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듬어보고(전시)

[물처럼 바람처럼]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서예전

Gijuzzang Dream 2011. 4. 11. 15:50

 

 

 

 

 

 창암(蒼巖) 탄생 240주년 기념특별전

 ‘창암 이삼만-물처럼 바람처럼’  

  

 

 

 


'물처럼, 바람처럼'이란 주제로 개최되는 이번 전시회는

2010년 12월 22일~2011년 5월22일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을 시작으로 순회 개최한다. 

: 정읍사예술회관(2011.3.5-3.13), 전주도립미술관(3.18-4.17), 국립광주박물관(4.23-5.22)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탄생 240주년 기념

 

 

 

 

 

 

 

 

<일운무적 득필천연(逸韻無跡 得筆天然)> 종이에 먹, 28.6×151.3cm, 김익두 소장

 

‘일운무적 득필천연(逸雲無跡 得筆天然)’은

‘빼어난 소리는 흔적이 없고 득도한 글씨는 자연 그대로이다’라는 뜻으로

자신이 추구하던 서도의 경지를 표현했다. ‘흔적도 없고 있는 그대로(逸雲無跡 得筆天然)’인 것이다.

자연스러움[天然], 꾸밈없는 소박함[拙樸], 개성 짙은 우리 정취[土俗], 강렬한 생명력[力動]으로

자리매김 된 창암 이삼만의 예술세계를 녹아든 글씨에서 나타내고 있다.

 

 

 

<운학유천 군홍희해(雲鶴游天 群鴻戱海)>

구름 속의 학은 하늘을 노닐고 무리 지은 기러기 떼는 바다를 희롱한다.

“하늘에서 놀고 바다에서 노닌다”는 글은 원래 운학유천(雲鶴遊天) 군홍희해(群鴻戱海),

즉 “구름과 학이 하늘에서 노닐고 갈매기 떼가 바다에서 노닌다”는 뜻으로,

양무제(梁武帝)가 종요(鍾繇)의 글씨를 평(評)한 구절에서 나온 것이다.

 

 

 

 

<산광수색(山光水色)>, 종이에 먹, 57.5×87.8cm, 개인 소장

 

산광수색(山光水色) - 산의 빛, 물의 색

 

산고수청(山高水淸), 즉 산은 높고 물은 맑다는 뜻과 비슷하다. 곧 경치가 좋음을 뜻한다.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거세게 물결치는 획이 춤추는 ‘산광수색(山光水色)’ 은

유수체의 원숙한 경지를 드러낸다.

 

 

<‘사시사(四時詞)’ 육언시>, 퇴계십운 10폭 중 한 폭, '유수체'의 창시자 창암 이삼만,

1846년, 종이에 먹, 79×53㎝, 개인 소장

 

  

 

日遲遲風澹澹 (일지지풍담담)  해는 더디고 바람은 담담한데

山下溪溪上沙 (산하계계상사)  산 아래 시냇물 모래 위로 흐른다. 

  一夜江南雨後(일야강남우후)  하룻밤 강남에 비 내린 뒤

  滿庭芳草綠陰(만정방초녹음)  뜰에는 향기로운 풀과 녹음 가득하네.

  

 

타계하기 1년 전에 쓴 ‘사시사(四時詞)’ 육언시는

막힘 없이 가볍고 자유로운 유수체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물 흐르듯이 바람이 부는 것처럼 자연스러우면서도 기운이 생동한다.

 

 

日遲遲風澹澹  해는 더디고 바람은 담담한데

山下溪溪上沙  산 아래 시냇물 시내 위의 모래.

一年杜宇明月  한해 중 두견새 우는 밝은 달밤

萬樹桃花杏花  만 그루 나무는 복숭아꽃 살구꽃.

 

鳥嚶嚶雲靄靄  새소리 지저귀고 구름은 자욱한데

山轉幽水轉深  산을 돌아 그윽하고 물은 돌아 깊구나.

一夜江南雨後  하룻밤 강남에 비 내린 뒤

滿庭芳草綠陰  뜰에는 향기로운 풀과 녹음 가득하네.

 

風凉凉葉簫簫  바람은 서늘하고 낙엽소리 우수수

雁聲高水聲急  기러기 소리 높고 물소리는 급하네.

幽人睡起彷徨  은자(隱者)는 잠이 깨어 일어나 방황하고

上下天光水色  위와 아래 하늘빛과 물색.

 

風冷冷雪霏霏  바람은 차고 눈은 펄펄 내리는데

閑自吟獨自酌  한가롭게 시 읊으며 혼자서 술잔 드네.

行人不到柴門  나그네 사립문에 찾아오지 않는데 

白雲千峰萬壑  구름만 천 봉우리와 일만 골짜기에 걸렸구나.

朱晦庵 四時詞 完山 李三晩 書

**주회암(朱晦庵) :주희(朱喜), 곧 주자(朱子). 회암은 그의 호

 

 

 

 

<이삼만(李三晩, 1770~1847)이 쓴 오언시>, 조선, 1830년, 종이에 먹

  

三江潮水急   삼강(三江)에 조수가 거슬러 오르고
五湖風浪湧   오호(五湖)는 풍랑이 거세지네.
由來花性輕   꽃은 본래 그 성질이 가벼우니
莫畏蓮舟重   연꽃실은 배 무겁다 두려워마오 

- 최호(崔顥, 중국 唐, 704~754) 「장간곡(長干曲)」

 

 

 

■<김양성(金養誠) 묘비>, 앞면 김정희, 뒷면 이삼만(66세), 탁본, 106.2x129cm, 김진돈 소장

 

창암과 추사는 한 작품에서 만나기도 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추사 50살 나던 해

집안 족척 김양성의 손자가 ‘김양성(金養誠) 묘비’ 비문의 앞면은 추사가 쓰고

뒷면 행장과 옆면은 창암이 써 줄 것을 부탁하면서 이뤄졌다.

 

 

■<임지관월(臨池觀月)>, 나무에 판각, 27.5×72.5cm, 전북대박물관 소장

 

연못에 다달아 달을 구경한다.

 

연못에 비친 달과 하늘에 떠 있는 달이 서로 대비되고 혼동되므로

진리(眞理)의 실체를 명확하게 간파하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

전라도 선암사 만세루에 '임지관월(臨池觀月, 연못에서 달을 바라보다)'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비슷한 글씨이지만 '못 지(池)'자가 다르다.

먹흘림 자국이 남은 ‘臨池觀月’은 추상회화를 보는 듯 동양철학의 깊이와 조형미가 동시에 느껴진다.

 

 

■<갈기분천(渴驥奔川)>, 51세, 1820년, 전북도립미술관 소장

 

渴驥奔泉(갈기분천) - 목 마른 명마가 샘을 보고 달려감. 힘차고 급한 모양의 비유

 

怒猊抉石渴驥奔川 胸呑七澤筆搖五岳(노예결석갈기분천 흉탄칠택필요오악)

성난 사자가 바위를 긁고 목마른 말이 시냇물로 달려가듯.

흉중으로는 칠택을 삼키고 붓으로는 오악을 흔든다.

 

 

■<이삼만(李三晩, 1770~1847) <정이, 「언잠(言箴)」> 부분, 종이에 먹, 101.8×27.3cm, 개인 소장 

   宋 정이천(程伊川=程子)의 '사물잠(四勿箴)' 중 '언잠(言箴)'에 해당

  보고(視箴) 듣고(聽箴) 말하고(言箴) 행동(動箴)하는 것에 대한 경계의 말을 이름

 

 

<길흉영욕(吉凶榮辱) 유기소소(惟其所召)>

- 길흉과 영욕도 모두가 말로 인해서 초래된다.

 

“사람 마음이 이끌리는 것은 말 때문이니,

말을 할 때 조급함과 가벼움을 금지해야만

마음 속이 고요하고 혼란하지 않는다.

하물며 말은 자기 마음의 출입문 같으니

말 한마디로 전쟁이 일어나기도 하고, 우호관계를 만들기도 한다.

길하고 흉하며 영화롭고 욕됨이 오직 그 입이 부르는 것이다.

너무 말을 쉽게 하면 믿음성이 떨어지고,

번거롭게 말수가 많아지면 그 핵심을 잃어버리게 되며,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고

비뚤어진 말은 비뚤어져 되돌아온다.

말 같지 못한 말은 하지 말라.

이 말을 명심하여야 한다.”

 

 

 

 

 

 

 

■<호원(虎圓)/ 구암(龜菴)/ 청풍(淸風)/ 애룡(愛龍)>

호원(虎圓) - 종이에 먹, 30.2×51㎝, 개인 소장

구암(龜菴) - 종이에 탁본, 38×57㎝, 김진돈 소장

청풍(淸風) - 종이에 먹, 50×30.3㎝, 개인 소장

애룡(愛龍) - 종이에 먹, 30×51.2, 개인 소장

 

 

<관수세심(觀水洗心)>, 나무에 판각, 24×86.2㎝, 개인소장

관수세심(觀水洗心): 흐르는 물을 보며 마음을 씻는다

 

<장자>의 ‘관수세심 관화미심(觀水洗心 觀花美心)’은

물을 보면서 마음을 씻고, 꽃을 보면서 마음을 아름답게 가꾸라는 뜻

 

옛날 성철현달(聖哲賢達)과 소인묵객(騷人墨客)들은 물에 자신을 비춰 봤다.

공자는 물을 보고 깨달았다. “흘러가는 것이 이와 같아서 밤낮으로 쉬지 않는구나.”

노자는 말했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으니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는다.”

주자는 읊었다. “땅의 모양은 동쪽 서쪽이 있지만, 흐르는 물은 이쪽저쪽이 없도다.”

송강 정철도 보탠다. “물은 나뉘어 흘러도 뿌리는 하나다.”

더위를 쫓을 뿐만 아니라 깨달음을 좇는 게 물이다.

 

 

<도잠(陶潛=陶淵明, 365-427)의 음주(飮酒) 9> 중에서,

1825(56세), 종이에 먹, 각 53.5×29.8㎝, 윤영돈 소장

 

淸晨聞叩門(청신문고문) 이른 아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

倒裳往自開(도상왕자개) 서둘러 옷 걸치고 나가 문을 여니

.....

壺漿遠見侯(호장원견후) 한 병 술 가지고 멀리 찾아와

疑我與時乖(의아여시괴) 시대와 어긋나지 않은가 날 의심하네

襤縷茅詹下(남루모첨하)  남루하게 처마 밑에 사는 신세이니

未足爲高栖(미족위고서) 고상한 삶이라고는 할 게 못되오 

.....

紆轡誠可學(우비성가학) 고삐 돌려 벼슬하는 일 비록 배울 만 하지마는

違己詎非迷(위기거비미) 자기를 어기는 것이 어찌 미혹되지 않겠는가

且共歡此飮(차공환차음) 잠시 함께 이 술이나 즐기세나

吾駕不可回(오가불가회) 내 수레 돌릴 수가 없으니....

乙酉夏 書于玉流洞 完山 李參晩

 

 

 <용비(龍飛)>, 43×56㎝, 개인소장

용이 하늘을 나는 힘찬 기상을 뜻한다.

<주역(周易)> 건괘(乾卦)에

“구오는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봄이 이롭다(九五 飛龍在天 利見大人)” 하였다.

 

 

■<전상창고자위제일공부야(專尙蒼古者爲第一功夫也)>,

1831, 62세, 종이에 먹, 28.2×102.5㎝, 국립전주박물관 소장

 

 

專尙蒼古 者爲第一功夫也 (‘옛 것을 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공부’이다.)

辛卯玉流完山李三晩書于玉流百花潭上

 

 

■백거이(白居易) <만추한거(晩秋閑居)>

종이에 먹, 27.3×136㎝, 개인 소장 

 

地僻門深少送迎  땅이 궁벽하고 문도 깊어 오가는 이 적어서

披衣閑坐養幽情  옷 헤치고 편히 앉아 그윽한 정을 기르네.

秋庭不掃攜藤杖  쓸지 않은 가을 뜰에 지팡이 잡고

閒踏梧桐黃葉行  한가로이 누런 오동잎 밟네.

 

 

■<이후백(李厚白) 절구(絶句)>

1831년(62세), 종이에 먹, 85.7×40.9㎝, 개인 소장

 

 

細雨迷歸路 騎驢十里風 野梅隨處發 魂斷暗香中

小院無人野 煙斜月轉明 淸宵易怊(惆)悵 不必有難情(亭)

三江湖水急 五湖風浪湧 由來花信(性)輕 莫畏蓮舟重

向晩意不適 騎車登古原 夕陽無限好 只是近黃昏

雲月有歸處 故山淸洛南 如何一花發 春夢遍江潭

入夜秋砧動 千聲(門)起四鄰 不緣樓上月 應爲 頭人

辛卯秋 李三晩

  

- 이후백(李厚白) 「절구(絶句)」

細雨迷歸路  가랑비에 돌아갈 길 잃고

騎驢十里風  나귀타고 바람 쏘이네.

野梅隨處發  들판 매화 가는 곳마다 피었으니

魂斷暗香中  은은한 향기 속에 넋이 끊어지네.

   

- 이상은(李商隱), 「등악유원(登樂遊原)」

向晩意不適  날 저무니 마음이 울적해져서

騎車登古原  수레 몰아 옛 언덕에 올랐네.

夕陽無限好  석양이 매우 아름답지만

只是近黃昏  단지 황혼이 가까울 뿐이네. 

 

 

<정기이발(正己而發)>, 종이에 먹, 20.3×70.6㎝, 전북도립미술관 소장

正己而發 - 자신을 바로잡은 뒤에 쏜다.

 

활쏘기에서 흔히 하는 말이다.

공자왈 “활쏘기는 군자(君子)와 비슷함이 있으니,

정곡(正鵠)을 잃으면 돌이켜 그의 자신에게서 구하는 것이다.”

(子曰 射 有似乎君子 失諸正鵠 反求濟其身)

세상만사 남을 탓할 겨를이 없다. 가만히 돌이켜보면 모두가 자기의 잘못이기 때문이다.

 

 

■<무이도가(武夷棹歌)>, 종이에 먹, 67.3×31cm, 개인 소장.

 

七曲移船上碧灘, 隱屛仙掌更回看.

却憐昨夜峰頭雨, 添得飛泉度幾寒

 

주희(朱喜)의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서시(序詩)에서 제7곡(第七曲)까지 여덟 폭에 쓴 것 중

마지막 폭이다.

창암의 행초 필적 가운데 변화로움이 잘 드러나는 수작이다.

 

 

 

 

 

 

 

 

 

 

  

 

■<소탕수경(疏宕瘦勁)>, 종이에 먹, 31×22cm, 개인소장 

 

이삼만(1770~1847)은 모필(毛筆)과 함께

남들이 쉽게 시도하지 않은 갈필(葛筆, 칡뿌리), 죽필(竹筆),

앵우필(鶯羽筆, 꾀꼬리깃털)과 같은

특이한 도구나 옷감을 가지고 작품을 제작하였다.

이것은 주목되는 도구와 재료의 확장인데

이는 창암 글씨가

소탕(疏宕 · 탁 트이고 거칠음),

수경(瘦勁 · 마르고 굳셈)한 맛을 내게 하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영(永)'자에 담긴 글씨 쓰는 8가지법[永字八法]과 창암 이삼만의 기본획>

이삼만, 1831년(62세), 종이에 먹, 25.4×19.7㎝, <서법책(書法冊)>, 개인 소장

      

창암은 후진들에게 언제나 겸허한 지세를 갖도록 했다.

물 흐르듯 써내려 가는 그의 글씨는 유수체(流水體)라는 독특한 필체를 낳았다.

영자팔법(永字八法)을 신팔창립(神八創立)의 것이라고 그의 서법을 설명했다.

여덟 가지의 운필법(運筆法)=영자팔법(永字八法)은

①측(側)=점(點) ②늑(勒)=가로획() ③노(努)=세로획(竪) ④적()=갈고리(⑤책(策)=오른삐침(仰橫)

⑥약(掠)=길게 왼쪽으로 삐친 획 ⑦탁(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짧게 삐친 획(短撇) ⑧책(珊)=파임(  

 

 

이삼만의 <書法>은 서예의 기본인 ‘一’자의 마제잠두(馬蹄蠶頭)를 설명한 서첩이다.

 

1. 一如千里陣雲 : 一자는 천리에 진(陣)을 치고 있는 구름형상으로 쓴다.

2. 馬蹄 : 一자의 시작부분 획의 모양은 말발굽 같아야 한다.

3. 上陽先降 : 위쪽의 뾰족한 부분에 붓을 대어 먼저 내려 긋는다.

4. 下陰仰升 : 아래쪽 들어간 부분에서는 내려 그었던 필봉(筆鋒)을 위를 향해 들어올린다.

5. 中心爲骨成駘 : 획의 중심이 뼈대가 되어 태반(駘盤)을 이룬다.

6. 正鋒遲攝而過 : 바르게 필봉을 세워 천천히 매끄럽지 않게 나간다.

7. 至半滿回作動氣 : 획의 중간에 이르러서는 필봉을 뒤집어 돌려 움직이는 기운이 일어나게 한다.

8. 過半用力擠右 : 획의 절반을 지나서는 힘을 주어 오른쪽으로 민다.

9. 至限滿暫屈曲利蠶頭 : 획이 끝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잠시 필봉을 굽히고 꺾어 누에머리모양을 만드는데 이롭게 한다.

10. 陽復降 : 획의 끝부분 위쪽에서 다시 필봉을 내려 긋는다.

11. 陰復承合面止 : 획의 끝부분 아래쪽에서 다시 필봉을 이어 운필을 그친다.

12. 蠶頭 : 一자의 끝부분 획의 모양은 누에머리 같아야 한다.

 

   

■<창암서적방우전(蒼巖書跡倣禹篆)>, 1845(76세), 종이에 묵서, 27.7×12.8㎝

 

 倣禹篆及瘱鶴筆意: 幽深無際, 古雅有餘

<禹篆 및 瘱鶴銘 필의의 모방> 그윽이 깊어 막힘이 없고 고아함이 여유롭네

 

 

倣漢魏古法: 書肇於自然, 陰陽生焉, 形勢氣載筆, 惟軟礙奇怪生焉, 得峻疾遲澁二妙, 書法盡矣.

<漢魏古法의 모방> 글씨는 자연에서 비롯되었으니, 음과 양이 생겨나고

형세의 기가 붓에 실려 부드러움, 거침, 기이함, 괴상함이 나타난다네.

험준하면서 거침없고, 느리면서 빡빡한 두 가지의 오묘한 이치를 터득하면 서법은 끝난다네.

 

倣晉人筆意: 晉人用筆, 皆外圓而內方, 簡遠淡雅, 逸韻自適也.

<晉人 필의의 모방> 진인의 용필은 모두 밖은 둥글고 안은 네모져서,

대속 같은 담박한 우아함이 빼어난 운치로 저절로 드러난다네.

  

倣唐人筆意: 歐陽詢, 淸勁秀健, 於唐爲最, 故顔柳皆承此套.

<唐人 필의의 모방> 구양순은 맑고 굳세며 빼어나고 건실함이 당의 서가들 가운데 으뜸으로

안진경과 유공권이 모두 이를 계승했네.

 

 

倣金生書: 我東金生與右軍, 竝驅中原, 如龍吟虎吼, 力敵萬夫, 盖筆法,

 先揭手腕, 使不接於紙面, 然後執筆, 切不可堅, 只以精力有透背之氣..

<김생서의 모방> 우리나라 김생은 왕희지와 같이, 마치 용과 호랑이가 포효하듯,

중국에서도 쌍벽을 이룰 정도로 뛰어나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만나려 했다네. 

필법이란 대체로 손과 팔을 들되 붓을 든 연후에 지면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고

절대 붓을 꽉 움켜잡아서는 안되며, 정력으로써 먹물의 기세가 종이 뒷면까지 배어들도록 한다네.

 

夫書法必先虛腕而疎管 堅握乃以透背爲意(부서법필선허완이소관 견악내이투배위의)

글씨를 쓰는 법은 먼저 팔에서 뻣뻣한 힘을 빼고 붓대에 기운을 통하게 하는 것이다.

손의 힘을 굳건히 길러 붓으로 종이의 뒷면에까지 꿰뚫는 것을 서도의 뜻으로 삼는다.

 

 

方能造藝, 旣得楷法, 則當知行誼, 故不可潦率, 只將飜覆,

여러 가지 조예에 능하여 이미 해서법을 얻었다면 또한 당연히 행서법도 알게 될 것이네.

그러므로 필법의 폐습을 고치지 않으면 장차 다시 번복하게 되리니.

 

而草法亦出於行, 故每以嚴重爲體, 不至胡也.

若奔走揮擲, 則篤諸夫宜. 

초서 역시 행서법으로부터 나오니 매양 엄중하게 하여 마음대로 되면 어지럽지 않게 될 것이네.

혹여 붓을 빠르게 휘두른다면 사람들을 놀라게 할 따름인저.  

 

    

乙巳之夏, 余至楚山之富武谷近水亭,

一日故人吳生允之, 自瀛洲來見, 忽憶三十年相從相愛之情, 淚與竝, 喜極無言.

因留一夜, 翌朝乃書與數紙, 以記日後耳.

完山李三晩 字允元 號蒼巖 七十六歲書.

 

을사년(1845) 여름에 내가 초산의 부무곡 근수정에 왔다.

하루는 고향친구 오윤지가 제주에서 와서 만나게 되었다.

30년 동안 서로 사귀며 우애롭게 지내던 정이 갑자기 밀려오자 눈물과 탄식이 함께 나와

그 기쁨을 뭐라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하룻밤을 머물고 이튿날 아침 여러 장의 종이에 글씨를 써주니,

이로서 훗날을 기약하고자 한다. 자 윤원, 호 창암, 완산 이삼만이 76세에 쓰다. 

- 순천대박물관, 강운, 최승효 기증문화재 ‘글씨의 아름다움’, 2008, p.50-52

 

 

<서도(書道)>, 종이에 먹, 30×82.8㎝, 강암서예관 소장 

 書道以漢魏爲原若專事晋家恐或有取姸

 

글씨는 漢과 魏나라의 것을 근원으로 삼아야 하며,

오로지 晋나라의 것을 따르면 예쁜 것만 따르게 될 것을 경계하는 글이다.

 

 

 

<화동서법(華東書法)>, 1800년(31세) 간행, 목판본, 28×16.5㎝, 김진돈, 한상봉 소장

 

<화동서법>은 1800년(이삼만 31세) 가을에  

宋나라 미불(米巿, 1051-1107), 채양(蔡襄, 1012-1067), 明나라 동기창(董其昌, 1555-1636)에 이어서

우리나라 한호(韓濩, 1543-1605), 윤순(尹淳, 1680-1741), 이광사(李匡師, 1706-1777)의 필적을 모아

목판으로 전주 계남산방에서 간행한 책이다.

 

이 책을 펴낸 이삼만은 왕희지(王羲之)의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를 집자하여

다음과 같은 서문(序文)을 썼다.

 

 

 

 

서법(書法)은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를 통해 오묘함이 지극하였으나

그릇되고 잘못 전해져서 진적(眞迹)을 보기 어렵다.

우리나라에는 김생(金生)이 뛰어났지만 진묵(眞墨)이 없어졌으니 한탄스럽다.

이제 중국과 우리나라의 진묵을 약간 구하여 널리 퍼뜨리려 하니 식견을 갖춘 이들의 비판을 바란다.

 

宋나라의 미불(米巿, 南宮)은 신이한 필력을 얻어 호매(豪邁)한 것이 뛰어났다.

채양(蔡襄, 忠惠)은 예스럽고 질박하여 필세(筆勢)의 굴곡마다 생기가 있었다.

明나라의 동기창(董其昌, 玄宰)은 청신(淸新)하고 간결하며 유려하여

그 필의(筆意)가 오묘함을 다하였다.

한호(韓濩, 石峯)는 옛 서법을 깊이 얻어 일찍이 정종(正宗)이 되었다.

윤순(尹淳, 白下)은 정미(精微)하고 출중하여 한 시대를 열었다.

이광사(李匡師, 道甫)에 이르러

전현(前賢)으로부터 깨달음을 얻어 晋과 漢나라의 글씨에 마음을 두었으며,

정법(正法)이 무너진 것을 개탄하고 시속(時俗)의 시비를 물어 바로잡고자 하였다.

근원을 헤아려 미묘함을 드러내었고 거짓을 끊고 참됨을 이었으며, 스승을 좇아 후학들을 열었다.

이로써 백세(百世)가 지나더라도 끝내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에 적는다.

 

 

 

 

 

 

 

 

 

 창암 이삼만(1770-1847)

 

본관 : 완산(完山, 全州) 문정공파 ‘승길(承吉)의 17대손

출생지 : 정읍현 동면 부무리(富武離=현재 정읍시 부전동 ‘부무실(富武室)’마을)

초명(初名) : 규환(奎煥, 奎奐, 奎桓)인데, 50세를 전후하여 삼만(三萬, 參晩, 參萬)으로 씀,

이후 삼만(三晩)으로 확정(三晩은 학문, 출사, 저술 3가지가 늦었다 하여 창암 스스로가 부른 이름이다)

자(字) : 윤원(允遠, 允元), 장원(長遠)

 

호(號) : 강암(强巖), 강재(强齋), 강재(剛齋), 창암(蒼巖)

창암은 호를 젊어서 ‘강암(强巖)’을, 중년 이후에는 ‘창암(蒼巖)’, 말년에는 ‘완산(完山)’이라 했다.

그가 창암(蒼巖)이라 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창암은 어느 날 문득 중국 하북성 석가장 근처에 있는 창암산(蒼巖산)이 떠올랐다.

창암사는 삐죽삐죽한 산봉우리와 깎아지른 듯한 절벽 등의 절경으로 유명하다.

창암산에는 석천(石泉)이 있는데 어떠한 가뭄에도 마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생각에 창암산의 넘치는 기세와 마르지 않는 석천의 필흥(筆興)이

한껏 부럽기만 하였다. 그는 이때부터 ‘창암(蒼巖)’이라는 호를 쓰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 <원교와 창암 ‘書狂’ 글씨에 미치다>, 최준호 저

 

창암의 삶

1770년 - 40대 후반 : 정읍 부무실 시절 - 서예 연마의 시기

50대 전후 - 60대 중반 : 전주 자만동 시절 - 중국 및 팔도 위상의 시기

60대 중반 - 78세 : 완주 공기골 시절 - 저술의 시기

 

■1770년 - 이지철과 김해김씨 사이에 4남1녀 중 차남으로 출생

■1786년 - 김해김씨와 결혼, 이후 1남2녀를 둠

■1787년 - 첫아들 태어났으나 어려서 사망

 

■1793년(24세) - 약초를 캐던 부친(52세)이 뱀에 물려 죽게되는 사건으로 창암은 뱀을 있는 대로 죽여

                        50년대 초까지만해도 전북일원에서는 매년 음력 정초 무렵 뱀막이로

                        ‘축사장군(逐蛇將軍) 이삼만(李三晩)’이라고 쓴 방(榜)을 마루기둥 아래쪽에 거꾸로 붙이는

                        가정이 많았다고 한다.

 

■1796년(27세) - 현존 묵적 중 최초의 ‘이공우연지묘비(李公友연之墓碑)’ 비문 글씨를 씀

■1800년(31세) - <화동서법(華東書法)>을 간행

                     - 이즈음 예도(藝道)의 동반자 명창(名唱) 심녀(沈女, 鄭氏)를 만남

 

■1820년(51세) - 이 시기를 전후하여 정읍에서 전주 옥류동(玉流洞)으로 이거(移居)

■1821년(52세) - 부인 김해김씨(55세) 죽음

                     - 양아들 렴(濂, 창암 셋째남동생 규원奎源의 아들) 출생

                       *이후 렴은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강화도 군대에 참전한 뒤 한양에서 죽음.

                        렴은 슬하에 두 아들(발, 평)을 두었으나 둘째 평은 친부인 규원의 양자로 가고,

                        첫째 발이 후사를 잇지 못하고 죽자 창암의 대가 끊어짐.

 

■1829년(60세) - 심녀(沈女) 정씨 죽음, 전주시 중노송동 선산 아래 ‘물왕멀’에 묻고

                       창암이 직접 ‘고명창심녀지묘(故名唱沈女之墓)’를 써서 묘표를 세워 위로함.

 

창암이 정읍 부무실 시절인 30세에 만나 60여세까지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누며

예인(藝人)으로서의 교감을 함께 나눈 명창 심녀(沈女)와의 애틋한 감정이 표현된,

창암 자신이 작성한 묘비문에서는 창암의 인간적인 면모를 고스란히 짐작할 수 있다.

 

<故名唱沈女之墓>

女姓鄭 初夫沈 善解音調 仍名沈女 從我三十年 同遊翰墨 尤能擅焉我

己丑之四月十日以病死葬吾先壟下路隅 鏤石而使不忘也 無臼工几又 毋人?旦勿

崇禎后四 己丑 月 日 李三晩 書竝撰. 

이 여인의 성은 정씨이고 첫 지아비는 심씨이다.

음률을 잘 하였으므로 그로 인하여 사람들이 그녀를 ‘심녀’라 불렀다.

나를 좇아 30년 동안 함께 문필(文筆)로 교유하였으며,

더욱이 나로 하여금 능히 이름을 떨치게도 하였다.

을축년 4월10일 병으로 돌아가매 나의 선산 아래 길가에 장사지내고

몇 자 돌에 새기어 잊지않고자 한다. 훼상이 없을진저.

숭정기원후 네 번째 기축년 월 일 이삼만 짓고 쓰다.

 

                     - 이후 묘비석은 유실되고 2000년대 ‘창암후실정씨지묘(蒼巖後室鄭氏之墓)’ 묘비와 함께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 아랫잣골 창암부부의 합봉(合封) 옆으로 이장함.

                     - 이 시기를 전후하여 창암은 완주군 상관면 공기골(孔洞)에 거주하며

                       죽을 때까지 자연귀의 탈속하여 ‘일운무적득필천연(逸雲無跡得筆天然)의 경지에 이름.

 

■1835년(66세) - 김공양성지묘비(金公養誠之墓碑) 비문의 글씨를 씀.

                        뒷면에 완산(完山) 이삼만이 해서로, 묘비 앞면에 경주(慶州) 김정희가 예서로 비문 작성

 

■1840년(71세) - 6월, 창암 서론(書論)인 <기오이적(機奧以跡)>을 집필함.

                     - 9월, 추사 김정희(55세)가 제주 유배길에 창암을 찾아와 만남

 

■1845년(76세) - <창암서적방우전(蒼巖書跡倣禹篆)>을 씀.

                        창암의 유년시절 부무실의 30년 고향친구 오윤지(吳允之)와의 만남을 감격해 하며

                        ‘여름날 새벽 정읍 부무실 근수정(近水亭)’에서 <창암서적방우전>을 써서 오윤지에게 줌.

                        이는 한국서예사의 정체성을 담보할 수 있는 ‘조선진체’ 연원의 근거가 되는 중요한 자료.

 

■1847년(78세) - 2월12일 전북 완주군 상관면 죽림리 공기골에서 죽음.

                        전북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척동리) 아랫잣골 선영에 묘소

**추사가 제주도 귀양에서 풀려나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들러 창암에 대한 흠모의 정을 나누려 했으나 이미 고인이 되었기에 그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창암의 묘비문을 써서 후손에게 남겨주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창암서예 궤적 Ⅰ(20, 30대~40, 50대)

왕희지와 그 전통을 이은 미불, 채양, 동기창 등 송(宋) 명(明)과

한호, 윤순, 이광사 등 조선의 여섯 대가이다.

31세 때 창암은 이들 필적을 텍스트로 자신의 글씨교과서인 <화동서법(華東書法)>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적어도 창암의 3,40대는 이들을 전적으로 소화해내고 있다.

 

 

 창암서예 궤적 Ⅱ (60, 70대)

<대우전(大禹篆)>과 <예학명(瘞鶴銘)> 그리고 김생(金生)의 글씨다.

‘옥류동시대’라 명명할 50대에 들어 본격 실험, 소화되는 이들 텍스트에서

창암 서예의 ‘창고(蒼古)’한 아름다움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이것은 창암 자신이 ‘서도(書道)는 한(漢) 위(魏)가 근본’이라고 말한대로

왕희지 이전으로 돌아가 비(碑)를 공부해야 한다는 당시 동아시아세계 서예 흐름과 궤를 같이 한 것이다.

 

 

- 호남 명필 창암, 추사와 쌍벽 이룬 서예 거봉(동아일보 기사)

 

창암이 회갑 때 쓴 서문에서 창엄은 다음과 같이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글씨쓰기를 즐겨 몇 해 동안 필가(筆家)에 드나들었으나

그 참뜻을 알지못해 항상 탄식했다. 중년에 충청도에서 노니다가

우연히 晋나라사람 주반(周班)이 쓴 비단 바탕의 글씨를 얻어 唐나라 때의 명필에 못지않다고 느꼈다.

또 서울에서 유공권(柳公權)의 진적(眞跡), 진필(眞筆)을 얻게 되어 옛사람의 붓을 다룬 뜻을 깨닫고,

만년에는 신라 김생(金生)의 글씨를 얻어 옛사람의 글씨 획이 실하고 슬기로움을 알았다.

이에 세 대가(大家)의 글씨를 밤낮으로 눈에 익히고 만번이나 써봤으나

재주가 모자란 탓인지 그 진경에 이르지 못함을 한탄했다.

더러 글씨를 청하는 분이 있었으나 매양 옛분의 심오한 경지에 미치지 못함을 크게 개탄했다.

그러나 이제 경향간에 어디를 가나 옛법칙을 지키는 이가 없고

거의 과거(科擧=科學) 글씨에만 힘을 쓰고 있으니 나같은 사람의 글씨는 도리어 쓸모없을 것이다.

다만 세상사람이 옛것을 배우지 아니하고 더욱 속된 글씨만 쓴다면

금석(金石)의 글씨와 큰액자는 누가 써야 하겠는가”

 

“해서(楷書)는 서 있는 것 같고, 행서(行書)는 걸어 다니는 것 같고, 초서(草書)는 달리는 것 같을지니

다만 해서(楷書)를 쓰는 뜻으로 조용히 굴리어 운필하면 무한한 취미를 얻게 될 것이다.

초서(草書)의 생김새는 봄철에 백로가 고기를 엿보는 것 같고, 가을철에 뱀이 구멍을 찾아드는 것 같고,

또는 장사가 강철을 펼치는 것 같고, 또는 연이 춤추고, 봉이 날고, 장사가 칼춤을 추고,

바람에 나부끼는 잔디 같고, 꺾어진 대나무 같고, 나부끼는 난초잎 같을진대

대개 이러한 기상을 뛰어난 운치라 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를 흠모하는 호남지방의 묵객들은

“벼슬이 없어 양반사회에서 백안시당했기에 높이 평가받지 못했으나

호방한 ‘행운유수체(行雲流水體)’는 틀에 짜인 듯한 추사의 필법을 앞지른다”고 입을 모은다.

창암은 생전에 명필로 이름을 떨쳐 넉넉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는데도

정읍군 내장면 부전리 불무골과 완주군 상관면 공기골에서 제자를 가르치며

청빈하게 살다가 생애를 마친 것으로 전해지며, 묘소는 완주군 구이면 하척(下尺)마을에 있다.

 

 

 

 창암서예 궤적 Ⅲ

流水體 미학과 정신경계

 

우리가 통칭 ‘유수체(流水體)’라고 부르는 창암 글씨는 획을 흘려쓰는 행초서(行草書)에서 잘 나타나며

6,70대 ‘공동(孔洞)시대’에 들어 농익어 나온다.

물론 그 실체는 3,40대와 50대의 왕법(王法)과 그 이전의 漢, 魏 계열이

일생을 통해 극공(克工)으로 혼융되면서 흘러내린 것이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과 정신세계는 창암의 말대로 ‘통령(通靈)’의 경지이고,

작품이 증언하는 대로 ‘흔적도 없고 있는 그대로(逸雲無跡 得筆天然)’인 것이다.

글씨에 녹아든 일생과 자연스러움[天然], 꾸밈없는 소박함[拙樸], 개성 짙은 우리 정취[土俗],

강렬한 생명력[力動]으로 자리매김 된 창암 이삼만의 예술세계를 나타낸다.

중국 위진시대와 통일신라 김생의 서법을 섭렵한 뒤

물결치듯 유려하면서도 예스러운 필법을 농익은 경지로 펼쳐낸 농암은

연인을 넘어 예도(藝道)의 동반자였던 판소리 명창 심씨와 만나 교유하면서

판소리 가락의 운율이 스며든 유수체의 미학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창암 서예는 글씨의 근본을 자연에서 구했기에 졸박미(拙朴美)가 느껴진다.

가늘고 굵은 선, 곡선과 직선, 먹의 농담 등 서로 반대되는 음양 요소가 한 화면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평생 붓 하나로 살아온 창암은 숱한 작품을 남겼는데 처지는 작품 없이 수준이 고르다.

인상적인 것은 매 작품에 관향, 이름, 자, 호를 빠짐없이 남기고 종이 낱장마다 도장을 찍어

작가의 존재를 뚜렷하게 각인시켰다.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을 강하게 드러낸 흔적이자

창암의 글씨가 곧 ‘完山 李三晩 字允遠 號蒼巖’ 처럼 그의 자화상임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창암서결(蒼巖書訣)

창암 71세(1840) 때 저술된 서예이론서 <서결(書訣)>은

‘총론’ ‘영자팔법’ ‘결구법’ ‘집필법’ ‘논습자지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자연에서 글씨를 구하는 창암의 확고한 서예관이 피력되어 있는데

“서(書)는 자연에서 비롯되어 음과 양이 생겨나고

형, 세, 기가 붓에 실려 부드러움과 거침, (바름과) 기괴함이 생겨난다.

세차고 빠름, 느리고 껄끄러움 이 두 가지 오묘함을 터득하면 서법(書法)은 끝난다”고 단언하였다.

 

 

 

 

 

 창암 이삼만의 서예

 

창암(蒼巖)의 삶과 예술세계를 보여주는 미공개 걸작을 비롯해 서예작품 100여 점이 선보인다.

특히 그를 대변하는 '유수체(流水體)'는 주목할 만한다.

창암 이삼만(1770년 9월 28일~1847년 2월 12일)은 이른바 ‘유수체(流水體)’로 필명을 떨친 작가로

17세기의 옥동 이서, 공재 윤두서, 18세기의 백하 윤순백하 윤순(白下 尹淳, 1680∼1741),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1777)로 이어지는 소위 '동국진체'를 계승하고 이어

19세기 조선후기 서풍(당시 중국 청나라에서 들어온 새로운 조류의 서예흐름과는 달리

조선의 전통적인 서풍에 더 무게를 둔 서예유파)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그의 작품은 조선후기 원교 서예의 주요활용 영역이 서첩에서 비문으로 전환되는

19세기 서단의 흐름을 실천한 인물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창암보다 16년 후에 태어난 동시대 인물인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에 가려

그 예술성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창암 선생은 평생을 전북(전주, 정읍 중심)지역에서 생활하였다.

어린 시절 8세 때, 生을 달리한 당대의 명필이었던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1777)를 흠모하여

그의 글씨를 흉내내기도 하였다. 글씨에 열중하여 포(布)를 누벼가면서 연습하였다.

부유한 가정에 태어났으나 글씨에만 몰두하여 가산을 탕진하였고

병중에도 하루 천 자씩 쓰면서 ‘벼루 세 개를 먹으로 갈아 구멍을 내고야 말겠다’고 맹세하면서

몽당 붓을 버린 것에 마당에 무덤이 될 만큼 쌓였고 밑창이 난 벼루가 몇이나 됐으며

앞마당의 연못물이 언제나 시커멓게 변했다는 정도의 수련을 거쳤다.

또 글씨 배우기를 청하면 점 하나, 획 하나를 한 달씩 가르쳤다고 한다.

서예와 문학에 대한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아 글씨를 배우려는 후학을 위해

1800년(31세) <화동서법(華東書法)>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창암 선생은 특히 새로운 도구 재료를 마다하지 않았던 실험 작가로 유명하다.
칡뿌리로 만든 갈필, 대나무로 만든 죽필, 꾀꼬리털로 만든 앵우필과 같은

특이한 도구나 옷감으로 작품을 제작했다.


창암의 독특한 글씨 철학은 그가 59세에 쓴 서론 <기오이적(機奧異跡)>에 잘 나타난다.

 

"서법은 먼저 팔을 들어 장심(掌心)이 비어 있는 상태로 붓을 쥐어

기혈이 종이 위에 주어져야 하며…

곧 모든 서체가 이를 좇아 그 덕을 신명나게 이뤄낼 것이다"

 

 

라고 한 이른바 창암 서법의 5대 원칙이 그것이다.

또 창암은 글씨를 씀에 있어 인품(人品高), 고법(古法, 옛법), 극공(極工, 온 힘을 다 바쳐 공부함),

통영(通靈, 신령스러운 경지) 등의 네 가지를 강조했다.

결국 집필법과 운필법, 영자팔법, 결구법 등의 학서론이 정립된다.

 

창암 71세(1840) 때 저술된 서예이론서 <서결(書結)>은

'총론' '영자팔법' '결구법' '집필법' '논습자지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자연에서 글씨를 구하는 창암의 확고한 서예관이 나타나있는데

"서(書)는 자연에서 비롯되어 음(陰)과 양(陽)이 생겨나고,

형(形), 세(勢), 기(氣)가 붓에 실려 부드러움과 거침, (바름과) 기괴함이 생겨난다.

세차고 빠름, 느리고 껄끄러움, 이 두 가지 오묘함을 터득하면 서법(書法)은 끝난다"고

단언하였다.

 

 

 

** 처음 붓을 댈 때는 붓끝을 지극히 뾰족하게 하며,

붓을 돌려 왼쪽으로 향하여 긴밀하게 탄력을 붙인 후 아래 모퉁이에 이르러 붓을 멈추고

위쪽으로 붓을 끌어올리며, 붓을 뒤집어 꺾어 다시 아래 방향으로 내려왔다가 위로 이어간다.

이러한 동작은 모두 손목을 써서 오르내려야 하며, 손가락으로 돌려서는 안된다.

잠두(蠶頭)에 이르러서는 또한 손목을 올렸다가 내리고 끝맺어야 한다.

이 이치를 자세히 탐구하고 여러 날 마음 속으로 생각하여 손이 따르게 되면

단지 '一'자 쓰는 법만으로도 오그리면 점(點)이 되고 세우면 직획(直劃)이 되며,

비슷듬히 기울이면 과(戈)가 되고, 삐치면 파(波)가 되니 팔법(八法)은 모두 '一'자에서 출발한다.

만약 이 법을 스승에게 배운다면 열흘이면 알게 되어 일생 쓸 수 있다.

 

 

창암은 "글씨에는 뼈가 있어야 한다"고 자신의 서예관을 견지했다.

"빼어난 소리는 그 흔적이 없고 빼어난 글씨는 천연 그 자체다"라고 말한다.

이 작품에서 나타난 것이 창암의 '유수체(流水體)'다.

흐르는 물과 같은 유수체는 독자적인 서체로 높이 평가되고 있는데

붓이 노래하고 먹이 춤추는 듯한 유수체는 물처럼 바람처럼 얽매임 없는

창암의 자연스러운 서예관의 결실이다.

 

창암의 서예철학은 "글이 신령스러운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인품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며, 책을 많이 잃고, 시를 많이 지으며 몸을 소중히 지켜야 한다.

스스로 만족치 말고 더욱 미치고, 더욱 도탑고, 견고하게 해야 한다"라고 가르친다.


창암은 죽기 1년 전인 1846년에 제자인 듯한 원규에게

"‘매일 맑은 새벽 서법을 한번 읽어 보아라. 그리고 매일 해서 50자를 쓰라.

(每日淸晨書法一遍 每日寫楷五十字)는 교훈을 남겼고

남에게 거만하지 말고 책을 많이 읽으며 시를 많이 짓고 몸을 소중히 하라

(勿傲人 多讀書 作詩句 持身以重)"고 가르쳤다.

그는 또 "서도(書道)는 자연으로부터 근원해 다시 자연으로 귀의하는 것이다"며

'성인정신'을 내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창암은 글씨와 자연과의 하나를 지향한다. 

 

 

 

조선 후기 3대 명필인 창암 이삼만((蒼巖 李三晩 1770∼1847)

 

창암은 조선말기인 19세기 호남서단을 평정하며 유수체로 필명을 떨친 인물이다.

서울의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 평양의 눌인 조광진(訥人 曺匡振 1772~1840)과 더불어

당대 3필(三筆)로 통했다.

 

추사 김정희가 천재였다면, 창암 이삼만(1770~1847)은 서광(書狂)이었다.
창암의 작품 97점이 ‘창암 이삼만-물처럼 바람처럼’ 특별전을 통해 한 자리에 전시된다.

추사에 비해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창암의 예술세계를 공개한다.

창암과 추사는 19세기 동시대에 활동했지만 서체의 성격이 대조적이다.

추사의 서체는 건축미와 인공미를 풍기고, 창암의 그것은 인위성을 배제한 무위자연적이다.

또 창암은 행·초서에서 자신의 서체를 완성했고,

추사는 예서체가 대부분이며 서한예서체로 서체를 완성했다.


특히 창암은 위진시대 고법과 우리나라 선대 서예가들의 서체를 필묵으로 녹여내면서

유수체라는 자신만의 필법을 확립했다.

유수체(流水體)의 미학은 주자가 쓴 ‘사시사’와 정이가 쓴 ‘언잠’에 잘 나타난다.

활동상도 대조적이다. 추사는 청나라 선진문물을 수용한 개혁적인 유학파다.

당대 이름난 학자인 완원과 옹방강 등에게 금석학과 실학을 배우고 돌아왔다.

그러나 창암은 전라도 산골에서 자기 수련과 공부로 조선의 고유색을 풀어낸 국내파였다.

추사는 규장각 시교·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병조참판 자리까지 오르며 부귀영화를 누렸다.

반면 창암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평생 서예에만 몰두했다.

31세 때 서예 교과서격인 <화동서법>을 펴냈으며 51세를 전후해 전주 옥류동에서 왕성한 활동을 했다.

60대 후반에는 전주 공기골로 내려가 서예에 침잠했다.

 

추사의 삶과 예술을 알기 쉽게 풀이한 유홍준의 『완당 평전』에

추사의 위대성을 돋보이기 위해 창암을 그저 무대 장치 쯤으로 소개한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창암의 글씨를 보면서 완당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 세련된 모더니스트가 한 점 거리낌도, 부끄러움도 없이 풍기는 촌티 앞에 당혹했을

희한한 풍경을 나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완당의 눈에 이쯤 되면 촌티도 하나의 경지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완당은 할 말을 잊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윽고 완당이 입을 열었다.

“노인장께선 지방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

그러자 창암의 제자들이 수모당한 스승을 대신하여 완당을 두들겨팰 작정으로

몰려나가려고 하니 창암이 앞을 막으면서 말렸다고 한다」

 

 

1840년(창암 71세) 가을, 55세인 추사 김정희가 윤상도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제주도 귀양길에 전주를 지나게 되면서 한벽루에서 창암과 상봉한다.

창암 소문을 들은 추사가 창암에게 정중히 예를 갖춰 하필(下筆)을 청하니

창암은 “붓을 잡은 지 30년이 되었으나 자획을 알지 못합니다(操筆三十年 不知字劃)”고 겸손해하자

추사가 간곡히 한 번 더 예를 갖추니 ‘江碧鳥逾白 山靑花欲燃 今春看又過 何日是歸年’을 일필휘지였다.

 

                          江碧鳥逾白   강물이 푸르니 새가 더욱 희게 보이고

山靑花欲燃   산이 푸르니 꽃 빛이 불타는 것 같구나

今春看又過   금년 봄도 보건대 또 속절없이 지나가나니

何日是歸年   어느 날이 바로 고향에 돌아갈 해인가?

 - 두보의 오언절구

 

이를 지켜보던 추사는 “과연 소문대로이십니다(名不虛傳)!” 라며 감탄해마지 않았다.

16년의 나이 차를 뛰어넘은 진정한 두 대가(大家)의 처음이자 마지막 생전의 상면(相面)인 것이다.

 

추사가 9년간의 제주도귀양(1840-1848)을 마치고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에

다시 전주에 들렀을 때는 창암은 1년 전 세상을 떠난 뒤였다. 이때 추사는 애석해하며

완주군 구이면 창암 묘소 앞에 <名筆蒼巖完山李公三晩之墓>라는 묘비 전문과 함께

‘公筆法冠我東老益神化名播中國(공의 필법이 나라에서 최고봉을 이루었고 나이가 들면서

입신의 경지에 들어 명성이 중국에까지 미쳤다)’ 이라는 묘비 후문을 남겼을 만큼 높이 평가했다.

 

그런데 실제로 전주 일대에 전해지는 추사와 창암 사이의 에피소드는 좀 다르다.

1840년 9월초 곤장 36대를 맞은 뒤 추사는 제주도 유배 길에 올라

20일이 지난 9월 하순에 전라도 해남에 도착했다.

그리고 바람이 잦기를 기다려 27일 제주로 가는 배에 올랐다고 했다.

그러니까 9월 초순에서 9월 하순까지의 사이에 추사는 이삼만이 있는 전주를 지나간 것이 된다.

 

이때 추사는 이삼만을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유는 전하지 않으나 장독으로 인한 몸의 형편도 그렇고

부당한 옥사 때문에 부글부글 끓었을 불편한 자존심도 한가로움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8년뒤인 1848년 12월초 유배에서 풀려난 추사는 전주를 지나면서 창암을 만나보려 했단다.

그러나 그가 이미 죽고 없다는 말을 듣고

추사는 생전의 창암을 만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고 전한다.

 

전주 에피소드에는

마지막으로 제주에서 풀려날 무렵의 추사가 창암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는 해석이 덧붙는다.

어쨌든, 창암과 추사는 역사위에 하나의 점만 남기고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내내 창암은 추사의 무게 속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기회를 놓치고 있었다.

 

 

창암연구자 - 조인숙 박사

창암선생이 한국 서예사의 정체성을 세운 장본인이란 사실은

창암선생 진흥회이사장 조인숙 박사의 집요한 연구와 선생의 발자취를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 발굴에서

비롯됐다. 조인숙 박사는 서예학을 공부하던 학창시절부터 창암선생의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됐고,

10여 년째 창암선생 서예세계의 연구와 함께 이를 계승하는데 몰두해 왔다.
그녀의 창암에 대한 연구와 발굴을 향한 발걸음은 우선 지난해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인

'창암 이삼만 서예술 철학연구'에서 역사적 근거를 제시하는 결실을 맺게 됐다.
조 박사의 논문에 따르면 "한국 서예 역사상 현존하는 문헌이나 묵적(墨跡)의 흐름은

창암선생이 정체성을 만들어 놓은 데서부터 비롯된다"고 단정지었다.

또한 "중국의 영향을 받은 한국 서예사가 중국 전통서예 인물들을 거쳐

19세기 창암으로 인해 그 절정을 이루게 되고,

이는 한국서예사의 맥이 하나의 '서맥(書脈)'으로서 가치가 충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평가했다.


조 박사는 특히 "창암은 그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운 이론과 실천을 겸비함으로써 서도세계의 지평을

넓히면서 창암체를 낳았고, 마침내 '조선진체'란 결정체로 거듭나게 된 것"이라 했다. 

"이는 중국적 서풍(書風)의 모방과 필사에 머무르지 않고 한국적 진경정신(眞景精神)에 입각해

우리 것을 우리 서취(書趣)에 맞게 종이에 옮긴 문화 독립적 사실"이라며

조선진체의 역사적 가치를 평가했다.

창암선생의 행적과 명성은 정읍 현지인들에게도 심심치 않게 전해지고 있다.
정읍 송산동에 사는 이의성(83)씨가 전하길

"창암선생의 친필 약재 목록이 당시 약력시장인 대구의 중국 상인들에게까지 전달됐고,

명필의 주인공을 직접 대면하고 싶다면서 엄청난 비단을 싣고 방문한 것을 고서에서 직접 봤다"고 했다.

"그 고서에는 중국 상인들이 가져온 비단은 50세를 갓넘어 요절한 창암선생 부인은

몸에 걸쳐보지도 못했다는 안타까운 사연도 적혀 있었다"며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전하고 있다.


조인숙 박사는 우선 민선5기 정읍시 공약사업에 맞춰 그동안 학계에서 논란이 돼왔던

창암선생의 출생지를 확인하는데 성공했다. 전국 각지 발물관과 기념관에 소장된 사료를 근거로

창암의 출생지가 정읍이란 사실을 확인해 복원작업의 기대감을 높인 것이다.
창암선생 진흥회는 생가터가 있는 부무실 마을이 창암 선생의 출생지로 공식 확인됨에 따라

정읍시 지원을 받아 역사적 고증작업을 거쳐 공론화를 추진하는 등 대대적인 복원사업을 벌일 계획이다.
창암선생 서예사의 복원작업은 순천대박물관의 유작품과 자료에 대해 박물관측의 공증을 확보하고,

충남 예산 추사기념관의 유물 자료를 활용한 고증과 학술대회 등을 통해 공론화를 꾀한다는 전략이다.
아울러 부무실 마을에 창암 선생의 친필로 '석담(石潭)'이란 글자가 새겨진 암석과

근수정 생가터 복원 작업 등을 거쳐 기념관을 건립, 체계적인 선양 사업을 지속할 예정이다.

 

 

창암 이삼만의 출생지는 정읍

 

창암 이삼만 선생은 추사 김정희(1786~1856), 눌인 조광진(1772~1840)과 함께 조선후기 3대 명필로

흐르는 물과 같은 서체인 '유수체(流水體)'를 완성하고

한국 서예사를 '조선진체'라는 주체적 서예사조로 정립한 인물이다.



정읍시는 이삼만 선생의 출생지가 정읍 내장상동 부무실이란 사실을

순천대박물관 등 3곳의 각종 기념관에서 관련 소장 유물을 잇따라 발견했다.

이삼만 선생의 출생지는 이번에 확인된 정읍 부무실 외에

주 활동무대로 알려진 전주 교동이란 설이 있어 학계에서 조차 논란이 돼 왔다.

하지만 이번 각종 기념관에 소장된 자료에서 이삼만 선생의 고향이 정읍 부무실이란 사실이 공식 확인돼

출생지 논란을 불식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삼만 선생의 출생지 확인 작업은 정읍시 문화예술과에서

전남 순천대박물관과 충남 예산 추사김정희기념관 및 경기 과천시청, 추사고택 과지초당 등

3곳에 소장된 자료에서 발견됐다.
순천대박물관에서는 이삼만선생이 1845년 76세 때 친필로 작성한 '창암서적 방우전' 작품에

부무실이 고향임이 확인됐다.

또 추사김정희기념관과 과천시청 추사고택 소장 자료에서도 정읍이 출생지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조선 후기 3대 명필인 창암 이삼만 선생의 출생지가

전북 정읍이란 역사적 고증이 잇따라 확인돼 복원작업을 벌일 계획이라고 3일 밝혔다.

사진은 창암 선생의 생가터로 추정하고 있는 정읍 내장상동 부무실 마을 근수정의 모습

(사진=정읍시 제공) shong@newsis.com 2011-03-03

 

 

정읍시는 부무실 마을이 창암 선생의 출생지로 공식 확인됨에 따라

역사적 고증 작업을 거쳐 공론화를 추진하는 등 대대적인 복원사업을 벌일 계획이다.
특히 정읍 내장상동 부무실 마을에 창암 친필로 '석담(石潭)'이란 글자가 새겨진 암석이 있는 점과,

이 암석이 당초 이 마을 근수정 생가터에 있었던 사실도 출생지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창암 선생 친필로 '석담'(石潭)이란 글자가 쓰여진 암석. (사진=정읍시 제공) 2011-03-03

 

창암 이삼만 유필각자(遺筆刻字) 암석 - '석담(石潭)'

본래 부무(富武)마을 저수지 위 계곡에 있었는데

칠보~내장간 지방도 개설공사로 인해 훼손될 우려에 처하자

1993년 현재의 위치(정읍시 부전동 614-1)로 이전한 것이다.

 

 

정읍 부무실 마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남녀노소 모두가 창암을 이웃집 어린애 이름 부르듯 존칭 없이 창암을 얘기할 정도로

창암과의 친숙한 부무실의 정감들을 피력하고 있으며,

현 부무실에는 창암이 나서 성장한 근수정(近水亭)이라는 처소와

창암이 목욕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석담(石潭)이라는 연못이 지금도 존재하는데

창암이 새긴 ‘석담(石潭)’의 각석 자리, 근수정(近水亭) 터의 동일한 지점은

6·25 때 불타버린 무계정사(武溪精舍) 터가 있는 계곡에 자리하고 있다.
- 2010-12-20 newsis

 

 

 

 

<창암(蒼巖) 이삼만과 추사(秋史) 김정희>

중국은 땅덩어리가 하도 넓어 희귀한 한약재가 많았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중국산 한약재인 '당재(唐材)'를 아주 귀물(貴物)로 간주했다.

행여나 북경으로 들어가는 인편에 끈이 닿으면 '당재'를 구해달라는 부탁이 많았다.

전주의 이름난 명필이었던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 1770~ 1847)도

자기가 필요한 당재를 구하기 위하여 한지에 붓으로 그 한약재의 이름들을 쭉 써주었다. 

북경의 한약방 주인은 조선에서 온 약재 주문서를 보고 깜짝 놀랐다.

명필이 쓴 글씨였기 때문이다.

"이게 누구 글씨냐? 약값은 안 받아도 된다. 그 대신 이 글씨는 나를 주고 가라!"

창암과 추사는 대조적이다.

추사는 돈 있는 교목세가(喬木世家) 출신이었지만, 창암은 지방의 한미한 집안이었다.

추사는 20대에 이미 북경에 가서 옹방강이나 완원(阮元) 같은 당대의 대가들로부터

서법(書法)에 대한 지도를 받을 수 있는 귀족이었지만,

창암은 시골에서 별다른 스승 없이 독학을 했던 '잡초바둑'이었다고나 할까.

추사가 제주도로 귀양가던 길에 전주에 들러 창암을 만나 서로의 글씨를 겨뤄보았다.

추사는 16년이나 연상이었던 창암의 글씨를 보고

'조필삼십년(操筆三十年)에 부지자획(不知字劃)이라'고 혹평하였다.

'30년 붓을 잡았다고 하지만 획(劃)도 하나 못 긋는구나!'

창암 제자들이 추사를 두들겨 패려고 했지만 창암이 가만히 두라고 말렸다.

추사는 털이 짧은 중국식 붓을 썼지만, 창암은 터럭이 아주 긴 붓을 사용했다.

창암은 꾀꼬리 꽁지털, 칡뿌리로 만든 갈필(葛筆), 앵무새 꽁지털과 같이

길고 아주 부드러운 재료를 사용한 붓으로 글씨를 썼다.

추사체는 획이 곧고 강직하다. 장검이나 돌비석 같은 직선의 기세가 느껴진다.

반대로 창암의 글씨는 '유수체(流水體)'라고 해서 물이 흐르는 것처럼 유연하고 곡선적이다.

유수체를 연구해온 김진돈(52) 선생은

창암의 집이 전주천이 감아 도는 한벽당(寒碧堂) 옆에 있었기 때문에

항상 물을 보면서 서체를 궁리했을 거라고 본다.

물은 대단히 영적(靈的)이다. 인생과 시간의 유전(流轉)을 상징한다.

추사는 제주도 유배를 끝내고 오는 길에 다시 전주에 들렀다. 이때 창암은 작고한 뒤였으므로,

추사는 그의 묘비에 '명필창암이공삼만지묘(名筆蒼巖李公三晩之墓)'라는 글씨를 남겼다.

- 2011.01.16 조선일보, 조용헌 살롱

 

 

 

 

 

 

 

 

 국립전주박물관 미술실 특집전시 “전북의 서예”

 

: 2011년 2월 1일(화)부터 5월 22일(일)까지

 

 

전북의 여염집 치고 글씨와 그림 없는 집이 없을 정도로

전북사람들은 그림과 글씨를 사랑하였으며, 자연스레 안목 역시 높았다.

전북에서는 조선에서도 제일가는 뛰어난 서화가를 배출하였다.

 

 

본격적으로 전북의 서예가 주목받게 된 것은

추사에 버금가는 명필로 칭송받은 이삼만(李三晩)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의 문하에서 서홍순(徐弘淳, 1798-?), 모수명(牟受明, ?-?) 같은 당대의 명필이 배출되었다.

 

전북의 서예를 이야기하면서 김제를 중심으로 활동한 이정직(李定稷, 1841-1993)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를 중심으로 하나의 서단(書壇)이 형성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조선시대 전북의 서맥(書脈)은 면면히 이어져

20세기에도 석전 황욱(石田 黃旭, 1898-1993)과 강암 송성용(剛菴 宋成鏞, 1913-1999)과 같은

뛰어난 서예가가 나왔다.

단순한 글씨가 아니라 쓴 이의 성품과 정신까지 알 수 있는 ‘서예의 미(美)’에 빠져볼 수 있는 전시이다.

 

 

이번 특집전시에 소개되는 작품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조선 전기 순창 강천사(剛泉寺) 복원 보시(布施)를 권유하는 설씨부인薛氏夫人(1429~1509)의

권선문첩(勸善文帖, 보물 728호) 글씨에서는 단아했을 정부인(貞夫人)의 성품이 묻어난다.

그리고 추사(秋史)에 버금가는 명필로 칭송받은 이삼만(李三晩, 1770~1847)이 행초서(行草書)로 쓴

오언시, 그의 제자인 서홍순(徐弘淳, 1798~?)이 행서로 쓴 주자가례 등이 주목된다.

 

이 밖에도 이정직(李定稷, 1841~1910), 조주승(趙周昇, 1854~1903), 석전(石田) 황욱(黃旭, 1898~1993), 그리고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 1913~1999) 등의 작품이 함께 전시된다.

 

조선 전기 설씨부인에서 20세기 석전과 강암에 이르기까지

전북 서예의 흐름을 짚어본 이번 전시에서는

단순히 글씨의 아름다움을 뛰어 넘어 쓴 이의 성품과 정신까지 살펴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와 더불어 미술실에 상설 전시 중인 조선왕실 관련 서화들도 보존을 위하여 전면 교체 전시한다.

대표적인 교체 전시품은

영조가 쉰 살을 맞아 성균관에서 거행한 활쏘기 행사를 그린 대사례도(大射禮圖)를 꼽을 수 있다.


   

예향, 전북의 서화

 

전북지역의 서화가들은 선비 정신을 살린 문인화(文人畵) 전통을 이어왔으며,

시서화(詩書畵)를 겸비한 서화가들이 다양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여류문인이며 순창출신의 설씨부인(薛氏夫人, 1429-1609)이 남긴 그림과

글씨, 무주인 최북(崔北, 1712-1786)이 남긴 그림 등이 오늘날 전해지고 있다.

이밖에도 이 지역 출신의 여러 화가들이 기록에 있으나 남아있는 작품은 대부분 19세기 이후의 것이다.

 

창암 이삼만(李三晩)은 조선의 3대 명필로 꼽히고 있으며,

호남삼절(湖南三絶)로 알려진 석정 이정직(石亭 李定稷, 1841-1910)은 많은 제자들을 길렀다.

군산 임피(臨陂) 출신의 화가 낭곡 최석환(浪谷 崔奭煥, 1808-?)은 포도 그림을 잘 그렸으며,

초상화로 유명한 석지 채용신(石芝 蔡龍臣, 1850-1941)은 전북지역에서 활동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설씨부인(薛氏夫人, 1429-1509) 권선문첩(勸善文帖) - 보시(布施)를 권하는 글

 

 

이 글씨는 신말주(申末舟, 1629-1503)의 부인인 설씨부인(薛氏夫人, 1429-1509)이

성종 13년(1482) 7월 순창 강천사(岡泉寺) 복원불사의 시주를 권하면서 쓴 것이다.

조선시대 여류문인이 쓴 필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물 제728호에 지정되었다.

  

      

■석정 이정직(石亭 李定稷, 1841-1910)이 쓴 글씨

 

光還與水(광환여수) - 시간은 물과 같이 흐른다. 

 

김제를 대표하는 명필가인 석정 이정진의 글씨를 모은 서첩이다.

이정직의 글씨는 옛 법(法)을 바탕에 두면서도 자신만의 서체를 창안하였다.

그는 김제를 중심으로 이른바 ‘김제서단(金堤書壇)’을 형성하여 전북지역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벽하 조주승(碧下 趙周昇, 1854-1903), 유하 유영완(柳下 柳永完, 1892-1953) 등이

그의 계보를 이었고 지금까지도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이정직의 '光還與水(광환여수)'

 

 

조주승의 '분향야우화도시(焚香夜雨和陶詩)'

 

     

■벽하 조주승(碧下 趙周昇, 1854-1903)이 쓴 글씨

 

분향야우화도시(焚香夜雨和陶詩) - 한밤 비 내리는데 향 사르니 도연명의 시와 조화를 이루네.

 

벽하 조주승(趙周昇, 1854-1903)은 이정직(李定稷, 1841-1910)에게 배웠는데

대원군이 ‘창란벽죽(蒼蘭碧竹)’이라 칭송할 만큼 묵죽화에 능하였다.

오세창(吳世昌, 1864-195 )은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서 조주승을 가리켜

“30년 동안 글씨를 공부하였는데 안진경의 필체를 배웠고 묵죽에 능하였다”고 하였다.

이 글씨는 <순용근법첩 柱聯>이라는 제목의 시첩에 있는 글씨이다.

 

몽인 정학교(夢人 鄭鶴喬, 1832~1915)는 벽하의 글씨를 구양순에 비격(比格)했고

매천 황현(梅泉 黃玹, 1855~1910)은 그의 글씨를 평하여

“송재 송일중(松齋 宋日中) 뒤에 창암 이삼만(蒼巖 李三晩)이요,

다음엔 벽하 조주승(碧下 趙周昇)을 손꼽아 정족(鼎足)이다” 칭찬하여

아동천추(我東千秋)의 자하 신위(紫霞 申緯, 1769~1846)에 비견되었다.

 

붓을 다루는 솜씨에 있어서는 자하 신위도 그에 미치지 못했고 시가(詩歌)와

조금(操琴)에 들어서는 비록 악장(樂匠)이라 할지라도 그를 따르지 못했다는 세평(世評)이어서

그를 칭하여 벽하사절(碧下四絶)이라 했다.

대원군이 벽하의 난과 대(竹)를 보고 ‘창란벽죽(蒼蘭碧竹)’이라 칭송하였다.

그는 호남삼절로 칭하는 석정 이정직(石亭 李定稷, 1841-1910)의 가르침과

중국 답사에서 보고 느낀 점이 후일 그의 작품제작에 밑거름이 되어

특히 글씨를 쓸 때나 문인화의 화제를 쓸 때 남의 글보다는 대부분 본인이 지은 글을 화제로 삼았다.

스승인 석정과 매천도 그의 서화를 국유(國唯)의 솜씨라 하였고

석석벽죽(石石碧竹)’이라 하여 석정의 괴석도와 벽하의 대나무가 일품이라 하였다.

또한 오세창의 <근역서화징>에는

글씨를 공부한지 30년에 글자는 안노공(顔?公: 안진경)을 배웠고 대(竹)까지 잘 그렸다고 하였다.

 

 

■서홍순이 쓴 주자가훈(朱子家訓) 

 

서홍순(湖山 徐弘淳, 1798-?)은 함열 사람으로 이삼만에게서 서예를 배웠다.

그는 초서에 뛰어났으며 작은 글씨인 태서(笞書)를 잘 썼는데

글씨 획이 머리털처럼 가는 것이 특징이다.

전주 풍남문(豐南門)의 현판글씨 ‘호남제일성(湖南第一城)’을 쓰기도 하였다.

 

이 글씨는 주희(朱熹, 1130-1200)의 가훈을 쓴 것으로

주자가훈은 주자가 그의 후손에게 삶의 도리를 밝힌 글이다.

 

■<영정(寧靜) / 관구(觀龜)>

기초 모수명(箕樵 牟受明, ?-?, 또는 기산(箕山)의 글씨 

 

 

종이에 먹, 58×87㎝, 류두선 소장

 

관귀(觀龜)는 지명이나 정자 이름으로 여겨진다.

 

 

■황욱이 쓴 글씨

一以貫之(일이관지) - 하나로써 모든 것을 꿰뚫음

 

 

석전 황욱(石田 黃旭, 1898-1993)이 이재 황윤석(頤齋 黃胤錫, 1729-1791)의 7대손으로

어려서부터 선비가 가주어야 할 육예(六藝)를 익혔다.

석전은 본래 쌍구법(雙鉤法)으로 해서, 초서로 글씨를 썼으나

환갑 이후 찾아온 수전증을 극복하기 위해 손바닥으로 붓을 잡고 쓰는 악필(握筆)을 사용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논어(論語)』〈위령공편(衛靈公篇)〉과 〈이인편(里仁篇)〉에서  나오는 말로

'일이관지(一以貫之)'는  ‘하나로 꿴다’는 뜻이다.

 

어느 날 공자(孔子)가 증자(曾子)에게 말했다.

“삼(參)아, 나의 도는 하나로 모든 것을 꿰뚫고 있다(參乎吾道一以貫之).”

공자가 나간 후 제자들이 그 뜻을 묻기를 “무엇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이에 증자(曾子)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선생님의 도는 충(忠)과 서(恕)일 뿐이다(夫子之道忠恕而已矣).”

이 말을 명확하게 이해한 사람은 제자 가운데 증자(曾子)뿐이었다.

 

또 「위령공편(衛靈公篇)」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어느 날 공자가 자공에게 말했다. “(賜), 너는 내가 많이 배워서 알고 있는 사람으로 아느냐?”
자공이 대답했다. “그게 아닙니까?”
공자가 말했다. “아니다. 나는 하나로써 세상의 이치를 꿰뚫었느니라.”

 

공자는 당시 많이 안다는 이유로 성인으로 불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런 점에서는 자공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자공은 남들에게 말을 박식하게 해서 어떤 사람들은 공자보다 더 나은 것으로 알기도 했다.

이에 반해 증자는 그다지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실천 위주의 수양을 한 사람으로

공자가 일이관지를 말했을 때 금방 그 뜻을 알았다. 그러나 오히려 박식한 자공은 그렇지 못했다.

공자는 그에게 많이 배우고 아는 것보다 오직 하나의 진리로 꿰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준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희는 ‘박학다식이 성인의 근거가 아니고 꿰뚫는 것이 성인의 근거’라고 말한 바 있다.

결국 공자는 충(忠)과 서(恕)로 일이관지(一以貫之)한 것이다.

 

충(忠)과 서(恕)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게 있다.

주희는 ‘본래 선한 자기의 본성을 순수하게 발현하는 것을 충(忠)이라 하고,

자기를 미루어 다른 것에 미치는 것을 서(恕)’라 하였다.

또한 왕부지(王夫之)는 ‘자기의 이치를 다하면 세상의 이치를 관통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주례소(周禮蔬)」에서는 ‘나를 미루어 생각하여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 헤아리는 것으로

만물의 이치가 모두 파악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 모두가 장자의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남을 사랑하면 인(仁)을 다한다.’는 말과 통하는 것이다.

서(恕)는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도덕률로

전통적으로 해석해오고 있지만, 최근에는 ‘자기가 하고 싶으면 다른 사람을 세워주고,

자기가 통하고 싶으면 다른 사람을 통달하게 하라.’는 적극적인 해석을 덧붙이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자기의 마음이나 이치를 다 하면 다른 사람이나 만물과 통(通)할 수 있는 이유나 근거는

‘사람의 본성과 사물의 이치가 하나의 근원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것으로 노자는 ‘사람이란 백(魄)이 일(一)을 품고 있는 존재’라 했다. 여기서 일(一)은

‘우주가 탄생하기 전의 혼돈의 원기(元氣) 또는 만물의 시원(始原)이 되는 도(道)’를 의미한다.

사람이나 만물은 한 근원에서 나온 존재들이므로

사물의 본질인 이치(理致)나 사람의 본성은 동질(同質)적인 것이다.

여기에 사람이 사물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는 근거가 있다 할 것이다.


공자는 충(忠)을 실천하여 내적으로 자기 완성을 기하였고

자신의 마음을 거울삼아 다른 사람이나 만물을 비추어 서(恕)를 실천했던 것이다.

 

즉, 일이관지는 공자의 사상과 행동이 하나의 원리로 통일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仁이며, 증자가 충(忠)과 서(恕)로 해석한 것은

충성과 용서가 곧 仁을 달성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고,

'한 번에 끝까지'라는 뜻으로 변형되어 쓰이기도 한다.

그 예로는 '초지일관(初志一貫)'이나 '일관(一貫)되다' 등이 있다.

 

 

■송성용이 쓴 글씨

博學篤志(박학독지) - 널리 배워 뜻을 도탑게 하다

 

 

강암 송성용(剛菴 宋成鏞, 1913-1999)은

이정직과 전우(田愚, 1841-1922)의 제자인 유재 송기면(裕齋 宋基冕, 1882-1956)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한학과 학문을 익히고 사대부의 품성을 길렀다. 아버지가 타계한 후에는

중국의 전통서법과 청대 비학파(碑學派, 비석에 새겨진 글씨로 서예를 배우는 학파)의 서법을

고루 섭렵하기도 하였다.

힘찬 필력이 돋보이는 문인화풍의 강암체(剛菴體)를 창안하였고 사군자도 두루 능하였다.

  

  

박학독지(博學篤志) 

‘널리 배워서 뜻을 돈독히 하라’ 

 

<명심보감(明心寶鑑)>에 “博學而篤志하여 切問而近思면 仁在其中矣”이 있다.

‘널리 배워서 뜻을 두텁게 하며 묻기를 절실히 하여 생각을 가까이 하면

어짐이 그 가운데 있다’는 뜻.

 

또 <논어(論語)>의 ‘자장편(子張篇)’에서 살펴볼 수 있다.

 

자하(子夏)가 말하기를

“날마다 모르는 것은 배우고(日知), 달마다 잘하게 된 것을 잊지 않는다면(月無),

배움을 좋아한다(好學)고 이를만하다”

또 말하기를 “널리 배워서(博學), 뜻을 돈독히 하며(篤志), 간절히 묻고(切問),

가까운 것부터 생각하면(近思), 인(仁)은 저절로 그 가운데 있다”고 하였다.

 

공자의 제자 중에 子夏는 특히 문학(文學)에 뛰어났다고 전한다.

여기서 말하는 문학은 예술의 갈래가 아니라 문헌연구,

곧 고증학(考證學)과 비슷한 분야라 할 수 있다.

고증학은 실천보다는 이론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子夏는 이에 알맞은 인물이었다.

 

날마다 배우기 위해서는 성실하지 않으면 안된다.

달마다 공부했던 내용을 잊지나 않았는지 점검하는 사람은 정말 배움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명말청초 때의 학자 고염무(顧炎武, 1613-1682)는 매일 매일 깨달은 내용을 지은

<일지록(日知錄)>은 여기에서 이름을 따왔다.

이어서 子夏는 학문 방법의 네 가지 기준, ‘博學’ ‘篤志’ ‘切問’ ‘近思’를 제시했다.

배움의 영역을 구별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뜻을 지니고, 의문을 간절히 가지고,

멀리서 찾지 않고 가까운 곳에서 찾는 자세를 갖춘다면

나날이 발전하는 학문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宋나라 때 주희(朱熹)가 여동래(呂東萊)와 같이 지었던 <근사록(近思錄)>은

여기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 남도일보 연재, 2010년 11월5일

 

 

■효종임금의 편지(御筆簡帖)

조선의 임금 가운데 명필가 중 한 사람인 효종(1619-1656)의 편지글들을 모은 서책이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아들로 봉림대군이었던 시절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병자호란으로 중국 심양에 강제로 머물게 되었다.

이 편지글들은 당시 중국에 온 사신들에 의해 전해졌던 것으로,

청나라에서의 구금 생활 중 느꼈을 여러 고충들이 담겨 있다.

편지 마지막에는 임금이 되기 전 이름인 ‘호(淏)’를 수결(手決)로 적었고,

그 위에 얇은 종이를 덧붙여 가렸다.

 

 

■영조임금이 쓴 글(英祖御製御筆)

이 책은 영조임금(재위 1724-1776)께서 임오년(壬午年, 1762, 영조 38) 정월 초파일에

기로소의 연로한 70세 이상의 문신(文臣), 공신(功臣)과 더불어 주강(晝講)하고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을 담은 서첩이다.

 

 

■공자묘(孔子墓圖)

작가미상, 조선, 종이에 색

 

 

 

 

 

공자묘는 공자(기원전 551-479)를 비롯한 중요 제자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말한다.

공자가 타계한 다음 해에 제자들이 공자가 직접 강의했던 은행나무 단에 대성전(大成殿)을 짓고

그의 위패를 모신 것이 시초라고 한다.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삼은 조선에서는 성균관(成均館)에 공자묘를 짓고

각 지방 향교, 서원 등에도 공자묘를 세웠다.

이 그림은 사당의 뒤쪽에 공자의 무덤을 그린 점으로 보아

중국 산동성 곡부(曲阜)에 있는 공자묘를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활쏘기(大射禮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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