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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체코인 엔리케 스탄코 브라즈의 서울방문(논고)

Gijuzzang Dream 2011. 4. 14. 00:36

 

 

 

 

 

 

 

 1901년 체코인 브라즈의 서울방문 특별전

 

 

 

 

 

 

- 이르지나 터도로보바(Jiřina Todorovová)  논고(論告) -

 

 

 

브라즈(Enrique Stanko Vráz)는

 

 

1860년 4월 18일 불가리아 도시인 타르노보에서 태어났다.

체코 혹은 러시아 출신인 아버지는 외교관이었는데,

브라즈는 때로 아버지가 육군 장교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스페인 사람으로 추정한다.

 

브라즈는 육군 사관학교를 다녔으며, 17세에 지원하여 간부 후보생으로

러시아 편에서 터키에 대항하여 싸웠다.

1880년 브라즈는 유럽을 떠나 아프리카로 여행을 갔다.

 

그가 쓴 편지에서 “나는 내 어린 시절에 대해 말할 때마다, 거짓말을 하곤 한다!” 라 한 것처럼.

그때그때마다 그가 말하는 출생지는 카라카스나 마투린 (베네수엘라),

아니면 시카고 (미국) 등 다양했다. 이 모두는 심지어 공문서를 작성할 때에도

어떤 특정한 순간에 그에게 가장 어울리는 곳이 어디이냐에 달려있었던 것 같다.

 

그가 한때 “혼혈이지만 내 피 속에 체코인 혈통은 참으로 미세하다.”라고 하였지만,

체코어에 대한 그의 열렬한 사랑이나 그의 부인할 수 없는 애국심이나 사적인 일기나 편지에서

벽한 체코어를 구사했던 점등을 보면

적어도 그의 양친 중 한명이 체코출신이라는 설이 더욱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브라즈는 이름을 규칙적으로 바꾸었는데, 성을 쓸 때는 처음에는 브라즈에 첨자를 붙이지 않았고,

이름은 앰드라해오 스탄코(Emdrajeo Stanko, 베네수엘라에 있을 때), 에드 스타니슬라브(Ed. Stanislav), 에밀 스타니슬라브(Emil Stanislav), 엠마누엘 스타니슬라브(Emanuel Stanislav),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형태 -엔리케 스탄코 브라즈(Enrique Stanko Vráz)로

나중에 바뀐- 엔리케 스탄코(Enrique Stanco) 같은 여러 가지 이름들이 붙여졌다.

체코에서는 일반적으로 공문서를 작성할때 스타니슬라브(Stanislav)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저서를 쓸 때에는 엔리케 스탄코(Enrique Stanko)라는 필명을 선호하였다.

 

아내는 블라스타 게린게로바(Vlasta Geringerová)이고

처가는 체코인으로서 시카고에 정착하여 출판업자로 성공한 집안이었다.

 

 

브라즈(Enrique Stanko Vráz) – 여행가

 

1880년부터 북아프리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아라비아 상인이나 가난한 유대인으로 변장하여

사하라 사막 심장부까지 합류하기를 기도하며 몇몇 무역 대상에 잠입을 시도하였다.

당시 그의 염원은 당시에 잃어버린 도시로 알려진 팀북투(Timbuctoo)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누구도 그들 원하는 곳까지 데려다 주지 못했으므로

그는 서아프리카 해안에서부터 팀북투를 찾기로 결정했다.

바투르스트(Bathurst, 현재의 반줄, 감비아)에 도착한 후 브라즈는 자연물들을 모으게 되는데,

이는 장차 그의 생계수단이 될 활동의 시작이 된 셈이었다.

어떤 물품들은 그 지역 유럽인들에게 팔았으며 일부는 유럽으로 보냈다.

불행하게도 그는 심각한 말라리아와 이질에 걸리게 되고,

2년 후 심각한 건강상태로 감비아를 떠나게 된다.

 

1885년 그는 또 다른 영국 식민지–황금해안(Gold Coast, 현재의 가나)에 도착하여

크리스천스보(Christiansborg, 현재 가나 수도인 아크라의 부분)에 자리 잡았다.

크리스천스보는 바실 전도회의 주 소재지였는데 그곳에서 그들은 병원을 성공적으로 운영했다.

여기서 브라즈는 질병 치료뿐 아니라, 선교사로부터 첫 사진기를 구입하게 된다.

이때부터 자연물 수집 외에도 사진 찍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브라는 주변지역들을 두루 여행하였는데, 애버리(Aburi), 아다(Addah), 아베티피(Abetifi),

그리고 동떨어진 아샨티 왕국의 옛 수도인 쿠마시(Kumasi) 등이 대표적이었다.

그 후 건강 회복을 위해 3개월 동안 카나리아 제도에 머물렀고 다시 황금 해안으로 돌아갔다.

1888년까지 아샨티족과 다호메이족 간을 정기적으로 오가면서 사진을 찍거나 수집활동을 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수집품들은 판매 목적으로 프라하의 바츨라프 프리취(Václav Frič) 상인에게 보냈지만,

또 일부는 국립 박물관에도 기증하였다. 당시 추정으로는 곤충 1만 5천 마리 이상,

새 및 동물의 가죽 2 천 장, 그리고 또 다른 자연 물품 3천 점 이상을 모은 것으로 보인다.

 

1889년 7월 브라즈는 베네수엘라로 출발한다.

수도인 카라카스에 정착하여 무역업을 시작했다. 그는 곧 베네수엘라 시민권을 취득하고

몇몇의 메이스닉 로지스(프리메이슨의 비밀 결사단체)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몇 가지 희귀한 난초를 포함하여 자연물을 수집하게 되었다.

친한 체코 친구 야로슬라브 브라즈다(Jaroslav Brázda)는 브라즈의 무역 대리인으로서

수집품의 포장과 판매를 담당했다. 그들은 인디언으로부터 해저케이블 생산 원료의 대체물로

활용할 수 있는 발라타 나무 수액 가공법을 배웠다.

 

브라즈는 이 무역의 수익을

수로를 따라 미국 열대를 횡단하는 원대한 모험을 위한 자금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그는 1892년 볼리바르(Bolívar)시를 떠나 오리노코 강(Orinoco)과 그 지류를 항해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많은 사진을 찍을 수 있었고 무수히 많은 자연 및 생활사 유물들을 수집하였다.

이것들을 프라가호와 투쿠소호에 실어 보냈다.

안타깝게도 투쿠소호는 브라즈의 귀중한 컬렉션, 노트, 네거티브필름을 실은 채 침몰하고 말았다.

 

이즈음 사업을 위해 카라카스에 남았던 브라즈다(Jaroslav Brázda)가

두 사람이 발라타 무역으로 모아두었던 돈을 모두 뺏기고 말았다. 이러한 재정적 손실로

망연자실한 두 사람은 급기야 남은 배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보물과도 같은 카메라를 팔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그는 가까스로 그의 컬렉션 중 남은 절반을 프라하로 보낼 수 있었다.

 

불운도 브라즈의 여행에 대한 집념을 막지 못했다.

그는 브라질 마나오스를 떠나 기선을 타고 아마존 상류를 천천히 거슬로 올라갔다.

후알라가 강 하류의 페루 이키토스까지 항해하면서

종종 주변 원시림에 정거하여 수집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키토스에서 브라즈는 하선하여 안데스산으로 향했다.

그는 안내와 통역을 자처한 몇 인디언들과 동행하였다.

1893년 11월 24일 브라즈와 그의 팀은 높은 봉우리를 지나 태평양 연안의 파카스마요(페루)에 도착했다.

미국 적도를 가로지르는 그의 여행은 성공적으로 종결되었다.

그는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은 많은 동물종의 가죽을 포함하여 엄청난 컬렉션을 모을 수 있었고,

수많은 사진과 알려지지 않은 지역의 귀중한 토착유물을 수집하였다.

 

1894년 브라즈는 프라하로 돌아왔다.

도착하자마자 그는 최초의 체코 비유럽문화박물관 설립자이자 소유주인

보이타 나프르스텍(Vojta Náprstek)을 방문하게 된다.

나프르스텍은 당시 체코여행가의 대다수에게 헌신적인 지지와 경제적 지원을 하던 사람이었다.

브라즈는 그가 남미에서 수집해온 유물들을

‘할라넥가에서(U Halánků)’라 불리는 집을 개조한 박물관에서 전시하였고

일련의 공개강좌도 기획하였다. 첫 공개강좌는 1894년 11월 26일 죠핀 궁전(Žofín)에서 열렸는데

자연과학단체의 회원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이는 미리 원고를 작성하여 준비한 유일한 강의였는데,

종국에는 원고를 읽지 않고 열정을 다하여 즉흥적으로 강연을 하였다.

브라즈의 강좌는 프라하 청중을 압도적으로 매료시켰고,

그는 곧 체코 내 유수 자연과학자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이후에도 체코와 모라비아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강연을 하였다.

프라하에 동물원을 설립한 단체의 후원으로 브라즈는 살아있는 동물 전시를 기획하기도 했다.

 

끊임없이 여행하는 브라즈는 1895년 11월

프라하를 떠나 북미에 살고 있는 많은 체코인들에게 강연을 하기 위해 경유하여, 일본으로 향했다.

여기에서 그는 수집을 계속하였고, 1896년 5월 싱가포르를 거쳐 보르네오로, 또 뉴기니로 여행하였다.

브라즈는 섬 북부에 위치한 도어만(Doré Bay) 작은 마을에 정착하여

미지의 내륙 중심부, 특히나 핫담산(Hattam Mountains)으로 갈 기회를 기다렸다.

얼마간의 기다림 후에 그는 곤충채집, 수협, 사진 찍는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브라즈 일행이 만난 토착민들이 저항하고, 일행을 안내할 정보가 신뢰성이 없고,

가장 중요하게는 식량의 부족으로 인하여 여행을 짧게 중단하고 뉴기니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1897년 3월 브라즈는 다시 싱가포르를 거쳐 현재의 태국인 시암으로 향했다.

그는 방콕과 인근 지역에서 한 달간을 보냈다. 그 뒤에 캄보디아 및 버마에 갈 예정이었지만

재정 부족으로 인해 1897년 5월말 유럽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프라하에서 2주를 보낸 후, 사업을 정리할 목적으로 다시 베네수엘라로 돌아가게 된다.

여정 중 미국을 경유하여 몇 개 도시에서 강연회를 갖기도 하였다.

 

1897년 12월 28일 브라즈는 미국 여정 중에

아우구스트 게린게르(August Geringer)의 딸 블라스타 게린게로바(Vlasta Geringerová)와 결혼을 한다.

게린게르는 체코어로 ‘단결(Svornost)’이라는 뜻을 가진 시카고 지역신문의 편집장이며

그의 회사는 미 전역에 살고 있는 체코인연합을 지원하는 유력한 지역출판사였다.

1898년 새해 첫날에 이 신혼부부는 멕시코로 두 달의 신혼여행을 떠난다.

돌아온 후 브라즈는 네덜란드, 체코와 모라비아에서 예정된 순회 강연차 다시 유럽으로 떠나게 된다.

그의 아내는 브라즈를 만나기 위해 곧장 프라하로 가지만, 그곳에서 정착을 한 적은 없었다.

그녀는 계속 시카고와 프라하를 왕래하였다.

1899년과 1900년에, 브라즈는 미국 전역 특히 애리조나 주와 뉴 멕스코 주를 여행하면서

많은 사진을 찍게 된다. 그는 또한 호피인디언 족의 주요 근거지인 왈피마을에서 2주를 보내기도 했다.

 

1901년 1월 브라즈는 의화단 운동(1898-1901)의 절정기에 중국여행길에 나선다.

북경에서 원명원을 비롯한 여러 궁전, 대성당, 정원 등 여러 유적지들을 방문하였다.

그는 사진을 찍는 동시에 자세한 여행일지를 기록하였다.

유럽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국, 시베리아, 러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돌아갔지만

프라하에 들르지 않고 곧장 시카고로 향했다.

1903년 가을과 1904년 4월 사이에 남미와 중미의 수도들을 방문했다.

브라질을 시작으로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에콰도르, 코스타리카, 그리고 파나마를 통했고

마지막으로 멕시코를 여행하였다.

 

1905년 브라즈는 라틴 아메리카 강연을 위해 잠깐 체코를 방문한다.

2년 후 그는 가족과 함께 체코로 돌아왔고, 이후 1910년 단 한차례 시카고를 방문한다.

계속되는 순회강연 때문에 그가 글을 쓰는데 필요한 시간과 에너지가 고갈되고 있었다.

 

1916년 브라즈는 공화당원 찰스 에번스 휴스에 반대하는 민주당 후보 우드로 윌슨을 위한

미국 사전 선거 캠페인에 참여하였다. 브라즈는 윌슨이 당선되도록 미국에 있는 체코인들을 설득하여

당시 미국에 사는 수 만 명의 체코인들이 윌슨을 지지하게 하는데 성공했다.

브라즈는 윌슨이 이에 대한 답례로 체코의 독립을 위해 도움을 줄 것이라 믿었다.

 

제 1차 세계 대전 후, 브라즈는 다시 체코(당시 신생 독립국인 체코슬로바키아)로 돌아왔다.

불행히도 그는 여행으로 인한 병치레가 잦았다.

1920년에 비소각화증(열대열 말라리아 예방으로 쓰는 비소의 장기복용으로 인한 2차 결과로 인함)에서

발전한 암으로 인해 왼팔을 절단했다.

그는 말라리아로 인한 심장병, 당뇨병, 천식 그리고 간 손상으로 인해 고통을 겪기도 했다.

이뿐 아니라 브라즈는 심각한 정신과적 문제도 감내해야 했다.

그는 정기 치료를 위해 퍼뎨브라티(Poděbrady)라는 온천 도시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체코에서 여행가이자 교육자로 유명한 요세프 커젠스키(Josef Kořenský)와 돈독한 우정을 키웠다.

 

브라즈는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을 다니며 강연을 계속하였다. 강연 대상은 주로 젊은이들이었고

그는 청중들을 매료시키기 위해 ‘빛나는 그림’ 즉 유리 슬라이드를 상영하였다. 

브라즈는 강연시리즈를 라디오로 방송한 최초의 체코 여행가 중 일인이다.

1928년 여섯 강연 시리즈에 대해 ‘라디오 저널 (Radio journal)’과 계약을 하였고,

1929년에는 여덟 번의 강연을, 1930년에는 일곱 번의 강연,

1931년에는 젊은 청자들을 위한 두개의 짧은 강연 시리즈를 방송하였다.

 

이 와중에도 브라즈는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건강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고 재정적으로도 곤란을 겪고 있었다.

그는 1932년 2월 20일에 사망했다.

나프르스텍 박물관 아카이브에 소장되어 있는 주프라하 미국영사의 보고서에는

‘이 미국 시민 사인(死因)은 간염이다’라고 씌여 있다.

 

 

브라즈 – 작가 및 사진가

 

브라즈는 잘 기록된 다수의 저서에서 그의 여행담을 잘 설명하고 있다.

그저 단순히 전형적인 유형의 여행기를 출판하였다는 점에서 뿐 아니라

그의 여행이 그로 하여금 다양한 단편 이야기들을 쓰게끔 만들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그는 늘 독자들에게 대중적인 형태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지리학적, 과학적, 민족학적인 묘사를 제공하는 ‘세계도회(Orbis Pictus)’와 같은

광범위한 백과사전적인 저작을 남기고자 하였다. 안타깝게도 이 작업은 완성되지 못했다.

 

브라즈의 이름으로 출판된 첫 저서는 <브라즈 여행으로부터(Z cest E.St.Vráze)> 제목으로

1898년에 발간되었고, 2년 후에 더 자세한 여행기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세계 여행(Cesty světem)>이라는 총서 형태로

『적도 지방의 아메리카를 가로질러(Napříč rovníkovou Amerikou, 1900년)』,

『흰 코끼리의 나라에서(V zemi bílého slona, 1901년)』,

『중국. 여행 스케치(Čína. Cestopisné črty, 1904년)』등 총3권으로 출판되었다.

1910년 그의 단편소설 및 기행문 선집으로『이국적인 단편 소설(Exotické povídky)』,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Z dalekých světů)』2권이 발행되었다.

 

브라즈 여행에 대한 보다 자세한 기록은 그의 사망후에 비로소 등장하게 되는데,

1940년에서 1946년 사이에 유망한 체코 출판사인 토우쥠스키(Toužimský) 모라베쯔(Moravec)에서

그의 작품을 9권의 총서로 제작하여 출판하였다.

제1~3, 8권은 라틴아메리카에 관한 것이고, 제6권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관한 것이며,

브라즈의 한국여행기는 중국여행기록과 함께

<북경의 흰 악마. 중국 방랑 및 모험(Bílý ďábel vToulky a dobrodružství vČíně)> 제목으로

제4권에 등장하고 있다. 태국은 제 5권, 뉴기니, 보르네오 섬과 일본은 제 7권에 등장하고,

마지막 제 9권은 다시 보르네오 섬에 관련된 내용이다.

 

이후로 1980년대에 브라즈의 선집 2권이 발간되었다.

하나는 ‘파노라마 (Panorama)’ 라는 프라하 국영 출판사가 발행한 라틴 아메리카 모험을 그린

『적도 지방의 아메리카를 가로질러(Napříč rovníkovou Amerikou, 1984년)』,

다른 하나는 토론토에 근거지를 둔 체코 망명인이 설립한 ‘Sixty–Eight Publishers’ 출판사가

브라즈여행기 중 가장 흥미로운 작품을 선정하여

『먼 나라에서(V dálavách světů, 1983년)』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브라즈의 저서가 20세기 동안 체코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의 영향은 주었겠지만,

브라즈 유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의심의 여지없이 그의 사진일 것이다.

1885년 브라즈가 황금해안에서 말라리아 치료를 받는 동안 그의 시도는 다소 우울하게 시작되었다.

 

브라즈가 바실 전도회의 소재지에 머무는 동안,

사망한 지 얼마 안 되는 선교사 앞으로 독일로부터 소포가 도착한다.

브라즈는 그 소포에 동봉되었던 사진기를 구입하게 된다.

이 사진기는 뒤셀도르프에 있는 리제강 (Liesegang)社가 생산한 것으로 나무로 되어 있었으며,

여행용 카메라라고 하기에는 무겁고 부담스런 도구였다.

삼발이에 설치되어야 했고 한 장 당 125그램의 무게가 나가는 유리판을 사용해야 했다.

카메라에는 또한 무겁고 검은 캔버스 배경천이 덮여있었다.

 

브라즈는 이전에 사진을 찍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진술을 익히는 데 애를 먹었다.

그가 제공하는 사진들은 당시 변화하는 사회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가치 있는 통찰력을 제공하고 있다.

 

브라즈는 ‘꼬치를 사용해서 머리카락을 뿔 모양으로 만든 원주민들과 마찬가지로,

내 선교사 친구들, 어설픈 유럽식 옷을 입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개종한 흑인들’이

모두 그의 스튜디오를 이용했다고 언급했다.

(Vlasta Vrázová, 브라즈의 삶과 여행 [Život a cesty E.St.Vráze], 1937, pp.44.)

 

브라즈는 1893년에 어쩔 수 없이 그의 카메라를 팔았을 때까지, 같은 사진기를 사용했다.

후에 미국에서 보르네오와 뉴기니에서 사용했던 것과 비슷한 카메라를 구입하였다.

중국과 한국으로 여행을 했을 때에만 좀 더 최신식의 카메라에 투자하였다.

브라즈는 당시 미국의 사진기술이 제공하는 최고의 코닥사가 제조한 스테레오 카메라를 선택했다.

중국과 한국 여행에서 찍은 사진들은 입체적이어, 큰 유리판에서 동시에 2장의 화상을 얻을 수 있었다.

브라즈가 사용한 마지막 카메라는 1913년에 나온 이스트먼 코닥 사진기로

훨씬 뛰어나고 간편한 휴대성과 더불어 셀룰로이드에 사진을 찍는 특징이 있었다.

 

열대우림과 같은 비선호 조건에서 필름을 현상하는 것은 대단히 까다롭고 복잡한 문제였기 때문에

양질의 사진들은 매우 소중하게 보관되었다. 후에 브라즈가 회고하기를

“열대 지방에서 젤라틴이 찢어지고 강에서 받아온 따뜻한 물에

모든 인간의 노력과 정교함이 헛되이 씻겨 내려가는 순간에 암실 장비 없이 판을 현상하는 것이

너무나 고생스럽고 실망만을 가져온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 때때로 사진 뒤의 이야기는 실제 사진 작품보다 더 재미있고,

그 행위 자체를 결코 유리판 위에 다 그러모을 수는 없다.”라 하였다. (Vlasta Vrázová, pp.44–45)

 

몇 천점이 되는 브라즈의 네거티브 필름, 슬라이드 및 인화된 사진은

현재 프라하 나프르스텍 박물관이 브라즈컬렉션으로 분류하여 소장 중에 있다.

물론 그가 강연을 위해 다른 자료도 활용하였을 공산이 크기 때문에

모든 사진을 다 그가 찍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기에는 여행가이자 모험가인 체코인 베드르지흐 마훌카(Bedřich Machulka)로부터 구입한

동아프리카 관련 네거티브필름 다수가 포함되어 있다.

이 컬렉션의 한국 사진 부분도 약 10%가 다른 이가 찍은 사진으로 추측된다.

 

 

브라즈 – 유산

 

엔리케 스탄코 브라즈는 체코의 사진가 중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하의 체코에서 그 누구도 브라즈 만큼

여러 나라에서 이렇게 많은 수의 사진을 찍은 이가 없기 때문이다.

체코의 사진 분야에서 수위를 차지할 뿐 아니라 몇 가지 점에서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를 차지하고 있다.

 

브라즈는 세계최초로 카메라를 들고 아베티피 왕국(현재 가나) 및 뉴기니아의 핟담산맥을 여행했다.

브라즈에게 사진은 감정적인 혹은 예술적인 매체라기보다는 사실적인 것으로서

후대를 위한 기록의 수단이었다. 특이할만한 점은 그가 유리네거티브에 직접 사진설명을 적은 점이다.

 

브라즈는 지역 건축이나 세부적인 면, 자연과 경관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대부분은 평민들의 모습이었다.

그의 사진은 장소와 시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브라즈는 투시적인 관찰자라 할 수 있는데, 이는 그가 사진을 활용하는 주된 목적이

다름 아닌 당시 멀리 떨어진 미지의 나라와 토착민족에 대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교육을 시키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세계가 지구촌화된 지금 이 시기에

브라즈의 남긴 작업들은 매우 귀중한 가치를 지닐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 이르지나 터도로보바 (Jiřina Todorovová) 박사

국립박물관 비유럽 민족학과장이다.

현재 체코 공화국 프라하의 아시아, 아프리카 및 미국 문화 나프르스텍 박물관에 파견 근무 중이다.

체코 여행가 및 그들의 사진에 대해 수많은 글을 쓴 작가로 잘 알려져 있고,

대표저서는『엔리케 스탄코 브라즈, 신비한 사진 여행가(Enrique Stanko Vráz. Záhadný cestovatel fotograf, 2006년 발행)』이다.  

 

 

 

 

 

 

 

 

  

 한국을 여행한 7명의 체코인 이야기

 

 

- 2차 세계대전 이전 한국을 찾은 그들의 여행담과 한국에 대한 생각

 

 

 

터블스의 국적 :

미국으로 이민한 약 4만 명의 보헤미아인(1870년 미국 연방 센서스)들과 마찬가지로

막스 터블스(Max Taubles, 1845-1886/ 본명은 Maximilian Taubeles)

곧 미국시민권자가 되었다.

1860년대 후반에서 1870년대까지 매년 약 4천명의 체코인들이

보다 나은 삶을 찾아 미국으로 꾸준히 이민을 왔다.

미국의 유명잡지 ‘하퍼스(Harper's)’에 기고할 기사 취재를 위해 조선에 왔다.

그러나 그는 정작 조선에 대한 기사는 한 줄도 보내지 못한 채 천연두에 걸려 생을 마치게 되었다.

3월 17일 제물포에서 언더우드 목사의 진행으로 장례식이 치루어졌다.

그의 묘는 현재 인천시 연수구 청학동 외국인묘지에 있다.

그는 오늘날 체코 공화국의 문화적 모태인 보헤미아 출신으로 조선을 방문한 첫 번째 체코인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관계 :

 

양국관계가 서로 소원했기 때문에 19세기 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선박이

중국이나 일본의 항은 정기적으로 운행해도, 한국을 방문하게 된 경우는 단 2회에 불과했다.

양국 조약 체결 2년 전인 1890년 전함 SMS 지린이(Zrinyi)가 극동 항해에 일환으로 한국을 찾았다.

 

1890년 제물포항에 닻을 내리고,

선장과 장교들이 주한 독일 영사인 페르디난드 크리엔(Ferdinand Krien)의 안내로

여러 명의 한국 관료를 만나 양국간의 우호적 관계 수립 가능성을 논의했다.

SMS 지린이호의 선원 중 일부가 한국땅에 발을 디뎠을 가능성이 높지만,

당시 보헤미아 언론에 소개된 것은 없다.

 

1893년 순양함 SMS 카이저린 엘리자베스(Kaiserin Elisabeth) 역시 제물포에 닻을 내렸는데,

여기에도 체코인 선원이 여럿 승선해 있었다.

러일전쟁 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선박의 한국 방문이 2차례 더 있었다.

 

1901년 4월 해군제독 루돌프 본 몬투쿠콜리 백작이 이끈 3척 함대가 제물포에 도착했고,

1년 뒤 SMS 마리아 테레지아호가 도착해서 선장 안톤 하우스가 고종황제를 서울에서 알현했다.

(한스-알렉잔더 크네이더가 작성한 한국의 오스트리아인 명단에서 인용)

 

그 중 한 명이었던 음악인 바클라브 하벨카(Václav Havelka 1869-1939)의 미 출판 일기를 통해

그가 한국을 방문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한국이 외국인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1870년대부터지만,

한국을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글이 유럽어로 출판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거의 20년이 지난 뒤이다.

대부분 영어나 러시아어였고, 일부 불어나 독일어 글이 있었는데,

이는 당시 한국을 찾은 외국인의 구성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중유럽출신 여행자가 쓴 책 중 한국을 다룬 2권은 흔히 러시아인으로 오인되고 있는

폴란드 작가이자 정치인 바클라 시에로즈제위스키가 (Wacław Sieroszewski: 1858-1945 ) 쓴

<한국-극동의 열쇠(바르샤바 1905)>와

헝가리 여행가이자 정치인 피터 바이 데 바야 백작(Count Péter Vay de Vaya :1863-1948)의

<동양의 황제들과 제국들> 이다.

 

당시에는 대한제국과 외교적 관계가 활발한 국가의 사람들이 한국을 주로 방문했는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한국과의 외교관계가 활발하지 않았다.

보헤미아에서 한반도까지 여행을 온 사람들은

1901년 요세프 코르젠스키(Josef Kořenský)와 엔리케 스탄코 브라즈(Enrique Stanko Vráz)가 처음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한국에 보인 무관심은 인접국 독일의 태도와 매우 대조적이다.

수많은 독일 여행가와 장교 및 방문자들이 한일합방 전에 한국을 찾았다.

 

 

1901 – 첫 체코 여행자들이 한국에 도착 

 

 

요세프 코르젠스키(Jpsef Kpfensky, 1847-1938)는

체코 어린이와 청소년 사이에 세계 지리와 역사에 대한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인물이다.

코르젠스키는 전세계를 누빈 전문 여행인이었지만, 한국을 방문하게 된 것은 고베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항해하던 중 잠시 정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코르젠스키는 부산항과 원산항만을 보게 되었고, 그 소감을 <지구의 반대편으로(1903-1904)>라는 2권짜리 여행기에 3페이지에 걸쳐 썼다.

안타까운 것은 ‘한국과 시베리아를 거쳐 고향으로’라는 장에는, 여행기의 다른 부분에는 많은 그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코르젠스키는 한국 방문 전과 여행기를 쓰기 전에 한국에 대한 글을 많이 읽었는데,

‘한국인은 지저분하고 게으르다’고 흔히 생각했던 다른 저자들의 부정적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코르젠스키 역시 친일본 성향이 있어

한국을 방문하기 전부터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작은 다리 사이로 아담한 일본인 조계지역과 한국인 지역이 나뉘어 있는데,

다리를 건너자 전혀 다른 세계가 나타났다.

단 몇 걸음 만에 완벽한 청결과 질서 대신 하수, 진흙, 먼지 속에 서 있었다.

한국 오두막은 진흙으로 지어졌고, 사람과 소가 함께 사용했다.’

 

선상에서 이미 ‘쇠락한 조선왕국의 해안(Kořenský 1903-04 II: 624)’이 보였고

부산에 도착해서는 ‘멀리서도 이미 잘 정리된 일본인 조계지와

무관심한 한국인들의 무너져가는 초가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무역은 게으른 원주민들을 지배하게 된 일본인들이 이미 오래 전에 장악했다(ibid.)’

 

물론 1901년 당시 일본인 조계지역이 한국 구역보다

‘훨씬 사람도 많고, 넓고, 자부심도 강했고, (Salmon 2003:21)’

이미 1890년대 말부터 ‘우편 등 많은 기능을 일본인들이 담당하고 있었으며,

일본은 항구의 금융기관들도 설립하고 지배하고 있었고, 연안무역의 대부분을 운영하고 있었다.(ibid.)’

는 코르젠스키의 글을 보면

모든 ‘원주민을 게으르고, 무식하며, 후진적’이라고 폄하하는 유럽인의 일반적 편견이 느껴진다.

 

마스투라 아틀라스의 <게으른 원주민에 대한 그릇된 인식(The Myth of the Lazy Native, 1978)>에 나온

작가의 견해와 비교 그러나, 그의 글이 전부 나쁜 것은 아니며,

묘사 중에는 편견 없이 직접 본 것을 단순히 표현한 부분도 있다.

 

방문한 두 항구의 풍경이 마음에 들었던지 ‘부산은 배후가 아름다웠고(Kořenský 1903-04 II: 624)(ibid.)’

‘원산 역시 산비탈에 위치해 있었다.(Kořenský 1903-04 II: 626)’고 적었다.

 

한국에 대한 이 짧은 경험담이 코르젠스키가 한국에 대해 출판한 최초의 글은 아니다.

1895년경 출판된 <아시아, 청소년을 위한 문화 스케치(ibid.)>라는 책에는

‘한국 왕국으로부터’라는 장이 있는데,

체코어로 쓰여진 한국에 대한 설명으로는 당시까지 가장 간결하고, 더 잘 알려져 있었다.

(Kořenský 1895:171-175).

 

코르젠스키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모종의 보고서를 1922년 출판된 제2판에서야 언급한다.

하지만, 제1판에서도 이미 지린이호 선장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는 것은

제로림 프라이헤르벤코 폰 보이닉(Jerolim Freiherr Benko von Boinik)이 쓴

<HMS 지린이호의 동아시아, 양쯔강, 황해로의 항해/ Die Reise S. M. Schiffes ´Zrinyi´ nach Ost-Asien

(Yang-tse-kiang und Gelbes Meer) 1890-1891> (비엔나 1894)를 참고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에는 한국에 대한 부분이 상당히 많다.

지린이호의 외과의사 페렌즈 가스파르(Ferenz Gáspár)가 쓴

<돛과 증기로 4만마일(Negyvenezer mérföld vitorlával és gözzel, 1893)>은 600페이지 이상의

헝가리어 여행기인데, 코르젠스키가 이 책을 참고했는지는 분명치 않으며 언어장벽으로 가능성도 낮다.

 

후자에는 한국 방문에 대해 약 40페이지가 들어 있는데, 출처로 잘못 인식되었던 적이 있었다.

(Klöslová 2000b:136, Klöslová 2009:332)

 

내용이 부정확하고, 그 외에 여러 가지 단점이 있기 때문에

‘연구자료로서의 가치는 거의 없다.’(Fendler 1990:28)를 토대로

1890년 한국에 왔던 오스트리아-헝가리 군함 SMS 지린이호 선원들의 경험을 썼다.

 

코르젠스키는 지린이호의 선장과 장교 3명이 제물포에서 말을 타고 서울에 가서

독일 영사관에 머문 여정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선장 일행은 한국 정부 관료 여럿을 만난 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인 비엔나에 돌아가 한국의 우호조약 체결 요청을 전달했다.

코르젠스키가 ‘President (1895:174)’이라고 지칭한 한국 대표는 지린이호를 직접 답방했고,

조폐청 방문에 선장을 초대했다.

코르젠스키는 제물포와 서울을 비교하면서 일본인 조계지와 한국 구역의 두드러진 사이를 강조했다.

여행자들은 명성황후 장례 준비 및 행사를 지켜보기도 했다.

‘장례식 연습은 아름다운 장관이었다’고 그는 적고 있다. (Kořenský 1895:173)

 

코르젠스키는 당시 한국 상황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혔는데,

가장 흥미로운 것은 중일 전쟁과 그 직접적 영향을 다룬 마지막 단락이다.

코르젠스키의 결론은 ‘일본의 승리로 한국에서 일본제국의 무역 이해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힘을 받게 될 것이다.(Kořenský 1895:175)’는 것이었다.

 

25년 이후인 1922년 코르젠스키는 자신의 인기 아시아 지리서의 확대판을 지역을 기준으로

2권으로 분리해서 출판했다.

<아시아, 동북아시아로부터의 문화 스케치. 시베리아, 트란스카스피안, 몽골리아, 티벳, 중국, 일본,

한국>이라는 새로운 제목 하에 국가별로 나라와 민족을 소개하는 원래의 형식을 유지했지만,

개정판의 경우 한국에 대한 부분이 상당히 확대되었다. 한국에 대한 내용은 제1판과 대동소이하지만

제목을 <구대한제국으로부터>라고 바꾸어 그 사이 한국의 지위가 바뀐 것을 반영했다.

 

‘인접국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화할 기회를 노렸고,

20세기초 독립국이었던 한국이 안타깝게도 1910년 일제의 식민지로 편입되었다.

 (Kořenský 1922:212)’고 전보다 균형 있는 자세를 취했다.

 

한국과 관련된 장이 2개 추가되었는데,

‘대한해협 너머’는 1901년 여행기의 내용을 확장한 것이고(Kořenský 1922:213-215),

‘한국의 산과 계곡을 넘어’라는 마지막 장은

영국 기자인 존 해밀턴(John Hamilton)의 글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Kořenský 1922:215-217)

 

요세프 코르젠스키의 인기 지리서들은 체코인들에게 한국을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코르젠스키가 쓴 30권 이상의 책들은 모두 인기리에 출판되고,

여러 차례 개정되면서 그는 체코 젊은이들에게 세계를 알리는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로 인정받았다.

그의 책들은 1890년대 중반부터 2차 세계대전까지 꾸준히 출판되고 상당한 인기를 누리며

적어도 3 세대에 걸친 체코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엔리케 스탄코 브라즈(Enrique Stanko Vráz, 1860-1932)

 

브라즈(그의 일생과 여행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 책의 토도로보바를 참고)가 본 서울은

비록 동시대 일본이나 중국의 다른 도시들 보다는 개발이 덜 되었지만, 빠른 속도로 부상하는 도시였다.

1900년 경인선의 개통으로 외국인들은 서울에 훨씬 쉽게 접근할 수 있었고,

1901년 봄 한국에 도착한 브라스는 훨씬 쉽게 제물포에서 서울로 이동할 수 있었다.

 

브라스의 한국 방문 기록을 분석한 즈덴카 크로슬로바에 의하면

“브라스는 1896년 일본 방문 때 이미 한국 방문을 생각했었는데, 1901년에야 그것이 성사되었다.

1901년 1월부터 3개월간 북경에서 모험에 가득 찬 기간을 보낸 뒤 4월 27일에 제물포항으로 향했다.

 (...) 한국은 그의 여행일정에서 2번째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그는 한국에 약 3주 머물렀지만, 한국에서의 여행 경험에 대해서는 단 몇 문장 밖에 남기질 않았다.

<중국. 여행스케치(Čina. Cestopisné črty)> 라는 브라즈의 여행기 중

‘북경에서 한국을 거쳐 시베리아로’라는 제목의 장에서 한국에 대한 문장은 단 7줄에 불과하다.

이 책은 1940년 <북경의 백귀>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판되었다.

 

그 7줄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제물포에서 나는 정박되어 있는 오스트리아 전함을 보고 매우 반가웠으며,

대부분 동포인 용감한 장교들과 매우 친근한 만남을 가졌다.

대부분은 얼마 전 북경에서 같이 걸었던 사람들이었다.

한국의 수도인 서울에서 나는 한국이라는 나라와 그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자금 사정 때문에 한국 일정이 단축되어 잠시 밖에 머물 수 없었다.

이미 5월 19일 나는 부산을 통해 한국을 떠났다.

한국은 동아시아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라고 불릴 만큼

풍요로운 자연과 온화한 기후를 갖추고 있었다.(Vráz 1904:393)”

 

 

브라즈가 찍은 서울 사진들이 책에 실리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관련된 본문과 떨어져서 책의 다른 부분에 실려 있다. (397-402 페이지에는)

브라즈와 한국인 안내인의 초상을 비롯한 한국 사진 4점이 실렸다. (Vráz 1904:400)

 

‘그는 한국에 대해 분명 좋은 인상을 받았지만(...)

3주간의 집중 연구의 결과라고 보기에는 다소 빈약한 보고서였다.’

 

그러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사이에 세계 여행을 다룬 체코어 서적이 상당히 증가했다.

체코 여행가들은 더 일찍이 먼 나라로 여행을 했지만, 여행기를 출판하지 않았다.

유럽, 지중해, 북미 외 지역에 대해 체코 여행가가 최초로 출판한 여행기는

에밀 홀루브의 <남아프리카에서의 7년(1880-1881)>이었다.

홀루브는 오늘날 남아공, 보즈와나, 짐바브웨, 잠비아에 해당하는 지역을 여행한 경험을 소개했다.

아시아를 소재로 한 체코 최초의 여행기는 <수마트라에서의 5년> 이라는 제목의 1883책인데,

파벨 두르딕(Pavel Durdík 1843-1903)이라고 체코 출신의 네덜런드 군의관이 썼다.

 

외국에 대한 관심이 체코 사회 내에 존재했었고 민족 해방의 강화로 관심이 증가했다.

(Rozhoň 2005:118)  

요세프 르젠스키와 엔리케 스탄코 브라즈는 물론

에밀 홀루브와 알베르토 보이텍 프리츠(Alberto Vojtěch Frič)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 기간에 가장 중요하고 인기 있는 체코 여행가로 꼽힌다.

그들은 서로 경쟁자이면서 동료 사이였다.

브라즈는 전 세계를 여행한 반면, 가장 나이가 많은 에밀 홀루브는 남아프리카만을 여행했고,

그는 두 권의 두꺼운 여행기와 아프리카 역사 및 민족학에 대한 논문도 여럿 썼다.

 

반면 가장 나이가 어린 알베르토 보이텍 프리츠(1882-1944)는

중남미 전문가로서 여러 권의 기행문과 민족지학에 대한 논문을 썼고, 선인장에 대한 최고 전문가였다.

교사 여행가인 코르젠스키, 볼타 나프르스텍(Volta Náprstek 1826-1894, 프라하에 나프레스텍 아시아,

아프리카, 미주 문화박물관이라는 체코 최초의 비유럽박물관 설립자)과 함께

이 세 명은 체코인들이 세계에 눈을 뜨게 한 선도적 인물들이다.

 

다른 여행가들의 책이 성공을 거두자, 강연회와 여행가들의 소장품 전시에도 상당한 관심이 쏠렸다.

외국에 대한 체코의 관심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었다.

한국에 대한 일반적 정보를 체코인들에게 소개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은 특히 브라즈의 강연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체코의 여러 도시와 마을로 순회강연을 다니면

큰돈은 아니지만 추가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대중 강연을 처음 시작한 것은 에밀 홀루브였다(Rozhoň 2005:97).

그는 2년 동안 무려 120회의 강연을 했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쳐 가장 많은 강연을 한 것은 브라즈였을 것이다.

브라즈는 죽기 얼마 전까지 끊임없이 강연을 열었다.

브라즈는 즉흥적 말재주가 워낙 뛰어났기 때문에 강연도 노트 없이 진행했고,

그 결과 안타까운 것은 자신의 여행기 외에는 그의 모험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초기 체코 여행가와 달리 브라즈는 무선의 시대에 살았다.

1929년 그의 강연 중 일부가 생방송으로 라디오에 중계되었다.

그러나 녹음된 것이 없이 때문에 강연 내용은 알 수 없다.

당시 체코슬라바키아의 선도적 라디오방송국이었던 프라하의 라디오저널이 보낸 편지에는

브라즈의 25분 강연 중 “한국의 전설과 옛날 이야기”라는 제목의 강연이 언급되었다.

이 강연은 1929년 12월 20일 저녁에 방송되었다.

즈덴카 크로슬로바는 브라즈가 28년 전 서울에서 만난 알렌박사가 편집해서 1889년 출판한

한국 옛날 이야기 책을 참고로 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브라즈의 여행기에는 한국에 대해 워낙 짧게 언급해서 새로운 정보를 얻을 것이 없지만,

브라즈의 서울 여행에 대한 정보를 즈덴카 크로슬로바가 최근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견했다.

바로 브라즈가 1910년에서 1921사이 살았던 미국 시카고의 체코어 일간신문인 스보르노스트에

한국 여행에 대해 브라즈가 기고한 기사들이 있었던 것이다.

브라즈는 <한국과 한국인>이라는 제목으로 1919년 4월 5회에 걸쳐 글을 발표했다.(Klöslová 2007:44)

체코어로 쓰여지기는 했지만, 새로 독립한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내용이 거의 알려지지 못했을 것이다.

냐하면 브라즈의 장인인 오거스트 게린저(August Geringer)가 출판하고 있었던 스보르노스트는

미국내 가장 중요한 체코어 일간지였지만,

체코 본국보다는 미국 내 체코어 사용자들을 주 독자층으로 겨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체코 도서관 어디에서도 1919년 4월자 스보르노스트를 단 한 부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스보르노스트가 유럽까지 건너왔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스보르노스트에 실린 기고문의 길이는 상당하지만

브라즈의 한국 방문 후 워낙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이나 즉흥성은 부족하다.

또한, 자신의 여행 경험은 극히 일부분만 차지할 뿐 다른 출판물의 내용을 상당부분 도입했다.

크로슬로바는 “이 기사만으로도 브라즈가 한국에서 무엇을 하였고, 어디를 갔으며 누구를 만났는지

더 잘 알 수 있지만” 한국 여행에 대한 다른 책과 비교될 수는 없다고 했다.

불교가 그의 주요 관심 분야여서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Klöslová 2007:44)

 

브라즈는 “나는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곳에 가서 이 오래된 종교의 흥미롭고 예술적으로 용감한

잔재들을 만나고, 공부하고 사진 찍었다. 나는 항상 따듯한 환대를 받았고, 스님들의 거처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물론 스님들도 내가 떠날 때 사례를 남길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고 썼다.

(Klöslová 2007:44에서 인용).

 

브라즈의 사진 중에는 그가 방문했던 사찰의 사진이 있는데,

사찰의 이름도 알려져 있지 않고 확인할 방법도 없다. 브라즈는 불교뿐만 아니라

“무속신앙에도 똑같이 관심이 있어서, 남녀 무당의 힘을 확인해 보고자 했다.(Klöslová 2007:45)”

 

브라즈에 의하면

“나는 남녀무당을 각각 고용해서 한국에서 시베리아로의 내 여행길이 무사하도록 부탁했다.

또 무당이 내가 앓고 있지도 않았던 병을 치료해 주었다. 그 비용이 10 일본달러 들었지만,

(...) 시베리아에 무사히 도착했기 때문에 후회되지 않았다.” (Klöslová 2007:45에서 인용)

 

돈이 부족했던 브라즈는 스스로 먹을거리를 해결해야 했다.

‘꿩을 사서 먹은 적도 있고, 소풍을 갔다 온 후

자기가 요리한 개구리 다리를 하인에게 주자 역겨워하며 뱉었다.’(ibid.)

‘관습상 여자들만 걸어 다닐 수 있는 시간에 길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점잖게 꾸지람을 들었다’고

인정하기도 했다.(ibid.)

 

이 기사에서 브라즈는 자신이 만난 다양한 사람들에 대한 기본적 정보를 소개하고 있다.

“한국의 최고 관료들도 만났는데, 그 중 한 명은 황제의 인척으로 파리에서 2-3년 정도 생활했기 때문에

약간의 영어와 불어를 구사했다고 한다. 브라즈가 단지 K대군이라고만 지칭한 이 관료는

방을 둘러친 창호지문 구멍으로 여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의 맏아들을 불러 소개했다.”

(Klöslová 2007:45-46)

 

브라즈는 황제의 윤허를 친히 얻어 옛 궁궐들을 둘러보았으며, 김판서로 알려진 사람의 주선으로

한 양반집에서 사진 촬영도 할 수 있었다고 한다.(Klöslová 2007:46).

그는 공공장소에서 사진촬영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일반 가정도 촬영할 수 있었는데,

촬영허락을 얻으려면 끈질긴 협상 혹은 ‘넉넉한 금전적 댓가’가 필요했지만,

덕분에 젊은 부부 혹은 전통 결혼식 장면을 찍을 수 있었다.(Klöslová 2007:47)

 

앞서 언급한 대로 브라즈는 많은 한국 전문가들도 만났는데,

그 중에는 이미 서울 주미총영사를 역임하고 있었던 호라스 N. 알렌박사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비숍의 책 중 한국의 결혼 및 장례 관습, 여성의 사회적 지위, 무당, 기생 및 무속 신앙과 관련된

내용을 많이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브라즈의 기사가 1919년 3.1운동 몇 주 후 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 실렸는데도

‘자신을 보호하고, 독립을 쟁취하려는 사람들의 피로 거리가 물들었다.(Klöslová 2007:47에서 인용)’고

쓴 것으로 보아 그가 한국 상황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나는 한국인들과 깊이 공감한다. 일본인들이 자유의 외침을 뿌리 뽑기 위해 칼과 피를 동원하고

있는 와중에 어떤 새로운 소식이 전해질까 걱정스럽다.”면서 공개적으로 한국의 편을 들었다.(ibid.).

 

그러나 “한민족은 일본의 라이벌 역할은커녕 일본과 싸울 준비조차 되어 있지 않다.”는 구절에서는

브라즈의 비관적 시각이 들어나면서도 “한국의 시위가 아무런 결과 없이 머물지는 않을 것이며,

일본은 어느 정도의 자치를 허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독립적으로 민족적인 추가 발전의 여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며 독자들에게 낙관적인 입장을 남겼다.(ibid)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한 이런 긍정적 태도는

한국의 사정에 대해 알고 있는 체코인이 많지 않았던 1919년 당시에는 흔한 일이 아니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인과 체코인은 정반대의 운명을 맞게 되었다.

한국은 민족의 독립을 빼앗긴 반면,

체코의 경우 거의 3세기에 걸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점차 힘을 얻고 있었다. 범슬라브주의에 따라 모든 슬라브계 민족과 나라를

러시아 통치하에 통일하려는 움직임이 19세기 중반부터 체코인들 사이에 상당히 인기를 얻고 있었고,

세계 패권을 차지하려는 러시아의 계획에 동조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차원에서 보헤미아 지역에서도 러일전쟁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러일전쟁 도중과 직후뿐만 아니라 수 년 뒤까지 러일전쟁을 다룬 책들이 많이 출판되었다.

러일전쟁에 대한 체코어 원작들도 있다는 것이 놀랍다.

 

Vladislav Záhorský가 쓴 <Poměry rusko-japonské(러일관계, 1904)>과

 체코의 사회민주당 정치지도자이며, 의원이기도 하고 작가이기도 한

František Soukup(1871-1940)와 František Modráček (1871-1960)이 함께 쓴

<Válka rusko-japonská(러일전쟁, ca. 1904)>도 있다.

Soukup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법무부 장관이 되었다.

그 외에 체코의 선도적 출판사인 J.Otto에서 극동전쟁에 대한 대형지도(63×53cm)를 제작했는데,

당시까지 한국이 가장 세부적으로 나온 지도였다.

 

그 중에서 한국과 관련하여 자세히 살펴 볼만한 책이 2권 있다.

하나는 한국을 비교적 자세히 다루고 있기 때문이고,

다른 한 권은 적어도 3세대에 걸친 체코 청소년 독자들에게 인기리에 읽힌 결과

한국의 존재를 체코인들에게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첫번째 책은 <글과 그림으로 본 러일전쟁>인데 3권으로 구성된 거의 8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작품은

다양한 출처의 정보를 철저하게 취합하고 많은 그림과 자세한 설명을 곁들이고 있다.

저자인 얀 클레칸다(Jan Klecanda 1855-1920)는 교사이면서도

대중역사서와 성인 및 청소년을 위한 장편 및 단편 소설을 쓴 다작 작가였다.

3권 모두 한국 및 한국 문제에 대한 많은 정보와 한국에 대한 사진과

그림(서울과 평양의 건물, 한국 시골 풍경 등)을 담고 있다.

한반도의 역사와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어 당시 보헤미아에서는 가장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문헌이었다. 클레칸다는 러시아의 운명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러일전쟁 이후 한국의 운명에 대한 작가의 의견은 많지 않지만, 러일전쟁이 끝나기 전에도

이미 전쟁으로 인해 한국이 가혹한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예견하고 있었다.

“한국의 독립은 이미 오래전부터 인접 강대국들의 눈의 가시였고,

어느 쪽에 행운이 따르건 그 결과와는 무관하게 이 지역의 평화를 위해 한국의 독립이 희생될 것이다.”

고 적고 있다.

 

체코 청소년들에게 한국을 널리 알리는데 일익을 한 책은

카렐 흐로우차(Karel Hloucha, 1880-1957)쓴 <동양의 불(1906, 제2판 1930)>이다.

러일전쟁을 다룬 이 책 전체에 한국이 다루어지고 있지만

특히 ‘곰의 귀와 우두머리의 귀(Hloucha: 1906:51-67)’라는 장에서는 서울과 제물포를 배경으로

흥미진진한 곰 사냥과 그 과정에서 죽음을 맞게 되는 사냥꾼 형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Klöslová 2009:340).

 

이 책의 의미는 20세기 전반 상당히 영향력 있었던 체코 작가인 흐로우차가

자신의 책에서 한국을 다루었다는 것이다.

 

흐로우차는 1905년 첫 작품을 낸 뒤

청소년 모험, 판타지, 공상과학 소설 분야의 가장 인기 있는 체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소설은 먼 이국을 배경으로 한 경우가 많았고,

<동양의 불>은 비록 그의 초기 작품이기는 하지만 세계적 인기 작가 줄 베른의 영향을 받아

이국적 배경과 흥미진진한 모험을 결합하는 성공적 스타일을 이미 따르고 있다.

흐로우차의 작품을 심도 있게 연구한 유일한 비평가인 온드레제이 네프(Ondřej Neff)는

“흐로우차의 작품들은 프랑스 롤모델인 줄 베른의 소설들을 너무나 비슷하게 따라한 나머지

줄 베른이 흐로우차의 작품을 가지고 몇 가지 사소한 점만 고친 뒤 자신의 작품이라고 우겨도 될 정도다.

그만큼 1880년대와 1890년대 줄 베른의 작품과 유사한 점이 많다.”(Neff, 1981:106)고 했다.

 

흐로우차는 흥미진진한 모험담을 꾸며내는 재주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극동지역에 대한 정보도 많이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풍부한 디테일이 잘 살아 있다.

흐로우차의 남동생 조에 흐로우차(Joe Hloucha 1881-1957)는 체코에서 가장 인정받는

아시아 미술 전문가 중 한 명이었으며, 일본에 대한 책과 일본을 배경으로 한 장편 및 단편 소설을 썼고,

(한국은 아니지만) 극동지역을 여러 차례 여행하기도 했다.

 

흐로우차는 한국을 주제로 삼은 ‘최초의 체코 작가일 뿐만 아니라

체코 문학에 한국인 인물을 처음 창조한 작가’이기도 하다.(Klöslová 2009:340)

뿐만 아니라 그의 소설은 코르젠스키의 대중 지리서와 함께

체코 대중에게 한국을 소개한 가장 큰 역할을 했다.

 

러일전쟁과 그 여파로 체코인들은 한국에 대해 알게 되었고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자연히 러일전쟁 이후 10년 동안 을사보호조약, 헤이그 회의,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 한일합방 등

주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정보가 비교적 자주 발표되었다.

이는 “체코 일부 계급사이에 한국에 대한 인지도가 점차 증가한 결과이며,

지배에 반대하는 한민족의 항쟁에 동조, 연대하는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Pucek 1988:19)

 

체코에서 한국의 운명에 관심을 가진 것이

피지배민족으로서의 운명의 유사성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은 기사들이

단순히 외신 보도를 통해 정보만 전달한 것이 아니라

짧게나마 항상 의견과 해설이 덧붙여졌다는 것으로부터 짐작할 수 있다.

 

“기사에 포함된 해설을 보면 체코 대중의 적어도 일부는

한국의 애국자들과 그들의 독립항쟁에 동조하고 있었음이 분명히 나타난다.”(Pucek 1995:VIII).

 

한국의 독립항쟁에 대한 체코 대중의 지지는

일반적으로 약자의 편을 드는 체코 사회의 전체적 분위기에 기반한 것이었다.

‘같은 슬라브 민족인 세르비아인들이 19세기 동안 독립을 위해 싸우는 과정에

체코인들이 큰 영향을 받은 것’도 유사한 예이다.(Kosatík 2000:42).

 

따라서 강자를 비난하는 것이 체코의 논리적인 접근법이었으며,

체코의 주요 일간지 나로드니 폴리티카의 1907년 7월 7일자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사설을 보면

‘이토는 공포와 군사독재, 점령과 억압으로 지배했다. (...)

그는 고문, 채찍질, 주먹질과 발길질로 한국을 지배했다.’고 쓰고 있다. (Pucek 1988:19에서 인용)

 

시베리아에서 체코슬로바키아군단의 입지가 워낙 확고했기 때문에

한국 독립운동군은 군단지도자들을 접촉했고,

그 후 블라디보스톡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체코슬로바키아군단의 친한감정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복속되었던 체코의 과거와 관련되어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군단과 한국 독립운동 세력간의 접촉 결과

시베리아에서 근무한 체코 군인 출신 작가들이 한국에 대해 쓰거나 번역한 책들이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상당 수 출판되었다.

이 그룹에서 한국을 가장 적극적으로 알린 사람은 Jaroslav Spirhanzl-Ďuriš(1889-1960)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여러 논문을 썼고,

Nikolay Garin Mikhailovskiy의 러시아로 된 한국전래동화집에서 이야기를 선별하여

체코어로 번역한 뒤 2권으로 엮어 출판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부터>와 <누렁개를 비롯한 한국이야기>라는 제목의 이 책들은

모두 1932년에 출판되었다.

전자의 서문에 Spirhanzl-Ďuriš가 한국인에 대한 체코슬로바키아군단의 견해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우리는 한국인의 근면함과 가난을 모두 알게 되었고,

운명을 묵묵히 받아들이면서 겸손한 민족임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삶을 희생할 만큼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들임을 배웠다.”(Spirhanzl-Ďuriš 1932a:....).

 

문학적 관점에 가장 중요한 군단출신 작가는 Josef Kopta(1894-1962)로서

소설 <황금화산(1937)>은 한국인 조합이 금을 캐는 블라디보스톡 근처 작은 섬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한국 관련 작품으로 가장 특이한 것은 Bohuslav Raýman(1886-?)이 1925년에 출판한

<젊은 사랑의 꿈. 한국의 목가>라는 것인데, 태국을 배경으로 하는 또 다른 극본과 함께 출판되었으며, 2008년에 본 저자가 이 희귀본을 발견했다.

 

1차세계대전 이후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시베리아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물러난 이후 한국을 방문한 것으로 확인되는

최초의 체코 여행자는 이르지 빅토르 다네시(Jiří Viktor Daneš 1880-1928)로 추정된다.

 

그는 프라하의 찰스대학 학생 시절부터 여행을 시작했는데,

첫 여행지는 보스니아와 헤르체코비아를 중심으로 한 발칸지역이었고,

이후에도 발칸지역을 평생 가장 좋아하는 여행지로 꼽았다.

베를린에서 1년간 공부한 뒤 다네슈는 1904년 개최된 제 8회 국제지리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하면서 미국의 지리와 지질을 공부하기 위해 몇 달 간 머물렀고,

특히 미국의 국립공원을 여러 곳 직접 둘러보았다.

2년 뒤 다시 미주지역을 찾은 다네슈는 카리브해 지역과 지리총회가 개최되었던 멕시코도 여행했다.

 

1909년 다네시는 처음으로 아시아를 여행했다.

친구이자 식물학자인 카렐 도민 (Karel Domin 1882-1953)과 함께 다네시는 대륙을 횡단하여

도민이 보고르의 식물원에서 잠시 근무하는 동안 함께 자바에 머물렀다.

그 뒤 호주로 가서는 호주인 LC 볼(Ball)과 함께 퀸즈랜드 북부의 지질도 개발작업에 동참했고,

이 작업 덕분에 다네시는 왕립 퀸즈랜드 학술원 회원이 되었고,

그의 이름을 딴 강이 생기는 영광도 누릴 수 있었다.

 

프라하로 돌아온 뒤 다네시는 챨스대학 정교수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1300 페이지 이상에 달하는 2권짜리 여행기를 출판했다.

<두 천국을 거쳐(1912)>라는 제목의 이 여행기는 다네시와 도민 공저였는데,

다네시는 이미 석회석 지형을 전문으로 하는 세계적 지질학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강의 외에는 주로 연구에 매진했으며,

‘그는 상당한 재산 덕분에 아무 문제없이 연구와 여행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Rozhoň 2005:68).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이후 다네시는

외교관으로 활동해 달라는 신생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의 제안을 기꺼이 수락했다.

당시 경험 있는 외교 및 영사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던 신생 정부는 국제적 지명도가 있는 인물들에게

나라를 대표시키는 접근법을 썼던 것이다. 다네시는 호주통이었고, 호주에서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에,

시드니의 체코슬로바키아 영사관 수립을 주도할 가장 이상적 인물이었다.

다네시 외에도 여러 아시아 관련 전문가들이 외교직을 수락했다.

 

체코 최고의 인도학자 Otakar Pertold(1884-1965)교수는 1920년에 봄베이 초대공사를 지냈고,

중국초대특사를 제안받은 Jan Klecanda(1883-1964) 는 필명인 Jan Havlasa로 더 잘 알려져 있다는

필명을 선택한 것은 동명이인 다른 작가와 혼동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본문 참고).

 

그러나 중국과 관례 수립을 둘러싼 협상이 지연되자 북경 특사 대신 브라질 초대특사로 임명되었다.

이에 따라 다네시는 1920년 8월에 영사 및 외교 업무를 시작했다.

외교관으로서의 생활이 일시적이라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지만,

거의 2년 반 동안 호주에서 조국을 대표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호주뿐만 아니라 뉴질랜드와 기타 태평양 지역도 그의 관할이었다.

덕분에 다네시는 그 지역을 두루 여행할 수 있었고,

시간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학문적 연구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공무에 매어있지 않은 모든 자유시간은 학문적 연구에 사용했다.’(Rozhoň 2005:219)

 

1923년 1월 다네시는 프라하로 귀임하게 되었다.

공무에서 해방된 다네시는 부인과 함께 시드니를 떠나 6개월 동안

뉴질랜드, 피지, 통가, 하와이, 일본과 한국을 여행했다.

한국에서는 다시 기차로 만주와 중국을 거쳐 체코슬로바키아로 돌아간 뒤 찰스대학 교수로 복귀했다.

 

체코슬로바키아로 돌아온 뒤 2년 만에 호주에서의 여행과 귀국길의 여행을 정리한

<태평양에서의 3년 (1926)>이라는 제목의 2번째 여행기를 출판했다.

‘한국에서’라는 장은 한국만을 다루고 있는데,

“일본 식민통치하의 한국을 처음으로 다룬 체코 작품으로 일본 식민지배 관련된 문제들을

체코인들에게 소개했다. 그는 한국에 가기 전 읽었던 한국 관련 서적에 동조하지 않았다.”

(Klöslová 2000:139).

 

“우리는 한국을 여행하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인들은 명예를 전혀 모르고, 기형적이며, 약하고, 나쁜 습관에 물들어 있고,

불온한 의도를 품고 있어서 일본 정부의 지배를 받아 마땅하며,

일본의 엄격한 지배가 오히려 한국인들에게 이롭다는 글을 읽으며 실망했었는데”(Daneš1926:559) 라며

오히려 직접 경험한 한국인들에 대한 첫인상은 긍정적이었다며 한국에 동정적인 입장을 남겼다.

(Daneš 1926:548)

 

그들이 만난 한국인들은 ‘깨끗한 긴 하얀 옷을 입은 건장한 남성들로서

자신들의 외모에 상당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으며(ibid.)’

‘잘못과 단점이 있었지만 좋은 점과 장점도 많이 지니기도 한’ 정직한 민족이라고 생각했다.(ibid.)

 

다네시와 그의 아내는

“한국인들의 나쁜 개인적 혹은 정치적 습관을 비난하는 글들이 한국인을 지배하는 외세의 이해를 돕고,

그들의 우세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본능적 의심이 들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실제적 관점에서 여러 가지 장점이 있을 수도 있지만, 도덕적 관점에서는 맞지 않는 일이다.

더 좋은 삶을 제공하기 위해 한국인을 재교육한다는 것은 자신들의 자기중심적 이해를 도모하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Daneš 1926:559)

 

당연하지만 한국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체코인이나 다른 슬라브족이 당한 것과 유사함을 지적했다.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이런 주장은 우리에겐 낯익다.

 

지역은 다르지만 얼마 전까지 외세의 굴레를 썼던 다네시는 한반도에 대한 주요 강대국의 태도,

특히 일본의 강압적 한국 지배를 용인한 것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우리의 눈앞에서 한 민족이 독립을 상실했다.

질서와 진보의 미명하에, 또 이른바 문명국이라는 국가들의 묵인 하에 한국은 식민통치에 넘겨졌다.

 (...) 한민족 예속에 대한 유럽 강대국의 태도는

슬라브 민족을 대상으로 저질러진 참혹한 만행에 대한 태도와 동일하다. (…)

누구도 일본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고, 1000년 역사를 지닌 한 나라를 노예화하기 위해

일본이 가장 잔인한 수단을 동원할 때도 반대하지 않았다.

러일전쟁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편을 들었던 러시아조차 억압받는 자들을 도와주지 못했다.

강대국들의 공공정책은 항상 천박했다.

그들은 정의나 인류보다는 경제적, 사업적 이해를 우선시한다.”고 썼다.(Daneš 1926:562)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오랫동안 혼란과 폭력으로 힘들어 했던 이 나라에 일본이 질서를 세웠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일본 총독부는 지나치게 규모가 크고,

한국인들이 차지할 자리들은 일본인들이 너무 많이 빼앗고 있는지 모르지만,

공공사업의 경우 상당한 진척이 있었다.’고 썼다.

 

그의 여정은 이미 발표된 여행안내서나 자세한 설명이 들어 있는 여행기

(1917년 버튼 홈즈의 여행기를 참고 했을 수도 있다)를 바탕으로 사전에 충분히 계획된 것이었다.

 

다네시는 한국 철도청 본사 옆에 (지은) 안락한 시설을 많이 갖추고,

잘 정비된 호텔에(Daneš 1926:552) 묵었다는 것을 언급했다.

“시베리아 국경에 이르는 광대한 일본의 지배영역을 일본 본토와 연결하는 길을 따라

고급 호텔들이 이어져 있는데, 이 보석 같은 호텔 중 하나인”(Clark 2003:191) 조선호텔을 선택하는 등

다네시는 항상 최고의 가장 비싼 숙소를 선택했다.

“철골과 석재로 지어진 신축 4층건물은 흙벽을 한 한국 전통가옥을 제압하며 일본의 지배 상징이었다.”

(ibid.) 이런 고급 라이프스타일 때문에 다네시는 기본적으로 일본정권의 좋은 면을 경험하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다네시는 일본어와 한국어 모두 할 줄 몰랐고,

극동지역을 여행한 경험이 별로 없어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그로 인해 현지인들과 직접 접촉하여 그들의 생활을 더 깊이 있게 파악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었다.

따라서 한반도에 대한 다네시의 의견은 보헤미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통치하에 있을 때

체코인으로 겪은 개인적 경험에 기인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상당히 친한파였고, 일본 덕분에 ‘기술적, 경제적 개선이 있었음(비록 식민지배세력의 이해를 위한

것이었지만)’을 인정하지만, 한국을 예속시키려는 일본의 전략에 반대했다.

 

 

최초의 체코 여성이 한국을 방문하게 된다.

바르보라 마르케타 엘리아쇼바(Barbora Markéta Eliášová 1885-1957)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했고, 동경주재 체코슬로바키아 외교공관에서 근무한 유명한 일본통이었다.

사생아로 태어나 어머니를 4살 때 잃은 그녀는 다네시처럼 유복하지 않았다.

엘리아쇼바는 고향 마을 지리코비체 사람들의 도움으로 자라났지만,

집중적인 언어 공부와 노력으로 여학교의 독일어 및 영어교사가 되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세계를 탐험하는 것이 꿈이었던 그는 26세에 교사일을 1년간 휴직하고

보헤미아를 떠나 기차로 러시아를 횡단하고, 블라디보스톡을 통해 일본에 도착했고, 그 뒤 일본을 연구하는데 평생을 바치게 된다.

일본에서 그녀는 동경대 영어교수의 가정교사로 일을 한 뒤 나중에는 일본인 전용 호텔에 살면서 일본어를 익히고 일본 관습을 직접 배우게 된다.

미국을 거쳐 유럽으로 돌아온 그녀는 첫 번째 여행기 <일본에서의 1년과 세계 일주(1915)>를 썼다.

 

1차세계대전 직후, 엘리아쇼바는 일본에 대한 지식 덕분에

동경주재 체코슬로바키아 영사관의 사무관으로 임명되어 다시 일본에 갔지만,

초대 공사 카렐 페르글러 밑에서 버티지 못하고

<카렐 페르글러 밑에서. 일본 주재 체코슬로바키아 공사관에서의 1년(1921)>이란 제목의 책은

일본에 대한 설명은 별로 없지만, 체코 외교활동에 대한 신선한 견해를 제공한다.

또, 체코출신 미국 변호사이며, 동경주재 초대특사(1920-21)를 지내고

이후 우익 정치 지도자로 논란을 일으킨 카렐(찰스) 페르글러를 다루고 있다.

페르글러는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국적을 박탈당하고 미국으로 이주한 뒤 존경받는 교수가 된다.

헌법학 전문가로 25년 뒤 주한 미군정의 특별고문으로

1946년에서 1948년 사이 한국 헌법 초안 작업에 참여하면서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1년 반만에 사직한 뒤 프라하로 돌아와 일본에 대한 기행문

<Zvlasti samurajů(사무라이의 땅으로부터, 1922)>을 쓰고, 일본 소설을 체코어로 번역했다.

엘리아쇼바는 1923년 다시 일본에 왔지만 대지진 때문에 예정보다 일찍 귀국하게 된다.

대지진 때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당시에 묵었던 집은 전파되었다.

일본에 머문 기간은 짧았지만, 그 뒤 일본에 대한 책을 2권 더 냈다.

<Vvdobách dobrých i zlých(일본에서의 좋은 시절과 어려운 시절, 1925)>,

<Dcery Nipponu(일본의 딸들, 1925)>.

 

1920년대 중반 엘리아쇼바는 이미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유명한 작가이자 여행가로 인정받고 있었다.

체코의 최초이자 ‘유일한 여성 세계여행가로서 단신으로 여행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여행을 직접 계획’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녀가 남아프리카를 잠시 거쳐 동남아와 호주를 여행하는 가장 긴 일정을 위해 출발했을 때

그녀가 이미 유명한 작가였다는 사실은 마지막으로 출판된 여행기인

<남반구에서의 1년(1928)>의 초판 인쇄부수가 상당히 컸다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책은 지금도 중고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그녀의 마지막 여행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1929년 그녀는 다시 한 번 일본을 방문하면서 한국도 찾게 된다.

한국 방문 일정과 경험에 대해서는 특별히 남긴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그 때까지 한국을 찾은 여러 체코인 중 극동지역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전문가였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 그녀의 의견은 상당히 귀중했을 것이다.

 

체코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극동지역을 알릴 목적으로 몇 권의 책을 쓰기는 했다.

이 책을 통해 그녀가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긍정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가 쓴 30페이지 길이의 단편소설인 <한국인 청년 남석(Eliášová 1934:65-95)>은

젊은 한국인 독립운동가의 이야기였다. 이 소설의 플롯 덕분에 엘리아쇼바는 한일관계에 대해,

특히 한국이 점차 식민화되어 가던 1905년에서 1910년 사이를 중심으로 간단한 설명을 할 수 있었다.

 

이야기의 줄거리를 보면 엘리아쇼바가 완전히 한국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인공 남석은 아버지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뒤 서울로 상경하여

독립운동 지도자인 삼촌의 손에 자라게 되는데, 일제에 충성하도록 남석과 친구들이 일본에 보내지지만

오히려 남석은 독립을 위해 싸우겠다는 각오를 다진 뒤 한국에 돌아온다.

“일본에 그토록 관심이 많았던 엘리아쇼바가 한민족에게 일본이 자행하고 있었던 불의를 알고 있었고,

민영환이 임금에게 남긴 편지를 중요 요소로 삼아 항일운동을 이야기의 소재로 선택했다는 사실이

놀랍다.”(Klöslová 2000b:143-4)

 

엘리아쇼바의 청소년 소설 <순애와 기태-한국 아이들(1941)>은

독립을 원하는 애국자들과 친일파 한국인들간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1910년대 한국 시골의 두 남매를 주인공으로 플롯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마을 사람들이 호주 선교사를 따라 기독교로 개종을 하고,

전통적 사고방식과 현대적 사고방식간의 불가피한 갈등을 겪는 과정도 그려진다.

9살 순애는 장래 시댁에 민며느리로 보내지는데,

시댁에서는 순애가 순종하는 며느리가 될 수 있도록 학교에 가지 못하게 하자 순애는 좌절한다.

다행히 순애의 아버지 배씨는 정혼을 깨고

순애와 기태를 데리고 서울에 가서 좀 더 나은 삶을 추구하게 된다.

아버지 배씨는 이 책의 긍정적인 주인공으로 독립투사이며,

어렸을 때 ‘형제들과 함께 조국을 위해 싸우러 나가지만 영웅적 전투에서 형제를 모두 잃고

홀로 고향에 돌아와 아버지와 상봉’했다.(Eliášová 1941:71)

그의 아버지는 곧 ‘아들을 잃은 슬픔이 아니라 자유를 잃은 슬픔에 잠겨 세상을 떠난다.’

(Eliášová 1941:146)

아이들을 데리고 상경한 아버지 배씨는 성공한 서울 친척들의 도움으로 자식들이 잘 살 수 있게 할

생각이었지만, 서울 친척의 맏딸이 일본인 장교와 결혼을 하고 얼마전 일본으로 건너갔고,

그 여동생도 일본인과 약혼했을 뿐만 아니라, 사돈 때문에 일본 종교로 개종까지(Eliášová 1941:143)

하는 등 서울 친척들의 ‘새로운 삶의 방식을 용납’하지 못한다.(Eliášová 1941:75)

그런 이유로 이야기에 끝에 가서 선애와 기태 모두 일본 학교에 가길 거부하고

나중에 한국 동포들을 가르치기 위해 선교기관에 들어가게 된다.

 

매우 단순한 이야기이지만 이를 통해 엘리아쇼바는

한국의 역사, 관습, 일과 여가, 삶과 생각, 교육 및 종교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룰 수 있었다.

히 유교적 원칙에 충실한 한국 가족의 관계를 통해

한국 상황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재차 반복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의 경우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한 언급이 이전 작품만큼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그 이유는 이 책이 나치 당국의 검열이 한창이었던 2차 세계대전 와중에 출판되었다는 정황으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나치당국은 자유 투쟁이나 점령과 같은 주제에 대해서는 간접적인 언급만을 허용했고,

동맹국인 일본을 내놓고 비난했다가는 작가와 출판사 모두 심각한 문제를 겪을 수도 있었다.

 

 

1930년대 중반 보후밀 포스피쉴(Karel Hloucha, 1880-1957) 

영리더라는 잡지에 청소년을 위한 이야기를 기고하고,

<전 세계를 통해>라는 월간지에도 여행기를 기고하는 등 선도적 체코잡지에 많은 원고를 제공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 머무는 동안에는 나라에서 가장 활발한 작가가 되었다.

그의 삶이나 여행에 대해서는 발표된 글이 별로 없기 때문에,

그의 일생을 연대기별로 정리해 보아도 의문점이 여전히 남는다.  

 

포스피쉴은 1919년 1차 세계 대전 직후 체코슬로바키아를 떠났지만, 몇 년 후 ‘모든 대륙과 섬을 건너겠다는 결심을 하고 여행을 시작’할(이브닝포스트 1929 12월 3일자:13) 때까지의 그의 행방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가 아시아를 여행했다는 사실은 싱가포르, 호주, 뉴질랜드의 현지 신문 기사로 확인할 수 있는데, 이것은 최근에 신문기사가 인터넷으로 검색가능해지면서 한층 수월해졌다.

 

포스피쉴은 언론을 만나 자신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당시의 신문기사들을 종합해 보면

그가 ‘1926년 8월 10일 무일푼으로 옷 한 벌만 들고 프라하를 떠났고’

(이브닝 포스트 1929년 12월 3일:13),

 

‘터키, 시리아, 파키스탄, 메소포타미아, 아라비아, 페르시아, 발루치스탄, 아프가니스탄, 인도, 버마,

인도차이나, 홍콩, 중국, 몽골리아, 만주, 한국, 일본, 필리핀, 영국령 및 네덜란드령 보르네오,

셀레베스, 발리, 자바, 수마트라와 말레이 반도’를 거쳐 싱가포르까지 오게 되었다는 것이

그의 여행을 입증하는 가장 오래된 동시대 증거인 1929년 1월 싱가포르의 스트레이트 타임즈 기사로

확인된다.(스트레이트 타임즈 1929년 1월 15일:10)

 

더 나중 날짜의 호주일간지 기사에 의하면 포스피쉴은 시암, 캄보디아, 마카오, 포르모사, 세레베스,

필리핀의 거의 모든 큰 도서와 말라야의 모든 주를 방문했다.(익제미너 1930년 5월 24일 :6)

 

이 기사에 의하면 다른 곳에서는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는 ‘비서 조세프 후블’(ibid.)과 함께

싱가폴에 도착했다는 것으로 봐서 그가 전 여정을 혼자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싱가포르를 출발해서1929년 11월초 호주에 도착한 뒤(1929년 11월 9일 시드니 모닝 헤럴드:17)

 

몇 달 간 집중적으로 여행을 하고, 1930년 여름에 뉴질랜드로 이동한다.

웰링턴에서 기자에게 밝혔듯, 그는 이미 귀국길에 올라 있었고,

뉴질랜드의 나라와 사람들을 연구하고 강연을 하기 위해 몇 주만 머물 계획이라고 했다.

(이브닝포스트 1930년 8월 6일:11)

 

그러나 운명이 그의 계획을 바꿔 놓아 그는 뉴질랜드에서 사랑을 만나

아이린 와워(Eileen Wawer)라는 두네딘 출신의 뉴질랜드 여성과 결혼을 하고

(1936년 2월 7일 이브닝 포스트:7) 10개월을 머물게 된다.

 

그러나 포스피쉴은 ‘귀국전 10만 마일을 여행한다는 기록’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계일주를 끝까지 마치고 싶어했다.(이브닝포스트 1930년 8월 6일:11)

1931년 중반 그가 이미 프라하에서 대규모 사진전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봐서는

그가 태평양과 미국을 신속히 횡단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1931년 10월 포스피쉴은 당시 최고의 전시장인 Veletržní palác에서

자신의 사진과 다른 작가의 것을 합해 1만점의 사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Klöslová 2005:58)

 

포스피쉴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고,

“1932년에는 <Širým světem>에 그의 기사가 실렸고,

포스피쉴은 하루아침에 이 잡지에 가장 많이 실리는 여행가 작가가 되었다.”고 크로슬로바는 밝혔다.

(Klöslová 2005:58)

 

잡지 기사를 위해 그는 아마 가장 모험이 가득 찬 여행경험들을 추렸을 것이고,

그 중 한국에서의 경험이 특히 가장 흥미진진했다.

1934년 1월과 2월 2부로 나뉘어 소개된 그의 한국 여행담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의 실루엣’ 이라는 제목이 붙여졌는데,

포스피쉴은 모험이 가득 찬 여행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듯하다.

그의 다른 글과 마찬가지로 여행기에 날짜를 명기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단지 한국에 몇 주 정도만 머물렀고 1927/28년 겨울에 한반도에 도착했다는 것만 짐작할 수 있다.

 

처음부터 그의 행동은 앞서 한국을 다녀간 두 명의 체코인과는 달랐다.

그는 다네시와 그의 부인처럼 ‘공식적인’ 조선호텔에 묵지 않았다.

그렇게 하고 싶어도 예산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한국을 여행했을 엘리아쇼바처럼 일본인 전용호텔에 묵지 못했을 것이다.

 

엘리아쇼바는 이미 일본인들 사이에서 생활하는데 익숙했던 반면,

포스피쉴은 일본어도 못했고, 한국에 아는 사람도 없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생활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었을 것이다.

아마 ‘한국인들은 지저분하며 질병을 퍼뜨리고, 한국인들과 살다가 도착한 지 몇 주 혹은 며칠만에

외인묘지로 간 외국인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그렇게 하지 말 것을 충고 받았을 것이다.

(Clark 2003:66)

 

‘강연료와 신문원고료만으로 생활하던’(캔버라 타임즈 1930년 3월 10일:2) 그는

자연히 한국 신문사를 찾아갔고, 한국 사회에서 가장 반일성향이 강했을 현지 한국 기자와 지식인들과

접촉하게 되면서 문제가 생겼다.

 

“일본 일간지 2곳의 출판사를 보러 갔는데, 한 곳은 영어계-일본신문이었고,

또 하나는 가장 큰 한국어 신문사인 동아일보였다. 두 곳 모두에서 나를 친절히 맞이해 주었지만,

특히 동아일보에서 나의 방문을 굉장히 반겼던 것 같다.”(Pospíšil 1934:269).

 

포스피쉴은 처음에는 한국 기자들과의 우호적 접촉이 왜 위험한지 모른 체,

누군가 자신을 도와줄 곳을 찾았고, 여행경비도 보탤 수 있어서 반가웠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서울에 거주하고 있었던 두 체코 동포들은 사태를 우려하고 있었고,

포스피쉴도 곧 일본의 철저한 통제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어디를 가든 따라붙는 그림자가 있었다.”(1934:322).

포스피쉴이 찾아갔던 한국사람들은 약속대로 그가 강연을 할 수 있도록 주선했는데,

포스피쉴이 강연을 취소하려고 하자 너무 늦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강연 사실은 ○월○일자 동아일보에서 최근 확인할 수 있었다.

 

포스피쉴에 의하면 강연은 일종의 성공을 거두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하게 된 역사적 과정을 들은 한국 관객은

“한국 청년들도 체코나 슬로박 젊은이들처럼 스스로를 조직해서 일본에 저항해야 한다고 소리쳤다.”

(Pospíšil 1934:323)

한편 “일본 당국자들은 내가 일본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고집했다.”(ibid.).

 

포스피쉴의 여행담들은 스릴이 넘치는 모험담으로 타블로이드에 어울릴 것 같은 문체이지만,

일부가 의심하듯 지어내거나 과장된 이야기는 아니다.

그의 여행기를 봐도 포스피쉴은 극동지역에서 일본 정책에 상당히 비판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일본이 극동지역 뿐만 아니라 그 너머에까지 위험한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일본정책에 대한 그의 부정적 시각은 유럽에서 나치 독일의 부상을 우려하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1935년 2월 뉴질랜드에 돌아온 뒤 포스피쉴은 적어도 한 차례 대규모 사진전을 열었고,

이를 본 평론가들은 이 전시회가 다양한 나라와 민족을 소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포스피쉴이 사진을 통해 일본의 군국주의를 보여주었다는 것을 강조했다.

 

포스피쉴 전시에 대해 이브닝포스트에 2차례나 기사로 소개한 한 기자는

“동양을 한 눈에 보여주는 사진들 속에서 무자비한 일본 군국주의와 그 목표의 냉혹한 달성을

분명 확인할 수 있다.”(이브닝포스트 1936년 2월 20일, 14)고 했다.

또, ‘작은 공포의 방’(이브닝포스트 1936년 2월 20일자:14)이 있고,

‘일본의 목표가 사진으로 명확히 드러나며, 동양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일본이 동원하는

잔인한 방법들과 일본이 방대한 제국을 발판으로 더욱 확장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1936년 이브닝 포스트 2월 29일, 7)

 

세계적 분쟁이 발발할 것이라는 포스피쉴의 걱정은

1936년 2월 이브닝포스트와의 긴 인터뷰에서 분명 나타났다.

‘넘치는가? 유럽이란 냄비. 독일의 목표. 전쟁 이야기가 많다. 새로운 2자 동맹?’

(이브닝포스트 1936년 2월 7일)을 보면 포스피쉴은 뉴질랜드인들에게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쳤다.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에는 파시즘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고’(ibid.)

더 나아가 ‘전쟁이 발발하면 독일, 이태리, 일본은

동시에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도 영토를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

전쟁이 발발하면 파시즘은 모든 유럽국가에서 권력을 장악하게 될 것이다.’고 했다.

또, ‘일본은 중국의 영토를 빼앗기에 앞서 무솔리니가 아비시니아 점령을 묵인받을 것인지,

혹은 국제연맹이 무용지물이라는 것이 입증될 것인지 예의주시하고 있다.’(ibid.)라고

포스피쉴은 주장했다.

 

포스피쉴은 유럽이나 극동의 상황이 뉴질랜드인에게 그저 간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만일, 다른 나라들이 일본의 계획에 반대하거나 방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면,

일본은 팽창을 멈추지 않을 것이고, 머지않아 호주와 뉴질랜드도 위협받을 것이다.”고 경고했다.(ibid.)

 

만주철도 근방에는 1차세계대전 전 혹은 도중에 러시아인들이나 체코슬로바키아군단과 함께 왔다가

정착한 체코인들이 비교적 큰 규모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중 누군가가 한국을 방문했을 가능성도 있다.

 

1918년에서 1925년 사이와 1931년에서 1939년 사이 여러 명칭으로 하얼빈에서 운영된

체코슬로박 대표부에 의하면 하얼빈에만 500명 이상의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교사, 음악인, 무역업, 사업 혹은 외국인 기업의 직원 등으로 근무했다.

다네슈와 포스피쉴(그리고 아마 엘리아쇼바까지도)이 만난

두 명의 체코인(스투데니와 후스 Mr. Studený, Mr. Hus)이 1920년대와 아마 1930년대까지

서울에 살았기 때문에 여전히 살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지만,

이들 역시 한국에서의 생활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한편 포스피쉴과 성격이 비슷했던 빅토르 무식(Viktor Mussik 1899-1952)은 한국에 오려고 했으나

1931년 일본 당국으로부터 한국 입국을 거부당했다.

무식(Viktor Mussik)의 여행이나 글 스타일이 포스피쉴과 비슷했기 때문에

그의 한국 여행 경험은 오늘날 매우 흥미로울 수 있었을 것이다.

 

무식(Viktor Mussik)은 1920년대부터 세계를 여행하며 체코 언론에 열심히 글을 기고했다.

그는 아프리카를 카이로에서 희망봉까지 육상으로 종단하고, 북아프리카를 두루 여행했으며,

이태리와의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아비시니아(오늘날의 이티오피아)에서 여러 체코 일간지의 특파원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중동지역과 아프리카에 대한 여행기 2권을 냈다.

(아마 자비로 출판했을 것이기 때문에 부수가 굉장히 적었을 것이다.)

<Trampem od Nilu až kJordánu(나일에서 요르단까지의 도보 여행, 1924)>,

<Pěšky severní Afrikou(걸어서 북아프리카 횡단, 1925)>,

<Výlet do středověku: reportáž zHabeše (중세로의 여행: 아비시니아에서의 보고, 1935-36)>

 

1931년 중일전쟁 이후 중국으로 갔다.

중국에서의 경험을 가지고 <황인들이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다.(1936)>는 책을

주요 체코 출판사를 통해 발표했다. ‘한국 입국이 거부되다.’는 장에서 그는 일본 경찰이 어떻게

자신의 한국 방문을 막았는지 설명하면서 신의주 관세청 건물에서 우연히 목격한 장면을 묘사했다.

 

“반쯤 헐벗은 한국 여인이 품에 작은 아기를 안고 바닥에 누워 있었다.

여인의 얼굴과 몸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일본군 두 명이 뾰족 군화로 여인을 걷어차고 있었다.”

(Mussik 1936:78).

 

무식(Viktor Mussik)의 한국 입국 거부에 대해

당시 체코신문에 더 자세한 정보가 소개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무식(Viktor Mussik)은 열심히 보도를 하는 기자로서

이미 여정 중에 <Venkov(농촌)> 등의 일간지에 기사를 많이 보냈기 때문이다.

한국인에 대한 일본 당국의 이와 같은 행동이 결코 드물지 않았다는 것도 강조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무임승차하던 맨 발의 작은 한국 소년 … 한 11살쯤 되어 보였는데,

일본 군인이 무자비하게 그를 구타했다.”는

1933년 미국인 부랑자 출신의 존 패트닉의 이야기(Uden (2003:30)에서 인용)

짧기는 하지만, 그의 경험담은 “한국인에 대한 일본의 잔혹함을 체코 독자들에게 알리는

여러 직접적 경험담” 중 하나였다.(Klöslová: 2000:139).

 

체코 독자들은 1920년대 일본의 공격을 받던 블라디보스톡에 근무했던

6만명 규모의 체코슬로바키아군단 병사들이 쓴 책과

회고록에서 접했던 일본의 태도가 그사이 별로 변화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체코와 슬로박 군인들이) 가장 강한 인상을 받은 것은

1920년 4월 블라디보스톡에 대한 일본의 공격과 특히 한국인에 대해 저질러진 만행이었다.”고

크로슬로바는 적고 있다.(2000b:141)

 

그녀는 이 주제에 대해 일련의 논문을 썼다.(Klöslová 2000b, 2001a, 2001b, 2002).

그녀가 인용한 F. V. Krejčí에 의하면

“일본인들은 특히 한국인 교외지역에 들이닥쳐서 300명 정도의 한국인을 죽였다.”고 한다.

(Krejčí, F. V.: Návrat Sibiřských legií /시베리아군단으로부터의 귀환/. Praha 1922, p. 22)

 

A. Zeman에 의하면 일본 군인들은

“한국인 구역을 엉망으로 만들면서 가옥을 불태우고, 정치활동을 하던 한국인 수 백명을 구속하면서

무자비하게 고문하고 동물처럼 길거리에서 총으로 쏴 죽였다.”(Zeman, A.: Československá Odyssea /Czechoslovak Odyssey. Praha J. Otto 1920, p. 75).

 

J. Kratochvíl에 의하면 “한국인 구역은 여전히 화염에 쌓여 있었다.

(…) 일본군은 한국인들을 사슬로 함께 묶어 죽음으로 끌고 갔다.”

(Kratochvíl, J.: Cesta revoluce /혁명으로의 길Praha: Čin 1928 /2nd ed./, p. 533,

모든 인용은 Klöslová의 것 2000b:141)

 

무식(Viktor Mussik)의 책과 <Širým světem>에 실린 포스피쉴의 글 모두 널리 읽혔기 때문에,

한국의 실정은 극동지방과 관련된 체코인들 사이에서 잘 알려져 있었다.

동경 주재 체코슬로바키아 외교관들은 일본이 중국 및 러시아와의 전쟁을 통해 확보한

식민지(즉, 포르모사와 한국)의 상황을 예의주시했는데, 그들의 보고 내용은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보고 중 가장 먼저 쓰여진 것은 동경에 체코슬로바키아 공사관 개설 몇 달 뒤인 1920년 12월 23일자였다.

약 2페이지 길이로 공사관은 사이토 장군이

1920년 12월 16일 오사카에서 지역 사업가들을 대상으로 한 연설을 묘사하고 있다.

(이 연설문은 몇 가지 논평과 함께 아사이신문에 공개되었다.)

 

한반도 상황에 대한 가장 비판적 보고는 1923일 4월 2일자로서,

공사관의 의견에 따르면 “한국에는 침묵이 감돌고 있지만, 이는 엄격한 통제 때문이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여전히 활발하다. 단, 그 핵심부는 국외로 이동되어 있다.

일본 정치인들은 한국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스스로를 기망하고 있지만,

멀지 않은 장래에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고 했다.

- 출처 : 야로슬라브 올샤 2세(Jaroslav Olša, j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