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듬어보고(전시)

[실학박물관 특별전] 연행, 세계로 향하는 길(전시내용)

Gijuzzang Dream 2010. 12. 31. 22:15

 

 

 

 

 

 

 

 

 

 

 

 

 

■ 연행단의 구성원

연행이란 조선시대 국가 외교사절로서 중국을 방문하는 것을 말한다.

 

명대에는 중국 천자를 배알한다는 의미로 ‘조천(朝天)’ 이라 했고,

청대에는 조천이라는 말 대신

청의 수도인 연경(燕京 · 현재의 베이징)을 다녀온다는 뜻으로 ‘연행(燕行)’ 이라 한 것이다.

 

관호

인원수

역할

정사(正使)

1

연행사절단 대표

부사(副使)

1

정사 다음 순위

서장관(書狀官)

1

규찰 및 점검, 기록 담당

역관(譯官)

19

통역 및 무역 담당

관주관(管廚官

3

삼사의 먹을거리 담당

장무관(掌務官)

1

문서 업무 담당

의원(醫員)

1

방물 수령에 참여

사자관(寫字官)

1

표문 관련 업무

화원(畵員)

1

방물 수령에 참여

군관(軍官)

7

정사와 부사, 서장관의 친인척으로 구성

우어별차(偶語別差)

1

한학, 몽학, 청학의 학습

만상군관(灣上軍官)

2

삼사의 숙소 정돈

일관(日官)

1

1741년부터 관상감 관원 참가

 

 

- 자제군관(子弟軍官)의 복식

 

군관들은 철릭을 입었다. 자제군관 역시 군관과 같은 옷을 입었다.

자제군관으로서 사행길을 갔던 김창업이 자신의 의복에 대해 기록해놓은 것이 비교적 자세한데,

김창업은 도강 전에는 흰색 도포를 입었다가,

도강할 때 군관들이 철릭으로 갈아입자 자신도 회색 창의로 갈아입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창의는 벼슬아치가 평소에 입던 옷으로 뒷솔기가 갈라져 있는 옷이다.

여기에 황갈색[沈香色] 띠를 매었고, 칼과 주머니를 안장에 걸었다.

철릭은 소매가 넓어 도포와 비슷한데, 양옆이 트여 있지 않고, 허리 아래로 주름이 잡혀 있다.

원래 윗옷과 치마를 따로 재단해 허리에서 치마주름을 잡아 연결시킨 외투로 군복의 일종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윗옷과 치마의 비율이 거의 같았는데 후기로 갈수록 치마가 두 배 이상 되었다.

소매도 크게 넓어져 결과적으로 도포와 비슷해졌다.

군복이기는 하더라도 관아의 아전, 양반관료에 딸린 겸인(傔人)들도 많이 입었다.

 

철릭과 함께 가슴에 띠를 둘렀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를 살펴보면 모든 양반들의 가슴에는 반드시 술띠가 둘러져 있다.

중인들도 가슴에 술띠를 둘렀지만, 대개 검은색이었다.

특히 자신들보다 높은 신분 앞에서는 검은색을 띠어야했다.

 

 

■ 연행사절단의 종류

정기사행(절행, 節行)

임시사행(별행, 別行)

명나라 사행

청나라 사행

사은행(謝恩行)

주청행(奏請行)

진하행(進賀行)

진위행(進慰行)

진향행(進香行)

변무행(辨誣行)

문안행(問安行)

고부행(告訃行)

동지행(冬至行)

- 동지 축하

정조행(正朝行)

- 신년 축하

성절행(聖節行)

- 황제와 황후의 생일축하

세폐행(歲幣行)

- 황태자의 생일 축하

동지행(冬至行)

동지 축하

 

 

 

■ 사행길

 

~1408년

선사포→가도→거우도→녹도→석성도→장산도→광록도→삼산도→평도→황성도→조기도→묘도→등주→제남→하간→북경

 

1409-1636 : 영락제의 육로 허용

의주→역창참→탕참→개주참→사열참→연산참→첨수참→요양→산해관→북경

 

1621-1629 : 명ㆍ청세력의 충돌

석다산→선사포→가도→거우도→녹도→석성도→장산도→광록도→삼산도→평도→황성도→조기도→묘도→등주→제남→하간→북경

 

1629-1632 : 모문룡 견제

석다산→거우도→녹도→석성도→장산도→광록도→삼산도→평도→양도→쌍도→각화도→영원위→북경

 

1637-1644 : 병자호란 종결

의주→책문→봉황성→심양

 

1645-1665 : 청나라 입관

의주→책문→봉황성→진동보→진이보→연산관→첨수참→요동→광녕→소릉하→산해관→심하역→영평부→풍윤현→옥전현→계주→통주→북경

 

1665-1678 : 심양에 성경부 설치

의주→책문→봉황성→진동보→진이보→연산관→첨수참→요동→성경→광녕→소릉하→산해관→심하역→영평부→풍윤현→옥전현→계주→통주→북경

 

1679~ : 우가장에 성보 설치

의주→책문→봉황성→진동보→진이보→연산관→첨수참→요동→백기보→소흑산→광녕→소릉하→산해관→심하역→영평부→풍윤현→옥전현→계주→통주→북경

 

1780 : 의주→삼강→구련성→책문→봉황성→통원보→연산관→첨수참→심양→백기보→이도정→소흑산→광녕→금주→산해관→북경→고북구→열하

 

1790 : 의주→봉성→이도정→열하→고북구→밀운→회유→북경

 

 

 

■ 송조천개귀국시장(送朝天客歸國詩章)

명나라 관리가 조선사신(해로사행단)을 전송하는 유일한 그림

: 명대 후기, 작자미상, 견본채색 1축,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명나라 관리인 금유심(金唯深)이 조선사신을 전송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시를 지은 금유심, 글씨를 쓴 매애(梅厓), 그림은 화원이 그린 것으로 보인다.

시를 지은 금유심과 글씨를 쓴 매애(梅厓)의 생애는 자세하게 전해내려오는 것이 없으며

그가 시를 준 대상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다. 다만 그림의 시기를 추정해볼 때

배편으로 사신이 오고간 것으로 보아 조선사신을 접대하고 전송하며 지은 시로 추정된다.

 

명나라 초기 바닷길을 이용한 사행기록화로서 남경 황성의 모습이 조감도처럼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제작 시기는 해로를 이용해서 명나라로 갔던 1392년 이후부터 1409년 사이로 추정된다.

  

‘앵무주(鸚鵡洲) 가에는 외로운 나무가 아득하고

봉황대(鳳凰臺) 아래에는 오색구름이 날리네’라는 시의 내용으로 볼 때

조선으로 귀국하는 사신이 중국 남방의 명소인 앵무주와 봉황대 등지를 유람한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현재까지 확인된 해로(海路)로 사행한 사신을 전송하는 유일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 사행단, 귀국길에 오르다

명나라에 조회왔다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조선사신 일행이다. 그림 우측 자금성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는데 반해 사신이 탄 배와 인물들은 과장되어 표현되었다.

 

- 금유심 일행, 무사귀환을 바라다

해로로 귀국길에 오른 사행단을 배웅하는 금유심 일행으로 추정된다.

사행 노정은 중국을 오고가는 데만 석 달, 북경에서 체류하는데 두 달, 최소 5개월 이상이 걸리는

쉽지 않은 길이다. 특히 해로의 경우는 바람과 파도에 의해 그 위험성이 더 컸을 것이다.

그에 따라 사행단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금유심 일행의 바람도 더 컸을 것으로 보인다.

 

- 자금성을 세밀하게 그리다

북경 자금성으로 조감도처럼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자금성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개의 문과 내부의 전각들이 뚜렷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는 좌측의 사신이 탄 배와 인물들이 과장되게 표현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 금유심, 시(詩)로 사행단을 배웅하다

당시 감찰어사를 역임한 금유심이 명나라에 조회 왔다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사행단을 전송하며

지은 시이다. 즉 조천객(朝天客, 천자의 나라 중국에 온 사신)이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는 시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海域航珍貢帝畿  해역을 항해하여 황성에 조공 와서

壯遊萬里恣輕肥  장유 만리는 빠른 말에 맡겼네.

中朝禮樂歆才望  중국의 예악은 명망 있는 인재를 대접하고

故國江山耀德輝  고국의 강산은 빛나는 덕을 발하네.

鸚鵡洲邊孤樹杳  앵무주 가에 외로운 나무 아득하고

鳳凰臺下五雲飛  봉황대 아래 오색구름 날리네.

俄然爲報潮平候  이윽고 파도가 잔잔해졌다 알리니

滿載恩光向日歸  은총 가득 싣고 동녘으로 돌아가네.

致監察御使 日湖 金唯深  감찰어사 일호 금유심.

 

 

 

■ 항해조천도(航海朝天圖, 燕行圖幅)

선사포(旋槎浦) 출항장면이 그려진 해로사행도

작자미상, 17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624년(인조 2) 명나라에 인조의 책봉사절 파견을 요청하는 사은 겸 주청사(謝恩兼 奏請使)로

명나라에 파견된 정사 이덕형(李德馨, 1566-1645) 일행의 바닷길 연행과정을 담은 25점의 그림이다.

 

당시 사행단에는 정사 이덕형을 비롯하여

부사 오숙(吳䎘, 1592-1634)과 서장관 홍익한(洪翼漢, 1586-1637) 등이 동행하였다.

사행노정은 곽산의 선사포(旋槎浦)를 출발하여

가도, 녹도, 석성도 등을 거쳐 등주에 이르기까지 해로를 이용하였고,

다시 등주에서부터는 북경에 이르기까지 동래, 청주, 제남, 덕주, 탁주 등을 거치는 육로를 이용하였다.

 

25점의 그림 말미에는 정사 이덕형의 글이 적혀 있는데

후일 해로로 사행할 자들에게 참고가 되게 하고자 사행에서 돌아온 후에 그렸다고 하는 걸로 보아

당시 이덕형 일행이 사행에 동행했던 화원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 그림은 이덕형 사행단이 해로사행길의 출발지인 선사포를 출발하려는 광경을 담고 있다.

 

- 바다 위의 배, 사행을 준비하다

해로사행길에서 가장 중요한 이동수단은 배다. 일렁이는 파도 위에 떠있는 배는

평교자를 타고 점차 다가오는 사행단 일행을 기다리는 중이다.

이제 이 배는 해로의 종착지인 등주(登州)까지 사행단을 태우고 갈 것이다.

 

- 이덕형사행단, 사행길에 오르다

해로사행길을 떠나는 이덕형 일행이다. 홍포를 입고 일행을 안내하는 6명의 관원들 뒤로

중간에 평교자를 탄 사람은 부사 오숙(吳䎘)으로 보이는데

이는 서열상 맨 앞의 정사 이덕형(李德馨)과 서장관 홍익한(洪翼漢) 사이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 3명의 여성, 무사귀환을 바라다

사행길은 어려움과 위험이 많은 길이다. 따라서 사행단을 떠나보내는 전송객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그들의 무사귀환을 바랬을 것으로 보인다.

3명의 여성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곧 출항할 배를 바라보며 그들의 건강과 평안을 빌고 있는 모습이다.

 

 

 

■ 연행도폭(燕行圖幅)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624년 인조의 책봉 요청을 위해 명나라를 다녀온 이덕형 일행의 여정을 그린 그림첩으로,

해로를 이용한 사행도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 조천기지도(朝天記地圖)

 

등주 봉래각, 정두원, 1631년(인조 9), 성균관대 존경각 소장, 필사본 복제

 

정두원(鄭斗源, 1581-1642)이 1631년 명나라 사행에서 돌아와

인조에게 바친 사행보고서 '조천기지도(朝天記地圖)'는 연행길 주요 지역의 그림과 견문을 적었다.

평안도 석다산(석다산)을 출발하여 요동반도와 산동반도를 잇는 해로를 통과하여 등주에 상륙한 다음,

여러 도시들을 거쳐 북경(연경)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이다.

정두원은 돌아오는 길에 등주에서 서양선교사인 로드리게스와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는데,

조선인 최초로 서양인과의 공식적인 만남이었으며

그에게서 홍이포, 천리경, 자명종과 함께

천문서(天文書)』『직방외기(職方外紀, 1632)』『서양국풍속기(西洋國風俗記)』『천문도(天文圖)』『홍이포제본(紅夷砲題本)』등 서양문물과 서적들을 조선으로 들여왔다.

 

 

   

■ 심양관도첩(瀋陽館圖帖

심양관 구지(舊址)가 그려져 있는 연행그림첩

1761년 (영조 37), 명지대 LG연암문고 소장

 

 

 

 

영조가 할아버지인 현종의 탄신 100주년을 기념해 1760년 정사 홍계희 일행(동지사행단)에게

그려 오게 한 '심양관도첩(瀋陽館圖帖)'은 화원 이필성이 현종이 살던 심양(선양)을 둘러보고 그렸는데,

제1폭에 영조의 어필이 있다.

현종은 조선 역사에서 유일하게 타국 땅 심양에서 태어난 왕이다.

병자호란 후 청에 볼모로 가 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효종)이 심양에 머물렀고

여기서 봉림대군의 맏아들인 현종이 태어났다.

영조는 봉림대군이 머물렀던 조선관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찰원(察院ㆍ사찰)이 들어섰음을 알고

이를 그리게 해 '심관구지(瀋館舊址)'라고 불렀다.

 

심양은 청나라가 일어난 곳이다.

동으로는 영고탑(寧古塔)에 접해 있고, 북으로는 열하(熱河)를 제어하고,

남으로는 조선을 어루만지면서 서쪽 중국으로 진격해 들어가니, 중국은 감히 꿈쩍을 못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 연경성시도(燕京城市圖)

1700년대 후반 연경을 그림,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 이당과 여원이 유득공을 위해 쓴 선면

19세기, 과천시 소장

 

 

청나라 문인 이당(理堂)과 여원(荔園)이 유득공을 위해 당나라 시를 검은 종이 바탕에 금분으로 쓴 글이다.

앞의 글은 당나라 낙빈왕(駱賓王)의 <모우심국서(冒雨尋菊序)>의 일부이고,

뒤의 글은 당나라 유종원(柳宗元, 773~819)의 시 <어옹(漁翁)>이다.

 

<모우심국서(冒雨尋菊序)> - 낙빈왕(駱賓王)

冒雨尋菊序

冒雨相邀(모우상요)

涼燠則鴻雁在天  敘交遊則芝蘭滿室(량욱칙홍안재천 서교유칙지란만실)

砌花舒菊  還同載酒之園(절화체서국 환동재주지원)

岸葉低鬆  直枕維舟之浦(안엽저송 직침유주지포)

 

 

<어옹(漁翁): 고기 잡는 노인> - 유종원(柳宗元)

 

漁翁夜傍西岩宿(어옹야방서암숙)

曉汲淸湘燃楚竹(효급청상연초죽)

煙銷日出不見人(연소일출부견인)

欸乃音襖靄一聲山水綠(애내음오애일성산수녹)

回看天際下中流(회간천제하중류)

岩上無心雲相逐(암상무심운상축).

 

늙은 어부 날 저물어 서암(지금의 호남성 永州시의 西山)에서 지내고

새벽에 맑은 상수[淸湘 : 맑은 상강(湘江)의 물. 상강은 상수(湘水)라고도 하며 호남성 남부에서 흘러나와 永州를 거쳐 동정호로 들어간다] 물 길어다가 초죽(초나라 땅 대나무. 永州가 예전 楚지역)을 태운다.

연기 사라지고 해가 떠도 사람은 보이지 않고

어여차 한소리에 산수만 푸르러간다.

하늘 끝 돌아보며 중류로 내려가니

바위 위로는 무심하게 구름만 쫓아간다  - <고문진보(古文眞寶)>

 

 

 

 

 실학자들의 연행연대기 

   

새로운 만남, 연행록(燕行錄)

 

 

조선시대에 연행로는 문명의 실크로드였다.

연행로는 공식적으로 세계문명과 조우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새로운 지식에 목말라 하는 조선의 학인들은 이 길을 통해 중국을 비롯한 세계 문화와의 만남을 꿈꾸었다.

 

연행길은 한양에서 연경(燕京)까지 오가는 데만 두 달이 넘게 걸렸고,

연경에서의 체류를 포함하면 6개월 정도가 소요되는 험한 여정이었다.

이때 사행단의 대표인 정사나 부사, 서장관들이 공식행사에 동원되거나 감시에 묶여 있는 반면,

수행원들인 자제군관들은 비교적 자유로웠다.

 

홍대용, 박제가, 박지원, 유득공, 김정희 등 북학파들은

자제군관의 신분으로 연행길에 동행하여 견문을 넓혔다.

궐 밖의 세상을 보고 들으며 자신들의 견문과 조선의 상황을 비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3대 연행록으로 꼽는

노가재(老稼齋) 김창업(金昌業)-『노가재연행록』, 홍대용-『을병연행록』, 박지원-『열하일기』등은

이렇게 탄생하였다. 그들은 연행을 통해 청나라의 발전된 학문과 문물을 수용하여

이용후생의 도구로 삼자는 북학(北學)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시기

실학자

임무

남긴 기록물

1631년(인조 9)

정두원(1581- ?)

진위사

『조천기지도(朝天記地圖)』

1636년(인조 14)

김육(1580-1658)

 

『조경일록(朝京日錄)』

『잠곡김문정공초상』

1646년(인조 24)

부사

 

1650년(효종 원년)

정사

『송하한유도(松下閑遊圖)』

1668년(현종 9)

박세당(1629-1703)

서장관

『서계연록(西溪燕錄)』

『사연록(使燕錄)』

1765년(영조 41)

홍대용(1731-1783)

서장관 홍억 수행원

『담헌연기(湛軒燕記): 한문본』

『을병연행록(乙丙燕行錄):한글본』

1776년(영조 52)

서호수(1736-1799)

1차

부사

 

1778년(정조 2)

이덕무(1741-1793)

서장관 심염조 수행원

『입연기(入燕記)』

박제가(1750-1805)

1차

정사 채제공 수행원

 

1780년(정조 4)

박지원(1737-1805)

정사 박명원 수행

『열하일기(熱河日記)』

1790년(정조 14)

서호수 2차

서장관

『연행기(燕行記)』

『연행일기(燕行日記)』

유득공(1749-1807)

부사 서호수 수행원

『열하기행시주(熱河紀行詩註)』

박제가 2차

채제공 추천

 

박제가 3차

정조의 명령

 

1801년(순조 원년)

유득공

 

『연대재유록(燕臺再游錄)』

1809년(순조 9)

김정희(1786-1856)

 

 

1861년(철종 12)

박규수(1807-1876)

부사

 

1872년(고종 9)

정사

 

 

 

①김창업 - <노가재연행록(老稼齋燕行錄)>

『연행일기(燕行日記)』는 1712년(숙종 38) 동지사 겸 사은사(冬至使兼謝恩使) 김창집(金昌集)의

타각(打角: 자벽군관(自辟軍官))으로 북경(北京)에 다녀온

김창집의 아우 노가재(老稼齋) 김창업(金昌業)의 연행(燕行) 기록이다.

 

1권의 앞부분을 제외한 9권까지는 일기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표지는 ‘노가재연행록’으로 되어 있다.

 

저자인 김창업은 55세라는 노령으로 구차하게 형인 김창집의 시중을 든다는 명목을 빌어,

군관의 행색으로 연행길에 오른다는 비난을 무릅쓸 만큼 중국에 대해 각별히 관심을 가졌다.

 

『연행일기』는 당대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문장가였던 김창업이 중국의 문물을 보고 느낀

흥미진진한 유람기록으로, 『을병연행록』과 『열하일기』등 조선후기 연행록의 모범이 되었다.

   

 

②홍대용 - <을병연행록(한글본) / 담헌일기(湛軒燕記, 한문본)>

 

하늘이 사람을 내매 쓸 곳이 다 있도다.

나와 같은 궁생(窮生)은 무슨 일을 이뤘던고.

등불 아래(燈下)에 글을 읽어 장문부(長門賦)를 못 이루고

말 위에서 활을 익혀 오랑캐를 못 쏘도다.

반상이 녹록(碌碌)하여 전사(田舍)에 잠겼으니

비수(匕首)를 옆에 끼고 역수(易水)를 못 건넌들

금등(金燈)이 앞에 서니 이것이 무슨 일인가?

 

간밤에 꿈을 꾸니 요동 들판을 날아 건너

산해관 잠긴 문을 한 손으로 밀치도다.

망해정 제일층에 취후(醉後)에 높이 앉아

묘갈(竭石)을 발로 박차 발해(渤海)를 마신 후에

진시황 미친 뜻을 칼 짚고 웃었더니

오늘날 초초행색(草草行色)이 뉘 탓이라 하리오.

 

 

 

진시황의 만리장성을 보지 못하니

남아의 의기 쟁영함을 저버렸도다.

미호 한 굽이에 고기 낚는 배가 적으니

홀로 도롱이를 입고 이 인생을 웃노라.

 

홍대용이 어머니를 위해 한글로 쓴 여행일기, 《을병연행록乙丙燕行錄》

북학파 실학자인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은 1765에서 1766까지 2년 동안 외교사절단의 일원으로

중국 북경에 다녀왔다. 그는 이때 북경의 천주당에서 서양 신부들과 만나 필담으로 이야기 하였고,

서양 문물을 포함하여 중국의 여러 자료가 모여 있던 유리창에서

엄성 등과 같은 중국 지식인들과도 만나 세계에 대한 눈을 키웠다.

이때의 경험을 일기로 썼는데, 귀국 후에는 시간이 날 때마다 그가 중국에서 본 여러 가지 문물과

또 다른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해드리고, 어머니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그 일기를 한글로 다시 썼는데, 그것이 《을병연행록》이다.

그의 연행록은 이후 박지원의 《열하일기》나, 서유문의 《무오연행록》 등에 영향을 주어

실학자들이 보다 넓은 세계를 보게 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1766년(영조 42) 홍대용(洪大容)이 연행(燕行)에서 견문한 것을 기록한 것으로,

6권 6책이며 필사본이다.

1765년 11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저자의 작은아버지 홍억(洪檍)이

삼절연공 겸 사은사(三節年貢兼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연행할 때

그를 수행하면서 견문한 바를 일기체가 아닌 주제별로 나누어 기록하였다.

 

주로 중국의 관제ㆍ과거제ㆍ풍속ㆍ음악과 서화 등에 관한 설명, 관상대ㆍ천주당의 관람ㆍ천주학ㆍ서양서ㆍ역법ㆍ안경ㆍ망원경ㆍ자명종 등 서양 문물에 관한 고찰, 정상(鄭商)ㆍ황상(黃商) 등

조선과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에 관하여 기록하였다.

또한 유구인(琉球人)ㆍ몽고인(蒙古人)ㆍ대비인(大鼻人)들의 기질ㆍ풍습과 대담 내용,

승려ㆍ공생(貢生)ㆍ마부ㆍ행상ㆍ세리(稅吏)들과의 일화, 가례ㆍ실학 등에 관한 견해,

연경(燕京)ㆍ심양(瀋陽)ㆍ산해관(山海關) 등 중요지역의 풍속, 지리적 환경, 산업 등에 관한 내용이었다.

 

특히, 북경에 머무르면서 강남출신(江南出身) 학자 엄성(嚴誠)ㆍ반정균(潘庭筠)ㆍ육비(陸飛) 등과의 필담,

왕복서간들을 날짜순으로 기록한 것이 주목된다.

 

양명학과 주자학ㆍ불교와의 관계, 중국과 조선의 가례에 대한 토론, 시ㆍ화 및 풍류 생활에 대한 대담,

교환된 시ㆍ부(賦)ㆍ기(記)들을 모두 수록되었는데,

이는 북학 사상을 체계화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③박지원 - 열하일기(熱河日記, 연암록(燕巖錄)

 

조선 후기 실학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영조 13)~1805(순조 5)이

정조 4년(1780) 박명원(朴明源)의 수행원으로 청(淸) 고종(高宗, 건륭제)의 칠순을 축하하기 위하여

사은 겸 진하사(謝恩兼進賀使) 연행 도중 성경(盛京)ㆍ북평(北平)ㆍ열하(熱河) 등지를 여행하고,

돌아와 그곳 문인들과의 교유 및 문물 제도를 접한 결과를 기록한 작품이다.

 

출발일 1780년 5월 21일

북경도착일 1780년 8월 1일(열하도착일: 1780년 8월 9일)

북경출발일 1780년 9월 18일

귀경일 1780년 10월 27일

 

『열하일기(熱河日記)』에는 중국의 산천(山川), 풍토(風土), 문물(文物), 제도(制度)는 물론,

역사(歷史)ㆍ지리(地理)ㆍ풍속(風俗)ㆍ습상(習尙)ㆍ고거(攷據)ㆍ건설(建設)ㆍ인물ㆍ정치ㆍ경제ㆍ사회ㆍ종교ㆍ문학ㆍ예술ㆍ고동(古董) 등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이용후생적(利用厚生的)인 면에 중점을 두어 기록되어 있다.

 

『열하일기』는 연행문학(燕行文學)의 백미이자 한국문학사의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애독되고 있다.

 

  

<압록강을 건너며>

압록강이 이 앞에 이르러 세 가지로 나뉘었는데 이는 삼강(三江)이라 이르는 곳이다.

이때 삼강이 다 얼어붙어 그 위에 눈이 쌓였고, 말을 타고 지나니 강인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

삼강을 지나는데 좁은 길이 겨우 수레를 통할만하고,

좌우의 갈대숲이 길을 끼고 우거져 경관이 뛰어났다.

 

<조선관의 상황을 설명하다>

조선 사신이 묵는 곳이다. 처음에는 옥하교(玉河橋) 위에 있는 옥하관(玉河館)이었는데,

러시아[鄂羅斯] 사람들에게 빼앗겨버렸다. 지금은 정양문 안 동성(東城) 밑 건어호동(乾魚衚衕)

한림서길사원(翰林庶吉士院)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연공사(年貢使)가 먼저 와서 관에 머물고 있는 중에,

다시 다른 사신이 오게 되면 서관(西館)에 나누어 묵게 되므로 여기를 남관(南館)이라고도 한다.

 

작년에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이 사신으로 왔을 때 남관에 불이 났었다.

한밤중 삼경(三更: 오후 11시-오전 1시)이나 되었는데,

관 안이 물 끓듯이 후닥닥 뒤집혀져 일행이 가졌던 폐백과 돈들을 성 밑에 쌓아 둔 채

말 수백 필은 대문이 메이도록 먼저 뛰어나가려고 덤볐다.

삽시간에 병졸 수천 명이 철통같이 둘러싸고 물수레 몇 십 대가 몰아 달려 들어왔다.

두 통씩 물통을 둘러메고 연거푸 수레 물통 속에 물을 길어 붓는데,

한 방울의 물도 허비하지 않았다.

불 끄는 자는 죄다 전(氈)으로 만든 모자와 가죽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의 모자나 복장이 함께 물에 젖었음에도 불구하고

손에는 긴 자루가 달린 도끼ㆍ갈퀴ㆍ낫ㆍ창 등을 들고 불길을 무릅쓰고,

마음대로 헐고 돌격하여 얼마 지난 뒤 불을 껐는데,

끽소리 없이 조용하여 흐트러진 물건들이 하나도 잃어버린 것이 없었다.

이것으로 보면 중국의 규율이 엄격하다는 사실과 매사에 구차함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진주가 명품으로 취급되다>

중국 사람들은 우리나라에서 나는 진주를 아주 귀하게 여겨서 ‘고려주’(高麗珠)라 부르고 있다.

그 빛깔은 해맑기가 차거(硨磲)와 같다.

지금 청나라 사람들은 이 진주를 모자 챙 앞뒤에 한 알씩 달아서 모자의 앞뒤를 표시한다.

우리나라 진주로서 무게가 8푼 이상이면 모두 보물로 인정된다.

황제가 가지고 있는 진주는무게가 7돈이나 되었다.

이 진주는 나쁜 꿈을 막는다고 해서 보물로 여겨진다.

황후(皇后)가 가진 진주는 6돈 4푼인데, 하얀 나뭇가지처럼 생겼다.

건륭 30년(1765)에 황후가 그 진주를 잃어 버렸는데,

그때 회회족(回回族) 출신의 후궁이 황후가 진주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황제에게 고자질했다.

수사 결과 궁중 호위 군졸의 집에서 그 진주가 발견되었고,

황후는 곧바로 폐출(廢黜)을 당하여 냉궁(冷宮)에 갇혔던 적이 있었다.

귀주(貴州) 안찰사(按察使) 기풍액(奇豐額)이 모자 끝에 우리나라 진주를 달긴 하였지만

그 빛깔이 아주 좋지 않았다. 기풍액은 이렇게 말했다.

“이 진주는 두께가 6〜7리(釐)나 되고 값은 마흔 냥이나 됩니다.”

그래서 내가 대답해주었다.

“이 진주는 조선에서 나온 게 아닙니다. 간혹 홍합을 먹다가 입 안에서 진주가 발견되기도 하는데,

그것을 육주(陸珠)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무 가늘어서 귀한 물건이라고 할 게 없습니다.

아녀자들이 머리꽂이와 귀이개 따위에 장식한 것은 대부분 일본에서 들여온 것입니다.

그래도 붉은 색깔은 제법 귀해 보이더군요.”

“아니예요. 이건 조개껍질을 둥글게 갈아서 만든 것이지 진주는 아닙니다.

사람들이 귀국의 진주를 좋아하는 까닭은

조개 같은 기운이 없이 자연적으로 보배로운 빛깔이 나기 때문이지요.”

기풍액이 이렇게 말하면서 웃는다. 이 말은 상당히 이치에 맞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우리나라 진주가 어디에서 나며,

또 누가 캐어서 이렇게 세상에 널리 깔려 있게 되었는지.

   

<간정동에 가다>

이 날은 일찍이 맘을 먹고 문 열기를 기다려 평중과 한가지로 간정동에 이르니,

육생과 엄생이 한생과 더불어 나와 맞이하였다. 서로 읍하고 캉에 앉고 반생이 있는 곳을 물으니,

엄생이 말하기를 간밤에 다른 곳에 머물러 아직 돌아오지 못하였다고 했다.

 

 

<구련성을 출발하여 책문에 들다>

장막 밖에서 자던 성번과 차충이 동이 튼다고 하여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와 앉으니

화톳불에 의지한 무수한 화졸이 다 발을 불 밑으로 뻗치고 누워 코를 골고 자는 이가 반을 넘었고,

아주 추워하는 모양이 적어 서북 지역 사람이 추위를 잘 견딘다는 말이 그르지 않았다.

 

<산해관에서 정녀묘를 보다>

진시황 때에 천하백성을 동원하여 만리장성을 쌓았는데,

10여 년에 마치지 못하니 주검이 쌓이고 원망이 사해에 미치었다.

 

노군둔(老君屯)과 왕아두점(王丫頭店)을 지나 몇 리를 가다가

왼쪽의 작은 길로 1리쯤 가서 정녀묘(貞女廟)에 닿았다.

들판 한 가운데에 작은 언덕이 솟아 있었는데,

정녀묘는 그 언덕 위에 바위를 깎아 집을 지어놓은 것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정녀(貞女)의 성은 허씨(許氏)이고 이름은 맹강(孟姜)으로,

그 남편 범랑(范郞)은 진(秦)나라 때 만리장성을 쌓다가 죽었다고 한다.

남편이 오랫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자 정녀는 남편을 찾아 여기까지 왔는데,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피 울다가 결국 자신도 죽고 말았다고 한다.

그래서 뒷사람들이 그곳에 사당을 세우고 한 여인의 조각상을 만들어 세웠다.

정녀의 조각상 옆에는 두 아이의 조각상도 나란히 서 있는데,

왼쪽 아이는 일산을 들고 있고 오른쪽 아이는 허리띠를 들고 있다. 두 아이는 정녀의 아들들이다.

일산은 당시 정녀의 행장을 상징하는 것이고 허리띠는 남편의 평상복을 상징하는 것이다.

 

 

 

■ 인평대군의 『연행기록(松溪集, 燕途紀行)』

17세기 중반, 이요(李潦), 국립중앙도서관소장

 

 

 

출발일 1656년(효종 7) 8월 3일

북경도착일 1656년 9월 22일

북경출발일 1656년 10월 29일

귀경일 1656년 12월 16일

 

인조의 셋째아들이자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 요(麟坪大君 潦, 1622∼1658)가

1656년(효종 7)에 사은사로 청나라 연경에 다녀왔을 때 쓴 기록이다.

 

그는 병자호란 후인 1640년에 19세로 심양에 들어가 1년동안 인질로 있었고,

이후 37세로 죽을 때까지 수시로 압록강을 넘나들었다. 송계(松溪)는 인평대군의 호이다.

 

인평대군의『연도기행(燕途紀行)』은 그의 11번째 중국 사행이었던 1656년 진주사(進奏使) 사행 기록이다.

상중하 3권인데, 상권은 1656년 8월 3일 서울 출발에서 8월 21일 의주까지,

중권은 8월 22일 의주에서부터 9월 22일 북경까지,

하권은 9월 23일 북경에서 12월 16일 서울로 돌아오기까지의 견문을 자세하게 일기체로 기록하였다.

 

일반적인 연행록처럼 날마다의 날씨, 하루 동안의 이동 거리, 묵은 곳과 먹은 것,

청나라 사람들과 주고받은 대화, 명승고적과 풍속 등에 대한 관찰이 담겨져 있다.

 

인평대군의 진주사행은 당시 효종의 군비 확충 정책이 조선의 관료와 사대부들이 군비확장을 의논하여

청나라에게는 일종의 반청(反淸)을 꾀하고 있다는 구실로 청나라의 추궁을 받게 되자,

이에 대해 해명하고 정책을 집행했던 관료들의 처벌을 완화시키고자 파견한 것이었다.

4개월 반 정도의 그렇게 길지 않은 여행이었는데,

인평대군은 무려 12일동안 천막을 치고 노숙을 했기에 감기와 안질, 열병에 시달렸다.

 

인평대군은 무려 11번의 사행 경험과 심양에서의 인질 생활을 통해

청나라 고위층과 잘 알고 지냈기 때문에 사행의 임무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반청 활동에 대한 변명은 잘 받아들여졌고,

영의정 이시백(李時白) 등 16명의 조신(朝臣)들이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다.

또한 현장조사를 통해 책임자를 문책하기 위해 파견하려던 칙사의 행차도 정지시킬 수 있었다.

 

『연도기행』에는 특히 요동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명청교체기의 많은 전쟁터와

그 전투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다.

앞서 사행에서 본인이 직접 목격한 것도 있고, 현지인들에게 전해들은 내용도 있다.

요동을 풍미하던 장수들 조대수(祖大壽), 홍승주(洪承疇), 원숭환(元崇煥), 오삼계(吳三桂)에 얽힌 일화와

이들의 처신에 대한 비분강개가 곡진하게 드러나 있다.

 

또한 병자호란으로 잡혀가서 청나라의 역관이나 군인으로 사는 조선인들의 삶도 자주 언급하고 있다.

특히 의주 출신의 김여휘(金汝輝)는 황제의 친위대에 속해 있으면서 접한 고급 정보를

인평대군의 숙소로 찾아와 전해주기도 하였다.  

 

 

 

서호수의 열하연행기(燕行記)

서울대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1790년(정조 14) 건륭황제의 80세 만수절(萬壽節)행사에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참여한

서호수(養直 徐浩修, 1736-1799)의 연행기록이다.

이때의 연행에는 서호수 외에도 박제가와 유득공이 함께 참여하였다.

 

출발일 1790년 5월 27일

북경도착일 1790년 7월 26일

북경출발일 1790년 9월 4일

귀경일 1790년 10월 22일

 

만주 복제(滿洲服制) 등에 대한 상세한 기록, 각국 조공(朝貢)의 내역, 대만(臺灣)의 풍물과

각 지역과 관련한 고사, 만수절의 장엄하고 호화스러운 축하 의식 절차와 광경, 몽고와 안남의 사절들 기록,

국자감(國子監) 안에 있는 석고(石鼓)에 대한 내력과 석고문(石鼓文) 전문을 싣고 있는 점이 특색 있다.

 

 

 

유득공의 열하여행기록(난양록, 灤陽錄)

19세기, 단국대학교 연민문고 소장

 

북학파 계열의 실학자 유득공(1749-1807)이 쓴 열하 여행시집이다.

그는 3차례 중국 땅을 밟았는데 첫 번째는 1778년(31세), 두 번째는 1790년, 세 번째는 1801년이다.

이 책은 두 번째 사행인 1790년(정조 14) 청나라 건륭제의 팔순 축하사절단으로

열하와 북경을 다녀온 뒤 엮은 것이다. 

유득공의 또 다른 연행록인 <연대재유록(燕臺再遊錄)>은  1801년(순조 1) 사행을 기록한 것이다.

 

 

  

泊汋城南漲綠波  박작성(압록강 연안의 성) 남쪽, 푸른 물결이 불었는데

             快船輕騎待離歌  빠른 배, 날랜 말이 이별 노래 기다리네.

   忽忽書付流星撥  갑작스런 편지가 빠른 파발에 보내오니

   不向燕京向熱河  연경으로 가지 말고 열하로 향하라 하네.

   - 유득공 <열하기행시주> 

 

 

 

 안남에 간 조선선비, 조완벽의 전기

이수광의 지봉집(芝峯集),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 환영초형기문(寰瀛肖形紀聞) - 안남(베트남) 사신이 그려진 풍속도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나라에 조공을 바친 여러 종족과 변경 국가들의 풍속을 기록한 그림이다.

중국에서 <직공도(職貢圖)> 형태의 그림은 18,19세기에 여러 차례 제작되었다.

이 그림은 조선 숙종 때 도화서 화원인 진재해(秦再奚, 1691-1769)가

18세기 청나라의 <직공도>를 모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양과 외번(外藩)의 속국, 중국 내 여러 지역의 성(省), 변경의 다양한 종족들의 복식과 함께

풍속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특히 복식의 묘사에서 화려한 채색과 입체감을 부각시킨 명암법 등

서양화법적인 요소가 두드러지게 반영되어 있다.

 

 왼쪽은 안남국 문관/ 오른쪽은 안남국 무관

 

 

 

 

 

 

- 조선과 안남의 문학교류사 / 조완벽전과 지봉 이수광

 

경남 진주의 선비였던 조완벽은 스무 살이 되던 1597년, 정유재란 발발과 함께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다.

일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중 한문을 읽을 줄 안다는 이유로 일본인 무역상인에게 다시 팔려갔다.

베트남 무역을 독점하고 있는 주인의 배를 타고 조선인 최초로 베트남에 가게 된 조완벽,

그는 여기서 조선의 문인 지봉 이수광의 시가 유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훗날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온 조완벽은 베트남에서 이수광의 시가 유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했다.

 

이수광은 1597년 사신으로 연경에 갔다가 안남의 연행사 풍극관(馮克寬)과 숙소인 옥하관에서

50여 일간 함께 머물며 시를 지었고, 이후 두 사람의 시는 각 나라에 소개되어 회자되었다.

두 사람의 옥하관 창수는 그로부터 2세기가 지난 1790년(정조 14)

열하에서 서호수를 만난 안남사신 반휘익(潘輝益)에 의해 ‘천고의 기이한 만남’으로 묘사되었다.

 

 

 배삼익의 명나라 사행일기(臨淵齋先生朝天錄)

19세기 중반, 필사,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출발일 1587년(선조 20) 3월 13일

북경도착일 1587년(선조 20) 6월 5일

북경출발일 1587년 7월 12일

귀경일 1587년 9월 13일

 

1587년(선조 20) 사은사(謝恩使)로 5개월간(3월 13일부터 9월 13일까지) 명나라에 다녀온

배삼익(裵三益, 1534~1588)이 쓴 조천록(朝天錄)이다.

명나라로 출발하기 전에 문서를 점검하는 과정부터 귀국까지의 여정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기 형식으로 날씨, 만난 사람, 방문 지역, 공무수행 과정 등을 자신의 느낌과 함께 기록한 글이다.

 

배삼익이 1587년 명나라에 가기 한해 전(1586) 하절사(夏節使) 윤자신(尹自新, 1529~1601) 일행이

옥하관(玉河館) 방의 온돌을 손보다가 화재가 발생하여 11칸을 태웠다.

이어 동지사(冬至使) 정사(正使) 성수익(成壽益)과 서장관(書狀官) 유영순(柳永詢)이

진헌방물(進獻方物) 중 나전함(螺鈿凾) 안의 소합(小合) 네 개를 도둑맞았다.

 

선조는 만력제(萬曆帝) 신종(神宗, 1563~1620)에게 1586년에 옥하관에 화재가 나서 건물 일부가 무너지고,

황제에게 바치는 방물 일부를 도적맞은 것을 사죄하러 보낸 사행으로,

배삼익을 정사로, 원사안(元士安)을 서장관으로 하는 진사사(陳謝使)를 파견하였다.

황제는 칙서를 내려 왕의 충성과 근신함이 칭찬할 만함을 포장(褒獎)하고

망의(蟒衣)와 채단(綵段)을 내려 주었다.

 

하지만『조천록』에는 본래의 목적인 사죄에 대한 것보다 잘못되었던 태조 이성계 관련 사항을 바로잡아

새로 찍는『대명회전(大明會典)』의 해당 문면을 베껴온 사실을 더 크게 다루고 있다.

또한 특기할 일은 옥하관 화재 때문에 명나라가 옥하관에 묵는 조선 사신들로 하여금

밤에 등불도켜지 못하게 한 일과 사행 도중 죽은 곽지원(郭之元)의 일이다.

곽지원은 명종ㆍ선조 때의 유명한 역관인데 1560년(명종 15) 사행 도중

여양역(閭陽驛)에서 1만 명의 오랑캐[㺚賊]에게 포위되었을 때, 역승(驛丞)이 항복하려 하자

“그대는 수관(守官)으로서 직무상 마땅히 죽음으로써 대적하여야 할 것인데, 지금 항복하려 하니

법으로 참(斬)해야 마땅하다.”하고 광녕(廣寧)의 군사 한 사람을 잡아 화살촉으로 귀를 뚫고 주리를 틀었다.

이에 역승이 크게 겁을 먹고 비로소 성 위에 올라 경계하여 지키고

일행 중의 군관 등도 편전(片箭)으로써 적을 쏘니, 적이 포위를 풀고 물러간 일화를 가지고 있다.

 

 

열하도(熱河圖), 18세기,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18세기 초 열하(熱河)의 상황을 반영한 필사본 지도이다.

황제가 지나는 역참(驛站)과 행궁(行宮)의 명칭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강희 연간(1662-1722)에 열하 지역은 몽고 세력이 위협적이었기 때문에

1702년부터 이곳에 황제의 행궁을 지어 매년 이곳의 목란위장(木兰围场, 木欄圍場, 무란웨이창)에서

황제가 이끄는 수만 명의 팔기군(八旗軍)이 참가하는 가을 사냥을 진행하였다.

몽고의 군사적 위협은 물론, 청의 주력부대를 지속적으로 훈련시키려는 목적이었다.

이 지도는 중국에서 제작하였거나 이를 직접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왕가도서지장(李王家圖書之章)’이 찍혀 있어 원래 이왕가박물관 소장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피서산장(避暑山莊)과 외팔묘(外八廟)

강희제에 시작되어 건륭제 때 완성된 피서산장(避暑山莊)은 청나라 황제의 여름 별궁이다.

피서산장이 있는 열하는 제2의 정치중심지로 ‘승덕(承德)’이라고도 불렸다.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온천과 함께 여름철에는 시원하여 청나라 황제들이 자주 찾은 곳이다.

외팔묘(外八廟: 와이빠먀오)는 피서산장을 둘러싸고 있는 라마사원 형태의 절과 사당을 말한다.

청 초기의 통치자들은 서방과 북방의 소수민족에 대한 회유책으로 라마교 부흥책을 실시했고

그것이 곧 외팔묘이다.

 

전시실에서 열하 비석 뒷면에 있는 건물 사진은 외팔묘 중의 하나인 소포탈라궁(普陀宗乘之廟)으로

티벳의 포탈라궁을 본따 만든 것이다. 

 

열하의 표지석과 보타종승묘의 원경 북경에서 동북쪽으로 260여 ㎞ 떨어진 곳에 위치한

열하의 현재 이름은 승덕이다.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덕분에 우리에게도 익숙한 열하에는

옹정, 건륭 연간에 걸쳐 청나라왕실의 이궁들이 건설되었다.

강희제 이후 역대 황제들은 여름철 열하의 피서산장에 머물면서

피서뿐 아니라 여전히 청에게 위협적 존재였던 몽골 세력에 대한 견제를 시도했다.

 

피서산장 부근의 구릉에는 포탈라궁을 본따 건설한 보타종승묘(소포탈라궁)를 비롯하여

보락사, 수미복수묘 등의 라마사원이 건설되었다.

청은 내몽고의 초원지대인 아우르는 사원들을 건설함으로써

중화세계의 안과 밖을 모두 아우르는 지배자임을 과시하고자 했다.

 

 

 

 

만국래조도(萬國來朝圖) - 연경 자금성에 모인 여러 나라 사신

청대, 전체 크기는 세로 200×가로 207㎝이며, 북경 고궁박물원에 소장되어 있다.

 

 

 

 

외국 사신들이 연경 자금성(紫禁城)에 도착하여 하례를 드리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태화전(太和殿)을 중심으로 양쪽에 있는 청동 사자상 등의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각도로 그렸다.

나무 위에 눈이 내린 것으로 보아 신년하례 장면으로 추정되며

하단 아래 부분에 조선 사신단의 모습이 보인다.

 

 

유구(琉球)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약 400년 동안 독자적인 왕국을 발전시킨 유구(오키나와)는

조선,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와 활발한 중계무역을 통해 해상왕국으로 번영한 왕조이다.

14세기 후반부터 명나라와 조공-책봉 관계를 맺었다가

1609년 사츠마번의 침입으로 일본 에도막부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후 일본의 영향 아래에 있으면서 독립국으로 중국과 조공무역을 지속하였다.

중국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제작된 칠기, 도자기, 염직물 등은 유구만의 독특한 문화로 꽃을 피웠다. 유구와 조선은 조선전기까지 교린외교 하에 활발하게 교류하였으나

17세기 이후에는 국교가 단절되어 간접적인 교류만 있었다.

지봉 이수광은 1611년 북경 회동관에서 유구사신 채견(蔡堅)과 마성기(馬成驥)와 필담을 나누기도 했다.

 

 

 

 

 

 

 

 

건륭어제석고문(乾隆御製石鼓文) 탁본, 열하 피서산장박물관 소장

열하를 가장 많이 찾았던 건륭제가 친히 집자하여 만든 10편의 석고문 중 일부이다.

석고문은 중국 진제(秦帝)의 수렵활동을 돌에 새긴 시를 말하며,

전서로 쓰여져 있어 중국 고대문자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전해진다.

석고(石鼓)라는 이름은 새긴 돌의 모양이 북 모양과 닮았다고 하여 붙인 것이다.

 

 

1790년 건륭제는 국학을 계승한다는 취지 아래에 고대 석고문에 쓰여진 글자를 집자하여

총 10편의 석고문을 만들고 이를 열하의 문묘에 두었다.

내용은 건륭제가 열하에서 수렵활동을 한 것을 묘사한 것이다.

만주족의 황제가 중화 문명을 이해하고 높이 숭앙한다는 뜻을 대내외에 밝힌 것이다.

    

 

담헌 홍대용(湛軒 洪大容, 1731∼1783) 초상

1766년(영조 42) 홍대용이 연행사(燕行使)의 서장관인 작은아버지 홍억의 수행군관으로

북경을 방문했을 당시 그려진 초상이다.

당시 사행의 내용을 담고 있는 『일하제금합집(日下題襟合集)』에 그려진 간략한 모습을 확대한 것이다.

 

『일하제금합집』에 실린 홍대용 일행의 초상화.
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부사(副使)의 군관 김재행, 상방 비장(裨將) 이기성,

서장관(書將官) 홍억, 부사 김선행, 정사(正使) 이훤의 초상이다.

 

김재행은 입상(立像)으로 무관복장을 한 호걸스런 풍채가 돋보이며

이기성은 선 모습을 그린 것으로 무관 복장을 했으며

홍대용(洪大容)의 삼촌 홍억(洪檍) 서장관은 과묵한 듯 얼굴이 숙인 채 앉아 있다.

또 부사 김선행(金善行)은 탑상 위에 걸터앉아 필담하는 모습이고

정사 이훤(李煊)은 왕족답게 근엄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홍대용의 초상
청의 선비 엄성(嚴誠)이 그린 것으로

주문조(朱文藻)가 엄성의 글과 그림을 모아 엮은 책인 『일하제금합집(日下題襟合集)』에 실려 있다.

 

 

***「일하제금합집(日下題襟合集)」

중국 남쪽지방인 항주에서 북경으로 과거 보러 가는 길에

마침 북경에 머물고 있던 홍대용 일행과 교유했던 엄성(嚴誠)이라는 항주 문인이 남긴 것으로

특히 여기에는 홍대용을 비롯한 조선외교사절 6명의 화상이 인물평과 함께 들어있다.

 

홍대용은 당시 외교사절단 서장관이던 삼촌 홍억(洪檍)을 따라 북경을 방문했다가

사절단 정사 순의군(順義君) 이훤(李煊)의 군관 이기성(李基聖)의 소개로

엄성을 비롯한 항주 문인들과 교유를 갖게 됐다.

초상화가 남겨진 인물은 홍대용을 비롯해

홍억, 이훤, 이기성 외에 사절단 부사였던 참판 김선행(金善行)과 그의 사촌동생 김재행(金在行)이다.

 

지금까지 홍대용 초상화는 동국대 김태준 교수가 <홍대용 평전(1987. 민음사)>에서

이번에 중국에서 발견된 화상과 같은 것을 소개한 적이 있을 뿐이며

그나마 원본을 다시 베낀 모사본인데다 필체가 흐릿해 세밀한 얼굴묘사 등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박교수가 찾아낸 이 화상은 유복(儒服)을 걸친 채 두 손을 공손히 모아 소맷자락 안에 넣은

홍대용을 그린 것으로 ‘홍고사대용(洪高士大容, 고사는 높은 선비라는 뜻)’이라는 제목이 붙어있으며

무엇보다 보존상태가 완벽해 온화한 듯한 그의 얼굴 표정까지 또렷이 읽을 수 있다.

 

「일하제금합집」필자인 중국인 엄성은 그의 책에서 홍대용은 처음 만날 때는 무복(武服)을 입고 있었으나 다음날 유복으로 갈아입은 그에게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엄성은 홍대용에 대해 “시를 짓지 않지만 시에는 조예가 깊다”고 평가하고 있다.

   

순천향대 중문과 박현규 교수가 중국 북경대도서관 선실본에서 발굴해 국내에 소개한

조선후기 실학자 홍대용 관련 기록, 조선외교사절단과 주고받은 시문과 서찰 등을

중국인이 기록한 「일하제금합집(日下題襟合集)」은 해방 후에까지도 국내에 있었다.

이런 사실은 홍대용 연구에만 일생을 바치다시피 그에 대한 단행본만 3권을 출판한

김태준 동국대 교수(국문학)가 증언하고 있다.

김교수에 따르면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중요문헌 해설서인 「조선사료집진」에는

이 책을 「조선사신화상」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하면서 여기에 실린 홍대용을 비롯해

1766년(영조 42, 건륭 31) 북경에 갔던 조선사신단 일행 4명의 상을 다시 게재해 놓고 있다.

그러면서「조선사료집진」은 이 책은 충남 연기에 사는 홍사덕이라는 사람이 소장하고 있다고

소장처까지 밝히고 있다. 홍사덕은 홍대용의 후손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기록을 주목한 사람은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을 만든 역사학자 고 김양선 교수였다.

김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홍사덕씨가 소장하던 「일하제금합집」원본을 인용하면서

“지금은 숭실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런데 숭실대박물관에는 현재 이 책이 남아있지 않다.

김태준 교수는 “조선총독부와 김양선 교수 기록을 보고 숭실대 박물관과 김교수 유족을 비롯해

이 책이 있을 만한 곳을 샅샅이 뒤졌으나 찾을 수 없었다”면서

“이 책이 국내에서는 아예 자취를 감췄거나 아니면 누군가가 공개를 하지 않은 채 숨기고 있을 것”

이라고 추정했다.

 

북경에서 홍대용 일행을 만난 중국 항주 출신 문인인 엄성(嚴誠)의 기록인 이 「일하제금합집」은

언제 조선에 유입됐을까. 홍대용이 남긴 기록을 뒤져보면

그는 생전에 중국에서 이 책을 받아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을 남긴 엄성은 북경에서 홍대용을 만난 다음해 복건성에서 학질에 걸려죽게 된다.

그런데 홍대용이 북경에서 돌아온 지 12년째, 즉 엄성이 죽은 지 11년째 되던 정조 2년(1778)

홍대용은 이덕무와 함께 북경을 방문했다 돌아온 손유의(孫有義)에게서 「일하제금합집」으로 추정되는 엄성의 유고를 받았다고 홍대용이 손유의에게 쓴 편지에서 적고 있다.

이로 미뤄보면 홍대용은 엄성이 남긴 이「일하제금합집」을 넘겨받아 보관해 왔으며

그것이 일제 때 그 후손 홍사덕을 거쳐 숭실대 김양선 교수까지 전해졌음이 분명하다.

: 1999.03.23 연합뉴스

 

*** 홍대용과 엄성

홍대용은 자기보다 한 살 아래인 엄성과 특히 가까웠다.

엄성은 민(閩)이란 땅에서 병이 위독할 때 홍대용이 선물로 준 조선산 먹을 꺼내어 향기를 맡다가

가슴에 올려놓은 채 운명하였다.

그의 죽음을 듣고 하늘이 자신을 괴롭힘이 너무도 혹독하다며 통곡한 홍대용이 보낸 애사와 향폐는

엄성이 죽은 지 두 해째 맞는 제사에 당도하여 항주의 선비들을 경탄시켰다.

엄성은 홍대용과 이기성의 초상화도 그려 주었다.

엄성은 본래 그림을 잘 그렸고 특히 백묘 인물화에 능하여 자화상을 그린 일도 있었는데

그가 그린 홍대용의 초상 또한 백묘인물화였다.

 

반정균은 홍대용을 「담헌기(湛軒記)」라는 글에서 이렇게 칭송했다.

홍대용은 기상이 높고 문견이 넓으니, 중국 서적 중에 보지 않는 것이 없고,

율력ㆍ전진의 법과 염락관민의 종지를 궁구하지 않음이 없다.

또한 시문으로부터 산수에 이르기까지 능치 못함이 없고

이론을 들으매 옛사람을 일컫고 의리를 근본으로 삼으니 짐짓 유자의 기상이 있다.

이는 중국에서도 쉽지 않은 인품이거늘 어찌 진한의 황원한 지경에서 얻을 수가 있을 것인가?

<반정균 「湛軒記」, 홍대용 『국역 담헌서』>

 

 

 

박제가(楚亭 朴齊家, 1750-1805)의 초상, 나빙(羅聘, 1733-1799)의 송별시

 

박제가가 청나라 북경에서 사귄 화가 양봉 나빙(兩峰 羅聘)이 그린 박제가 초상화.

원본은 추사 김정희의‘세한도’를 소장했던 일본 후지즈카 교수가 가지고 있다가

일제 말기 도쿄 태평양전쟁 때 소실됐고, 사진만 남았다.

당시 나빙은 강남을 떠나 북경 유리창의 관음사에 기거하며 불교에 귀의하고 있었기 때문에

박제가를 만날 수 있었다. 

북경 유리창의 관음각(觀音閣)에서 청나라의 화가인 나빙이 그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그려준 것.

 

 

 

相對三千里外人  삼천리 밖의 사람을 만나니

欣逢佳士寫來眞  기꺼이 훌륭한 선비의 모습을 그린다네.

愛君丰韻將何比  그대의 아름다운 풍채 사랑하여 무엇에 비할까.

知是梅花化作身  이 매화가 변해 그대가 되었음을 알겠네.

何事逢君便與親  무슨 일로 그대를 만나 친하게 되었던가.

忽聞別我話酸辛  홀연히 이별의 소식 들으니 씁쓸하다네.

從今淡漠看佳士  이제껏 담막한 그대를 보았는데

唯有離情最愴神  이별의 정(情) 정말 슬프기만 하다네.

 

 

 

 

명나라 사신을 의순관에서 맞이하는 그림(의순관영조도, 義順館迎詔圖)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1572년(선조 5) 명나라 신종황제의 등극을 알리는 중국 사신이

평안도 의주의 압록강가에 있는 의순관(義順館)에 도착하는 모습을 그렸다.  

 

 

 

 

이수광의 시문

1625년 가을 이수광이 함평으로 부임하는 학사(學士) 박정(朴炡, 1596-1632)과 헤어지면서 지은 시문이다.

 

 

“성대에는 현사를 우대하는데, 어이하여 이번 행차가 있는가.

붉은 충정을 오직 나라에 허락하고, 평소의 뜻 명예를 구하지 않았네.

해지는 강남 길, 가을바람 부는 바닷가 성, 임금과 부모가 모두 염려되리니

멀리 떠나는 마음을 묻지 않노라.”

 

 

 

성호 이익의 초상

포천시에 있는 옥동서원에 모셔졌었던 것으로 전하는데 이 초상은 한국동란 당시 화재로 없어졌다.

이 초상은 그것을 바탕으로 후손들이 다시 제작한 것이다.

1989년 재제작(복제품)

 

 

 

 

 

 

- 관음사 : 박제가가 나빙을 만났던 공간

- 자금성 오문 : 달력 반포장소, 자금성의 정문

- 조양문 : 조선연행단이 지나는 연경의 동문

 - 옥하관(회동관옛터 추정지) : 조선연행단 숙소

- 동천주당 : 홍대용이 방문했던 성당

 

- 남천주당 : 소현세자와 아담 샬이 만난 성당

- 양매죽사가 :

연암 박지원이 중국 학자와 교류했던 장소

- 법원사(민충사) : 24살의 추사 김정희가 방문한

연경의 최고 사찰

 

 

 

 

남천주당(南天主堂)=남당(南堂)

 

현존하는 북경에서 가장 오래된 천주교 성당이다.

천주교가 중국에 전파되는 과정에는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리치의 역할이 컸다.

그는 단순한 선교사가 아니라 중국문화와 학술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동시에 유럽의 학문과 과학기술을 중국에 전수하려고 시도했던 문화인이었다.

남당 역시 1601년(만력 29)년에 건립한 것이다.

남당은 홍대용을 비롯하여 북경을 방문했던 조선 사신들도 들렸던

‘명소’ 이자 이(異)문화 섭취를 위한 전당이었다.

 

 

홍대용과 박지원 등의 연행록에는 이들이 방문한 곳이 서천주당으로 되어있으나, 실은 남천주당이다.

천주당(天主堂)은 곧 서양사람의 관소로, 남서쪽에 위치한 선무문 내에 있다.

건륭제 때 ‘통미가경당(通微佳境堂)’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남천주당은 현존 건물 가운데는 가장 오래된 교당으로

明 만력 33년(1605) 천주교 예수회 선교사들이 세웠다. 청 건륭제 40년(1775) 불탔으나 다음해 중건됐다.

마테오리치 신부가 활동했던 곳이며, 소현세자와 교류하였던 아담 샬이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 사신들이 묵었던 옥하관과도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어

조선 사신들은 예수회 소속 서양신부들과 접촉하기에 용이하였다.

이들 천주당 신부들과의 만남은 조선에 서학이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천주당은 김창업의 『연행일기(燕行日記)』이후 연경을 방문하는 사신들이 반드시 들리는 명소가 되었다. 홍대용은 1766년 남천주당을 방문하여 당시 남천주당의 선교사였던

유송령(劉松齡, August von Hallerstein)과 포우관(鮑友官, Anton Gogeisl)을 만난다.

그는 모두 네 차례 천주당을 방문하였는데, 천주당에서 망원경으로 태양을 관찰하고

생전 처음 보는 파이프오르간의 제도를 살피고 연주하기도 하였다.

 

나중에 연행에 오른 박지원 역시 천주당을 찾은 감격을 『열하일기』에서 술회하였다.

천주당 바람벽과 천장에 그려져 있는 구름과 인물들은 ‘번개처럼 번쩍이면서 먼저 내 눈을 뽑을 듯 하는

그 무엇이 있었고, 꼭 숨을 쉬고 꿈틀거리는 듯 음양의 향배가 서로 어울려 저절로 밝고 어두운 데를

나타내고 있었다’고 하여 서양의 화법에 대해 감탄하기도 하였다.

 

18세기 이후 조선의 실학자들은 천주당을 찾아 서학을 접하면서 그 사유의 지평을 넓히게 된다.

남천주당은 중국식 불교사원과 유럽식의 건축양식이 융합되어진 성당이다.

대성당은 이탈리아의 대성당과 비슷한 반원 아치형의 로마네스크 양식이며

남북으로 길게 놓여있고 전체적으로 암회색의 벽돌을 사용하여 축조하였다.

화려하지는 않으나 고졸하고 소박함을 더해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천주당의 벽화를 감상하다

“무릇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사물의 겉모습만 그리고 내면은 그리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대체로 사물에는 튀어나오고 오목하며 크고 작으며 멀고 가까운 형세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붓대를 대강 몇 차례 놀려서 산의 주름이 없기도 하고

물에 파도를 없애기도 하며 나무의 가지를 없애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뜻을 그린다(寫意)’라고 하는 것이다.

 

 

두보(杜甫, 712-770)의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마루 위의 단풍나무 이것이 어쩐 일인고 (堂上不合性楓樹)

낮은 강산에 안개가 일어나니 괴이하구나 (怪底江山起煙霧)

 

이 시에서 ‘마루 위’라고 한 것은 그곳이 나무가 날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뜻하고

‘어쩐 일인고’라고 한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또 안개는 응당 강산에서 일어나야 하는데 병풍에서 일어난다면

아주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는 뜻이다.

 

지금 천주당 가운데 바람벽과 천장에 그려져 있는 구름과 인물들은

보통 생각으로는 헤아려낼 수 없는 것이고 보통 언어와 문자로는 형용할 수도 없는 것이다.

내 눈으로 이것을 보려고 하는데 번개처럼 번쩍이면서 먼저 내 눈을 뽑는 듯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나는 화폭 속의 인물들이 내 가슴 속을 꿰뚫어보고 있는 듯한 게 싫었다.

또 내 귀로 무엇을 들으려고 하는데 굽어보고 쳐다보고 돌아보는 그들이

먼저 내 귀에 무엇을 속삭였다. 나는 그것이 내가 숨긴 데를 꿰뚫어 맞힐까봐 마음이 겸연쩍었다.

내입이 장차 무엇을 말하려 하는데 그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돌연 우레 소리를 내는 듯하였다.

 

가까이 가서 바라보니 성근 먹물을 허술하고 거칠게 묻혀서 단지 그 귀, 눈, 코, 입 등의 형태와

터럭, 수염, 살결, 힘줄 등의 사이를 희미하게 그어 갈라놓았을 뿐이다.

털끝만한 치수도 정확하게 묘사해놓아서 마치 숨을 쉬며 꿈틀거리듯 음악의 향배가 서로 어울려

저절로 밝고 어두운 부분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림에는 한 여자가 5-6살 된 어린애를 앉혀두었다. 그 어린애는 병든 얼굴로 힐끗 보고 있는데

그 여자는 고개를 돌린 채 어린애를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옆에는 시중 5-6명이 병든 어린애를 굽어보고 있는데 참혹해서 머리를 돌리고 있는 자도 있었다.

새의 날개가 붙은 귀신수레는 박쥐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땅에 떨어져 찌그러져 있었다.

한 신장(神將)이 발로 새의 배를 밟고 손에는 무쇠방망이를 쳐들고 새머리를 짓찧고 있었다.

또 머리는 사람인데 몸뚱이에 새의 날개가 돋은 자도 있었다.

온갖 그림이 다 기괴하고 망측하여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해낼 수도 없었다.

 

좌우의 바람벽 위에는 구름이 몽실몽실 쌓여 한여름의 대낮풍경 같기도 하고

비가 갓 갠 해수면 같기도 하며 산골에 날이 새는 듯 구름이 끝없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수없는 구름 꽃봉오리가 햇발에 비치어 무지개가 떴고

멀리 바라보이는 곳은 까마득하고도 깊숙하여 끝이 없어 보였다.

온갖 귀신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갖은 도깨비가 나타나 멱살을 붙들기도 하고

소매를 뿌리치기도 하는데, 서로 어깨를 비비고 발등을 밟고 있었다.

가까운 것은 멀리 뵈기도 하고 얕은 데는 깊어보이기도 한다.

숨은 놈이 드러나기도 하고 가렸던 놈이 나타나기도 하여 뿔뿔이 따로 서있으니

모두 허공을 등에 대고 바람을 돌아가는 모습이었다.

 

대체로 구름이 서로 간격을 두어 이렇게 보엿다.

천장을 바라보니 수많은 어린아이들이 오색구름 속에서 뛰노는데

마치 허공에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것 같았다.

살결을 만져보면 따뜻할 것만 같고 팔목이며 종아리는 포동포동 살이 쪄 있었다.“

- 박지원 『열하일기』「구외이문(口外異聞)」

 

 

 

 

동천주당(東天主堂)

 

기록은 홍대용의『연기(燕記)』에 소상하다.

동천주당은 몽고관(蒙古館)에서 북옥하교(北玉河橋)를 지나 자금성을 따라가다가 보이는

기이한 기와지붕을 인 서양식 집이다. 지금의 왕부정대가(王府井大街) 74호에 있다.

북경 4대 천주교당 가운데 하나인 동천주당은 명말 2명의 선교사가 세웠으며

청조가 북경에 들어올 때 훼손됐다가 순치 12년(1655)에 이 땅을 하사했다.

이때 남당과 같이 건립됐지만 가경 12년(1807) 화재로 폐허가 됐는데 1884년에 로마식으로 다시 건립됐다.

의화단의 난 때 다시 불탔으나 1904년 배상형식으로 프랑스와 아일랜드가 공동으로 중건했다.

 

천주당을 방문한 연행사들은 원근법을 이용한 서양 그림의 사실적인 화법에 감탄하곤 한다.

홍대용은 북쪽 벽에 그려진 천주(天主)의 화상(畵像)이 모발이 무성하여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하여 원근법을 사용한 서양그림의 입체법에 탄복하였다.

 

동천주당 서쪽에는 자명종루(自鳴鐘樓)가 있고 누각 아래에는 해시계(日晷石) 한 쌍이 있다.

서쪽으로 난 문 밖으로 두 길 되는 대(臺)가 있었는데 이를 관성대(觀星臺)라 하였다.

대 위에는 집 셋을 세워놓았고 가운데 집에 혼의, 망원경 등 여러 가지 의기들을 저장하여 두었다.

대 아래 넓이가 수십 묘(畝) 되는 뜰에는 벽돌을 쌓아 길이가 1丈쯤 되는 기둥을 만들어두었는데

위에는 열십자로 구멍이 뚫려있었다. 이런 것이 무려 수백 개가 뜰에 널려있었으니,

대개 봄여름에는 위로 포도덩굴이 올라가도록 횃대를 놓아둔 것이다.

 

기둥 옆에 군데군데 무덤처럼 흙을 모아둔 것은 포도를 저장하는 곳이다.

뜰 동쪽의 두어 칸 집이 있고 가운데 우물이 있었다. 우물 위에 두레박틀을 만들었고

옆에는 치목(齒木)을 가로질러서 톱니바퀴가 맷돌처럼 고르게 돌아가게 하였다.

벽에는 버드나무 물통이 수십 개 매달려 있어 봄여름에 물을 길어 포도에 대는데

기계바퀴가 한 번 돌면 수십 개의 두레박이 차례차례로 물을 끌어올리기 때문에

사람이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물은 도랑에 고루 퍼져 뜰에 가득 차게 된다.

홍대용은 천주당에서 포도를 힘들여 가꾸는 것은 술을 빚기 위한 것이라고 적었다.

 

천주당에 가다

비가 내렸다. 남관에 유숙하였다. 오후에 천주당에 갔다.

천주당은 순성문(順城門) 동쪽에 있는데 전부 벽돌을 쌓아 지었고 나무라고는 하나도 쓰지 않았다.

천주당은 매우 높고 넓었으며 중국에서 사용하는 칸살이나 맹첨(甍簷, 용마루와 처마)의 제도를

사용하지 않은 건축물이었다. 흠천감관(欽天監官, 명대 이후에 천문과 역수를 맡아보던 관원으로

서양에 온 선교사들도 이 관직에 임용되었다) 2명은 서양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때마침 그들은 원명원(圓明園)에 근무하러 가서 부재중이고

다만 이곳을 지키는 한족들만 있었다. 주렴을 걷고 문으로 들어가니

마치 깊은 골짜기에 들어선 것과 같아서 사람의 말소리가 울려 퍼졌다.

 

천장을 바라보니 마치 가마솥을 엎어놓은 것 같았는데 거기에는 여기저기 인물화가 그려져 있었다.

한 어린아이는 놀란 눈을 하고 위를 쳐다보고 있고 한 부인은 걱정스런 모습으로

그 어린아이를 어루만지고 있으며, 한 늙은이는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손을 비비며

그 어린아이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 듯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사방에서 구름이 어린아이를 감싸고 있었고

그 구름 위로 머리만 내어놓은 사람이 무수히 많이 그려져 있었다.

그 집은 3개의 기둥으로 되어 있었다.

첫 번째 기둥의 북쪽 벽에 마치 불당(佛幢, 불교계에서 각종 깃발을 달아 세우는 게양대, 당간)과

같은 나무로 만든 것이 있었다. 거기에도 부인이 병든 아이를 보호하는 그림이 있었는데

위에는 백조 1마리가 날개를 펴고 입으로 하얀 기운을 토해내며 부인의 이마에 쏘아대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왼쪽과 오른쪽의 벽에도 또다시 3개를 설치하여 그곳에는

2개의 날개가 달린 여자가 창을 가지고 사람을 찌르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또 어떤 늙은 사람이 두 손을 벌리고 십자가에 매달려 떨어지려는 어린아이를 받으려는 모습을

한 그림도 있었다. 그런데 그 그림은 너무 갑작스럽기도 하고 매우 괴이하기도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좋지 않은 생각이 들게 하였다.

일반적으로 병든 어린아이는

이른바 천주교에서 말하는 야소(耶蘇, 기독교에 등장하는 예수의 중국어 음역어)이고,

근심하는 부인은 야소의 어미라고 하였다.

 

서양사람은 성품이 깨끗하여 집안 벽장 위에 붉은 나무그릇에다가 왕겨 따위를 담아서

사람의 침을 그곳에 뱉게 한다고 한다. 옥상에 또 누각이 있었고 밖으로 5개 창문이 있는데

납지(蠟紙, 밀랍을 녹여 만든 종이)로 발라서 광선을 차단하고 있는 것이 유리와도 같았다.

그곳을 지키는 사람은 주인이 없다는 이유로 옥상에 올라가서 구경하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 위는 풍로고(風鑪鼓)와 기상악(氣像樂) 등의 악기를 설치하였다고 하는데 매우 시끄러웠다.

 

이곳 천주당은 근래에 불이 나서 새로 지었다고 한다.

이 집은 전체가 벽돌로 이루어져 있어 불에 타지 않을 듯하다.

당(堂)의 오른쪽을 작은 문이 하나 있고 문 안으로는 작은 길이 있었다.

작은 문을 통해 바라보니 북쪽 벽에 철사줄에 목이 매인 큰 개의 그림이 있었는데

얼핏 보니 물려고 덤비는 것 같아서 무서웠다. 그 그림 밑에는 살아있는 개 몇 마리가

그늘에 누워있었는데 그림의 개와 살아있는 개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서쪽 담 밖에 의기(儀器)를 간직하는 집이 있었는데

천주당을 지키는 사람이 끝내 구경하기를 허락하지 않아 보지 못하였다. 매우 한스럽다.

- 이덕무『입연기(入燕記)』 1778년 6월14일

 

 

 

유리창(琉璃廠)

 

정양문 밖 남쪽 성 밑으로 가로 뻗치어 선무문 밖까지 이르는데 연수사(延壽寺)의 옛 터이다.

당나라 때에는 연하향(燕夏鄕)이라 불렀으며 송 휘종이 북으로 순행할 때 황후와 함께 연수사에 묵었다는 기록이 있다. 유리창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이곳이 유리기와와 벽돌을 만드는 공장이었다는데서 연유한다.

유기기와와 벽돌은 흙으로 빚은 기와와 벽돌에 여러 가지 색깔을 칠하고

그 위에 유약을 덧칠하여 광택을 낸 것이다.

이 공장에는 사람의 출입을 금하고 기와를 구울 때면 더구나 금기하는 것이 많아서

비록 전속기술자라도 모두 넉 달 먹을 식량을 갖고 들어가되 한 번 들어가면 마음대로 나오지 못했다 한다.

 

명대에 이르러서도 궁궐 건설에 필요한 유리기와와 벽돌을 굽는 지역이었던 유리창은

청대 초 저명한 문인들이 북경에 머물면서 유리창 부근에 정착하게 되면서

문화적인 분위기가 점차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유리창이 본격적인 문화지역으로 발전한 시기는 청 건륭연간에 들어서이다.

건륭제가 대형총서인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하기 위해 사고전서관을 세우고

전국에 산재된 서책을 북경으로 모으도록 하였다.

각 지방관청에서 파견된 문인들이 이 서책들을 가지고 경사로 들어왔고,

그들은 성밖 유리창과 그 인근 지역의 각 지방관서에서 세운 회관에 머물기 시작했다.

이들은 경사에 거처할 동안 유리창에 몰려들어 서적을 보거나 담소를 나누었으며

사고전서관에 근무하는 학자들도 이곳에 와서 학문을 토론하거나 필요한 서적과 문물을 구하곤 하였다.

이로부터 유리창은 문화거리로서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박지원의『열하일기』「황도기략」편을 보면, 유리창 점포에는 재화와 보물이 넘치고 있었는데

서점으로서 가장 큰 곳은 문수당(文粹堂), 오류거(五柳居), 선월루(先月樓), 명성당(鳴盛堂) 등이고

주옥, 비단, 주육, 과일 등 여러 가지 물건이 좌우 가게에 진열되었는데

화려하여 사람을 현혹시켜 눈길을 빼앗을만하다고 했다.

유리창은 특히 서적, 비판(碑版), 정이(鼎彛), 고동(古銅)의 화로와 기완(器玩) 가운데

단아한 것이 많이 쌓여있어서 널리 알려졌으며

장사하는 자들 중에는 과거에 응시하여 관리가 되려는 남방의 수재들이 끼어있어

시사(市肆)를 구경하는 사람들 중에 가끔 지명(知名)의 인사가 있다고 한다.

 

1766년 북경을 방문하였던 홍대용은 유리창에서 엄성, 반정균, 육비 등 중국의 선비들을 만나는데

유리창에서의 이 만남은 한중교류사의 시작으로 평가받는다.

 

유리창은 청말 이후의 각종 외침과 민란, 중국공산당 정부수립 이후 유물의 국가소유화정책,

문화대혁명 등을 거치면서 큰 손상을 입고 겨우 명맥만 유지하였는데

최근 시장경제를 도입한 중국정부의 침체된 유리창을 부활시키려는 노력으로 새롭게 변신중이다.

 

유리창에서 『동의보감(東醫寶鑑)』을 보다

유리창은 명나라 때 동창(東廠)이라 불렸다.

호동 어귀에 입구를 알려주는 큰 문이 있고 문을 들어가니 책가게가 있었다.

각각의 이름이 숭문당(崇文堂), 문수당(文殊堂), 성경당(聖經堂), 명성당(明星堂), 문성당(文星堂), 유당(裕堂), 취성당(聚星堂), 대초당(大招堂), 유무당(有無堂), 문무당(文武堂), 영화당(英花堂),

문환재(文煥齋)로 모두 13 가게였다.

다 두 겹의 집을 짓고 안팎으로 여러 탁자를 사면으로 높게 쌓았으며

집 위에도 누각을 만들었으니 한 가게에 쌓인 책만도 수만 권이 넘을 지경이었다.

 

책의 목록을 살펴보니 거의 대부분이 명나라 이후 문집이요,

태평성대에 보탬이 될만한 것들이 많았으니 모두 전에는 듣지도 못하던 것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책을 살 때 늘 이전에 나온 것을 구하였기에

상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만나기만 하면 비싸게 값을 부른다.

우리나라에서 귀하게 여기는지를 짐작하였기 때문이다.

이 가게 외에도 2-3곳이 더 있으나 그다지 볼만한 것이 없었다.

가게들마다 다 우리나라의『동의보감』을 귀중하게 책으로 만들어서

3-4질씩은 모두 다 갖고 있었다. 저들도 중요하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 서유문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 1798년 12월22일

 

 

옥하관(玉河館)

 

명나라 때 우리 사신이 북경에 이르면 예부(禮部) 근처에 있는 여관에서 묵었는데

순치 원년부터 관(館)을 새로 짓고 우리 사신들을 거처하게 했다.

옥하(玉河)의 곁에 있기 때문에 ‘옥하관(玉河館)’이라 하고 혹은 남관(南館)이라고도 하였다.

건륭 임진년(1772, 영조 48) ‘회동관(會同館)’이라 사명(賜名)하고

관문에 ‘회동 사역관(會同四譯館)’이라고 편액하였다.

 

그러다가 러시아(鄂羅斯)사람들에게 점령되자 정양문 안 동쪽 성밑 건어호동에 관을 마련하고

이름을 ‘서관(西館)’이라 하여 우리 사신을 옮겨 묵게 하였다.

 

서관은 한림서길사원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고 옥하관보다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그런데 러시아에서 다시 그곳으로 옮겨왔기 때문에 우리 사행은 다시 옥하관에 관사를 정하게 되었다.

지금의 동교민항 호텔 자리이다.

 

이 관은 대개 네 겹으로 되어 있다.

제일 첫집은 곧 마루(廳事)로 세 사신이 아문(衙門)의 여러 관원들과 공적인 예로 만날 적에 모였는데

조선 후기에 세폐, 방물 등을 저장하는 곳으로 쓰였다.

두 번째 집은 정사(正使)가 거처하고, 셋째 집은 부사(副使)가 거처하고,

넷째 집은 서장관(書狀官)이 거처하였다.

집마다 다 건넌방과 좌우 익랑(翼廊)이 있어

반당(伴倘: 사신이 자비로 중국에 데리고 가던 종자)과 비역(裨譯)들에게 나누어주어 거처하게 하였다.

 

문밖에는 평상을 걸쳐서 마루를 만들어 오르고 내리는데 편리하게 하고,

마루 밑에는 자그마한 삿자리 방을 만들어서 마두들이 거처하며 부름을 기다리게 하였다.

일행의 쇄마(刷馬)와 역마(驛馬)는 모두 삿자리집 밖의 노천에 있었다.

 

관문(館門)은 세 사신이 출입하는 때가 아니면 늘 닫아두고,

동쪽에 협문이 있어 일행의 여러 사람들은 그곳으로 다녔다고 한다.

조선의 연행사들은 옥하관의 이 동쪽협문을 나와 유리창 등 북경의 번화한 거리와 고적을 돌아보고

수많은 중국의 명사들과 교유할 수 있었다.

『신원지략(宸垣識略)』에는

“옥하교는 동안가(東安街)에 있는 것을 북옥하교(北玉河橋),

동강미항구(東江米港口)에 있는 것을 중옥하교(中玉河橋),

동성근에 있는 것을 남옥하교(南玉河橋)라 한다. 사이관(四夷館)은 미항(米巷)에 있으며

지금 고려인(高麗人)의 관사는 동성근에 있으니 곧 사이관의 별관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청에서 찍은 서책을 보고 칭찬하다

옥하관에 머물렀다.

옥하관에 있는 일행은 같은 나라사람인데도 인심이 착하지 못해서

밤이면 말굴레를 벗겨가기도 하고 또 의복을 훔쳐가기도 한다.

그런데도 수색해서 체포할 방법이 없으니 정말 통탄스럽다.

 

각종의 서책을 가져다 보았는데 청나라에서 새로 찍은 것도 많았다.

학문을 없애버린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모든 각판(刻板)이 모두 토판(土板)이므로 만들기가 매우 수월했다.

책이름이 무척 많아 다 볼 수는 없었다.

날마다 나오는 저보(邸報, 북경에서 조정의 중요한 내용을 기록해서 지방에 알려주는 문서)도

토판을 쓰는데 그 글씨 새기는 일이 편리하고 쉽기 때문이다.

- 최덕중 『연행록(燕行錄)』, 1713년 1월5일

 

 

융복사(隆福寺)

 

문승상사에서 동남쪽으로 수 리 거리에 있다. 절은 큰 시가 서북쪽에 있는데 일명 ‘대융복사’라고도 한다.

명나라 경태 3년(1452, 문종 2) 공부시랑 조영(趙榮)이 일꾼 1만명을 감독하여

영종 남내(南內)의 나무와 돌을 거두어서 지었다고 한다.

절 안의 여러 전(殿)은 합쳐서 수십 채가 있었는데 옹정 9년에 중수했다.

 

박지원은『열하일기』앙엽기(盎葉記)에서 융복사의 장날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융복사의 장날은 매월 사흘과 하루인데 거마들이 더욱 복잡하고

절 안에는 공경과 사대부들의 수레와 말이 연이어 이르러 손수 물건을 골라잡아 사곤 한다.

온갖 물건이 뜰에 가득 차고 주옥과 보물들이 이리저리 발길에 채다시피 구르고 있어

걷는 사람의 발길을 조심스럽게 하고, 사람의 눈을 어리둥절하게 하였다고 한다.

섬돌 층대며 옥돌 난간에 걸어둔 것은 모두 용봉무늬를 놓은 담요와 모직들이며

담장을 둘러싸다시피 한 것은 모두가 법서(法書)와 명화(名畵)들이며

이따금 장막을 친 채 징과 북을 치는 곳은 재주를 부리고 요술을 부려서 돈벌이를 하는 곳이다.

 

박지원은 돌아다니면서 장사치들을 상대로 물건값을 흥정하는 이들을 유심히 살펴보는데

그들은 모두 오중(吳中, 강소성지방)의 명사들이거나,

유람차 온 자는 대대로 한림서길사(翰林庶吉士) 같은 이들이라고 했다.

그들은 친구를 찾아 고향소식을 묻기도 하고 겸하여 그릇 등속과 의복을 사기도 하는데

찾는 물건들은 대개 골동그릇, 새로 발간된 서적, 법서와 명화, 관복과 염주, 향랑, 안경 등이다.

박지원을 비롯하여 이덕무, 박제가 등 조선의 연행사들은 유리창과 더불어 이곳 융복사에서

중국의 수많은 서적을 구입하여 조선에 소개하고 실학의 기틀을 닦기도 하였다.

 

융복사를 다녀온 역관의 이야기를 듣다

“이날 역관 치형(致馨)이 융복사 저자를 구경하고 왔다.

융복사는 명나라 경태 5년(1454)에 지어졌다. 그가 보고 온 것을 대강 말하였다.

 

‘이 절이 크고 화려하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작년에 큰 집 한 채에 불이 나서 다시 지을 때,

법당을 헐어 그 재목으로 그 집을 다시 지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법당은 또 다른 재목으로 고쳐지었는데 이전과 달라진 것은 없었으며

사방의 익랑 여러 채도 다 새로 지은 것이라 합니다.

왜 굳이 이 법당 재목을 옮겨서 집을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제작기술은 정교하고 신묘하였으며

그 빛나는 단청은 이전에는 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절 안팎 문안의 넓은 곳에는 빈틈없이 장사치들로 가득 찼습니다.

기이한 보배와 형형색색의 물화를 다 기록할 수 없고, 잘생긴 외모와 눈에 두드러지는 의복을 입고, 활기차게 떠들면서 분위기를 돋우는 사람들 중에는 조정의 관리, 선비인 듯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양가죽 옷과 베로 지은 상복을 입고 온 자도 엄청나게 많았으니

이는 어떤 풍속인지 모르겠습니다.

 

절 동쪽 어귀에는 가게 하나가 있는데

여러 모양의 자명종과 윤도(지구의를 말한다)를 파는 곳이었습니다.

가게 안의 금칠한 탁자 위에는 큰 궤짝이 하나 놓여있었는데

사면 유리와 기둥을 다 침향나무로 기묘하게 새겨서 만들었습니다.

앞에는 유리 한 겹으로 가리고 유리 안에는 수(繡)놓은 휘장을 드리웠는데

한가운데에 ‘인지서운(仁智瑞雲)’이라는 네 글자를 새겼습니다.

겉으로 보아도 신기한 글씨였습니다. 주인에게 궤짝 속을 좀 보여 달라고 하였더니

열쇠 하나를 집어서 유리 안의 한 구멍에 넣고 두어 번 돌리자 가운데 한 곳이 스스로 열렸습니다.

그 안의 자물쇠는 윤도 모양같이 만들었는데 밖에다가 지남철을 깔아서

두어 번 저절로 돌더니 궤짝 속에서 스스로 기이한 음악소리가 났습니다.

그리고 수놓은 휘장이 또한 스스로 걷히면서 그 안에서 대추만한 말과 팥알만 한 사람이

무수히 나오는데 다 옥(玉)으로 만들었습니다. 각각 도끼와 깃발을 들었는데

황제 앞에는 나열한 수레장막이 하나도 빠진 것 없이 두어 줄로 천천히 돌아갔습니다.

또 안에 한 겹 유리로 막힌 곳에는 코끼리, 황옥교(黃屋轎), 말 탄 시위(侍衛)들이 좌우로 벌려져

있었는데 또한 스스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유리로 8-9층 쌓았는데 저절로 돌고 있었고,

그 안에는 사람이 요동하는 듯싶더니 갑자기 금으로 만든 이층탑을 놓고 누런 양산을 받치더군요. 뜰아래 천 명의 관리들이 조회하는 모습도 만들어놓았는데 아주 세밀하고 정교하여

살아 움직이는듯 하였습니다. 이는 자못 귀신이 만든 것 같았습니다.

앞뒤로는 봉황이 입에 붉은 종이를 물고 공중에서 날갯짓을 해 춤추면서 내려오니

처음 열쇠를 넣어 돌릴 때부터 여러 번 변화하되 음악소리는 잠시도 멈추지 아니하였습니다.

그 음악소리는 맑고 아름다웠는데

그 소리는 양금을 치며 생황을 불며 경쇠를 치면서 나오는 소리였습니다.

반나절 동안이나 곡조가 서로 호응하더니 여러 겹 유리와 수놓은 휘장이 차례로 저절로 닫히자

음악소리도 따라서 그쳤으니 그 신묘함을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이 궤짝의 값이 백은 800냥이라 하더군요.

 

그밖에 자명종이 움직이면서 소리가 났는데 제작이 정밀하고 신기하였습니다.

서양나라의 자명종도 하나의 값이 은자 30냥이라고 하였으니

한 가게에 쌓인 것을 생각해보면 모두 다하면 몇 억만냥이나 될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중국에 재물이 많다는 사실을 이것으로 미루어서 알 수 있었습니다.

한 절 안에 있는 무수한 물품들과 가게에서 파는 것들이 별로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들은 없고,

쓰임이 일정하지 않은 잡물건에 가까우니 이상합니다.

 

비연(鼻煙)이라고 하는 담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루로 만들어 작은 병에 넣었으니

병은 한 치 남짓하였는데, 다 호박과 금패, 수정, 만호 같은 보배로 만들었습니다.

병을 기울여서 가루를 손끝에 찍어 코에 대고 기운을 빨아들이는데,

그 가루가 속으로 들어가며 재채기를 할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고 합니다.

사람마다 이 병을 사용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처음은 만주사람만 하다가

요사이는 한인(漢人)도 즐기지 않는 자가 없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면 문득 병을 주며 쓰는 법을 가르치면서 말하기를

‘코의 기운을 소통하는 것이니 아주 좋은 법입니다’라고 합니다.”

- 서유문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 1799년 1월11일

 

 

관상대(觀象臺)

 

자금성 동남 모퉁이에 위치한 흠천감(欽天監) 앞에 보이는 높은 대(臺)를 ‘관상대(觀象臺)’라 한다.

일반적으로 관상대에 오르는 일은 금지되었는데 성을 의지해서 높이 쌓았으므로

궁궐을 엿볼 수 있고 대부분의 의기(儀器)가 귀중한 보물들이기 때문이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는, 관상대 위에는 여러 가지 관측하는 기계들이 놓였는데

멀리서보면 큰 물레바퀴 같았다고 한다. 이 관측기구를 이용하여

일월(日月), 성신(星辰), 풍운(風雲), 기색(氣色)의 변화하는 현상을 예측할 수 있다.

관상대 아래에는 흠천감이 있어 천체와 기후에 관한 사무를 담당한다.

그 정당(正堂)에는 ‘관찰유근(觀察惟勤)’이라고 쓴 현판이 붙어있다.

 

뜰에는 청동으로 만든 혼상(渾象), 간의(簡儀) 등의 천문관측기구가 놓여 있다.

크기는 모두 대여섯 뼘쯤 되고 네 둘레에는 돌난간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또한 강희 연간에 만든 6의(儀)가 있는데

천체의(天體儀), 적도의(赤道儀), 황도의(黃道儀), 지평경의(地平經儀), 기한의(紀限儀)이다.

그 제도는 모두 서양에서 나온 것으로 매우 정밀하고 교묘하다.

 

관상대 위에 진열된 기계들은 혼천의(渾天儀), 선기옥형(璇璣玉衡) 등의 천문기구이다.

박지원은 흠천관에서 본 기구들이 석치(石癡) 정철조(鄭喆祚, 1730-1781)의 집에서 본 물건과 같았다고

했는데 일찍이 정철조는 대나무를 깎아 천문기구들을 만들었다고 전했다.

 

담헌 홍대용은 그의『연기(燕記)』에서 이른 아침 관상대에 올라 여러 천문기기들을 구경한 일과

관성대(觀星臺)에서 혼의(渾儀)와 망원경 등을 본 일을 기록하고 있다.

 

관상대를 찾아가다

관상대는 성 동남모퉁이에 있다. 흠천감의 관할 아래 있으며 의기들로 천체를 관찰하는 곳이다.

 

관상대는 유송령(劉松齡)이 일찍이 말하였다.

“황상의 금지구역으로 사람이 가까이 할 수 없다.” 통역들 역시 말하였다.

“이전에 우리나라 사람이 감관(監官, 감독하고 관리하는 관리)에게 뇌물을 주고 올라가

구경하고 왔는데 그 뒤 일이 발각되어 파면을 당한 일이 있어 사람을 금하는 것이 더욱 엄해졌다.”

 

들리는 말은 다음과 같다.

“성에 오르면 사형에 처한다는 법률이 있다.”

관상대는 성을 의지하고 있어 중금(中禁, 임금이 계시는 곳)을 엿볼 수 있고

또 위에 있는 의기들이 대부분 임금이 만든 것으로 국가의 귀중한 그릇들이므로

사람을 함부로 들여보내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3월 귀국할 때 길을 돌아 대(臺) 밑으로 갔다.

아침 해가 막 떠오르는데 멀리 10여 개의 의기가 돌난간 안으로 죽 벌여져 있는 것을 바라보니

이상한 모양과 제도들이 기이한 빛들을 반사하고 있었다.

곧장 훌쩍 날아오르고 싶었지만 도리가 없다. 대(臺) 위에서 한 사람이 난간을 의지하고 굽어보기에

나는 말을 세워 쳐다보며 이야기를 걸고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한 다음 한번 보여달라 하였다.

그는 고개를 저었고 손바닥을 펴서 목을 그어 보이며 말했다. “올라올 수 없다. 죄가 사형이다.”

 

대(臺) 아래 공청이 있었는데 문이며 담이 몹시 깊고 높다. 흠천감의 관리(分司)인 듯하다.

나는 말에서 내려 문지기를 보고 읍하며 들어가기를 청하였더니

“사(司)는 금지구역이라 들어올 수 없지만, 다만 지금은 이른 아침이라 상관이 오지 않았으니

잠시 들어오되 오래는 있을 수 없다”하였다.

나는 고맙다고 인사하고 들어갔다.

청사 서쪽으로 2-3자 높이 평대가 있었는데 사방이 각각 수십보쯤 되어 보였다.

 

동쪽으로 혼천의(渾天儀)와 혼상(渾象, 하늘의 별들을 보이는 위치 그대로 둥근 구면에 표시한

천문기기)이 있고, 서쪽으로 간의(簡儀, 오늘날의 각도기와 비슷한 구조를 가진 천문관측기기)가

있었는데 모두 청동으로 만들었다.

하나의 크기가 대여섯 뼘쯤 되고 둘레로 돌난간을 세워 두었다.

간의의 제작은 매우 복잡해서 창졸간에 제대로 다 살펴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혼의(渾儀)만은 송나라 제도로서『서경집전(書經集傳)』에 실려있는 그대로였다.

명나라 정통연간(1436-1449)에 만든 것으로 비록 버려두고 쓰지는 않지만

쌍환(雙環), 수준(水準), 수직(垂直), 직거(直距) 등 여러 가지 방법만은 대조해볼 수 있었다.

북쪽에 구리궤(同櫃)가 있는데 기계 돌리는 물을 담아두는 것인 듯싶지만,

산실(散失)되어 잘 알 수가 없었다.

 

대(臺) 위에 있는 모든 기계들은 강희(1662-1722) 이후에 만든 것들로

육의(六儀)가 있었는데 천체의(天體儀), 적도의(赤道儀), 황도의(黃道儀), 지평경의(地平經儀),

기한의(紀限儀) 등이었다. 모두 서양법이 동으로 건너온 뒤에 생긴 것으로

곽수경(郭守敬, 1231-1316)의 구제(舊製)에 비해 훨씬 정밀하게 되어 있다.

최근 육의를 각각 쓰는 것만큼 간편하지 못하다고 한다.

문지기가 빨리 나가라고 성화대는 통에 정신없이 나와 버렸다.

- 홍대용『연기(燕記)』, 1765년 1월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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