌레의 생태를 살피고는 그것을 기록으로 남긴다.
무려 40여 년을 쏟아부어 완성했다는 <성호사설(星湖僿說)> 전체 30권 30책 중에서도

권4~6의 '만물편(萬物篇)'에 수록된 368개 항목은 바로 자연 관찰과 실험을 통한 글쓰기의 산물이다.
성호는 '만물편'에서 소똥구리나 바다 게 같은 자연 관찰기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의복과 음식, 생활도구에 대한 단상, 민간신앙에 대한 견해, 메모장 만들기부터 무기개량 방안까지 그야말로 만물학의 방대한 기록으로 남겼다.

기러기와 쇠똥구리의 습성을 관찰해 잘못 알려진 것을 바로잡고, 바닷게를 분류해 생태를 기술하고,

수십 년간 꿀벌을 치면서 느낀 바를 담아 이상적 사회에 관한 장편 시를 짓기도 했다.

"하찮은 풀과 거름이라도 풍성한 곡식을 기르는 바탕으로 삼을 수 있다"

"생물을 보면 깨달음이 있다"고 한 그의 말은 고담준론이 아니라 실사구시를 추구했던

그의 학문 세계를 압축하고 있다.

 

 

소똥구리(길강, 蛣蜣)

 

<자서(자서(字書)>에 “소똥구리는 똥 덩이를 둥글게 만들어, 암컷과 수컷이 함께 굴리다가 땅을 파고

넣은 다음 흙으로 덮고 간다. 며칠이 되지 않아 똥 덩이는 저절로 움직이고,

또 하루 이틀이 지나면 소똥구리가 그 속에서 나와 날아 간다”고 하였다.

내가 관찰해 보니 그렇지가 않다.

처음에는 여러 벌레가 함께 더러운 똥 속에 있는데, 벌레는 많고 동이 적으면 다 빨아먹고야 만다.

그렇지 않으면 서로 나누어 가지되, 두 마리가 한 덩이씩 굴리는데 이리저리 뒤섞여 구별이 없다.

이것은 우연히 서로 만난 것이지 암컷과 수컷은 아니었다.

똥 덩이를 흙 속에 묻어 두는 것은 다음날 먹으려고 쌓아놓는 것이다.

까마귀와 까치가 먹을 것을 얻으면 반드시 남모르게 우거진 숲속에 간직해 두었다가

나중에 파헤쳐 먹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사람들은 소똥구리가 땅속에서 나오는 것만 보고

똥 덩이가 변해서 벌레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런 이치는 없을 듯하다.

이것은 내가 직접 눈으로 보고 알아낸 것으로 나는 일찍이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뜰에 똥 덩이 있는 것을 용하게 알고 찾아와서 庭有苓通聖得尋

뒤에서 밀고 앞에서 당겨 애써 가져가는구나 後推前拒苦駸駸

자연히 서로 만나 함께 이로움을 구하는거지 偶然相値求同利

본래 두 벌레가 한마음으로 하는 건 아니라네. 未必雙虫本一心

- <성호사설, 만물문>

 

 

 

 

 

 

 

꿀벌 기르기(蜂史)

 

벌레로 어질고 착하기는 꿀벌이 으뜸이다. 이 꿀벌은 다른 벌레와 서로 다투는 일도 없다.

무릇 벌레는 초목의 잎과 껍질, 뿌리와 열매를 파먹어 해를 끼친다.

오직 이 꿀벌만은 꽃가루와 풀잎에서 흘러내리는 이슬을 모으는데

혹 다른 벌레를 만나면 옆으로 피하여 일찍이 서로 다투는 것을 보지 못했다.

벌 중에 임금[왕벌]이 있다는 것은

그 지혜와 힘으로 여러 벌들을 덮어 주고 외적을 방어할 수 있어서가 아니다.

벌들이 날마다 하는 짓을 살펴보니, 왕벌은 아무 것도 마음에 두는 일이 없는 듯하다.

하지만 일벌들은 왕벌의 동정을 반드시 지켜보는 모양이다.
벌들이 떼를 지어 웡웡거리며 날아다닐 때, 왕벌은 무리 속에서 돌아다니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매일 한낮이 지나면 반드시 그렇게 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왕벌도 한 마리의 벌일 뿐이다.

왕벌이 한 구멍에 가만히 있기만 하고 아무 하는 일이 없다면,

일벌들은 무엇으로 왕벌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겠는가?
왕벌은 때때로 나와 돌아다니면서 마음과 뜻을 서로 통하게 하고

위와 아래가 견고해지게 하는 것이니 무리를 위해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


이러므로 임금의 은택이 신하에게 미치지 않아도 원망하거나 배반하지 않는다.

크게 성을 내면 침을 쏘고 죽게 되지만, 그 용맹은 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다.

부지런히 임금만을 섬기기 때문에 서로 의심도 불평도 시기도 하지 않는다.


     [蜂王]

후와 왕은 종자가 있어 지위는 매우 다르지만

侯王有種自殊科

꾀가 깊고 힘이 세어서 그렇게 됨은 아니지

不是謀深與力多

단군·신라 시대처럼 서로 양보하는 기풍을 갖는다면

一道檀羅熙皥在

옛날이건 지금이건 찬탈하는 신하가 있겠는가

古今聞有簒臣麽

 

잘 다스리는 정치란 가만히 있는데도 교화가 저절로 깊게 되지

至治無爲化自深

모퉁이에 있는 나라 작아도 임금은 역시 군림한다

偏區雖小亦君臨

도끼와 창으로 겨누면서 위협하고 성내지 않는데도

誰知不怒威鈇鉞

모두가 나라 위하는 마음 품고 있음을 누가 알랴

個個皆懷死長心

 

왕벌은 종자 있어 아랫벌이 복종하니

蜂王種子蜂臣服

권좌에 높이 앉아 중생을 굽어본다

王座高居俯衆生

어진 은택은 널리 골고루 입히지 못해도

未必仁恩覃被廣

높고 낮은 질서는 제대로 지키고 있다

尊卑天得理分明

 

사발만한 한 나라를 통 속에다 벌였어도

金甌天地隙中開

위엄과 덕이 행해져서 온갖 군사 몰려든다

威德風行四到來

이르거나 늦거나 우레같이 뒤끓으니

早晏喧聲雷若沸

궁부에 내린 명령을 각 기관에서 재촉하는 듯하구나

應知宮府放衙催

 

입이 있으니 누구나 벌어먹어야 할 몸이 아니겠는가

有口誰非食力身

노력하여 임금을 섬기는 것도 떳떳한 도리이지

勤勞事上亦天倫

한 마음으로 지키기만 하고 침략이 없게 되어

專心保守無侵畧

강토 밖의 백성들은 차가운 눈초리로 보는구나

冷視封彊以外民

 

바글바글한 자손들까지 모두 군왕이 되어

雲仍蟄蟄總君王

나눠 받은 영토에서 각각 제대로 주장한다

茅土分封各主張

하늘이 주는 이 번화로움은 모두가 내 것이라고

天賦繁華吾自有

봄철이 들면 온갖 꽃향기 차지하는구나

春來專掌百花香

 

왕벌이 명령하면 파발보다 빠르고

王居渙號置郵傳

우두머리 벌이 문을 지키는데, 자물쇠를 단단히 잠그고 있다

冠范司門鎖鑰堅

지나다니는 가다리와 놀기만 하는 나나니는 다 외구이니

過螉遊臝皆寇

누구냐고 묻는 장군벌의 호통 소리 용감히 터져 나오네

誰何賈勇武蜂宣

 

마음과 힘은 억만 벌들이 다 같이 쓰게 되고

心力惟應億萬同

임금과 신하도 일체로 되는 길에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

君臣一路物能通

분수대로 따르는데 항복과 반항이 있으랴

自從分定無降叛

죽는 한이 있어도 나라 잃은 임금 되기는 부끄럽게 여겨야지

抵死猶羞作寄公

출전 :《성호사설》<만물문> 봉순(蜂巡) · 봉사(蜂史)


<성호사설> 만물문의 ‘봉순(蜂巡)’과 ‘봉사(蜂史)’에 수록된 내용에는 관찰과 분석을 통해

생물의 이치를 설명해 가는 성호 이익의 경험적인 글쓰기가 잘 드러나 있다.

성호는 자연 생물에 대해 능동적인 태도로 다가간다.

그에게 자연 생물은 교훈과 깨달음을 주는 존재였다.

인간의 삶에 대한 철학과 함께 이상적인 정치의 모습을 자연에서 찾아본다.

수십 년 양봉의 경험을 토대로 성호는 ‘왕벌[蜂王]’이라는 제목으로 한편의 시를 지었다.

꿀벌의 생태에 비유하여 군왕에 대한 충성과 각자의 직분을 다하는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사회에 대한 유학자의 갈망을 담아낸 것이다.  

또한 성호는 꿀벌을 잘 기르기 위해 유의해야 할 15가지의 방법도 자세히 정리한다.

당시 꿀벌을 기르는 백성들이 참고할만한 실용적인 지식이다.

이처럼 성호는 생물에 대한 관찰을 통해 자연을 과학적으로 바라보았고,

나아가 백성들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한 실용정신을 실천하였던 것.

 

 

 

 

 

       (신사임당의 '초충도')

 

 초충도(草蟲圖) - 풀과 곤충

 

모란(牧丹)

주렴계(周濂溪)가 이르기를 “모란은 꽃 중에 부귀한 꽃”이라고 하였으니,

사람의 눈을 가장 기쁘게 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내가 보기에 모란은 가장 쉽게 떨어지는 꽃이다.

아침에 곱게 피었다가 저녁이면 곧 시들게 된다. 부귀란 오래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비유할 만하다. 또 모양은 비록 화려하나 냄새가 나빠서 가까이 할 수 없으니, 부귀란 참다운 것이 못된다는 것을 비유할 만하다.

 

그런 까닭에 나는 벌을 노래함이란 시를 지었다.

 

牧丹花上何曾到    저 미물인 벌도 모란 꽃송이에는 가려하지 않으니

應避花中富貴名    꽃 중에 부귀화(富貴花)라는 이름을 꺼려하는 것이지

-<성호사설, 만물문>

 

 

 

갈대를 입에 문 기러기(銜蘆)

<회남자(淮南子)>에 “기러기가 갈대를 물고 나는 것은 쏘는 활을 피하려 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나는 이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함로(銜蘆)’란 대개 군중(軍中)에서 재갈을 물린 것처럼 소리 없이 지나간다는 뜻이다.

기러기는 떼를 지어 날아갈 때 울음으로 서로를 부르지만, 낮게 날아가다 사람과 거리가 가깝게 되면 재갈을 문 듯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니 이런 데에서 징험할 수 있겠다.

내가 살고 있는 바닷가에는 기러기 떼가 잘 모이지만, 갈대를 물고 다니는 기러기는 한 마리도 보지 못했다.

 

고양이(家狸)

고양이는 가리(家狸)이다. 옛사람의 시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猫兒眼裏定周天   고양이 눈 속에는 주천이 제대로 정해져 있어

子午懸針卯酉圓   자오로 지남침을 달고 묘유로 둥글게 돈다.

寅申巳亥杏仁橢   인신과 사해로 갈 때는 살구씨처럼 길쭉하게 되고

四季還如棗心然   사계로 돌아올 때는 대추씨와 같이 뾰족하구나.

 

고양이 눈동자는 살구씨처럼 생겨서 시간처럼 빙빙 돈다는 것을 뜻하는 듯하다.

자오(子午)란 바로 남북의 방향인 까닭에 한쪽 면만 드러내게 되고, 묘유(卯酉)란 동서방향으로 가로놓였기 때문에 둥근 전체가 나타나게 된다. 그 중간에 대추씨처럼 되기도 하고 살구씨처럼 되기도 하는 것은 모두 앞을 향해 비뚜름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모습이 각각 다르게 되는 것이다.

혹 고양이가 성을 내게 될 때는 눈 속에 달린 지남침이 반드시 성내는 기를 따라 움직인다. 따라서 성을 내면 기가 따라 움직이게 되고, 눈동자도 역시 남북으로 바로 서게 된다.

 

병아리 기르기

병아리의 털과 날개가 생기기 전에 솔개와 매는 위에서 엿보고 생쥐와 족제비는 아래에 숨어 있다. 살쾡이와 고양이는 둥우리를 뚫고, 철모르는 아이들은 기왓장과 돌멩이로 이리저리 던진다. 이들은 모두 병아리를 잡아먹으려고 한결같이 엿보면서 사람이 어떻게 보호하는지 살핀다. 따라서 돌봐주는 사람의 마음이 조금만 게을러지면 온갖 걱정이 이틈 저틈으로 들이닥친다.

나는 병아리를 기를 때 남은 밥알을 자주 먹이며 부지런히 보호해준다. 똥구멍이 막힌 것은 털을 가위로 잘라주면 똥이 바로 터져 나온다. 이렇게 하면 병아리가 쉽게 자란다.

대개 백성들이 겪는 여러 가지 고통을 잘 사는 사람들은 깨닫지 못한다. 온갖 고통을 받고 또 굶주리게 되니 어찌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다가 도랑과 구렁에 엎어져 죽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성호사설, 만물문>

 

 

 

 

  

물고기와 게(장한종)

 

 

게(蟹)

갯가와 바닷가에 게가 많은데, 내가 본 것은 열 종류 정도이다.

여항(呂亢)의 <십이종변(十二種辯)>, <해보(蟹譜)>, <본초(本草)>, <도경(圖經)>, <자의(字義)> 등을 살펴보면 물의 형태와 지대에 따라 다르다고 하지만, 혹 살펴서 아는 것에도 옳음과 잘못이 있다.

성호가 안산 바닷가에서 관찰한 게는 대략 18종이다.

 

방해(蚄蟹) - 약에 넣으면 맛이 좋다.

이오(二螯), 팔궤(八跪) - 어느 곳에나 다 있다.

유모(蝤蛑) - 바다 가운데 있는 큰 게로 빛이 붉고 등에는 뿔과 가시가 있는데, 속칭 ‘암자(巖子)’라고 한다.

발도자(撥棹子) - 뒷발이 넓고 엉성한 것이 돛대처럼 생겼다. 물을 밀고 떠다니는데, 속칭 ‘관해(串蟹)’라고 하는 것은 등에 꼬챙이 같은 두 뿔이 있기 때문이다.

갈박(竭朴) - 팽활보다 크고 껍질에 검고 아롱진 무늬가 있다.

오정적(螯正赤) - 농게를 말한다. 늘 큰 뿔로 햇빛을 가리고 작은 발로 먹이를 구한다. 속칭 ‘농해(籠蟹)’란 것인 듯한데, 등이 삼태기처럼 둥글고 길쭉하기 때문이다. 암컷은 두 발이 모두 작다.

활(蟛螖) - 무늬발게를 말한다. 바닷가의 바위와 자갈밭에 산다. <만물문>에 따르면 ‘팽월(蟛越)’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은 ‘팽해(蟛蟹)’라고 부른다.

사구(沙狗) - 팽활과 흡사하다. 모래에 구멍을 만들고 사람을 보면 이리저리 방향을 바꾼다. 지금 흔히 말하는 ‘갈해(葛蟹)’라는 것이 있는데, 등은 편편하면서 길고 털이 있으며 다닐 때는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기 때문에 잡기 어려운데 이것이 사구인 듯하다.

의망(倚望) - 크기가 팽활과 비슷하며 늘 사방을 흘겨보면서 두 뿔을 들고 일어서서 먼 데를 바라본다. 속칭 ‘황통(黃通)’이라는 것인데, 단오날 밤이면 반드시 바다풀 위에 빽빽하게 둘러 모인다. 지역 사람들은 그네뛰기 한답시고 불을 밝히고 수없이 잡는데 팽활과 비교하면 조금 크게 생겼을 뿐이다.

노합(蘆합=虍+巾) - 팽기(蟛蜞)나 오정적처럼 생겼으나 먹을 수가 없다. 지금 속명으로 ‘적해(賊蟹)’란 것은 등에 조금 아롱진 무늬가 있다.

팽기(蟛蜞) - 팽활보다는 크고 보통 게보다는 작으며 팽월과 비슷하면서 조금 크고 털이 있다. 밭고랑 가운데 구멍을 뚫고 다니는데 채도명(蔡道明)이 게인 줄로 착각하고 먹었다가 거의 죽을 뻔했던 게가 이것이다.

마통해(馬通蟹)는 독이 있고, 율해(栗蟹)는 팽활과 같은데 등이 넓적하고 털이 있으며 뿔과 발이 뾰족한데 끝이 조금 붉다. 이것은 여항(呂亢)이 기록한 열두 가지 종류 중에도 없는 것이다.

 

옹검(擁劒), 망조(望潮), 석군(石蜠), 봉강(蜂江) 등에 대해서는 어업하는 집에 물어보았는데, 모두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 <성호사설, 만물문>

 

 

<만물문>에 기록되어 있는 게 중에서 10여종 정도는 현재 멸종되었다고 한다.

 

도둑게 - 바다와 가까운 습지, 논밭, 냇가 등에 산다. 부엌에 들어가 음식물을 훔쳐 먹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방게 - 강 하구의 진흙 바닥, 갈대밭에 산다.

칠게 - 갯벌에 사는 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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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도(魚蟹圖) - 옥산 장한종 / 임전 조정규 : http://blog.daum.net/gijuzzang/3291555

 

 

 

 

물레(蠶綿具)

기계가 교묘하고 세밀함에 따라 공력은 갑절이나 줄어든다. 우리나라 물레는 문익점의 장인 정천익(鄭天益)이 처음 만들었다. 물레 하나에 실톳도 하나로 되어 있다. 한 사람이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쥐고 돌리면서 왼손으로는 실을 뽑아 가락에 감게 되어 있는데, 돌아가는 속도가 매우 빠르다. 중국 물레와 비교하면 일을 갑절이나 할 수 있으니 묘하게 만들어졌다고 하겠다.

 

사조의 <석문>에는 “강남 지방에는 목면이 많이 생산되는데 봄 2-3월이 되면 씨를 뿌린다. 싹이 난 후에 한 달이 지나서 세 차례만 김을 매면 꽃이 피어 열매를 맺는다. 열매가 익으면 껍질은 네 조각으로 찢어지고 그 속에서 솜과 같이 생긴 흰 숭어리가 제대로 터져 나온다. 지방 사람들은 쇠로 만든 씨아로 그 씨를 빼버리고, 솜과 같은 것만 모아서 자그마한 대나무 활로 활줄을 잡아당기면서 뭉실뭉실하게 탄다. 모두 일정하게 타진 후에 솜을 말아서 대통처럼 속이 비게 만든다. 물레 가락에 대고 돌리면 저절로 실오리가 뽑혀 나오는데, 베틀에 짜서 베를 만든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지금의 면화(棉花)라는 것이다.

 

목면 재배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은 바닷가의 구석진 지대로 목면은 심지 않는다. 목면을 혹 시험 삼아 재배해보는 자가 있지만 게으름만 피우고 제대로 가꾸지 않는다. 나중에 와서 잘되지 않으면 토양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니 어찌 그럴 이치가 있겠는가.

그러나 사실은 풍속습관이 고쳐지지 않아서 그렇지 목면의 성질이 지방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사방을 두루 살펴보면, 산골이건 바닷가건 목면이 생산되지 않는 데가 없으니 이는 책임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지금 북쪽지방에도 목면을 심지 않으나 이 지역은 모두 바다가 가까워서 기호지방 산 가까이 있는 고을보다 따뜻하다.

나는 이런 사실을 직접 듣고 본 결과, 저 머리에 젖은 습관은 고질처럼 되고 가꾸는 손은 생소해서 끝내 제대로 가꾸는 방법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호남지방에는 소마가 없고 다만 수유나무 열매로 기름을 짜서 등불을 켜게 된다. 남과라는 호박이 난 지도 거의 백년이 가까이 되었는데 아직 호남지방에는 미치지 못했으니 목면이 생산되지 않는 것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만약 목면을 심는 방법만 깨닫는다면 반드시 생활에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인데, 삼베옷과 가죽옷을 입는데 습관이 되어서 힘껏 생산해보려고 하지 않는다. 이들을 잘 달래고 지도하여 목면 심기를 풍속이 되도록 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황시(黃始)와 문익점(文益漸)과 같은 공이 있게 될 것이다.

 

뽕나무 재배

뽕나무의 잎은 누에를 먹이고 껍질은 종이를 만들며 가지는 휘어서 광주리와 농 등속을 만든다. 뽕나무는 크게 키우기가 매우 어렵다. 뽕나무에는 두 종류의 벌레가 있는데, 한 종류는 가지에서 시작하여 속을 파먹고 뿌리에 들어간다. 한 종류는 나무가 오래 묵으면 벌레가 껍질과 살 중간에서 저절로 생겨서 그것이 빙 두르게 되면 나무가 말라 죽는다. 그리고 땅이 너무 토박하면 무성하지 않고 밭두둑에 심으면 곡식에 해를 입힌다. 그래서 뽕나무를 가꾸는 방법은 해마다 베어서 크게 자라지 못하게 한다.

또 오디가 익으면 씨를 받는데 심으면 바로 나지만, 여름철 가뭄에는 잘 마르고 겨울 추위에는 곧 얼어 죽는다. 이 때문에 씨를 받아 보관했다가 해동된 후에 심으면 겨울철이 되더라도 뿌리가 깊이 박혀 죽지 않을 것이다.

-<성호사설, 만물문>

 

 

 

 

 

 

 

섹션 4. 만물학의 제창

 

 

 책가도(책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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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이규경)                

 

조선 헌종 때 오주 이규경(李圭景, 1788~?)이 우리나라ㆍ중국(中國)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고금의 사물에 대하여 고증하고 해설하고 천문(天文)ㆍ시령(時令)ㆍ지리(地理)ㆍ풍속(風俗)ㆍ관직(官職)ㆍ궁실ㆍ음식(飮食)ㆍ금수(禽獸) 등 모든 부문에 관한 것이 수록된 60권이다.

역사 · 경학 · 천문 · 지리 · 불교 · 도교 · 서학(西學) · 예제(禮制) · 재이(災異) · 문학 ·음악 · 음운 · 병법 · 광물 · 초목 · 어충 · 의학 · 농업 · 광업 · 화폐 등 총 1,417항목에 달하는 내용을 변증설(辨證說)이라는 형식을 취하여 고증학적인 방법으로 해설하고 있다.

19세기에 들어와 임진 · 병자 양란(兩亂) 이후 조선사회 내부에 축적된 학문적 성과와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 등으로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문집인《임하필기(林下筆記)》과 작가 미상의《동전고(東典考)》등 백과전서적인 책들이 많이 나타났는데, 이 책은 이러한 학풍을 대표하고 있다. 특히 이 책은 규장각(奎章閣) 검서관(檢書官)을 지낸 조부인 이덕무(李德懋)의《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규경은 서문에서 “명물도수(名物度數)의 학문이 성명의리지학(性名義理之學)에는 미치지 못하나 가히 폐할 수 없다”고 하여 자신이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를 적고 있다. 이규경은 성리학에 해박하였으며, 불교와 도교 및 서학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석전총설(釋典總說)>에서는 “유가 · 도가 · 석가를 3교로 일컬어 정족(鼎足)처럼 평등하게 여겨온 지가 오래되었다”고 하였으며, 노자(老子)를 성인(聖人)의 무리로서 평가하였다. 서학에 대해서는 발전된 서양의 과학기술은 수용하고 천주교는 사교로서 배척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역사에 대한 관심은 <동국전사중간변증설(東國全史重刊辨證說)> <이십삼대사급동국정사변증설(二十三代史及東國正史辨證說)> 등에 나타나 있으며, 중국의 역사에만 관심을 갖지 말고 우리의 역사에 대해 애정을 가질 것을 강조하고 역사적 사실을 치밀하게 고증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평민 안용복(安龍福)이 울릉도를 우리 영토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사실을 소개하고 있다. 이 외에 민중생활사와 관련된 내용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이 중에서 농가(農家)의 월령(月令)에 대한 것, 구황식물로서 감자, 어구(漁具), 장시(場市), 화폐, 병법, 금속, 자연과학에 대한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 책은 19세기 지식인의 학문의 폭과 깊이가 나타나 있으며, 왜곡되게 인식되어 있는 19세기 사상사를 검출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성호 이익의 저술을 모은 책, 성호집 20세기,
목판본 이익(李瀷) 저술, 이병휴(李秉休) 편

 

이익(李瀷, 1681~1762)이 평생에 걸쳐 이룩해 놓은 실학사상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저술이다.

그의 7대손인 이덕구(李德九)의 집에 보관해 오던 것을

1917년 밀양의 퇴로서숙(退老書塾)이라는 곳에서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전체 구성은

이익의 문장을 살펴볼 수 있는 부(賦)와 악부(樂府), 친지 · 제자들과 주고받은 편지인 서(書),

여러 가지 저술들은 모은 잡저(雜著), 기(記), 발(跋), 논(論) · 명(銘) · 잠(箴) · 찬(贊) · 송(頌),

축문(祝文) · 제문(祭文), 비(碑) · 묘표(墓表), 묘갈명, 묘지명, 행장, 행록 · 유사(遺事) · 전(傳)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편지들을 모은 서(書)에서는 친구 및 문인(門人)들과의 학문교유 양상을,

잡저에서는 그의 실학의 핵심인 경세치용학(經世致用學)의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실학자 이익의 사상과 학문 특징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나는 가난한 사람이다. 가난하다는 뜻은 재물이 없다는 말이다.

재물이란 부지런히 힘쓰는 데서 나오는 것으로

부지런히 힘쓰는 습관이란 어릴 적부터 익혀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습관을 익히지 못한 내가 어찌 가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재물 중에 곡식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하루에 두 그릇의 밥은 입이 있는 자는 누구나 먹어야 하는데,

저마다 노력을 다해서 얻은 것이 아니므로 재물이란 항상 모자라고 없어지는 것이 걱정이다.
나는 천성이 글을 좋아하여 온 종일 글만 읽고 있다.

따라서 한 올의 베나 한 알의 쌀도 모두 내 힘으로 생산된 것이 없다.

그러니 어찌 이 세상의 한 마리 좀벌레가 아니겠는가?

다행히도 물려받은 땅이 조금 있어 몇 섬의 쌀을 받고 있다.

그런 빠듯한 살림살이 속에서 절약하여 적게 먹는 것으로

첫번째 경륜(經綸)과 양책(良策)으로 삼고 있다.

요즘 사람들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 흰 죽 먹는 것을 ‘조반(早飯)’이라 하고,

한낮에 배불리 먹는 것을 ‘점심(點心)’이라 한다.

부유하거나 귀한 집에서는 하루에 일곱 차례를 먹는데,

술과 고기가 넉넉하고 진수성찬이 가득하니,

하루에 소비하는 것이 백 사람을 먹일 수 있다.

옛날 하증(何曾)처럼 집집마다 사치하니, 민생이 어찌 곤궁하지 않겠는가?

매우 탄식할 일이다.

 (《성호사설》인사문 식소(食小) 중에서 발췌)


위의 글에서 나타나듯 성호의 식생활은 검소했다.

가난한 학자의 생활에 자족하면서 백성들의 음식에도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성호는 죽 음식을 즐겼다.

새벽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며 먹었던 죽은 임금님부터 백성들까지 먹었던 음식 중 하나였다.
콩은 허기진 백성의 식탁을 채워 줄 으뜸가는 곡식이었다.

“곡식이란 사람을 살리는 것으로 그 중 콩의 힘이 가장 크다”고 성호는 말하고 있다.

가난한 백성은 콩을 갈고 콩나물을 함께 넣어 죽을 만들어 먹도록 추천했다.
또한 기침병[해수병]을 치료하는 민간요법으로

뜨거운 순두부 물에 꿀을 타서 먹으면 효험이 있다는 것을 널리 알리고 있다.
성호는 콩을 자신의 삶에 매우 긴요한 곡식으로 생각하였고

나아가 백성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일상의 음식으로 여겼다.

성호가 지은 “콩 밥 먹으며”란 시에서 안빈낙도하며 민생에 따뜻한 시선을 지녔던

성호선생의 모습을 떠올려 보시기 바란다. 

- 실학박물관 학예팀 조준호

2011년 6월2일, 실학박물관 뉴스레터 <실학자의 단상>


 


        콩 밥 먹으며[半菽歌] 중

 

 

                 (《성호선생전집》권5)

 

하늘이 오곡을 만드니 콩도 그 하나지

天生五穀菽居一。

그 중 붉은 색은 더욱 좋다고 하네

就中赤色尤稱嘉。

불이 왕성하면 물은 빠르게 죽고

火旺方生水旺死。

달콤하고 부드러우며 맛은 더욱 좋다

甜滑輕輭味更奢。

가난한 집 궁핍한 살림에 더없이 좋은 방편이고

貧家乏財善方便。

싼 가격에 쉽게 구할 수 있으니 이것 또한 좋다

賤價易辦此亦多。

쌀과 잘 어울려 내 몸 고르게 할 수 있고

與米相和得均劑。

가마솥에 푹 찌면 김이 모락모락

錡釜爛蒸騰成霞。

그릇에 담아 내면 그 기운 사람을 씌우고

盈杅啓會氣燻人。

깨끗하고 맑으며 고르게 익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水晶火齊交相加。

들꽃에 봄 바람 불어 피고 또 피니

春風雜花開複疊。

복숭아 꽃 오얗 꽃 울긋불긋 그 색 진하다

桃紅李白色盪磨。

어른과 아이들 달려나가 다투어 숟가락질 하네

長少分行爭擧匙。

일시에 씹으니 입 안은 향그럽다

一時咀嚼芬齒牙。

이래로 고기 맛은 오래도록 잊어버리겠지

爾來肉味忘已久。

강의 잉어와 송어· 농어 자랑하지 못하고

河鯉松鱸莫相誇。

앞 마을 한 번 보니 연기 나는 집 없으니

請看前村煙未起。

이 물건 우리에게 큰 존재 아니겠나

此物於我非泰耶。

전해 들으니 부귀한 사람들은 너도나도 사치스럽다는데

傳聞貴富競豪侈。

한 상에 만냥 고기반찬 가득하여도

一餐萬錢羶葷羅。

마음 흡족하고 배 불리는데는 자랑할 것 없다

塡胷果腹不肯休。

인민들 벗겨내여 자기 욕심 채우니 이를 어찌할까?

剝民充欲其柰何。

나는 군자를 알거니 스스로 너그러운 것 잘하지

吾知君子善自寬。

콩 밥이 큰 사람의 관대함에 무어 해가되겠나?

半菽何害碩人薖。

가난한 집에 사는 것도 괜찮으니

蓬門日月足生涯。

육경을 책상에 펴놓고 아침저녁으로 읽는다.

六籍在案終朝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