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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대동여지도 간행 150주년 기념전

Gijuzzang Dream 2011. 4. 28. 21:21

 

 

 

 

 

 

 

 대동여지도 간행 150주년 기념전

 

 “대동여지도, 지도에 담은 동방의 큰 나라”

 

 

 

 

ㅇ전시명칭 : “대동여지도, 지도에 담은 동방의 큰 나라”
ㅇ전시기간 : 2011.04.26~07.24
ㅇ전시장소 :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1층(중, 근세관) 역사의 길
ㅇ전시유물 : 대동여지지도 목판(보물 제1581호) 등 16건 55점

  

 

대동여지도 간행 150주년을 기념하여 김정호(金正浩, 1804-1866)

지도. 지리지 연구 업적을 재조명함으로써 조선후기 전통지도학의 발전을 조명하는 전시로서,

<대동여지도 목판> 등 약 20여 점 전시한다.

 

이번 전시는 

대동여지도 초간본(大東輿地圖, 1861)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목판(보물 제1581호)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구도(靑邱圖, 보물 제1594-2호) -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동여도지(東輿圖志) -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등 16건 55점을 함께 소개하여 김정호의 업적을 집중 조명한다

 

먼저 17세기 이래 다양한 지도들을 소개하고

조선 후기 지도학의 지도의 발전과 연관하여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의 간행이 갖는 의미,

위대한 성취는 17, 18세기 이래의 지도학의 성과를 창조적으로 종합한 결과이며

김정호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김정호는 제한된 수요만을 충족시킬 수 있는 필사본 지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목판 인쇄본으로 <대동여지도>를 제작하였다. 그는 목판 인쇄본 간행을 위해 목판을 직접 판각하였으며

이후에는 초간본(1861)의 일부 오류를 수정하여 재간본(1864)을 발간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조금이라도 더 나은 지도를 제작하고자 했던 김정호의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먼저 17세기 이래 다양한 지도들을 소개하고, 김정호의 지도 제작과 지리학 연구를 조망하고자 하였다.

 

특히, 22책으로 만들어진 <대동여지도> 전체를 펼쳐 전시함으로써

<대동여지도>의 전모를 관람하도록 하였다.
 

순조 34년(1834) 김정호는 <청구도(靑邱圖)>를 제작한 이래 보다 정확하고 상세한 지도를 만들기 위해

지리지(地理誌)를 연구하는 한편 다양한 유형의 지도를 제작하였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철종 12년(1861), 

김정호는 우리나라 지도 제작의 전통을 집대성하여 <대동여지도>를 간행하였다.

이 지도는 오늘날의 지도와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상세할 뿐만 아니라

지도를 사용하는 사람의 편의를 최대한으로 고려한 실용적인 지도이다.

이러한 위대한 성취는 17 · 18세기 이래의 지도학의 성과를 창조적으로 종합한 결과이며,

김정호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 전체를 남북 120리 씩 22층으로 나누고,

각 층별로 동서 방향의 지도를 수록한 지도이다.

각 층의 지도는 1권의 책으로 묶어, 동서 80리를 기준으로 접고 펼 수 있도록 해서 보기 쉽도록 만들었다.

또한 각 층의 지도를 담은 22권의 책을 모두 펼쳐 연결하면,

세로 약 6.7m, 가로 약 3.8m 크기의 대형 우리나라 전국지도가 된다. 

 


 

 

 

 

- 대동여지도(1861년) 초간본, 조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대동여지도 표제부분(1861년), 조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구도(靑邱圖)〉

 

 

1834년(순조 34) 김정호(金正浩)가 만든 한국 지도로, 〈청구선표도(靑邱線表圖)〉라고도 부른다.

2008년 대한민국의 보물 제1594호로 지정되었다.

현존하는 옛 지도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 가로 462㎝×세로 870㎝, 축척은 약 1/216,000이다.

옛 지도 가운데 일정한 크기의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축척이 동일한 전국도 가운데 가장 정밀하고, 이후 제작된《대동여지도》의 기초가 된 채색필사본이다. 상하 2책이며 현재 국립중앙도서관과 고려대학교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김정호가 제작한 첫 번째 지도이며 두 책으로 되어 있는〈청구도〉는 앞머리에 최한기가 쓴 제문 다음에 김정호가 쓴 범례가 있고, 1면 크기의 역사 지도인〈동방제국도(東方諸國圖)〉, 〈사군삼한(四郡三韓圖)도〉, 〈삼국전도(三國前圖)〉, 〈본조팔도성경합도(本朝八道盛京合圖)〉와 4면 크기의〈신라구주군현총도(新羅九州郡縣總圖)〉, 〈고려오도양계주현총도(高麗五道兩界州縣總圖)〉,〈본조팔도주현도총목(本朝八道州縣圖總目)〉이 들어 있다.

 

4면 크기의 신라, 고려, 조선 지도는 행정구역 및 지명의 시대적 변천을 개관할 수 있고, 청구도의 각 지방 지도를 찾기 위한 색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밖에 부록으로 군국총목표(軍國總目表)라는 제목의, 당시 행정구획별 남녀인구수 · 군보 · 곡부 · 방면 · 전답 · 민호 등이 기재된 표가 있다.

또한 지도 내용에는 수계(水系) · 지형 · 성곽 · 창고 · 역도(驛道) · 봉수 · 교량 · 고개 · 섬 · 호구 · 시장 · 군병 · 토산(土産) · 공납 · 풍속 · 능묘 · 사찰 등 그 지역의 특색을 나타내는 지지사항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지도 구성 방법

 

전국을 가로 22판, 세로 29층으로 나누어 편람하기 좋도록 책첩으로 만든 총 321면의 첩지도이며, 가로 70리×세로 100리를 기준으로 모눈을 그린 획정지도(劃定地圖)이다. 이는 동서의 길이를 1,540리, 남북의 길이를 2,900리로 계산한 셈이다. 이러한 획정법은 종전의 획정법과는 달리 바로 정조 때 천문 관측에 따라 정해진 8도의 극고도(極高度, 경위도)에 근거한 것이다. 이때 남북 3천 리는 세로 30층이지만 제주도와 전라도를 잇는 한 층이 생략되어 있다.

또한 청구도는 방안이 지도 위에 그려져 있어 산과 물을 자르는 기존 지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각 면의 위와 안쪽 또는 오른쪽에 10리 방안을 표시했을 뿐 지도 위에는 방안을 그리지 않았다.

그리고 군현의 경계를 확실하게 하였으며, 특히 비지(飛地)와 두입지(斗入地)를 표시하여 한눈에 볼 수 있게 하였는데, 이 점에서〈청구도〉는 이전의 어느 지도보다 실용적이다.

 

본조팔도주현도총목 색인도

〈청구도〉에는 색인도(索引圖) 역할을 하는 '본조팔도주현도총목(本朝八道州縣圖總目)'이 수록되어 있다.

이는 지도를 찾아가는 방법을 만들어 놓은 것으로, 경위선표에는 방안의 가로, 세로에 일련번호가 붙어 있으며, 각 지도의 방안에 써있는 가로 세로의 일련번호를 비교하여 지도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지지 정보의 결합

군현을 파악하고 통치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수록한 지지적 내용인 호구(戶口), 전결(田結), 곡총(穀總), 군정(軍丁)의 수와 서울까지의 거리를 각 군현이 표현된 지도 위에 직접 기록해 놓아 통치 정보가 나타난다. 그리고 신라 이후 각 군현 명칭의 변화를 읍치 주위에 신라는 ‘라(羅)’로, 고려는 ‘려(麗)’로 구분하여 적고 있어 행정구역 및 지명의 시대적 변천을 개관할 수 있다.

또한 과거의 전투 기록 등 당시로서는 중요한 여러 역사 정보를 해당 장소에 간략하게 적고 있어 역사 정보를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자연지리 정보는 산의 표현에서 크기나 겹쳐진 줄의 수로 지형의 높낮이의 일부 표현한 것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지도식

사방을 12개의 방위로 나누고, 10리 간격의 원이 그려져 있으며, 이 지도식은 기호만 별도로 모은 범례표가 아니라 지도상에서 직접 바다, 섬, 강, 산, 읍성, 목장, 못, 다리, 고개, 봉수, 누각 등의 기호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특이한데, 이러한 지도범례의 표현은 현대 지도에서도 사용되고 있는 방식이다.

 

청구도 개성부 범례

범례의 용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동일한 정보를 동일한 기호로 표시하여 지도에 수록된 정보에 통일성을 부여하고, 이용자들로 하여금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이다.

범례의 내용은 방면의 호칭이 면 · 방 · 사와 같이 지방마다 다른 점을 지적하면서 면으로 통일 시키고 있다.

또한 진보 · 사원 · 역 · 창 등의 위치 표시가 갖고 있는 애매함을 극복하기 위해 진 · 사 · 역 · 창의 글자 부분이 위치임을 밝히고 있다.

군현읍치의 경우 세로로 길고 큰 사각형을 통해 정보를 통일시켰지만 안쪽에 고유 명칭 두 자를 적어놓아 다른 군현과 구별할 수 있도록 하였고, 병영 · 수영 · 통영 · 각종 영은 세로 또는 가로로 긴 작은 사각형 안에 명칭을 적어 넣었다. 봉수는 불이 타오르는 삼각형 모양으로 그려져 있다. 이외에 도로가 홍색 실선으로 표시되어 있고 하천은 흑색 쌍선에 청채색을, 산지는 흑색 연속봉만에 녹색채색을 하였다.

 

과학적인 지도

색인도, 지지 정보의 결합, 지도식, 범례를 갖추었고, 또한 지도 구성에서의 모눈 획정이나 방위 산출, 극고에 따른 지도의 보정 등은 당시〈청구도〉가 조선에서 가장 과학적 지식과 기술을 잘 활용한 지도였음을 알 수 있다.

 

미비점

〈청구도〉는 당시의 어떤 지도보다 뛰어나지만 옛 지도에서 가지는 단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지도의 도식 곧 지도식을 전통적 방식을 채택했고, 방위를 12방위를 씀으로써 지도 자체는 정확하지만 지도의 지점(地點) 표현이 보다 불분명하게 되었다. 수계는 정확히 표시한 반면 산맥은 진산(鎭山) 중심으로 표현함으로써 산맥이 많은 동쪽이 실제보다 넓게 그려졌다. 게다가 부기가 많아 지도의 독립성보다는 지리지《동여도지》의 부도적 성격이 두드러졌다.

 

 

제작 원리

〈청구도〉는 최한기의〈청구도제〉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제작 원리로 만들어졌다.

 

지도 제작은 획야분주(劃野分州 : 하나라 우왕이 대홍수를 다스린 뒤 중국을 9주로 나누어 각 주의 실정에 맞게 공물을 정했다는 데에서 비롯한 말. 이를 기록한 지도가 서진(西晉)의 배수(裵秀)가 그린 〈우공구주지도(禹貢九州地圖)〉이다.)에서 비롯한다.

획야분주에서는 산맥과 수계에 따라 지역을 나누었다. 천문 관측에 따른 경위선의 결정에 대해서이다. 최한기는 “하늘의 1도는 땅의 200리가 되고 또 시간의 4분에 해당한다.”라고 하였다.

1791년(정조 15)에 천문을 관측한 결과로써 지형 · 위치 · 방위 등을 바로잡았다. 이는 1713년(숙종 39)에 청나라 사신 하국주(何國柱) 일행이 한양에 와서 상한대의(象限大儀)를 써서 한성부 종가의 극고를 실측하여 북위 37도 39분 15초, 북경 순천부를 기준으로 한양이 편동 10도 30분이라는 실측치를 얻었다.

이를 기초로 정조가 1791년에 〈여지도〉에 입각하여 8도의 경위도를 양정시켰다. 이에 따라 8도의 분폭과 전국 주의 분표가 자유자재로 이루어져 실제 모양과 그다지 차이가 없는 지도를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여지도〉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정철조(鄭喆祚) · 황엽(黃燁) · 윤영(尹鍈)이 편찬한〈여지도〉가 특히 우수하여, 김정호는 그 지도를 참고하여〈청구도〉를 만들었다.

 

재래 지도의 폐단을 지적하였다. 정상기가 지적하였듯이 종이의 크고 작음에 맞추어 334개 주현을 똑같이 그렸기 때문에 좁은 고을은 넓어지고 넓은 고을은 좁아지게 되었다. 김정호는 이에 유의하여 전국을 같은 비례로 제도함으로써 축척 비례가 정연하고 주현의 분합이 가능했다.

 

배수(裵秀)의 6체(六體)를 들어 지도 제작 원리를 설명하였다. 서진(西晉)의 배수(裵秀)는 〈우공구주지도(禹貢九州地圖)〉를 그린 지리학자이며 정치가이다. 그가 중국 지도학의 시원을 이루었는데, 지도 제작의 여섯 원리를 제시하였다.

분율(分率) : 지형의 동서 · 남북의 폭원(幅員)

준망(準望) : 이곳과 저곳의 지형을 바로잡는 방위

도리(道里) : 이곳과 저곳의 거리

고하(高下) : 지형의 높낮이

방사(方邪) : 지형의 모남과 비뚤어짐

우직(迂直) : 지형의 구부러짐과 곧음

 

제도 원리

〈청구도〉는 배수(裵秀)의 6체(六體)에 따라 그려졌다. 곧 방안선을 그을 때 가로 70리, 세로 100리로 나누어 분율을 고려하였고, 준망은 동서남북의 4방위 대신 12간지의 12방위법을 써서 방위를 바르게 하였다. 거리의 균정을 위해 일정한 지점을 중심으로 10리마다 원을 둘러 그려서 도리(道里)를 바르게 하였는데, 이것이 평환법(平環法)이다.

그 전에 쓰던 방괘법(方罫法)은 사우(四隅, 네 귀퉁이)의 리수(里數)가 사정(四正 : 子 ‧ 午 ‧ 卯 ‧ 酉의 네 방위)보다 멀기 때문에 거리를 균정하게 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또한 천문 관측에 따른 경위선 표식을 적용한 점, 《기하원본》을 참고하여 서양 기하학의 원리를 이용한 확대 · 축소의 정확성을 기했다.

 

한편 청구도의 저본은〈해동여지도〉또는〈동여(東輿) : 청구도 원형 추정 조선전도 '동여(東輿)' 발간〉로 본다.

 

 

 

 

 

 

 

 

 

 

 

 

대동여지도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와 김정호(金正浩)는 남북한을 막론하고 교과서에 실린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지도, 최고의 지리학자로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대동여지도가 유명해진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1934년에 교과서 [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에 김정호와 대동여지도를 수록한 후부터이다. 

 

대동여지도의 정확성에 관해서는 조선을 침탈한 일제조차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경부선 철도를 부설하고자 전국을 측량하여 5만분의 1 지도를 만들었는데 대동여지도와 비교했더니 별 차이가 없었다, 청일전쟁·러일전쟁 당시에 군사용으로 사용했다, 토지침탈시 측량에도 이용했다는 등 여러가지 일화가 알려져 있다.

대동여지도는 김정호(金正浩 ?~1866)가 만든 지도이다. 고산자(古山子)는 김정호의 호. <출처: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김정호는 어떤 사람인가?

김정호와 대동여지도에 대해서는 잘못 알려졌던 점들이 많다. 우선 김정호가 지도의 중요성을 알고 많은 지도와 지리지를 편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지도를 만들기 위해 홀로 백두산을 7차례 오르내릴 정도로 방방곡곡을 다녔다든가, 대원군이 대동여지도의 정밀함을 보고 지도 목판을 불태우고, 김정호는 국가기밀 누설죄로 투옥시켜 결국 그가 옥사하였다는 것은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들은 [조선어독본]에 나온 것인데 일제가 조선을 폄하하기 위하여 조작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대동여지도는 주로 현지 답사에 의해 만들어진 지도라기 보다는, 비변사나 규장각에 소장된 지도와 민간 소장 지도 및 여러 지리지 등을 섭렵하여 만들었다고 보고 있다. 김정호는 대동여지도(1861) 뿐만 아니라 다양한 지도와 지리지를 만들었다.

서울지도인 수선전도(首善全圖, 1840년대), 전국지도인 청구도(靑邱圖, 1834), 동여도(東輿圖, 1857)를 제작하였으며, 전국지리지인 동여도지(東輿圖志, 1834∼1844), 여도비지(輿圖備志, 1853∼1856), 대동지지(大東地志, 1861∼1866) 등을 편찬하였다.

  

대동여지도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 목판본 (1861년) 보물 제 850호로 지정된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본.
디지털화하는 과정에서 전체 지도 중 1책의 순서가 편집되었다.

오른쪽은 현재의 서울 부근 <출처: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대동여지도는 현존하는 전국지도 중 가장 큰 지도로 크기가 6.7m x 3.8m 이다.

지도는 동서 80리, 남북 120리를 한 면으로 총 227면으로 구성된다.

2면이 1판으로 제작되어 이러한 판이 동서 19, 남북 22단으로 배열된다.

목판 한 장에는 지도 2면을 앞뒤로 새겨 넣어 총 60장의 목판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목판은 12장(보물 1581호)으로 국립중앙박물관 11장(25면), 숭실대기독교박물관 1장(2면)이 남아 전한다.

 

대동여지도는 남북 22단으로 나뉜 한 단이 각각 하나의 책자 형태로 나뉘어 제작되어 있다. 이 책자 하나를 ‘첩’이라고 하는데, 한 첩은 약 20 x 30cm정도로 휴대하기 부담 없는 크기이다. 따라서, 전체는 총 22첩이 되는데, 한 첩에 담긴 지도를 펼치면 한반도의 동서가 펼쳐지고, 연이은 첩을 상하로 잇대면 남북이 이어진다. 각 첩의 표지에 이 첩에 담긴 주요 지명을 표기하여 필요한 부분만 쉽게 찾고 가지고 다닐 수 있도록 만들었다.

 

대동여지도가 다른 지도와 달리 필사가 아닌 목판본으로 제작된 점도 특기할 만하다. 목판으로 만든 이유는 필사할 때 생기는 오류를 최소화할 수 있는 것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대량생산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대동여지도는 전국지도이기도 하지만, 도성도와 한성부지도(京兆五部)의 상세 지도가 별도로 추가되어 있다. 요즘으로 보면 전국 지도에 서울 시내 지도와 수도권 지도가 따로 들어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제 사용자의 편리를 고려한 것이다.

 

대동여지도에 별도로 추가되어 있는 상세지도. 한성부지도와 도성지도 <출처: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대동여지도의 축척에 관한 학설

대동여지도는 모눈을 그려 축척을 표시한 지도이다. 범례부분에 가로 8개, 세로 12개의 눈금을 그려 ‘한 칸은 10리(每方十里)’, ‘한 면은 세로 120리, 가로 80리(每片 縱一百二十里, 橫八十里)’, 한 칸에 사선을 그어 ‘14리(十四里)’라고 축척을 표기하였다. 그러면 대동여지도는 현대적 의미로 얼마의 축척을 갖는 지도였을까? 문제는 10리가 몇 ㎞인가를 아는 것이 주된 관건이다. 대동여지도는 100리를 1척(尺), 10리를 1촌(寸)으로 하는 ‘백리척(百里尺)’ 축척의 지도이다. 그러나 당시의 1촌, 1보(步)가 현재의 몇 ㎝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므로 이를 바탕으로 축척을 계산해 내기는 어렵다.

 

현재 우리는 10리를 약 4㎞로 환산하는데, 이것은 구한말 이후 일본의 거리기준이 도입된 이후에 정해진 것이다. 현재 학계에서는 대동여지도를 만들 당시인 19세기의 거리기준으로, 10리를 4.2㎞와 5.4㎞로 보는 2가지 견해가 있다. 10리를 4.2㎞로 보는 견해는 지도의 크기와 실제 지표면의 크기를 대비하여 계산한 것이고, 5.4㎞로 보는 견해는 19세기 경위도 1도의 거리관계에 대한 기록을 바탕으로 얻은 값이다. 따라서 대동여지도의 축척은 전자에 따르면 160,000분의 1, 후자를 따르면 216,000분의 1 의 지도가 된다.

 

 

범위와 세밀함을 겸비한 대동여지도

김정호는 조선 후기에 발달했던 군현지도, 방안지도(경위선표식 지도), 목판지도, 절첩식지도, 휴대용지도 등의 성과 및 장점들이 독자적으로 종합된 전국지도를 만들었다. 조선 후기의 지도는 크게 두 가지 계열로 발전하였는데, 하나는 18세기 중엽 정상기(鄭尙驥)의 [동국지도東國地圖] 이후 민간에서 활발하게 전사되었던 전국지도·도별지도이며, 다른 하나는 국가와 관아가 중심이 되어 제작했던 상세한 군현지도이다. 김정호가 만든 지도들의 뛰어난 점은 바로 이 두 계열 지도의 장점만을 결합, 군현지도 수준의 상세한 내용을 갖춘 일목요연한 전국지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기호표

   <출처: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 대동여지도의 축척표

     <출처: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이러한 것이 가능하였던 가장 주요한 이유는 바로 함축적 의미가 들어있는 독자적 기호의 사용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동여지도는 도면의 글씨를 가능한 줄이고 기호화된 지도표(14개 항목 22종)로 표기하여 11,760여 개의 지명을 간결하게 수록하였다. 즉 능․역․산성 등 명칭을 기호로 표시하였을 뿐 만 아니라, 옛 지명들도 표시하여 역사지리적인 정보도 함께 제공하고 있다. 또한 산은 독립된 산이 아닌 산맥(산줄기)으로 표시하였으며, 산줄기의 굵기로 산의 크기와 높이를 짐작할 수 있도록 하였다. 물길은 단일곡선과 이중곡선 2가지로 표현하였는데 단일곡선으로 된 것은 배가 다닐 수 없는 물길, 이중곡선은 배가 다닐 수 있는 물길을 표현한 것이다. 이는 여행시 걷기와 배타기를 고려하여 계획을 짤 수 있게 하기 위한 배려다.

 

도로는 곡선인 물길과 달리 직선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목판에 먹을 묻혀 찍어내는 단색 지도인 대동여지도의 특성을 고려하여, 물길과 도로의 구분을 쉽게 하기 위한 조치이다. 도로에는 실제 거리 10리마다 점을 찍어 두었는데, 비교적 곧은 길은 점 간격이 넓으며, 산악지형이나 꼬불꼬불한 길인 경우는 점 간격이 좁다. 이를 통해 두 지점 사이를 실제로 걸어갈 경우 걷는 거리와 도로의 상태를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이렇게 대동여지도는 국토를 보다 정확하고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실학적 지식으로 국가의 사회, 경제, 공간 구조를 반영하려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더욱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 대동여지도의 광주 주변.

아래쪽에 영산강 줄기가 있으며, 오른쪽 아래에 광주, 가운데에 장성, 왼쪽 위에 고창이 보인다.

<출처: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 대동여지도의 대구 부근.

    왼쪽의 큰 강이 낙동강이다.

    남쪽부터 창녕, 현풍, 대구, 칠곡 등이 보인다.

    <출처: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화폐 도안으로 검토되었던 대동여지도

지난 2009년 10만원 권 화폐 도안으로 대동여지도를 쓰려다 취소되는 해프닝이 있었다. 그 이유는 대동여지도 목판본에 독도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김정호는 분명히 독도를 알고 있었고, 이전에 제작한 청구도에 독도를 표기하였다. 따라서 대동여지도에 독도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명확하지는 않다. 대동여지도가 목판으로 제작되어 정확한 축척의 위치에 독도를 표기하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이 현재의 추정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김정호의 업적을 기념하여 천문학자인 전영범이 2002년 1월 9일 보현산천문대에서 발견한 소행성 95016의 이름을 김정호(Kimjeongho)라고 지었다. 김정호는 하늘에 있다.

- 홍현선 / 국립과천과학관 전시기획총괄과 연구관
연세대학교 사학과에서 학사, 석사학위를 받고 온양민속박물관, 국립중앙과학관에 근무하였으며, 2002년부터 국립과학관추진기획단에서 전시물의 기획, 제작, 감독을 하였으며,
현재는 국립과천과학관 전통과학분야의 전시, 연구, 교육업무를 맡고 있다.

발행일 
2011.02.19

자료 제공 국립과천과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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