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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전주박물관] 석지 채용신(石芝 蔡龍臣), 붓으로 사람을 만나다

Gijuzzang Dream 2011. 3. 5. 20:11

 

 

 

 

 

 

 

 

 석지 채용신(石芝 蔡龍臣), 붓으로 사람을 만나다

 

  • 장소 : 국립전주박물관 기획전시실
  • 기간 : 2011년 02월 15일 ~ 2011년 04월 03일(연장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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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은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에 명성을 떨친 화가 석지 채용신(石芝 蔡龍臣, 1850~1941)이

    타계한 지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채용신은 어진(御眞) 제작의 주관화사(主管畵師)로 활약하였고,

    후에는 집안의 연고지였던 전주 일원을 중심으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채용신은 초상화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서양화법과 사진술을 받아들여,

    전통과 혁신이 공존하는 자신만의 화풍을 완성해 낸 화가로 유명하다.


    이미 22세에 흥선대원군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이름을 떨쳤다.

    1886년 37세의 늦은 나이로 무과에 급제해 관직을 지내고 50세에 물러난 후 전주로 낙향했는데,

    이때 어진을 그리라는 명을 받는다.

    채용신은 1899년과 1900년 두 차례에 걸쳐 태조를 비롯한 역대 임금의 어진을 그렸으며,

    그의 솜씨를 흡족히 여긴 고종의 명을 받아 고종의 어진뿐 아니라

    기로소(耆老所) 신료 16명의 초상까지 제작했다.

    1941년 6월4일 만 91세의 나이로 전북 정읍 신태인 육리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붓끝에 담아냈다.

     

     

    채용신은 전래의 초상기법을 단호하게 탈피하여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채석지 필법’이라고 부를 만한 독특한 기법을 확립하였다.

    그것은 초상의 안면 묘사를 전통적인 선에 의존하지 않고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으로 나누어 무수히 자잘한 붓질을 거듭함으로써

    얼굴이 기본적으로 면(面)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실체감이 강하게 느껴지며

    의복의 주름 처리 역시 같은 면으로 처리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화면의 장식성에도 유의하여 흉배와 각대 등에 화려한 니금장식을 베풀고

    바닥에 깐 화문석도 장식효과를 최대한 살리고 있다.

    또한 인물이 공간 속에 자리하고 있는 3차원성을 적극적으로 인식하여

    과거와는 달리 인물의 배경을 어둡게 선염하는 등

    재료만 동양화일 뿐 기법 효과면에서는 서양화와 다름없다 할 수 있다.

     

     

     

    국립전주박물관은 서거 70주년을 맞은 그의 작품 세계와 생애를 조명하는 기획특별전을 마련하였다.

     

    전시는 모두 세 개의 주제로 구성되었다.

     

    <첫 번째 주제 - 그림을 업으로 삼다>

    관료출신인 채용신이 어진 제작에 참여하여 어진화사(御眞畵師)로

    고종의 신임과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게된 내력을 엿볼 수 있다.

     

    <두 번째 주제 - 화폭에 담은 전라도 사람들>

    전라도 지역에 정착한 채용신이 그린 이 지역 인물들의 초상화를 소개한다.

    그 중에는 간재 전우 등 채용신이 깊은 교분을 나눈 유학자와 우국지사들에게

    무상으로 그려준 것들도 있다. 1910년~30년대에 걸친 작품들에서 화풍 변화 양상과 함께

    초상화 인물들의 면모를 함께 살펴볼 수 있다.

     

    <세 번째 주제 - 다양한 그림을 그리다>

    채용신의 초상화 이외의 다양한 장르의 그림을 공개한다.

    그가 남긴 산수 · 화조 · 영모 · 무신도(巫神圖) 등 다양한 장르의 그림들을 공개한다.

    이를 통하여 채용신이 지닌 화가로서의 다채로운 재능과 역량, 섬세한 필치를 느낄 수 있다.

     

     

     

    - 채용신 -

     

    1850년 : 서울 삼청동에서 대대로 무관(武官)을 지낸 가문에서 채권영(蔡權永, 1828∼1901)의 3남 중

                 장남으로 태어남. 본명은 東根, 자는 大有, 호는 石芝, 石江, 定山 등.

     

    1886년 : 무과에 급제(科名이 龍臣이어서 본명인 동근을 용신으로 바꿈)

    1887년 : 그림에 재주를 보여 이 무렵 대원군 이하응의 초상을 그림

    1880년 : 전주이씨와 혼인. 자녀는 5남 3녀

                 그중 3남 상묵(尙默)은 일본어에 능통해 일본에 건너가 사진기술을 배워

                 서울에서 경성사진관을 열어 조선에서 사진관 개업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1891년 : 종5품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1893년 : 부산진의 수군첨절제사(종3품)

    1896년 : 전남 여수 돌산진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 1899년 무관직에서 물러남

     

    1899년 : 태조어진모사에 조석진(趙錫晉, 1853~1920)과 함께 주관화사(主管畵師)로 발탁

    1900년 : 태조어진 완성, 창덕궁 선원전에 봉안

                 4개월 후 선원전에 화재발생, 7祖 어진(御眞)소실, 태조어진과 6조 어진을 모사(模寫)함

                 이후 고종어진(御眞) 初本과 기로소당화첩(耆老所堂畵帖, 16명의 耆老臣像) 그림

                 고종에게 신망을 얻고 ‘석강(石江)’이라는 호를 하사받음

    ***『영정모사도감의궤(影幀摹寫都監儀軌)』

    1900년, 1901년(채용신의 나이 50, 51세),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채용신은 1899년과 1900년 어진모사 작업에 조석진과 함께 주관화사로 참여하였는데

    이 책은 그 작업을 자세히 기록한 의궤이다.

    1899년에는 어진을 봉안하는 창덕궁 선원전(璿源殿)의 태조어진을 새롭게 모사하였고,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선원전에 화재가 발생하여 불타 없어진

    7조(태조, 숙종, 영조, 정조, 순조, 익종, 헌종)의 어진을 1900년에 다시 완성하였다.

    1901년본 의궤에 따르면 채용신은 이때의 공로로 칠곡군수직을 하사받았으며,

    전(錢) 400냥, 양목(洋木) 1필, 면주(綿紬) 1필, 백목(白木) 2필, 거핵(去核) 5근을 상으로 받기도 하였다.

     

    1900년 :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정3품)

    1901년 : 부친상을 당해 전라도 금마에 머뭄

    1901년 : 칠곡군수

    1905년 : 정산군수 부임, 최익현을 만남

                 최익현(崔益鉉), 임병찬(林炳瓚) 초상 그림, 종2품이 됨

    1906년 : 을사늑약 이듬해 관직에서 물러나 전라도로 낙향하여 항일운동가 및 애국지사들과 교유

                 익산, 김제, 변산, 고부, 정읍, 나주, 남원 등지로 전전하면서 본격적으로 초상화 주문 제작

     

    1914년『봉명사기(奉命寫記)』와『전정산군수채공이력실기(前定山郡守蔡公履歷實記)』를 4월에 씀

    ***『봉명사기(奉命寫記)』

    1924년, 채용신의 나이 74세,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채용신이 어명(御命)을 받아 그린 여러 초상화의 제작 전말을 담은 책으로

    1914년 채용신이 직접 기록한 것을 훗날 권윤수(權潤壽)의 서문(序文)을 덧붙여 완성하였다.

    채용신은 1899년과 1900년 두 차례에 걸쳐

    임금의 초상인 어진(御眞)제작에 참여하면서 명성을 얻었고,

    1902년 당시 임금인 고종(高宗)의 어진과 기로소(耆老所) 16인의 초상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이 책은 화원(畵員) 선발부터 초상 제작까지의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화원으로서의 채용신과 궁중회화사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석강실기(石江實記)』

    1931년 이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채용신이 그린 초상에 대해 남긴 시문과 기록들을 담은 책이다.

    이중 채용신 자신이 쓴 글은 7편 정도이다.

    나머지는 대부분 초상을 주문하거나 초상을 감상한 지인들이 남긴 ‘화상찬문(畵像贊文)’들이다.

    주인공이나 주문자와 만나 그 인물에 대해 숙지한 후에 초상화를 그렸으며,

    그림을 완성하면 주문자는 채용신에게 감사의 표시로

    선물뿐 아니라 편지와 시문을 적어 보내오기도 하였다고 한다.

    최익현과 전우를 비롯한 이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들의 찬문이 포함되어 있어,

    채용신의 교유관계와 활동의 폭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1917년 : 초청받은 일본을 여행하면서

                 호산 서홍순의 증손자이자 채용신의 제자이던 서정민(徐廷珉)과 함께 일본인들의 초상화와

                 乃木 希典大將(노기 마레스케), 後藤新平(고토우 신뻬이) 등의 초상을 그림

     

    1920년대 이후 : 정읍 신태인 육리에 사는 교육자이자 거부(巨富)인 황장길(黃長吉)이 마련해준

                  거처에서 지내며 초상을 제작.

                  아들, 손자 규영(奎榮)과 함께 ‘채석강도화소(蔡石江圖畵所)’라는 공방을 운영.

    1941년 : 6월4일 전북 정읍군 신태인읍 용궁면(일명 육리) 장군리에서 세상을 떠남

     

    1943년 : 총독부 관리인 일본인 오다 쇼고(小田省吾, 1871~1953)의 주선으로

                 6월4일부터 10일까지 서울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유작전

      

     

     

     


     

    ■고종 어진(高宗 御眞)

     

    1902년 이후, 국립중앙박물관, 이홍근 기증

     

    채용신은 고종의 총애를 받아 1902년 고종 어진을 제작하였고,

    이에 고종은 그에게 ‘석강(石江)’이라는 호를 친히 내려주었다.

    이 고종어진의 밑그림을 바탕으로 채용신이 여러 모사본을 제작했던 사실이 기록에 전한다.

    이 작품 역시 그 중 하나로, 황색 곤룡포를 입어 대한제국의 황제임을 상징하였으며

    보(補)와 어좌 장식 역시 금박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양 무릎 사이에 ‘임자생 갑자등극(壬子生 甲子登極)’이라 쓰인 호패가 보인다.

     

     

    ■전우 초상(田愚 肖像)

      

     

      

    1911년(채용신의 나이 61세), 종이에 색, 국립중앙박물관

     

    전주 출신 호남 기호학파의 거두이자 항일운동가였던 간재 전우(艮齋 田愚, 1841~1922)의 70세 초상이다.

    전우와 채용신은 1906년 채용신이 관직에서 물러나 전주로 내려오면서 만나게 된 것으로 보이며,

    전우가 노년에 머물던 부안 계화도에 찾아가 초상을 그려줄 만큼 각별한 사이였다.

    이 초상은 현재 전하는 여러 점의 전우 초상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굵게 패인 주름과 매서운 눈매에서 유학자이자 항일운동가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석강실기』에는

    전우의 말년에 채용신이 그를 위해 고종어진을 그려주었는데 글자를 수정한 일화가 전한다.

     

    지금 산하가 빛을 바꾸고 임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구구한 이 마음은 다만 머리를 잡고 통곡하며 조용히 죽기만을 기다리다가

    폐하를 구천에서 절할 뿐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선제(先帝, 고종황제)의 환한 영정 얼굴을 선생의 절묘한 신필(神筆)의 모사(摹寫)

    솜씨로 아직 죽지 않은 미천한 이 신하에게 은혜를 베풀어 뵙게 해 주시다니

    이 뜻을 어찌 감히 잊겠습니까?

    영정의 전면에 '태상(太上)' 두 글자는 마땅히 '광무(光武)'로 바꾸어야 하겠고,

    후면의 '석지팔십옹(石芝八十翁)' 다섯글자는 격에 맞지않으니 삭제하고,

    다만 종2품(從二品) 아래에 신(臣)이라는 글자를 보태 넣어야 하겠습니다.

    살펴주심이 어떻겠습니까?

    변변치 않은 옷감으로 저의 정을 나타냅니다. 바라건대 살펴주시오. - 『석강실기』중 -

     

     

    ■박만환 초상(朴晩煥 肖像)

    1910년(채용신의 나이 60세), 비단에 색, 서울역사박물관

    '경술년 4월 상순 종2품 전군수 채석지가 그리다(庚戌四月上澣從二品前郡守蔡石芝寫)'

     

    정읍의 부농이자 의금부 도사와 삼례찰방을 지낸 창암 박만환(蒼巖 朴晩煥, 1849~1926)의 62세 초상이다.

    그는 항일운동에 자금을 제공하고 1903년 정읍에 영주정사(瀛洲精舍)를 세워 간재 전우와 함께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소외된 여성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30여 명의 양반가 자제들이 수학하였으며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가르침을 받기 위해 줄지어 기다렸다는 일화가 전한다.

    아들 박승규 역시 일왕 암살을 도모하고 항일운동을 위해 적극적으로 재정지원을 하는 등

    일제강점기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박만환은 정자관을 쓰고 한 손에 부채를 쥔 채 무릎 위에 올려놓았는데,

    손을 드러내지 않은 모습은 1910년대 초반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얼굴에는 다부지고 고집스러운 그의 면모가 잘 드러난다.

     

     

    ■유소심 초상(劉小心 肖像)

    1915년(채용신의 나이 65세), 비단에 색, 국립중앙박물관

     

    1915년 6월 초순에 완성한 유소심(劉小心)의 초상이다.

    화면 오른쪽에 주인공 유소심이 스스로 '자필(自筆)'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왼손에는 『성리전서(性理全書)』를 들고 오른손을 거의 가려져 있는데,

    이전까지 손을 소매 속으로 완전히 가렸던 것에서 손이 소매 밖으로 나오는 화풍의 변화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오른쪽 버선발을 드러내고, 옷주름에 하얀색 안료로 하이라이트를 주는 것 역시

    1910년대 중반부터 나타나는 특징이다.

     

     

    ■김제덕 초상(金濟悳 肖像)

    1921년(채용신의 나이 71세), 비단에 색, 국립민속박물관

     

    임실의 한학자 추수(秋水) 김제덕(金濟悳, 1855~1927)의 67세 초상으로,

    채용신의 작품 중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는 보기 드문 작품이다.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국권이 강탈당하자 임실의 익산(翼山)으로 들어가

    종암정사(鍾嵒精舍)를 짓고 석정 이정직(石亭 李定稷) 등 지역 문인들과 친분을 쌓았다.

    그 과정에서 채용신을 만나 교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문집 『추수사고(秋水私稿)』와

    채용신의『석강실기(石江實記)』에 수록된 채용신의 찬문과 윤영철(尹永哲)의 글을 통해

    이 초상이 1920년 10월17일 종암정사에 세 사람이 모였을 때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소서(小序)

    추수(秋水)와 같이 기특한 재주는 이미 노련하고, 석지(石芝)의 유명한 솜씨도 노련하다.

    모두 세간에 자주 왕래하지 못하고 세월이 쇠퇴하니 진실로 개탄스럽다.

    이 같은 사람들이 같은 세상에 살면서 서로 만나지 못한다면 그 한스러움이 어떠하겠는가?

    만약 훗날 한 사람은 살고 한 사람은 죽는다면 그 한스러움이 다시 어떠하겠는가?

    지금 다행스럽게도 공교롭게 만나 둘 다 탈이 없다. 한 가지 기이한 일이라 하겠으니,

    마치 그 사이에서 묵묵히 돕는 것이 있는 듯하다.

    생각건대 비단에 그려진 초상이 산과 연못의 파리함과 닮은 것은 더할 것이 없다.

    구름같이 떠도는 나그네의 교분을 지닌 나는 간략히 작은 예술 솜씨를 바쳐,

    그 부본(副本)으로 하기를 바라면서 글을 올려 드리니, 마땅히 크게 웃을 것이다.

    신유년(1921년) 소춘(小春, 10월) 17일에 윤영철이 절하고 올린다.

     

     

    특히 영정함에 봉안된 상태 그대로 전하고 있어 당시 제작경향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영정함 문 안쪽에 ‘고송수학(古松瘦鶴)’과 ‘벽오추월(碧梧秋月)’ 그림이 부착되어 있었다.

    채용신이 그린 추수 김제덕의 초상을 보관하던 영정함 문 안쪽 좌우에 붙어있던 두 폭의 작품으로

    채용신은 초상을 그리면서 종종 영정함의 문에 붙이는 그림을 그려주었다고 한다.

    화면 우측에 적힌 화제인 ‘고송수학 벽오추월’은

    모두 채용신이 김제덕의 초상을 그리고 적어준 화상찬문의 부분이다.

    소품이지만 옅은 담채를 가미한 점이나 채용신 특유의 아래로 쳐진 나뭇가지 표현 등에서

    그의 산수화 경향을 엿볼 수 있다.

     

    김추수상 찬(金秋水像 贊)

    고송수학 벽오추월(古松瘦鶴 碧梧秋月) : 고송과 여윈 학이오, 벽오동에 가을 달이로다

    교결휘광 소상미발(皎潔輝光 昭森眉髮) : 얼굴은 환히 빛나고 눈썹은 밝고 진하니

    일편고심 난이필설(一片古心 難以筆舌) : 옛사람의 마음 한 조각 붓이나 말로는 다하기 어렵구나.

     

     

    - 채용신은 부부초상화를 남겼는데 엄격한 신분질서 사회에서도 획기적인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기법상으로도 극세필을 사용하여 얼굴의 세부묘사에 주력하는 ‘채석지 필법’이라는

    혁신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주로 중인 출신의 도화서화원이 주문했던 초상화를 많이 그렸고,

    거기다가 부인과 함께 부부초상화까지 남겼으며, 양반이 아닌 여인상도 다수 그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채용신의 초상화는 미술관과 개인소장을 합쳐 총 60여 점에 이르고 있으며,

    이 가운데 여인상은 3점 가량이라고 한다.

     

     

    ■서병완 부부 초상(徐丙玩 夫婦 肖像)

    1925년(채용신의 나이 75세), 비단에 색, 가로 62㎝×세로 115㎝,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소장.

     

    조선말기 어의(御醫)를 지낸 익산출신 서병완(徐丙玩, 1868~1947)과 부인 남원양씨(南原梁氏, 1895~1926)의 초상이다. 이들은 채용신이 익산에 있을 때 가까이 지내던 이웃으로 알려졌다.

    병풍과 서책, 바닥 화문석 문양, 양발 옆에 드러낸 의자다리 등은 당시 채용신 작품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화면에 적힌 글에서, 초상을 제작한 시기는 을축년(乙丑年, 1925년) 계춘(季春, 음력 3월)으로 같지만,

    서병완초상이 부인의 것보다 조금 늦게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부인 초상의 화면 우측에 '병인 7월4일 별세 을축생(丙寅七月四日別世乙丑生)'이라 적혀 있어

    양씨부인이 세상을 뜬 후에 생몰년을 따로 기재한 것으로 보인다.

    채용신의 부부초상 제작 경향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부부초상화는 손자인 서인원씨에 의해 2001년 월간 <미술세계> 11월호에 처음 소개되었다.

       

     

    ■황장길 부부 초상(黃長吉 夫婦 肖像)

    1936년(채용신의 나이 86세, 채규영의 나이 24세), 비단에 색, 개인 소장

     

    정읍 신태인의 부호이자 교육자였던 황장길(黃長吉, ?~1958)과 부인(주낙례)의 모습을 그린

    보기드문 반신상의 부부 초상이다.

    뒷면에 적힌 글을 통해 황장길은 58세, 부인은 61세상임을 알 수 있다.

    화면에 적힌 ‘춘강(春崗)’은 채용신의 손자 규영(奎榮, 1912~1949)의 호로,

    채용신과의 합작으로 전해지며 지금까지 알려진 채용신의 작품 중 가장 후대의 것이다.

    황장길 부친과 채용신 부친의 각별했던 인연으로 황장길은

    정읍 신태인 육리의 자기집 옆에 채용신의 거처를 마련해주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곳이 채용신이 ‘채석강도화소(蔡石江圖畵所)’라는 공방을 두고 초상화를 제작하였다는 거처가

    바로 이곳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초상은 단순한 주문제작품이 아니라, 집안 간의 돈독한 인연으로 제작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 채용신은 초상 외에도 산수, 화조, 영모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통해

    화가로서의 다채로운 재능과 역량을 보여주었다.

    그의 공방이던 ‘채석강도화소’에서는 초상화 주문뿐만 아니라 산수화 병풍의 주문도 받았는데

    제작비는 전신초상과 같은 100원이었다.

    현재 남아있는 채용신의 작품 중 초상화 이외의 산수, 화조도의 대부분은 장식용으로 제작된 것들이다.

     

     

    정읍 태인에 머물며 제작한 <송정십현도>와 <칠광도>는

    그 지역에 장기간 머물며 마을의 성현들 모습을 실경과 함께 표현한 산수인물도이다.

    그의 산수도는 수묵을 위주로 한 전통산수화법과 달리 채색을 이용하여 다채롭게 표현한 것이 특징인데

    이는 그가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지도 않았고 정통화단 출신도 아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채용신은 실제 인물의 초상만을 그린 것이 아니라

    사당에서 봉안하는 성현도(聖賢圖)도 적지 않게 제작하였는데 성현(聖賢)에 대한 존숭감이 높았기 때문에

    공자, 주자, 관우, 안향 등을 모시는 사당에서 의뢰하면 거절하지 않고 제작해주었다고 한다.

    『석강실기』에도 진주의 도통사(道統祠)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성현의 초상을 제작해준 채용신에게 보내온 감사의 편지와 찬문(贊文)들을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 전주 남고산성(南高山城) 관성묘(關聖廟)를 비롯한 전북 일대의 사당에 그가 그렸다는 성현도들이

    많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안타깝게도 거의 대부분 도난당하여 행방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채용신의 성현도들은

    일반 인물초상화와 다르게 일반적인 사당의 봉안용 도상형식을 따르면서도

    채용신 특유의 인물표현과 복식을 혼용한 점이 특징이라 하겠다.

     

     

    송정십현도(松亭十賢圖)

    1910년(채용신의 나이 60세), 비단에 색, 119.0×83.4㎝,정읍 송산사(松山祠) 소장

     

     

     

     

     

     

     

     

     

     

     

    채용신은 정읍 태인 김직술의 집에 머물면서 초상화 이외에도 이 지역과 관련된 여러 그림을 남겼다.

    이 그림은 태인 고현동향약의 중심 인물들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이모한 것 중의 하나로,

    광해군 10년(1618)에 인목대비를 서궁에 가두자, 어지러운 시국을 개탄하며 낙향하여 초탈한 삶을 살았던

    열 명의 선비들이 태인 고현동 성황산의 송정(松亭)에 모인 모습을 그린 일종의 계회도(契會圖)이다.

    채용신의 작품인 만큼 계회도임에도 인물 표현들이 매우 상세하고

    인물들 각각의 개성이 드러나도록 묘사하였다.

    흘러내리는 옷 주름과 자세, 손모양 등은 채용신의 초상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표현이다.

     

    본래의 그림에는 계회도의 명칭과 참석자들의 명단까지 적혀있었으나,

    도난당했다가 되찾았을 때는 일부가 소실된 상태였다고 한다.

    이 그림은 송정(松亭)의 뒷편에 지은 영모당(影慕堂)에 보관되어

    오늘날까지 봄가을 제사를 지낼 때 사용되고 있다.

     

    이들은 이른바 일곱 명의 거짓 미치광이라는 뜻의 ‘7광’

    또는 10인의 어진 사람이라는 뜻의 ‘10현’이라고도 불렸다.

    7광은 스스로 부른 것이고, 10현은 후세 사람들이 부른 것인데 통칭 '7광 10현'이라 한다.
     

    7광(狂)

    월봉 김대립(月峰 金大立, 도강인), 오무재 김응윤(悟無齋 金應贇, 도강인),

    부휴재 김감(浮休齋 金堪, 안동인), 호암 송치중(壺巖 宋致中, 여산인), 난곡 송민고(蘭谷 宋民古, 여산인), 천묵 이상형(天默 李尙馨, 전주인), 관산 이탁(觀山 李倬, 전주인)

     

    10현(賢)

    오무재 김응윤, 부휴재 김감, 호암 송치중, 난곡 송민고, 관산 이탁,

    명천 김관(鳴川 金灌, 도강인), 췌세 김정(贅世 金鼎, 도강인), 만오재 김급(晩悟齋 金汲, 도강인),

    월오 김우직(月悟 金友直, 도강인), 월담 양몽우(月潭 梁夢禹, 청주인)

     

     

    칠광도(七狂圖)

    1910년(채용신의 나이 60세), 비단에 색, 127.7×83.4㎝, 정읍 송산사 

     

    <7광도>. 윗마을이 지금의 무성리 원촌. 아랫마을이 시산리 동편마을이다

                  (‘무성서원’ 등 큰 서원과 사당이 있어 ‘원촌’이라 불린다)

     

    17세기 초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위에 반발하였던 태인의 일곱 선비들을 그린 것으로,

    7광은 김대립, 김응윤, 김감, 송치중, 송민고, 이상형, 이탁을 가리킨다.

    <송정십현도>와 마찬가지로 정읍 태인지역에서 전해지던 그림을 모사한 것이다.

    채용신의 산수화에서 자주 보이는 부감시(俯瞰視)에 세필(細筆)로 이곳의 경관을 상세히 묘사하였다.

    상단의 성황산을 중심으로 오른편 송정(松亭)에 모여있는 7인을 그렸고,

    좌측 아래 무성서원을 비롯하여 각 경물들의 명칭을 적어 넣었다.

     

     

    ■무이구곡도 10폭병풍(武夷九曲圖 十幅屛風)

    1915년(채용신의 나이 65세), 종이에 색, 각 107.4×37.3㎝, 국립중앙박물관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는 중국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노래한 주자(朱子)의 시(詩)에서 유래했으며

    시대에 따라 주문자와 화가의 성향이 반영되면서 다양하게 그려졌다.

    화면 상단에 주자의 무이구곡가 10수가 거꾸로 쓰여 있는 것이 특징이며,

    맨 왼쪽 10폭에 “개국 524년(1915년) 9월에 석지가 그렸다”라고 밝히고 있다.

    채용신은 산수화 역시 거의 일관된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각 지명을 표시하고

    화면을 채운 경물들과 매 장면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은 조선시대 정형화된 도상과는 다른 형식이다.

     

     

    ■관우 초상(關羽 肖像)

    중국 촉나라 장수 관우 초상, 1928년(채용신의 나이 78세), 비단에 색, 전북대박물관 소장

     

    중국에서 관우를 숭배하던 관제신앙(關帝信仰)이 우리나라에 유입되어

    관우를 국가 수호신 또는 재신(財神)으로 모시는 민간신앙이 유행하였다.

    처음 공개되는 이 관우(關羽) 초상화는 흥미롭다.

    채용신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다른 관우초상과 달리 황룡포를 입고 어좌에 앉은 모습이다.

    특히 관우의 얼굴과 면류관, 오른팔과 무릎에 갑옷을 그려넣은 것을 빼면

    원광대학교박물관 소장의 '고종어진'과 거의 흡사하다.

     

    배경에 그려진 일월오봉병에서는 가운데 주봉(主峰)의 밑그림을 발견할 수 있어

    본래 오봉(五峰)으로 그리려다 생략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본래 고종어진을 제작하다 관우초상으로 변경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화면 좌측에 '무진년 가을 7월 상순 종2품 채석지가 모사, 봉안하였다'라고 쓰여 있어

                       (戊辰秋七月上澣從二品蔡石芝摹寫奉安)

    이전의 관우초상을 모사하는 과정에서 완성한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송계 권기수(松溪 權沂洙)

    1919년(채용신의 나이 69세), 비단에 색, 국립중앙박물관

     

    중추원 의관을 지냈다고 알려진 권기수의 63세 초상이다.

    주인공은 양태가 좁은 흑립(黑笠)을 쓰고 두루마기에 옥색 전복(戰服)을 걸친 모습으로

    대모(玳瑁) 갓끈, 저고리의 누런 호박단추, 양손에 보석장식(扇錘)이 있는 부채와 안경을 들고

    화문석 위에 앉은 전면상으로 당시 부유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우측 상단에  ‘正三品通政大夫中樞院議官 松溪 權近洙六十三歲像’이라 묵서되었고,

    좌측 상단에 '개국529년 기미중춘하한 종2품 전군수 석지채용신사'라고

     (開國五百二十九年 己未仲春下澣 從二品 前郡守 石芝蔡龍臣寫)

    묵서되어 있어 작품의 제작시기를 파악할 수 있다.

    ‘石芝’ 주문방인(朱文方印)과 ‘定山郡守蔡龍臣印章’ 주문방인이 날인되었다.

      

     

     

     

     

     

     

     

     

     

     

     

     

     

     

     

     

     

     

     

     

     

     

     

     

     

     

     

     

     

     

     

     

     

     

     

     

     

     

     

     

     

     

     

     

     

     

     

     

     

     

     

     

     

     

     

     

     

     

     

     

     

     

     

     

     

     

     

     

     

     

     

     

     

     

     

     

     

     

     

     

     

     

     

     

     

     

     

     

     

     

     

     

     

     

     

     

     

     

     

     

     

     

     

     

     

     

     

     

     

     

     

     

     

     

     

     

     

     

     

     

     

     

     

     

     

     

     

     

     

     

     

     

     

     

     

     

     

     

     

     

     

     

     

     

     

     

     

     

     

     

     

     

     

     

     

     

     

     

     

     

     

     

     

     

     

     

     

     

     

    석지 채용신, 붓으로 사람을 만나다
    잊혔던 조선 전통 초상화 맥의 자랑스러운 복원


     

    석지 채용신(石芝 蔡龍臣, 1850~1941)은 무관집안출생으로

    1886년 고종 37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과 군수를 역임한 인물이다.

    1899년까지 부산진(釜山鎭)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를 끝으로 무관직을 그만두고

    전주에 내려와 기거 하던 중 그의 일생에 중대한 일이 발생한다.

    찬정(贊政) 민병석(閔丙奭) 추천으로 1900년 태조어진을 모사할 수 있는 어용화사로 불려가게 된 것이다.

    조석진(趙錫晉, 1852~1920))과 함께 주관화사(主管畵師)로 임명되어 태조어진을 모사(摹寫) 제작한 그는

    그 다음해인 1901년에는 재주를 인정받아, 고종이 직접 본인의 어진제작을 명하여 어진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당시 어진제작 노고로 고종으로부터 남다른 총애와 함께 포상으로

    금관조복과 역서(曆書), '석강(石江)'이라는 호를 하사받고,

    벼슬도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정3품으로 승진한 후 칠곡군수와 정산군수를 지내게 된다.

    이후 1906년 정산군수(定山郡守)를 마지막으로 관직을 그만두고

    전라도지방(전주, 익산, 부안, 진안, 정읍 등)에 내려와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마지막 어진화사, 뒤늦은 주목을 받다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많은 의문점이 생긴다.

    무관출신으로 그림을 누구에게 사사 받았다는 기록도 없고, 전문적인 직업화가도 아닌 채용신이

    어용화사로 태조어진 모사(模寫)와 고종의 어진을 제작하였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아마 타고난 예술적 감각과 재주, 그리고 각고의 노력으로

    남다른 초상화를 제작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하는 추측을 할 뿐이다.

    채용신의 작품은 1943년 화신화랑에서 50여 점이 전시되었고,

    1951년 일본학자 구마가이노부오(熊谷宣夫)가 채용신을 학계에 처음 소개했으나

    그가 다시 세상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현대에 들어와 채용신의 초상화 작품이 관에서 운영하는박물관에 처음 선을 보인 것은,

    내 기억으로는 아마도 90년대 중반 전주국립박물관에서 개최되었던

    <전북근대작가전>에 채용신의 초상화 작품(이덕응상)이 출품되면서부터이다.

    이어 2001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미술관에서 그의 대표적인 초상화작품 60여 점을 모아

    대대적인 전시회를 개최하면부터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고종황제를 친히 도사(圖寫)한 마지막 어진화사로서 알려지면서 그 주목도가 더해져

    작품의 가치가 더 한층 높아졌으며, 그의 일대기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다.

     

    본인이 15여 년 전부터 전통초상화에 관심을 갖고 채용신의 작품과 그의 일대기를 공부하면서

    의문스러웠던 것은 고종황제 어진을 제작한 어진화사로서 그 유명세가

    현대에까지 계속 이어질 법 함에도 묻혀 있다가 재조명을 받게 됐다는 점이다.

    채용신은 작품의 양적, 직절인 측면에서도 근대 주요작가로서 자리매김을 해올 수 있는 충분한 당위성을

    갖추고 있음에도 2000년도에 들어와서야 여러 학술 및 연구논문들이 발표되고, 전시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이는 그가 조선시대 통틀어 위대한 초상화가로서 충분한 자질과 조건을 가지고 있는 반면

    이를 저해하는 요소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채용신이 지방에서 주로 활동하였고 작품이 초상화에 집중되었다는 점,

    대부분 주문제작을 하다 보니 문중이나 개인소장 작품이 많아 쉽게 세간에서 볼 수 없었다는 점,

    정식 직업화가가 아닌 무관출신이기에 동료화가나 중앙화단과의 연결고리가 없었던 점을 들고 있다.

     

    학자가 아니라 전통초상화를 전공한 본인의 입장에서는조금 다른 견해도 제시하고 싶다.

    그의 초상화작품들에서 나타나는 기법들을 시대별로 관찰해 보면

    어떤 일정한 틀에 치중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한 기법에 친숙해져 있다보니

    회화사라는 큰 틀에서 보면 천부적인 손기술과 재주는 있되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과감한 변화와 혁신은 부족했다는 아쉬움이 드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유명세를 현대까지 이어오는 데에 작지 않은 걸림돌이 되지 않았나 싶다.

     


    전통 초상화 기법을 완성한 화가

     

    석지 채용신의 초상화작품의 작품세계를 논하기에 앞서

    먼저 조선시대 초상화에 대한 성격과 시대적 배경(근대~19세기중엽부터 20세기중엽)을

    먼저 파악해보는 것이 순리이며, 채용신의 초상화작품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조선시대의 초상화는 수와 질적, 양적인 면에서 괄목할 만한 발달을 보여 왔으며

    진전(眞殿)제도로 인해 왕의 초상화가 지속적으로 제작되었고

    일반사대부로까지 확대되어 사묘(祠廟)에 봉안되었다.

    이외에 승상(僧像)초상도 적지 않게 제작되어 조사당(祖師堂)을 조성 봉안하였다.

    이렇듯 조선시대의 초상화는 대부분 숭모(崇慕)의 대상으로 제작되었다.

    고려양식을 그대로 이어받은 조선전기 및 중기 초상화의 특징이 뚜렷한 필선과 선염에 의한 명암처리라면,

    후기에는서양화법의 영향으로 음영법(陰影法)과 요철법(凹凸法)이 도입되면서

    의습선이 점점 사라지고 명암이 대신하게 된다.

    특히 안면부분을 무수한 세필로 중첩하여 명암을 주는 기법이 활성화돼

    조선말기 채용신에 이르러 그 절정을 이루게 된다.

     

    또한 기법면에서도 전신사조(傳神寫照)라는 화론아래

    ‘터럭하나라도 똑같지 않으면 그 사람이 아니다(一毫不似便是他人)’라는 명제를 가지고

    놀랄만한 발전을 가져온 시기였다.

     

    채용신의 초상화작품에서 나타나는 기법과 특징은

    첫째, 얼굴부분의 뛰어난 관찰력과 이를 바탕으로 극세필로 안면의 육리문(肉理紋)을 묘사하는 표현기법.

    둘째, 배채(背綵)시 안면 부분에 호분(胡分)을 칠해 얼굴 부분을 현실감 있게 표현한 점.

    셋째, 직접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정면상을 주로 그렸다는 점.

    넷째, 바닥에 화문석 돗자리를 주로 그렸으며 제작년도에 따라 그 기울기가 다르다는 점.

    다섯째, 손과 신발의 묘사를 적극적으로 했다는 점.

    여섯째, 1900년대 초에는 구한말 우국지사(최익현, 황현, 전우, 이병순, 기우만, 이덕응 등)들을

    주로 제작하여 조선의 독립을 독려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기법과 특징들이 비교적 잘 나타나있는 대표작으로는

    이번 전시에 출품되지 못했지만 한말의 거유였던 황현(黃玹)과 이덕응(李德應)상을 들 수 있다.

    대상인물의 생김새뿐 만 아니라 인격까지도 표현한

    채용신 평생의 작품관을 대변해 주는 탁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채용신은 조선시대 초상화의 원칙이라 할 수 있는 전신사조(傳神寫照)를

    비교적 충실히 수행한 대표적인 작가로 고종어진까지 제작한 탁월한 작가였다.

    반면 노년에는 공방을 차려 사적 계급에 관계없이 명령과 요청에 따라 다양한 계층의 초상화를 제작하였다.

     

    특히 1920년 이후 제작되는 초상화들은

    사진술을 결합(노년에 거동이 어려워 사진으로 주문을 맡아 집에서 작업하였다는 기록이 있음)하여

    초상화를 제작하다보니 내면묘사의 심미나 기량도 점점 떨어지게 되는데

    이 점이 채용신의 작품세계를 평가할 때에 아쉬움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간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채용신은 격동과 변혁의 시대를 살았던 화가이다. 또 한국전통 초상화의 기법을 완성한 작가이다.

    어진화가이면서 대중초상화를 제작한 작가이다.

    무관이면서 전문직업화가를 능가하는 뛰어난 기량의 소유자이다.

    한국회화사상 초상화를 가장 많이 제작한 작가이다.

    이러한 그의 업적에 비해 과소평가되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다행히도 최근 채용신의 작품세계에 대한 많은 연구와 평가가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전통초상화에 대한 연구가 아직 다양성과 전문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있는 환경에서

    그에게 다가갈 때에는 더 많은 신중함이 필요하다.

    필자는 위에서 언급한 채용신이 과소평가된 이유들을 명쾌히 밝힐 수 있는 방향으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그에게 쏠린 이 뒤늦은 관심을

    그가 응당 받아야 할 정당한 평가로 바꿀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채용신의 초상화 작품을 10여 년 만에 한곳에서 만날 수 있도록

    전시를 기획한 박물관 관계자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 이철규 예원예술대 교수
    - 전북문화저널, 2011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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