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듬어보고(전시)

[서울역사박물관] 1901년 체코인 엔리케 스탄코 브라즈의 서울방문

Gijuzzang Dream 2011. 4. 16. 10:47

 

 

 

 

 

 

 

 

전시명 : 1901년 체코인 엔리케 스탄코 브라즈의 서울 방문
전시기간 : 2011-04-14 ~ 2011-06-12
전시장소 :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1층)

 

 

 

 

이번 전시는 1901년 제물포를 통해 서울을 방문한 체코인 브라즈가

서울 방문시 촬영하여 남긴 50여 점의 서울 사진들과

이후 여행기를 비롯한 체코인들이 남긴 한국에 대한 기록을 소개함으로써

20세기 전반 당시 체코인이 인식하고 있는 조선과 서울의 모습이다.

  

전시의 구성

(1)한-체코 교류사의 출발  (2)여행가 브라즈  (3)1901년 브라즈가 본 서울

 

 

서양 각국들이 동양에서 힘을 겨루던 19세기 말,

마침내 고요한 아침의 나라였던 조선은 새로운 도약을 꿈꾸며 문호를 개방했다.

이때 외교관을 비롯하여 많은 외국인들이 각자의 꿈을 안고 조선의 수도 한양을 찾아왔고

그들은 조선여행기와 사진을 남겼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사진들은

체코 국립 나프르스텍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 문화박물관(Naprstek Museum of Asian, African and American Cultures, part of the Czech National Museum) 소장품으로서

엔리케 스탄코 브라즈(E. St. Vraz, 1860-1932)가 1901년 5월 잠시 서울을 방문하였을 때 촬영한 것이며,

비록 그 양이 많지 않으나 당시 서울의 생생한 역사와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시대부터 우리나라를 방문한 체코인들과

그들의 여행기, 소설 등을 소개한다.

 

 

‘여행가 브라즈’에서는

북아프리카, 라틴 아케리카, 태평양 군도, 그리고 중국과 인도까지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사진과 여행기를 남긴 브라즈에 대해 소개한다.

그가 서울을 찍은 카메라와 같은 기종인 코닥 스테레오 카메라(1907년)를 비롯해

스테레오 카메라로 찍은 유리건판 필름(동시에 2장의 화상이 찍힘)을 전시했다.

당시 사진의 원리와 스테레오 카메라로 찍힌 입체 사진을 볼 수 있는 체험 코너를 마련해

관람자의 이해를 도왔고 브라즈가 직접 타고 온 배는 아니지만 바다를 건넜던 선박 모형을 전시하여

당시 교통수단에 대해 이해를 도왔다.

 

‘1901년 브라즈가 본 서울’은 브라즈가 찍은 사진 중에서 엄선해 총 53점으로,

서울에 머문 1901년 4월 말부터 5월 말까지 찍은 거리, 궁궐, 민가, 명소 등을 담고 있다.

서울의 장소, 거리, 궁궐, 사람들, 서양인의 활동으로 나누어 전시했다.

그리고 브라즈의 여정을 추적한 영상을 만들어 사진의 이해를 도왔다.

또한 패널에서 브라즈의 사진이 갖는 의미와 당시 배경을 설명했다.

특히 동대문에서 내려다 본 종로 거리는 현재의 모습을 같은 위치에서 촬영해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비교할 수 있다.

 

전시장에 걸린 브라즈의 사진은

창덕궁 돈의문, 탑골공원, 경복궁, 남대문로 상점가, 성경을 읽고 있는 가정, 활을 쏘고 있는 양반들의 모습,

이화학당과 보구여관 등으로 추정되는 서양인 학교와 병원의 사진 등 서울의 다양한 일상이 소개된다.

브라즈의 사진 중에서 경복궁 신무문에서 후궁으로 가는 길에 보이는 서양식 시계탑 모습,

창덕궁 낙선재의 후원 화계 모습 등은 현재 실물이 남아 있지 않아 그 자체로 귀중한 사료다.

 

 

 

한국을 소개한 체코인

 

우리나라에 찾아온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사망한

보헤미아 출신 미국 기자 막스 터블스(현재 인천 연수구 청학동 외인묘지 안장)를 비롯해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가 여행기를 남긴 코르젠스키와 다네시,

체코문학에 한국인 인물을 소개한 흐로우차와 엘리아쇼바,

일제 강점기 때 동아일보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해 강연한 포스피쉴 등을 소개했으며,

그들의 출판물을 전시해 초기 체코인과 한국의 인연을 살펴볼 수 있게 했다.

 

 

 

 

인터뷰 기사

 

: 야로슬라브 올샤 Jr.(Jaroslav Olsa, jr./ 주한 체코공화국 대사) 

 

 

 

한-체코 교류사에 대해 언급하자면, 다음 세 가지 특징을 먼저 꼽을 수 있겠다.

가장 먼저 대부분의 사람들이

21년 전 체코(당시 체코슬로바키아)와 대한민국 간 최초로 외교협정이 성사된 사건을 떠올릴 것이다.

이는 매우 최근에 맺은 실질적인 협정으로 이후 양국 간 활발한 교류의 초석이 되었고

비유럽국가(중, 미, 일) 중에서는 체코 국내에서 4번째로 무역규모가 크며,

무역량 면에서도 2010년 기준으로 23억불을 넘어서게 되었다.

 

또한 한국의 대 체코 투자규모는 지난 20여 년간 독일, 일본, 미국에 이어 4번째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에 소개된 대표적인 체코 제품에는 크리스탈, 디자인, 필스터(Beer Pilsner) 맥주,

수력 터빈(hydraulic turbine) 등이며 드보르작, 스메타나 같은 유명 체코작곡가들의 음악과 뮤지컬,

대중음악이 한국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체코에서는 현대자동차, LG전자, 삼성컴퓨터, 한국영화 등이 대중의 호평을 받고 있다.

 

실제로 체코와 한국의 교류가 시작된 때는

지금으로부터 125년 전 1886년 3월15일로

이 날은 서울 사통의 한 주택에서

중년의 외국인남성이 천연두로 사망한 날이다.

 

막스 터블스(현재 인천 연수구 청학동 외인묘지 안장)는

미국잡지 Harper's지의 기사제보를 위해

제물포에 한 달 전에 도착했으며,

터블스는 체코 중부지역인 보헤미아에서 한국으로 건너와

사망하게 된 최초의 체코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느 사료에서도

그의 업적이나 기록을 찾아볼 수는 없지만

체코와 한국 교류사에 길이 남을 최초의 인물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막스 터블스(Max Taubles, 1845-1886)의 묘비

1886년 보헤미아 출신 막스 터블스(본명은 막스밀리안 타우베레스, Maximilian Taubeles)는

미국의 유명잡지 ‘하퍼스(Harper's)’에 기고할 기사 취재를 위해 조선에 왔다.

그러나 그는 정작 조선에 대한 기사는 한 줄도 보내지 못한 채 천연두에 걸려 생을 마치게 되었다.

3월 17일 제물포에서 언더우드 목사의 진행으로 장례식이 치루어졌다.

그의 묘는 현재 인천시 연수구 청학동 외국인묘지에 있다.

 그는 오늘날 체코 공화국의 문화적 모태인 보헤미아 출신으로 조선을 방문한 첫 번째 체코인이다.

 

 

 

체코의 가장 영향력 있는 여행작가였던 브라즈

 

‘최초’라는 개념이나 한-체코 양국간 무역현황 등의 통계적 사실 혹은 기록과는 별개로

과거 체코인에게 한국을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을 꼽자면 엔리케 스탄코 브라즈를 들 수 있다.

브라즈는 사진가이자 작가로서

남아프리카를 탐험한 에밀 흘루브와 중남미의 식물학을 연구한 보이테흐 프리츠와 함께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 독립 이전 가장 영향력이 있는 체코여행가 중 한 명이다.

 

브라즈는 여러 편의 저술과 더불어 수차례 강연회를 통해

일반 대중에게 체코 밖 세계를 알리는데 크게 기여한 기행작가이다.

체코 사회가 인접해 있는 유럽국가 외에 멀리 떨어진 외부세계를 이해할 수 있었던 데에는

브라즈를 비롯한 당시 탐험가들의 역할이 컸던 것이다.

브라즈가 강연에서 소개했던 수 만 점의 사진자료는 라틴아메리카에서부터 태평양군도에 이르기까지,

또한 아메리칸 인디안에서부터 멀리 인도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대륙의 내용을 망라할 정도로

규모나 내용면에서 방대함을 자랑한다.

 

 

뛰어난 사진작가였던 브라즈는

1880년대 중반부터 현재의 가나지역에서 사진을 찍기 시작한 이래 꾸준히 사진기록작업을 이어갔다.

그의 사진은 멀게는 뉴기니부터 사업화된 라틴아메리카 대로에 이르기까지 지역의 구분을 두지 않았고,

특히 그의 사진은 강연과 교재로 활용이 용이하도록 상당히 묘사적인 각도에서 기록된 편이다.

다행히도 그의 방대한 소장품들은 훼손 없이 그의 사후 체코 프라하에 소재한

아시아문화 전문연구기관인 나프르스텍 박물관에 기증되어,

브라즈가 기증한 사진자료들은 나프르스텍 박물관에서 전문적으로 보존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브라즈가 촬영한 서울 사진들이

1930년 브라즈가 사망한 후 출판이나 공식적인 소개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내용이 대부분이다.

당시(1900년대초) 서울에 대한 사진자료가 그리 많지 않음을 감안할 때

브라즈 사진기록이 풍부한 자료로 이해되기를 바란다.

- 서울역사박물관 문화정보지 <Semu> 2011년 봄호, No. 29. p.6-7

 

 

 

 

1. 엔리케 스탄코 브라즈(Enrique Stanko Vráz, 1860-1932/ 사진가, 여행가)

 

1901년 4월27일 제물포로 입국, 약 3주간 서울과 근교를 여행하고

5월19일 부산을 통해 한국을 떠나 일본으로 떠났다.

브라즈는 중국 북경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제물포를 통해 조선에 들어왔다.

이때 제물포까지 타고 온 배는 범기선(증기와 바람을 동력으로 사용)이었다.

당시 중국을 통해 한국에 들어온 여행객들은

제물포 앞바다에서 범기선에서 내려 작은 배로 갈아타고 상륙하였는데,

브라즈도 이와같은 방법으로 입국하여 기차를 타고 서울로 이동하였다.

 

그는 라틴아메리카에서부터 태평양군도, 아시아와 인도까지 여행하며 여행기와 사진을 남겼다.

『중국. 여행 스케치(Čina. Cestopisné črty)』중 3장「북경에서 한국을 거쳐 시베리아로」에서

짧은 서울 방문기를 남겼고, 그가 서울 방문 시 촬영한 80여 장의 스테레오 사진은

체코 국립박물관 나프르스텍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문화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국은 동아시아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라고 불릴 만큼

풍요로운 자연과 온화한 기후를 갖추고 있었다.(기행문에서)

 

나는 한국인들과 깊이 공감한다.

일본인들이 자유의 외침을 뿌리 뽑기 위해 칼과 피를 동원하고 있는 와중에

어떤 새로운 소식이 전해질까 걱정스럽다.(3 ․ 1만세 운동 소식을 듣고)

 

 

 

2. 요세프 코르젠스키(Jpsef Kpfensky, 1847-1938/ 여행가)

한국을 처음으로 여행한 체코인으로,

1901년 부산항과 원산항을 방문하고 기행문을 발표하여 체코인들에게 한국을 알렸다.

 

 

3. 카렐 흐로우차(Karel Hloucha, 1880-1957)

한국을 주제로 삼은 최초의 체코 작가일 뿐만 아니라 <동양의 불, 1906>이라는 책에서

체코 문학에 한국인 인물을 처음 창조한 작가로서 체코 대중에게 한국을 소개했다.

 

 

4. 이르지 빅토르 다네시(Jiri Viktor Dancs, 1880-1928)

1923년 한국을 방문하였고, 1926년 출판한 여행기 <태평양 주변에서 보낸 3년>에서

일본 식민지배의 문제를 지적하고 한국을 소개하였다.

 

 

5. 바르보라 마르케타 엘리아쇼바(Barbora Markcta Eliasova, 1885-1957)

1933년 한국을 방문한 최초의 체코여성이다.

젊은 한국독립운동가를 다룬 단편소설 <한국인 청년 남석, 1934>를 짓고,

1941년에는 독립을 원하는 애국자들과 친일파 남매의 갈등을 다룬

장편소설 <순애와 기태(Sunae a Kétai)>를 발간하였다.

 

 

6. 보후밀 포스피쉴(Bohumil Pospisil, 1902-?)

여행가이자 저술가로서 동아일보 초청으로 1928년 2월19일 강연회를 개최하였으며,

1934년 1월과 2월 “고요한 아침의 나라의 실루엣”이라는 기사를 잡지 <전세계를 통해>에 기고하였다.

 

포스피쉴초청강연회 강연홍보기사(동아일보, 1928년 2월17일, 19일자)

 

 

 

 

  

◇전시 사진  

 

■가가(假家)가 깨끗이 정돈된 돈의문 앞 새문안길(기재된 소제목 - '도시대문 옆 보행자들')

정면에서 돈의문을 보고 촬영하였다. 오른쪽으로 전차 선로가 놓여있으며,

주변의 상가 앞에 있던 가가(假家)를 모두 철거하여 길가가 정비되고 길 왼편에 수구(水口)가 드러나 있다.

왼쪽 집 앞에는 장옷을 둘러 얼굴을 가린 여성들이 있고, 그 뒤쪽으로는 가마가 보인다.

오른쪽에는 남자아이가 동생을 업은 모습, 성문 바로 앞쪽에는 물지게꾼과 신식군복을 입은 군인이 보인다.

서양인들이 흥미롭게 느낄 만한 다양한 문화들이 한 장면 속에 압축되어 있다.

앞쪽에 서 있는 사람들은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사진을 촬영하는 쪽을 바라보고 있다.

 

 

■방치된 경복궁 근정전(기재된 소제목 - ‘방치된 궁궐 뜰’)

고종이 왕위에 오른 후 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하여 국왕과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경복궁 안 건청궁에서 왕비가 살해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난 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1896년 2월11일)하면서 경복궁은 빈 궁궐이 되고 말았다.

브라즈가 방문한 1901년 5월은 경복궁이 빈 궁궐이 된 지 5년이 지난 때였다.

사진 속에 보이는 근정전 건물과 기단의 석물들, 뜰에 세운 품계석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의연히 제 모습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뜰에 깔린 박석 사이로 자란 잡초나 지붕의 잡상 일부가 사라진 모습은

주인이 떠난 궁궐이 방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진의 중앙에 서 있는 흰 도포 차림의 인물은

브라즈의 여행을 안내한 인물로 다른 사진에도 자주 등장한다.

 

 

 

■5월의 경복궁 경회루(기재된 소제목 -  ‘여름 궁궐 정원에 있는 호수(연못) 위 정자’)

 

경회루의 모습을 동남쪽에서 잡아 경회루와 물그림자, 서쪽의 인공섬과 동쪽 담장에 난 문을

한 화면에 담았다. 오른쪽 끝에 왕의 침소인 강녕전의 지붕이 보인다.

전경을 담기 위해 오늘날에도 즐겨 쓰는 구도다.

경회루 지붕의 삼각형으로 된 풍판에는 작은 창이 열려 있는데 지금은 없어진 창이다.

브라즈가 한국을 방문한 시기는 5월이었다. 경회루를 둘러싼 연못에는 연꽃의 줄기가 올라와 있으나

아직 작은 잎이 보일 뿐 꽃은 보이지 않는다. 이 사진을 통해 계절을 확인할 수 있다.

 

 

■경복궁 신무문(神武門)에서 후궁으로 가는 길

(기재된 소제목 - ‘집들과 벽이 에워싸고 있는 궁궐 길’)

건청궁 집옥재를 나와서 서쪽으로 가면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으로 나가는 길이 있다.

이 사진은 신무문 위에서 남쪽을 향하여 그 길을 찍은 것이다.

왼쪽 담장은 집옥재 구역의 담장이다. 이 담장 너머 나무 사이에는 벽돌로 된 서양식 시계탑이 보인다.

이 시계탑은 러시아 건축가 세레딘 사바친이 설계하여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담장 끝쪽에는 집옥재 앞쪽 구역과 연결된 경림문(慶臨門)이 있고,

그 남쪽으로 난 길 끝에 있는 문은 궁궐의 생활공간인 후궁으로 연결되는 유형문(維亨門)이다.

 

 

건어물전 상인(기재된 소제목 - '자신의 상점에서 식품을 파는 상인)

시내 상가의 건어물 가게의 바닥에는 맷방석 앞으로 말린 명태(북어)로 보이는 건어물을 펼쳐놓았다.

진열대 위로는 나무주걱과 조리, 미역 등이 쌓여 있다.

탕건 차림의 상인은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한 듯 색안경에 담뱃대를 문 모습이 다소 부자연스럽다.

왼쪽으로는 닭장수들이 이용하던 닭장 형태의 지게가 보인다.

 

 

종로에서 곡물을 펼쳐놓고 파는 상인(기재된 소제목 - '시장의 곡물 판매')

종로의 전차가 다니는 거리의 북쪽은 비워두고

남쪽에 맷방석, 둥구미, 가마니 등에 담은 곡물을 펼쳐놓은 장이 열렸다.

왼쪽 상가에는 처마 밑에 포목전이라고 쓴 천이 간판처럼 달려있으며,

상가의 지붕 앞쪽에는 집집마다 등이 달려 있다. 원경으로 무악산의 줄기가 뻗어 있는 것이 보인다.

  

 

■한낮의 종로 솔가지 시장(기재된 소제목 - '거리에 있는 남자들')

원경으로 잡힌 인왕산과 무악산의 위치로 보아 종각 근처에서 서쪽을 향해 찍은 것으로 보인다.

북쪽방향으로 드리운 짧은 그림자를 통해 정오 무렵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교외에서 솔가지를 싣고 온 사람들은 손님을 기다리며 쉬고 있고

소의 등에는 몸체를 가득 덮은 솔가지가 실려 있다. 오른쪽의 남성은 생선을 사고 돈을 지불하고 있다.

왼쪽에는 간단한 요기거리를 파는 듯한 사람이 포장을 치고 앉아 있다.

종로에서는 시간과 구역에 따라 각기 다른 물건을 사고 파는 장이 수시로 열렸다.

 

 

■종각 옆의 옹기장수와 단발한 아이들

(기재된 소제목 - '작은 순례 신전 앞 잡상인을 둘러싼 어린이들)

종로에서 남대문으로 향하는 길이 나뉘는 곳에서 종각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다.

가운데에는 짐을 가득 실은 옹기장수가 힘에 겨운 듯 지팡이로 지게를 받치고 잠시 쉬고 있다.

그 옆으로 남루한 차림의 아이들이 사진 찍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으며, 뒤에서는 대그릇을 사고 팔고 있다.

좁은 공간에서 다양한 물품이 거래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종각의 지붕 앞으로는 남대문로로 향하는 전차의 전력공급선이 지나가고 있다.

 

 

■종로와 남대문로가 만나는 모퉁이 상점(기재된 소제목 - '거리에 있는 보행자들')

종로와 남대문의 교차점으로, 종로에서 남대문으로 향하는 남대문로는 서울의 중요한 대로로,

종로와 마찬가지로 시전이 설치된 상업지구로

남대문로에 접한 종각의 맞은편으로도 상점이 늘어서 있었다. 

모퉁이에 있는 상점은 측면으로도 문이 나 있는데 마방(馬房)으로 추정된다.

상가가 즐비한 대로임에도 놀러나온 듯한 아이들이 많은 것이 눈에 띈다.

 

 

■남대문로에서 전봇대수리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행인들

(기대된 소제목 - '마차선(전차선)과 전화선 기둥이(전신주가) 보이는(있는) 거리')

남대문로에서 종로쪽을 바라보고 거리의 모습을 촬영하였다.

원경으로 왼쪽에 백악이 있고 가운데에는 북한산 보현봉이 있다.

전봇대와 사람들 사이로 희미하게 종로의 상가가 보인다.

당시 남대문로에는 1899년 12월에 전차가 개통되어 선로가 깔렸다.

사람들이 전차의 전력 공급하는 전봇대에 올라 수리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모여 있다.

전봇대 곁에는 서양식 옷차림을 한 사람이 서 있고, 왼쪽에는 서양식 건물도 들어서 있어서

개항 이후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소공로 개수공사와 환구단(기재된 소제목 - '도시 전경 : 앞에 빈민 판잣집들, 뒤에 궁궐)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제천의식을 지내는 제단으로 환구단을 건립하고, 1899년에는 신위를 모시는 황궁우를 건립하였다.

사진 왼쪽에 환구단의 정문, 오른쪽에는 황궁우가 있다. 황궁우의 오른쪽 흰 건축물이 환구단이다.

정문의 지붕 왼쪽 끝에는 경운궁(오늘날 덕수궁) 앞 원수부 건물과 대안문 끝자락이 걸려 있다.

아래쪽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 닦고 있는 길이 소공로이다. 당시 도시계획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북한산 자락의 보현봉과 그 앞으로 솟은 백악과 이어지는 인왕산의 줄기가 드러나 있다.

 

 

■이화학당 - 선교사와 여학생들

(기재된 소제목 - '미국 전도(선교회?) 학교 건물 앞에 서 있는 학생과 선생들)

사진 속의 건물은 이화학당 구내의 선교사 주택으로 알려져 있다.

서대문 방향에서 촬영하여 원경으로 인왕산 능선이 펼쳐져 있다.

선교사로 보이는 네 명의 서양인 여성과 학교관계자로 보이는 두 명의 갓을 쓴 남성이 함께 찍었다.

앞쪽에서는 수업을 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으나

다른 인물들의 시선은 정면을 향하고 있어 기념으로 단체사진을 촬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구여관 - 의사, 간호사로 보이는 서양 여성과 환자

(기재된 소제목 - '미국 전도(선교회?) 학교의 여학생들 및 여선생들)

 

한옥 건물을 배경으로

간호사와 의사로 보이는 서양여성과 환자인 여자아이를 포함한 사람들을 촬영하였다.

정확한 장소는 파악되지 않지만 여성들만 있는 병원이라는 점과

브라즈의 여정에서 볼 때 여성전용병원인 보구여관(保救女館)일 가능성이 크다.

보구여관은 이화학당의 설립자인 메리 스크랜턴이 여성들의 치료를 위해 세운 병원으로

정동 이화학당 구내에 있었다.

  

 

■동대문에서 바라본 종로

동대문의 문루에 올라가 서쪽으로 향하는 종로를 한 장면에 포착하였다.

종로는 도성 안을 동서로 관통하는 대로다.

이 사진은 동대문의 문루에 올라가 서쪽으로 향하는 종로를 한 장면에 포착한 것이다.

도로의 양쪽으로 상점들이 도열해 있는데, 상점 앞에 설치되어 있던 가가(假家)는 철거되고 없다.

도로의 오른편으로는 1899년 5월에 개통된 서대문-청량리간 전차의 선로와

전차의 전력을 공급하기 위한 전봇대들이 늘어서 있다.

왼쪽 아래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 있는 곳이 전차의 차고지다.

전차선은 동대문 앞에서 세 갈래로 나뉘는데 직선으로 뻗은 선로가 동대문을 거쳐 청량리로 가는 길이며,

가운데 선로는 차고지로 들어가는 길이다. 사진 위쪽 원경으로 인왕산, 무악산(안산)의 능선이 보인다.

그 아래쪽은 응봉에서 이어지는 종묘의 숲이다. 

 

 

■활쏘기 시범을 보이는 양반들(기재된 소제목 - '활쏘기를 즐기고 있는 양반들의 모습')

양반들이 활터에서 활을 쏘는 자세를 취해 보이는 모습을 촬영한 채색사진이다.

실제 활을 쏘는 사대(射臺)가 아니라 사진촬영 요청에 응하여 공터에서 자세만 취한 것이다.

뒤쪽에는 활쏘기를 구경하던 사람들이 시선을 돌려 사진촬영을 구경하고 있다.

서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곳으로 보이지만 정확한 장소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 사진과 연속되는 장면을 담은 사진들이 여러 책을 통해 소개되었다.

 

 

성경을 읽고 있는 기독교 가정

(기재된 소제목 - '한국의 기독교가족 식구들이 자기집 마루에 앉아 성서를 읽고 있는 모습')

기독교 가정의 가족이 마루 끝에 앉아 성경을 읽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남편은 탕건차림이고 아내는 집안일을 하던 중이었는지 앞치마를 두르고 소매를 걷고 있다.

어린 두 아이는 앞을 보고 있으나 부부와 큰딸은 어색한 듯 눈을 내리깔고 있다.

댓돌 주위로 가족들의 신발이 흩어져 있는데 갓신과 함께 아이들이 신는 나막신도 보인다.

마루 안쪽으로는 뒤주, 장 위로 밥상 등 각종 가재도구들이 보인다.

처마 끝에는 차양을 쳤으며 왼쪽으로 등도 달려 있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상복(喪服) 차림의 여인들

(기재된 소제목 - '도시 시장에 온 시골 여자들의 모습')

두건을 쓰고 요대(腰帶)를 한 상복 차림의 여성들은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있다.

뜯겨나간 창호지와 문살이 드러나 있고, 방안도 휑하니 비어 있는 집안 분위기로 볼 때

여행자들에게 판매할 목적으로 촬영된 기념품 사진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 상중인 여성일 수도 있으나 부자연스러운 주변환경과 상황으로 보아

한국의 풍속을 보여주는 판매용사진으로 제작된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된다.

1900년대에 간행된 여러 책에 소개된 사진에는 같은 집을 배경으로 찍은 <혼례>사진 등이 보인다.

 

 

탑골공원 안의 원각사 탑(기재된 소제목 - '도시 대문 앞의 탑')

원각사는 조선 세조 때 세운 사찰로 1512년(중종 7) 헐려 없어졌지만

탑과 사찰의 내력을 적은 비석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원각사 10층탑은 대리석탑으로

임진왜란 때 상단 3층이 떨어져 방치되어 오다가 1947년 제모습을 되찾았다.

사진 중앙에 상단을 내려놓은 원각사탑이 있고, 오른쪽에는 원경으로 원각사비가 보인다.

원각사 터에는 원래 민가가 들어서 있었으나 1897년부터 공원을 조성하면서 민가를 모두 철거하고

1902년경 팔각정을 세웠다. 사진은 공원 조성이 시작되었으나 아직 팔각정을 세우기 전의 모습을 담았다.

사진 중앙에 아이들과 함께 서 있는 인물은 브라즈의 여행을 안내한 사람이다.

 

 

분주한 종각 앞 전차 매표소(기재된 소제목 - ‘번잡한 도시 거리의 전경’)

1899년 개통된 전차는 서대문-청량리 노선과 종로-용산 노선이 있었다.

종각은 두 노선이 만나 선로가 분기하는 지점으로 그 앞에 전차 매표소가 있었다.

종각 맞은편에 있는 전차 매표소, 왼쪽으로 ‘한성전기회사(漢城電氣會社) 차표매하소(車票賣下所)「Seoul Electric Co. Railway Ticket]’라고 적힌 간판이 있다. 길바닥에서는 선로가 교차하며 양쪽으로 나눠지고 있다. 매표소 오른쪽에는 한성전기회사의 사옥을 신축중인 모습이 보인다. 앞쪽의 전봇대에는 ‘인천황도변상졈’이라는 상호와 선전물이 붙어 있다. 종로의 중심가답게 매우 분주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돈화문로의 아이들(기재된 소제목 - ‘물품이 진열된 상점들 앞 거리 어린이들’)

종로 3가에서 창덕궁에 이르는 돈화문로의 중간에서 아이들을 세워두고 찍었다.

길 끝 쪽으로 중층지붕의 돈화문이 보이고 그 뒤로 응봉 노선과 북한산 보현봉이 보인다.

길 양쪽은 상가로 개천 건너편에 늘어선 집의 처마 아래에 업종을 알리는 팻말이 보인다.

집 앞쪽으로는 상품을 진열하는 곳으로 보이는 가가(假家)들이 붙어 있다.

남자아이들은 긴장한 듯 주먹을 쥐고 있고 여자아이들은 사진 찍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다.

여자아이들이 동생을 업고 있는 모습도 보이는데 당시에는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남대문로에서 전봇대 수리하는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는 행인들

(기재된 소제목 - ‘마차선(전차선)과 전화선 기둥(전신주)이 보이는 거리’)

남대문로에서 종로 쪽을 바라보고 거리의 모습을 촬영하였다.

원경으로 왼쪽에 백악이 있고 가운데에는 북한산 보현봉이 있다.

전봇대와 사람들 사이로 희미하게 종로의 상가가 보인다.

남대문로에는 1899년 12월에 전차가 개통되어 선로가 깔려 있다.

사람들이 전차의 전력 공급하는 전봇대에 올라 수리하는 모습을 보기위해 모여 있다.

전봇대 곁에는 서양식 옷차림을 한 사람이 서 있고,

왼쪽에는 서양식 건물도 들어서 있어서 개항 이후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아현 쪽에서 바라본 서대문 밖 마포로 풍경(기재된 소제목 - ‘도시 및 뒷산의 전경’)

서대문에서 양화진으로 연결되는 도로의 중간에 위치한 아현에서 동북쪽으로 전경을 담았다.

원경으로 무악산, 인왕산, 북한산 보현봉, 백악, 응봉 등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산세가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중간의 백악 아래로 도성이 연결되어 있으며 오른쪽 응봉 아래 즈음에 돈의문이 보인다.

그 아래쪽으로 경기감영을 둘러싼 담장과 포정문(布政門), 선화당(宣化堂) 등 여러 건물들이 있고

그 오른쪽으로 서지(西池)가 있다. 서지의 왼쪽에 있는 담장 너머로는 원래 경기중군영(京畿中軍營)과

활터가 있었지만 사진에서는 건물이 철거되고 빈터로 남아 있다.

19세기 ‘경기감영도병’과 비교하여 조선후기 서대문 밖의 전경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돈의문(기재된 소제목 - ‘도시 대문’)

도성의 서쪽 대문으로 흔히 서대문이라고 불린다.

돈의문은 양쪽의 성벽이 앞쪽으로 튀어나와 성문이 움푹 들어간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사진은 서대문의 오른쪽 성벽 위에서 동북쪽으로 돈의문을 찍어서 뒤로 백악과 북한산 보현봉이 보인다.

유리건판에 색을 입힌 채색 사진으로 기와지붕이 붉은 색으로 표현되어 있다.

한국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서양인들이 채색하는 과정에서 일으킨 오류로 보인다.

 

 

동묘(東廟) 돌계단에 앉아있는 안내인(기재된 소제목 - ‘궁궐 뜰의 계단에 앉아있는 남자’)

중문이 있는 정전의 남쪽 담장 너머에서 동묘의 정전과 동무(東廡)를 촬영하였다.

사진 왼쪽의 천을 드리운 건물이 정전이고, 그 앞쪽이 중문(中門), 왼쪽이 동무(東廡)다.

담장 너머로 정전 뜰에 심은 향나무도 보인다. 계단에 앉아 있는 인물은 브라즈의 안내인이다.

사진 속의 담장과 안내인이 앉은 돌계단은 없어졌지만 석물은 현재까지 남아있다.

 

 

동묘(東廟) (기재된 소제목 ‘풀을 메고 가는 여자’)

임진왜란 때 참전한 명나라 장수들은 서울의 두 곳(南廟, 東廟)에 관우(關羽)를 무신(武神)으로 모시는

관왕묘(關王廟)를 세웠다.

동쪽 흥인문 밖에 세운 사당은 동묘(東廟), 남쪽 숭례문 밖에 세운 사당은 남묘(南廟)라고 불렸다.

사진은 정전과 서무(西廡), 중문(中門)의 지붕이 보인다.

사진 앞쪽에는 솔가지를 실은 지게를 메고 있는 남성과 망태기와 갈퀴를 지닌 아이가 있다.

서양인들은 특히 많은 짐을 싣는 지게에 관심을 보였다.

‘풀을 메고 가는 여자’라는 사진의 해설은 이런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다.

남자를 여자로 오해한 것은 남자아이들이 머리를 길러 성별을 구별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창덕궁 낙선재

(기재된 소제목 - ‘버림받은 궁궐의 뜰, 여자 주인은 정치적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고들 한다’)

낙선재는 헌종 때 민가 형식을 본따 지은 집이다.

남향으로 난 장락문(長樂門) 안쪽에서 낙선재의 서쪽 누마루와 행랑을 잡았다.

행랑 뒤로 높은 곳에 자리잡은 상량정도 보인다.

누마루 아래의 화방벽이나 아기자기한 문살 등이 오늘날과 다름없다.

하지만 누마루와 안쪽 행랑의 처마 밑에는 오늘날과 달리 햇빛을 가리기 위한 차양이 달려있고,

행랑의 기단도 오늘날보다 많이 드러나 있다.

안쪽 행랑의 아랫부분은 오늘날과 구조가 다르며 디딤돌도 놓여있다.

오랫동안 비어있었던 듯 마당에 풀이 자란 모습도 보인다.

여자 주인이 정치적으로 죽임을 당했다는 해설은 낙선재를 경복궁 건청궁 곤녕합과 혼동한 것이다.

돌을 밟고 서 있는 인물은 브라즈의 안내를 맡은 인물이다.

 

 

창덕궁 낙선재 후원의 화계(기재된 소제목 - ‘궁궐 정원에 있는 테라스 및 조각상들’)

낙선재 후원은 경복궁 교태전 후원인 아미산과 더불어 궁궐에서 가장 아름다운 후원으로 꼽힌다.

화계를 쌓아 여러 가지 꽃을 심고 괴석을 놓아두었다.

아래쪽에는 지금까지 남아있는 관상용 세연지(洗硯池)와 괴석인 소영주(小瀛洲)가 있다.

오늘날에는 괴석의 왼쪽으로 화계 한 층을 더 만들고 화계 위에 굴뚝을 놓아 모습이 다소 달라졌다.

뜰에 디딤돌을 놓아 거닐도록 한 것도 지금과 다른 점이다.

 

 

창덕궁 연경당 농수정(기재된 소제목 - ‘궁궐 정원에 있는 신전’)

농수정은 창덕궁 연경당 일대의 작은 후원으로 기능하는 곳으로

연경당의 서재인 선향재 뒤쪽 화계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사진은 돌계단 앞쪽 정면에서 농수정을 찍은 것이다.

사모지붕에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된 구조와 정자 주위의 돌난간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화계를 그대로 층계로 활용한 계단은 오늘날의 돌계단보다 훨씬 조화롭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듯 문종이가 떨어져 나간 곳이 많으며, 지붕 위 절병통도 윗부분이 훼손되어 있다.

오른쪽은 중국식 건물인 선향재의 벽으로 지붕 앞의 차양도 보인다.

 

 

경회루와 백악(기재된 소제목 - ‘궁궐 정원에 있는 호수(연못) 옆 정자’)

경회루와 연못의 인공섬을 양쪽에 두고 백악의 모습을 잡았다.

백악 아래로 경회루 뒤쪽 담장과 문, 그 뒤의 높게 자란 나무들이 있다.

나무 사이로 지금은 없어진 전각들의 담장도 보인다.

경회루는 추녀마루 끝에 11개의 잡상을 앉힌 것으로 유명하지만

이 사진에서는 대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몇 개만이 남아 있다.

오늘날에는 북쪽 담장 왼편에 하향정이라는 육모정자가 있으나 이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경복궁 집옥재 계단에 선 브라즈

(기재된 소제목 - ‘궁궐 계단에 서 있는 엔리케 스탄코 브라즈(Enrique Stanko Vráz)’)

건청궁의 왼쪽에는 팔우정, 집옥재, 협길당 세 채의 건물이 있다.

이 건물들은 원래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으로 지어졌는데

1888년 고종이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지금의 자리로 이건하였다.

집옥재는 고종이 서고 겸 서재로 사용하던 중국식 건물이다.

이 사진은 건물의 서남쪽에서 집옥재를 찍은 것으로 오른쪽으로 복도각과 협길당이 연결되어 있다.

집옥재 앞 계단에 서있는 서양인이 여행의 주인공인 엔리케 스탄코 브라즈다.

근대초기 서양인들이 촬영한 집옥재는 대부분 건물의 동남쪽인 협길당 앞쪽에서 촬영한 것인데 비하여

이 사진은 서남쪽에서 본 집옥재의 모습을 담았다는 특징이 있다.

옆의 한국인은 다른 사진에는 등장하지 않은 인물로

브라즈가 다수의 한국인을 동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경복궁 신무문에서 후궁으로 가는 길(기재된 소제목 - ‘집들과 벽이 에워싸고 있는 궁궐 길’)

집옥재를 나서 서쪽으로 가면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으로 나가는 길이 있다.

이 사진은 신무문 쪽에서 남쪽을 향하여 그 길을 찍은 것이다.

왼쪽 담장은 집옥재 구역의 담장으로 층이 졌는데, 담장 너머 나무 사이로 벽돌로 된 시계탑이 보인다.

이 시계탑은 러시아건축가 세레딘 사바친이 설계하여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담장 끝 쪽에는 집옥재 앞쪽 구역과 연결된 경림문(慶臨門)이 있다.

남쪽으로 난 길 끝의 문은 유형문(維亨門)으로 궁궐의 생활공간인 후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경복궁 강녕전과 경회루 사이의 통로(기재된 소제목 - ‘궁궐 후문과 연결되어 있는 골목길’)

경복궁의 동선은 근정전에서 편전인 사정전, 침전인 강녕전을 거쳐 경회루로 통한다.

이 사진은 강녕전과 경회루 사이에 있는 작은 골목길을 담았다. 오른쪽 담장의 첫 번째 문은 강녕전,

두 번째 문은 왕비의 침소인 교태전과 연결되는 흠경각, 함원전 구역으로 통하는 문이다.

왼쪽 담장의 문 세 곳은 경회루로 들어가는 다리로 통한다.

경회루의 담장은 일제 지배초기에 없앴던 것을 근래에 복원하였다.

문이 솟은 탓인지 오늘날에 비해 담장이 낮아 보인다.

골목 안쪽의 문은 지금은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없는 후궁으로 연결된다.

오른쪽 문에 기대앉은 소년은 브라즈의 여행에 동행한 인물로 다른 사진에도 등장하고 있다.

 

 

경복궁 건청궁 곤녕합(기재된 소제목 - ‘등불로 밝혀진 뜰에 있는 정자’)

고종은 1873년 경복궁의 가장 안쪽에 왕과 왕비가 한가롭게 거처할 목적으로

사대부 가옥을 본뜬 건천궁을 건립하였다.

건청궁 내에는 왕의 거처인 장안당과 왕비의 거처인 곤녕합, 서재인 관문각이 있었다.

관문각은 1892년 서양식 2층 벽돌조 건물로 개조되었다가 1901년경 철거되었다.

본 사진은 왕비의 처소인 곤녕합의 오른쪽 누각인 옥호루와 뜰에 있는 등을 담았다.

뒤쪽으로 곤녕합의 뒤쪽 담장과 경복궁의 북쪽 담장이 보이며 관문각은 철거되고 없다.

호루는 명성황후가 죽임을 당한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건청궁은 을미사변 후 방치되다가 1909년 철거되었는데 2006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중건되었다.

 

 

경복궁 팔우정(기재된 소제목 - ‘여름 궁궐에 있는 육각형 모양의 정자’)

팔우정은 2층으로 된 팔각형의 정자로 고종이 수집한 서적을 보관하던 곳이다.

왼쪽에서 팔우정과 복도각, 집옥재를 잡았다. 사진 속 외형은 오늘날과 같으며 창은 모두 유리로 되어 있다.

다만 지붕 꼭대기의 절병통은 오늘날보다 더 높고 화려하다. 옆 건물인 중국식 건물은 집옥재인데

지붕 용마루 끝에는 다른 건물에서는 보기 어려운 화려한 용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방치된 경복궁 근정전(기재된 소제목 - ‘방치된 궁궐 뜰’)

고종이 왕위에 오른 후 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하여 국왕과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경복궁 안 건청궁에서 왕비가 살해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난 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하면서 경복궁은 빈 궁궐이 되고 말았다.

브라즈가 방문한 1901년 5월은 경복궁이 빈 궁궐이 된 지 5년이 지난 때였다.

사진 속에 보이는 근정전 건물과 기단의 석물들, 뜰에 세운 품계석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의연히 제 모습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뜰에 깔린 박석 사이로 자란 잡초나 지붕의 잡상 일부가 사라진 모습은

주인이 떠난 궁궐이 방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진의 중앙에 서 있는 흰 도포 차림의 인물은

브라즈의 여행을 안내한 인물로 다른 사진에도 자주 등장한다.

 

 

경복궁 향원정 원경(기재된 소제목 - ‘여름 궁궐 정원 정자와 다리 옆 남자 3명’)

향원정은 1873년 고종이 건청궁을 건립할 때 연못인 향원지를 조성하고 그 가운데 지은 육모정자이다.

당시에는 향원정으로 연결되는 다리인 취향교가 건청궁 쪽인 북쪽으로 놓여 있었다.

이 사진은 향원정을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바라보며 찍은 사진이다.

사진 아래쪽에는 건청궁 쪽에서 집옥재로 건너가는 다리와 석축이 쌓인 개울이 보인다.

이 개울은 남쪽으로 흐르다 경회루 뒤편을 지나 경복궁의 금천으로 흘러 들어간다.

사진 속에 등장하는 세 명의 남성은 브라즈의 여행을 수행한 인물로

마주보고 서 있는 두 남성은 다른 사진에서도 보인다.

 

 

경복궁 향원정(기재된 소제목 - ‘여름 궁궐 정원에 있는 호수 옆 정자와 다리’)

서북쪽에서 근경으로 향원정을 잡았다. 왼쪽으로 건청궁 쪽으로 건너가는 취향교가 뚜렷하게 보인다.

겹처마의 2층 누각에 난간이 달린 향원정의 자태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붕 꼭대기의 장식인 절병통에 위쪽으로 뻗은 잎이 있는 것과

맨 위의 고깔모양의 장식이 없는 것은 오늘날과 다르다. 안내를 맡은 인물이 향원정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5월의 경복궁 경회루(기재된 소제목 ‘여름 궁궐 정원에 있는 호수(연못) 위 정자’)

경회루의 모습을 동남쪽에서 잡아 경회루와 물그림자,

서쪽의 인공섬과 동쪽 담장에 난 문을 한 화면에 담았다. 오른쪽 끝에 왕의 침소인 강녕전의 지붕이 보인다.

전경을 담기 위해 오늘날에도 즐겨 쓰는 구도다.

경회루 지붕의 삼각형으로 된 풍판에는 작은 창이 열려 있는데 지금은 없어진 창이다.

브라즈가 한국을 방문한 시기는 5월이었다. 경회루를 둘러싼 연못에는 연꽃의 줄기가 올라와 있으나

아직 작은 잎이 보일 뿐 꽃은 보이지 않는다. 이 사진을 통해 계절을 확인할 수 있다.

 

 

절구질을 하는 자매(기재된 소제목 - ‘절구로 곡물을 빻는 소녀 2명’)

기독교가정의 두 딸이 앞치마를 두르고 절구질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안쪽으로 광이 있으며 앞쪽의 장독대에는 크고 작은 독이 놓여 있다.

그 오른쪽으로는 물통과 두레박, 물건을 이는데 사용하는 또아리가 있다.

당시에는 우물이 있는 집이 드물었던 것에 비추어 볼 때

동네 우물에 두레박을 들고 가서 물을 길어오는 것으로 보인다.

서민가정의 생활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이다.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기재된 소제목 -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기독교가정의 아내가 어린아이를 안고 있다. 안채를 마주보는 구석 한켠에 문을 달아 공간을 만들었는데

물품을 보관하고 가사일을 하는 공간으로 보인다. 위쪽에는 새끼줄로 빨래줄을 매어 놓았다.

 

 

쓰개치마를 쓴 여자 아이

(기재된 소제목 - '집을 나가기 전 두루마기를 덮고(쓰개치마를 쓰고) 있는 여인')

서양인들은 여성들이 쓰개치마나 장옷으로 얼굴과 몸체를 가리고 외출하는 모습을 한국을 대표하는 풍속의 하나로 인식하였다. 얼굴을 가린 여성의 모습은 서양인들이 직접 촬영한 사진도 많고 판매용 사진도 다양하게 제작되었다. 사진 속의 여성은 여자 아이로 자신의 키에 비해 지나치게 긴 쓰개치마를 두르고 있다. 역시 사진 촬영을 위해 부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한 것이다. 곁에 나막신을 벗어 두었는데, 당시의 어린 아이들은 평소에도 나막신을 많이 신었다.

 

 

 

서쪽에서 동쪽 방향을 본 종로(기재된 소제목 - ‘신부에게 가마를 가지고 가는 신랑의 모습’)

종로를 따라 신부를 데리러 가는 신랑 일행을 찍었다.

말을 탄 신랑 좌우로 일산을 받쳐들었고 뒤에는 가마가 따르고 있다.

앞에는 두 사람이 청사초롱을 메고가고 있고 신랑 곁으로는 혼례를 도와줄 사람들이 동행하고 있다.

멀리 원경으로 수락산에서 이어지는 용마산의 능선이 보인다.

사진 왼쪽에는 유리창문을 단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있어서 시대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서양식으로 개조된 한옥과 정원(기재된 소제목 - ‘정원이 있는 한국 양반의 거처’)

전통한옥에 유리창문과 양철 차양을 대어 서양식으로 개조한 주택이다.

기단에는 화분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데 오른쪽에는 큰 종려나무 화분이 있다.

마당에는 잔디가 깔려있고, 그 위에 일본식 석등이 놓여있다.

조경방식에 비추어볼 때 전통 양반가옥보다는 한옥을 개조한 서양인의 주거지나 외교공관으로 보인다.

 

 

정원에서 쉬고 있는 여학생들(기재된 소제목 - ‘정원에 있는 한국 양반인의 딸들’)

교사로 보이는 건물의 아래쪽에 있는 정원에서 여학생들을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 중앙의 나무는 꽃이 피기시작한 배나무로 보인다. 나무 뒤쪽으로 도성과 건물이 이어져 있다.

체코 납스텍박물관(Náprstek Museum)의 브라즈 사진 콜렉션 가운데

이 사진에서 보이는 계단을 포함하는 교사의 전경을 담은 사진이 있다.

이화학당의 설립자 메리 스크랜턴(Mary Scranton)의 숙소 아래쪽으로 추정된다.

 

 

꼬마신랑

(기재된 소제목 - '집 마루에 있는 소년.

    : 결혼한 지 이미 일주일이 된 9살의 내 어린이 친구(그의 아내는 7살이었다). 서울. 1901년')

한국은 서양에 비해 일찍 결혼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조혼이 성행하기도 하였다.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한 꼬마신랑의 존재는 서양인들에게는 낯설고 놀라운 관습이었다.

브라즈의 설명에 따르면 사진 속의 아이는 9살로 7살 된 여자아이와 결혼하였다.

어린 나이지만 어른의 복장을 따라 상투를 틀고 도포에 갓을 착용하고 있다.

 

 

혼례를 치른 신혼부부

(기재된 소제목 - ‘결혼식 ‘무동(mudong)’이라는 마법사

                        : 주례사가 신부 머리 위에 모자를 씌워주고 있는 모습’)

신랑은 사모에 단령을 착용하고 신부는 활옷에 화려한 화관을 쓰고 있다.

신부의 화관이 고정되지 않는지 뒤에서 손으로 받치고 있으며,

옆쪽의 다리를 올린 여성은 신부의 얼굴을 가리는 혼선(婚扇)을 들고 있다.

앞쪽에는 두 여자아이가 당의를 입고 족두리를 쓰고 있고, 왼쪽의 여자아이는 칠보화관을 들고 있다.

신랑 신부와 아이들이 한껏 성장을 한 것과 대조적으로

뒤로 보이는 창문은 창호지가 찢어져 문살이 드러나고 있고 방안도 휑하니 비어 있다.

집안의 분위기로 볼 때 여행자들에게 판매할 목적으로 촬영된 기념품 사진일 가능성이 높다.

이 사진은 1900년대에 간행된 여러 책에 소개되어 있다.

해설에서 ‘무동(mudong)'이라 한 것은 ’무당‘의 오기로 보인다.

 

 

쓰개치마를 쓴 여자아이(기재된 소제목 - ‘집을 나가기 전 두루마기를 덮고(쓰개치마) 있는 여인)

서양인들은 여성들이 쓰개치마나 장옷으로 얼굴과 몸체를 가지고 외출하는 모습을

한국을 대표하는 풍속의 하나로 인식하였다.

얼굴을 가린 여성의 모습은 서양인들이 직접 촬영한 사진도 많고 판매용 사진도 다양하게 처리되었다.

사진 속의 여성은 여자아이로 자신의 키에 비해 지나치게 긴 쓰개치마를 두르고 있다.

역시 사진촬영을 위해 부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한 것이다.

곁에 나막신을 벗어두었는데 당시의 어린아이들은 평소에도 나막신을 많이 신었다.

 

 

장옷을 두른 여성과 식사하는 여자 아이들

(기재된 소제목 - '집마루에 있는 어린이들과 소녀.

: 내 친구 가족. 집을 나갈 때 남들에게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머리를 가리는 여자(소녀)를 보세요')

집안에서 장옷을 두르거나 마당에서 식사를 하는 모습은 누가 보아도 부자연스러운 장면이다.

브라즈가 친구의 가족으로 소개한 것으로 보아

친구의 가족에게 포즈를 취하도록 부탁하여 촬영한 사진으로 보인다.

 

 

하급관리 (기재된 소제목 - '적은 금액을 받고 브라즈에게 도시를 안내한 저급(하급)관리')

브라즈가 한국의 하급관리로 소개한 인물을 일본인 사진사의 집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갓의 모양이나 복색으로 볼 때 양반 관료보다는 서리계층의 인물로 보인다.

브라즈는 조선의 귀족계층을 '방파인(Bang Pa in)'이라고 소개하였는데, 이는 '양반'의 오기로 보인다.

 

 

남대문 근처 상동교회(기재된 소제목 - '자바라 상점, 뒤에 가톨릭교회')

1901년 미국인 선교사이자 의사인 윌리엄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이 남대문 근처 상동에서

설립한 병원에서 운영하던 교회를 확대하여 설립한 감리교 교회다.

사진 속의 건물은 1900년 붉은 벽돌로 신축한 예배당으로 교회 북쪽에 위치한 남대문로에서 촬영한 것이다. 앞쪽의 한옥은 교회의 사택이나 스크랜턴이 운영하던 병원 건물인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아래쪽으로 전차 선로가 지나가고 있다.

 

 

선교사에게 수예를 배우는 여학생들

(기재된 소제목 - '미국인의 전도(선교회?) 뜰에서 한국 소녀들이 수공을 배우는 중')

서대문 방향에서 촬영하여 원경으로 인왕산 자락이 보인다.

선교사 1명과 학생들이 수예를 하는 듯하지만 사진촬영을 위해 마당에서 자세를 취한 것이다.

왼쪽에 보이는 건물의 테라스 난간은 이화학당 초기 한옥교사와 같은 모양으로

같은 구역에 속한 건물로 추정된다. 이화학당은 1897년 한옥교사를 허물고

 그 자리에 서양식 2층 벽돌집인 메인홀을 지어 1899년 12월에 준공하였다.

따라서 브라즈가 방문한 1901년 5월에는 널리 알려진 초기 한옥교사는 이미 철거되고 없는 상태였다.

 

 

마당에서 수업하고 있는 여학생들

(기재된 소제목 - '선생 및 선교사, 여학생들이 앉아 있는 미국 전도(선교회?) 학교의 뜰')

여성 선교사와 남성이 학생들과 찍은 사진이다.

여학생들이 마당에서 책을 펼쳐놓고 남성에게 글을 배우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으나

역시 평상시의 수업 광경이라 보기 어렵다. 사진 촬영을 위해 자세를 취한 것이다.

수예를 배우는 여학생의 사진과 동일한 난간이 보이지만 방향을 달리하여 뒤쪽으로 백악이 자리잡고 있다.

 

 

미국 선교회 병원 계단에 서있는 사람들

(기재된 소제목 - '병원도 갖추고 있는 미국 전도(?) 계단에 서 있는 사람들')

한옥 건물 앞에 선교사로 보이는 서양인과 간호사로 보이는 한국 남성 등이 서 있다.

건물의 주련에는 '안식을 위하여 세상에 전한다(爲安息傳於世)' 등

기독교 선교와 관련된 문구들이 적혀 있으나 정확히 어떤 기관을 가리키는지는 알 수 없다.

윌리엄 스크랜턴이 1887년 남대문 근처 상동에 병원을 개설하고 병원 교회를 운영하다가

상동교회를 개창했다는 점과 브라즈의 여정에 비추어 보면 스크랜턴이 운영한 병원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체코 공화국(Czech Republic)  

 

 

 

 

 

 

 

체코공화국은 중부 유럽에 위치하며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와 슬로바키아에 둘러싸인 내륙국가로서

수도는 프라하(Praha), 공화제(의회민주주의제)를 표방하고 있다.

면적은 78,886㎢으로 한반도의 1/3에 해당하며 인구는 약 1,050만 명(2009년 기준)이다.

언어는 체코어(슬로바키아어, 폴란드어와 같은 서슬라브어)를 사용하며,

통화: 코루나(koruna, Kč. Kčs.)

인종: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폴란드인

종교: 로마가톨릭교 40%, 개신교 10%

초대 대통령: 바츨라프 하벨

현 대통령: 바츨라프 클라우스

 

 

5세기 말, 6세기 초 - 슬라브인이 현 모라비아와 슬로바키아 지역에 정착

9세기 후반 - 기독교 전도사가 들어옴

9세기~1306년 - 프로제미슬 왕조기간 동안 체코의 국력이 점진적으로 신장됨

1346~1378년 - 까렐 4세 통치 하에 보헤미아왕국의 최고 전성기를 맞음

15세기 초 - 국가 위기로 후스 운동이 유발됨

1526년 - 합스부르크 왕조가 보헤미아 왕조를 계승하여 다국적 왕조를 형성

1520년 - 빌라 호라 전투에서 보헤미아의 패배, 합스부르크 왕조의 집권 지속

1918년 - 10월28일 체코슬로바키아 독립국가 형성

1939년 - 3월15일~1945년 5월9일, 독일 점령

1948년 - 2월 공산당 점거

1968년 - 8월 자유화운동 “프라하의 봄” 봉기

1989년 - 11월 공산당 정권 몰락

1993년 - 1월1일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에서 분리, 독립하여 체코공화국 설립.

 

 

체코는 오스트리아, 독일, 폴란드, 슬로바키아 공화국과 인접해 있다.

서부 보헤미아(Bohemia)와 동부 모라비아(Moravia)로 이루어진다.

모라비아 서쪽의 일부는 실레시아(Silesia)라고 불리는 역사적인 지역이며,

나머지는 현재의 폴란드이다. 체코의 수도이자 보헤미아 수도인 프라하는

블타바강(Vltava)과 라베강(Labe)을 사이에 두고 위치해 있다.

 

체코는 산, 완만한 고원과, 저지대, 동굴, 협곡, 넓은 평원, 습지, 호수, 연못, 댐 등 아름답고 다채로운

자연을 자랑하지만 불행하게도 북쪽으로 가면 갈수록 대기오염과 산성비 오염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는19세기 무분별한 산업화의 영향이다.

경작을 위해 수세기에 걸쳐 나무를 베어냈음에도 불구하고 체코의 1/3은 여전히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천연의 숲은 대부분 경작이 불가능한 산악 지역에 있다.

수목 한계선(1400m) 이상으로는 초원, 관목림, 지의류 등이 있다.

곰, 늑대, 스라소니와 그 외 야생고양이, 마모트, 수달, 담비, 밍크 등의 야생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숲과 습지대에는 꿩, 자고, 오리, 야생거위 등 사냥조류들이 서식하는데 이들은 주로 사냥감이다.

독수리, 콘돌, 물수리, 황새, 느시, 뇌조 등도 드물게 눈에 띈다.

 

체코의 대부분 지역은 습기 많은 대륙성 기후이므로

여름엔 따뜻하고 비가 많으며, 겨울엔 춥고 눈이 많다. 기온 변화는 완만한 편이다.

가장 더운 달은 7월, 가장 추운 달은 1월이다.

12월에서 2월까지는 저지대에도 영하로 기온이 떨어지고 산악지방은 정도가 더 심하다.

사실상 ‘건기(乾期)’라는 것은 없다. 갑작스런 천둥번개로 무더운 여름이 사라지기도 한다.

겨울에는 40일-100일정도 눈이 내리고(산간지방은 130일 정도), 저지대는 안개가 잦다.

 

체코인은 꾸밈없고, 온순한 사람들로,

작은 나라치고는 놀라울 만큼 광범위한 다양한 문화적, 종교적, 정치적 모습을 갖고 있다.

독일인과 오스트리아인에서 폴란드인과 헝가리아인까지 다양하다.

자유로운 모습에서 엄격한 전통적인 모습, 또 세계화된 사고방식에서 국수주의까지 존재한다.

가장 큰 교회는 로마가톨릭교회이고,

1991년 체코인 중 40%정도가 가톨릭교도라지만,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가는 사람은 그보다 훨씬 적다.

 

체코는 또 세계적으로 유명한 많은 음악가들을 배출한 음악의 나라이기도 하다.

체코의 수도 프라하는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풍스러움을 간직하고 있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체코의 문화유산 중 12개의 유적지는 유네스코의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무엇보다 이 같은 많은 문화유산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 집중되어 있는 곳이 체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