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동국진체(東國眞體)

Gijuzzang Dream 2011. 4. 13. 14:51

 

 

 

 

 

 

 

 동국진체 (東國眞體)

 

 

동국진체란 중국의 서체를 모방하지 않고 우리의 정서에 맞게 개발된 한국적 서체로

옥동 이서(玉洞 李緖, 1662-1723)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의 형이었던 이서는

벼슬이 찰방에 그쳤으나 서예에 있어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으며

우리나라 서예사에 <필결(筆訣)>이라는 이론 및 비평서를 남긴 선구자이기도 하다.

 

이서의 서맥은 해남 출신의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 1668-1715)에게 이어져

본격적인 뿌리를 내리게 되는데 공재는 이서를 만나 자연스럽게 동국진체를 전수받게 된다.

이는 이서의 행장(行狀)에

공재와 백하 윤순(白下 尹淳, 1680-1741),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1777) 등이

모두 그의 여체(餘體)라고 기록되어 있음에 근거한다.

그러나 공재 윤두서의 행장에는 이서와 만나 서법을 논했다는 대목이 있는데다

나이 차이도 6세에 불과하는 점에서 제자라기보다는 함께 동국진체를 논했다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공재로 이어진 동국진체는 크게 두 개의 줄기를 형성한다.

하나는 아들인 낙서 윤덕희(駱西 尹德熙, 1685-1766)와 외증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

방산 윤정기(舫山 尹廷琦, 1810-1879), 춘계 윤홍혁(春溪 尹洪赫) 등 집안으로 이어졌고,

또 하나는 백하 윤순 - 원교 이광사로 이어져 대중화의 기틀을 마련한다.

 

 

옥동

이서

 

 

 

 

 

 

 

 

 

 

 

 

 

 

공재

윤두서

 

 

 

 

 

 

 

 

 

 

 

 

 

 

 

 

 

 

 

 

 

 

 

 

 

 

 

 

 

 

 

낙서

 

 

 

 

 

 

 

 

백하

윤 순

 

 

 

 

 

 

 

 

 

 

 

 

 

 

 

 

 

 

 

 

 

 

 

 

다산

 

 

 

 

 

 

 

 

원교

이광사

 

 

 

 

 

 

 

 

 

 

 

 

 

 

 

 

 

 

 

 

 

 

 

 

방산

 

 

 

 

 

 

 

 

 

 

 

 

 

 

 

 

 

 

 

 

 

 

 

 

 

 

 

 

 

 

 

 

 

대흥사

신지도

송하

조윤형

직암

윤사국

 

 

 

 

창암

이삼만

 

 

 

춘계

 

 

 

 

 

 

 

 

 

 

 

 

 

 

 

 

 

 

 

 

 

 

 

 

 

 

 

 

 

 

 

 

 

 

 

 

 

 

 

 

 

 

즉원

 

김광선

 

 

 

 

 

 

 

 

 

 

 

 

 

 

 

 

 

 

 

 

 

 

 

 

 

 

 

 

 

 

 

 

 

 

 

 

 

 

 

 

 

 

 

 

아암

 

 

황치곤

 

 

 

 

 

 

 

 

 

 

 

 

 

 

 

 

 

 

 

 

 

 

 

 

 

 

 

 

 

 

 

 

 

정재규

 

박문회

 

 

 

 

 

 

 

혜집

 

 

황성원

 

 

 

 

 

 

 

 

 

 

 

 

 

 

 

 

 

 

 

 

 

 

 

 

 

 

 

정기

 

 

안규동

 

황욱

 

 

 

 

 

일화

 

 

 

 

 

 

 

 

 

 

 

 

 

 

 

 

 

 

 

 

 

 

 

 

 

 

 

 

 

 

 

 

 

 

 

 

 

 

 

 

 

 

 

 

 

 

 

 

 

 

 

 

 

 

 

 

 

 

 

 

 

 

 

 

 

 

 

 

 

 

 

 

 

 

 

 

 

 

 

 

 

 

 

 

 

 

 

 

 

 

 

 

 

 

 

 

 

동국진체의 서맥

 

 

 

 

 

 

 

 

 

 

동국진체의 서체를 대중화한 원교 이광사는 한때 완도 신지도에 유배되기도 하였는데

이곳에서 이명의(李明義)와 김광선(金光善)을 길러낸 것을 비롯,

해남 대흥사의 즉원(卽園, 1738-1794), 혜장으로 알려진 아암(兒庵, 1772-1799),

창암 이삼만(蒼巖 李三晩, 1770-1847) 등 크게 4대 계보를 형성해 본격적인 대중화의 기틀을 마련한다.

 

원교 이광사는 전주 출신으로

그는 백부의 진유사건에 연루되어 부령과 신지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감했는데

죽을 때까지 붓을 놓지 않을 정도로 서예에 진력, 훗날 서예의 중흥을 이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마당에 앉아있는 동안에도 땅에 글씨를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당송위진(唐宋魏晉)과 전혀 다른 서체로 일가를 이루었다.

특히 그는 전서와 예서에 뛰어나 연암 박지원은 그의 글씨를 독특한 개성미의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원교 이광사의 저서는 <동국악부> <원교집선> <원교서결> 등을 통해 서예중흥에 이바지하였다.

 

송하 조윤형으로 이어졌던 원교 이광사의 서맥은

죽석 서영보(竹石 徐榮輔, 1759-1816), 눌인 조광진(訥人 曺匡振, 1772-1840),

직암 윤사국(直庵 尹師國, 1728-1809)으로 이어졌으나 뿌리를 내리지는 못했고,

창암 이삼만으로 이어졌던 서맥이 오늘날 호남서맥의 원류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창암 이삼만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서예에 몰두, 집안을 돌보지않아 가정이 퇴락했을 정도였으며

처음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우연히 부산 상인의 장부에 기록한 것이 명필로 알려져 이름을 날렸다.

특히 그는 행초에 능했고 기운생동의 필법으로 유명하며 그의 서체를 ‘창암체’라 부른다.

하동 칠불암의 편액을 비롯해서 전주 제남정액 등 많은 편액을 남겼으며

수많은 제자를 길러 '호남서단'이 한국서단의 중심으로 부상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창암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기른 제자는

익산 출신 호산 서홍순(湖山 徐弘淳, 1798-?), 함평 출신 기초 모수명(箕樵 牟受明, ?-?),

해사 김성근(海士 金聲根, 1835-1918), 노사 기정진(盧沙 奇正鎭, 1798-1879),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 1891-1977), 설주 송운회(雪舟 宋運會, 1874-1965),

근원 구철우(槿園 具哲祐, 1904-1989), 석전 황욱(石田 黃旭, 1898-1993),

강암 송성용(剛庵 宋成鏞, 1913-1999),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馨, 1903-1981) 등이

그의 서맥에서 비롯되었다.

 

모수명은 만년에 호남지방을 돌아다니며 서법을 가르쳤는데

3개월간 배워도 일정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면 수업료 200냥을 받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의 서체는 성씨에 따라 ‘모체(牟體)’라 한다.

모수명의 서맥 가운데서 설주 송운회 - 송곡 안규동(宋谷 安圭東, 1907-1987)으로 이어지는 라인에서

가장 많은 서예인들을 배출했다. 설주와 송곡은 행초에 능했는데 오늘날 이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펴고 있는 운암 조용민(雲庵 趙鏞敏), 용곡 조기동(龍谷 曺基銅), 학정 이돈흥(鶴亭 李敦興),

송파 이규형(松坡 李圭珩), 금초 정광주(金草 鄭侊柱) 등이 모두 그의 제자이다.

 

익산 출신 서홍순은 전주 이삼만, 남원의 강남호(姜南湖)와 더불어 조선후기 3대명필이라 불리며

전주 풍남문의 편액 ‘호남제일성’을 썼다.

 

전북에서는 석전 황욱과 손자인 황방연으로,

전남에서는 설주 송운회를 통해 또 하나의 서맥을 형성하게 되는데

전북 강암 송성용은 김창돈으로부터 해사 김성근의 서맥을 익혀

집안조카인 송하영(宋河瑛, 1937-1990)의 아들 송하경(宋河景)으로 전수했다.

 

 

 

 

 

 

동국진체<東國眞體>

 

전남 구례군 광의면 방광리에 지리산 천은사(泉隱寺)가 있다.

1910년 8월 나라가 망하자 자결한 『매천야록(梅泉野錄)』의 저자 황현(黃玹)을 모신

매천사(梅泉祠)가 그 근처에 있다.

 

천은사의 원래 이름은 단 샘물이 있다는 뜻의 감로사(甘露寺)였다.

숙종 때 중건했다고 전해지는데, 정작 영조 때의 학자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1712~1781)이 지은 『천은사 중수상량문(泉隱寺重修上樑文)』이 남아 있다. 중수할 때 샘가의 구렁이를 잡아 죽인 이후로 물이 말라서 ‘샘이 숨었다’는 뜻의 천은사(泉隱寺)가 되었다. 그 뒤 원인 모를 화재까지 자주 일자 절의 수기(水氣)를 지켜주는 구렁이를 죽였기 때문이라고 여겨졌다.

천은사에서 신필(神筆)로 알려진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에게 현판 글씨를 부탁하자 물 흐르는 듯한 수체(水體)로 ‘智異山泉隱寺’(지리산 천은사)라고 써주었다.

이 현판을 일주문에 건 뒤부터 화재가 나지 않았는데, 지금도 고요한 새벽에 일주문에 귀를 기울이면 신운(神韻)의 물소리가 들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기이한 글씨체다.

 

 

이광사는 가객(歌客)의 노래가 우조(羽調)면 글씨도 우조고, 노랫가락이 평조(平調)이면 글씨도 평조의 분위기가 담겼다고 전할 정도로 신기(神氣)가 담겨 있는 글을 썼다.

이광사의 조부는 호조참판을 지낸 이대성(李大成)이고 부친은 대사헌 이진검(李眞儉)이었으나 소론(少論) 강경파였기 때문에 노론(老論)에서 추대한 영조가 즉위한 후부터 집안이 몰락했다.

부친 이진검은 전라도 강진에 유배되었다가 영조 3년(1727)에 죽고 말았다.

이광사 자신도 영조 31년(1755) 발생한 나주벽서 사건에 연루돼 사형 위기에 몰렸다가 겨우 살아나 함경도 부령(富寧)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이광사는 자호(自號)를 ‘두만강 남쪽(斗滿江之南)’이란 뜻의 ‘두남’(斗南)’으로 짓고 학문과 글씨에 몰두했다.

이광사가 백하(白下) 윤순(尹淳)의 뒤를 이어 중국과 다른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서체인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과 가문의 신산한 고초를 붓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 부문이 오탈자와 심사비리 등으로 도마에 올랐다.

원(元)나라의 정표(鄭杓)는 『연극병주(衍極竝注)』에서 “오호라! 서도는 지극하도다. 군자는 반드시 지극한 경지를 쓴다고 했는데, 하물며 서도이겠는가?(嗚呼! 書道其至矣乎!君子無所不用其極,況書道乎!)”라고 말했다.

- 이덕일 역사평론가

- 중앙, 2011.06.22 [이덕일의 古今通義(고금통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